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리원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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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북한 국기.svg 황해북도

사리원시
沙里院市
Sariwŏn City
}}} ||








상위
황해북도
하위
31동 9리




대의원
[ 펼치기 · 접기 ]
파일:wpk.jpg 오명춘 (제365호 사리원선거구)
파일:wpk.jpg 채강환 (제366호 원주선거구)
파일:wpk.jpg 송윤희 (제367호 미곡선거구)
파일:wpk.jpg 강윤석 (제368호 선경선거구)
파일:wpk.jpg 리선권 (제369호 광성선거구)
파일:wpk.jpg 리영래 (제370호 정방선거구)
파일:wpk.jpg 리용호 (제371호 운하선거구)
파일:wpk.jpg 리영심 (제372호 구천선거구)

시당
파일:wpk.jpg 김봉남[1]
(사리원시당 책임비서)
인민위
파일:wpk.jpg 최성봉[2]
(사리원시 인민위원회 위원장)
면적
187.91㎢
시간대
UTC+9
인구
307,764명 (2008년)
인구밀도
1,688명/km² (2008년)

1. 개요
2. 지리
3. 역사
4. 경제
5. 교통
6. 문화
7. 남북통일 이후 전망
8. 이북 5도 기준 행정구역
9. 북한 기준 행정구역
10. 기타
11. 참조 자료



1. 개요[편집]




사리원 시내(2019년)[3]
황해북도 서쪽 끝에 있는 도시. 황해북도 소재지[4]이다. 인구가 개성시보다 조금 적은데, 일제강점기의 인구가 2:1 정도였던 것을 고려하면 배로 증가하여 따라잡은 것이다. 물론 개성에 문화재가 가득한 데다가 개발할 평지가 적어서 상대적으로 인구 증가가 더디게 된 점도 감안해야 되기는 한다.

대한민국에서는 의정부시가 사리원시와 가장 유사한 도시 구조를 보이고 있다. 의정부시와 사리원시가 해당 도의 제2청사(황해북도도 황해도에 속하면 해주-사리원 이원체제) 위치이기도 하고, 남북 분단 상황에서 (개성을 제외하고) 각각 접경지에 가장 가까운 지역 중심 도시라는 점이 같다.


2. 지리[편집]


박민하: 사리원이 어디야?

- 백설(CJ제일제당) '사리원불고기' 양념 광고[5]



2017년, 시 중심부 경암산 인근[6]에서 촬영한 사리원 시내. 멀리 보이는 산이 정방산이다.

서쪽으로는 넓은 재령평야를 바라보고, 동북쪽으로는 경암산과 마주한다. 평야에 있는 도시인 만큼 북한 제일의 농업도시로, 일제강점기 때나 지금이나 농사 시험장이 있다.

시내에는 재령강 쪽으로 향하는 운하를 뚫어놓은 것이 특징. 시내 중심부 경암산(景岩山) 공원에는 민속거리라는 것을 조성해 놓았는데, 한반도 주요 역사 유적들의 미니어처를 전시하고 있다. 북한 유적뿐만 아니라 경주에 있는 첨성대 미니어처도 있으며, 조선시대 건물인 경암루가 그 안에 있다.

사리원시의 정방산은 한반도에서 유일하게 자생하는 전갈의 서식지로, 북한 천연기념물 171호로 보호하고 있다.

기후는 서울에 비해 모든 달의 최고기온과 최저기온이 각각 2℃가량 낮다. 냉대동계건조기후(Dwa)에 속한다. # 강원도 춘천과 기온이 비슷하되 강수량이 대구보다 약간 낮다.


3. 역사[편집]


본래 봉산군의 일부로 시 승격 이전에는 봉산군 사원면이었다. 이전의 역사는 봉산군 문서 참고.

사리원은 '-원()'이라는 지명에서도 알 수 있듯 평양과 개성을 잇는 교통로 상에 위치한 교통 취락으로 발전한 곳이다. 고려시대까지 평양과 개성을 잇는 주요 교통로는 자비령을 넘는 길이었지만, 조선시대에 자비령을 넘는 길을 폐쇄하고 서쪽의 동선령(洞仙嶺)을 넘는 길이 그 역할을 대신 맡게 되었다. 이때 동선령을 넘는 사람들이 동선령 남쪽 사리(沙里)에서 숙박을 많이 하게 되었고 이윽고 사리에 숙박시설인 원이 설치되어 '사리원'이라는 이름의 유래가 되었다. 이후 사리원은 교통의 요지로 번창하여 읍치인 동선면보다 더욱 번화하게 되었다. 유명한 봉산탈춤도 여태 전승되던 동선면이 아닌 사리원에서 열리게 되었다.

1905년 서울의주를 잇는 경의선이 사리원을 통과하고 1912년 동선면에 있던 봉산군청까지 사원면으로 이전하면서 사리원은 확고부동한 봉산군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후 1921년 사리원면으로 개칭되고 1931년 사리원읍으로 승격되었다. 1945년 기준 사리원읍은 면적 31.77㎢, 12개 리로 구성되었다. 아래 이북5도위원회 행정구역 참고. 8.15 광복 이후 북한 치하에서 1947년 로 승격되어 봉산군에서 분리되었다. 대한민국이북 5도 체계로는 1947년이 아니라 1945년 광복 직후에 봉산에서 떨어져 '사리원시'가 되었다고 간주한다.

6.25 전쟁 당시 대한민국 국군유엔군이 북진 레이스를 벌리던 시점에 짧은 전투 후 사리원을 함락시켰는데, 이 때 잠시 대한민국에서 사리원시 임시 시장을 파견한 적도 있다.[7] 물론 중국 인민지원군이 밀고 내려오면서 사리원시를 다시 북한에 내주고 사리원 시장도 남쪽으로 피난갔다. 이 때문에 임기는 3개월이 채 못 됐다고... 이북 5도에서 사리원을 별도로 관리하는 이유는 한국 정부에서 사리원 시장을 파견한 적이 있다는 사실이 문서로 남아있는 것이 결정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2022년 현재 이북 5도에서 사리원시와 송림시별도로 관리하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파일:정방산.jpg

이북에 있는 데다가 딱히 잘 알려진 곳은 아니지만, 국사를 열심히 공부했다면 고려 시대 다포식(多包式) 건축 양식을 보전[8]하고 있는 응진전이 있는 성불사가 부근[9]에 있음을 알 것이다. 참고로 이 성불사가 가곡 <성불사의 밤>의 무대로 알려져 있다. 유홍준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보면 지금도 북한 사람들 사이에서 사리원의 관광명소로 성불사가 아주 유명하다고 한다.

성불사를 보호하듯이 두르고 있는 정방산성 역시 고려 시대에 세워지고 조선 후기 김자점이 대대적으로 보수한 12km 규모의 거대한 산성으로, 전근대 시기 황해도 최대의 군사 거점이었다. 병자호란 당시 김자점이 5천여 병력과 주둔했으나, 청나라 군대가 산성들을 모두 무시하고 한성으로 바로 진격하면서 무력화되었다. 정문격인 남문 정방루[10] 인근 성벽은 7~9m에 달하 위용을 자랑하고, 치성과 곡성 및 4개의 장대를 갖추고 있다. 성벽의 성가퀴 및 여장도 잘 남아 있으며, 총안과 사혈용 구멍이 무려 6천여개나 있다. 북한의 국보 89호로 지정되어 있다.

4. 경제[편집]


국토연구원은 사리원은 농업 중심의 도시였으나 최근 주민 생활에서 상업 활동의 비중이 점차 증가한다고 평가한다. 분단 체제 하에서 신의주, 청진보다 시장화 진전에 불리하다고 평가 받는다.

국토연구원은 농업·행정 기능 중심에서 상업 기능에의 의존도가 심화되고 있으며, 2013년경 같은 시기에 탈북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청진에 비해 민간 주택 개발은 그리 활성화되어 있지 않다고 평가하였다. 계층별 주거지 분화가 시작된 정도다. 그러나 큰 차이는 아니라서 2019년 인근 봉산군 등지에서 주택 건축이나 물류 사업을 하는 개인 돈주들에 고용되면 농촌에서 일하는 것보다 높은 소득을 올릴 수 있다고 한다. 소위 '농민 일공[11]'이라고 하는 일용직 노동자를 고용하는 것이다. 그런데 농민이 이렇게 더 많은 돈을 버는 것은 그 돈으로 곡식을 바치겠다고 해도 불법이다. #

주민 대부분이 장마당을 통하여 생활 물자를 조달하고 있는 상황이다. 구천장이나 대성장은 국가 계획에 따른 승인된 공식장이고, 상매동 등의 소형 장마당은 도내에서 승인을 해준 것이라고 한다. 시 외곽에 장마당이 있으나 2010년대 들어 인근의 집값이 올라갔다고 한다.

평양을 수도로 하는 분단체제 하에서 꽤 재미를 보고 있다. 우선 수도 평양해주, 개성 등 남부 주요 도시를 이어주는 교통 요충지에 자리 잡고 있으며, 더불어 평양과 강원도 주요 지역들 사이의 교통도 분단된 현재로서는 사리원을 거쳐야 하는 형편이다.[12] 이러다 보니 북한 최대의 도매시장인 평성시장에서 황해도, 강원도로 들어가는 물자들은 거의 무조건 사리원을 경유하고 있다. 또한 원산을 통해 반입된 일본산 고급 제품들, 해주에서 강원도나 함경도로 반출되는 쌀 등의 제품들도 사리원을 경유한다. 한 마디로 평성시장의 하위호환인 셈이며, 별다른 산업 시설이 없던 사리원은 이런 지리적 이점을 기반으로 서비스업이 크게 발달해 있다. 그리고 평야 지역답게 쌀이 유명한 것으로 보인다. 이만갑에 나온 사리원 출신 탈북자는 사리원 쌀은 굉장히 부드럽고 맛있다 한다.

개성과 연계 발전을 위한 관광 개발이 국가적 사업으로 추진되어, 유튜브에 사리원을 방문한 외국인의 동영상이 있는 편이다. 네덜란드인 유튜버 아이고바트도 방문한 적 있다. 중국비리비리 같은 사이트에서도 중국어로 "沙里院"이라고 검색하면 나온다. '민속놀이터'라고 하는 시설 근처에 호수가 있는 공원이 있다. 한복을 대여할 수 있고 지역 특산물인 막걸리[13]를 주기도 한다고 한다. 문제는 한국어를 하는 사람이 주민과 대화를 하면 감시요원이 있는지 확인하고 주민들이 도망간다는 점이다. 그런 감시요원이 없으면 주민들이 상당히 반겨준다고 한다. (한국계 교포의 개성, 사리원 방문기)


5. 교통[편집]


철도는 평부선사리원청년역 - 동사리원역이 있다. 사리원역은 황해청년선의 분기역으로, 신천이나 해주 방면으로 갈 수 있다. 평양개성간 고속도로가 시가지 북부를 지나고 있으며, 평양-개성간 1급도로와 사리원-해주간 1급도로가 개설되어 있다.

택시버스도 있다.

시의 서쪽 경계인 재령강에서 시내로 가는 운하가 있다.

서울에서 직선으로 약 150km, 철도로는 200km 거리에 있다.


6. 문화[편집]


문화시설로 사리원민속촌, 경암호, 경암루, 사리원청년경기장(2009년 준공, 2016년 재건축 / 2만 2천 명 수용), 사리원체육관(2021년 준공 / 1천 명 수용), 황해북도예술극장(2009년 준공 / 1천 명 수용), 사리원청년야외극장(2020년 준공)이 있다.


7. 남북통일 이후 전망[편집]


통일이 되고 안정이 되면 고양시급으로 성장할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지도를 보면 대전과 지정학적 위치가 상당히 비슷하고. 대신 더 춥다[14] 넓은 평야에 미래 경의선경의고속철도가 경유할 확률이 굉장히 높으며, 북한판 경부고속도로인 경의고속도로 또한 이곳을 지날 확률이 매우 높다. 실제 지금도 지나고 있긴 하지만. 이런 천혜의 교통의 요지이자 살기 좋은 땅(물론 지금은 아니지만)을 가만히 놔둘 리가 있겠는가? 더불어 통일되면 옆에 붙어 있는 재령군은 계룡시급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다. 더구나 여기는 통일 초기에도 중요한 역할을 할 지역이다. 개성이 북으로 가는 관문 역할을 한다면 이곳은 북한 전역으로 연결되는 교통과 특별히 통일 초기, 북한의 북부 지역(함경도평안도)을 연결하는 물류의 중간기착 지역으로 상당한 중요성을 지닌 지역으로 탈바꿈하게 된다. 북한 전역의 도로망이 완공되기 전까지 어느 세월에 사리원은 북한 전 지역을 잇는 심장과 같은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15] 이미 일제 시대부터 도청소재지로 해 달라는 요구가 있을 만큼 교통의 요지요, 하물며 지금은 북한의 동서 교통이 연결되는 곳이어서 평양, 함흥이 광역시가 되면 황해도에도 광역시가 있어야 한다는 요구를 무시하기도 어렵다. 이렇게 되면 도청소재지를 새로 지정해야 한다는 골치 아픈 문제가 또 생긴다. 물론 사리원이 광역시로 승격된다면 도청소재지는 그냥 기존처럼 황해도의 전통적인 중심 도시였던 해주에 둘 가능성이 높다.

이렇게 보면 통일 되면 말짱 꽝 아닌가 생각할 수 있지만, 별다른 산업 시설이 없는 것은 광적으로 이동거리 단축에 집착하는 북한 특유의 중앙집권식 계획경제체제 때문이고[16], 통일 후 시장경제체제 하에서 사리원은 서울과 평양을 잇는 도로·철도 간선축의 중심에 위치하면서 넓은 개발 부지를 바탕으로 적지 않은 이점을 누릴 가능성이 크다.[17] 일제강점기 황해도청 소재지는 해주였지만, 이미 1923년부터 도내 각계각층에서 사리원으로의 도청 이전 요구가 빗발칠 정도로 사리원은 상당한 발전을 구가하던 도시였다. 만약 해주에 철도가 들어가지 않았으면 공주시가 그랬듯 사리원에 속절없이 도청을 뺏겼을 가능성도 높다. 진주시: 우린 있는데도 뺏겼는데? 사리원은 황해도 최대 도시이다.

그러니 통일 후 어느 정도 기반이 잡히면 프랜차이즈 점포가 입점하는 건 시간 문제이다. 그야말로 교통의 요충지이자 물류의 중간 기착점이란 지리적 요건으로 인해 요식업과 숙박업이 강세를 보일 것이다. 뿐만 아니라 현지 주민들 역시 관련 업종에 종사하거나 자영업 형태로 일할 수도 있으므로 경제 발전에도 많은 도움이 있을 것으로 보여진다.

남한식으로 개편된다면 역사성이나 행정구역 특성상 봉산군도농통합할 가능성도 높다. 이 경우 익산시(이리), 아산시(온양), 문경시(점촌), 보령시(대천), 정읍시(정주), 거제시(장승포), 통영시(충무), 남양주시(미금)[18], 연기시(조치원)[19]가 그랬던 것처럼 사리원은 역사적 지명이나 동 이름으로만 남고 봉산가 될 가능성이 있다.[20] 혹은 반대로 사리원의 지명도가 비교적 높다는 이유로 구미시포항시처럼 봉산이 사라지고 사리원시로 통합될 가능성도 있다.


8. 이북 5도 기준 행정구역[편집]




파일:사리원시기.png

아래 행정동과 법정동은 《이북5도 명예읍·면·동장 위촉에 관한 규정》 제8조 별표2에 규정되어 있다.

행정동
법정동·리
경암동
경암리(景巖里)
대원동
대원리(大元里)
동동
동리(東里)
사동
사리(沙里)
사원동
사원리(沙原里)
상하동
상하리(上下里)
서북동
북리(北里)·서리(西里)
신구동
구천리(駒泉里)·신양리(新養里)
신창동
신창리(新昌里)
철산동
철산리(鐵山里)


9. 북한 기준 행정구역[편집]


2008년 기준. 그 이후 2019년 여름 촬영된 위 관광객의 영상에서는 시내에 류경동, 문화동, 선경동 같은 지명이 보인다. 2011년에는 한국 조국평화통일불교협회가 '영광동'의 빵공장에 밀가루를 전달하기도 했다. # 시내의 행정구역을 2010년대 대대적으로 개편한 것으로 보이나 위치는 위와 같은 영상에서 확인되나 기존 동의 폐지 여부는 확인되고 있지 않다. 황해북도예술극장 근처 시내 중심부에서 도로를 경계로 하는 동으로 파악되고 있으며(위치), 기존 북1동에서 북4동, 동1동에서 동2동의 영역과 일부가 겹치거나 아예 개편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영역에서 동을 추가하는 근거가 되는 인구의 증가가 크지 않았지만 바뀐 4개의 동 이름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아예 기존 동이 폐지되고 새 동이 신설된 것으로 보인다.

  • 관할 동: 경암동, 광성동, 구천1동, 구천2동, 구천3동, 구천4동, 대성동, 도림동, 동1동, 동2동, 만금동, 북1동, 북2동, 북3동, 북4동, 산업동, 상매1동, 상매2동, 상하동, 서리동, 성문동, 신양동, 신창동, 신흥1동, 신흥2동, 어수동, 운하1동, 운하2동, 원주동, 은별동, 철산동
  • 관할 리: 구룡리, 대룡리, 문현리, 미곡리, 봉의리, 선정리, 성산리, 정방리, 해서리


10. 기타[편집]


  • 백설(CJ제일제당)의 불고기 양념 이름으로 쓰이기도 한다. 고수박민하[21]가 광고에 출연하였다. 문서 상단의 멘트이다.

  • 마찬가지로 사리원 출신의 실향민인 김봉득이 6.25 전쟁대전광역시에 정착하여 차린 평양냉면집이 사리원 면옥이다. # 따라서 (상단에서 언급했듯이) 사리원은 북한에서 불고기로도, 냉면으로도 유명한 도시는 아니다.


  • 2008년 11월 5일 당시 북한에서 부모와 같이 탈북한 A군(당시 생후 3개월)[22]이 바로 여기 황해북도 사리원시 대원리에서 태어났다. 링크. 행정상으로는 '대원리'가 52년에 사라졌다고 하니 북한에서는 일반 주민의 지명 개념이 과거 기준이거나 서울 '청량리'처럼 이런 지명이 널리 통용되는 것으로 보인다.

  • 싱하이밍 주한 중국대사가 수학한 사리원농업대학이 위치한 곳이다. 그 영향으로 싱하이밍 대사는 한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한다.

파일:배스킨라빈스_사리원.png


11. 참조 자료[편집]


  • 북한의 도시계획 및 도시개발 실태분석과 정책과제(2016, 국토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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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22년[2] 2022년[3] 관광객이 촬영한 사리원 모습. 10분이 넘는 분량으로 시내를 촬영한다. 25분 23초 무렵에 롤러스케이트장 같은 새로운 문물의 보습도 보인다.[4] 자세한 사항은 북한/행정구역 문단을 참조바란다. 소재지는 어떤 관청이 있다는 뜻이 아니라 중심지다. 즉 '도당'이니 '인민위원회' 등은 공기업 지사 마냥 소재지에다가 일을 하는 개념인데 한국을 무작정 대입하려다보니까 자꾸 오류가 편집된다. 미국, 일본, 중국과 같은 관행을 맞추려면 '도당 소재지', '인민위원회 소재지'를 중심지로 쓰는 개념은 오류다.[5] 이 '사리원 불고기'의 유래는 사리원 출신 실향민인 구분임 씨(1916~1980)가 당뇨병으로 고생하는 남편을 위하여 개발한 것이라 한다. 즉, 남한에서 만든 것이고, 탈북자에 의하면 실제 사리원은 불고기로 유명한 지역은 아니라고 한다.[6] 구글맵에서는 경암산이 정방산으로 잘못 표기되어 있다.[7] 전쟁 와중이라 관련 기록이 부족해서 누구를 사리원 시장으로 보냈는지가 안 나온다. 다만 중앙일보2019년 소설가 김진명인터뷰한 기사에 따르면 당시 임시로 파견된 사리원 시장이 김진명 작가의 조부였다고 한다.[8] 조선 시대 중수는 했으나 양식은 거의 그대로 계승되었다고 한다.[9] 성불사는 광복 직후 행정구역상으로는 황주군 주남면 정방리, 북한 행정구역상으로는 봉산군 정방리에 위치한다.[10] 현재의 건물은 6.25 당시 파괴된 것을 복원한 것이다[11] 2010년대 후반에는 북한 농촌 지역에서는 흔한 현상으로 보인다.[12] 강원도 도소재지인 원산은 도내 주요 지역들과 평양을 이어주지 못하는 위치다. 이런 입지가 대일무역 중단 이후 원산의 몰락을 가속화시킨 요인 중 하나이기도 하다.[13] 북한의 북쪽에서는 한동안 널리 생산되지 못한 술이다.[14] 한반도 이북 지역은 남한보다 추운 지역이라는 상식을 가지고 들어가는 게 정신건강에 이롭다. 게다가 위치를 보더라도 사리원은 평양 바로 아래에 위치해 있다. 바로 냉대 기후 지대에 속해있다는 셈이다. 당연히 추울 수 밖에 없는 지역이다.[15] 게다가 평양과 매우 가깝기 때문에 평양의 위성 도시로서도 그 위력이 대단할 것이다. 평양의 거주민들 가운데 일부가 이곳으로 이주할 가능성도 높고, 요충지라는 이점을 십분 살려서 관련 사업 지점에서 근무할 이들의 주거 지역으로의 이점을 누리게 될 것이다.[16] 아직 남북이 활발히 소통하던 2000년대 중반까지 북한에 다녀온 사람들은, 북한은 도로가 산을 만나는 경우가 아니면 완전히 직선으로 뻗어 있었다고 한다. 이는 모든 토지가 국가 소유이고 반항하다가 코렁탕 수준이 아니라 끔살 당하기 십상인 동네여서, 그 땅에 집이 있건 논밭이 있건 그냥 헐고 지나가 버리기 때문이다. 이는 1960~70년대 한국, 1980, 90년대 중국에서도 비슷했다. 물론 지금은 알박기가 횡행한다.[17] 멀리도 말고 당장 통일 직후 새로 개설해야 하는 북한 전국의 도로망과 철도망을 생각해보면 사리원의 중요성은 지나치다고 할 수도 없다. 북한의 이북 지역과 도서 지역을 연결하는 거점으로서와 아울러 후술한 바와 같이 중간기착 지점 역할까지 담당하는 지리적 특성상 사리원은 통일 직후 개성시 다음으로 통일 한국 정부가 최우선으로 개발할 지역이 된다.[18] 다만 이쪽은 전통적으로 읍내가 유명한 지역명은 아니다.[19] 이쪽은 도농 통합이고 뭐고 하기 전에 세종시가 발족되었다.[20] 마찬가지로 옆 동네 송림시도농통합 되어 송림은 동 이름이나 역사적 지명으로만 남고 황주으로 통합될 가능성이 있다.[21] 박찬민 아나운서의 셋째 딸.[22] 2008년 7월 15일생. 현재 나이 15세. 2022년 기준 중학교 2학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