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보이아 공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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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보이아 공국
Ducato di Savoia

파일:사보이아 공국 국기.svg
파일:사보이아 공국 문장.svg
국기
국장
FERT, FERT, FERT[1]
상징
국가
사보이아 행진곡
(Marzo di Savoia)
위치

파일:DuchyofSavoy1600.png

1416년 ~ 1847년
역사
성립 이전
왕정 선언 이후
사보이아 백국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
지리
위치
이탈리아 북서부
수도
샹베리(1416~1563)
토리노(1563~1798, 1814~1847)
칼리아리(1798~1814)
인문환경
언어
라틴어[2], 이탈리아어, 프랑스어
종교
로마 가톨릭
민족
이탈리아인
정치
정치체제
전제군주제
국가원수
공작
국성
사보이아 가문
주요 공작
아메데오 8세(1416~1440)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1553~1580)
카를로 에마누엘레 1세(1580~1630)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1675~1730)

언어별 명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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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어
Ducato di Savoia
라틴어
Ducatus Sabaudiae
피에몬테어
Ducà 'd Savòja
프랑코프로방스어
Ducato di Savouè
프랑스어
Duché de Savoie
독일어
Herzogtum Savoyen
스페인어
Ducado de Saboya
영어
Duchy of Savoy
에스페란토
Duklando Savojo
중국어
萨伏依公国
일본어
サヴォイア公国


1. 개요
2. 역사
3. 역대 군주



1. 개요[편집]


프랑스 남동부 사부아이탈리아 반도 북서부 피에몬테, 발레다오스타에 위치했던 공국이다. 프랑스 왕국부르봉 왕조오스트리아스페인 합스부르크 왕조 간의 대립을 교묘히 이용하여 영토를 넓혔다.

훗날 사보이아 가문사르데냐 왕국을 선언하면서 본거지였던 사보이아 공국은 이탈리아 통일의 기반이 되었다.


2. 역사[편집]


대립교황 펠릭스 5세로도 유명한 아메데오 8세(Amedeo VIII di Savoia)가 1416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지기스문트로부터 공작으로 서임되면서 사보이아 백국공국으로 승격되었다. 사보이아 공국은 신성 로마 제국이탈리아 왕국이 아닌 라인강 상류 관구(Oberrheinischer Reichskreis)에 속했으며 제국의회에 표결을 할 권리가 부여되었으나 이 권한을 실제로 사용하지는 않았다.

아메데오 8세는 영토를 확장하는 한편, 사보이아 가문의 마지막 방계였던 피에몬테의 루도비코[3]가 사망하자 피에몬테를 사보이아 공국으로 재합병시킨 후 1424년 피에몬테 공후국을 창설하여 가문의 계승자에게 피에몬테 공(Principe di Piemonte)을 명예 칭호로 주어 관리를 맡겼다. 이외에도 그는 여러 칙령을 발표하여 행정을 개혁하였고 자코모 자케리오(Giacomo Jaquerio)와 같은 예술가를 초빙하여 문화 부흥을 장려하였다.

하지만 아메데오 8세의 무기력한 후계자 루도비코의 뒤를 이어 즉위한 아메데오 9세베르첼리(Vercelli)의 빈민들에게 복지를 베풀고 교회에만 헌신한 나머지 정치적으로는 부인인 프랑스의 욜랑드에게 휘둘려 무능하기 짝이 없었다. 그의 뒤를 이어 필리베르토 1세, 카를로 1세, 카를로 조반니 아메데오 같은 어린 공작들이 연달아 즉위하고 일찍 사망하면서 사보이아 공국은 정치적으로 혼란을 겪었다.

1496년, 카를로 조반니 아메데오가 불과 7세의 어린 나이에 침대에서 떨어져 사망하자 카를로 조반니 아메데오의 종조부 필리포 2세가 공국을 승계받았다. 하지만 필리포 2세는 법적 계승자가 아닌 가장 가까운 남계 후손의 자격으로 상속한 터라 정통성을 두고 여러 세력이 시비를 걸어와 정치적인 위기는 계속되었다. 정통성 시비를 차단하기 위하여 필리포 2세는 죽기 전 후계자 필리베르토 2세를 카를로 1세의 딸 사보이아의 이올란다와 결혼시켜 정통성을 강화하고자 했지만 이올란다는 자녀를 낳지 못한 채 일찍 사망했다. 그 사이 이탈리아를 호시탐탐 노리던 이웃의 프랑스는 루이 12세나폴리 왕국밀라노 공국을 거의 정복하였고 사보이아 공국은 프랑스에게 사방으로 포위당한 형국이 되었다.

1504년, 필리베르토 2세가 사망하자 이복 동생이 카를로 2세로 즉위했으나 계속된 정치적인 혼란을 수습하기에는 유약한 통치자였다. 밀라노 공국을 영구적으로 합병할 기회를 노리던 프랑수아 1세는 밀라노 공작 프란체스코 2세 스포르차가 후사 없이 사망하자 다시 이탈리아 전쟁을 일으켰고, 1536년에 사보이아 공국을 침공하여 밀라노 공략의 전초 기지로 삼으려 했다. 수도 샹베리와 핵심도시 토리노가 순식간에 함락되었고, 카를로 2세는 베르첼리에서 마지막으로 반격을 시도했으나 이마저도 실패로 끝났다. 점령당한 사보이아 공국 영토에는 프랑스 행정관들이 파견되어 프랑스의 간접 통치가 실시되었다.

사실상 공국을 빼앗긴 카를로 2세는 발레다오스타, 니차, 쿠네오, 베르첼리만 유지한 채 겨우 연명하다 1553년, 베르첼리에서 사망했다. 사보이아 공국은 카를로 2세의 외아들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가 물려받았으나, 프랑스가 사보이아 공국을 점령한 이상 영지 없이 유명무실한 작위만 달고 있는 신세에 불과했다. 이를 타파하기 위해 그는 사촌[4]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에게 몸을 의탁하였고, 스페인령 네덜란드 총독으로 부임하여 생캉탱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결과, 1559년 이탈리아 전쟁을 끝낸 카토캉브레지 조약에 따라 사보이아 공국을 돌려받았다.

공국을 돌려받은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는 생존을 위해 스페인과 프랑스 사이에서 줄타기 외교를 구사했으며, 그 일환으로 프랑스 왕 앙리 2세의 누이 마르그리트와 결혼하면서 프랑스와의 사이를 돈독히 하였다. 하지만 동시에 프랑스를 믿을 수 없는 이웃이라고 생각하여 1563년, 프랑스의 침입에 노출된 샹베리에서 알프스 산맥 뒤편에 있어 비교적 방어에 용이한 토리노로 천도했다. 그리고 토리노 천도 2년 전인 1561년에 공국의 공용어라틴어에서 이탈리아어로 바꾸면서 지금까지 프랑스와 이탈리아 사이의 애매한 정체성을 가졌던 사보이아 공국이 이탈리아 역사에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발판을 마련했다.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의 뒤를 이은 카를로 에마누엘레 1세프랑스, 스페인과 번갈아 동맹을 맺어가며 몬페라토 변경백국, 제노바 공화국을 상대로 확장을 하려 시도했지만 성공적이지 못했다.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살루초 변경백국은 손에 넣었으나 이 과정에서 과거 조상들이 손에 넣었던 사부아 인근의 브레스(Bress) 지역을 프랑스에게 양도했다.

카를로 에마누엘레 1세의 팽창 정책은 프랑스와 스페인 관계에서 불안정성을 불러왔다. 비토리오 아메데오 1세 치세에는 30년 전쟁의 연장으로 프랑스와 스페인군이 사보이아 공국 영내에서 교전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프랑스는 론 강 유역의 토리노와 이탈리아 반도로 향하는 전략적 요충지였던 피네롤로를 빼앗았고, 사보이아 공국은 이곳을 되찾기 위해 수 십년을 허비했다.

프란체스코 자친토는 어린 나이에 열병에 걸려 일찍 사망했고, 동생 카를로 에마누엘레 2세가 역시 어린 나이에 즉위했다. 이 때문에 어머니인 프랑스의 크리스틴 마리가 섭정을 했으나 프랑스의 영향력이 강대해질 것을 우려한 카를로 에마누엘레 2세의 숙부 마우리치오 추기경과 사보이아-카리냐노 공작 토마소 프란체스코[5]가 피에몬테 내전을 일으켰다. 이 내전은 1642년에야 끝이 났다. 카를로 에마누엘레 2세는 1655년 발도파를 잔혹하게 진압하여 국제적인 비난을 받기도 했으나 니차(Nizza)를 발전시키고 알프스 산맥을 통해 프랑스로 갈 수 있는 도로를 건설하여 상공업 진흥에 힘썼다.

1700년,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이 일어나자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는 프랑스의 편을 들어 참전했으나 사부아 공자 외젠[6]이 이끄는 오스트리아 군대가 밀라노에 도착하자 오스트리아의 편에 섰다. 이에 프랑스군이 니차를 함락시켰고 이어서 토리노를 포위하였지만, 오스트리아의 도움을 받아 프랑스군을 물리쳤다. 1713년 위트레흐트 조약이 체결되어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은 끝났고, 사보이아 공국은 시칠리아 왕국을 보상으로 받았다.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는 시칠리아 왕을 자처하였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사국 동맹 전쟁이 발발하여 스페인에게 시칠리아를 빼앗겼다. 오스트리아의 도움을 받아 시칠리아를 탈환하기는 했으나 카를 6세의 강요를 이기지 못해 시칠리아를 반강제적으로 내주고 대신 사르데냐를 얻었다. 이후 사보이아 왕가는 사르데냐 왕을 칭하였다.

이후 사보이아 공국은 1847년 사르데냐 국왕 카를로 알베르토가 사보이아와 사르데냐를 하나의 영토로 완전히 통합시킬 때까지 계속 유지되었다. 하지만 편의상 사르데냐 왕국으로 묶어 부르는 경우가 많다.

3. 역대 군주[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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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여러가지 의미가 있으나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다.[2] 1561년까지.[3] Ludovico di Savoia-Acaia 1364~1418. 아메데오 8세에게는 매부가 되며, 토리노 대학교의 설립자이다.[4]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 공작의 어머니인 포르투갈의 베아트리즈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의 황후 포르투갈의 이자벨은 친자매 사이였다.[5] 훗날 카를로 펠리체가 후사 없이 사망하고 사르데냐 왕으로 즉위한 카를로 알베르토의 조상이다. 더불어 사부아 공자 외젠의 할아버지이기도 하다.[6]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와 사부아 공자 외젠은 6촌 관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