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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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3. 기타



1. 개요[편집]


司馬楚之

390~464, 자는 덕수(德秀). 사마팔달이자 사마의의 동생인 사마규의 8대손이며 북위의 낭야왕이다. 아버지는 사마영기(司馬榮期)이다.


2. 생애[편집]


동진의 황족이지만 동진이 멸망하여 북위로 망명하였다. 본래 양익이주자사(梁益二州刺史) 사마영기의 아들로 태어나 익주에서 성장했지만 아버지가 죽자 단양으로 돌아간다.

당시 유유유송을 건국하고 동진사마씨 황족들을 모두 숙청하자 살아남은 사마씨들은 달아났고 무리를 모아 복수할 기회를 노렸는데 이들 가운데 사마초지가 있었다. 이후 사마초지는 만명이 넘는 세력을 구축해 유유에게 복수하려 했다. 유유는 자객 여겸(欐謙)을 보내지만 사마초지는 자객에게까지 잘해주어 자객이 암살개획을 자백하고 사마초지를 모시게 된다.

이후 북위 명원제 말에 위나라에 귀순하여 형주자사에 임명되었다. 태무제 초에 북위의 공주와 결혼하며 낭야왕(琅邪王)에 봉해졌다. 또한 북위로부터 사지절 시중 양익령삼주제군사 호서계교위 진서대장군 개부의동삼사 양주자사(使持節・侍中・都督梁益寧三州諸軍事・護西戎校尉・鎮西大将軍・開府儀同三司・揚州刺史)를 임명받아 수춘에 주둔했다.

이후 태무제가 북벌할때 보급을 맡았으며 태무제 신가 연간에 남쪽으로 정벌군을 좇아왔다가 활대(滑臺)에서 송나라 군대를 대패시켰고, 나중에 다시 양주(凉州)로 정벌 왔다가 구지(仇池)에서 송나라 군대에 승리를 거두었다. 군공(軍功)으로 관직이 시중(侍中)까지 올랐고, 중진대장(中鎭大將)과 삭주자사(朔州刺史)를 역임했다.


3. 기타[편집]


청렴검약함으로 유명했다고 한다. 아들로는 사마보윤(司馬宝胤), 사마금룡(司馬金龍), 사마약(司馬躍)이 있으며 사마금룡(?~484)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시중진서대장군, 운중진대장군, 삭주자사에 이르렀다. 그의 묘인 사마금룡묘가 후대 발굴된바 있다.

북사위서에 그의 기록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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