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비 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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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비 킹의 주요 수훈 및 헌액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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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5ARYZvK4L2afx8AcWcf6kF-1.jpg 로큰롤 명예의 전당 헌액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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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비비 킹
B.B KING

헌액 부문
공연자 (Performers)
멤버
(개인자격)
입성 연도
1987년
후보자격 연도
1986년
후보선정 연도
1986년, 1987년











비비 킹
B.B. King


파일:CFDLi4OW0AES2m_.jfif.jpg

본명
라일리 B. 킹
Riley B. King
출생
1925년 9월 16일
미시시피주 베어 크릭
사망
2015년 5월 14일 (향년 89세)
네바다주 라스베이거스
국적
[[미국|

미국
display: none; display: 미국"
행정구
]]

직업
싱어송라이터, 음악가
장르
일렉트릭 블루스, R&B, 로큰롤, 소울, 가스펠
악기
보컬, 기타, 피아노
활동
1942년 ~ 2014년
종교
개신교(오순절교회)[1]
링크
공식 사이트

1. 개요
2. 생애
3. 사용 기타
4. 대표곡



1. 개요[편집]



파일:the king of blues.jpg


비비 킹은 미국의 싱어송라이터이자 기타리스트다. 풍부한 가사 표현 능력과 기타 연주 실력으로 팬이 많다. "블루스 음악의 대부"로 알려졌으며, 롤링 스톤 선정 "역대 최고의 기타리스트 100인" 중 6위에 선정되었다. 블루스 팬들이 흔히 말하는 3킹중 한 사람이다.[2]

무려 195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 60년을 넘는 기간 동안 현역으로 활동했다.[3] 이 정도로 오랜 기간동안 현역으로 활동했던 뮤지션은 척 베리 정도밖에 없다. 덕분에 수많은 후배 블루스 뮤지션들에게 꾸준히, 그리고 엄청난 영향을 줘왔고, 수많은 후배 뮤지션들에게 거의 신과 같이 떠받들어지던 존재였다. 심지어 에릭 클랩튼도 비비 킹을 선배로서 깍듯이 예우하면서 거의 헌정 앨범급인 'Ride with the King'이라는 콜라보레이션 앨범도 발매할 정도였다.


2. 생애[편집]


1925년 9월 16일, 미시시피주 베어 크릭에서 소작농이던 앨버트 리 킹과 노라 엘라 풀리의 아들로 태어났다. 4살 때 부모님이 별거하기 시작했고, 이후 그는 미시시피주 킬미카엘에서 살았다.[4][A][B] 10살 때 어머니가 맹인인 채로 31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는 그에게 신앙심과 사람들이 선하다는 믿음을 심어줬다. 어머니 사후 그는 할머니 · 풀리안 가족과 살았고, 그는 엘혼 교회에서 설립한 엘혼 학교와 '처치 오브 갓 인 크리스트' 교파의 교회에 다녔다.[C] 교회의 가스펠 음악은 그의 노래에 최초로 영향을 주었다.[D]

1940년 할머니가 사망했고 그는 에드웨인 헨더슨에게 7.54달러의 빚을 졌다. 같은 해 가을, 아버지가 그를 데려가 미시시피주 렉싱턴에 살게 되었다. 그러나 좋지 않은 환경과 아버지에게 낮선 느낌을 받아 결국 16살에 자전거로 약 45마일을 달려 킬미카엘로 돌아왔다.[C] 이후 월급 15달러를 받으며 백인 농부 플레이크 코티지의 하우스 보이[5]로 일했다. 플레이크가 그를 위해 기타를 사줬는데, 대신 두 달에 걸쳐 월급을 절반만 받았다고 한다. 그는 하우스 보이로 일하면서 10학년을 마쳤다.[6]

그는 농장에서 일하며 점심 시간에 기타를 독학했다. 그는 1941년 11월, 라디오 방송국 KFFA에서 첫 방송된 'King Biscuit Time'을 듣고 방송에 나오는 음악가가 되기를 꿈꾸게 된다.[E] 이후 1943년에 자신이 고향으로 부르던 아이오와주 인디아놀라로 이주해서 존슨 배럿의 농장에서 트랙터 운전사로 일하며 살았다.[A][C] 그는 1944년 혹은 45년에 결혼하고 사촌인 버켓 데이비스 부부와 같이 살면서 목화 재배를 하며 살았다. 미 육군에 입대했으나 기초 훈련만 마치고 제대했고, 버켓 및 3명과 세인트 존스 가스펠 싱어스 (St. John's Gospel Singers) 를 결성했다.[C]

그는 1946년에 사촌인 부카 화이트를 찾기 위해 멤피스로 향했고 10개월을 그곳에서 그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그 뒤 트랙터 문제로 빚을 갚으려 인디아놀라로 돌아왔으나, 1948년 말에 다시 멤피스로 돌아와 머무르기 시작한다.[B][C] 1949년에 라디오 방송국 WDIA에서 DJ로 일하기 시작했고 파라스 극장에서 열린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그의 이름 중 B.B.는 'Blues Boy'를 축약한 것이다.[A]

그의 첫 녹음은 1949년이었다. 로스앤젤레스에서 곡을 녹음했으며 RPM 레코드가 이를 발매하였다.[F] 그러다 1951년에 Three O’Clock BluesR&B 차트 1위를 차지하고, 차트에서 15주를 머무는 히트곡이 되었다.[E] 이후 여러 히트곡을 내면서 큰 인기를 누린 그는 1년에 300회 이상의 공연을 수행하기도 했다.[D]

1952년엔 배우자와 자녀 없이 이혼했다. 이후 1958년에 재혼했다.[C] 그 뒤 1962년에 ABC 레코드와 계약하고 1965년에 라이브 앨범 'Live at the Regal'을 발매했다.[G] 이 앨범은 당시 가장 성공적인 블루스 앨범들 중 하나였다.[F] 특히 1969년에 커버한 'The Thrill Is Gone'은 큰 인기를 얻었고 그에게 첫 그래미 상을 안겨주었다.[B][D] 1960년대 말 록 기타리스트들은 그의 영향력을 인정했다.[D] 1966년에 재혼한 배우자와 이혼했다.[C]

1952년 이후부터 30년이 넘도록 매년 평균 300회 이상의 공연을 했으며[G], 여러 인물들과 협업하면서 수많은 음반과 히트곡을 내놓았다. 그 중 1971년 발매한 'Live in Cook County Jail'는 명반으로 평받는다.[D] 1985년엔 버클리 음악대학에서 명예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1996년엔 자서전인 내 주위의 블루스 (Blues All Around Me) 를 발간했다. 1999년엔 테너 루치아노 파바로티가 주최하는 파바로티와 친구들 콘서트에 출연해 파바로티와 듀엣 무대를 가지고 주케로와도 듀엣 무대를 가졌다.

이후 고령이 되어서도 불구하고 왕성하게 활동했다.[7] 다만 1990년대쯤부터는 과체중과 기력의 노쇠 때문에 라이브에서도 서서 연주하지 않고 거의 앉아서만 연주하기 시작했다. 또한 2014년 10월엔 공연 중 무대에서 넘어져 예정돼있던 여러 공연을 취소하기도 했다.[G]

그는 1980년대부터 제2형 당뇨병을 앓고 있었다.[F] 2015년 5월 14일, 라스베이거스의 자택에서 자던 중 당뇨병으로 인한 뇌졸중으로 숨졌다.[E][8] 그는 35세부터 어려운 형편의 흑인 아이들을 후원해왔다고 한다.


3. 사용 기타[편집]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42px-Gibson_Lucille_.jpg

깁슨의 ES-355를 기반으로 바리톤 스위치와 F홀이 없는 타입의 기타인 루실(Lucile)을 사용한다. 검정색에 더블바인딩, 금장 하드웨어와 에보니 지판까지 상당히 고급스러운 생김새가 특징. GibsonEpiphone에서 시그네쳐로 나와있으며, 상당히 고가의 기타이다.

'루실'이란 이름이 붙은 해는 1949년이다.[9] 아칸소주 트위스트의 한 클럽에서 공연하던 중 루실이란 여성에 관련해 몸싸움이 벌어져 불 붙은 등유가 든 통이 엎어지면서 화재가 났다. 모두가 대피에 성공했으나 30달러의 기타를 실수로 두고 왔음을 알게 된 그는 화재 현장으로 들어가 기타를 챙겨 겨우 탈출에 성공했다. 이후 그는 죽을 뻔한 원인이 여자 하나를 둔 몸싸움이었음을 알게 되었고 이를 기념하는 의미로 기타에 루실이란 이름을 지었다.[G][10]

한영애의 대표곡 중 하나인 '루씰'은 이 비비 킹의 기타 '루씰'에게 바치는 곡이다.


4. 대표곡[편집]



비비 킹의 대표곡인 The Thrill Is Gone. 좋아하는 사람이 많을 뿐더러 인기 덕에 유독 다른 유명 연주자들과 함께 한 버전이 많다. 에릭 클랩튼, 스티비 원더, 게리 무어, 트레이시 채프먼, 루치아노 파바로티 등.


위 'The Thrill is gone'은 시카고에서 열린 'Crossroads Guitar Festival 2010'에서 비비 킹과 같이 에릭 클랩튼, 로버트 크레이, 지미 본[11]이 같이 연주한 영상이다.


또 하나의 대표곡인 루실(Lucille). 위에서 설명한 자신의 애용 기타인 루실에 얽힌 스토리를 가사로 담담하게 풀어나간다.


1989년 일본 블루스 카니발에서 연주한 Blues boys tune(제목이 All over again이라고 잘못 표기되어 있다). 신의 연주실력을 보여준다. 중간에 나온 kamisama!(신님!) 의 탄성도 인상적.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01 19:59:11에 나무위키 비비 킹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본래 가족들을 따라 침례회 신자였으나 침례교회가 매우 보수적이어서 기타를 허용하지 않아 음악적으로 보다 진보적인 교회를 찾아다니다가 미시시피의 웨슬리안 오순절교단인 Church of God in Christ 소속 교회의 목사에게 코드를 배우고 즉시 개종했다고 한다. #[2] 비비 킹, 앨버트 킹, 프레디 킹. 사실 "3가지 XX" 식으로 따지기를 매우 좋아하는 일본 팬들이 만든 말이며, 유사품으로 세계 3대 시리즈등이 있다.[3] 거기다가 무명 시절에 활동하던 기록까지 합치면 1940년대로 내려간다.[4] Bob L. Eagle · Eric S. LeBlanc, "Blues: A Regional Experience" (ABC-CLIO · 2013.5.1.), 196쪽, #[A] A B C "B.B. King Birthplace", msbluestrail.org[B] A B C Bill Dahl, "B.B. King: Biography", 올뮤직[C] A B C D E F G "S30 EP2: B.B. KING: THE LIFE OF RILEY: Timeline", 「PBS」, 2016.2.2.[D] A B C D E "B.B. King: American musician", 브리태니커 대백과사전[5] 집안일을 대신해주는 일을 했다는 것이다.[6] "B.B. King", achievement.org, 2004.6.10.[E] A B C Tim Weiner, "B. B. King, Defining Bluesman for Generations, Dies at 89", 「뉴욕 타임즈」, 2015.5.15.[F] A B C Cassandra Waggoner, "B.B. KING/RILEY B. KING (1925 -2015)", blackpast.org, 2008.6.4.[G] A B C D Biography.com Editors, "B.B. King", biography.com, 2017.4.27.[7] 이미 90년대 시점에서 나이는 환갑을 한참 넘었었지만, 그러면서도 연간 200회 이상 라이브를 다니는 등 어지간한 젊은 친구들 못지 않은 노익장을 과시했다.[8] "BB King, the King of Blues, dies at 89", 「BBC」, 2015.5.15.[9] 루실의 원래 모델인 ES-355의 출시년도가 1958년인데 왜 1949년에 벌써 이름이 붙은 건가하면, 루실이란 원래 특정 모델을 지칭하는 단어가 아니라 그가 쓰던 기타를 모두 지칭하는 말이었다. 즉 비비 킹 본인에게 루실이란 기타를 대체하는 보통 명사와 비슷한 개념이었던 것. 이후 비비 킹이 유명해지자 그가 쓰는 해당 모델이 덩달아 유명해지면서 현재는 루실 하면 위의 기타를 지칭하는 고유 명사가 된 것이다.[10] Richard Havers, "B.B. King: Still The King Of The Blues", 「uDiscoverMusic」, 2022.9.16.[11] 스티비 레이 본의 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