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토 마코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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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5대 조선총독


'''{{{#c3c965 일본 제국 제30대 내각총리대신
사이토 마코토
斎藤実[1] | Saitō Makoto
'''

파일:Makoto_Saito_2.jpg

출생
1858년 10월 27일
무츠국 이사와군 시오가마촌
(現 이와테현 오슈시 미즈사와)
사망
1936년 2월 26일 (향년 77세)
도쿄부 도쿄시 요츠야구
(現 도쿄도 신주쿠구)
재임기간
제3대 조선총독
1919년 8월 12일[2] ~ 1927년 4월 4일
제5대 조선총독
1929년 8월 17일 ~ 1931년 6월 17일
제30대 내각총리대신
1932년 5월 26일 ~ 1934년 7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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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명
도미고로(富五郎)
아호
고스이(皋水, 천수)
배우자
사이토 하루코
작위
백작
정당

약력
제7대 아키쓰시마함장
제8대 이츠쿠시마함장
제3·7대 해군성 군무국장
제3대 해군함정본부장
제3대 해군차관
제14-18대 해군대신
제3·5대 조선 총독
제41대 문부대신
제47대 외무대신
제30대 내각총리대신
내대신
군사 경력
임관
일본해군병학교 (6기)
복무
일본제국 해군
1882년 ~ 1914년
최종 계급
대장
참전
청일전쟁
러일전쟁

1. 개요
2. 생애
2.1. 초창기 활동
2.2. 해군의 실력자
2.3. 조선에서의 문화 통치
2.4. 총리 취임
2.5. 사임과 암살
3. 여담
4. 대중매체에서



1. 개요[편집]


일본군인(일본 해군 대장), 정치인. 2차례에 걸쳐 최장기 조선 총독과 30대 일본 총리를 지냈다.


2. 생애[편집]



2.1. 초창기 활동[편집]


현재 이와테현 무츠의 사무라이 집안에서 태어났다. 일본 해군을 주름잡은 사쓰마(가고시마) 번 출신이 아니고, 순전히 자기 힘으로 승진을 거듭한 실력파이다.[3] 14세의 나이로 상경하여 이듬해, 일본해군병학교에 입학하였다. 해군병학교 졸업 후 1882년 해군 소위로 임관했다. 1884년 미국 유학을 떠나 1888년까지 초대 주미일본공사관 주재무관을 지냈다. 이로 인하여 자유주의 성향을 띠게 되었으며 유창한 영어를 습득할 수 있었다.[4]

1888년 귀국하여 해군 참모본부에서 근무하였는데, 함대 근무는 최소한만 경험하였으며, 해군성에 오래 재직하는 관료 군인으로서 대해군을 건설하는데 아키야마 사네유키 제독과 함께 큰 역할을 했다. 작전능력과 행정능력에서 매우 높은 평가를 받아 미래 해군의 주역으로 평가받게 되었다. 1893년 해군소좌로 승진했고, 1894년 청일전쟁이 발발하자 메이지 덴노의 시종무관에 임명되었다.


2.2. 해군의 실력자[편집]


1897년 12월 초에 중좌로 승진하였는데, 12월 말에 다시 대좌로 승진 통보를 받는 등 전례없는 파격적 승진을 거듭했고, 1898년 40세의 나이로 대좌로 승진하였으며 중장보직인 해군차관에 임명되었다. 이후 군무국장, 함정본부장, 교육본부장 등 해군의 요직을 두루 거쳤으며, 1900년 해군 소장으로, 1904년에 해군 중장으로 승진했다.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 했을 때 해군의 경영을 사실상 틀어쥔 해군의 실력자였다. 일본의 조약파(条約派)[5] 해군 제독 출신으로 자유주의 성향이었고 서방세계를 잘 알거니와 경험도 풍부했다. 해군 중장 니게 카게노리 제독의 딸을 아내로 맞았다.

1906년 사이온지 긴모치 내각이 출범하자 해군대신에 임명되어 1914년까지 5개 내각에서 해군대신을 지냈다. 해군 건설에 공을 인정받아 남작 작위를 수작받았으며, 1912년 해군 대장으로 승진했다. 하지만 1914년 야마모토 곤노효에 내각이 지멘스 사건으로 무너지자, 이에 책임을 지고 해군대신직을 내려놓고 예편하였다. 이후 홋카이도로 귀농을 위해 이주 준비를 하고 있었다.


2.3. 조선에서의 문화 통치[편집]



파일:attachment/사이토 마코토/sa431.jpg

사이토의 초상화

일본은 당시 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를 3.1 운동의 책임을 물어 해임한 뒤, 조선을 유화적으로 통치해야 할 필요를 느끼고 적합한 인물을 물색했다. 1919년 8월, 하라 타카시 내각은 군인 출신의 임명을 강경히 요구하는 육군의 요구와 동시에 조선에서의 통치 완화, 육군의 영향력 축소 사이에서 고민하다가[6] 해군 퇴역 장성인 사이토 마코토에게 조선총독에 부임해달라고 요구했다. 사이토는 군인 출신이라 육군에서도 반대할 명분이 민간 출신 문관 임명에 비해 적었을뿐더러, 해군 출신이라 조선에서 육군의 영향력을 줄이는 데에도 알맞춤이었다. 훗날 총리대신 임용 당시 타임지에서도 이런 언급을 했다.

흔히 문화통치를 조선 민족 말살을 위한 악랄한 통치 수단으로 취급하지만, 단순한 (1930년대 이후의) 민족말살정책만은 아니었다. 당시 일본 본토에서는 다이쇼 데모크라시라 불리는 민주주의 운동 붐이 한창이었다. 일본 본토에서 일어나던 민주주의와 평화운동의 분위기, 하라 다카시 총리(하라는 문민 출신이었다.)와 사이토 총독의 자유주의적 성향이 조선 통치에도 영향을 끼쳤다. 이 때문에 교원까지 칼차고 수업하던 것이 완화되어 더 이상 칼을 차지 않게 됐고, 원성 자자하던 육군 헌병 대다수가 보통경찰로 전환되었으며, 조선인들이 하급 관리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근현대문학가 채만식 작가가 레디메이드 인생에서 서술한 내용에 따르면, 자유주의가 조선에 들어와서 교육열이 높아졌다고 한다. 당연히 학력이 높아진 조선 사람들이 면서기, 수리조합 사무원, 순사(순경) 같은 지식노동자로 진출한 것. 한글신문인 조선, 동아일보, 조선중앙일보[7]가 등장한 시기이기도 하다. 물론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한계나 이후 상황을 살펴봐도 그렇고, 조선의 문화통치 역시 저항을 느슨하게 하는 동시에 조선인들의 지지율을 얻고 환심을 사기 위해 시행한 회유책이었지, 실질적으로 조선인의 자유나 복지를 위한 것은 아니었다. 그나마 식민통치기 중 조선인들이 약간이라도 숨 좀 편히 쉴 수 있었던 때 정도로 보면 된다.

그의 조선 통치는 친일파가 다수 생기게 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사이토 총독이 행한 유화정책인 문화통치는 일본과 타협을 하려는 민족자치론자들의 머릿속에 자치를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심어주었고, 결국 이들 민족자치론자들은 친일파로 변절했다. 하지만 일본에 타협하지 않은 민족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은 신간회를 조직하는 등 좌우합작 독립운동을 이어갔다(1925년). 여성운동가들이 기독교계와 사회주의자들이 합작하여 근우회를 조직함으로써 여성인권 및 해방운동에 헌신한 시기(1929)이기도 하다.

흔히 아베 노부유키의 괴설 떡밥과 함께 식민 교육으로 조선을 장악하겠다는 사이토 제독의 '신교육칙어' 떡밥이 있다. 그러나 칙()이란 한자는 중국의 남북조시대 이후로 황제가 신하들에게 내리는 명령을 가리키는 의미가 되었고, 일본에서도 그러한 뜻으로 사용했다. 교육칙어란 명칭도 '천황이 신민들에게 교육에 관해 내리는 명령'이란 뜻이다. 따라서 일개 장군이나 제독, 또는 총독이 자기가 내리는 명령을 감히 '칙서'라느니 '칙어'라느니 표현할 수 없다. 만약 정말로 그런 짓을 한다면, 일개 신하가 감히 천황과 동등한 반열인 줄로 안다고 탄핵받을 거리를 자기가 알아서 제공해주는 정치적 자살이다. 게다가 메이지 천황교육칙어는 일본의 패전 때까지 개정되지도 않았다. 교육칙어는 유교 봉건적 도덕관을 주제로 한 일제스러운 스타일이라, 신교육칙어란 출처 미상의 문서와는 맥락도 매우 다르다.

독립운동가들의 분열 공작을 펼치기도 하였는데 경성신문의 사장이었던 아베 미쓰이에에게[8] 온건 독립파를 변절, 회유시키라는 지시를 내려 최남선, 최린 등 독립 운동에 가담한 인사들을 회유하려 그들을 지원해주거나 공작을 시도하였다. 이 러한 시도를 통해 사이토는 조선의 국내 독립운동 세력을 어느 정도 약화시켰다.

그는 1927년 4월 4일 제네바 해군 군축조약(6월 2일 ~ 8월 4일)의 전권 대표로 출석하였으며 12월 조선 총독을 사임하고 추밀고문관에 임명됨으로 일본 중앙 정치에 본격적으로 개입하였다. 하지만 1929년, 후임 야마나시 한조가 비리[9] 혐의로 사임하자 1929년 8월 17일 재취임하여 1931년 6월 17일까지 통치, 사이토 마코토 2기 집권기에 접어든다. 가히 10년 통치로, 35년 조선 통치 가운데 1/4을 넘어 1/3에 육박한다.

후임 총독 우가키 가즈시게 역시 1930년대까지의 문화통치와 공업화정책으로 충실하게 뒤를 이었다.

앞서 말했듯 한국에서는 그 또한 제국주의 인물로 평가받지만, 정작 일본 내에서는 합리성을 중시하는 온건파 인물로서 여겨졌다. 하지만 알다시피 조선에서 친일파가 본격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하고 독립 운동 계파간에 균열이 가기 시작한 시기 또한 이 사람이 조선 총독으로 재임하고 있던 시기였다. 당시 조선의 사회상은 일제강점기민족 분열 통치기를 참조할 것.

부부 동반으로 최초로 조선에 올라온 총독이기도 하다. 부부 동반으로 군복이 아닌 평범한 양복중절모 차림으로 나와 문화통치를 선전한 적도 있다.[10] 그렇게 취임하러 온 당일에 강우규가 그를 처단하기 위해 서울역 앞에서 폭탄을 투척해서 친일 고관과 일본인을 합쳐 사상자 37명이 나왔다. 가까이서 구경하던 민간인 중에도 일본인 부상자 몇 명이 있었다고도 한다. 그런데 암살 대상이었던 사이토 제독은 그다지 화를 내거나 하진 않았다고 한다.

한편 강우규가 재판이 마무리될 때 한 최후의 일언(마지막 항소) 내용은 링크와 같다[11]. 요약하자면 죽이려고 한 것은 사이토 제독 한 사람뿐이고, 주변의 민간인을 부상 입힌 것은 본의가 아니라는 것.

2.4. 총리 취임[편집]



파일:external/www.kantei.go.jp/souri30.jpg

30대 총리 취임 후

그 후 1932년 5월 15일 일어난 5.15 사건[12] 이후 군부의 폭주를 경계했고, 사이온지 긴모치와 중신들이 개별적으로 만나 회의한 결과 사이토 제독의 온건노선에 호응하여 총리에 임명되었다. 그동안 정당 당수들을 총리후보로 간택하여 정당내각을 용인해왔던 원로 사이온지 긴모치가 정당정치를 종식시키고 중신들과의 협의를 통해 거국내각을 이끌어 냈다는 점은, 그만큼 일본의 상황이 안 좋았음을 의미한다.

게다가 쇼와 덴노는 5.15사건 이후 '인격이 훌륭한 총리', '파시스트 성향 절대 불가', '국제관계에 중심을 둔 온건파'라는 조건을 모두 갖춘 인재를 원했다. 또한, 해군 출신 총리는 전반적으로 정치권에서 해군보다 큰 힘을 행사하던 육군이 문민 출신 관료들과 대립할 때 타협안으로 옹립되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 역시 감안해야 한다. 사이토 역시 그 점에서 다르지 않았다.

여튼 1932년 사이토가 내각총리대신으로 임명되자 '조선 총독으로 임명되는 것이 일본 총리로 가는 코스'라는 인식이 생겨 군인 정치가들이 침 흘리는 자리로 급부상했다. 그는 일본 내부 경제문제 해결과 정치 안정화를 위해 와카츠키 레이지로 민정당 총재와 스즈키 기사부로 정우회 총재에게 협력을 요청하여 초당적인 내각을 조직했다. 절친인 다카하시의 재정정책으로 여러 사업을 추진하여 경제력을 강화하려 했지만, 군사비가 급증하여 효과는 미미했다. 한편, 사상 면에서는 전혀 온화롭지 않았다. 교토제국대학의 타키카와 교수의 사상[13]을 문제 삼아 교단에서 내려오게 만드는가 하면, 일본 공산당을 전면적으로 탄압하여 궤멸 상태로 만들었다.

그리고 "온건한" 그 조차도 유지했던 군부의 마지막 철칙.

나라가 초토화되더라도 만주국을 승인한다.

(우치다 고사이 외무대신의 이른바 '초토연설')

사이토 내각은 1932년 만주국을 정식으로 승인하였으며, 국제연맹에서 일본은 만주국을 정식으로 인정받지 못하게 되자 국제연맹을 탈퇴해 버린다. 만주국의 승인과는 별개로 이렇게 아주 완전한 국제적 고립을 선택하는 것은 본디 사이토 내각의 의사는 아니었고, 탈퇴 성명문을 낭독하고 일본 대표단을 데리고 국제연맹에서 뛰쳐나온 마츠오카 요스케도 자기가 일을 저질렀다 싶어서 차마 일본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군부는 마쓰오카가 다른 나라들의 대표단 앞에서 당당한 모습을 보였다고 하여 국민영웅으로 떠받들며 환호했고, 마쓰오카의 귀국현장에는 대대적인 환영인파가 몰리는 등 여론도 강경하게 되었다. 사이토 내각은 이 국민적 관성을 받아낼 방법이 없어 그대로 국제연맹을 탈퇴해버리고 말았다.

군부[14]와 대립을 극력 피했으나 군부는 그의 리버럴 성향을 싫어했으며, 내각을 흔들기 위해 끊임없이 관료에 대한 스캔들 사건을 폭로했고 '제국인조견사' 불법 주식매매사건을 통해 궁지에 몰린 그는 1934년 내각을 사임했다.

사이토 제독은 사임 직후 오카다 게이스케를 후임으로 하여 해군 출신의 중립성을 강조하려고 했으나, 현실은...


2.5. 사임과 암살[편집]


1934년, 총리직을 내려놓은 사이토는 내대신에 임명되었다. 총리 시절과 마찬가지로 현상 유지를 주장했기 때문에, 황도파의 청년 장교들로부터 현상 유지의 총본산으로 지탄을 받아 미움을 샀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Korekiyo_Takahashi_and_Makoto_Saito_last_pic_together.jpg

20대 총리였던 다카하시 고레키요 당시 대장대신(왼쪽)과 사이토
이 사진은 1936년 2월 20일에 찍힌 것으로, 6일 후 2.26 사건 으로 두 사람은 손잡고 나란히 황천길로 간다. 총독 시절에 군복 대신 양복을 입고 출근하였는데, 총리대신 취임 이후에도 마찬가지로 캐주얼한 양복차림으로 나타났다.

결국 그를 눈엣가시처럼 여긴 황도파 청년 장교단은 1936년 2.26 사건으로 쿠데타를 일으켰고, 사이토는 77세를 일기로 결국 암살당하고 말았다. 이때 다카하시 대장대신과 와타나베 조타로 육군교육총감도 함께 암살당했다. 자세한 내용은 2.26 사건 참조.

물론 그가 암살 기도를 받은 게 처음은 아니었다. 앞서 말했듯 대표적으로 1919년 강우규 의사의 폭탄 투척과 1926년 순종의 승하 때 송학선 의사의 기도가 있었지만[15] 모두 실패했었는데[16] 아이러니하게도 같은 민족인 일본인, 그것도 자신이 몸담고 있던 일본군에게 사살된 것이다.

여러 번 암살 시도를 넘겼던 사이토 제독은 제 명에 죽을 줄 알았지만, 총독도 총리도 다 그만두고 내대신으로서 일선에서 물러나 있는 중에 청년 황도파에게 친영, 친미파로 지목되어 죽게 되었던 것. 사이토 제독은 암살당했던 대신들 중에서 가장 끔찍하게 살해되었다. 집에 난입한 반란군 황도파 군인들이 47발이나 사격했다. 그중 몇 발은 장교도 아닌 증오심으로 가득찼던 일반 육군 병사가 자원해서 시행한 확인사살이었다.

암살 과정에서 사이토 제독의 처인 하루코도 장교들에게 저항하다가 장검으로 토막났다는 와전된 야사도 전해지나, 실제로는 그때 부상을 당했지만 죽지 않고 살아남아서 천수를 누려 1971년에 97세 나이로 사망했다.

2.26 사건 이후로는 총리 암살 사건이 일어나지 않아 한동안 총리가 자연사 및 자살이 아닌 타살로 죽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2022년에 아베 신조 피살 사건이 일어나 무려 86년 만에 총리 암살 사건이 다시 발생한다. 전직 총리 신분으로 암살당한 총리는 이토 히로부미, 다카하시, 사이토, 아베, 현직 상태에서 암살당한 총리는 하라 다카시이누카이 쓰요시가 있다.[17]

3. 여담[편집]


  • 개인적 성격은 털털했다고 전해진다. 1914년 전역 직후 구입한 별장에서 여느 집 노인들과 다름없이 검소하게 지내다 보니, 그 지역의 서장이 일을 하고 있던 제독을 보고 "못 보던 영감님이네."라고 했다가 얼굴을 보고 놀랐다고 한다.

  • 군인치고 신사적이었다고 하며, 평소에 분위기 파악이 빠르고 조용한 대화를 했던 것 같다. 일본 총리 재임 시절 정치인들이 맹렬하게 비난하고 도발을 해도 "긴장감이 없어보이지만 저는 극도로 긴장해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라고 공손하게 답변했을 정도로 점잖았다.

  • 편지 쓰기를 좋아해서 감사 편지나 답장을 자주하였으며, 서예를 좋아했던 그에게 휘호를 부탁하면 거절하지 않고 빠짐없이 썼다고 한다. 한 번 들어온 서신은 반드시 보관하는 습관이 있었고 개인정보 습득에 빨랐는데, 이런 습관 덕에 그가 지녔던 서류가 일본 국회도서관에 보존될 정도.


  • 고자라는 설이 있었다. 내용인즉슨 어릴 적 개에게 물려 뜯겨나가 외부 성기가 완전히 없었다는 것. 실제로 결혼을 하기는 했으나 친자를 보지 못했고 양자 1명만 두었다. 하지만 수염을 기른 것으로 보아 친자가 없어 생긴 낭설일 가능성이 크다. 고자는 테스토스테론 부재로 인해 수염이 나지 않는다. 결정적으로 외부 성기가 없으면 병학교 신체검사를 통과했을 리가 없다. 당시의 일본군 신체검사도 그렇고 현재의 자위관 신체검사도 그렇고 고자는 군인으로 받아주지 않기 때문이다. 자녀를 낳지 못한 것은 아마도 난임이거나 불임이어서 그랬을 가능성은 있을 수 있어도, 수염 나고 사관학교 신체검사까지 통과한 사람이 고자라는 건 완전히 헛소리이다.

  • 1931년 서울 조계사에 목조관음보살상을 기증했다. 이 관음상을 모시기 위해 남산 기슭에 약초사라는 절이 세워졌다.

4. 대중매체에서[편집]


  • 1990년 KBS 8.15 특집극 <왕조의 세월>에서는 배우 최정훈이 연기했다.

  • 2002년 SBS 드라마 <야인시대>에서는 배우 전무송이 연기했다. 조선총독부 기념식에서 최동열의 아버지, 고노에(하야시 장인), 하야시와 인사하고 고노에와 하야시에게 대일본 제국의 영광을 도와줄 사무라이라고 칭송한다. 이후 나머지 일본 고위 관료들과 함께 기미가요를 부르는 것으로 퇴장한다.

  • 2017년 개봉한 영화 <박열>에서는 배우 정운봉이 연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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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구자체로는 , 제등실이라고 쓴다.[2] 부임 9월 1일[3] 보신전쟁 이래 도호쿠 지방 출신은 중앙 정계에 진출하기 힘들었다.[4] 사이토 마코토의 영어 스피치 영상이 기록영화로 남아 있는데, 직접 들어보면 일본인 특유의 재플리시 억양이 거의 없다. #[5] 런던 해군 군축조약 유지를 지지하는 온건파 노선이다.[6] 이러한 논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식민지 조선을 일본 핵심층이 어찌 생각했는지 알아야 한다. 원래 하라는 조선의 초대 정무총감을 지낸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양아들 야마가타 이사부로를 총독으로 추천하려 아리토모에게 건의하였다. 그랬더니 아리토모가 '이사부로는 하세가와와 조선의 폭동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고 거절하였다. 하라는 '양아들보다 육군이 우선인 고집불통 영감탱이'라고 속으로 욕하였는데, 이때 육군대신인 다나카 기이치가 중재안으로 사이토를 추천하였다. 당시 일본 상층부, 특히 육군에서는 '조선은 육군 것'이라는 명확한 인식이 있었다. 그러기에 조선 총독도 육군의 자리라고 여겼던 것이다.[7] 몽양 여운형이 사장으로 있었던 일간지이다.[8] 아베 미쓰이에는 언론인 출신으로 "데라우치의 오른팔은 아키시이며 사이토의 오른팔은 아베 미쓰이에"라 할 정도로 사이토의 비선측근이었다.[9] 한 미곡상이 야마나시 한조의 측근에게 뇌물 5만 엔을 주었다가 발각된 사건으로, 일명 "조선총독부 의옥 사건"이라고 한다. 야마나시는 무죄 판결을 받았으나 이로 인해 모든 공직을 내놓아야 했다. 한편으로는 1928년 5월 타이완에서 조명하 의사가 일본 황족 구니노미야 구니히코(쇼와 덴노의 장인)를 칼로 찌른 사건에 대한 책임까지 겹쳤다는 말이 있다. 참고로 구니노미야는 그 때 죽지 않았지만 패혈증이 발병하여 이듬해인 1929년 1월 사망했다.[10]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제복을 입고 보내던 육군과 달리, 근무 시간이나 큰 행사 외엔 사복 정장 차림을 하는 게 일반적이던 해군의 분위기가 반영되었다.[11] 폭탄의 위력을 몰랐다는 점은, 강우규는 이미 재판 과정에서 폭탄의 위력을 알고 있었느냐는 검사의 질문에 대해 "끝에서 뾰족한 것이 튀어나와 내가 죽이고자 하는 사람 하나만 맞힐 줄 알았지, 그렇게 많은 사람을 상하게 할 줄은 몰랐다."라고 말한 바 있었다.[12] 해군 급진파 청년이 중심이 되어 호헌운동의 중심이었던 이누카이 쓰요시 총리를 암살한 사건이다.[13] 교토대학은 옛날부터 개혁적, 리버럴한 학풍이 강했기로 유명하다.[14] 여기서 말하는 군부란 대체로 일본 육군을 말한다. 일본군의 육해군 대립은 해군 출신 일본국 내각총리대신들에 대한 육군의 끊임없는 흔들기로 나타났다. 선술했듯, 해군 출신 총리대신은 보통 육군과 문민 관료간 대립시 일종의 합의에 의해 나오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육군들이 언젠간 쫓아내려고 하는 경향이 컸다.[15] 송학선의 경우는 닮은 사람을 사이토로 오인하고 죽였지만, 다행히도 민간인이 아니라 일제의 요인이었다.[16] 1923년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했던 김상옥 의사도 원래 사이토 총독 암살을 목표로 국내에 잠입한 것이었고, 1933년 만주국 일본대사 암살을 기도한 남자현도 1926년 사이토 총독 암살을 기획한 적이 있었으나 거사 직전 송학선의 의거로 경계가 강화되는 바람에 시도조차 하지 못하고 실패.[17] 하마구치 오사치는 현직에 있을 때 암살 미수를 당했다가 기적적으로 생존했으나 완치되지 않은 몸으로 무리를 하다가 직무에 복귀한 지 얼마 안 되어 총리직을 사임하고 피격 10개월 만에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피격되고도 꽤 길게 생존했고, 현직 총리 신분으로 테러를 당해 전직 총리 신분으로 사망하여 '암살당했다.'고 단정하기에는 애매한 부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