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업(후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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司馬鄴
(? ~ 909년)

오대십국시대 후량의 인물. 자는 표인(表仁). 사마인(司馬諲)의 아들.

우무위대장군(左武衛大將軍) 사마인의 아들로 가문의 명망이 높았기 때문에 사마업은 재물을 주어 관직에 오를 수 있었다. 천복(天復)[1] 초에 한건(韓建)이 사마업을 등용했고, 사마업이 거주하던 의 절도유후(節度留後)에 임명되었다. 이후 한건은 판관(判官)을 보내 사마업을 보내 당나라의 봉상부(鳳翔府)[2]를 맡겼는데 주전충이 군대를 이끌고 입관(入關) 했는데, 주전충의 선봉대가 좌빙익(左馮翊)에 이르자 사마업은 인장과 열쇠를 들고 주전충의 선봉대를 맞이했다. 주전충은 한건이 주둔하고 있는 화주(華州)를 포위했는데 사마업을 시켜 한건을 불러다 타이르자 한건은 성문을 열고 투항했다.

907년, 주천충이 후량을 건국하자 사마업은 우무위상장군(右武衛上將軍)의 벼슬을 받았고, 909년에는 양절(兩浙)에 사자로 갔다.

사마업은 형주(荊州), 양주(襄州), 담주(潭州), 계주(桂州)를 지나 항주(杭州)와 월주(越州)에 도달했다. 사마업은 복명(復命)[3]을 하기 위해 배를 타고 동해로 나가 등주와 내주에 이르렀다. 당시 양주(揚州)에는 적의 군사와 선박이 많았기에 반드시 돛을 높이 하고 멀리 바다 깊숙히 돌아가야 했다. 이 때문에 오는 길에 손해 보는 것이 많았다.

사마업은 바다에서 해를 넘겼는데 가던 중 사마업과 일행들이 타고 있던 배가 표류되어 탐라국(耽羅國)까지 갔고 이런 상황에서 사마업은 일행들과 함께 탐라에서 생을 마감했다. 후에 조정에서 조서를 내려 사마업을 사도(司徒)로 증직되었다.

인지도가 동명의 이름을 가진 인물에게 밀리고, 한자까지 같은데다 중국어 위키백과에도 개별 문서가 개설 되어있지 않아 그의 기록은 구오대사 양서 사마업전, 자치통감에서 그의 이름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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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당소종이 901년 부터 904년 까지 사용하던 연호다.[2] 당나라 때 설치된 지역이다.[3] 명령 받은 일을 처리하고 그 일을 보고 하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