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질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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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 제국
Império do Brasil
파일:브라질 제국 국기.svg
파일:브라질 제국 대형 국장.png
국기[1]
국장
Independência ou Morte!
독립이 아니면 죽음을![2]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300px-Brazilian_Empire_1828_%28orthographic_projection%29.svg.png

브라질 제국의 영토
1822년 1월 9일 ~ 1889년 11월 15일
성립 이전
멸망 이후
포르투갈-브라질-알가르브 연합왕국
브라질 제1공화국
우루과이
수도
리우데자네이루
정치 체제
입헌군주제
국가 원수
황제
종교
로마 가톨릭
언어
포르투갈어
통화
헤알
인구
1,433만 명 (1890년)
주요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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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2년 독립&건국, 제국선포, 페드루 1세 즉위
1825년~1828년
브라질-아르헨티나 전쟁
1831년
페드루 1세 퇴위 → 페드루 2세 즉위
1864년~1870년
삼국동맹전쟁
1888년 노예제 폐지
1889년 페드루 2세 강제 퇴위 → 제국 해체
1891년 페드루 2세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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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브라질 제국 국가

1. 개요
2. 역대 국기
3. 역사
4. 후일담
5. 각종 매체에서
6. 역대 군주



1. 개요[편집]


1822년 포르투갈 왕국으로부터 독립하여 오늘날의 브라질에 세워진 제국이다. 1889년에 브라질이 공화국으로 전환되면서 멸망하였다.

2. 역대 국기[편집]


파일:브라질 제국 국기(1822).svg
1822년 9월 18일부터 1822년 12월 1일까지 쓴 국기. 이때는 왕국으로 승인받았기 때문에 왕실 왕관(coroa real)이 그려졌다.

파일:브라질 제국 국기(1822-1853).svg
1822년 12월 1일부터 1853년 8월 29일까지 쓴 국기. 왕실 왕관이 황실 왕관(coroa imperial)으로 바뀌었다.

파일:브라질 제국 국기.svg
1853년 8월 29일부터 제국이 멸망한 1889년 11월 15일까지 쓴 국기. 파라나 주가 승격되어 별이 19개에서 20개로 바뀌었다.

초록, 노랑, 파랑은 포르투갈의 브라간사 왕조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조를 상징하는 색이었다. 문장 아래에 리본으로 묶인 식물은 커피 줄기와 담배 줄기라고 한다.

현재의 브라질 국기도 초록 바탕과 노란 마름모와 파란 문장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3. 역사[편집]


나폴레옹포르투갈 본토를 점령하자 포르투갈의 브라간사 왕가대서양을 건너서 가장 거대하고 부유한 식민지인 브라질로 망명하게 되었다. 이때 식민지였던 브라질은 거의 본토에 준하는 가치를 가진 영토로 격상되면서 포르투갈의 중심지로 성장한다. 특히 브라질의 리우데자네이루는 한때 포르투갈의 수도로 선포되기도 했는데, 이는 유럽 국가들의 식민지 도시가 수도로 선포된 유일한 사례다.

나폴레옹워털루 전투의 패배로 세인트헬레나로 귀양을 가자 브라간사 왕가는 1821년 다시 포르투갈로 귀환하나, 이미 브라질은 포르투갈의 단순한 식민지로 남아있을 의사가 없을 정도로 성장했고 그에 따라 막강한 발언권을 가지게 되었으며 자치권도 확대되었다. 결국 브라질은 포르투갈의 단순한 식민지에서 포르투갈-브라질-알가르브 연합왕국을 선포할 정도로 성장했으며, 리스본의 본국 정부는 브라질 자치 정부에 대해 간섭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포르투갈 본국 정부가 위협을 느끼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결국 포르투갈 의회는 연합왕국을 해체하고 브라질을 단순한 식민지로 격하할 것을 결의하였다. 브라질인들은 격분했고 결국 포르투갈 국왕 주앙 6세의 아들인 페드루 1세가 브라질 부유층의 지지를 등에 업고 1822년 9월 7일 독립을 선포하고 10월 17일 제국을 선포했다. 1824년 3월 25일에 헌법이 제정되고, 1826년 5월에 의회가 열리면서 브라질 제국이 탄생했다.

처음에는 초대 황제 페드루 1세에 대한 지지가 매우 높았으나 갓 독립한 나라들이 대개 그렇듯이 국내 대립과 반목이 극심했다. 페드루 1세는 국가 분열을 진압하기 위해 전제주의적인 통치 방식을 택했고 이는 역효과를 낳아 반발은 더욱 심해졌다. 또한 포르투갈 식민지 당시 전쟁으로 병합했던 남부의 시스플라티나 주의 지도자들이 아르헨티나의 지원을 받아 돌아왔고 500일 전쟁 끝에 우루과이로 독립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에 황제는 아르헨티나에 선전포고했는데 징집령에 반대하여 폭동이 일어났고 아르헨티나 군대는 브라질의 함대를 전멸시켜 거의 브라질 해안을 능욕하는 한편 유럽 용병과 소수의 징집병으로 구성된 브라질 군대를 격파하고 브라질 본토까지 유린했다. 결국 1828년 우루과이의 독립을 승인하면서 페드루 1세의 인기는 무너지고 말았다. 황제를 반대하는 폭동까지 일어나자 질려버린 페드루 1세는 1831년 불과 5살짜리 아들 페드루 2세에게 제위를 물려주고 포르투갈로 도망치다시피 돌아갔다.

페드루 2세는 장장 58년간 재위하면서 많은 치적을 쌓았다. 1847년부터 총리 제도를 실시하였고, 흑인들과 원주민들로 구성된 노예들을 부리는 플랜테이션 농업으로 자본주의는 엄청나게 발전했다. 1864년 강성해진 파라과이가 호전적인 분위기를 자아내자 아르헨티나, 우루과이와 연합하여 박살내버렸고 파라과이의 독재자 프란시스코 솔라노 로페스는 궁지에 몰린 후에도 항전을 계속하다 전사했다. 브라질은 6년간의 전쟁 끝에 예전부터 탐하던 마투그로수 주를 크게 확대하여 도합 1만 4천 제곱킬로미터의 영토를 아르헨티나와 분할했고 이과수 폭포를 삼등분했다.

한편 브라질은 아메리카에서 노예제가 유지되는 마지막 나라였는데, 예전부터 노예제를 좋아하지 않았던 페드루 2세는 1888년 전격적으로 노예제 폐지에 서명했다. 허나 이 과격한 개혁은 농장주들과 자본가들의 큰 불만을 불러일으켰고, 이들 중 상당수를 공화주의자로 전향하게 만들었다. 또한 페드루 2세의 치세 기간 동안 나라가 안정되면서 식자층이 크게 늘었고 제정 자체를 구시대의 유물로 여기는 공화주의자들이 매우 늘었다. 결국 이들의 합세로 데오도루 다 폰세카의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 1889년 11월 15일 브라질 의회는 제정 폐지를 의결했고 페드루 2세와 그 가족들을 국외로 추방했다. 페드루 2세는 즉각 이를 수락하여 포르투갈로 떠나버렸다. 페드루 2세와 그 가족들은 유럽의 호텔을 전전하면서 어렵게 살았다. 1891년 페드루 2세는 당뇨병과 폐렴이 겹쳐 파리에서 숨지고 만다. 한편 브라질에서는 황제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졌고 1920년 황제의 시신을 도로 브라질로 모셔와 그의 이름을 딴 도시인 페트로폴리스에 안장했다.


4. 후일담[편집]


페드루 2세 폐위 후에도 노예제가 사라졌다는 점을 빼면 브라질의 상황이 딱히 극적으로 달라지지 않았다. 정치는 황제만 사라졌을 뿐, 실질적으로 과두제에 가까운 형태로 운영되었다. 또한 이 때문에 토지개혁이 진행되지 않았고[3], 브라질 남동부의 비옥한 토지는 주로 백인 이주민들에게 분배되었기 때문에 흑인들이나 빈민들은 여전히 고달픈 삶을 면치 못했고[4] 흑인들에게 대한 차별대우는 여전했다. 이러한 상황이 조금이나마 개선된 것은 제툴리우 바르가스 정권대 와서였다.

여하튼 브라질도 민주정-독재정을 거쳐 1980년대 군부독재가 종식되고 민주화 이후로도 군사정부가 남기고 간 엄청난 외채에다가 초인플레이션까지 겹쳐 정국이 혼란스러웠던 탓에 1990년대 초반에 뜬금없이 대대적인 제정 복고 운동이 벌어져서 실제로도 1993년 4월 국가 정체(政體)를 묻는 국민투표가 치러졌다(공화국/군주국, 내각제/대통령제). 이러한 왕정복고 시도는 브라질 대중들에게 화제거리가 되기는 했지만 실제로는 큰 호응을 얻지 못했으며 실제 투표에서도 이러한 상황이 잘 드러나서 유효표 중 복벽을 지지하는 결과는 13.4%의 득표를 건지는데 그쳤다. 상파울루, 리우데자네이루에서 비교적 높은 지지를 얻었으나 그래봤자 16% 좀 넘는 수준이다.

브라질 제국은 사라졌으나 브라질 황제의 계보는 남았고 페드루 2세보다 오래 산 유일한 자식인 딸 이자베우가 승계하게 된다. 이자베우의 사망 이후에는 그녀의 손자 페드루 엔히키 왕자[5]가 승계하였고, 브라간사 왕가는 오를레앙-브라간사 왕가로 이어진다.[6]

명목상 브라질 제위 계승 순위권자 7명의 초상(2019년)[7][8]

2022년 7월 가주 루이스가 서거하자 공화국 정부는 대통령령으로 7월 15일을 애도일로 선포했다.# 후계자는 동생 베르트랑 (1941~).


5. 각종 매체에서[편집]



6. 역대 군주[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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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853년부터 쓴 국기다. 국기 역사는 후술.[2] 실제로 이 표어를 딴 영화가 있다. 1972년 브라질 영화로 브라질 제국의 건국사를 다룬 영화이다.[3] 사실 이러한 소수계층의 토지 독식 문제는 현재진행형이다. 물론 토지 개혁 시도가 없었던것은 아니었지만 전체 농토에 비하면 턱 없이 적거나 아니면 실행되지 못했다.[4] 그렇다고 백인 이주민에 대한 대우가 좋았냐면 그것도 아니었던 것이, 기존의 브라질 농장주들이 백인 소작민들을 인간이하 취급하며 착취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이 때문에 쓴맛을 처절히 맛본 백인 이주민들은 본국으로 돌아가거나 더 살기 좋은 아르헨티나나 우루과이로 재이민하기 일쑤였고, 한때 독일과 이탈리아 정부에서 브라질 이민을 제한했을 정도였다.[5] 이자베우의 차남인 루이스의 아들[6] 그 외에도 자손들이 구 포르투갈 왕가 및 구 유고슬라비아 왕가, 오를레앙 왕가, 양시칠리아 왕가, 뷔르템베르크 왕가로 연결된다. 이자베우의 손녀인 마리아 프란시스카(장남 페드루의 딸)가 현재 포르투갈 브라간사 왕가의 수장인 두아르트 피우의 어머니이며, 마리아 프란시스카의 조카인 마리아 다 글로리아는 페타르 2세의 아들 알렉산다르와 결혼해 세 아들을 두고 이혼했다. 또한 마리아 프란시스카의 언니 이자베우는 오를레앙 왕가의 현 수장 장의 할아버지인 앙리 로베르 페르디낭과 결혼해 5남 6녀를 두었고, 그들 중 두 딸이 양시칠리아 왕가 및 뷔르템베르크 왕가와 통혼했다.[7] 바수라스(Vassouras)분파. 수장인 루이스(1938~2022)는 페드루 엔히키 왕자의 장남이다.[8] 현재 브라질 황가는 이자베우의 차남 루이스의 계통인 바수라스 계통과, 이자베우의 장남 페드루 지 아우칸다라의 계통인 페트로폴리스 계통으로 분열되어 있다. 본래 이자베우의 후계자였던 페드루 지 아우칸다라가 체코인 귀족과 결혼하며 귀천상혼 논란이 생기자 계승권을 포기하였는데, 1940년 페드루가 사망한 뒤 그 장남 페드루 가스탕이 구 브라질 제국 헌법에 황위 계승권자가 왕족과 결혼할 것을 규정한 조항이 없기에 귀천상혼에 따른 부친의 계승권 포기는 법적 근거가 없는 조치였으므로 무효라는 주장을 펼치며 자신이 황가의 수장임을 선언하고 나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