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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플랜테저넷

웨식스, 노르망디 공작 윌리엄1세


이름
윌리엄 플랜테저넷
(William Plantagenet)
별칭
사자 (Le Lion / The Lion)
지위
햄프셔 백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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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위
1072년 2월 23일 ~ 1103년 7월 25일
전임
해럴드 2세
후임
윌리엄 2세

웨식스 공작 파일:웨식스 공작 문장.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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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위
1075년 9월 5일 ~ 1103년 7월 25일
전임
애설스탠[1]
후임
윌리엄 2세

노르망디 공작 파일:800px-Arms_of_William_the_Conqueror_(1066-1087).svg.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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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위
1097년 12월 18일 ~ 1103년 7월 25일
전임
로베르 3세
후임
리처드 1세

출생
1041년 7월 30일
잉글랜드 왕국 글로스터 혹은 웨일즈 귀네드[1]
사망
1103년 7월 25일 (향년 61세)
잉글랜드 왕국 웨식스 윈체스터
부친
불명[2]
모친
불명[3]
배우자
파일:HouseOfWessex.png 크리스티나 에아드워드스도흐토르 (1067년 결혼 / 1103년 사망)
자녀
슬하 3남 2녀
윌리엄 2세, 리처드[4], 존, 세실리아, 시빌라

1. 개요
2. 생애
2.1. 유년기
2.2. 영지찬탈, 그리고 비상
2.3. 제1차 십자군
2.4. 십자군, 그 이후
2.5. 1차 노르망디 침공
2.6. 왕가와의 갈등
2.7. 2차 노르망디 침공
2.8. 말년
3. 여담



1. 개요[편집]


윌리엄 플랜테저넷은 잉글랜드, 프랑스 역사 상 깊은 관계가 있는 명문가 플랜테저넷가문의 시조이다.
1066년 윌리엄 1세의 잉글랜드 정복전 때 솔즈버리(현재의 윌트셔 지방)를 영주 베오트릭[5]으로부터 찬탈하여 솔즈버리 영주가 되었으며 이후 윌리엄 1세에게 충성맹세 후 얻은 교전권과[7] 솔즈버리를 기반으로 햄프셔, 도싯, 서머싯, 와이트섬 등을 장악해 웨식스 공작이 되었으며 말년에는 노르망디지역까지 얻어 웨식스와 노르망디 공작이 되었다.

2. 생애[편집]



2.1. 유년기[편집]


그의 유년기는 행방이 알려지지 않아 추측만 할 뿐 정확한 사실은 알려지지 않았다. 당대 역사학자들은 그의 2대 위의 조상이 솔즈버리에 정착한 귀족출신이라는 것을 추측한 기록만 존재한다. 현대로 와서는 그의 혈통 역시 밝혀져 솔즈버리로 정착했을 당시에도 꽤 규모있는 군사세력이었을 가능성도 제시되고 있다.

2.2. 영지찬탈, 그리고 비상[편집]


1066년 윌리엄 1세의 침공으로 혼란스러웠던 시기를 틈타 글로스터 가문의 영지였던 솔즈버리를 자신의 휘하 기사들과 찬탈하여 윌트셔 영주가 되었다. 이후 윌리엄은 윌리엄 1세에게 충성을 맹세 후 얻게 된 교전권과 1070년 카노사 여공작 토스카나의 마틸다와 자식 간 약혼 동맹을 결성하여 1072년 햄프셔, 1074년 와이트섬, 1075년 도싯을 차례로 점령하고 잉글랜드 왕국으로부터 웨식스 공작에 봉해졌으며, 이후 1083년 서머싯 영주 리차드와의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웨식스 지방을 완전히 평정하였다. 이 때와 1차 십자군 시기의 윌리엄은 말그대로 파죽지세였다.

2.3. 제1차 십자군[편집]


1080년 1차 십자군이 발발하자 윌리엄은 예루살렘을 향한 십자군에 서약한다. 1200여명의 군사를 데리고 간 윌리엄은 아크레에 상륙 하여 아크레를 점령 후 예루살렘에서 농성을 준비하던 이슬람토후국 연합군 1만 5천여명을 상대로 대승하고 곧장 예루살렘을 점령하는 활약상을 펼쳤으며 그 이후 윌리엄은 '사자'라는 칭호로 영주들 사이에서 유명해졌다. 1082년 2년간의 성전이 종료되고 엄청난 활약을 펼친 윌리엄은 당시 교황 알렉산더 2세에게 엄청난 재물을 얻게 되고 이때문에 그의 영지인 웨식스지방이 그의 재위 기간동안 런던보다 부유해졌다. 또한 포로로 잡힌 이슬람교도들을 개종을 조건으로 모두 석방하여 교황 알렉산더 2세에게 자비의 귀감이라며 찬사를 받았다.

2.4. 십자군, 그 이후[편집]


십자군에서 돌아온 윌리엄은 주교이면서 온갖 비리를 저지르고 다니는 주교 에아둘프를 파문시킬 것을 촉구하고 자신의 영지에 그간 무질서하게 난립되었던 건축물을 정리해가면서 영지의 도시화를 꾀하는 등 내정과 영지민들에게 집중하는 모습을 보였다.[6]1076년 카노사 여공작 토스카나의 마틸다의 사후 유명무실해졌던 동맹은 이 시기에 약혼파기로 인해 완전히 깨졌으며 장자였던 윌리엄은 이후 윌리엄 1세의 손녀 캐서린과 약혼하며 잉글랜드 왕국 내에 자신의 입지를 공고히 하였다.

2.5. 1차 노르망디 침공[편집]


1088년 윌리엄은 딸 세실리아와 스웨던 왕국 후계자 콜 에릭손과 약혼하여 잉글랜드 왕국과 스웨덴 왕국 2왕국을 동시에 동맹을 유지하게 되었다. 그런 그에게 노르망디는 잉글랜드 너머로 진출하려는 그에게 당장의 프랑스왕국을 자극하지않고 대륙에 진출할 수 있는 최고의 영지였다. 당시 공작인 로베르2세는 윌리엄 1세에게 반기를 들다가 영지 하나 없이 지내던 중 1087년 윌리엄 1세가 사망 전 유언으로 노르망디 공작 작위를 수여받아 노르망디 영주들의 지지기반이 약했으며 영주들은 언제든지 로베르2세에게 반기를 들 생각을 하고 있었다.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윌리엄은 1089년 6월 로베르 2세의 자해로 인한 사망으로 로베르 3세가 공작으로 올랐을 때 노르망디 침공을 개시했다. 2살이던 로베르 3세는 정무를 보지 못하였고 그의 부모인 애미스는 평민출신이어서 노르망디 귀족들의 지지세력이 없었다. 윌리엄은 그 점을 노렸다.

그 해 가을, 윌리엄은 노르망디 루앙 지역을 침공한다.
윌리엄은 외지방에 상륙하여 공성전을 준비하였다. 하지만 외지방은 윌리엄의 생각대로 쉽게 점령되지 않았다. 윌리엄은 외지방 점령에 무려 1년 반을 소모하였으며 조금만 더 지체되었다면 루앙에서의 지원군으로 노르망디를 확보하는 계획에 문제가 생겼을 것이다. 하지만 윌리엄은 스웨덴 왕국에 지원군을 요청하여 이 문제를 해결하였다. 스웨덴 왕국은 같은 시기 프랑스 왕국의 플랑드르지방을 공략하려는 신성 로마 제국을 프랑스 왕국과 방어하고 있었으며 신성 로마 제국이 후퇴한 이후 곧장 노르망디 베이유에 상륙하여 지역을 점령해갔다. 이런 상황으로 인해 노르망디 공작 섭정 애미스는 판단 착오로 한 곳을 집중하여 막는 것이 아닌 스웨덴 왕국군을 방어하려 하다가 되려 패퇴해버렸으며 그 결과 윌리엄은 외지방을 완전 점령 후 루앙도 점령하는데 성공한다.

로베르 3세는 부모이자 섭정인 애미스와 함께 점령 직전 메인으로 도망쳤고 노르망디 일대 영주들은 어린 공작인 로베르 3세가 아닌 윌리엄에게 충성 맹세를 하였다.

2.6. 왕가와의 갈등[편집]


윌리엄 1세에게 충성을 맹세하였던 그이지만, 윌리엄 1세의 삼남 윌리엄 2세가 왕위에 오르자 왕실의 권력을 낮추는 데에 동의하는 파벌에 합류하였다. 1091년 루앙 점령 후 1년 전부터 시작되었던 데번 지역의 반란을 쉽사리 진압하지 못하자 윌리엄은 요크, 랭커스터 공작 모르카르와 콘월백작 제프리, 그리고 켄트지방 백작들과 합세하여 영주들의 권리를 보장하기를 요구한다. 당연하게도 윌리엄 2세는 이런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잉글랜드 내부에서 전쟁이 일어난다. 윌리엄은 자신의 바로 옆 지방인 서리를 점령하고 곧장 런던으로 향하며, 스웨덴 왕국에게 다시 도움의 요청을 보냈다.

1092년 10월 21일 런던 남부 킹스턴에 스웨덴 왕국군이 상륙하였고 상륙 이후 3시간 뒤에 벌어진 전투는 윌리엄의 승리로 끝이 났다.
이후 반 년간 윌리엄과 함께한 영주들, 스웨덴 왕국군은 런던과 켄트, 버크셔, 옥스퍼드셔 일대를 점령하여 윌리엄 2세의 항복을 받아냈다. 항복 이후 윌리엄은 윌리엄 2세에게 영주들의 권리를 보장함과 동시에 조세와 징집병을 받지 않는 조약을 받아 냈다. 훗날 이 조약은 '버킹엄 조약'[7]으로 알려지게 된다.

2.7. 2차 노르망디 침공[편집]


1096년 7월 윌리엄은 노르망디 공작위를 차지하기 위해 다시 한번 노르망디로 출정한다.
윌리엄은 이전 노르망디에서 있었던 일을 상기해 외지방 대신 베이유에 상륙하여 로베르 3세의 성은 리시유 성으로 진격했다.
로베르 3세는 노르망디 지역 유력 영주 아브랑슈 백작인 휴에게 지휘권을 일임하지만 일전의 충성 맹세를 윌리엄에게 한 휴 백작은 윌리엄이 노르망디에 상륙하자 전투를 제대로 치루지 않고 맞붙다가 후퇴하는 등 소극적인 행위를 지속했다.

그 결과 윌리엄은 별다른 공세없이 리시유에 도착하였으며 1097년 12월 18일 리시유를 점령한다.
로베르 3세는 리시유성에서 포로로 잡혀 윌리엄에게 노르망디 공작작위를 양도하게 되고 메인으로 돌아가게 된다.
윌리엄은 1098년 알랑송 지역을 소유하고 있던 몽고메리 가문에게서도 알랑송 지역을 탈환하여 노르망디 전 지역을 소유하게 되었다.

윌리엄은 노르망디 영지를 차남 리처드에게 줄 생각이었으나 리처드는 노르망디 침공 이전 나갔던 사냥에서 부상당해 그만 사망해 버렸고 노르망디 점령 후 그 땅은 삼남 존에게 줄 생각으로 존을 루앙백작에 봉했다.

2.8. 말년[편집]


1102년 어느덧 60세가 넘은 윌리엄은 자신의 영지수도인 윈체스터에 군사학교[8] 설립하여 기사양성과 전술학 발전에 신경썼다.

1103년 5월 9일 아내 크리스티나가 사망하자 그에 따르듯 1년도 채 안되어 1103년 7월 25일 윌리엄 역시 사망한다.
중세 초, 한미했던 가문을 단숨에 왕국의 유력 공작으로 성장시키며 자신의 이름과 가문을 널리 알렸던 전설적인 인물이었던 그는 윈체스터 성당에 아내 크리스티나 옆에 뭍혔다.

사망 후 웨식스 공작위는 장남 윌리엄이, 노르망디 공작위는 삼남 존이 상속받았으며, 장녀 세실리아는 스웨덴 왕국의 여왕, 아끼던 막내딸 시빌라는 밤버러 가문의 미하일[9]과 연애결혼에 성공하여 알랑송 백작부인이 되었다.


3. 여담[편집]


그의 조상의 기록은 유실되어 확실하지 않지만 웨일즈 귀네드 지역의 왕이자 웨일즈를 최초로 통일할 뻔 했던 로드리 마우르의 장자 아나라우드 압 로드리의 후손의 사생아로 태어나 근근히 삶을 살아가던 왕가의 사생아 출신으로 추정되며 그의 아내인 크리스티나는 알프레드 대왕의 직계 후손이므로 비공식적으론 두 왕가의 피를 이었으며 현재 영국왕실에서도 그의 혈통이 섞여있다.

아내 크리스티나와는 금실이 좋아 평생동안 사생아뿐 아니라 그 흔한 바람도 없었으며 유산하거나 사고로 죽은 자식을 포함해 총 3남 2녀의 자식을 가졌다.

그의 외모는 금발에 청안을 가진 휜칠한 미남으로 표현되고 있으며 머리 밑의 털은 어두운 금색이었다고 한다. 그의 명성은 유럽대륙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했다고 한다. 일부 지역에서는 주군이었던 윌리엄 1세보다 더 유명했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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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윌리엄의 출생지는 현재도 확정되어있지 않았으며 잉글랜드 윈체스터 지역과 웨일즈 귀네드 지역 두 곳으로 역사학자들은 추정하고 있다.[2] 기록이 유실되었다.[3] 기록이 유실되었다.[4] 1093년 11월 13일 사냥 중 사망하였다.[5] 베오트릭은 잉글랜드 정복전 당시 해럴드 2세의 세력에 가담하여 1069년 영지를 몰수당하고 이후 역사상에서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7] 잉글랜드 정복 이후 윌리엄 1세는 잉글랜드 지방 각지에 노르만 귀족들을 배치하고 교전을 금지하였다.[6] 현대의 윈체스터에서도 윌리엄이 행했던 도시화 흔적을 엿볼수 있으며 도로정비 등 여러 면에서 과거의 흔적이 많이 보인다.[7] 1093년 4월 27일 윌리엄 2세가 영주들의 권리 및 조세 징수, 병사 징집을 일체 하지 않는다는 조약이다.[8] 현대의 영국 왕립 육군학교의 전신이 바로 윌리엄이 세운 군사학교이다. 윌리엄 사후 플랜테저넷가문과 연관된 인물들, 혹은 귀족만 입학할 수 있었지만, 19세기 빅토리아 여왕 시기부터 전국의 인재들이 신분을 막론하고 입학할 수 있게 되었다. 역사로만 따지면 무려 900년이 넘는 역사이다.[9] 윌리엄은 미하일을 좋게 보았고 막내딸이 영지없는 귀족에게 시집보낼 수 없다며 알랑송 백작에 봉했다. 이후 미하일과 시빌라의 후손은 앙주지역과 프랑스 왕국과의 혼인 관계에도 엮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