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틀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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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레논
폴 매카트니
조지 해리슨
링고 스타

{{{#808080
[ 전 멤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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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udio Album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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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

1963

1964

1964

1965

파일:Rubber Soul Album.jpg


파일:91AL-aLarsL._SL1500_.jpg


파일:SgtPepper.jpg



파일:beatles_1968_transparent.png


1965

1966

1967

1967

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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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

1969
{{{#!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2px 4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 #000000; font-size: .8em"
Let It Be
1970

}}}
[ US Albums ]
[ Live Albums ]
[ Compilation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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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틀즈의 주요 저널·여론조사 선정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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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틀즈의 주요 수상 및 헌액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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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큰롤 명예의 전당 헌액자
파일:로큰롤 명예의 전당 로고.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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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비틀즈
THE BEATLES

헌액 부문
공연자 (Performers)
멤버
존 레논, 폴 매카트니, 조지 해리슨, 링고 스타
입성 연도
1988년
후보자격 연도
1988년
후보선정 연도
198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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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존 레넌
JOHN LENNON

헌액 부문
공연자 (Performers)
멤버
(개인자격)
입성 연도
1994년
후보자격 연도
1994년
후보선정 연도
199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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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폴 매카트니
PAUL MCCARTNEY

헌액 부문
공연자 (Performers)
멤버
(개인자격)
입성 연도
1999년
후보자격 연도
1993년
후보선정 연도
199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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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조지 해리슨
GEORGE HARRISON

헌액 부문
공연자 (Performers)
멤버
(개인자격)
입성 연도
2004년
후보자격 연도
1994년
후보선정 연도
200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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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링고 스타
RINGO STARR

헌액 부문
음악적 우수상 (Award for Musical Excellence)
멤버
(개인자격)
입성 연도
2015년




파일:songwriters-hall-of-fame-logo_770_441_90_s.jpg 작곡가 명예의 전당 헌액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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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존 레논
JOHN LENNON

멤버
(개인자격)
입성 연도
1987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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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폴 매카트니
PAUL MCCARTNEY

멤버
(개인자격)
입성 연도
1987년 #
















역대 아카데미 시상식
파일:oscar_logo.svg
음악상 수상작
제43회
(1970년)

비틀즈
(렛잇비)


역대 그래미 시상식
파일:external/www.brooklynvegan.com/grammy.jpg
올해의 노래
제8회
(1966년)


제9회
(1967년)


제10회
(1968년)

토니 베넷
“The Shadow of Your Smile”

비틀즈
“Michelle”
[1]

피프스 디멘션
“Up, Up and Away”
최고의 신인상
제6회
(1964년)


제7회
(1965년)


제8회
(1966년)

스윙글 싱어즈

비틀즈

톰 존스





비틀즈의 주요 등재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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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음반 산업 협회
파일:3C33F99B-797F-4AB9-B8FC-147421D8A6EF.png
Best-Selling musician In America
역대 미국에서 가장 많은 음반을 판 음악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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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자
수치
장소
출처
비틀즈
약 1억 8,300만
미국
#















비틀즈의 기네스북 등재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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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uiness World Records
파일:기네스 세계기록 로고.svg
Best-selling musician of all time.
역사상 가장 많은 음반을 판 음악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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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자
수치
날짜
출처
비틀즈
약 10억장
2001년 3월 19일
#


Guiness World Records
파일:기네스 세계기록 로고.svg
Most Recorded Song
역사상 가장 많이 녹음된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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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자
수치
날짜
출처
비틀즈, Yesterday
약 1,600회
1986년 1월 1일
#





비틀즈
The Beatles

파일:296108673827581ad7a1de3451cd75cd.jpg
[1]맨위 빨간 옷부터 시계방향으로 폴 매카트니, 조지 해리슨, 링고 스타, 존 레논

▼ 다른 사진 보기
파일:The-Beatles-Ringo-Starr-Paul-McCartney-George.jpg
{{{-2 Beatles for Sale이 발매될 쯤인 1964년 말에 촬영된 사진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폴 매카트니, 링고 스타, 존 레논, 조지 해리슨}}}
{{{-2 Rubber Soul이 발매될 쯤인 1965년에 촬영된 사진
왼쪽부터 조지 해리슨, 존 레논, 링고 스타, 폴 매카트니}}}
{{{-2 Revolver가 발매될 쯤인 1966년 월드 투어 중 찍은 사진
왼쪽부터 폴 매카트니, 존 레논, 링고 스타, 조지 해리슨}}}
파일:비틀즈.png
{{{-2 1967년, Magical Mystery Tour 촬영 도중
왼쪽부터 링고 스타, 조지 해리슨, 존 레논, 폴 매카트니}}}
파일:abbey_road_cover.jpg
{{{-2 1969년, Abbey Road 앨범 커버
왼쪽부터 조지 해리슨, 폴 매카트니, 링고 스타, 존 레논}}}

국적
[[영국|

영국
display: none; display: 영국"
행정구
]]

결성
1960년 8월 중순[2]
잉글랜드 랭커셔 리버풀[3]
데뷔
1962년 10월 5일
데뷔일로부터 22457일 | 61주년
싱글 Love Me Do / P.S. I Love You
데뷔 앨범
해체
1970년 4월 9일[4]
멤버
존 레논 (리드 보컬, 리듬 기타, 키보드, 1957 - 1970)
폴 매카트니 (리드 보컬, 베이스, 키보드, 1958 - 1970)
조지 해리슨 (리드 기타, 보컬, 1958 - 1970)
링고 스타 (드럼, 보컬, 1962 - 1970)
전 멤버
스튜어트 서트클리프 (베이스, 1957 - 1962)
피트 베스트 (드럼, 1960 - 1962)
장르
로큰롤[5], 클래식 록, , R&B, 블루스, 포크, 블루스 록, 팝 록, 포크 록, 사이키델릭 음악, 소프트 록, 아트 록, 아트 팝, 바로크 팝, 챔버 팝, 하드 록, 피아노 록, 드론 록, 어쿠스틱 록, 스탠다드 팝, 아방가르드 음악, 익스페리멘탈 록, 선샤인 팝, 오케스트라 팝, 일렉트로닉 뮤직, 컨트리 뮤직, 프로토 펑크, 프로토 슈게이징, 뮤직홀, 헤비 메탈[6]
레이블
파일:Apple_Corps_logo.png
[7]
파일:영국 국기.svg
파일:7FF17EF7-7612-4390-BF5C-B00EF61850AD.jpg[8]
파일:미국 국기.svg
파일:캐피톨 레코즈 로고.svg[9]
링크
파일:비틀즈 로고.svg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 파일:트위터 아이콘.svg | 파일:페이스북 아이콘.svg | 파일:유튜브 아이콘.svg

1. 개요
2. 상세
3. 멤버
5.1. 싱글
5.1.1. 빌보드 싱글 차트
5.1.2. 해체 후 멤버별 빌보드 성적(싱글)
5.2. 앨범
5.2.1. 빌보드 1위
5.2.2. 빌보드 2위
5.2.3. 빌보드 3위~10위
5.2.4. 빌보드 11위~20위
5.3. 문서가 분리된 비틀즈 노래들
8. 롤링 스톤스와의 라이벌리
9. 인기
9.1. 한국에서의 인지도
10. 음악적 성향
11. 저작권 논란
12. 기타
12.1. 비틀즈 관계자들
12.2. 대한민국에서의 비틀즈
12.3. 기타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파일:리버풀 비틀즈.jpg


음악의 3B[10]

레너드 번스타인이 개정해서 붙여준 비틀즈의 별명이다.

비틀즈는 1962년에 데뷔하여, 1970년에 해체된 영국의 4인조 , 록 밴드이다.

2. 상세[편집]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역사상 최고의 아티스트이자 전 세계 록 음악의 상징과도 같다. 대중문화를 상징하는 아이콘 중 하나이다.
비틀즈의 등장은 대중음악의 전과 후를 나눈다는 평론이 주될 정도[11] 대중음악을 바꿔놨으며, 대중음악의 인식을 바꾸면서# 대중음악이 만들어지는 방식을 바꿨다고 평가받는다.# 현재도 음악계에 큰 영향을 주고 있고, 음악계는 물론 사회, 문화계에서도 그 자체로 전환점[12]을 찍으면서 새로운 현대 사회로 변화를 이끌었다. 그들의 등장은 20세기 사회 문화사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로 평가된다.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고 평가받는 전설적인 그룹으로, 대중문화를 상징하는 아이콘 중 하나이다.

1957년 존 레논이 조직한 고교 밴드 쿼리멘에서 시작되었다. 이후 몇번의 밴드 멤버 교체를 겪다가, 폴 매카트니와 그의 친구 조지 해리슨이 가입하였으며, 1962년 최종적으로 링고 스타가 영입되면서 밴드가 완성되었다.

1960년대 초반에는 함부르크의 클럽을 전전하며 실력을 쌓았고, 매니저 브라이언 엡스타인EMI소속 프로듀서 조지 마틴을 만나면서 Love Me Do라는 첫 싱글을 발매할 수 있게 되었다. 첫 싱글의 성공을 통해 자신감을 얻은 비틀즈는 1963년 1집을 냈으며, 1집과 2집이 영국에서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1964년 미국 시장에 진출했고, 동시에 미국의 음반 시장을 점령하면서 브리티시 인베이전의 주역이 되었다. 이후 비틀즈는 1970년까지 13장의 정규 앨범을 발매하였다. 그러나 1968년경부터 멤버들 간의 음악적 갈등으로 밴드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고, 1970년 4월 폴 매카트니가 밴드를 탈퇴하면서 비틀즈는 공식적으로 8년 만에 해체한다.

해체한 지 50년이 넘어가는 밴드이고, 활동 기간도 겨우 7년 6개월 정도로 유명 록밴드들 중 굉장히 짧은 축이지만[13], 비틀즈는 록 음악뿐만 아니라 비틀즈 이후의 대중음악 대부분의 장르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사회 문화적인 부분에서도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또한,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많은 음반을 판매한 아티스트이다.[14] 데이터 분석 결과, 가장 영향력 있는 아티스트로 선정됐다. 로큰롤 명예의 전당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 그룹 포함, 모든 멤버가 개별적으로 등극했다. 이런 경우는 역사상 유일하다고 한다.

음악사적으로 보면 비틀즈를 기점으로 본격적인 현대 대중음악의 시대가 시작된다 할 수 있다.[15] 1960년대 초중반에도 로큰롤의 부활과 대중음악 시장의 대호황, 문화적 파란을 일으켰어도, 음악적으로는 척 베리엘비스 프레슬리를 위시로한 로큰롤에 큰 영향을 받은 로큰롤 아이돌 밴드였다. 그러다 현대 대중음악계 최초로,[16] 단순히 싱글곡 모음집이 아닌 앨범 자체에 예술성을 불어넣은 Rubber Soul을 만들어 "앨범시대"를 열면서 새로운 대중음악의 세계를 개척하기 시작한다.[17]

1966년 역사적인 Revolver 앨범 발매를 시작으로 하프시코드, 드론 사운드, 시타르, 리코더, 역재생 등 다양한 악기와 방법으로 소리를 사용하여 다채로운 사운드를 선보이며 "실험음악과의 장벽"을 허물었고, 기존의 연애만 노래하던 가사에서 인류애, 사회, 인생, 평화 등을 노래했는데 이러한 비틀즈의 시도들은 문학계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기존의 로큰롤, , 블루스같은 장르뿐만 아니라 사이키델릭 음악, 포크 록, 프로그레시브 록, 팝 록, 아방가르드, 헤비 메탈 등 실험적인 장르들까지 시도한다. 그리고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를 시작으로 모든 연령층에 록 음악으로 대표됐던 "대중음악의 인식"을 끌어올렸다. 브리티시 인베이전 이후의 현대 대중음악 역사에서 성별, 세대를 구분하지 않고 같은 장르의 음악을 대중적으로 즐기게 만든 것이다. 너바나와 같은 얼터너티브 록 밴드는 물론, 에이브릴 라빈같은 팝 펑크, 포스트 말론같은 힙합, 메탈리카같은 헤비 메탈에드 시런같은 아티스트도 비틀즈에게 지대한 영향을 받았으며, 일렉트로닉 뮤직[18]힙합[19], 펑크 록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받는다.

비틀즈에게 영향을 받았다고 직접 언급한 음악가만 해도 핑크 플로이드, 주다스 프리스트, 브루스 스프링스틴, 블랙 사바스, 카펜터즈, 데이비드 보위, 마이 블러디 밸런타인, 라몬즈, , 빌리 조엘, 라디오헤드, 오아시스, 너바나, 셀린 디옹, 그린 데이, 레이디 가가, 마룬 5, 앨리샤 키스, 존 레전드, 노라 존스, 저스틴 비버, 테일러 스위프트, 포스트 말론, 빌리 아일리시, 해리 스타일스[20] 등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21] 한국에서도 비틀즈의 영향을 받은 수많은 음악가들이 있는데, 키보이스, 조용필, 신중현, 펄씨스터즈, 들국화, 이적, 장기하, 잔나비, 혁오 등이 있다.

이러한 점과 후술할 이유들로 음악 저널/평단/평론가들 사이에서는 대중음악 역사상 최고의 아티스트로 평가받는다. 기타계에서 지미 헨드릭스가, 드럼계에서 존 본햄이 고정 1위로 꼽히는 것처럼, 록 밴드 및 장르 불문 올타임 아티스트에서는 비틀즈가 항상 1위로 꼽힌다.

비틀즈는 대중적으로도 어마어마한 성공을 거뒀다. 빌보드 싱글/앨범 최다 1위 기록에, 월간 이용자 4억 9천만명대의 스포티파이 서비스가 가장 늦게 시작된 편인데도 2015년 12월 24일 시작 후 3일간 가장 많이 스트리밍 됐으며, 바이럴 차트 50위안에 38개 곡을 올려놓는다. 현재 듣는 연령대도 64%~69% 이상이 34~35세 이하다.[22] 그리고 2023년 실시간 기준 가장 많이 스트리밍된 아티스트 순위에 43위권에 머물고 있다.[23][24] 아직까지도 엄청난 음반/음원이 팔리고 있으며[25] 대한민국의 대중들이 알고 있는 외국 음악가 중 마이클 잭슨과 함께 대중적 인지도가 제일 높다. 다른 비슷한 시대의 록밴드인 레드 제플린, 롤링 스톤스, 더 후 등부터 1960~90년대 록 음악/팝 음악이 성공하지 못한 대한민국에서 매니아층만 알고 인지도가 낮지만, 비틀즈는 당연히 예외이다.[26] 대한민국 광고 혹은 예능에서 나오는 곡들 중에서 이거 들어봤는데 하는 곡들 중에서 꽤 많은 곡들이 비틀즈의 곡임을 알 수 있다. 비틀즈 노래들의 저작권이 온갖 곳에 다 퍼져 있어[27] 저작권료가 골 때리는 점을 감안하면 더욱 대단하다.

음반 판매량으로 보아도 막대한 성공을 이루어냈다. 2000년대 이후 가장 많이 팔린 앨범도 비틀즈의 앨범인 "1"이다.[28] 정규 앨범도 아닌 컴필레이션 앨범으로만 2000년대에 가장 많은 앨범을 판 것이다. 1960년대에 그 인기는 엄청나서 1965년 미국에서 판매된 음반의 60%가 비틀즈의 음반이었으며, 비틀즈의 라이브 공연이 있는 날에는 청소년들이 모조리 비틀즈의 공연을 보러가 청소년 범죄가 단 한 건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믿기 힘든 일도 있다. 요즘 세대에도 인기가 매우 높은데 가장 인기 있는 록밴드 투표를 하면 대부분 1위로 꼽힌다.[29] 또한, 비틀즈는 역대 음반 판매량 1위라는 기록도 있는데, 약 6억 장 정도를 판 것으로 추정되며, 무려 10억 장을 팔았다는 자료도 있다.[30] 빌보드 200 차트 누적 기록으로도 1위/5위권/10위권 모두 최장기록을 가지고 있으며, 1970년 해체 후 나온 앨범으로도 1970년대, 1990년대, 2000년대에 앨범 차트 1위를 기록했다. UK 차트에서는 196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 모든 디케이드에 앨범 차트 1위를 기록했다.

비틀즈는 문화계에서도 독보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문화계에서는 1950년대 중후반부터 비틀즈가 나오던 1960년대 초중반까지를 현대적인 시기가 아니라 과도기로 인식하며, 비틀즈가 본격적으로 폭발적인 인기를 끌기 시작한 1963~1964년에 영화계에서 가장 인기 있던 배우가 고전 배우에 준하는 폴 뉴먼오드리 헵번이었다. 이 시기 비틀즈가 브리티시 인베이전을 일으켜 대중음악의 인식을 바꾸면서 문화를 납치했다는 평을 받는데, 이 시기부터 대중문화 전반이 급격하게 격변하고, 비틀즈 유행의 후반기에는 아메리칸 뉴웨이브 시네마가 시작되어 영화계도 현대적으로 넘어간다. 여기에는 비틀즈가 만든 자유로운 사회가 큰 영향을 미쳤다.[31] 비틀즈는 이전의 검열이 심하고 보수적이던 대중문화계를 몇 년 만에 자유롭게 변화시켰다는 점에서 상당한 평가를 받는다.

이렇듯 비틀즈는 거대한 사회 현상이었으며, 당시에 아주 만연했던 인종차별 완화에도 큰 기여를 했다.[32] 그리고 어느 나라에서간에 반체제의 상징으로 받들여져, 히피 운동에도 큰 영향을 줬다.[33] 이성보다 감성, 당시에 평화, 반전주의를 대표했었다. 1967년 사랑의 여름에서 All You Need Is Love가 히피의 상징곡으로 꼽히기도 했고, 히피들의 패션 역시 비틀즈 멤버들의 패션에서 유래했다. 히피 문화와 비틀즈에 집착하는 여성팬들로 생긴 그루피족 문화는 자유로운 성문화를 조성했으며, 성 개방화에 큰 역할을 했다. 이러한 문화들 말고도, 1960년대 반문화의 리더로 취급받으면서 많은 문화적 운동이 비틀즈의 지원을 받거나 영감을 얻었다. 이전 시대까지 철 없는 치기·일탈로 받아들이던 평화주의, 개인주의, 평등주의, 성해방, 세속주의 등의 사상들이 비틀즈로 인해 사회 문화의 주류 사상으로 인정받으며 여전히 인류의 중요한 이념으로 여겨진다.

패션 아이콘으로서, 당대부터 지금도 패션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그 어떤 뮤지션보다 스타일이나 의류를 가장 크게 보편화한 뮤지션으로 뽑혔으며, 개별 멤버로도 존 레논은 여전히 스타일 아이콘으로 언급되고, 그의 스타일 등은 재생산되며 소비된다. 비틀즈가 세계적으로 유행시킨 '모즈 룩(Mods Look)'은 현대 정장 스타일의 기준으로 볼 수 있고, 댄디 스타일의 시작으로 지금도 패션업계에서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스타일이다.# 그리고 터틀넥 니트도 영화계에서는 스티브 맥퀸이 있다면, 음악계에서는 비틀즈가 대중적으로 유행시킨 옷이다. 비틀즈 멤버들의 패션은 캐주얼 패션에 영향을 주면서 보편화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 그리고 비틀즈와 그들을 중심으로 커진 1960년대 반문화의 영향으로 10대-20대 중심의 패션 서브컬처가 주류 문화로서 발전한다. 그리고 반문화의 영향으로 미니 스커트의 발명과 대중화, 남녀 모두에게 청바지가 베이스가 된 스타일링이 대중화됐다. 또한, 이 시기의 반문화는 Rachel Carson의 침묵의 봄으로 수면 위에 오르게 된 환경운동의 근간이 되었다.

정치적으로도 유일무이한 현상을 이끈다. 냉전 시기, 소련 진영에 속하는 국가들의 철의 장막에 침투한 비틀즈코드(비틀즈의 음악·패션 등)는 이념 대립과는 별개의 문제로 공산권 국가를 뒤흔들어 놓았다. 서구권에서는 젊은이들의 반항으로 여겨져 신좌파 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는데, 공산권에서는 "서구권 자유주의 문화"의 위대한 사례로 알려져 공산권의 반서구적이고 폐쇄적인 체제를 무너트리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프라하의 봄 당시 시민들이 Hey Jude를 시위대의 상징곡으로 사용했고, 레논 벽민주화의 상징으로 유명하다. 소련의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어떤 이데올로기보다, 어떤 종교보다, 베트남전이나 어느 전쟁이나 핵폭탄보다 냉전 확산의 가장 중요한 단일 원인은 비틀즈였다"라는 말을 남기며,# "비틀즈로 소통하고, 개혁했다"#라는 말도 남긴다. "소련은 비틀즈 때문에 무너졌다"라는 말이 비틀즈의 인지도가 비교적 바닥인 대한민국에도 전해졌을 정도다.

즉 비틀즈는 음악적,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인 면에서 모두 역사에 기록된 업적을 세웠다. 타임에서는 비틀즈를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인물 100인" 중 한 명으로 선정했으며, 빌보드, 롤링 스톤 등 매체에서는 비틀즈를 The Greatest artists Of All Time 리스트에서 1위로 선정했다.[34] 앞으로도 큰 이변이 없는 한 비틀즈는 역사상 가장 중요한 밴드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한국에 알려진 유명한 노래로는 몇 개 꼽자면 Yesterday, Let It Be, Hey Jude, All You Need Is Love, Ob-La-Di, Ob-La-Da, Twist and Shout, I Want to Hold Your Hand 등이 있다. 물론 이 노래들 말고도 잘 알려진 곡들은 정말 셀 수 없을 정도다.[35]

3. 멤버[편집]


비틀즈의 구성 멤버

존 레논 John Lennon
생몰
1940년 10월 9일 - 1980년 12월 8일 (향년 40세)
출신지
파일:영국 국기.svg 영국 잉글랜드 랭커셔 리버풀
활동
1956년 - 1970년
포지션
리드 보컬, 리듬 기타, 키보드

폴 매카트니 Paul McCartney
출생
1942년 6월 18일 ~ (81세)
출신지
파일:영국 국기.svg 영국 잉글랜드 랭커셔 리버풀
활동
1957년 - 1970년
포지션
리드 보컬, 베이스[36],키보드

조지 해리슨 George Harrison
생몰
1943년 2월 25일 - 2001년 11월 29일 (향년 58세)
출신지
파일:영국 국기.svg 영국 잉글랜드 랭커셔 리버풀
활동
1958년 - 1970년
포지션
리드 기타, 보컬

링고 스타 Ringo Starr
출생
1940년 7월 7일 ~ (83세)
출신지
파일:영국 국기.svg 영국 잉글랜드 랭커셔 리버풀
활동
1962년 - 1970년
포지션
드럼, 보컬

구 멤버들

스튜어트 서트클리프, 피트 베스트
파일:비틀즈 로고 화이트.svg
[37]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밴드답게 밴드의 각 멤버 4인방 모두 대중음악사에서 큰 족적을 남긴 싱어송라이터들이다. 다른 위대한 밴드인 레드 제플린이 각 멤버가 대중음악사에 큰 영향을 미친 연주력으로 유명하다면, 비틀즈는 각 멤버가 대중음악사에 큰 영향을 미친 싱어송라이터들이라는 점에서 유명하다. 하다 못해 가장 묻힌다는 링고조차 'Octopus Garden'이라는 좋은 노래를 만드는 등 음악적으로는 훌륭했다. 그런데 나머지 3인방은 솔로 시절에도 어마어마한 성공을 거두었으며, 대중음악 역사상 최고의 명곡이라는 Imagine이나 My Sweet Lord, 역사상 최고의 히트곡으로 꼽히는 Say Say Say, Silly Love Songs, Ebony and Ivory, Coming Up, (Just Like) Starting Over, Got My Mind Set on You 모두 비틀즈의 멤버들이 솔로 활동으로 발표한 곡들이며, 이들은 전부 80년대까지 대중음악계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존 레논이 쿼리멘을 결성한 1957년에 폴 매카트니, 조지 해리슨, 링고 스타는 멤버가 아니었으나, 1958년 폴 매카트니가 쿼리멘에 가입하고, 이후 자신의 학교 친구였던 조지 해리슨을 존 레논에게 소개시켜주면서 조지가 합류했다. 중간에 존 레논의 미대 친구였던 스튜어트 서트클리프와 클럽 주인의 아들 피트 베스트가 급하게 합류하기도 했으나, 음악이 소질에 안 맞았던 스튜어트 서트클리프는 중간에 밴드를 탈퇴하고 얼마 안 가 급사했으며, 피트 베스트는 멤버들 간에 불화를 겪다가 밴드에서 쫓겨났다. 이때 피트 베스트를 대체하기 위해 들여온 드러머가 링고 스타이다.

  • 리드 보컬이자 리듬 기타인 존 레논은 대중음악 역사상 최고의 싱어송라이터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 전설적인 아티스트이며 비틀즈 시절 폴 매카트니와 함께 레논-매카트니 콤비를 이루며 비틀즈 음악의 정체성을 구축했다. 특히나 존 레논은 명실상부한 초기 비틀즈의 히트메이커 였으며 빌보드 1위를 달성한 비틀즈 초기의 열 곡 중 여덟 곡이 존 레논이 주도하여 작곡한 곡일 정도로 큰 영향력을 미쳤다. 데뷔 초에는 주로 로큰롤 위주의 곡을 만들었으나 1965년부터는 밥 딜런의 영향을 받아 포크 록 색체의 음악을 선보였으며 1966년 Revolver 이후부터는 사이키델릭 록을, 그리고 그 이후로는 블루스 록, 하드 록, 소프트 록, 프로그레시브 록 등 비틀즈 해체 전까지 다양한 음악을 선보였다. 존은 특히 작사적인 측면에서 매우 고평가를 받았는데 이는 자신의 경험에 기초해서 솔직하고 진솔한 가사를 곡에 써내려갔기 때문이다. 보컬 또한 롤링 스톤 선정 위대한 가장 위대한 가수 5위, 가장 위대한 록 가수 8위에 올라있을 정도로 훌륭했으며 비록 본인은 얇은 목소리 때문에 본인의 목소리를 싫어했지만 매력적이고 독특한 보컬로 평가받는다. 리듬 기타리스트로서도 존 레논은 롤링 스톤 선정 위대한 기타리스트 55위에 랭크되어 있으며 비록 화려한 기타 연주는 많이 보여주지 않아도 간단한 기타 연주로 곡을 잘 구성한, 리듬 기타리스트로서도 훌륭한 아티스트였다.

  • 리드 보컬이자 베이시스트인 폴 매카트니는 대중음악 역사상 최고의 싱어송라이터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 전설적인 아티스트이며 비틀즈 시절 존 레논과 함께 레논-매카트니 콤비를 이루며 비틀즈 음악의 정체성을 구축했다. 존이 진솔하고 솔직한 가사를 쓰며 작사가로서 특히 호평받았다면 폴은 누가 들어도 아름다운 멜로디를 순식간에 만들어내는 작곡가로서 호평받았다. 당장 대한민국 사람들에게도 유명한 YesterdayHey Jude, Let It Be같은 노래들도 폴의 작품이다. 물론 폴은 단순히 대중적이고 듣기 좋은 멜로디를 만드는 것뿐만 아니라 실험적인 음악도 많이 선보였다. 그 예시로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는 폴이 주도해서 만들었으며 최초의 메탈 음악 중 하나인 Helter Skelter를 작곡했다. 또한 Abbey Road의 B면에 여러 곡을 연결시켜 메들리로 만들어낸 것 또한 폴의 아이디어였다. 보컬 역시 출중했으며 존이 독특하고 매력 있는 보컬이었다면 폴은 가장 기술적이면서도 로큰롤부터 포크 록, 하드 록, 사이키델릭 록, 헤비메탈, 심지어 동요에 이르기까지 소화할 수 있는 장르의 범위가 매우 넓은 보컬로서 호평받았다. 베이시스트로서의 실력도 롤링 스톤 선정 베이시스트 8위에 선정되어 있는 등 출중했으며 Rain, Come Together, Hey Bulldog, Paperback Writer 등 여러 비틀즈의 노래에서 폴의 훌륭한 베이스 실력을 엿볼 수 있다.

  • 리드 기타이자 보컬인 조지 해리슨은 대중음악에서 손꼽히는 싱어송라이터 중 한 명이자 최고의 기타리스트 중 한 명이었다. 비틀즈의 리드 기타로서 쉽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어렵지도 않은 매력적인 기타 코드들을 여럿 만들었으며 데뷔 초에는 A Hard Day's Night, I Saw Her Standing There, Can't Buy Me Love 등 여러 노래에서 화려한 기타 솔로들을 보여주었다. 비록 비틀즈 중기 부터는 시타르에 너무 푹 빠진 나머지 기타 연주 실력이 상대적으로 떨어졌으나 비틀즈 후기에는 실력을 많이 회복해서 Something, The End에서는 데뷔 초처럼 화려한 기타 연주를 보여주기도 하였다. 송라이터로서는 데뷔 초에는 레논-매카트니의 벽에 막혀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했으나 Revolver에 3곡을 수록한 것을 시작으로 점점 발전해 나가더니 비틀즈가 마지막으로 제작한 앨범인 Abbey Road에서는 SomethingHere Comes the Sun이라는 명곡들을 만들어내며 자신 역시 레논-매카트니에 버금가는 훌륭한 송라이터라는 것을 증명해 보였다.

  • 드러머이자 보컬인 링고 스타는 밴드 내에서만 따졌을 땐 타 멤버 대비 비중이 적다고 조롱당하긴 해도 이견이 없는 록 음악 역사상 최고의 드러머 중 한 명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록 드럼의 기본을 정리한 시초 격 인물로 평가받으며 다른 멤버들이 작곡한 곡에 적절한 드러밍을 잘 배치시키며 곡을 더 다채롭고 완성도 있게 만들었다. 드러머로서 화려하지는 않지만 탄탄한 기본기를 갖춘 드러머로 평가받으며 She Loves You, Rain, She Said She Said를 들어보면 링고의 훌륭한 드럼 연주를 볼 수 있다. 비틀즈 시절에 송라이터로서는 크게 부각되지는 못했지만 비틀즈가 마지막으로 제작한 앨범인 Abbey RoadOctopus's Garden은 꽤나 호평받았다.

많은 4인조 밴드가 그렇듯이 리더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멤버들이 나름대로의 존재감과 상업성, 작품성을 갖추고 있으며, 현재까지도 각 분야에서 어마어마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특히 폴 매카트니는 비틀즈 해체 이후로 올린 빌보드 1위 곡만 해도 역대 12위일 정도로 높은 상업성과 작품성을 지닌 음악가였으며, 존 레논, 조지 해리슨, 링고 스타 역시 비틀즈 해체 이후에도 꾸준한 음악 활동으로 모두 자작곡을 빌보드 1위에 올렸다.

현재 멤버들 중 절반인 2명이 사망했다. 존 레논1980년에 정신병자 마크 채프먼에게 저격을 당해 과다출혈로 절명했으며, 조지 해리슨은 잦은 흡연으로 인한 후두암이 뇌종양으로 전이되어 2001년에 사망했다.

그래도 나머지 2명 폴 매카트니링고 스타는 살아 있으며, 80대에 접어든 고령에도 아직도 작품 활동을 계속하고 있으며, 당연하게도 전설 대우를 받는다. 살아 있는 두 멤버인 링고 스타폴 매카트니는 밴드 해체 50년이 다 되어가는 최근에도 자주 만나며, 가끔에는 같이 무대에 오르기도 한다.

4. 역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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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images4.alphacoders.com/247756.jpg

비틀즈의 전반기[38] 모습
비틀즈의 후반기[39] 모습[40]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The_Beatles_in_America.jpg


파일:external/a365bf2d673d33ee41494341de9ac5360099a1e7171dc47d8e165387677ea393.jpg

에드 설리반 쇼(Ed Sullivan Shows)에 출연하기 위해 그 이틀 전인 1964년 2월 7일 미국 존 F. 케네디 국제공항에 상륙한 비틀즈.
역사적인 브리티시 인베이전의 시작을 상징하는 사진이다.
1969년 8월 22일 비틀즈 멤버들이 모여 찍은 사진.
이것이 우리가 볼 수 있는 그들 모두가 모여 있는 마지막 모습이다.[41]




1964년 2월 9일 에드 설리반 쇼(Ed Sullivan Shows)에서의 첫 미국 라이브 공연 중[42]
1965년 8월 15일 셰어 스타디움에서의 라이브 공연 중[43]




1966년 6월 24일 독일 뮌헨에서의 라이브 공연 중[44]
1969년 1월 30일 애플 레코드 사 옥상에서 진행한 마지막 라이브 공연 중[45]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비틀즈/역사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5. 음반 목록[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비틀즈/음반 목록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5.1. 싱글[편집]



5.1.1. 빌보드 싱글 차트[편집]


순서는 최고 순위 달성일 순. 빌보드 핫 100 1위 기록이 총합 20곡으로 역대 최고 기록이다.#

The Beatles Billboard HOT 100 차트인 목록
년도
곡명
최고 순위
수록앨범
1964년
I Want To Hold Your Hand
7주연속 1위
Past Masters
Please Please Me
3위
Please Please Me
My Bonnie
26위
Tony Sheridan과 합작
She Loves You
2주연속 1위
1
I Saw Her Standing There
14위
Please Please Me
Twist And Shout
2위
Can't Buy Me Love
5주연속 1위
A Hard Day's Night
From Me to You
41위
1
Roll Over Beethoven
68위
With the Beatles
You Can't Do That
48위
A Hard Day's Night
There's a Place
74위
Please Please Me
Why
88위
Tony Sheridan과 합작
All My Loving
45위
With the Beatles
Do You Want to Know a Secret
2위
Please Please Me
Thank You Girl
35위
Past Masters
Love Me Do
1주 1위
Please Please Me
P.S. I Love You
10위
Four By The Beatles[46]
92위

Sie liebt dich
97위
Past Masters
A Hard Day's Night
2주연속 1위
A Hard Day's Night
I'm Happy Just To Dance With You
95위
I Should Have Known Better
53위
Ain't She Sweet
19위

I'll Cry Instead
25위
A Hard Day's Night
And I Love Her
12위
If I Fell
53위
Slow Down
25위
Past Masters
Matchbox
17위
I Feel Fine
3주연속 1위
1
She's A Woman
4위
Past Masters
1965년
Eight Days a Week
2주연속 1위
Beatles for Sale
I Don't Want To Spoil The Party
39위
4[47]
68위

Yes It Is
46위
Past Masters
Ticket To Ride
1주 1위
Help!
Help!
3주연속 1위
Yesterday
4주연속 1위
Act Naturally
47위
1966년
We Can Work It Out
3주연속 1위
1
Day Tripper
5위
What Goes On
81위
Rubber Soul
Nowhere Man
3위
Paperback Writer
2주연속 1위
Past Masters
Rain
23위
Yellow Submarine
2위
Revolver
Eleanor Rigby
11위
1967년
Penny Lane
1주 1위
Magical Mystery Tour
Strawberry Fields Forever
8위
Baby You're A Rich Man
34위
All You Need Is Love
1주 1위
I Am the Walrus
56위
Hello, Goodbye
3주연속 1위
1968년
The Inner Light
96위
Past Masters
Lady Madonna
4위
1
Revolution
12위
Past Masters
Hey Jude
9주연속 1위
1
1969년
Get Back[48]
5주연속 1위
Let It Be
Don't Let Me Down[49]
35위
Past Masters
The Ballad Of John And Yoko
8위
1
Something
3위
Abbey Road
Come Together/Something
1주 1위
1970년
Let It Be
2주연속 1위
Let It Be
The Long and Winding Road/For You Blue
2주연속 1위
1976년
Got to Get You into My Life
7위
Revolver
Ob-La-Di, Ob-La-Da
49위
The Beatles
1978년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
71위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
1982년
The Beatles' Movie Medley
12위

1995년
Baby It's You
67위
Please Please Me
1996년
Free as a Bird
6위
Anthology 1
Real Love
11위
Anthology 2

Past Masters1에 실린 곡들은 정규 앨범에 실리지 않고 싱글로만 발매된 곡들이다.


5.1.2. 해체 후 멤버별 빌보드 성적(싱글)[편집]


비틀즈는 해체 후에도 4명 모두 빌보드 Hot 100 1위를 한 번 이상 해봤다. 이렇게 활동 중에도 1위를 하고 해체 후에 멤버들 모두 1위를 한 밴드는 비틀즈가 유일하다.

Hot 100 1위만 소개한다.

  • 존 레논(2곡)
    • Whatever Gets You thru the Night (1974)
    • (Just Like) Starting Over (1980)[50]

폴 매카트니는 70년대 빌보드 총 결산에서 솔로 아티스트 중 엘튼 존 다음인 2위로 쳐준다.(엘튼 존은 15주, 폴은 13주를 랭크시켰다.)[51]

  • 조지 해리슨(3곡)
    • My Sweet Lord / Isn't It a Pity (1970)[52]
    • Give Me Love (Give Me Peace on Earth) (1973)
    • Got My Mind Set on You (1987)


해체 이전에 스무 곡을 1위에 올렸고, 해체 후에는 16곡을 1위에 올렸다.


5.2. 앨범[편집]


"비틀즈는 해마다 신곡이다."[53]

신해철


(괄호 안은 발매년도) 순서는 빌보드 앨범 차트 달성일 순.


5.2.1. 빌보드 1위[편집]


빌보드 200 차트도 1위 앨범이 통합 19개로 역대 최고 기록이다.# 누적 기록으로도 132주로 최고 기록이다.



5.2.2. 빌보드 2위[편집]


  • Introducing... The Beatles (1964)[55]
  • Something New (1964)[56]
  • Yellow Submarine (1969)
  • Hey Jude (1970)
  • Rock 'n' Roll Music (1976)
  • The Beatles at the Hollywood Bowl (1977)


5.2.3. 빌보드 3위~10위[편집]


  • The Beatles' Story (1964)[57]
  • 1962-1966 (일명 레드 앨범) (1973)
  • Live at the BBC (1994)
  • Let It Be... Naked (2003)
  • Love (2006)
  • On Air – Live at the BBC Volume 2 (2013)
  •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 리뉴얼 앨범으로 3위 (2017)
  • The Beatles 리뉴얼 앨범으로 6위 (2018)
  • Abbey Road 리뉴얼 앨범으로 3위 (2019)
  • Let It Be 리뉴얼 앨범으로 5위 (2021)
  • Revolver 리뉴얼 앨범으로 4위 (2022)

5.2.4. 빌보드 11위~20위[편집]


사실 비틀즈의 모든 정규 앨범들과 대부분의 라이브 앨범들이 10위 안에 들어서 11위 밖을 따지는 것이 무의미하다. 더구나 그냥 앨범도 아니고 박스 셋이 20위 안에 들었다는 것이 놀라울 지경.


5.3. 문서가 분리된 비틀즈 노래들[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6. 평가와 영향력[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비틀즈/평가와 영향력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7. 비틀매니아[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비틀매니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8. 롤링 스톤스와의 라이벌리[편집]


비틀즈의 라이벌을 꼽으라면 팬들이나 평론가들이나 이구동성으로 동시대에 활약했던 롤링 스톤스를 꼽는다. 이러한 라이벌리는 1965년 경부터 시작되었으며, 대중음악 역사상 최초이자 가장 유명한 라이벌리로 뽑힌다.[58] 실제로 롤링 스톤스는 비틀즈가 1960년대 유럽과 북미를 휩쓸고 다닐 때 대중적 인기나 비평적 성과로 대항할 수 있었던 거의 유일한 밴드였다.[59]

이 두 밴드가 라이벌로 꼽혔던 이유는 인기뿐만 아니라 대조되는 이미지와 특성 탓도 있었다. 먼저 비틀즈가 신사나 모범생의 이미지로 유명했다면 롤링 스톤스는 악동이라는 대조되는 이미지로 유명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비틀즈는 노동 계급 출신이지만 롤링 스톤스는 유복한 중산층 출신이다. 특히 스톤스의 보컬인 믹 재거는 그 유명한 런던 정경대의 경영대학 출신으로, 브라이언 메이, 존 디콘, 로저 테일러와 더불어 록 아티스트 중에서 학력이 가장 높은 사람이다. 그렇기에 실제로 당시 비틀즈는 ‘모범생인 척하는 악동들’로, 스톤스는 ‘악동인 척하는 모범생들’로 불렸었다. 그리고 비틀즈가 다소 팝적인 음악을 발매하거나 스튜디오에서의 실험에 집중한 반면, 롤링 스톤스는 블루스와 로큰롤에 기반한 정통 하드 록블루스 록적인 음악을 발매하거나 라이브 투어를 중시했다.

이렇게 라이벌리가 유명하지만 밴드 멤버들끼리는 서로 음악적인 영향도 자주 주고받고 서로 교류도 자주하는 친한 사이이다. 사실 60~70년대 영국 음악계는 매우 좁아서 웬만한 뮤지션들은 서로 다 안면이 있거나 친한 사이였기도 하다. 하지만 라이벌답게 서로 은근히 디스를 주고받은 적도 많은데, 몇 가지 사례로 존 레논믹 재거의 춤이 Faggot스럽다고 디스를 한 적도 있고, 키스 리처즈페퍼 상사가 똥같다고 디스를 한 적이 있다. 그리고 비교적 최근인 2020년에도 폴 매카트니가 롤링 스톤스는 블루스 커버 밴드라는 묘한 말을 남겼고, 이에 대응해 믹 재거는 비틀즈는 매디슨 스퀘어 가든같은 큰 규모의 공연장에서 공연한 적이 없고 투어 비즈니스가 자리를 잡기 전에 해체를 했기 때문에 롤링 스톤스와 비교 대상이 될 수 없다는 묘한 말을 남겼다.

팬들끼리의 관계는 두 밴드의 음악을 같이 향유하는 팬들이 가장 많지만, 가끔 나이가 지긋이 든 팬들끼리는 서로 싸우기도 한다. 국내 록 커뮤니티에서 나이 지긋한 레드 제플린 팬과 딥 퍼플 팬의 키배를 생각하면 쉽게 이해된다.

이렇듯 이들의 라이벌리가 너무 유명하다보니까 현재에도 라이벌을 표현할 때 비틀즈와 롤링 스톤스 같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9. 인기[편집]



인기의 절정을 구가하던 1965년의 셰어 스타디움 콘서트 당시


역사적인 셰이 스타디움 공연의 시작을 알리는 "Twist and Shout" 최초의 대형 스타디움 공연.[60]

대중음악 역사상 최고의 아티스트답게 전 세계인들의 인기와 사랑을 받은 밴드라는 수식어가 과하지 않다. 대중음악의 아이콘으로서 데뷔 초부터 해체직전까지 시대를 압도하는 인기를 구가했고, 해체된지 5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엄청난 인기와 인지도를 지닌 밴드이다. 비틀즈는 세대와 시대, 지역[61]을 가리지 않고 큰 인기를 누려왔다. 심지어는 폐쇄적이었던 구 공산권에서도 비틀즈의 인기를 막을 수 없어, "소련이 무너진 이유는 비틀즈 때문이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비틀즈의 인기는 상상을 초월했다.[62]

자유주의를 상징했던 비틀즈의 영향력은 전 세계로 뻗쳐나가며 소련같은 공산권도 절대로 예외가 아니었다. 문자 그대로 소련을 뒤집어 놨으며,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소련을 비롯한 양측 동맹국 사이에서 긴장, 경쟁 상태가 이어진 냉전 시기, 소련 진영에 속하는 국가들의 ‘철의 장막’에 침투한 비틀즈코드(비틀즈의 음악·패션 등)는 이념 대립과는 별개의 문제로 공산권 국가를 뒤흔들어 놓았다. 1960년대를 지배하던 비틀즈는 생활과 밀접한 이야기나 개인의 감정을 음악이나 옷차림으로 자유롭게 표현했고, 그 키워드이자 ‘비틀즈코드’는 ‘자유분방함’으로 이 신드롬은 철의 장막 속의 소련이나 키예프 등의 공산권 국가에도 침투했다.

하지만 공산권 국가에서 체제를 위협할 수 있는 개인의 개성이나 자유 등의 민주적이고 자유주의 문화를 인정하지 않았고, 소련 정부 측에서는 체제선전용 연극과 노래공연 등을 이용해 ‘건전한 체제·문화를 이룩하자’는 구호아래 선전활동에 힘을 쏟았다. 암시장에서 비틀즈 앨범이 비밀리에 활발히 거래되었는데, 그 풍경은 가히 007 작전을 연상케 했다고 한다.사람들은 엑스레이 사진을 병원에서 저렴하게 사거나 폐기된 엑스레이 사진에다 음악을 입히는 방법을 쓰기도 했다. 이렇게 만든 앨범은 '뼈에 와 닿는 음악(on the bones)'이라는 별명으로도 불렸다. 이 방법은 1950년대부터 이용되던 방법이었지만, 비틀즈의 광팬들로 인해 대중화 되었다. 비틀즈 문화를 막기 위해 정부가 민병대를 조직하여 단속했고, 음반을 가지고 다니다 적발되면 바로 대학교에서 제적당하는 등의 처벌을 받았다. 하지만 이미 자유를 맛본 젊은이들은 녹음기를 이용해 서로 다른 음반을 사서 따로 녹음해 나눠 갖거나 '해적판'을 이용해 꾸준히 음반을 접한다. 결국 소련도 경제적 실리도 취할겸 젊은이들의 열망에 항복했고, 후에 소련에서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등장(1990~)했을 때, 고르바초프는 "어떤 이데올로기보다, 어떤 종교보다, 베트남전이나 어느 전쟁이나 핵폭탄보다 냉전 확산의 가장 중요한 단일 원인은 비틀즈였다"라는 말을 남기며,#“비틀즈로 소통했고, 개혁했다.”라는 말을 남겼을 정도였다.# 프라하의 봄 당시 시민들이 Hey Jude를 시위대의 상징곡으로 사용하는 등, 레논 벽은 민주화의 상징이다. 비틀즈는 공산권에서 "자유주의 문화"의 위대한 사례로 알려져 공산주의 세계의 반서구적이고 폐쇄적인 체제를 무너트리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평가받는다. 미국 대통령이 못한 일을 영국 밴드가 해냈다는 식의 말이 있고, "비틀즈가 공산주의를 죽였다."라는 말도 있을 정도로 대단한 현상이었다. 이로서 비틀즈의 인기가 공산주의에 얼마나 영향을 미쳤는지 알 수 있다.

1960년대 브리티시 인베이전 당시의 열풍은 말할 것도 없는 수준으로 당시 미국에서 판매되는 음반의 60% 이상이 비틀즈 앨범이었고, 비틀즈의 음반이 열광적으로 팔리며 대중음악 시장에 유례없는 대호황이 오면서, 음악 시장은 폭발적인 성장을 맞이한다. 1970년대에 가서야 카세트 테이프가 대중적으로 보급되었고, 1980년대에 이르러서야 CD가 발명된 것을 고려하면, LP가 주류 매체이던 당시로 상상을 넘는 광풍적인 판매량을 보인다. LP 자체의 가격도 카세트 테이프와 CD에 비해 2-3배 수준이지만, 재생 기기인 턴테이블의 가격은 보급기 기준으로도 CD플레이어나 카세트 테이프 플레이어의 몇 갑절이나 된다. 해체 이후에도 비틀즈는 가장 인기 있던 록 밴드로 자주 꼽히곤 했다. Come Together, Yesterday, Hey Jude 등은 1960년대의 음악을 언급할 때 가장 먼저 언급되는 노래로 최고의 명곡으로 평가받는다. 2012 런던 올림픽 개회식 당시 비틀즈의 노래만 2곡(Come Together, Hey Jude)이 연주되었는데, 상당수의 현대 음악가들이 폐회식에서 공연했다는 것을 생각해본다면 비틀즈가 가진 인기를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빌보드 순위 역시 비틀즈의 인기를 알려주는 지표다. 비틀즈가 발매한 앨범은 거의 빌보드 1위에 올랐고, 해체 이후 발표한 컴필레이션 앨범도 20위권에 올랐고 일부는 1위에까지 올랐다. 해체 후 발매된 앨범으로 1970년대, 1990년대, 2000년대에 1위를 기록했고, 심지어 2009년 발매한 모노 CD 세트까지, 비틀즈가 발매한 모든 컴필레이션, 정규, 라이브 앨범들은 빌보드 20위권에 올랐는데, 이는 롤링 스톤스나 레드 제플린조차 이루지 못한 엄청난 기록이다. 빌보드 누적 기록도 어마어마한 수준으로, 싱글+앨범 차트 1위 누적 기간이 총 191주로 비교 불가 1위이다. 빌보드 200 차트로도 1위, 5위권, 10위권 모두 최장기록을 가지고 있다. 비틀즈의 빌보드 200 1위 누적 기록은 132주로 2위인 테일러 스위프트의 60주의 두 배를 넘는다.

빌보드 뿐만 아니라, UK 차트에서도 인기를 볼 수 있는데, 비틀즈는 196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 모든 십년대에 UK 차트 앨범 1위를 달성하는 위업을 보인다.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가 2017년에 무려 49년 125일만에 차트 1위를 달성하고, 후에 Abbey Road도 2019년에 49년 252일만에 1위를 재탈환한다. 각 앨범들은 빌보드에서도 49년 후에 다시 앨범 차트 10위 안에 오르며, 빌보드 200 차트 3위를 기록한다.

음반 총 판매량도 모든 분야에서 1위. 추측 판매량이 무려 약 10억 장 이상이며, 인증 판매량만 해도 6억 장이다. 이는 2위인 엘비스 프레슬리와 1억 장 가까이 차이나는 양이다. 음반 시장이 위축되고 있다는 점까지 감안하면 사실상 비틀즈의 음반 판매량 기록은 깨지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고 평가받는다. 록으로만 분야를 좁혀봐도, 음반 판매량 2위, 3위, 4위, 5위인 밴드들을 전부 합쳐도 비틀즈의 음반 판매량에 못 미친다는 점에서 그 인기를 짐작할 수 있다. 특히나 2위인 레드 제플린과 3위인 핑크 플로이드는 록뿐만 아니라 전체 아티스트 6위8위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차이가 나는 것이다.

20세기를 지나, 해체한지 50년 이상이 지난 현재에도 엄청난 인기를 가지고 있다. 스포티파이 서비스가 가장 늦게 시작된 아티스트인데도 실시간 기준, 스트리밍 순위 40위권이라는 놀라운 기록을 가지고 있다. 그중에서도 30%가 18~24세, 17%가 25~29세의 리스너다. 17세 이하도 포함하면 절반이 넘어가며, Z세대에게도 여전한 대중문화 현상으로 남아있다고 전하고 있다. , 레드 제플린, 롤링 스톤스, 핑크 플로이드와 함께 서구권 20대들에게서 가장 인기가 높은 고전 록밴드이며, 굳이 고전 록밴드로만 한정하지 않더라도 요즘 20대~30대들에게 인기 있는 음악가 순위를 꼽더라도 10위권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이중 지역별로 보자면 롤링 스톤스, 레드 제플린이나 핑크 플로이드는 아시아 지역에서 인기가 덜하고, 은 북미 지역에서 인기가 덜하다는 점을 보면 지역과 세대를 가리지 않고 매우 높은 인기를 얻는 록밴드로는 비틀즈가 유일하다.

유튜브로도 현재의 높은 인기를 알 수 있다. 비틀즈 채널은 2015년 10월 중순까지 완전한 음원이 올라오지 못 했다. 앞서 언급한 스포티파이도 그렇고, 저작권 문제로 음원이 늦게 올라오기 시작한 것이다. 2015년 10월 후반에 Revolution을 시작으로 몇가지 곡들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While My Guitar Gently Weeps2016년 6월이 지나가기 전에 올라오고, Something2017년 12월에 올라왔다. Come Together2018년 6월 후반에 올라왔고, Here Comes the Sun2019년 9월 26일에 처음으로 올라온다. 심지어 아직까지도 올라오지 못한 곡들이 꽤 있다. 상징적인 Yesterday2017년 12월에 음질이 거친 라이브 영상으로 처음 올라오고, 2023년 5월이 현재까지 그 유명한 Let it Be 뮤직비디오가 아직도 올라오지 않았다. 그리고 올라왔던 뮤비들도 저작권 문제인지 간혹 내려간다. 그럼에도 2023년 5월 기준, 구독자 736만에 총 조회수 59억의 기록을 가지고 있다. 비틀즈의 특수한 상황이나, 유튜브 자체가 동영상 콘텐츠인 것을 생각해볼때, 실로 대단한 기록이다.

한 대학교에서 미국인들을 상대로 설문한 "최고의 록밴드" 투표 결과에서도 1위를 기록한 바 있다. 2018년 조사 결과 비틀즈는 23%로 1위를 차지했으며 8%를 얻는데 그친 롤링 스톤스를 15%p 차로 상회했다.[63] 인터넷 인기 투표에서도 비틀즈는 언제나 상위권인데, 팬층이 매우 두꺼운 레드 제플린이나 핑크 플로이드, 을 제외하면 비틀즈와 경합을 치루는 밴드도 없을 정도다. 그 유명한 AC/DC이글스, 라디오헤드도 비틀즈와는 비교가 안 되게 적은 표를 받는다. 평론적으로든, 인기로든간에 비틀즈는 압도적인 록밴드 1위 자리를 고수하고 있는 것이다.

후대 음악가들에게서 받는 인기는 정말 이루어 말할 수 없는 수준이다. 가장 많이 커버된 아티스트로, 현재까지 총 11,600회가 넘는다. 2위인 전통 민요가 7,400회, 3위인 프랭크 시나트라가 2,200회인 것을 볼때 실로 압도적이다. Yesterday 하나만 하더라도, CBS의 2014년 보도에서 3,000명 이상의 아티스트들이 커버한 것으로 보아서 비틀즈의 노래 하나의 커버가 3위 이하를 압도하는 것으로 가히 놀라운 수준이다. 블랙 사바스 같은 헤비 메탈 밴드부터 테일러 스위프트, 에드 시런 같은 팝 아티스트까지 가장 좋아하는 밴드로 비틀즈를 꼽을 정도이다. 하드 록부터 소프트 록까지, 아트 팝에서 사이키델릭 록까지, 그리고 발라드부터 헤비 메탈까지 장르와 세대를 가르지 않고 음악가들로부터 비틀즈는 무한한 존경을 받고 있다.

2018년 월스트리트 저널의 통계 산출에 의해 '역사상 가장 인기 있는 록 밴드' 순위를 매겼는데, 비틀즈는 당연히 1위를 기록했다.[64] #

9.1. 한국에서의 인지도[편집]


록 음악이 비주류인 한국에서도 비틀즈는 모든 분야의 본좌로 평가받는 뮤지션이기에 밴드 이름 자체는 매우 유명하다. 국내에서는 록의 입지가 굉장히 좁기에 전 세계적으로 대성공한 레드 제플린, AC/DC 등의 밴드들과, 비틀즈와 동시대에 활동하여 이들의 라이벌이라고 평가받는 롤링 스톤스의 인지도는 매우 낮은 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65]과 함께 세대를 막론하고 가장 유명한 록밴드로 꼽힌다.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팝송 순위에서도 YesterdayLet It Be가 각각 1위와 4위를 차지했다.

한국 대중들에게 비틀즈의 이미지는 록밴드가 아니라 올드 팝 그룹으로 받아들여지는 면이 강하다. 그리고 비틀즈에 대해 이름만 알고, 사실상 제대로 모른다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전술했듯이 한국인들은 누구나 비틀즈를 알고 있기는 하지만, 정작 비틀즈의 곡은 소프트한 몇 곡만 알고 있는 경우가 대다수이다. 그렇기에 비틀즈가 록밴드인지도 모르는 사람들도 많은 편.[66] 중기~후기 비틀즈의 사이키델릭 록, 블루스 록, 하드 록 넘버들은 록덕후들을 제외하면 인지도가 극히 낮다. 게다가 페퍼 상사화이트 앨범에 수록된 여러 곡들을 들어도 이게 록이냐고 묻는 사람들도 많다. 이는 대한민국에서의 록 음악의 인식이 헤비 메탈에 국한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고정관념

그래도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역대 최고의 록밴드로 꼽히는 밴드답게 록덕후들은 뼛속까지 자세히 알고 있는 밴드이며, 이들 사이에서는 비틀즈 중후기의 곡들을 안 들어봤으면 간첩 취급을 받는 밴드이기도 하다.

10. 음악적 성향[편집]


여기서는 비틀즈의 음반과 작곡 성향을 중점으로 다룬다. 아래 내용의 상세한 내용은 비틀즈/평가와 영향력, 또는 비틀즈/역사 문서로 이동할 것.


10.1. 음악의 변화[편집]








초기 (1963, Love Me Do)
중기 (1966, Rain)
후기 (1968, Helter Skelter)

들어보면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음악의 스타일이 확연하게 변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비틀즈는 한국에서는 평범한, 인기 많은 로큰롤, 팝 밴드로 인식되는 경향이 있지만 이는 현실과 매우 동떨어진 인식이라고 할 수 있다. 로큰롤 밴드로서의 비틀즈의 정체성(머시 사운드)은 1965년까지만 국한되는 것이며 중기와 후기의 비틀즈는 사이키델릭 록, 하드 록, 아방가르드 등 과격한 노래들이 주를 이룬다. 보통 시대별로 나누어 성향이 두드러지는 점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비틀즈는 핑크 플로이드만큼이나 음악적인 성향에서 많은 변화를 거친 록밴드였다. 다만 핑크 플로이드는 활동 기간만 30년이 넘고, 시드 바렛 체제 / 로저 워터스 체제 / 데이비드 길모어 체제로 나뉘어 음악적인 성향이 변했던 반면, 비틀즈는 데뷔부터 해체까지 겨우 8년 동안에 한 명의 리더도 교체되지 않았음에도 변화무쌍한 음악적 성향을 보였기에 매우 특이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상술한 핑크 플로이드를 비롯해 라디오헤드, 마이 블러디 밸런타인, 플리트우드 맥 등 극소수를 제외한다면 이렇게 다양한 변화를 거친 밴드는 찾기 어렵다.

구분
음반
장르
초기
(1962 - 1964)




로큰롤
과도기
(1965)



포크 록
중기
(1966 - 1967)



사이키델릭 장르
후기
(1968 - 1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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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llow Submar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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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bey Ro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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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t It Be
모든 장르

비틀즈의 연대 구분은 흔히 위의 표와 같이 나타난다.

더 간단하게는 1966년을 기점으로 전기와 후기로 나눌 수 있는데, 1966년에 일종의 인식론적인 단절이 일어났다고 보는 시각에 기초한다. 이러한 구분법의 가장 큰 근거는 이 해에 비틀즈가 무대 생활을 그만두었다는 점이다. 투어밴드로서의 생명을 포기하고 스튜디오 밴드로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게 되는 1966년을 기점으로 잡은 것. 또한 Revolver페퍼상사 이후 비틀즈의 앨범이 통일성과 자기완결성을 지니게 된 것을 근거로 삼기도 한다. 각 나라마다 중구난방으로 발매되던 음반들도 점차 동일한 규격을 지니게 된다. 이러한 구분은 1973년 발매된 컴필레이션 앨범1962-19661967-1970이 발매되면서 공식적으로도 인정받게 된다.

하지만 Love Me DoTomorrow Never Knows를 같은 시기로 묶는 것은 누가 봐도 무리기 때문에 사이키델릭 록 성향이 짙게 드러나는 1966년부터 1967년까지의 시기를 중기로 새롭게 분류해 초기-중기-후기라는 시대 구분을 만들어 냈다. 실제 비틀즈의 음악을 들어보면 Revolver와 초기 비틀즈 음반의 성향은 매우 다르고[67] 마찬가지로 The Beatles의 곡들도 사이키델릭한 성향이 매우 옅어지고 블루스 록하드 록 등 다양한 시도들이 이뤄져 페퍼상사 음반과 같은 시기로 묶기 어렵다. 또, 멤버들의 음악적 관계 역시 초기와 후기로만 묶기에는 중기에 약간의 변화가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비틀즈는 초기에는 엘비스 프레슬리척 베리, 리틀 리처드, 버디 홀리의 영향을 받은 로큰롤팝 음악 밴드로 시작했다. Please Please Me 음반과 With the Beatles 등 비틀즈의 초기 앨범에서 팝과 로큰롤의 성향이 강하게 드러나는 편이며, 이후 이런 경향은 5집 Help!까지 이어졌다.

여기까지가 한국인들이 비틀즈에게 가지고 있는 일반적인 이미지이지만, 1965년 이후로는 비틀즈의 팝, 로큰롤 성향이 거의 사라졌다. 1965년 미국의 시인이자 포크 뮤지션이었던 밥 딜런의 영향으로 마약을 접하고, 작사의 중요성을 알게 되었으며, 또 밥 딜런의 포크송 성향에 감명을 받게 되었다. 조지 해리슨은 밥 딜런과 사적으로도 친한 관계가 되었고 존 레논폴 매카트니도 밥 딜런의 영향을 받아 작사에 신경을 쓰게 되었고 이후 나온 작품이 Rubber Soul이었다. 러버 소울은 전 앨범을 통일된 구성으로 채운 최초의 "명반"[68]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 때문에 러버 소울 이후로 비틀즈의 중기 음악이 시작된다고 보는 의견도 있다. 다만 비틀즈의 사이키델릭한 사운드에 중점을 두는 사람들은 Revolver를 중기 음악의 시작으로 보기도 하는데, 어차피 공식화된 기준은 아니기 때문에 Rubber Soul은 보통 과도기 앨범으로 여겨진다.

러버 소울 앨범 발매 이후 마약의 영향을 받은 록 장르, 즉 사이키델릭 록이 비틀즈 내에서 적극적으로 시도됨에 따라 사이키델릭이 주를 차지하는 비틀즈의 중기 음악이 시작되었다. Revolver 음반의 발매로 비틀즈는 기존의 로큰롤 아이돌 밴드에서 벗어난 가장 실험적인 록밴드로 거듭났다. 리볼버 내에서 사랑을 주제로 한 노래는 단 3개뿐이었고, 현대인의 고독함, 미래에 대한 불확실함 등을 다룬 심오한 주제가 음반의 주를 이뤘다. 또 Yellow Submarine과 같은 동요나, Taxman 같은 사회 비판적인 음악, Love You To 등의 인도 음악도 수록되었다. 기존 존 레논폴 매카트니에 밀려 많은 노래를 작곡하지 못했던 조지 해리슨은 이 앨범에 처음으로 3곡을 수록하면서 밴드의 주요 작곡가로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1967년 발매된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은 3200만장의 판매고를 올리며 비틀즈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앨범이 되었고, 클래식부터 진보적인 록 음악가까지 거의 모든 평론가들에게서 호평을 받으며 록 음악의 시대를 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존 레논폴 매카트니, 조지 해리슨의 갈등으로 사이키델릭 록이 주가 되던 성향이 무너졌고, 영화 Magical Mystery Tour의 실패로 폴 매카트니 주도 체제가 붕괴하면서 이후로는 각 멤버들이 자유분방하게 거의 모든 장르를 시도하는 가장 실험적이고 진보적인 밴드가 되었다. 사이키델릭 록에서 탈피해 각 멤버들이 자유롭게 만든 곡을 컴필레이션 앨범마냥 꽉꽉 집어넣은 앨범인 The Beatles바로크 팝부터 하드 록까지 기존에 존재했던 거의 모든 대중음악 장르들을 수록했으며, 또 후기의 음악들에도 영향을 줬다. 헤비 메탈, 펑크 록, 프로그레시브 록, 심지어는 30년 뒤에야 주류를 차지하는 얼터너티브 록의 시초가 되는 등[69] 대중문화 역사상 전무후무한 엄청난 영향력을 미쳤다. 앨범 발매 직후부터 1990년대까지는 산만한 구성 때문에 혹평이 주를 이었으나, 얼터너티브 록의 부상 이후 The Beatles 앨범이 가진 혜안이 재평가를 받으면서 점점 평가가 상승했다.

그러나 이토록 자유롭고 다양했던 음악적 성향은 그만큼 비틀즈 멤버들간의 음악적 교감이 떨어지고 있었던 것을 의미했고 결국 존 레논, 폴 매카트니, 조지 해리슨은 각각 솔로 앨범들을 준비하면서 밴드가 와해되게 된다. 1969년 마지막 역작인 Abbey Road를 완성한 이후 비틀즈는 1970년 4월 해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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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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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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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후기의 악기 사용도 주목할만한데, 초기에는 베이스 기타, 어쿠스틱 기타, 드럼에 가끔 피아노를 치거나 하모니카를 부르는 수준이었지만 1966년 이후로는 현재 기준으로도 매우 혁신적인 다양한 악기를 시도하였다. Revolver 음반에서 역재생과 같은 신기술과, 갈매기 우는 소리 등 다양한 사운드를 시도한 이후, 1967년에는 트럼펫에 리코더, 시타르 등 다양한 악기를 들고와 곡을 만들었다. The Beatles 세션때에는 일부러 망가진 어쿠스틱 기타를 사용하는가하면 새소리, 구두소리까지 음악에 포함시켜 다채로운 악기 성향을 보여줬다.

곡의 구성에서도 비틀즈는 매우 혁신적인 성향을 보였다. 페퍼 상사와 The Beatles 앨범에서 한두곡 정도를 바로 이어지는 형식으로 만들었는데, 애비로드 앨범에서는 아예 여러곡을 이어붙여 하나의 음악으로 만드는 메들리 구성을 보여줬다. 이는 당대 대중문화에 하나의 충격으로 다가왔고 로저 워터스 등 수많은 음악가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10.2. 시도한 음악 장르[편집]



10.2.1. 로큰롤, R&B[편집]




대부분의 비틀즈 초반기 음악이 포함된다. 버디 홀리, 척 베리, 리틀 리처드 등 1950년대 로큰롤 음악가들에게서 큰 영향을 받았다. 초기 앨범에서 R&B 곡들을 커버하기도 했고, 비틀즈 초반기에는 그저 흥겨운 로큰롤[70], 브리티쉬 R&B같은 장르의 노래를 작곡했지만, 후반기에 가서는 점차적으로 로큰롤을 하드 록과 융합시키거나, 혹은 아예 연주 방식을 바꿔버리는 식으로 고전적인 로큰롤의 재해석을 이끌었다. 또 페퍼 상사 음반에서는 사이키델릭 록로큰롤을 하나의 음악에 담아내는 신선한 시도로 로큰롤의 새로운 지평을 열기도 했다. 단순한 로큰롤에서만 그친게 아니라 정말 여러가지 시도로 마개조를 해버렸다. 이 때문에 후반기 비틀즈 음악들은 정통적인 로큰롤로는 분류되지 않고, 대체로 "로큰롤" 밴드로서의 비틀즈는 초반기에 국한된다고 보는 의견이 많다.

10.2.2. , 팝 록, 소프트 록, 피아노 록[편집]




대표곡으로는 Here Comes the Sun, Hey Jude, Let It Be, All You Need Is Love가 있다. 한국에서 "비틀즈"의 이미지는 이 장르로 국한되어 있고 실제로 비틀즈의 음악에서 팝이 차지하는 비중이 큰 것 역시 사실이다. 단순히 팝 음악을 시도한 게 아니라 팝 록, 소프트 록, 쟁글 팝, 파워 팝, 아트 팝, 드림 팝 등의 장르 형성에서 결정적인 영향을 줬고 빌리 조엘 같은 후대의 팝 록 아티스트들이나 버즈 같은 쟁글 팝, 파워 팝 아티스트들도 비틀즈의 영향력을 언급할 정도로 이 분야에서 비틀즈는 상당한 성취를 이뤘다.

비틀즈가 시대에 구분짓지 않고 꾸준하게 추구해온 장르로 폴 매카트니팝 록들이 여럿 알려져 있지만 존 레논 역시 에 가까운 음악들을 많이 작곡했다. 또 조지 해리슨Something 등의 팝 록들을 제작해 큰 인기를 얻었다.

10.2.3. 사이키델릭 음악[편집]




사이키델릭 장르의 대부분은 Revolver부터 Magical Mystery Tour에 분포되어 있다. 1966년부터 1967년까지 수많은 사이키델릭 곡들이 제작되었는데, 가장 유명한 곡은 Strawberry Fields ForeverA Day in the Life가 있다.

밥 딜런과의 만남 이후 처음으로 마약을 접한 비틀즈 멤버들은 마약의 몽환적인 분위기를 곡에 담아내려고 노력했고 그 노력의 산물이 Revolver였다. 신나는 로큰롤 음악을 베이스로 깔고 있으면서도 몽환적인 가사와 멜로디를 사용했으며, 또 역재생 등 신기술들을 이용해 신비한 분위기의 노래들을 만들어냈다. 시드 바렛 등 여러 사이키델릭 아티스트들이 이 시기 비틀즈 노래들의 영향을 받았다.

1968년 이후로는 사이키델릭 록이 차지하는 비중이 대폭 줄어들고 대신 하드 록을 비롯한 여러 새로운 장르가 사이키델릭 록을 대체했다. 그럼에도 Abbey Road까지 사이키델릭 록은 비틀즈 멤버들에게 어느 정도의 영향을 미쳤고, 또 1968년 이후 작곡한 몇몇 곡들은 사이키델릭 장르로 분류되기도 한다.

10.2.4. 하드 록, 헤비 메탈[편집]




  • 나이키 1987년 에어맥스 광고, '레볼루션 인 모션(Revolution in Motion)'에 Revolution이 삽입됐다.# TV 광고에 비틀즈의 음악이 들어 간 최초의 사례이고, 이 광고로 나이키는 폭발적인 성장을 이루었으며 자유와 초월이라는 광고 주제가 나이키의 새로운 브랜드 이미지가 되었다.#

비틀즈는 로큰롤 밴드에서 시작했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흥겹고 비트가 빠른 하드 록적인 성향을 일찍이 보였으며, 사람에 따라서는 1965년 비틀즈의 여러 로큰롤들이 파워 팝하드 록의 모태가 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다만 비틀즈가 본격적으로 하드 록을 시도한 것은 1968년 The Beatles 세션 이후이다.

1964년 록밴드 킹크스You Really Got Me가 크게 히트하고, 1965년 영국의 록밴드 더 후가 전설적인 명반인 My Generation을 발표했고, 이후 크림, 지미 헨드릭스에 의해 하드 록이 점차적으로 록 음악계의 주류 음악으로 떠오르고 있던 시점에서 키스 문, 에릭 클랩튼 등 여러 하드 록 아티스트들과 친분을 맺고 있던 비틀즈 멤버들도 시대의 흐름을 타고 하드 록 대열에 편승하였다. 단순히 하드 록을 연주하는 것을 넘어 헤비 메탈 등의 새로운 장르로 하드 록의 가능성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하드 록 역사에서도 매우 중요하게 다뤄지는 음악가이다. 특히 화이트 앨범에 수록된 Helter Skelter아이언 버터플라이In-A-Gadda-Da-Vida, 레드 제플린Good Times Bad Times-Communication Breakdown과 함께 세계 최초의 헤비 메탈 음악으로 꼽히며 후대의 블랙 사바스 등 여러 메탈 음악가들에게 큰 영향을 줬다.

처음에는 She Loves You에서 보여준 파워 팝으로 시작했지만, Good Morning Good Morning 등의 곡을 거치면서 점점 하드 록의 성향을 보이더니 Revolution, Helter Skelter, Oh! Darling 같은 곡에서는 본격적으로 뛰어난 하드 록의 정수를 보였다.

비틀즈가 록 밴드임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한국인들에게 비틀즈가 록밴드였다는 점을 알려주기에 좋은 곡들이 많다.


10.2.5. 프로그레시브 록[편집]




비틀즈가 정식적인 프로그레시브 록밴드는 아니였으나 The Beatles를 기점으로 프로그레시브 록 장르도 시도를 한다. The BeatlesHappiness Is a Warm Gun, Abbey RoadI Want You (She's So Heavy) 등이 그 예시. 이러한 비틀즈의 음악들은 훗날 프로그레시브 록의 전설 핑크 플로이드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10.2.6. 바로크 팝[편집]




비틀즈의 제일 유명한 바로크 팝 장르의 곡은 1965년에 탄생한 Yesterday다. 그리고 후일 비치 보이스Pet Sounds의 영향을 받았고, 폴 매카트니Pet Sounds가 없었다면 페퍼 상사 앨범도 없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는데 그래서인지 페퍼 상사 앨범에는 She's Leaving Home클래식 음악의 영향을 많이 받은듯한 바로크 팝 곡들이 여럿 수록되었다.

Pet Sounds에서 보여준 바로크 팝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색다른 바로크 팝의 가능성을 보여줌으로서 바로크 팝이 대중 음악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지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또한 클래식 음악과 대중음악의 융합으로 기성 세대들의 록 음악, 대중음악에 대한 편견과 선입견을 낮추는데에도 기여하였다.

다만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 앨범 이후로 특별히 바로크 팝의 가능성을 보여주지는 않았고 Piggies 같은 일부 곡을 제외한다면 비틀즈에게 바로크 팝이 주류 장르가 되지는 못했다.


10.2.7. 블루스, 블루스 록[편집]




로큰롤이 블루스에서 파생된 장르인 만큼 비틀즈 역시 초창기부터 정통 블루스 음악을 공연에서 커버하곤 했다. 블루스 음악이 주류에서 밀려난 시기인 1970년 공개된 For You Blue는 정통 12바 블루스 형식의 곡이다.

1968년을 기점으로는 에릭 클랩튼을 비롯한 여러 블루스 록 음악가들의 영향을 받았다. 블루스 록 장르는 하드록과 함께 비중이 늘어난 장르였는데, The BeatlesLet It Be 앨범에 수록된 다수의 곡들이 블루스의 형태를 띄고 있다. Yer Blues, Don't Let Me Down 등 정통 블루스에 가까운 음악 역시 여럿 존재한다. 한편으로 비틀즈는 블루스 록헤비 메탈하드 록으로 넘어가는데에 큰 영향을 미친 밴드이기도 한데, I Want You (She's So Heavy)블루스헤비 메탈프로그레시브 록의 색채를 집어넣은 것이다.


10.2.8. 포크 음악, 포크 록[편집]




1964년에 처음으로 포크 록을 시도했었고, 후에 1965년 밥 딜런의 영향으로 완성된 포크 록Rubber Soul 앨범에서 시도한 바 있다. 이 시기 In My Life를 비롯한 여러 곡들이 작곡되었다. 비록 Revolver의 영향으로 비틀즈 내에서 포크송의 영향은 급격하게 줄어들었지만, 여러 악기들을 포크송에 도입하면서 포크 록의 형성에 크게 기여하기도 했고, 무엇보다 하나의 통일된 음반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낸 Rubber Soul 앨범의 가치 때문에 포크 록 역시 비틀즈의 역사에서 빠질 수 없는 장르이다.

밥 딜런 역시 비틀즈의 영향을 받아 포크송과 록 음악의 융합을 시도하기도 했는데, 그런만큼 비틀즈가 포크록 역사에 기여한 부분 역시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10.2.9. 아방가르드[편집]




프랭크 자파, 비치 보이즈와 함께 아방가르드를 대중음악에 도입한 최초의 뮤지션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사이키델릭 록이 아방가르드에서 영향을 받은 장르인 만큼 비틀즈는 Revolver 시기부터 아방가르드적 요소를 도입한다. Eleanor Rigby에서 불협화음을 활용하고, 익스페리멘탈 록의 탄생에 기여한 Tomorrow Never Knows[71]에서 백마스킹을 시도한 것이 그 예다. 비틀즈 최고의 명곡으로 꼽히는 A Day in the Life 역시 아방가르드가 대중음악과 적절히 융합된 사례라고 볼 수 있다.

카를하인츠 슈톡하우젠[72]존 케이지의 영향을 받아 1968년에는 본격적인 정통 아방가르드 음악을 선보이기도했다. 오노 요코의 영향 역시 컸던 것으로 보인다. Revolution 9Wild Honey Pie가 대표적인 전위 음악이다. Abbey Road 세션 당시에는 아방가르드의 영향력이 약간 줄어들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가지 실험적인 시도를 통해 아방가르드 음악과 록 음악의 융합된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10.2.10. 동요[편집]




동요 역사상으로도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아티스트다. All Together Now, Yellow Submarine, Octopus's Garden 등 동요 스타일의 곡을 여럿 제작했고 중독적인 멜로디에 부르기 쉬운 가사로 만들어, 동요가 대중음악에 자연스럽게 녹아들 수 있도록 크게 공헌한 아티스트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한편으로는 여러 음악가들에 의해 "어린이들에게 들려주기 좋은 대중음악"으로 비틀즈가 굉장히 많이 꼽힌다. 데이브 그롤은 "어린이들에게 들려주기 좋은 음반" 3장중 하나로 비틀즈의 페퍼 상사 음반을 꼽았다.#


10.2.11. 기타 장르[편집]





라가 록 역시 처음 시도했는데 여기엔 조지 해리슨의 영향이 컸다. 시타르를 처음으로 서양 대중음악에 도입해서 대중음악 악기의 범위를 크게 넓혔다. 대체로 몽환적인 분위기이며 이 때문에 사이키델릭 록과 인도 음악을 융합하는 독특한 시도 역시 Magical Mystery Tour 세션 당시 이뤄졌다.
  • 펑크 록도 시도했는데, 더 후의 영향을 받아 단순한 코드와 과격한 음악을 만들어 펑크에 가까운 음악들을 만들어냈다. 특히 The Beatles 앨범에서 비틀즈가 시도한 펑크 록들을 여럿 감상할 수 있다.
  • 얼터너티브 록을 시도해본적은 없지만[73] 너바나 등 얼터너티브 록 밴드들에게 큰 영향을 준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 자장가 역시 비틀즈가 시도한 장르였다.


10.3. 레논-매카트니[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레논-매카트니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1. 저작권 논란[편집]


많은 노래가 저작권 문제랑 직접 맞물리기 때문에[74] 2010년 말까지 전 세계적으로 합법적인 온라인 다운로드가 매우 어려웠다.[75] 곡들의 저작권은 비틀즈 멤버 4명뿐만 아니라 곳곳의 기업, 개인이 나누어 갖고 있다. 마이클 잭슨도 비틀즈 곡 저작권을 가진 것으로 유명하다. 오노 요코폴 매카트니는 이 저작권을 되찾기 위해 손잡고 법정 투쟁까지 벌였으나 결국 판결은 마이클 잭슨의 손을 들어줬다. 이 일 때문에 폴과 마이클의 관계가 나빠지기도 했다고.[76]

사실 마이클 잭슨도 저작권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볼 여지가 있었는데, 정확하게 말하자면 마이클 잭슨은 비틀즈 곡 그 자체의 저작권은 가지고 있었지만, 곡의 음원의 저작권은 차마 구매할 엄두를 못 냈던 것. 곡과 음원의 저작권자가 다른 사례는 대중음악 역사상 전무후무할 것이다. 참고로 현재 비틀즈 음악들의 음원은 대부분 애비 로드 스튜디오가 가지고 있으며, 이 때문에 비틀즈 음악을 사용하려면 복잡한 방식으로 처리를 해야 한다. 더군다나 마이클 잭슨이 가지고 있던 비틀즈 곡의 저작권은 결국 마이클 잭슨이 나중에 모두 팔아버렸다고 한다.

그런데 2016년 2월 22일 유니버설 뮤직에 따르면 29일부터 한국 음원사이트에서 비틀즈의 음반을 스트리밍하거나 다운로드할 수 있다고 한다.

칼 세이건보이저에 관련해서 밝힌 일화에서 보이저 호에 실으려고[77] 조지 해리슨이 작곡한 곡인 'Here Comes the Sun'의 저작권을 사러 멤버 4명에게 문의했더니 4명 모두에게 저작권이 없었다고. 물론 방법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법률적 문제를 해결하려니 골치가 아파져 결국 포기했다고 한다. 지구를 대표하는 곡이 될 수도 있었음에도 결국 저작권 때문에 못 넣은 것인지라 팬들의 아쉬움이 이만 저만이 아니다. 대신 NASA는 2008년 북극성으로 존 레논이 작곡한 곡인 Across the Universe를 쏘아올렸다.

이 저작권료는 현재 엄청나게 비싸진 상태로, 대한민국 최초로 광고 음악에 비틀즈 음악 'I Will'을 사서 쓴 결과 4개월에 4만 달러를 지불했다고 한다. 게다가 이건 특별히 싸게 준 거라고 한다. 저작권료가 보편화된 현재는 한 곡당 기본 1억 원 이상으로 저작권료를 줘야 하는데, 이 당시는 저작권 초창기였던지라 저작권료가 낮을 수밖에 없었다.

비틀즈의 첫 싱글 Love Me Do는 사정상 링고 스타가 아닌 앤디 화이트라는 사람의 드럼이 들어갔는데, 이 사람이 저작권료를 받지 못하다가 2천년대에 들어서 한꺼번에 몰아서 받았는데, 그 사람이 평생동안 번 돈보다 노래 하나 참여해서 나온 저작권료가 더 많았다고 한다.

이런 막대한 저작권료 때문에 위에서 설명한 두 영화에서도 모두 커버 곡을 사용했다. 커버 곡이 훨씬 싸서 원곡을 넣으면 제작비가 몇 배로 늘어난다고 한다. 대한민국에서는 비틀즈의 트리뷰트 밴드인 'The Mentles'의 커버 곡을 많이 사용하고 있다.

12. 기타[편집]


외래어 표기법에서는 공식적으로 Beatles[bi:tlz]를 비틀스라고 표기하기로 했다. 왜냐하면 -s[z]는 '스'로 적는다.'라는 규정을 만들었기 때문이다.[78] 존 레논도 "존 레넌"이라고 적는다. 그러나 팬들 사이에서는 비틀"즈"와 존 레"논"이 압도적으로 더 많이 쓰인다.

특유의 바가지 머리가 비틀즈 초창기의 아이덴티티라고 할 수 있는데, 바가지 머리를 영어로 하면 Mop(대걸레) Top였기에 헤어스타일로 인해 종종 개그 소재가 되곤 했다.

존 : (대걸래를 흔들며) 폴, 너 어떻게 된거야? 뼈만 남아버렸잖아!

폴 : 그건 대걸레야. 나 여기 있다구!



파일:external/www.hollywoodreporter.com/Beatles_Royal_Honor_Queen.jpg


본의 아니게 영국 재정에 보탬이 되었다. 당시 영국이 고세율 정책을 취해 수익의 96~97%를 세금으로 냈다고. 이 점을 리볼버 1번 곡인 'Taxman'에서 깠다. 이 덕분에 영국 왕실로부터 훈장을 받기까지 했는데, 당사자나 보는 사람들이나 여간 고깝지가 않았다. 왜냐하면 받은 이유가 외화를 많이 벌어서였다. 즉 문화 활동(음악) 때문에 준 게 아니란 얘기. 게다가 영국의 높으신 분들은 "망나니같은 대중 음악 가수에게 훈장이 웬 말이냐"라며 반발했다고.[79] 존 레논은 반전 운동 등 사회 활동을 하던 중 이 때 받았던 훈장을 반납했다. 전쟁이나 지원하는 왕실이 준 거라서 싫다고 했다. 물론 비틀즈 해체 후에도 음악 활동을 계속했으니 그런 것이겠지만, 그 3~4%인 수익이 지금 가치로 수천억에 달한다.

의학계에도 공헌을 했다고 볼 수 있다. CT를 만든 사람(Godgrey Hounsfield, 후에 노벨상을 탄다.)이 비틀즈의 레코딩 회사인 EMI 소속이었다. EMI는 Electric and Music Industries의 약자로, 전자제품 및 음악관련 사업을 영위하고 있었다. 당시 비틀즈로 인해 돈이 넘쳐나는 EMI가 CT 만드는데 자본 투자를 했고, CT는 1960년 경에 연구를 시작하여 1970년대 초에 시제품이 나왔으니 비틀즈가 활동한 시기와 일치한다.#

시그니처라기보단 대부분 리켄배커 혹은 에피폰 기타베이스를 애용하였는데 투어 시기에는 존 레논은 리켄배커의 325 모델을, 폴 매카트니는 호프너의 바이올린 베이스를 조지 해리슨은 그레치의 듀오 모델을 링고 스타는 블루 옥토퍼스 색상의 루딕 드럼세트를 메인으로 사용했다. 존 레논과 조지 해리슨은 1964년 미국 방문 시 리켄배커 사로부터 선물받은 기타를 사용하기도 했다. 폴 매카트니가 공연 때 바이올린 베이스를 애용한 것은 여타 베이스들 보다 무게가 가벼워서 휴대가 간편하고 왼손잡이인 자신에게 좌우 대칭인 바디 모양이 연주하기에 편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러버 소울 레코딩 시점 부터 존 레논은 에피폰의 카지노 모델을 폴 매카트니는 리켄배커의 베이스 4001S를 메인으로 사용하였다. 메탈리카의 클리프 버튼이 애용한 것도 같은 모델. 그러나 렛잇비/애비로드 시점의 후반기에는 폴은 호프너 바이올린 베이스로 돌아가고, 현재도 호프너 베이스를 가지고 투어한다.



파일:레논벽.jpg


사진은 체코의 관광지로도 유명한 프라하의 레논 벽. 민주화의 상징으로 레논 벽은 유명하다. 1980년 존 레논이 암살당했을 때, 당시 체코슬로바키아 사회주의 공화국의 화가와 음악인들이 벽에 초상화와 그의 노래 가사 일부를 그리면서 이후 이 벽은 존 레논, 평화, 서구 문화, 정치 투쟁 등과 관련된 주제의 그림들로 장식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혁명 분위기가 고조되면서, 민주화 운동의 근거지가 됐다. 공산당 정부는 철거를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체코슬로바키아 국민들은 레논 벽에서 출발하여 웬체슬라스 광장(現 바츨라프 광장)으로 이어지는 인간 띠 시위를 진행했고, 1989년 11월 27일 후사크 공산정부의 무조건 항복을 받아냈다. 이런 레논 벽은 2019년 홍콩 민주화 운동에도 등장한다. 홍콩 전역에 십여 개가 넘는 레논 벽이 생겨나고,# 홍콩 외에 토론토, 밴쿠버, 서울, 도쿄, 베를린, 런던, 시드니, 맨체스터, 멜버른, 타이베이, 오클랜드세계의 여러 주요 도시에 응원의 레논 벽이 등장했다.## 그야말로 민주화의 상징이 아닐 수 없다.

워낙 유명한 존재이다 보니 비틀즈와 관련된 음모론 및 황당한 루머들도 많다. 대표적인 게 비틀즈의 업적들이 믿기지가 않아서 "딥스에서 만든 조직"이라는 음모론이다. 국내외로 비틀즈가 활동했던 과거부터 유행했던 음모론이며 Lucy in the sky with Diamonds의 Lucy가 '루시퍼'를 뜻한다고 주장하며 여러가지 헛소리를 늘어놓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존 레논 살해 배후설"과 "폴 매카트니 사망설"이 있다. 전자의 경우 극우파 세력이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한때 좌파성향이었던 존 레논 살해를 조종했다는 건데, 명확한 증거가 있는 얘기가 아니라 단지 몇몇 호사가들의 상상에 불과하다. 후자의 경우 비틀즈 곡들 사이사이에 흩어진 실마리를 모아 짜맞추면 "폴 매카트니는 1966년 말에 이미 죽었고, 지금 그의 자리는 폴 매카트니 닮은 꼴 찾기 콘테스트에서 우승을 거두었던 윌리엄 캠벨이 대신하고 있는 것이다."란 말인데, 당연히 뻥이다. 음모론자들은 몇몇 증거도 들이밀지만 어거지성 말장난에 불과하다. 이외에 알레이스터 크로울리와 연관이 있다는 둥 요상한 밑밥이 많다.

비틀즈 멤버들 주연으로 반지의 제왕이 영화화될 뻔했었다. 반지의 제왕을 인상깊게 읽은 존 레논의 제안으로 1969년에 계획된 프로젝트였다. 존은 골룸, 폴은 프로도, 조지는 간달프, 링고는 역할로 나올 예정이었고 감독은 스탠리 큐브릭으로 정해졌으나, 원작자인 J. R. R. 톨킨이 자기 작품을 영화화하는 것은 허락할 수 없다고 하는 바람에 계획단계에서 무산됐다. 또한 큐브릭 감독도 반지의 제왕을 읽은 뒤 영화화하는 게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였고,[80] 비틀즈와 만남을 가져 그들에게 영화화가 불가능한 이유를 설명하여 멤버들 역시 이 프로젝트에 흥미를 잃어버렸다.

존 레논을 제외한 나머지 비틀즈 멤버들은 심슨 가족에서 각자 본인 역할로 목소리 출연을 한 적이 있다. 존 레논은 심슨 가족이 나오기 전에 사망했기에 안타깝게도 그의 목소리는 들을 수 없다. 만약 그가 생존해있었다면 심슨에서 존 레논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영화 아이 엠 샘과 'Across the Universe'는 비틀즈 곡으로 OST 전곡을 채운 것으로 유명하다. 특히 'Across the Universe'는 작중 등장하는 인물 이름까지 전부 비틀즈 음악 관련으로 해놓아서 비틀즈 들을 설레게 했다.

세상에서 가장 많이 커버된 아티스트로 현재까지 총 11,600회가 넘는다. 2위가 전통 민요로 7,400회, 3위인 프랭크 시나트라가 2,200회, 4위 엘비스 프레슬리가 1,890회, 5위 스티비 원더가 1,550회인데, 비틀즈의 Yesterday 하나만으로도 2014년 CBS 뉴스 기준, 3,000명 이상의 아티스트가 커버했다고 나온 것으로 보아서 다른 아티스트들의 비틀즈 노래 커버 기록이 가히 압도적이다.#

뮤지션들에게 워낙 영향력이 큰 밴드이다 보니 어느 시대의 뮤지션들간에 비틀즈 팬들이 엄청나게 많다. 오아시스같은 경우는 단지 팬 수준을 넘어서 빠돌이 느낌이 날 정도다. 아이러니한 것은 조지 해리슨이 오아시스를 30년 지나면 잊힐 밴드라고 혹평하자 리암 갤러거도 지지 않고 조지 해리슨을 깠다.

1967년 페퍼상사 세션 당시 한 무명 사이키델릭 밴드와 EMI 스튜디오에서 잠깐 만나서 대화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 밴드가 다름 아닌 핑크 플로이드. 그런데 비틀즈 멤버들은 데뷔조차 하지 않았던 당시의 핑플에 별로 큰 호기심을 가지지 못해서 그렇게 긴 시간 동안 만나지는 않았다고 한다. 비슷한 사례로 1969년 1월 비틀즈 멤버들이 스튜디오 내에서 데뷔도 안 했던 한 록 밴드를 언급한 적이 있었다. 다만 이는 지미 페이지야드버즈의 기타리스트로서 이미 음악계에선 유명인사였고, 존 폴 존스 또한 음악계에서 유명한 세션맨이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1974년 에티오피아에서 발굴된 최초의 오스트랄로피테쿠스 AL 288-1에게 "Lucy in the Sky with Diamonds"에서 따온 '루시'라는 별명이 붙여졌다. 루시를 발견한 날 고인류학자들이 이 노래를 반복적으로 들었다고 한다. 1993년에는 새롭게 발견된 삼엽충 종들에게 비틀즈의 멤버들의 이름을 딴 학명이 지어졌다.

현재 비틀즈 멤버 4명의 이름을 딴 소행성이 소행성대의 궤도를 돌고 있다. 2008년 2월 4일에는 NASA가 "Across the Universe"를 전파 형태로 바꾸어 우주로 쏘아올리기도 했다.

2021년 10월에 시작된 NASA의 프로젝트 Lucy도 비틀즈의 Lucy in the Sky with Diamonds에서 따온 것이다.비틀스 명곡 싣고 우주 탄생 비밀 찾아나선 '루시'# 탐사선 Lucy는 다이아몬드 원반을 싣고 있고, Starship 패널에는 아인슈타인, 칼 세이건, 비틀즈 멤버들의 인용구가 포함되어 있다. 자세한건 비틀즈/평가와 영향력

2009년 3월, 리버풀 호프 대학 석사 과정에 '비틀즈 학과'가 개설됐다. 또한 리버풀 알버트 독에는 The Beatles Story라는 비틀즈 박물관이 있다.



비틀즈의 멤버 존 레논파텍필립 Ref. 2499는 세상에서 가장 귀중한 시계 중 하나로 유명하다.# 파텍필립 Ref. 2499는 지구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시계로 불리는 모델으로 1년에 10개 미만만 생산되었으며, 35년간 오직 349개만 만들어진 한정판 아닌 한정판이다. 37mm의 사이즈, 최상의 혈통을 가진 이 시계는 첫 번째 시리즈는 경매를 통해 2012년에 약 30억원에 판매되었고, 플래티넘 모델은 1989년에 당시 가격으로 무려 30억원에 판매된 적도 있다. 2023년 4월자 물가로 환산한다면 대략 96억원 5천만원이다. 더군다나 존 레논이 착용한 이 모델은 파텍필립 Ref. 2499 모델 중에서도 2499/100 이라는 레퍼런스를 달고 나온 Ref. 2499의 네 번째 시리즈로 추정된다. 여기에 존 레논 프리미엄까지 붙었으니 그 가치는 상당할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미국 드라마 등에서도 자주 보인다. 미드 루시퍼에서는 주인공 루시퍼 모닝스타스포일러의 가명이 Penny Lane이었고, 멘탈리스트에서는 주인공 패트릭 제인이 "내가 좋아하는 비틀즈 멤버가 누구인거 같나요?"라는 대사.[81] 2022년 아마존 프라임에서 방영한 "잭 리처" 시즌1 스포일러의 단서가 비틀즈였다. 하우스 오브 카드에서의 Nobody was really sure if he was from the house at all 대사는 A Day in the Life 가사에서 따왔다. 화이트 칼라에서는 주인공 닐 카프리피터 버크의 침묵 씬에서 비틀즈의 곡들이 나오는 등등.. 다양하다.

그외에도 CSI에서 그렉의 오노 요코 발언, 프렌즈에서는 결혼식 축가로 쓰이는 등, 이외에도 Hey Jude의 화음을 따라하며 "이봐, 지미~ 나쁘게 생각마, 더 좋게 만들어 보자", Yesterday의 화음을 넣으며 "Oh, XXXXX came suddenly", Lucy in the Sky with Diamonds에서 따온 "그녀는 다이아몬드랑 하늘에 있어" Carry That Weight 가사에서 따온 "Fucxxx, you're gonna carry that weight, carry that weight a long time" 이런 대사 등등.. 대중음악의 클래식이다 보니 여러 방식으로 언급되는 듯 하다. 비틀즈 멤버들의 솔로곡도 간혹 나온다. 그러나 국내에선 일반적으로 모르는 편이므로 화음까지 넣으며 가사 그대로가 나와도 뭐가 뭔지 모른다. 한국이 기이할 정도로 비틀즈 인지도가 낮은 편이다.

2019년, 독일 막스 플랑크 연구소에서 실시한 80,000개 이상의 다양한 화음을 포함하는 과학적 연구에서 Ob-La-Di, Ob-La-Da를 과학적으로 가장 완벽한 팝송으로 선정했다. 연구를 위해 연구원들은 1958년에서 1991년 사이에 녹음된 시대의 대표적인 700개의 노래를 수집하고 지원자들에게 그들의 음악과 가사를 제외한 다양한 코드 진행을 연주했다.#

비틀즈의 트리뷰트 밴드 중 하나가 내한 공연을 한적도 있다.

레고에서 비틀즈 가수들의 얼굴을 담은 레고 아트 비틀즈 31198를 출시했다. 무려 2,933조각이다.

1974~1982년까지 일본에서도 비틀즈 아류 밴드 '즈틀비(ずうとるび)'가 활동했는데, 쇼텐 방석 나르미 야마다 타카오가 데뷔해 1977년까지 활동했다. 애니 <마루코는 아홉살>에도 언급되었다.

몬티 파이선의 에릭 아이들과 닐 인스가 The Rutles라는 이름으로 비틀즈를 패러디한 개그 소재를 사용 한 적이 있는데 이것을 계기로 실제로 러틀즈라는 밴드를 만들게 되었고 앨범도 여러장 발매했다. 특히 조지 해리슨이 좋아해서 러틀즈의 Roof Top Concert 촬영에 BBC 기자 역할로 까메오 출연했다.

죠죠의 기묘한 모험동인게임인 디아볼로의 대모험에 등장하는 스탠드 중 착용시 비틀즈의 음악이 나오는 스탠드는 화이트 앨범, 데스 13, 옐로 템퍼런스, 허밋 퍼플의 4개이다. 참고로 이 스탠드들은 메이드 인 헤븐을 합성하는 데 필요하다.

명탐정 코난 극장판 '칠흑의 추적자'에서도 후반부에 중요한 밑밥의 단서가 되었다. 앨범 커버까지도 저작권료가 비쌌는지 비틀즈 앨범 커버의 등장인물들을 몽땅 소년 탐정단 멤버로 바꿔치기했다. 이 사진은 아가사 히로시 문서에서 볼 수 있다.

울펜슈타인: 더 뉴 오더에서 신문 기사로 짤막하게 언급되는데 이름은 모두 독일식으로 바뀌어 있다. 밴드 이름도 '디 케퍼'(Die Käfer, 독일어로 딱정벌레라는 뜻)로 바뀌어 있다. 나치가 공연을 허가해주려고 하지 않자 어쩔 수 없이 이름을 개명했다고. 작중에서 Mond Mond ja ja와 Change over day가 디 케퍼의 인기 곡으로 등장하는데, 그중 Mond Mond ja ja는 A Hard Day's Night와 비슷한 느낌이 나게 작곡한 것이라고 한다.[82] 다만 수집 요소에 따르면 앨범에 이스터 에그 형식으로 저항을 촉구하는 메시지가 들어가있다는 소문이 있다고 한다.

나치 독일2차대전에서 승리한 대체 역사 소설 당신들의 조국에서는 "흑인 풍의 해로운 울부짖음"이라며 주류 언론들의 비난을 받는다.

파일:hWPujBG.jpg
호주 멜버른에서 나치식 경례를 한 적이 있다.

방일 공연을 했을 때 당시 국민애니였던 오소마츠 군의 캐릭터 이야미의 셰에에~ 포즈를 했다고 한다.



비틀즈를 소재로 한 더 비틀즈: 락 밴드(The Beatles: Rock Band)라는 게임이 2008년에 발매되었다. 하모닉스가 제작하고 MTV가 배급을 맡았다. 비틀즈의 곡을 연주할 수 있는 리듬 게임이다. 적절한 비틀즈 곡 선곡[83]과 전기 영화 같은 현실적인 풍경에서 몽환적인 스타일로 넘어가는 인트로가 인상적이다. 비틀즈가 추구한 음악세계의 변화를 따라가는 듯하다.

BBC 드라마 닥터 후의 11대 닥터는 이들 중 하나가 되고 싶어 했다. 비틀즈에 들어가야 되니까 죽을 수 없다나?

2013년 5월 23일, 링고 스타Ringo 2012 앨범 문서화를 끝으로 비틀즈 모든 멤버들의 솔로 정규 앨범이 문서화되었다. 그에 따라 모든 멤버의 음반 목록 문서가 분리되었다.

프로필을 보면 알겠지만 비틀즈 멤버 전원의 혈액형이 RH-이다(!)

넷플릭스에서 볼 수 있는 애니메이션 중에 비틀즈의 노래를 바탕으로 한 뮤지컬 애니메이션이 있다. 이름은 비트 벅스.

존 레논의 집에 모인 비틀즈 멤버들이 할일이 없자 다같이 집단자위(!)를 한적이 있다고 한다. 자위하면서 영감을 주는 사람을 서로 외치는데 존 레논이 윈스턴 처칠이라고 외쳤다고한다.#

침착해! 스쿠비 두에서는 비틀즈의 폰트로 이루어진 팀 비들스의 보석상이라는 가게가 시즌 1 9화에서 등장했으며, 25화에서는 섀기스쿠비가 역관광을 시전하는데, 해체 과정이 섀기가 존 레논 포지션, 스쿠비가 음반 회사 사장, 오노 요코 포지션을 맡아 제대로 역괸광을 시전한다.



4인조 팝 밴드 비틀즈의 모습.
폴 매카트니, 조지 해리슨. 얼마나 품위 있게 생겼는가?
하지만 그들이 비틀즈를 결성했을 때는 반바지 수영복을 입고 변기를 목에 건 채 노래를 불렀다.
그러다가 그들은 친절한 천사인 런던의 사업가 브라이언 엡스타인을 만났다.
그는 이 재능 있는 젊은이들이 그에게 돈이 될 것임을 알았다.
정신병에 걸린 듯한 팬들은 아무것도 듣지 못한다.
히스테리, 비명... 사람들은 완전히 사로잡혀 있고, 반달리즘폭동은 공연의 말미를 흔히 장식한다.
긴 머리를 한 4명의 사진으로 벽의 4면을 도배하기도 한다.
그래, 춤춰라, 계속 춤춰라! 사회 문제는 다 잊어버리고! 팬들은 세상에서 뭐가 일어나는지 관심조차 없다.
더 빠르고 더 시끄럽게! 다른 사람들은 신경쓰지도 마라!

1966년 소련의 선전 영화 中

공산권에서 전무후무한 현상을 이끌었던 밴드인지라 소련 정부에서 비틀즈를 비난하는 프로파간다 영화를 만들 정도였다. 내용은 브라이언 엡스타인을 음악으로 돈 버는 장사꾼 취급하고 비틀즈 팬들을 사회 문제에 전혀 관심 없는 정치적 무관심의 극치라고 주장하는 것이다.[84] 그러거나 말거나 소련 팬들이 너무나도 열광적으로 비틀즈를 사랑한 덕분에 자유주의, 히피 물결이 소련에 많이 유입되었다는 게 아이러니다.


파일:롤링 스톤 로고.svg
롤링 스톤 선정 비틀즈 100대 명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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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롤링 스톤 로고.svg
롤링 스톤 선정 비틀즈 10대 명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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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위
2위
3위
4위
5위
Revolver
Abbey Road
The Beatles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
Rubber Soul
6위
7위
8위
9위
10위
Magical Mystery Tour
Help!
Let It Be
A Hard Day's Night
With The Beatles
※ 2011년 롤링 스톤지가 독자들을 상대로 한 여론조사를 토대로 'Top 10 Beatles Albums'를 선정.




롤링 스톤에서 비틀즈 100대 명곡과 10대 명반을 선정한 적이 있었다. 비틀즈 입문자라면 참고하면 좋을 듯하다. 10대 명반은 독자 투표로 치뤄졌는데 Revolver가 1위를, Abbey Road가 근소한 차이로 2위를 기록했다. 최고의 명곡은 A Day in the Life가 차지했다. 그런데 명곡 리스트는 롤링 스톤의 취향대로 브리티시 인베이전 초기의 로큰롤 음악들이 너무 많이 차지하고 있다는 점이 한계라고 할만하다. 나무위키에 개별 문서도 만들어지지 않은 If I Fell이나 You're Going to Lose That Girl 등이 Penny Lane, I Am the Walrus, Helter Skelter 등 비틀즈 중후반기를 대표하는 명곡들보다도 높은 순위를 차지하고 있다는 점은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들기 충분하다.

레딧 r/indieheads 이용자 투표
Our top ten Beatles songs
순위
곡명
작사/작곡
표수
1위
A Day in the Life
존 레논, 폴 매카트니[A][B]
1,167표
2위
Strawberry Fields Forever
존 레논[A]
609표
3위
Tomorrow Never Knows
존 레논[A]
499표
4위
Happiness Is a Warm Gun
존 레논[A]
496표
5위
In My Life
존 레논[A]
437표
6위
Something
조지 해리슨
431표
7위
Eleanor Rigby
폴 매카트니[A]
369표
8위
While My Guitar Gently Weeps
조지 해리슨
341표
9위
Across the Universe
존 레논[A]
289표
10위
I Want You (She's So Heavy)
존 레논[A]
286표
출처

레딧의 r/indieheads에서 사용자들이 뽑은 "최고의 비틀즈 곡" 순위에서는 차이가 확연하게 드러난다. 비틀즈 초기의 음악은 In My Life 단 한곡밖에 순위에 못올렸고, 중후반기의 음악들이 9곡을 차지했다. 또 롤링 스톤에서는 18위에 그쳤던 Tomorrow Never Knows가 이 투표에서는 3위로 올랐다는 점 역시 주목할만하다. 1위와 2위는 롤링 스톤과 비슷한 결과가 나왔는데, 그중에서도 A Day in the Life는 2위와 2배에 가까운 차이로 1위를 차지했다. 비틀즈 팬들과 평론가들에게서 암묵적으로 A Day in the Life가 최고의 비틀즈 곡 취급을 받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조지 해리슨폴 매카트니보다도 더 많은 곡을 10위권에 올렸다는 것 역시 놀라운 점이다.

TheTopTens 투표
Best Beatles Songs
순위
곡명
작사/작곡
득표율
1위
Hey Jude
폴 매카트니[A]
10%
2위
A Day in the Life
존 레논, 폴 매카트니[A][B]
9%
3위
Let It Be
폴 매카트니[A]
7%
4위
Here Comes the Sun
조지 해리슨
6%
5위
Yesterday
폴 매카트니[A]
6%
6위
Strawberry Fields Forever
존 레논[A]
5%
7위
While My Guitar Gently Weeps
조지 해리슨
4%
8위
In My Life
존 레논[A]
4%
9위
Eleanor Rigby
폴 매카트니[A]
4%
10위
Something
조지 해리슨
3%
출처

TheTopTens라는 인터넷 투표 사이트에서 진행한 투표도 있는데, 이것은 비틀즈 팬들뿐만 아니라 지나가던 청취자들도 투표한 것이기 때문에 레딧의 팬층 중심 투표 결과와는 또다른 결과가 나왔다. 대체로 일반인들에게도 유명한 곡들이 많은 표를 얻었으며, 팬층들에게 잘 알려진 매니악한 노래들은 순위가 다소 떨어졌다.[85] 그럼에도 불구하고 A Day in the Life는 근소한 표차로 2위를 차지했다. 또 특기할만한 점은 바로 조지 해리슨인데, 조지 해리슨은 10개 곡중 무려 3개의 곡을 랭크시켰다.

한국에서는 Let It Be가 대체로 가장 인기가 많고, 그 다음을 Yesterday, Hey Jude, All You Need Is Love 등이 잇는다. 한국에서는 폴 매카트니의 팝송이 인기가 많은 대신 비틀즈 중후반기 대부분을 차지하는 록 음악들은 인지도가 매우 낮다.

남성 보이밴드라는 점과 미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는 점에서 방탄소년단과 비교되기도 한다. 다만 BTS와 비틀즈는 음악적 성향[86]은 물론 상업적인 성공, 음악적 업적 등에서 비틀즈가 워낙 넘사벽이라 진지하게 비틀즈와 BTS를 비교하는 사람은 일부 극성 아미를 제외하면 없다. 비틀즈가 "성공한 대중음악 밴드"의 지표가 되면서 발생한 일일 뿐이다. 후일 더 스미스와 오아시스 역시 비틀즈와 비교를 당했다는 점을 본다면 BTS가 특출나게 성공한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87]

2021년 미국의 경제전문지 포브스에 의하면 레논-매카트니 듀오의 음악 저작권 가치는 5억 달러로, 전체 뮤지션 중에서 1위로 조사되었다.

일본의 외무상 하야시 요시마사가 비틀즈의 팬으로 유명해서, 주요 외교 자리에서 비틀즈의 곡을 연주하는 걸로 주목받는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그의 연주 제안이 거절 당한 적도 있다..#

12.1. 비틀즈 관계자들[편집]


※ 위에서 조금밖에 언급되지 않은 서트클리프와 베스트, 매니저 엡스타인, 그리고 기타 인물들에 대해선 요약해서 여기에 적어주시기 바랍니다.

  • 스튜어트 서트클리프 - 비틀즈의 전 베이시스트.
  • 아스트리드 키르헤 - 스튜어트의 애인이자, 비틀즈의 초기 모습을 찍었던 사진가.
  • 피트 베스트 - 비틀즈의 전 드러머.
  • 브라이언 엡스타인 - 1967년까지 비틀즈의 매니저.
  • 앨런 클라인 - 브라이언 엡스타인 사후 비틀즈의 매니저. 비틀즈의 해체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져있다. 보통 사람들은 오노 요코가 비틀즈 해체의 주요 원인으로 지목하나, 비틀즈의 팬들은 입을 모아 앨런 클라인을 가장 큰 이유라고 언급한다.[88] 기존 매니저였던 브라이언 엡스타인이 사망한 이후, 돈을 제대로 만져본적도 없던 비틀즈 멤버들이 너무나도 많은 돈을 잃자, 새로 매니저를 선임해 재산 관리를 하게하자고 합의했다. 그런데 폴을 제외한 나머지 멤버들이 앨런 클라인을, 폴 매카트니가 리 이스트먼[89]을 새 매니저로 지지하면서 곯아있던 밴드 멤버간의 갈등이 폭발하였다.
  • 오노 요코 - 존 레논의 부인. 일본계 전위예술가. 비틀즈 말기 녹음까지 관연하고 존 레논과 함께 음반까지 발표. 존 레논이 밴드 활동보다는 좌파운동 등 정치적인 문제에 관심을 갖도록 만드는데 영향을 미쳤고, 여기에 인종차별적인 편견이 덧붙여져 비틀즈 해체의 원흉으로 일컬어기도 하였다. 물론 어느 정도는 영향을 끼쳤겠지만, 그녀가 비틀즈 해체의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 패티 보이드 - 모델. 조지 해리슨의 전 부인. 에릭 클랩튼까지 포함된 3각관계가 유명.
  • 린다 매카트니 - 폴 매카트니의 아내로 비틀즈 해체 이후 매카트니와 함께 윙스의 멤버로 활동하였다.
  • 조지 마틴 - 프로듀서. Let It Be를 제외한 모든 비틀즈 음반을 프로듀스했다.
  • 필 스펙터 - 프로듀서. 'Let It Be' 음반에서 오케스트라 위주의 사운드를 만들었지만 폴 매카트니와 마찰이 심했다. 2000년대 들어서 폴 매카트니는 필 스펙터가 덧입힌 사운드를 모두 제거한 'Let It Be...Naked'라는 음반을 발매하였다.
  • 빌리 프레스턴 - Get Back 세션에 키보디스트로 참여했던 흑인 키보디스트. 원래 비틀즈 곡들의 키보드 연주 녹음은 주로 폴 매카트니가 맡았었지만, Get Back 세션에선 라이브 연주를 원했기 때문에 베이스기타를 연주해야 하는 폴 매카트니 대신 키보드를 연주할 세션맨이 필요해서 선택된 뮤지션이었다. 프레스턴의 키보드 연주에 만족한 비틀즈는 그를 세션맨 이상가는 대접을 해주어 싱글 Get back에서는 비틀즈와 함께 공동 뮤지션으로도 이름을 올려주었다. 이 뮤지션의 솔로 대표곡으로는 'Outa-Space', ‘Nothing from nothing’ 등이 있다. 훗날 링고 스타의 백밴드인 올스타밴드의 일원으로 링고 스타의 순회 공연에 자주 참여하기도 했다.
  • 글린 존스 - 프로듀서. 필 스펙터가 프로듀싱을 하기 전에 발매를 거부당했던 'Get Back'(Let It Be) 앨범의 프로듀싱을 맡았다.
  • 알란 파슨스 - 페퍼 상사 앨범의 사운드 엔지니어였다. 앨범에 표기는 안돼있지만 'White Album'과 'Abbey Road' 음반에도 참여하였다. 이런 중요한 명반들의 작업에서 얻는 노하우와 실력을 바탕으로 핑크 플로이드The Dark Side of the Moon에서 혁신적인 사운드를 만들어내었고, 알란 파슨스 프로젝트라는 독자적인 프로젝트 음악 활동도 하였다.
  • 에릭 클랩튼 - 조지 해리슨과 친구였다. 조지 해리슨이 작곡한 While My Guitar Gently Weeps에서 기타를 치기도 하였으며 Here Comes the Sun의 작곡의 동기부여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패티 보이드라는 여자를 두고 개막장 사랑싸움을 벌인 적이 있다.
  • 롤링 스톤즈 - 비틀즈와 함께 60년대 락음악계의 쌍두마차. 언론에 의해 라이벌 관계가 부각됐었고 실제로도 서로 라이벌 의식도 어느 정도는 있었던 걸로 알려졌으나, 사적으론 꽤 친한 사이였다. 롤링스톤즈의 첫 히트곡I Wanna Be Your Man은 레논-매카트니가 써 준 곡이고, 그 후로도 서로의 레코딩에 게스트로 우정 참여하기도 했었다.
  • 밥 딜런 - 밥 딜런과 비틀즈는 서로 창조적인 영향을 주고 받은 사이였다. 원래는 어쿠스틱 포크 뮤지션이었던 밥 딜런은 비틀즈의 로큰롤 음악이 가진 활력에 매료되어 기존의 포크에 락을 접목시킨 포크락으로 음악 인생을 전환하게 된다. 비틀즈도 밥 딜런에 자극을 받아 자의식이 강하고 보다 깊이 있는 가사를 쓰기 시작한다. 마리화나도 밥 딜런이 선물로 준걸 계기로 접하게 된다.
  • 브라이언 윌슨 - 비치 보이스 역시 비틀즈와 서로 창조적인 영향을 주고 받은 관계다. 특히 폴 매카트니와 브라이언 윌슨이 그러한 관계였다. 초창기엔 서프음악 전문이었던 비치 보이스는 비틀즈의 러버소울 앨범을 듣고 그 완성도와 예술성에 감명과 자극을 받아 자신들도 단순한 서프음악을 넘어선 그러한 명작을 만들어 보겠다고 작정하고 만든게 바로 명반 Pet Sounds 앨범이다. 이 앨범은 다시 비틀즈에 영향을 줘서, 폴 매카트니가 주도한 앨범인 Sgt. Pepper앨범의 사운드에 많은 영향을 주게 된다. 또한 비치 보이스의 불운의 명작 SMiLE에 관한 사연도 비틀즈와 얽힌 것이 많다.
  • 마하리시 - 비틀즈가 인도 여행을 하면서 만난 인물. 비틀즈는 명상을 통해 새로운 영감을 얻고 싶어 했지만, 마하리시는 이를 만족시키지 못했다. The Beatles 앨범의 Sexy Sadie는 마하라시를 까는 곡이다. 마하라시는 UV의 뮤직비디오에 나왔던 요기 다니엘의 스승이기도 했다.
  • 클라우스 부어만 - 함부르크 시절 만난 동료 뮤지션. Revolver 앨범 표지 드로잉이 이 사람의 그림이다. 비틀즈 해체 이후 존, 조지, 링고의 솔로 작업에도 참여했다.
  • 빌 해리 - 존 레논의 예술학교 친구로 'Mersey Beat'란 음악 잡지를 만들었다. 비틀즈에 대한 기사를 쓰기 위해 만든 잡지였고, 이걸 읽은 브라이언 엡스타인과 연결되어 비틀즈와의 만남을 주선했다. 비틀즈의 탄생과 해체를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모두 지켜본 증언자로서 비틀즈 관련 다큐멘터리나 영상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살아 있는 비틀즈 사전이다. 학교서 남들과 전혀 다른 차림새와 행동거지로 다니던 존 레논이 마음에 들어 친해졌다고 한다.


12.2. 대한민국에서의 비틀즈[편집]


보통 대한민국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비틀즈의 곡은 'Let It Be', 'Yesterday', 'Hey Jude', 좀 더 덧붙이자면 'Ob-La-Di, Ob-La-Da', 'I Will', 'All You Need Is Love'[90] 정도라서 예전에 KBS '신발장'에 비틀즈 신동(하영웅군)이 나왔을 때 비틀즈 곡이 200곡이 된다고 하자 "그렇게 많아?"라고 하는 패널도 있었다. 냉정히 말해 대한민국 일반 대중들이 인식하는 비틀즈는 '옛날에 유명했던, 달달한 선율의 러브송을 부르는 서양 팝송 밴드' 딱 여기까지다. 비틀즈가 록 음악을 한다는 사실에도 어색해하는 사람이 많을 정도.[91]

한국 케이블 방송사에서 HBO '밴드 오브 브라더스'라는 제목으로 이들을 재현한다는 주제의 방송을 한 적이 있는데, 'Hey Jude'를 부르면서 'Hey Jude ~ 나나나나 ~ 나나나나 나나나나나 ~' 등의 가사만 읊는다든지, 멤버 이름으로 매카트니를 댄다든지, 초기 프로필만을 참고해 '폴 매카트니는 구운 돼지고기를 좋아했다고 한다'는 내용을 방송했다든지(폴 매카트니는 현재 채식주의자이다.), 전혀 사전 조사를 하지 않은 듯한 내용만을 내보내 욕을 바가지로 먹었다.

한 마디로, 비틀즈라는 이름과 대표적인 히트곡 몇 곡 정도는 유명하지만 정작 비틀즈 음악의 핵심인 정규앨범들을 알고 찾아 들을 정도의 진짜 팬은 별로 없는 것이 실정이다. 근데 이건 비틀즈뿐 아니라 다른 60년대 뮤지션들도 비슷한 상황이다. 한국에서 서양 록/팝 음악이 본격적으로 들어와서 인기를 얻기 시작한 게 70년대부터였기 때문에 그 전인 60년대의 밴드들은 한국의 음악 팬들에게 상대적으로 간과되어 왔다.

애초에부터 한국이 록의 불모지라고 불릴정도로 록의 인기가 없는 나라다. 한국 내에서 록 밴드/록 뮤지션은 영화로 유명해진 , 50년대 대중 문화의 상징인 엘비스 프레슬리 정도만이 인지도 있는 편이고, U2, 레드 제플린, 엘튼 존, 척 베리, 블랙 사바스, 핑크 플로이드, AC/DC, 너바나, 지미 헨드릭스, 섹스 피스톨즈, 롤링 스톤스 등 전설적인 록 아티스트들의 인지도는 밑바닥을 치는 게 한국 음악계의 현실이다. 그나마도 비틀즈는 록밴드가 아니라 팝 밴드로 사실상 인지도가 더 높고, Helter Skelter 같은 노래를 듣기 전까지는 비틀즈가 락 밴드라는 사실도 어색해하는 사람들이 압도적으로 높다. 그렇기 때문에 비틀즈의 곡중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록 음악이 인기를 얻지 못한 것은 별로 특별한 일이 아니다.

디시인사이드에서는 왜인지 남자 연예인으로 분류되어 있다. 그래도 남자 연예인은 거시적 관점에서는 맞으니까 넘어갈 수 있다. 그런데 미국음악으로 분류된 건 잘못. 비틀즈는 영국 밴드이다. 비틀즈 갤러리에서도 가끔씩 나오는 불평이다.

비틀즈 멤버 중에서 공식적인 내한공연을 한 멤버는 아무도 없었으나, 2014년 5월 28일 폴 매카트니의 내한이 결정되면서 처음(이자 사실상 마지막)으로 비틀즈 멤버가 내한을 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갑작스런 건강문제로 2014년 내한공연이 취소되었다. 그러나 2015년, 다시 내한 소식이 들려왔고 내한공연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자세한건 폴 매카트니/내한 문서로. 이듬해인 2016년 11월 5일 링고 스타도 내한공연을 가짐으로써 한국은 비틀즈 멤버의 공연 불모지에서 완벽히 벗어났다. 원래는 JTBC 뉴스룸에도 출연해 인터뷰를 가질 예정이었으나,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인한 촛불집회 열기가 한창일 때라 인터뷰는 무산되었다.

비틀즈 곡의 무지막지한 저작권으로[92] 인해 한국에서는 아이튠즈를 빼고는 음원 스트리밍&다운로드 서비스가 불가능했다. 2015년 크리스마스부터 iTunes, Spotify를 비롯한 여러 음원 사이트에서 비틀즈의 음반을 스트리밍하기 시작했다. 당연히 한국에서는 어떤 서비스도 지원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냥 먼나라 이야기인줄만 알았다...였는데 하지만 2016년 2월 29일부터 한국의 주요 음원 사이트에서 비틀즈의 17개의 앨범을 서비스 시작한다고 한다. 포함되는 음반은 정규 음반 13개를 포함하고 1, 1962-1966, 1967-1970, Past Masters 이렇게 17개의 음반이라 한다. 비틀즈 커뮤니티는 당연히 흥분모드에 들어갔고, 많은 젊은 층에게 비틀즈를 홍보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단, 음원 서비스가 풀리면서 유튜브에 있던 비틀즈 노래들과 라이브 영상들 대부분이 유니버설 뮤직의 요청으로 삭제되는 큰 단점도 생겼다.

그런데 2018년 6월 17일, 유튜브 공식 채널에 모든 앨범이 무료 스트리밍으로 업로드되었다. 이로 인해 비틀즈에 대한 접근성이 훨씬 높아지게 되었다.

2018년 4월부터 2020년 5월 11일까지 MBC 라디오를 통해 조PD의 비틀즈 라디오가 방송했다. 이 프로그램은 비틀즈 전문 방송으로 비틀즈 노래는 물론 비틀즈 멤버들이 개인 활동으로 발표한 곡이나, 다양한 버전의 비틀즈의 노래를 리메이크한 곡들 혹은 비틀즈에 영향을 받은 곡 등을 소개하는 방송이었다.

여담이지만 폴 매카트니의 인터뷰 내용에 따르면, 비틀즈는 한국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고 한다. 투어를 못한 것은 프로모션을 할 대행사에 부재였다고 생각한다고 한다.


12.3. 기타 관련 문서[편집]


[1]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 앨범 작업 당시인 1967년 2월 28일에 촬영된 사진이다.[2] 쿼리멘 결성 이후인 1960년 7월 초에 이름을 실버 비틀즈(Silver Beatles)로 변경했고 8월 중순에 비틀즈(The Beatles)로 줄였다. 쿼리멘의 결성 년도인 1957년을 비틀즈 결성 년도로 보기도 한다. 애초에 이름을 바꾼 것 외에는 밴드 구성에 변화가 없었기 때문. 다만 1960년함부르크 공연을 거치며 아마추어 밴드가 아닌 어엿한 프로 밴드로 자리매김한 상징적인 년도로서의 의미가 있다.[3]잉글랜드 머지사이드 리버풀.[4] 언론 공식 발표 기준, 데뷔로부터 2743일[5] 머시 비트[6] 시도했던 장르가 원최 많아서 여기에 다 기재하기 어렵지만 밴드의 주류 음악은 포크와 로큰롤을 기반으로 한 뉴(New) 록 음악이었다. 잠시 밴드의 주류 음악이 되었던 사이키델릭 록은 1966년부터, 블루스 록은 1968년부터 시도했다.[7] 자체 설립[8] 팔로폰 레코드. 영국 음반. 그러나 2012년 이후 EMI 매각 과정에서 비틀즈 및 존 레논, 조지 해리슨, 링고 스타의 Apple 레코드 레이블 솔로 음반에 대한 권리를 제외한 팔로폰 레코드 전체가 워너 뮤직 그룹으로 편입되면서 재발매가 아닌 비틀즈 앨범에 대해서는 더 이상 팔로폰 레이블을 붙일 수 없게 되었다. 현재 비틀즈 녹음물에 대한 발매 권리는 유니버설 뮤직 그룹과 그 자회사 Calderstone Productions가 갖고 있다. Apple 레이블을 달고 나왔던 폴 매카트니의 솔로 음반들, 그리고 비틀즈의 데뷔 싱글인 Love Me Do/P.S. I Love You는 예외적으로 폴 매카트니가 설립한 MPL Communications가 갖고 있다.[9] 캐피톨 레코드. 미국 음반[10] 바흐, 베토벤, 비틀즈의 앞 글자 B를 따서 3B라고 불렀다. 본래 유래는 바흐, 베토벤, 브람스 셋을 칭하는 3B로, 번스타인이 브람스를 제외하고 비틀즈를 넣은 것이다.[11] 아예 대놓고 “팝 음악의 역사는 비틀즈의 등장 전과 후로 나뉜다”라는 말이 있다. 여기서 쓰인 팝은 장르로서의 팝이 아니라, 대중음악(Popular Music)의 약칭인 '팝'이다. 비틀즈 정보가 제한적인 한국에도 알려졌을 정도로 유명한 말이다. 그러나, 저 문장에서 '비틀즈' 단어를 다른 이의 이름으로 바꿔서 쓰는 자들이 있는데, 보통 글삭튀를 하지만 대놓고 조작하는 경우도 있다.[12] 브리티시 인베이전, 문화적 자유주의의 근간이 되어준 록 음악 등, 세계화, 반문화(Counterculture), 포스트 모더니즘, 정치적 자유, 사상, 젠더 혁명, 패션, 영화, 종교, 문학, 예술 등, 그리고 기성 가치관관습의 타파와 공산주의의 몰락에도 큰 역할을 했다. 비틀즈 자체가 자유주의의 상징으로 쓰였다.[13] 역사상 족적이 크다고 평가받는 대다수의 록밴드들은 활동을 굉장히 긴 편이다. 롤링 스톤스, 더 후, 핑크 플로이드 등의 밴드들은 거의 40년 넘게 활동하고 있으며, 특히 롤링 스톤스와 더 후는 현재까지도 현역이다. 비틀즈와 레드 제플린 정도가 이례적으로 활동 기간이 짧은데, 재미있는 점은 이 두 밴드가 각각 역사상 가장 많은 음반 판매량을 기록한 밴드 1, 2위라는 것.[14] 전체 2위는 엘비스 프레슬리이나 비틀즈와 판매량 격차가 매우 크다.[15] 프랭크 시나트라, 엘비스 프레슬리 등 40~50년대 대중음악 아티스트가 없던건 아니지만, 비틀즈 이전에는 가사가 없는 음악이 빌보드 1위를 차지하는 일이 잦았을 정도로 클래식의 영향력이 컸다.# 이러한 이유가 아니더라도, 앞서 평론 등에서 언급했듯이 대중음악에 기준을 정립했으며, 현대 대중음악의 기반을 만들었다. 자세한 것은 비틀즈/평가와 영향력[16] 재즈나 영화 사운드트랙 음반을 제외한 록, 팝 음악 등등을 기준하여 최초라고 지칭한다.[17] 특히 1965년 이후 제작한 앨범들은 음악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를 가지고 있다.[18] 대중음악계에서 처음 전자음악적인 색채를 띄우기 시작한 건 1960년대 후반 비틀즈가 카를하인츠 슈토크하우젠의 영향을 받은 여러 음향실험을 페퍼 상사, 화이트 앨범 등에서의 적용부터다. 이 시기 대중적으로 전자음향 기법을 각인시켰다.[19] 사이키델릭 록이 바탕인 Lil Yachty의 23년 신작 Let's Start Here.도 그렇고, Tomorrow Never Knows은 일렉트로니카/힙합/댄스 분야 전문의 영국 음악 매거진인 Muzik지가 선정한 ‘테크노/힙합 음악의 탄생과 발전에 가장 큰 영향을 준 명곡 50선’ 중에서도 최초의 곡으로 꼽혔다.[20] 음악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이 아티스트들은 전부 성향이 천차만별이다. 핑크 플로이드는 프로그레시브 록, 블랙 사바스는 헤비 메탈, 브루스 스프링스틴은 하트랜드 록, 너바나는 그런지, 그린 데이는 펑크 록, 마이 블러디 밸런타인은 슈게이징, 라디오헤드는 본인 특유의 진취적인 음악, 퀸은 비틀즈와 마찬가지로 틀에 얽매이지 않는 다양한 장르의 음악, 오아시스는 팝이나 얼터너티브에 가깝고, 앨리샤 키스와 존 레전드는 R&B소울 아티스트이고, 노라 존스는 재즈다. 포스트 말론은 힙합이고, 테일러 스위프트, 저스틴 비버, 빌리 아일리시는 스타로 불리는 아티스트들이다. 그런데 이 모든 아티스트들에게 비틀즈가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특히나 오아시스의 경우 비틀즈의 영향을 앞의 밴드들과 비견도 되지 않을 정도로 많이 받은지라 거의 비틀즈를 신에 가깝게 대접한다.[21] 심지어 뿌리가 비틀즈 데뷔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레드 제플린도 음악적 부분은 적어도 관리 및 경영 방식은 비틀즈에게서 영향을 받았다.[22] 그중에서도 30%가 18~24세, 17%가 25~29세다. 2022년에 출제된 논문에서 인용됐다는 스포티파이 데이터에서 30대 중반 이하 연령층에서 2% 이상이 올랐다고 나와있으나, 저 부분이 34세 언더 62%를 지칭하는 건지, 35세 언더 67%를 언급하는 것인지 혼란이 오므로 수치를 저렇게 표기한다.[23] 2000년대 이전 아티스트 중, 비틀즈보다 많이 스트리밍된 아티스트는 31위권의 퀸말고 없다.[24] 참고로 1000위 안에 이름을 올린 존 레논과 폴 매카트니의 솔로 커리어 스트리밍 횟수까지 모두 더하면 24위이다.[25] 2022년 기준 국제음반산업협회(IFPI)에서 그 해 발표된 음반/음원이 아니라도 그 해에 판매되었으면 순위에 반영, 디지털/물리적 음반, 음원 모두 반영한 Global Recording Artist of the Year 순위에서 19위로, 2000년대 이전 아티스트 중 유일하게 20위 안에 들었다.# 빌보드에서 집계한 2022년 기준 실물/디지털 앨범 판매량 합산 순위에도 유일하게 7위에 들었다. 2021년, 2020년에도 8위, 6위 등을 기록했다.[26] 단, 대한민국에서는 비틀즈의 이미지 중 60년대 초의 팝, 로큰롤 이미지가 다소 강하고, 비틀즈의 노래들 중에서도 Yesterday가 압도적으로 유명하기 때문에 최고의 걸작들이 모여 있는 60년대 후반 앨범들의 인지도는 영미권과 정반대로 낮은 편이다. 아무래도 비틀즈가 순회 공연을 통한 대중적 전성기를 이뤘던 건 엄연히 1960년대 중반이고, 무엇보다도 당시 대한민국은 검열이 심했던 편이라 마약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1960년대 후반 당시 유행했던 장르들을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인지도가 떨어진다는 비틀즈의 60년대 후반 앨범들조차 다른 60년대 음악가들의 앨범보다 인지도가 압도적으로 높은 건 변치 않는다.[27] 당장 마이클 잭슨이 비틀즈의 곡의 저작권을 갖고 있다 알려져 있는데 실제로 마이클 잭슨이 소유한 비틀즈 음악 저작권은 일부이며 어떤 곡은 비틀즈 4인방 모두가 곡의 저작권을 갖고 있지 않을 정도이기도 하다. 당장 빌보드 역사상 가장 제목 길이가 긴 1위 곡인 메들리 Stars on 45의 제목이 그렇게 된 이유가 비틀즈의 골때리는 저작권 때문이었는데 심지어 저때는 그나마 비틀즈 곡들의 저작권이 지금보다는 덜 퍼져 있었을 때였다.[28]콜드플레이, 에미넴, 테일러 스위프트의 수많은 히트작 음반들보다 해체된지 30년이 넘은 비틀즈의 베스트 앨범이 더 많이 팔려서 2000년대 통산 앨범 판매량 1위를 기록한 것으로, 이는 전례가 없는 엄청난 기록이다. 다만 2000년은 21세기에 포함되지 않아 21세기 통산 1위는 아델의 21이다.[29] 한국에서 2등은 보통 이 꼽히며, 서구권에서는 레드 제플린이 2등으로 꼽힌다.[30] 이는 2위인 엘비스 프레슬리를 1억 장 차이로 상회하는 것이며, 록밴드로만 따질 시 약 3억 장 이상을 팔아 2위를 차지한 레드 제플린을 2배 이상의 압도적인 차이로 따돌리는 것이다.[31] 이 시대가 어떤 사회였는지 패션종교로 설명하자면, 댄디와 미니 스커트의 시작으로 평가받는 '모즈 룩'이 반항의 상징이었으며, 머쉬룸, 몹톱컷으로 불리는 비틀즈의 헤어컷을 따라했다고 퇴학당하는 일도 있었다. 이스라엘에서는 공연을 막기도 했으며, 존 레논의 예수 발언으로 비틀즈의 앨범이 화형식을 당하고, 국제적인 라디오 보이콧, 바티칸에서 성명문을 내는 등의 일이 있었다. 역사상 가장 많은 소설 판매과 번역으로 기네스북에 올려진 추리 소설의 상징, 애거서 크리스티의 동시대 소설에서도 비틀즈는 '딴따라'라는 식으로 부정적으로 묘사된다.[32] 1960년대는 인종차별이 공기처럼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던 시대이다. 인종 분리도 당연하듯이 받아들이던 시대인데, 이때 비틀즈는 역사상 대중 음악계 최초로 관중석 인종 분리를 부셔냈다. 1964년, 잭슨빌 게이터볼 공연 에피소드인데 공연장에 인종 분리가 있을 거라 들은 비틀즈는 공연을 거부하였고, 격렬한 대치 끝에 결과를 받아냈다. 전 세계적으로 인기있던 그들이 민권법 운동을 공식적으로 지지하면서 흑인 뮤지션들과 협업도 자주 하며 지원해주는 등, 여러가지 행동을 했다.[33] 일반적으로 어떠한 문화든 가치는 사회를 중요시하는데, 히피 문화는 자신, 자아를 중요시했다.[34] 선정 내역을 보면 알겠지만, 사실상 모든 매체가 역대 아티스트 순위에서 비틀즈를 1위로 선정한다.[35] 하필 잘 알려진 곡들이 대부분 팝 록, 소프트 록 성향의 곡이다 보니 유독 한국에서는 "비틀즈 그거 그냥 아이돌 팝 밴드 아닌가?" 하는 오해가 잦은 편이다. 더군다나 국내에서 록 음악은 곧 헤비 메탈이라는 편견이 존재하기에, 비틀즈를 비롯한 록 밴드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에게는 그야말로 속터지는 상황이다.[36] 스튜어트 서트클리프가 탈퇴하기 전까지는 리듬 기타를 맡았다.[37] 사진은 1968년 The Beatles 앨범 당시 촬영된 것으로 앨범 안에 저 4장이 분리되어 들어가 있다. 2018년 50주년 기념반 슈퍼 디럭스/디지털 음원 버전의 커버로도 쓰였다.[38] 1962년부터 1966년까지를 말한다. 콘서트 투어를 진행하고 특유의 정장 차림, 바가지 머리가 특징이었던 시기다. 다만 음악적 성향에 초점을 두어 1962년~1964년 까지만 초기로 보고 1965년부터 1967년 까지는 중기로 보는 시각도 많다.#[39] 1967년부터 1970년 까지. 투어를 중단하고 히피 열풍의 영향으로 멤버들의 스타일도 크게 변한 시기다. 상술했듯 1967년을 중기에 포함시키고 1968년부터 1970년 까지를 후기로 보는 경우도 있다.[40] 초기, 후기로 나누기는 하나 사실 4-5년 정도 차이밖에 되지 않는다.[41] 이 사진을 찍고 얼마 안 가 비틀즈는 거의 해체하다시피 했으며, 이후 1970년대에는 멤버들 간의 사이가 영 좋지 않았기 때문에 1980년 존 레논이 사망할 때까지는 다함께 모여서 사진을 찍는 일은 없었다. 다만 존 레논 사후에 남은 세 명이 같이 모여 찍은 사진은 꽤 많다. 대표적으로 이 사진.[42] 영상의 곡은 싱글로 나온 I Want To Hold Your Hand이다.[43] 영상의 후반부에 등장하는 곡은 Twist and Shout이다.[44] 영상의 곡은 Yesterday이다.[45] 영상의 곡은 싱글로 나온 Don't Let Me Down이다. 정식으로 발매되기 약 2-3개월 전에 이 공연을 통해 첫 공개했다.[46] 캐피톨 레코즈를 통해 발매된 EP. 수록곡은 Roll Over Beethoven, All My Loving, This Boy, Please Mr. Postman. 참고로 1965년에 발매된 '4 by the Beatles'와는 별개의 앨범이니 주의.[47] 캐피톨 레코즈를 통해 발매된 EP지만, 발매를 '슈퍼 싱글'이라는 이름을 달고 발매했다. 수록곡은 Honey Don't, I'm a Loser, Mr. Moonlight, Everybody's Trying to Be My Baby로 모두 다 커버곡이다. 참고로 1964년에 발매된 'Four by the Beatles'와는 별개의 앨범이니 주의.[48] 빌리 프레스턴과 합작[49] 빌리 프레스턴과 합작[50] 이 싱글을 발매하고 며칠 뒤에 존 레논이 피살당했다. 1위에 오른 것도 존 레논 사후의 일이라 존 레논은 생전에 이 곡이 1위하는 것을 못 보고 죽었다.[51] 그룹까지 포함할 시 70년대 1위는 9개의 싱글을 27주동안 1위에 랭크시킨 비 지스이다.[52] 더블 A 싱글[53] 사실 신해철이 처음 했던 말은 아니라 신해철의 지인이 말했던 걸 본인의 라디오에서 대신 언급한 것. 세월이 얼마나 흐르던 처음 듣는 대중들을 팬으로 만드는, 그만큼 그들의 히트곡들이 첨단적이었다는 걸 알 수 있다.[54] 제목은 비틀즈 65면서 64년 발매인 이유는 연말에 발매되었기 때문이다.[55] 자신들의 앨범 Meet the Beatles!에 밀려 2위를 기록했다.[56] 자신들의 앨범 A Hard Day's Night에 밀려 2위를 기록했다.[57] 일반적인 앨범도 아니고 단지 해설과 인터뷰가 수록된 오디오 다큐멘터리 앨범이었는데도 7위에 올랐다. 그만큼 비틀즈의 인기가 상상을 초월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58] 보통 1970년대의 레드 제플린 VS 핑크 플로이드, 1980년대의 마이클 잭슨 VS 프린스, 1990년대의 투팍 VS 비기와 함께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라이벌리로 꼽힌다.[59] 당시 브리티시 인베이전을 이끌었던 밴드 중 비틀즈만큼 빌보드와 UK 차트 1위를 밥 먹듯이 차지했던 밴드는 롤링 스톤스밖에 없었다.[60] 55,600명의 관중으로 당대의 세계 기록을 경신했다. [61] 가령 의 경우 미국 음반 판매량으로만 따지면 U2에도 밀리지만, 영국 내에서의 인기는 비틀즈 다음간다.[62] 서구권의 자유주의적인 문화가 유입되어 공산주의가 붕괴되었다는 소리다. 당시 비틀즈는 자유 진영 문화의 상징이자 가장 대표적인 문화로 취급받았고, 196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공산권에서 록 음악이 반항, 반체제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밴드가 원하던 원하지 않던 반항의 상징으로 다루어졌는데, 대표적으로 키노가 있다.[63] 3위는 레드 제플린(4%), 4위는 AC/DC(4%), 5위는 이글스(3%).[64] 2위는 레드 제플린, 3위는 , 4위는 핑크 플로이드, 5위는 롤링 스톤스.[65] 보헤미안 랩소디 영화의 흥행 이후 인기가 특히 높아지긴 했지만 영화 이전에도 동아시아에서는 매우 인기 있었던 밴드였다.[66] 그렇기에 한국의 음악 관련 커뮤니티들에서는 비틀즈가 록밴드냐고 묻는 사람들도 꽤 있으며, 이러한 사람들에게 Helter Skelter를 들려주면 바로 납득한다는 후문도 있다.[67] 조지 마틴이 리볼버의 데모 버전을 들어보고 깜짝 놀라 아무말도 못했다는 일화도 있다.[68] 러버 소울 이전까지만 해도 히트곡 위주 감상이 일반적이었으나 이후로는 앨범 위주의 감상이 새로운 감상 방식으로 떠올랐고, 후일 핑크 플로이드, 더 후 등의 뮤지션들에게도 큰 영향을 줬다.[69] 커트 코베인Nevermind 앨범 제작 당시 이 앨범을 듣고 감명을 얻었다고 한다.[70] 스키플에 기반을 둔 리버풀 사운드 또는 머시 사운드를 말하는데 이는 미국의 정통 로큰롤과 구분한다.[71] 익스페리멘탈 록이기도 하다.[72] 패퍼 상사의 앨범 커버에도 등장한다.[73] 애초에 당시에는 얼터너티브 장르가 등장하지도 않았던 때였다.[74] 한 예로, 비틀즈의 흩어진 저작권 중 하나를 가지고 있는 소니뮤직은 비틀즈와 메탈리카를 카피/패러디 한 밴드인 비탈리카가 데뷔앨범을 발매할 즈음에 거액의 저작권 소송을 걸기도 했다. 다행히 메탈리카가 나선 덕에 이 문제는 원만하게 해결하긴 했지만 앞으로도 비탈리카 같은 사례가 반복될 것이라는 건 뻔한 사실이다.[75] 그래서 음원 파일을 가지려면 직접 음반을 사다가 Windows Media Player 등의 컴퓨터 프로그램에서 CD를 복사한 뒤 음원을 추출해내는 것 외에는 별다른 방도가 없었다.[76] 80년대말에 폴과 찍었던 사진이 존재한다. 그러니까 완전히 나쁜 사이는 아니었고 간간이 투어 공연을 관람하고 사진을 찍을 정도사이는 되었다는 것이다.[77] 먼 미래에라도 보이저호를 발견하게 될지 모르는 외계인에게 지구의 소리를 알려주려고 보이저 호에 탑재된 오디오 속의 음반에 지구의 각종 자연음과 여러 나라 사람들의 말소리 등과 함께 음악도 넣었는데, 주로 클래식 음악들이었고 대중음악 중에선 비틀즈의 곡을 넣으려고 했던 것. 척 베리의 명곡인 Johnny B. Goode도 골든 디스크에 수록된 바 있다.[78] 관련 사이트[79] 1960년대 당시 영국 상류계층 사회는 굉장히 보수적이었다. 얼마나 보수적이었는지 상상이 가지 않는다면 당시 엘리자베스 2세가 가나를 방문하여 외교활동을 하는 것에 대해 '폐하께서 어찌 감히 흑인하고 손을 잡고 춤을 춘다는 것인가?'라며 반발하거나 부왕 필립 공이 BBC를 활용하여 왕실의 일상을 보여주고자 했을 때에도 신성함이 없어진다!라며 내각의 극렬한 반대를 받았다. 특히나 당시 영국 사회에서 훈장을 받는 다는 것은 군사적 혹은 외교적 공을 세우는 것이었기 때문에 양복을 입고 노동자계층에서나 즐기는 시끄러운 음악을 연주하며 귀족들이 지키던 사교 예는 밥말아 먹은 듯한 비틀즈에게 그저 돈 많이 벌었다고 훈장을 주는 것은 상류계층 사회에서는 상상도 못한 일이었던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당시 총리가 노동당 해럴드 윌슨이었던 점도 작동했다.[80] 이 당시는 1960년대다. 2000년대 그 반지의 제왕을 생각하면 안 된다. 그때는 변변한 그래픽조차 없었으며, 따라서 일반인보다 훨씬 작은 호빗들을 표현할 길이 없었다.[81] 서양 심리학에서 쓰이는 문답법이라고 한다.[82] 참고로 작중에는 The comet tails가 작곡한 Weltraumsurfen(벨트라움서펜, 우주 서핑)이라는 곡도 인기 곡으로 등장하는데, 곡 이름만 봐도 알 수 있겠지만 비치 보이스의 Surfin USA를 패러디한 것이다.[83] 순서대로 A Hard Day's Night(1964), Paperback Writer(1966), Here Comes the Sun(1969), I Am the Walrus(1967). 초반에 지나가듯 Maxwell's Silver Hammer가 옷 드라이 가게 이름으로, Back in the U.S.S.R.가 노래 안의 비행기 구동음으로 등장한다. 초반 연출은 영화 A Hard Day's Night의 장면을 그대로 오마쥬하였다.[84] 정작 비틀즈 멤버들은 정치, 환경, 종교 등 여러 분야에서의 사회 운동으로 유명하다. 특히나 존 레논은 현재까지도 아나키즘평화주의의 대명사로 꼽힐 정도다.[A] A B C D E F G H I J K L M N O 레논-매카트니 명의.[B] A B 존 레논의 비중이 크다.[85] 가령 Tomorrow Never Knows는 레딧에서는 3위였지만 여기서는 22위로 떨어졌고 Happiness Is a Warm Gun은 순위권에조차 들지 못했다. 반면 Penny Lane, I Am the Walrus 등 해외에서 유명한 비틀즈 곡들은 높은 표를 받았다.[86] 비틀즈는 로큰롤 밴드에서 시작해 포크 록, 사이키델릭 록을 거쳐서 하드 록, 헤비 메탈, 펑크 록 등 매우 많은 록 장르를 시도한 반면 BTS는 상대적으로 R&B와 힙합에 치중되어 있는 모습을 보인다.[87] 다만 동양인 음악 밴드로서는 전례 없는 성공을 거뒀기 때문에 한국에서 매우 주목받는 면이 있다.[88] 물론 이 외에도 많은 문제가 있었다. 폴 매카트니의 독재, 밴드 내 싸움으로 지친 링고 스타, 레논-매카트니에 밀려 자기 곡을 제대로 쓰지 못하고 있던 조지, 점점 달라졌던 존과 폴의 음악 세계, 헤로인 중독에 빠진 존과 요코 등이 원인으로 꼽힌다. 그러나 그중 가장 큰 원인이 브라이언 엡스타인의 사망과 그로 인한 후임 매니저 선임 과정에 있다는 것은 대부분의 팬들이 부정하지 않는다.[89] 폴의 아내인 린다 매카트니의 아버지, 즉 폴 매카트니의 장인이다.[90] 이마저도 비틀즈 버전이 아니라 커버 곡인 러브 액츄얼리 버전을 많이 안다.[91] 소위 '록 스타' 하면 생각나는 반항적이고 과격하게 소리지르는 이미지와 국내에서 인식되는 비틀즈와는 거리가 있기 때문.[92] 이에 대해 +N.ex.T가 표절 시비에 휩싸였을 때 신해철은 이런 말을 남기기도 했다. "음악의 역사에서 오선지에 적을 수 있는 모든 좋은 멜로디는 비틀즈가 싹 긁어가서 더 이상 좋은 멜로디가 나올수 없다."라는 발언까지 한 적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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