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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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1. 개요
2. 점안 및 복장의식
2.1. 문화재청의 불상 이름 짓기
3. 역사
3.1. 불상 이전
3.2. 불상의 출현
3.3. 간다라 불상과 마투라 불상
3.4. 불상의 전파
4. 종류
5. 동아시아의 불상
5.1. 한국의 불상
5.2. 중국의 불상
5.3. 일본의 불상
6. 서구권에서의 불상
7. 대불
8. 여담



1. 개요[편집]


불상()은 붓다의 모습을 묘사한 조각을 말한다. 석가모니의 모습을 묘사한 것이 많지만, 아미타불 등 다른 부처를 묘사한 조각도 흔하다. 보살, 아라한 등 불교 관련으로 예배의 대상이 되는 존재들을 묘사한 조각도 넓은 의미로는 불상이라고 포괄해서 부른다. 불교 미술의 핵심.

본디 우리말에서 불상을 세는 단위는 좌(座)지만 현대 한국에서는 구(軀)라는 단위를 쓰는 경우가 더 많은데, 일본에서 불상을 쿠(軀)라는 단위로 세는 데 영향받은 듯하다. 구(軀)를 불상을 세는 단위로 사용하는 것은 한국 정서에 원칙적으로 맞지 않고[1] 우리말 국어사전에도 없다.

우리나라에서는 불상을 제작하는 사람을 불모(佛母)라고 부른다. 대중에게 잘 알려진 어휘는 아니지만 불교계에서는 잘 쓰인다.


2. 점안 및 복장의식[편집]


불상뿐만 아니라 불교에서 쓰이는 여러 가지 종교적 도구들은 사용하기 전에 점안(點眼), 혹은 개안(開眼)이라 하여 종교적 도구로서 생명력을 불어넣는 의례를 행한다. 점안의식을 해야 비로소 종교적 용도로 사용할 수 있다. 본디 점안(點眼)이란 불상에 을 그린다는 뜻이다. 처음 제작한 불상을 제 위치에 안치하여 흰 종이나 천으로 가리고 사람들과 승려들을 청하여 의례를 행한다. 진언과 반야심경 등을 외우며 의례를 진행하다가 승려가 붓을 들어 허공에 대고 불상에 눈을 그려넣는 시늉을 한 뒤 흰 천을 벗기고 마무리하여 끝낸다. 여기서는 간단하게 설명했으나 중간에 승려들이 바라춤을 추고 을 뿌리는 등 실제 절차는 상당히 복잡하기 때문에 이런 의례에 정통한 승려를 따로 청한다. 여력이 안 되는 곳에서는 약식으로 행하는 경우도 많은 듯하다. 불교계에서는 가정에 작은 불상을 모실 때에도 간략하게라도 점안의식을 한 뒤에 봉안하라고 권한다.

단어대로라면 불상이나 보살상 등에만 점안이라는 말을 사용할 수 있지만, 승려들이 입는 가사 등에도 점안한다고 표현한다.

불보살상일 경우 단순한 점안을 넘어 복장(腹藏)의식을 하기도 한다. 점안의식이 복잡하다고 하지만 복장의식과 감히 비할 바가 못된다. 복장의식을 할 때에는 불상을 안치할 곳에 결계를 쳐서 청정하게 하고, 후령통(喉鈴筒)이라는 금속제 통에 정해진 물품을 넣고, 황초복자(黃錞幅子)라는 보자기로 싼다. 그 외에 발원문과 불경, 신자들이 시주한 물품 등을 안에 넣고 다라니를 적은 종이와 판으로 불상에 뚫린 구멍을 막는다. 이러한 물품을 불상의 뱃속에 넣는다 하여 복장(腹藏)이라고 부른다. 후령통 안에 넣을 물품의 종류와 제작, 넣는 방법 등 전과정이 종교적 상징성으로 체계화되어 절차가 매우 복잡하다. 제대로 행하면 거의 10시간 정도 걸리는데, 의식에 참여하는 승려들은 말을 거의 하지 않고 묵묵히 자기 맡은 바를 행한다. 한국 불교계 전체를 통틀어도 복장의식을 제대로 하는 승려는 매우 드물고, 조계종에서도 복장의식을 표준화하고 불교계의 전통이자 문화예술로 승화할 계획이 있다. 복장한 뒤 점안의례를 뒤이어 하여 복장점안이라고 합쳐 부르는 경우도 있다.

한국 불교에서는 조상경(造像經)이라는 책에 의거하여 복장의식을 한다. 조상경에 기록된 양식은 대략 고려시대에 나타났는데, 세월이 흘러 의식을 집행하는 승려에 따라 조금씩 달라졌다. 조계종단이 복장의식을 표준화한다는 것이 이런 차이 때문이다. 통일신라시대 불상에도 복장유물이 발견된 사례로 보아 복장의식이 있었음을 알 수 있지만, 그 형식은 후령통을 만들어 넣는 조상경의 방법과 꽤 달랐던 듯하다. 2019년 4월에는 '불복장작법'이라는 명칭으로 무형문화재 제139호로 지정되었다. 한중일 불교계에서 현재까지 체계화된 불복장의식이 전해지는 곳이 한국뿐이라 그 중요성을 인정했다고 한다.

우리나라 불교 관련 문화재 중에는 복장의식 때 넣고 현대에 발견된 물품도 꽤 있는데 흔히 복장유물이라고 부른다. 도둑들이 복장유물을 탐내서 몰래 사찰에 들어가 오래된 불상을 파괴하고 유물을 훔쳐가기도 하였다.

티베트 불교에도 복장의식이 전하는데 형식이 한국불교와 매우 다르다. 티베트식에서는 불상을 뒤집어 (해당 불상과 관련된 진언을 새긴) 나무 막대를 집어넣어 마치 사람의 척추처럼 세우고 정해진 향료로 공간을 채운다. 불교적 도안을 새긴 종이와 화폐를 안에 넣고 구멍을 봉쇄하여 정해진 자리에 안치한다. 티베트식으로 복장의식을 하면 공간을 꽉꽉 채우기 때문에 한국식으로 복장한 경우보다 불상이 훨씬 무거워지는 듯...

아프가니스탄에 있었던 바미안 석불에서도 5-6세기 복장유물이 발견되었다고 하니 불상 안에 뭔가를 집어넣는 의례는 꽤 흔했을 수 있다. 그러나 점차 쇠퇴하여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주로 점안의식만 하고, 체계화된 복장의식이 지금까지 전해지는 곳은 우리나라와 티베트뿐이라고 한다. 2-3세기 간다라 불상에서는 복장이 아니라 불두(佛頭), 즉 불상의 머리에 사리를 안치했던 흔적이 있다.

2.1. 문화재청의 불상 이름 짓기[편집]


우리나라의 문화재청이 불상의 이름을 짓는 방식은 규칙을 알고 보면 매우 간단하다. 기본적인 규칙은 아래와 같다.
지역명[2] + 해당 불상이 있는 사찰명[3] + 불상을 만든 재료 + 부처의 이름 + 불상의 자세 + 상(像)

불상을 돌로 만들면 석조(石造), 나무로 만들면 목조(木造), 구리(동)로 만든 다음 금칠을 하면 금동(金銅), 철로 만들면 철조(鐵造), 흙을 빚어 만들면 소조(塑造)라고 한다. 소조로 만든 다음 종이나 삼베를 여러 겹 입힌 후 을 칠하고 말렸다면 건칠(乾漆)[4]이라고 한다.

불상이 일어선 모습이라면 입상(立像), 땅에 옆구리를 대고 누운 모습이라면 와상(臥像)[5], 앉아 있다면 좌상(坐像)[6], 좌상인데 대좌(臺座)에 앉아 한쪽 다리를 내리고 다른 다리는 내린 다리 위에 올린 상태면 반가상(半跏像), 반가상 상태에서 한쪽 팔로 턱을 괴고 생각하는 듯한 모습이라면 반가사유상, 두 다리를 모두 내린 채라면 의좌상(倚坐像)이라고 한다. 한국의 불상들은 크게 입상과 좌상으로 나눌 수 있고, 좌상에서 어떤 형태로 앉아 있느냐에 따라 하위 카테고리가 생긴다.[7]

예를 들어보자. 영주 흑석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국보 제282호)이란 명칭은 경북 영주시 흑석사에 있는, 나무로 만든, 아미타불이 앉은 자세로 있는 상이라는 뜻이다.

이외에 삼존상(三尊像)이라고 하면 존귀한 분(부처나 보살) 셋을 조각한 상이란 뜻이다. 마애(磨崖)라는 단어가 들어가는 경우도 있는데, 큰 바위나 절벽에 새겼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마애불은 큰 바위에 (마치 화가가 스케치하듯) 선으로 부처의 형상만 새기거나, 또는 부조(浮彫) 형식으로 돋을새김한 것이다. 우리나라의 가장 대표적인 마애불상으로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국보 제84호)이 있다. 더러는 몸통은 절벽에 선만 새기고, 머리는 바위를 얹어 조각하기도 하는데, 이러한 마애불 형식은 파주 용미리 마애이불입상(보물 제93호) 항목 참조.

소조니 건칠이니 마애니 하는 한자어가 언중들에게 낯설 뿐이지, 각 단어를 규칙적으로 조합해 작명하기 때문에 알고 보면 매우 직관적이다.

3. 역사[편집]



3.1. 불상 이전[편집]


본래 석가모니가 살았던 시대의 인도에서는 제사를 지내기는 했으나 신상을 만드는 관습은 없었다. 브라만교는 물론 육사외도에도 이러한 관습이 없었다. 불상을 만드는 것은 원시 불교의 교리와도 그리 맞지 않았으므로 초기 불교에는 불상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물론 불교에도 종교적인 상징은 있었다. 석가모니의 유골을 모신 사리, 수레바퀴의 형상으로 불법(佛法)이 퍼짐을 나타내는 법륜, 발자국의 모습을 조각한 불족석(佛足石),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었다는 보리수 등이 상징이 되었다. 초기 인도의 불교 미술에서도 석가모니의 생애를 다룬 조각을 만들었지만, 석가모니의 모습을 감히 직접 묘사하지는 못하고 발자국, 보리수, 대좌 등으로 그 존재를 암시하는 수법을 썼다.


3.2. 불상의 출현[편집]


초기 불교의 금기를 깨고 불상이 등장한 때는 대략 대승 불교가 출현한 1세기 무렵이다. 쿠샨 왕조 시기 간다라(Gandhara) 지역(지금의 아프가니스탄 동북부, 파키스탄 북서부 지역)과 북인도의 마투라 지역(현재의 파키스탄)에서 불상이 나타났다.

불경의 전승에 따르면, 석가모니가 불교에 적대하는 외도들을 굴복시키고자 사위성에서 쌍신변(雙神變) 기적을 일으킨 뒤 그대로 수미산 정상 도리천에 올라갔다. 어머니 마야부인이 자신을 낳고 이레 만에 죽은 뒤 도솔천에 거하는 동자로 환생했는데, 도리천에서 어머니의 환생을 위해 설법하기 위함이었다.[8] 석가모니가 석 달간 도리천에서 설법하는 동안, 지상에서는 석가모니를 뵙고 가르침을 들을 수 없어 난리가 났다. 이때 우전왕(優塡王 Udayana)이 나라의 뛰어난 목수를 불러 전단향 나무로 처음으로 불상을 조각하도록 했다. 이 소식을 듣고 바사닉왕(波斯匿王 Prasenajit)은 자색이 감도는 황금으로 불상을 조성했다.

이런 전승대로라면 이미 석가모니 생전부터 불상이 나타났다. 하지만 학자들은 위 전승들은 불교계에 불상이 대중화된 뒤 이를 정당화하고자 추가한 이야기라고 여긴다.


3.3. 간다라 불상과 마투라 불상[편집]


간다라 지역은 알렉산드로스 3세의 원정군이 페르시아를 정복하고 인도 북부까지 공격하고, 그가 남기고 간 주둔군을 기반으로 그리스-박트리아 왕국인도-그리스 왕국들이 세워지면서 이 지역에 그리스 미술이 전파되었다. 인도문화를 기반으로 헬레니즘/페르시아 문화가 결합되면서 간다라 문화에서는 불상이 나타나게 된다. 박트리아 계 그리스 인들은 불교를 어느 정도 받아들인 것으로 보이며, 이 과정에서 신상을 인간의 형태로 묘사하는 그리스 문화의 특성과 불교가 결합되어 불교에서 금기시하던 불상 제작이 서서히 등장하기 시작한다.

간다라의 불상은 그리스 신들의 조각에 영향을 받았으며, 또한 페르시아의 영향을 받아 후광을 묘사하는 광배가 나타난다. 간다라 시대에 이미 석가모니 이외에도, 미륵불, 아미타불, 관음보살 등의 작례가 나타나고 있다. 육체의 사실성을 추구하던 그리스 미술의 영향으로 석가모니가 금식을 하며 보리수 밑에서 수행하다가 득도하는 불상을 보면 정말 아사 직전의 사람처럼(...) 도드라진 갈비뼈와 푹 꺼진 안구, 텁수룩한 수염, 나무 뿌리 같이 갈라져 있는 혈관 같은 것들이 눈에 띈다. 또한 간다라 지역에서 산출되는 검푸르고 단단한 편마암 재질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대체로 무겁고 근엄한 분위기를 풍기며 눈을 가늘게 뜨고 있는 것들이 많다. 더불어 이때 불상이 입고 있는 법의는 두껍고 옷주름이 세세히 묘사되어 있으며 통견 형식으로 두 어깨를 가린 것이 특징이다.

간다라 양식 이외에도 인도 북부에서 탄생한 마투라 양식이 있는데 아무래도 석가모니 사후 아직 불상 조성을 금기시하는 지역 전통이 잔재해 있었기 때문에 누가 봐도 불상을 만들어놓고 보살상이라고 이름지어 놓았다, 그래서 마투라 지역에서 출토된 불상들을 보면 보살상이라고 이름 붙인 것들이 많다. 또한 인도 고유 미술의 영향을 받아서 양감이 풍부하며 상당히 관능적이다. 검푸른 편마암을 쓴 간다라 불상과는 달리 인도 지역에서 산출되는 적색 사암으로 제작되었기 때문에 전반적으로 온화하고 밝은 이미지를 준다. 그리고 간다라와는 달리 눈을 희번득크게 뜨고 웃고 있는(...) 불두들이 많은 것이 특징이다. 또한 불상이 입고 있는 법의도 쉬폰처럼 나풀나풀한 인도 고유 복식이며 한 쪽 어깨를 드러낸 우견편단 형식이 보이는 것도 특징이다.

학계에서는 간다라와 마투라 중 어디서 먼저 불상이 발현되었느냐를 두고 의견이 나뉘어지는데 그 이유가 간다라와 마투라 불상을 연대측정을 해봤더니 거의 시간차를 두지 않고 동시대에 출현했다는 연구결과가 나왔기 때문이다. 물론 간다라에서 불상이 발현되어 인도 본토로 넘어왔다는 주장이 다수다.


3.4. 불상의 전파[편집]


이런 불상이 널리 전파된 것은 중국의 위진남북조 시대 때부터다. 이미 중국에서는 후한 시대 때 불교가 전파되었는데 이 당시만 해도 한 시대에 융성했던 유학의 영향으로 불교 사상은 허무맹랑한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대형 불상이 조성되지 못했다. 그러나 위진남북조 시대와 오호십육국 시대를 겪으며 중국 대륙이 쑥대밭이 되면서 민중 사이에서 불교가 크게 전파되었고, 불교 이론을 지지하는 호(湖)족 군주의 영향으로 인해 석굴사원이 조성되면서 대불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원래 불상은 대부분 마른 몸이었다.[9] 한반도에는 삼국시대 때 불교가 수입될 때 중국의 영향을 받아 호리호리한 불상이 주로 조성되었는데 특히 중생 구제를 대표하는 미륵신앙이 융성했을 때 마른 불상이 많이 출현했다. 대표적으로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이 있다. 시대가 변해가면서 부한 불상을 선망하는 경향이 커지면서 마른 불상들이 많이 사라진 덕분에 지금은 대부분 부한 불상만이 남았다.

후대에 여러 가지 요소가 추가되기는 했으나 기본적으로 금동이나 비싼 재질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아무나 제작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고, 금전적인 여유가 되는 귀족층이 자신의 돈을 투자하여 사찰에 발원하기도 했다.

미술사학계에서는 불상의 표현으로 시대적인 분위기를 파악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불상의 육체가 지나치게 관능적이거나 세속적으로 표현되어서 종교적 경건함과 동떨어져 있을 경우는 그 문화권이 종말을 고하고 있었다고 추측하기도 한다. 깊은 신심과 종교적인 열망이 합쳐져 탄생한 불상에도 인간의 욕망을 제어하지 못하고 그대로 표현한다는 것은 이미 도덕이나 종교가 제 기능을 못 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4. 종류[편집]




5. 동아시아의 불상[편집]



5.1. 한국의 불상[편집]


일반적으로 한국에서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불상은 항마촉지인을 한 석가불이다. 삼국시대에는 호국불교의 성격을 띄었기 때문에 불상들이 대체로 군주 같은 근엄한 얼굴을 했다. 석굴암 본존불이 그 예. 이후 통일신라 시대에는 점차 불상이 뚱뚱해진다.

신라 때까지는 서라벌 중심으로 중앙집권적인 귀족적인 불상이 많았지만, 지방 호족이 강성하고 불교가 민간의 생활로 파고든 고려시대에는 산에 가서 큰 돌을 깎아다가 대강 깎아놓은(...) 덩어리 같은 불상들이 출현하기도 했다. 그래서 고려시대 불상은 영험하고 권위 있는 부처라기보다는 민간에서 모시는 신령처럼 생겼다.

이렇게 된 이유는 자본과 기술력, 인력의 부족 때문이다. 후삼국 시대와 고려 시대 지방에서 조영한 불상들은 호족과 지방민들이 중심이 되어 세운 것들인데, 아무래도 호족들은 신라 왕실 만큼 재원을 조달해줄 수가 없고 이들로부터 의뢰를 받은 기술자들도 신라 왕실 소속 기술자들 만큼의 기술력을 갖추지 못하거나, 그만한 기술력이 있어도 재원과 인력이 부족하다보니 아무래도 불상이 투박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마냥 이 시대의 불상을 윗 문단에서처럼 대강 깎아놓은 덩어리로 표현하긴 그런데, 미술사적 측면에서는 신라 왕실에서 조영한 불상과 비교하면 투박하기 이를 데 없지만, 기존의 형식을 깨고 개성과 지역색을 추구했다고 평가할 수 있으며 정치사적 측면에서는 지방에서 불상을 조영할 정도로 불교가 보편화되고 지방 세력들이 힘을 축적했다고 분석할 수 있어 후삼국과 고려 시대의 불상도 나름의 의미를 갖는다.

조선시대에는 숭유억불 정책으로 인해 불상이 조성되는 일은 줄어들거나 규모가 작아지고 재질도 달라졌다. 고려시대까지만 해도 석불, 금동불, 불이 많았지만, 조선시대에는 목불(나무로 만든 불상)이나 소조불(흙으로 만든 불상)이 늘어났다. 조선시대에 만든 불상들은 대체로 책상에 앉아 공부하는 선비들처럼 상체를 구부정하게 묘사하는 것이 특징이다.

한국사 전체적으로는 석불이 많지만, 우리나라에 흔한 화강암은 엄청나게 단단하기 때문에 석굴사원이나 대형 석불은 별로 없다. 우리나라의 석굴사원은 석굴암, 경주 골굴암 마애여래좌상, 군위 아미타여래삼존 석굴 정도가 있는데 군위의 것은 당시 중국에서 유행하던 석굴사원을 따라해보려다가 실패해서 마애불로 남은 케이스다. 한편, 단일 개체로 규모가 가장 큰 것은 논산 관촉사미륵보살입상.

한중일 3국 중 가장 먼저 로 불상을 만드는 기술을 확보했다는 특징이 있다. 철은 구리보다 가공하기 힘들고, 당시에는 여러 개의 도가니에 녹인 쇠를 동시다발적으로 부어서 주조했기 때문에 조금만 머뭇거리면 불상이 깨지기 쉽고 크기가 큰 철불은 주조상 생길 수밖에 없는 외형틀의 이음매를 없애기가 어려워 상의 이곳저곳에 보기 흉한 주조흔이 남는다. 그래서 철불은 중국에서는 12세기 송나라 때부터, 일본에서도 13세기 가마쿠라 막부 시대부터 유행하기 시작했지만 한국에서는 수백 년이나 제작 시기가 앞선 8세기 중엽 보원사지 출토 철제여래좌상이 있고, 9세기 철불도 청양 장곡사 철조약사여래좌상 및 석조대좌, 철원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 등 다수 남아있기 때문.

북한에서는 불상을 발사했다 카더라[10]


5.2. 중국의 불상[편집]


중국에서는 외래 종교에 관대한 이민족 왕조의 영향으로 불상이 많이 조성되었고, 대륙의 기상에 힘입어 불상의 규모가 대체로 크고 아름답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문화대혁명 시기에 구시대의 잔재라고 하여 유명 사찰을 제외하고 홍위병이 불상을 위시한 상당수의 불교 문화재를 불태우고 파괴했다. 그럼에도 아직까지도 많은 수의 불상이 남아있다.


5.3. 일본의 불상[편집]


일본의 불상은 밀교의 영향으로 불상에서 신비주의적인 느낌이 물씬 풍긴다. 천수관음 같이 아스트랄하게 생기거나 일본 민화에서 나오는 것처럼 전체적인 선이 날카로운 불상도 있어서 보는 이에 따라서는 한국, 중국의 불상과는 달리 무서워보일 수도 있다. 또한 나무가 많은 지역 특색으로 인해 목조불상이 많이 조성되었다. 이외에도 비불이라 해서, 한국과 중국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불상도 있다.

6. 서구권에서의 불상[편집]


영어권 문화에서는 왠지 달마나 중국에서 묘사되는 모습이 널리 알려졌는지 인자한 표정을 지닌 살찐 대머리 정도로 인지되는 경향이 있다. 껄껄 웃는 버전으로 Happy Budai 혹은 Laughing Buddha, 또는 Fat Buddha 등으로 불리고, 달마상이라고 잘못 알려지기도 했다. 상품화가 많이 된 이 상이 묘사하는 인물은 사실 포대화상(布袋和尙)이라는 10세기 중국의 도승으로, 중국 후량의 승려였다. 조각에서 묘사하는 것처럼 얼굴이 크고 둥글고 배가 두둑한 모습이었다고 한다. 항상 큰 포대자루를 매고 길거리를 돌아다니며 사람들에게 점을 쳐주거나 인생/시국상담을 해 주었는데, 사람들이 그를 미륵불의 화신으로 추대하면서 그의 모습을 본딴 불화나 불상을 많이 만들면서 유명해졌다. 다시 말하면 부처의 원 모습하고는 거리가 멀다. '포대'라는 명칭의 영문표기는 중국어에서 유래한 Budai 혹은 Pu-tai, 또는 일본어식 발음에서 유래한 Hotei도 쓰인다.


7. 대불[편집]


절벽 그 자체를 조각해서 만드는 거대한 마애불이 이미 간다라 시대부터 존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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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 가장 큰 조각상들은 대부분 불상이다. 가장 큰 조각상인 통일의 조각상을 제외한 톱텐 조각상들이 모두 불상 아니면 관음상이다. 자유의 여신상이나 어머니 조국상을 모두 능가한다. 현존하는 가장 큰 불상은 중국 허난성의 노산대불(128m, 기단 포함 150m)이 며, 석가부처 상으로 한정하면 미얀마에 있는 레쭌 셋짜(Laykyun Sekkyar)이다. 높이 116m로 기단 포함 130m.

1989년 당시 가장 큰 조각상이었던 어머니 조국상을 능가했던 녀석도 일본의 불상(홋카이도 대관음)이었으며, 이후로 센다이 대관음, 우시쿠 대불, 노산대불이 차례로 가장 높은 조각상을 차지하다가 인도의 통일의 조각상이 2018년 가장 높은 조각상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여러 민족이 거쳐가서 불교 문화의 흔적이 남아 있던 아프가니스탄에도 거대한 석불이 조성되었는데 그중 바미안 석불탈레반에 의해 2001년에 완파당했다. 이로 인해 탈레반은 국제 사회에서 가루가 되도록 까였으나 정작 이딴 돌덩이 부순 것 갖고 왜들 난리임?이라는 반응을 보여 더 욕을 먹었다. 자세한 것은 문서 참고.


8. 여담[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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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국에서 구(軀)라는 단위는 시체를 셀 때 사용하는 구(具)와 음이 같다.[2] 생략할 때도 많다.[3] 해당 불상이 특정 사찰의 경내에 없다면 이것도 생략한다.[4] 한자 자체로는 '옻을 말렸다.'는 뜻이다. 그래서 한약재로 쓰이는 말린 옻도 '건칠'이라고 부른다.[5] 와불이라고도 하는데 동남아권 불교국가에서는 매우 흔하게 볼 수 있지만 전통적으로 한국 불교에는 사실상 없는 형태이다. 화순 운주사에 문화재에 지정된 유일한 와불이 있지만, 이 불상은 실제 형태는 좌상과 입상이다. 지표에 있는 암반에 부처를 좌상과 입상 형태로 새긴 뒤 일으키려다가 실패한 것이라, 처음부터 부처가 누운 모습으로 제작하는 와상과는 다르다. 이외에는 원각사지 십층석탑의 4층 탑신에 와상이 조각되었다. 다만 현대 한국에서도 현대식 사찰 위주로 종종 와상이 조성된다.[6] 여기서도 또 나뉘는데 오른쪽 발이 왼쪽 다리 위에 올라가 있으면 길상좌(吉祥坐), 반대라면 항마좌(降魔坐)라고 한다. 대부분 불상은 길상좌이다.[7] 상술한 것 외에 윤왕좌(輪王坐), 교각좌(交脚坐), 유희좌(遊戱坐) 등이 있다.[8] 석가모니는 지상에서 도리천으로 올라가고 동자는 도솔천에서 도리천으로 내려왔다.[9] 니까야에 묘사된 붓다의 생전 모습도 대체로 마른 모습이었음이 시사된다. 이때 불교 수행자들은 걸식으로 살아갔으며 그마저도 현대만큼 풍족하게 음식을 구하기 힘들었기 때문에 대부분 마른 몸매였다.[10] 미국에서 미사일로 확실히 못 박았음에도 국방부에서 ‘불상 발사체’ 표현을 고집하자 한국 네티즌들이 진짜 불상을 발사하는 짤방들을 올려 조롱하였다. 그 와중에 리우데자네에루의 거대 예수상을 발사하는 ‘예수상 발사체’ 드립까지 등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