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danny0602

덤프버전 : r20170327

서로를 이해하며 나아가 세상을 이해해 무언가 깨달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편집[편집]


살아 숨쉬는 글을 만드는 것을 좋아합니다. 수학 공리와 이로부터 만들어진 이론 체계를 수립하고 결과를 체계화, 연역화시킨 결과는 아름답습니다. 대칭미와 절제미, 숭고미까지 느껴집니다. 중요한 건 그것에 입문하는 과정, 그 체계에 난입하게 된 과정, 그 체계를 만드는 과정은 절대 논리와 객관의 결과물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 순간에는 온갖 직관과 감, 설명할 수 없으며 설명할 생각도 못한 감정들이 꼬여서 둥실 떠오르게 만듭니다. 그게 최초의 시작입니다. 그런 과정 없이 아무것도 모르던 사람이 새로운 것을 알 수는 없습니다. 어린이의 덧셈과 뺄셈, 비례식 등에서 부닥치는 난관은 가소로울 지 모르지만 우리의 대부분이 한번쯤 대면한 감정입니다.

이론은 합리적이게 쓰여야 합니다. 그게 위키백과의 지향입니다. 하지만 이 곳의 글은 이해 가능하도록 쓰이는 것이 먼저입니다. 문화를 공유하고 자신이 알고 있던 것을 남에게 더 다가가기 쉽도록 만드는 것이 우선입니다. 지식만 전달해서는 생명력이 않습니다. 그 지식의 모티브 역시 제공해야만 지식이 유지되고 존중되고 새로 써지는 불길이 될 수 있습니다. 남이 이것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애썼던 지식의 공감대, 새로운 것을 생각하면서 너무나도 신기해하던 그 감정들, 그런 모티브들 말입니다. 결국 지식이란 보석을 세공하려면 그 보석을 정제하는 세공사 역시 훈련되어야만 합니다.


2. 객관성과 주관성[편집]


주관성은 나의 생각, 객관성은 모두의 생각? 객관성 같은 건 사실 없습니다. 객관에 다가가고자 끊임없이 노력하는 상호 주관이 있습니다. 이 이상은 그저 이상입니다.

세상에는 생각이 다른 사람들이 생각보다 너무, 너무 많습니다. 다른 생각들은 동의와 반대로 대치하는 경우 역시 많지만, 아예 말도 통하지 않을 때가 더 많습니다. 당연하게도 그 말도 통하지 않는 생각과는 말해볼 기회도 없습니다. 모든 客이 觀하지 않은 상황 - 70억이 살고 있는 지구에선 이젠 아예 불가능한 상황 - 에서 객관성을 전제하는 것은 비약입니다. 그것을 70억에 비해서 극소수인 지식과 생각을 갖춘 사람들이 정당한 과정을 통해 합리적이고 단순해서 더 강력한 방법으로 '객관'을 만들어왔습니다. 깜짝 놀랄 만한 정확성과 쓸모는 너무나 탁월해 더 많은 사람이 이 생각을 배워 이해하게 하고, 더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게 해 점점 이 과정의 끝이 보이는 것 같았습니다.

생각이 맞부딪힐수록 이 정확성과 쓸모라고 생각했던 건 우리 눈이 정확하지 않았기 때문인 경우를 점점 보게 되었습니다. 하나하나 삐그덕거리는 이론과 현실이 늘어만 가고 더 큰 걸 포함시킬 수록 더 큰 문제가 생겨 사소한 문제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점점 근본적인 문제로 바뀌어 보이기 시작했죠. 그런 사람들이 나는 반댈세 하고 다른 생각을 가져오고, 그 방향 역시 점점 종잡을 수 없게 되어버렸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인정하지 않았죠. 그 후 많은 이론 체계들이 몇번의 파국을 맞습니다. 많은 걸 고쳤죠. 도량은 더욱 커졌습니다. 생각은 더욱 깊어지고, 더 잘 싸우게 되었습니다. 다른 의견과의 조율을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잊지 않았죠. 하지만 그건 이런 언어를 아는 사람들만의 이야기입니다. 아예 다른 소리와 형태를 가진 언어끼리는 소통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언어들의 대부분엔 다른 언어가 존재한다는 말을 만들 수 없었습니다. 이게 현재의 우리입니다.

적잖이 하나의 의견만을 허용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특히 수학자연과학. 라부아지에프리스틀리의 달랐던 이론은 사실상 20세기까지는 엄밀한 증명이 이루어질 수 없었지만, 비합리적인 방법으로 라부아지에의 이론의 승리가 되었습니다. 프리스틀리의 이론이 모두 틀린 것도 아니었고 라부아지에의 이론이 모두 맞는 것도 아니였습니다. 이것은 차후 모두 고쳐졌지만, 이를 고치기 위해 쓰이던 언어는 라부아지에의 것이었습니다. 이미 패배했던 프리스틀리의 언어는 잊혀진 후였습니다.

주관성은 언어입니다. 언어의 뜻 뿐만이 아니라, 소리, 표현방식, 뉘앙스 등에 따라 생각을 표현하기 위해서 단 하나의 방식을 골라야만 하는 언어입니다. 어떤 종류의 말을 쓰는지에 따라서 이미 객관성은 깨집니다. 하나를 고르면 다른 하나를 고를 수 없다는 점에서 이미, 한국인이 서로 말할 때 존댓말과 반말을 구분하지만 영어에서의 존대와 일상어는 특수용법과 일반용법의 개념이듯이. 왼쪽, 오른쪽이라는 단어가 없는 언어에서는 동서남북으로 모든 방향을 표현할 수 있지만, 죽을때까지 상대적인 방향이란 개념을 알 수 없듯이.

(편집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