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카모토 류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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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카모토 류이치의 주요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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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아카데미 시상식
파일:oscar_logo.svg
음악상
제59회
(1986년)


제60회
(1987년)


제61회
(1988년)

허비 행콕
(라운드 미드나잇)

사카모토 류이치, 데이비드 번, 콩 수
(마지막 황제)

데이브 그루신
(반항의 계절)



역대 골든 글로브 시상식
파일:goldenglobe.png
음악상
제44회
(1986년)


제45회
(1987년)


제46회
(1988년)

엔니오 모리코네
(미션)

사카모토 류이치, 데이비드 번, 콩 수
(마지막 황제)

모리스 자르
(정글 속의 고릴라)

제47회
(1989년)


제48회
(1990년)


제49회
(1991년)

앨런 멩컨
(인어공주)

사카모토 류이치, 리차드 호로비츠
(마지막 사랑)

앨런 멩컨
(미녀와 야수)


역대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
파일:BAFTA 로고.svg
영화 음악상
제36회
(1982년)


제37회
(1983년)


제38회
(1984년)

존 윌리엄스
(E.T.)

사카모토 류이치
(전장의 크리스마스)

엔니오 모리코네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


역대 파일:daejongfilmawards_logo.png
파일:daejongawards.png
음악상
제54회
(2017년)


제55회
(2018년)


제56회
(2020년)[1]

달파란
(가려진 시간)

사카모토 류이치
(남한산성)


정재일
(기생충)






사카모토 류이치
坂本(さかもと龍一(りゅういち | Ryuichi Sakamo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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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952년 1월 17일
도쿄도 나카노구
사망
2023년 3월 28일 (향년 72세)
도쿄도
국적
[[일본|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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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

자녀
사카모토 미우 포함 2남 2녀[1]
학력
도쿄예술대학 음악학부 (작곡과 / 학사)
도쿄예술대학 대학원 (음악연구과 / 석사)
직업
음악가, 작곡가, 편곡가, 프로듀서, 피아니스트, 키보디스트
레이블
일본 컬럼비아(1978 - 1979)
알파 레코드(1978 - 1983)
MIDI / SCHOOL(1984 - 1986)
CBS 소니 / TERRAPIN(1987)
버진 레코드(1989 - 1991)
도시바 EMI(1993)
포 라이프 레코드 / güt(1994 - 1997)
워너 뮤직 재팬(1998 - 2006)
commmons(2006 - 2023)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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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이름
3. 생애
3.1. 어린 시절
3.2. 활동
3.3. 사회적 행보
3.4. 사망
4. 음악 스타일
5. 디스코그래피
5.1. 정규 앨범
5.2. EP
5.3. 사운드트랙
6. 필모그래피
7. 오토바이오그래피
8. 류이치사카모토소셜프로젝트코리아
9. 다른 아티스트와의 관계
10. 사건사고 및 비판
10.1. 인성 문제
10.3. 유희열에 의한 표절 논란에 대한 입장
10.3.1. 개요
10.3.2. 정황
11. 여담



1. 개요[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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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작곡가이자 뮤지션. 세계적으로 높은 인지도를 가지고 있으며, 특히 영화 음악을 통해 대중에게 널리 알려졌다. 골든글로브상그래미 어워드를 수상한 인물이자 아시아 최초 아카데미 음악상 수상자다.



2. 이름[편집]


坂本龍一는 일본인의 인명이므로 일본에서는 당연히 '사카모토 류이치'라고 읽지만, 서양에서는 일본인들의 해외 진출시 또는 서구권에 본인들을 알리던 관례대로 성씨와 명을 도치시킨 ‘류이치 사카모토’로 소개되었고, 이 이름이 한국에도 그대로 소개되어 아직 한국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서양식 표기대로 '류이치 사카모토'라고 부른다. 옐로 매직 오케스트라 활동이나 영화 음악 등으로 먼저 이름이 알려진 서구권을 통해 한국에 소개되었기 때문인지 한국에서도 별 고민없이 서양식 표기를 사용했던 것.[2] 비슷한 예로는 마찬가지로 한국에도 잘 알려진 음악가 구라모토 유키 역시 '유키 구라모토'로서 훨씬 많이 알려져있다.[3]

네이버에 '사카모토 류이치'라고 검색해도 '류이치 사카모토'라고 등재된 프로필이 표시되며 요즘은 많이 나아진 편이지만 여전히 많은 언론사에서 그의 이름을 다룰 때 '류이치 사카모토'로 표기하는 곳이 많다. 정식 수입 개봉된 다큐멘터리 류이치 사카모토: 코다 역시 공식 자료의 모든 곳에 '류이치 사카모토'라고 이름과 성씨가 거꾸로 쓰여져 있다.

3. 생애[편집]



3.1. 어린 시절[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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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1월 17일 도쿄 나카노구 출생. 아버지는 출판사의 편집자였으며, 장서와 클래식 LP를 많이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당시 다녔던 유치원에서 피아노를 배웠고, 이것이 즐거워서 이후에도 계속해서 피아노 학원을 다녔다고 한다. 4살에 작곡을 시작해서 11세 때인 1963년 도쿄예술대학의 음악 교수에게 클래식 작곡을 배우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중학교 때 우연히 포스트모던 연주회에 가서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고등학교 때는 당시 일본의 사회주의 운동에 영향받았었다고 하며[4] 백남준의 작품 등 다양한 포스트 모던 아티스트들의 작품에 매료되어 있었다고 한다.

1971년 도쿄예술대학 음악학부 작곡과에 입학하였다. 당시 주어진 조건대로 곡 하나를 작곡해야 하는 시험을 고작 1시간 만에 끝내고 나가 버렸다고 한다. 그러나 입학한 후 작곡과는 전형적인 클래식 분위기 일색이라 어울리지 못하였고 미술학부 친구들과 어울렸다고 한다. 대학에서 본격적으로 놀아다니기 시작해서 아르바이트 형식으로 피아노 연주를 하며 아티스트들과 교류를 넓히기 시작했다.

이 시기의 흔적으로 전위파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인 타카하시 유지(高橋悠治)가 쇤베르크베르크, 베베른의 피아노곡 전곡을 1977년에 일본 콜럼비아에서 녹음할 때 쇤베르크의 초기 습작인 '여섯 곡의 피아노 연탄곡집'에서 타카하시와 함께 피아노를 연주한 것이 있다.


3.2. 활동[편집]


솔로 데뷔전인 1976년 부터 슈가 베이브 출신의 오오누키 타에코, 야마시타 타츠로 등 여러 아티스트들의 세션으로 활동하였고, 같은 해 츠치토리 토시유키와 같이 녹음한 Disappointment-Hateruma가 연주자로서는 처음으로 이름을 올린 앨범이다. 솔로 데뷔 이전에 1978년 도쿄에서 열린 우주 박람회의 기념 앨범인 '宇宙(1978)'를 제작했으나, 신디사이저 음색과 다큐멘터리 멘트를 조합해 하나의 분위기를 만들어낸 작업물에 가깝고, 수록된 곡도 자신의 곡이 아닌 Joe Meek의 'Telstar'라는 곡을 커버한 것이었다. 자신의 이름도 앨범 한 구석에 조그맣게 올리는 데 그쳤다. 이후 1978년, 제대로 된 솔로 앨범인 Thousand Knives[5]를 내 주목을 받는다. 타이틀 곡인 Thousand Knives는 이후에도 각종 YMO 라이브 버전 (# ## ### ####)이나 YMO 앨범 버전, 피아노 연주곡 버전 (# ##)등등으로 죽을 때까지 계속 우려먹힌다.

이 앨범을 발매한 뒤, 당시 이미 일본 대중음악계에서 유명세를 쌓고 있던 호소노 하루오미, 타카하시 유키히로 등과 알게 되었을 때, 사카모토 본인은 팝[6]에 문외한이라 그들과 어울리면서도 왜 그들이 유명한지 전혀 몰랐었다고 한다. 원래 친했던 둘의 앨범에 참여를 하는 방식으로 이야기가 오가다 우연히 앨범을 만들자고 이야기가 나와 함께 음악을 만들게 되니 그게 Yellow Magic Orchestra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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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왼쪽부터 호소노 하루오미, 사카모토 류이치, 타카하시 유키히로
YMO 활동 당시 사카모토 류이치[7]

사실 일본에서는 큰 반향이 없었으나, 레코드 회사에서 이들의 음악을 본격적으로 밀어주었으며 미국을 비롯한 영국 등 서구 각지에서 콘서트를 열었다. 당시로써는 매우 진보적인 전자음악이었고, 음악 전반에 깔린 팝과 락큰롤의 느낌, 동양인이 하는 최신 현대 음악에 대한 신비감이 섞여있었기 때문인지 서구에서 대히트를 치게 된다. 일본에서는 이러한 소식을 계속해서 자국민에게 전했고, 몇 달 후 일본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그들은 국민 아티스트가 되어 있었다는 이야기다. 이 때 느닷없이 국민적 인기를 얻게 된 탓에 인기에 대해 아무 면역(?)이 없던 YMO 멤버들은 집 밖에만 나가도 알아보는 사람들 때문에 엄청 시달렸고, 특히 사카모토 류이치는 대인기피증까지 앓았었다고 한다.[8] 호소노나 타카하시야 YMO 이전에도 언론에 자주 노출되는 편이였으니 그렇다쳐도 Technopolis를 작곡하며 YMO 데뷔를 성사하였던 사카모토는 YMO로 갑자기 유명해졌으니…[9]

당시 가장 큰 히트를 친 곡은 단연 Behind the MaskRydeen[10], Tong Poo. Behind the Mask는 마이클 잭슨이 가사를 덧붙여서 앨범 (시기 상으로 하필이면 세기의 앨범인 Thriller였을 것이라는 설이 있다)에 리메이크되어서 들어가기로 되어 있었다고 하나 모종의 이유로 빠졌고[11] 이후 에릭 클랩튼이 락버전으로 리메이크한 것이 널리 알려졌다. 마이클 잭슨 사망 후 유작으로 발매된 앨범에 댄스풍으로 재차 어레인지된 버전이 들어갔다.[12] 전자음악과 마찬가지 당시 막 인기를 끌기 시작하던 전자게임을 뮤직비디오로 활용한 Computer Game도 유명하다.

YMO 막바지에는 J-pop 분위기의 가벼운 곡들을 많이 냈으며 보컬로도 활동하여 당시 일본에서 요즘 가장 귀여운 아저씨들로 불렸다고 한다. 다양한 리메이크가 된 君に、胸キュン의 오리지널 뮤직비디오를 보면 상당히 맛간 느낌으로 역시 천재는 범상치가 않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된다. 물론 노래 자체가 흥겹고 귀엽기에 이후 여러 차례 리메이크 된다. 이 곡 외에도 YMO 뮤직비디오 대부분이 말 그대로 사이키델릭한 느낌을 준다.

YMO 활동으로 유명해지자 영화배우, 광고 모델로 활동영역을 넓혔다. 오시마 나기사 감독의 1983년 작품 <전장의 크리스마스(戦場のメリークリスマス/ Merry Christmas Mr. Lawrence)>에서 주연과 OST를 맡았다. 영국의 뮤지션 데이비드 보위와 공동으로 주연한 이 영화에서 그는 일본군 장교로 나오는데, 데이비드 보위와의 격렬한 키스신(!)도 등장한다. 이 영화의 주 테마곡인 Merry Christmas Mr. Lawrence는 영화보다 유명해져서 사카모토나 영화를 몰라도 이 노래만큼은 모두가 알 정도다.[13] 한국의 경우에는 영화 내용이 문제[14]가 되어서 정발되지 않았기에 영화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음악 자체는 여러차례 대중매체에서 재생되었기 때문에 전혀 모르고 있다가 우연히 듣게 되면 '어 그거!'할만큼 은근 인지도가 있는 명곡이다.


화룡점정으로, <마지막 황제>의 OST를 통해 오스카상을 수상하면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으며 일본을 대표하는 아티스트가 되었다. <마지막 황제>에서도 직접 극중 인물을 연기했다.[15] 배역은 푸이만주국을 배후 조종한 아마카스 마사히코 예비역 일본 육군 대위로 분했다.[16] 테마곡 Last Emperor와, Rain이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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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황제> 출연 당시 사카모토 류이치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 테마곡을 맡기도 했다. 말 그대로 월드 클래스 뮤지션. 근데 의외로 게임 음악에 여러차례 참여 했는데, 89년도 PC엔진판 천외마경을 비롯한 여러 게임 음악을 맡았고, 드림캐스트를 처음 구동하면 골뱅이 로고와 함께 흘러나오는 오프닝 콘솔 뮤직도 그의 작품이다. 'L.O.L.: Lack of Love'에서는 OST와 함께 시나리오 라이터도 맡았다고 한다. 애니메이션에 참여한 일은 거의 없으나, 단 하나 왕립우주군에서만 참여해 음악을 맡았다.[17] 위에서 설명한 YMO 시절 '君に、胸キュン'의 수많은 리메이크 곡 중 하나는 마리아 홀릭 1기 엔딩에도 쓰였고, 이로 인해 오덕계에서도 YMO가 주목을 받게 된다. 이외에도 그나 YMO의 곡들이 리메이크된 경우는 많다.

2013년 5월에는 도쿄 필하모닉 교향악단과 함께 16년 만에 오케스트라 협업 공연을 선보였다. 약 1년 뒤인 2014년 4월 역시 Playing the Orchestra 2014를 성황리에 마쳤지만, 같은 해 7월 10일에 기자회견을 통해 인두암 진단을 받고 투병 중이며 당분간 음악활동을 중지할 것을 밝혔다.[18]

2015년 암 투병 이후 첫 복귀작을 발표했다. 야마다 요지 감독의 영화 '어머니와 살면'의 OST라고 한다.

2015년 8월 30일 일본 국회 앞에서 아베 신조 정부가 추진 중인 안보법안 반대 시위에 참가하며 오랜만에 다시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연설을 통해 시위에 나선 사람들을 격려하고, 헌법과 민주주의를 되찾기 위한 아주 중요한 시기에 함께 행동하겠다고 했다. # 위안부 관련해서도 사과해야 한다는 입장을 지지하며, 이를 보고 극우단체에서는 재일이라고 비하하기도 한다.

일본 지지통신 11일 보도에 따르면 사카모토 류이치는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주연의 영화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The Revenant, 2015)'에서 음악을 담당해 골든글로브상 최우수작곡상 후보에 올랐으며 독일의 음악가 알바 노토와 수상을 놓고 경쟁하게 된다고 한다. 알바 노토와 사카모토 류이치는 이전부터 공동으로 앰비언트 뮤직을 작업하며 앨범도 여러 장을 발표할 만큼 음악적 교류가 활발한 편이다.

2021년 1월 21일 본인의 웹페이지를 통해 직장암 투병 사실을 밝혔다. 두 번째 암투병이며 성공적으로 수술은 마쳤으나 앞으로 활동으로 인한 장거리 여행은 어려울 것이라 언급하였다. #

2022년 6월 7일, 문예지 ‘신초’에 자신이 시한부 상태임을 밝혔다. 문예지에 류이치는 직장과 간 두 곳, 림프로 전이된 종양, 대장 30cm를 절제했다고 밝혔다. 암 판정 후, 치료하지 않으면 남은 시간이 6개월이라는 통보를 받았다고 하며, 수술은 예정시간 8시간을 넘은 20시간에 달했다고 한다. 류이치는 “수술이 아닌 투약 방식으로 통원 치료를 하며 음악 활동을 이어갈 것”이라며 “남은 시간 속에서 음악을 자유롭게 하며 내 인생을 다시 돌아보는 시간을 갖겠다”고 밝혔다.#[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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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2월 11일-12일에 일본의 웹사이트 MUSIC/SLASH를 통해 오랜만에 온라인 피아노 솔로 콘서트를 갖는다. 제목은 <Ryuichi Sakamoto: Playing the Piano 2022>. 보통은 실시간 라이브 공연을 있는 그대로 방송했지만, 최근 건강 상태가 악화되면서, 지난 9월 몇 차례에 걸쳐 녹화를 마무리했다. 이것은 그 영상의 편집본이며, 이를 위해 뉴욕에서 영화 전문 스탭이 소집되었다. 12월의 인터넷 송출 이후 극장판으로 재편집되어 전세계에 필름 마켓에도 오를 계획이다.

이번 12월 11일에 MUSIC/SLASH를 통해 전달되는 사카모토 류이치의 온라인 피아노 솔로 콘서트 <Ryuichi Sakamoto: Playing the Piano 2022>는 사실상 사카모토 류이치의 대외적인 마지막 연주 모습이 될 것이다. 보도자료를 통해 본인이 직접 "이번이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겠다"고 코멘트를 한것이 보도자료에서는 꽤 가볍게 다뤄졌고, 이를 기사화 한 언론사들 역시 저마다 그의 코멘트를 각자 다른 무게로 해석하고 받아 적었는데, 현지 스탭들이 전해온 이야기에 따르면,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거나, 멘탈 컨디션 부분에서는 괜찮아 보이지만, 전과 다르게 너무나 수척해진 모습에 놀랐고, 그만큼 체력이 약해진 것이 눈에 띄게 보여서 걱정을 하는 이들이 많았다고 일본의 뉴스 등을 통해 전해져왔다.

2022년 10월까지도 새로운 작품을 출시하긴 하지만, 대부분 2, 3년 전에 이미 제안 받았던 것들의 마감분이며, 그외 과거 작품들의 리마스터링 재발매, 아울러 그동안의 활동 전체를 회고하는 회고집 출간을 예정하는 등 살아 있을때 신경 써서 챙겨 볼 수 있는 건 다 마무리 짓고 가겠다는 의지가 여러 곳에서 엿보인다. 이런 경향은 과거 한국에서 사카모토 측과 업무를 경험해본 회사들의 이야기에서도 예를 들 수 있다. 사카모토 측은 일본에서 발매된 자신의 음반, 책이 한국에서 라이센스화 되는 것을 비롯하여, 한국에서만 특별히 발간되는 책이나 기타 상품들이 출시하는 경우 본인들의 기준에 만족할때까지 하나 하나 꼼꼼히 시간을 들여서 확인하는 것으로 유명하다고 한다. (이것은 한국 외 지역에서 발매될 경우에도 마찬가지.) 예를 들어 오랜 시간 동안 재활용 종이를 사용해서 상품을 제작해왔기 때문에 환경 호르몬이 검출되지 않는 선을 지킨 용지를 사용해서 제작을 했는지, 콩기름 잉크를 사용해서 인쇄를 했는지 확인을 한다든지. 또 일본어를 한국어로 제대로 번역을 했는지 확인도 하기 때문에, 일본에서 한국어를 능숙하게 하는 전문가를 불러서 검수를 진행한다고. 그래서 다른 해외 뮤지션들보다 국내 발매가 좀 더 늦어지는 일이 많다고 한다. 그렇다면, 지금도 그는 생을 마치기 전까지 충분히 자신의 모든 것을 마감해두고 가겠다는 생각으로 바쁜 날을 보내고 있었다.


3.3. 사회적 행보[편집]


음악 활동 외로 사회 운동에 관심이 많았고, 특히나 말년에는 환경 보호와 사회 운동에 적극적인 행보를 보였다. 유명세에 시달린 탓에 평소 조용한 사생활을 추구했지만, 인류 보편적 생존의 조건을 뒤흔드는 문제에 대해선 오히려 유명세를 통해 사회의 관심을 환기시키는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다.[20]

고등학생 때에도 일본 사회주의 운동에 감명받아 전공투로 학생 운동에 참가해 바리케이드 봉쇄를 결행하기도 했고, 대학 시절에는 타케미츠 토오루를 비방하는 과격한 전단을 뿌리기도 하는 등 적극적으로 사회 운동에 참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21] 1997년에는 일본의 음악 저작권이 JASRAC가 독점 관리하는 문제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고, 제도권의 움직임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또한 1999년에 제작한 오페라 'LIFE'를 계기로 환경과 평화에 대해 자주 언급하기 시작하며, 잔여 지뢰 제거 활동을 위한 자선곡인 'ZERO LANDMINE' 등을 발표하기도 했고, 미국 9.11 테러를 주제로하는 논고집을 발표하기도 했다.#

일본 내적으로는, 2004년에는 음악 평론가인 다카하시 켄타로와 영국 출신의 DJ 피터 바라칸 등과 함께 공동 성명을 내어, 일본 국회에서 심의되고 있던 '음악 레코드의 환류 방지 조치'에 반대를 표명하기도 했다.# 이외에도 '2006년 PSE법 반대 서명 운동'의 경우 중심인물로 활동하기도 했고, 같은 해 '아오모리현 핵처리 시설 설립 반대 운동'을 시작으로 반핵운동에도 주도적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특히, 반핵 운동은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더 강력하게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22]
파일:사카모토 류이치 평화헌법 수정반대 시위 연설.png
또한 헌법 9조의 개정에 강하게 반대하며 일본 내 사회적 화두인 부부별씨(夫婦別氏) 제도의 도입에 찬성했다. 2015년부터 아베 신조 정권이 강하게 밀고 나갔던 집단 자위권과 평화 헌법 개정에 대해 시위에 참여하는 등 비판하는 행보를 보였다. #

그외에 상기할 점으론, 매크로바이오틱(전체식)의 실천자이기도 하며 채식주의자이기도 하다. 과거 중단한 적이 있었지만, 2014년 암 진단 이후 본인의 라디오 방송에 다시 복귀하면서 비건(완전채식주의자)이 되었음을 선언하기도 했다. #

평소 수많은 자선 콘서트와 프로젝트를 지원하기도 했다.


3.4. 사망[편집]


2023년 4월 2일, 일본의 신문사 스포니치 아넥스는 사카모토 류이치가 지난 3월 28일 도내 병원에서 향년 71세의 일기로 사망했다고 보도했다. 사인은 직장암.기사 트위터

결국 본인의 인터뷰대로, 지난해 12월 11일 열린 「Ryuichi Sakamoto:Playing the Piano 2022」 피아노 솔로 콘서트가 마지막 공연이 됐다. 암투병 사카모토 류이치, "마지막 콘서트 될지도"

솔로 정규 앨범은 1월에 발매한 12가 마지막이 되었으며,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괴물(일본 영화) 사운드트랙과 방탄소년단의 멤버 슈가의 솔로 스튜디오 앨범 D-DAY의 9번 트랙 Snooze가 유작으로 세상에 나온다.

2023년 3월 29일 교도통신 보도에 의하면 「음악 제작도 어려울 정도로 기력·체력 모두 감쇠하고 있습니다. 유감스럽게도 편지를 보내는 것 이상의 발신이나 행동은 어렵다고 합니다.」라고 전했는데, 이 기사가 나올 시점에서는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


4. 음악 스타일[편집]


그는 여러 인터뷰에서 클로드 드뷔시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동시에 많은 공부를 했다고 밝혔다. 자서전에서는 한때는 진지하게 자신이 드뷔시의 환생이라고 믿었을 정도였다.[23] 실제로 그의 다큐멘터리를 보면 바흐의 곡으로 피아노 연습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으며 그의 기악곡 여러 곳에 바흐와 드뷔시의 음악적 구조가 발견된다.

이 외에도 고전음악을 바탕으로 한 음악학도답게 많은 작곡가들의 영향을 받았다. 동시에 그는 다양한 나라들의 민속음악에도 관심이 많고 자신의 음악에 접목하기를 좋아하는데, 이는 마지막 황제의 사운드트랙 제작 당시 의뢰를 받고 중국으로 날아가기 전 중국을 배경으로 한 영화의 OST인 만큼 구할 수 있는 중국 음악의 음반을 모조리 구해서 공부하고 갔다고 자서전에서도 밝힌 바 있다. 한국의 민속음악에도 관심이 많아 아주 오랫동안 교류하는 국악인들이 많이 있다.

재즈, 탱고, 보사노바, 영화음악을 비롯해 일렉트로니카와 월드뮤직[24] , 뉴에이지, 힙합까지 아우르는 음악적 활동을 펼치고 있다.

싫어하는 음악으론 헤비메탈, 비주얼계를 꼽았다. 헤비메탈에서 더 마니악한 데스메탈은 들어보고 싶지도 않다고 하며 비주얼계는 촌스럽다는 것이 이유. 젊은 시절에는 컨트리 뮤직, 하와이안 음악을 싫어했는데 나이를 먹어가고 하와이를 직접 방문해보면서 좋아졌다고 한다.

영화음악에서 대표곡이 많은데, 영화 'The Sheltering Sky'의 동명 테마곡 The Sheltering Sky, 영화 '철도원'의 테마곡 Popoya, 영화 '바벨' 중에 나오는 Bibo No Aozora[25] 등이 유명하다.

이외에도 많은 YMO 곡들의 실질적인 작곡가여서, 대표곡들은 YMO 시절부터 엄청나게 많다. YMO 시절 곡들을 피아노로 편곡해서 연주한 곡들의 느낌도 각별한데, 각각의 원곡과 피아노 편곡 중 하나씩만 알고 있기에는 대단히 아쉬울 것이다. 인기있는 필수적인 몇 곡만 들어보고 싶다면 Self-Portrait(페이지 상단의 곡), Technopolis, Tong Poo, Energy Flow, Tibetan Dance, Merry Christmas Mr. Lawrence 등. 아마도 그의 곡 중에 제목을 몰라도 어느 한 곡 정도는 들어봤다 싶을 것이다. 은근히 한국의 광고 음악으로도 사용되기 때문에 아는 곡도 있을 것이다.

그가 가장 관심 있어했고 꾸준하게 창작활동을 벌인 쪽은 전자음악, 환경음악 쪽이다. Async와 영화음악 중에서 베스트를 추려 3인조 실내악 편성으로 편곡한 1996이 있다. 솔로 디스코그래피 중에서도 단연 최고로 꼽히는 경이로우면서 아름다운 앙상블을 느낄 수 있다. 이외에 솔로 연주는 BTTB나 Playing The piano가 유명하다.


5. 디스코그래피[편집]



5.1. 정규 앨범[편집]




5.2. EP[편집]


  • Zero Landmine(2001)[26]


5.3. 사운드트랙[편집]




6. 필모그래피[편집]



7. 오토바이오그래피[편집]


  • 음악으로 자유로워지다 (2009)
  • 나는 앞으로 몇 번의 보름달을 볼수 있을까 (2023)

GQ JAPAN의 전편집장 스즈키 마사후미와 사카모토 류이치의 대담이 자서전 형식으로 출판된 책이다. 일반적으로 '자서전'은 작가 본인과 관계 소속사와 출판사의 첨삭을 거쳐 기획되는 형태인데, 오토바이오그래피는 인터뷰어가 추가되어 기획과 첨삭을 함께 하며 인터뷰어의 존재는 드러나지 않는다.

국내에서는 인터뷰어 지승호가 신해철 등과 이런 형태의 작업을 해왔는데, 차이가 있다면 지승호와 신해철이 함께한 '쾌변독설'에서는 지승호의 존재가 드러나있고, 사카모토 류이치의 책은 스즈키 마사후미의 존재가 드러나지는 않는다. (지승호의 작업은 그래서 오토바이오그래피보다는 인터뷰집에 해당한다.)

이례적으로 '나는 앞으로 몇 번의 보름달을 볼수 있을까'에서 스즈키 마사후미 본인의 후일담이 담긴 챕터가 마지막으로 실려있다. 이는 이 책이 사카모토 류이치의 사실상 마지막 책이기 때문에, 그가 죽기 전,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그와 대화를 하고 또 사망에 이르는 과정을 듣고 지켜본 타인, 인터뷰어이기 때문에, 그가 경험한 설명이 필요하다는 전제에서 작성 된 내용이다.

모두 출판사 신쵸의 기획으로 수록 내용 일부는 신쵸의 월간지에서 미리 공개됐고, 추가 내용이 더해져 단행본으로 나왔다. '음악으로 자유로워지다' 이후 15년만에 두번째 책 '나는 앞으로 몇 번의 보름달을 볼수 있을까'가 출간됐다.


8. 류이치사카모토소셜프로젝트코리아[편집]




한국에 <Ryuichi Sakamoto Social Project, Korea 류이치사카모토소셜프로젝트코리아> 가 있다. 사카모토 류이치가 2010년 12월 소셜 미디어를 활용한 실험 프로젝트 「skmtSocial Project 사카모토 소셜 프로젝트(통칭, #skmts)」가 본래 명칭이며, 여기에 Korea를 붙여, 한국 관객에게 보다 집중된 정보를 제공하고자 일부 팬이 자원해서 만든 정보 채널이다. 현재는 <itmusiccreative 잇뮤직크리에이티브>라는 곳에서 운영하고 있으며, 사카모토 류이치의 각종 소식을 한국어로 번역하여 전달하고 있다. 팬이 운영하는 뉴스 채널로 사카모토 류이치와는 공식적으로 관계가 없다.

파일:2011skmt.jpg

이들이 처음 활동에 나서기 시작한 것은 2011년 1월 9일 사카모토 류이치의 단독 콘서트 <Ryuichi Sakamoto|Playing the Piano - Korea 2011>가 계기였는데, 그 때 당시 사카모토 류이치의 내한 일정을 공연 기획사 측에서 제대로 전달 하지 않아서, 팬들의 불만의 목소리가 컸다. 이를 염려한 일부 팬들이 공연 기획사측과 협의하여 사카모토 류이치의 각종 일정 전달 받아 이를 정리하기 시작했고, 이것이 각종 SNS등으로 퍼져나갔다. 당시 사카모토 류이치는 홍보 일정의 하나로 가수 윤상이 진행하는 KBS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 했었고, 이 날 방송에서 윤상은 직접 이들의 블로그를 언급하기도 해주기도 했다.

파일:skmttrio2021.jpg

2012년 12월 9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류이치 사카모토 트리오 내한 공연 <Ryuichi Sakamoto Trio Tour 2012|Japan & Korea> 에서 부터는 본격적으로 업무 일부에 참여한다.

파일:LIFELIFEposter.jpg

시간이 흐른 뒤 2018년 서울 회현동 Piknic 에서 열린 사카모토 류이치의 특별전 [RYUICHI SAKAMOTO: LIFE, LIFE] 에서 이들 프로모션에 함께 참여해줄것을 제안, 사전 준비 일정에 참여한다.

파일:piknic2023.jpg

사카모토 류이치의 사망 직후 출간된 <나는 앞으로 몇 번의 보름달을 볼 수 있을까>가 한국의 위즈덤하우스에서 한국어판으로 발간되었다. 본 책의 출간을 기념하여, 위즈덤하우스측에서 출간 기념 추모전을 기획했고, 이를 서울 중구에 위치한 전시공간 Piknic에 제안하여 성사되었다. 추모전은 2023년 7월 13일부터 7월 31일까지 3주동안 진행됐다. 추모전 소식을 알리는 보도자료가 처음 공개된 당일, 위즈덤하우스와 류이치사카모토소셜코리아측에서 이 내용이 선공개되었다.

이렇게 입소문 난 추모전은 후반부로 가면서 관객이 증가. 추모전은 성황리에 마무리 되었다.

잇뮤직크리에이티브가 운영하는 류이치사카모토소셜프로젝트코리아의 SNS 채널은 해당 링크#에서 확인 할 수 있다.


9. 다른 아티스트와의 관계[편집]


5살 이상 나이 차이가 나지만 동료 이상으로 친하다. 물론 풍파가 없었던 건 아니지만, 호소노 하루오미의 앨범 중에는 사카모토가 세션으로 참여했었던 앨범이 많았고, YMO 초기에도 호소노의 명성을 빌려[27] 활동했었던 만큼 사카모토의 초기 명성 증대에 큰 영향을 준 인물이다.
YMO 시절 타카하시 유키히로의 중재에도 불구, 장기간 반목하며 해산했지만 각자의 경력을 쌓던 십여년의 기간이 지난 후에는 다시 만남을 이어나갔다. 이후 호소노 하루오미는 그 시절의 류이치를 두고 '파더 콤플렉스'라며 다섯 살 많은 본인에게 억눌린 자아를 해소하는 느낌을 받았다는 소감을 남겼으며 사카모토 류이치는 그때의 자신을 만난다면 '두들겨 패주고 싶을 것이다'라며 간단한 회고.
호소노 하루오미는 사카모토 류이치 사후 본인의 안부를 걱정하는 사람들에게 "류이치는 몇 년에 걸쳐 준비를 하고 영면했으며, 본인이나 가족도 후회없이 떠났기 때문에... 저도 그걸 알고 난 후에 편안하게 지내고 있다"라며 자신의 근황을 전했다.

동년배이지만 생일로 치면 사카모토가 5개월 빨리 태어났다. 사카모토 류이치의 정규 1집 앨범 의 앨범 자켓 디자인과 코디네이팅은 물론 초기 작품 전체의 드럼으로 참여를 줄곧 해왔다. [28]
상술했듯 둘은 막역한 사이로 보여져왔는데, 지난 2023년 1월 14일 사망했다. 2020년 8월 심한 편두통으로 건강검진을 받았는데 여기서 뇌종양 판정을 받았고, 몇차례의 수술과 재발을 반복해왔고, 최근까지 활동을 중지한 채로 요양중이었다. [29]
사카모토 류이치의 마지막 정규 앨범으로 보고 있는 <12>가 그의 생일인 1월 17일에 발매되었는데, 정식 발매가 되기 며칠전에 다카하시 유키히로가 사망하면서 큰 상실감에 빠진것으로 알려져있다.

시티팝의 거장 야마시타 타츠로가 아주 선호한 키보디스트 셋(사토 히로시, 사카모토 류이치, 히로유키 남바)중 1인. 타츠로의 고평가되는 앨범인 SPACY(1977) 활동기 및 커리어 초창기에 사카모토가 라이브에 빠지는 일이 없었다. 이렇게 어려울 때 세션을 많이 해준 덕인지 타츠로 이 양반도 사카모토의 정식 데뷔앨범을 포함해 많은 앨범에 참여했다.

  • 야노 아키코
전 부인.YMO 세션을 많이 도와준 덕인지 자신도 도움을 많이 받고 결혼까지 했으나 야노의 종교 문제로 별거에 돌입, 사카모토는 이후 지금의 아내인 노리카 소라와 함께 살면서 두명의 아들을 낳았다. (최근 유산 상속 문제로 노리카 소라와 그의 아들들이 이제서야 사카모토 류이치의 법적인 가족으로 등기되었다.) 가장 최근에 있었던 WORLD HAPPINESS 페스티벌에서 함께 무대에 오르기도 했다. 이는 야노 아키코가 다카하시 유키히로와 호소노 하루오미등과는 여전히 돈독한 관계를 유지해왔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후문.
사카모토 류이치의 대표곡 의 퍼블리싱을 야노 아키코의 회사에서 현재까지도 관리하고 있다. 수익 배분 비율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 때문인지 실제로 이들이 법률상 이혼이 확정시 된 것 시점이 2006년 무렵이었다.(야노 아키코와는 80년대 후반 별거에 들어갔고, 그 전부터 사카모토 류이치는 현재의 아내인 노리카 소라와 동거 생활을 하면서 아이를 낳아 지금의 가정을 이루었다.) 당시 이렇게 오랜 시간 재판을 조정해온 가장 큰 원인으로 의 저작권 이전 문제로 보고 있는 해석이 많았다.

대학 시절부터 오랜 친구로 야마시타 타츠로, 새디스틱 미카 밴드의 다카나카 마사요시등과 자취방에서 우동을 만들어 먹으며 곡 작업도 하는 등 동고동락을 해온 절친으로 데뷔 시절 세션을 많이 도와주는 등 사카모토 류이치는 오오누키의 작품성향을 만드는데 도움을 많이 주었다. 그래서 사카모토가 어려워 하는 뮤지션이면서 동시에 사카모토에게 조언 할 수 있는 몇 안되는 뮤지션 중 한명이다.
2010년 무렵 사카모토 류이치의 곡에 오오누키 다에코가 가사를 붙여 완성한 앨범 가 발매되었고 또 2023년 3월, RADIO SAKAMOTO의 마지막 방송을 그녀에게 일임했다.

호소노 하루오미의 소개로 1978년부터 키보드를 쳐주었고 그당시 앨범들을 보면 수준급이라고 한다.

타카하시 유키히로가 속했던 사디스틱 미카 밴드의 기타리스트. YMO의 1집 기타 레코딩에 참여하는 등의 교류를 했다. 사카모토 류이치 또한 타카나카 마사요시의 앨범인 JUNGLE JANE, Ballade 등에 참여하기도 했다.

  • 김덕수
사카모토 류이치와 TBS가 함께한 "ZERO 지뢰폭탄 제거 프로젝트 "에서 사실상 처음 협연했다. 인연은 그 이전부터 있어온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정확한 내용은 공개되지 않았다. 이후 김덕수와는 영화 <남한산성>에서 다시 협연했다. 특히 한국 전통 악기 (북, 장고등)과 판소리가 가능한 여성 보컬이 필요로 했는데 당시 김덕수가 그와 함께 해온 제자, 동료들을 소개해주었다. 그래서 당시 남한산성의 사운드트랙 마감을 위해 사카모토 류이치는 비공개로 한국에 방문했다. 녹음은 서울 강북구 미아동 성신여대 캠퍼스에 소속된 Red Brick Wall에서 진행됐다.
사적으로도 오랜 시간 친분이 있어 한국에 방문하면 꼭 만나고 가는 지인이며, 가족끼리도 친해서 매번 만날때마다 김덕수의 아내분이 직접 김치를 만들어 선물한다고.

  • 정재일
2000년 초반 서울 혜화동에서 처음 만난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사카모토 류이치와 TBS가 함께한 "ZERO 지뢰폭탄 제거 프로젝트 "를 위해 김덕수와의 레코딩 당시 김덕수가 소개해 준것으로 알려져있는데 확실치는 않다. 하지만 정재일이 어린시절부터 거의 모든 장르의 음악을 구사해왔기 때문에 (현대음악은 물론 국악에도 재능이 높아 판소리를 현대적으로 해석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으며, 국립극장에서도 자주 공연을 올리고 있다.) 당시 김덕수는 물론 음악계 어른들 사이에서 눈여겨 보는 젊은 재목으로 유명했다.
이후 2018년 PIKNIC 개관 전시를 진행하면서 홍보성 기사로 정재일과 함께한 인터뷰가 진행되면서 17년만에 조우했다.잇뮤직크리에이티브측에 따르면 사카모토 류이치가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을 보았으며, 본 영화의 음악 역시 정재일이 맡았다는 것을 알고 무척 감동했다고 말했다고.

2003년경 MC 스나이퍼가 사카모토에게 The Sheltering Sky의 샘플링 허락을 직접 맡았고, 그 곡을 샘플링하여 MC 스나이퍼는 자신의 2집 앨범 수록곡 Baby don't cry를 작곡하였다. 그 외에도 사카모토와 함께 1개월 동안 일본 현지에서 공연과 같은 음악적 활동을 하였으며# ##, 직접 사카모토의 녹음실에 소주를 보내기도 하였다고 한다. 여담이지만, 이때 사카모토의 매니저는 더이상 소주를 선생님 녹음실에 보내지 말아달라고 하였다고 한다. 이유는 사카모토가 소주를 먹고 항상 녹음실에서 잔다고…

2022년 9월 슈가의 바람으로 비공개 만남을 가졌다. 슈가는 인스타그램에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로렌스'를 연주한 곡을 올리는 등 팬심을 드러내오기도 했다. 사카모토 류이치는 이때의 만남에 관해 "이야기를 나눠보니 교만함이 없는 청년으로 음악 활동에 매우 진지하게 임하고 있다"고 전하기도 했다. 국내기사 사카모토 류이치 별세 시에 슈가는 SNS에서 애도의 뜻을 표했다.


10. 사건사고 및 비판[편집]


후술하겠지만, 사회적인 면에서 평화와 인권을 외치는 모습과는 달리 정작 본인의 행실에서는 주변 사람, 가족, 사물 등 대상을 가리지 않고 일상적으로 폭력을 행사해오거나 혐오발언을 해 온 것이 밝혀지고, 그러다 못해 말년에는 장애인 동급생을 학대해놓고 전혀 반성하지 않은 음악가를 옹호하는 망언까지 하여 일본 현지에서는 사후 그의 음악성을 기리는 것과 별개로 그의 인간성마저 미화하는 일각의 시각에 위화감을 표하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다.

10.1. 인성 문제[편집]


  • 문예춘추(文藝春秋) 2012년 2월호 인터뷰에서 본인이 직접 밝히기를, 젊은 시절 YMO로 인기를 얻은 뒤 회사에서 개인 운전수를 고용해줬는데, 본인이 그날 그날 기분에 따라 패거나 괴롭히고 못살게 군 탓에 견디지 못하고 그만둔 사람이 여럿이었다고 한다. 이에 대해 본인 왈 젊은 시절에는 체력에 자신이 있었다고(...).

  • 음주 후 취한 채로 거리를 걷다가 어느 이탈리아 레스토랑의 음식모형 전시대에 먼지가 쌓여있는 것을 보고 격분해 때려부수다가 인근 경찰서에 연행된 전적이 있다.

  • 매니저에게 자신이 좋아하는 가게의 불고기 도시락을 사오라고 시켰는데 해당 가게에 주문이 불가한 상황이라 어쩔 수 없이 다른 가게의 같은 메뉴를 사오자 매니저를 패고 도시락을 집어던진 뒤 해고했다는 이야기를 술회하기도 했다.

  • 부인공론(婦人公論) 2018년 7월 24일호 인터뷰에서 그의 딸 사카모토 미우는 어린 시절, 당시 체벌이 당연시되는 시대이기도 했지만 아버지 사카모토 류이치는 유독 심했던 기억이 있다며, 내가 잘못해서 맞는 것인지, 단지 아버지 개인적인 분노를 나에게 표출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때가 많았다고 회상했다.

  • 대충일간이토이신문(ほぼ日刊イトイ新聞)이라는 웹사이트의 특집기사 3회차에서, 츄리닝을 입고 다니는 사람이나 식당에서 혼자 밥을 먹는 사람을 보면 불쾌감을 느낀다는, 밑도 끝도 없는 혐오 발언을 하기도 했다. #



10.2. 오야마다 케이고 옹호 논란[편집]


  • 2021년 9월 21일 본인과 오랫동안 교류했던 오야마다 케이고가 자신의 학교폭력 사실에 대해서 트위터로 장문으로 사과한 내용에 대해서 사카모토 류이치는 본인의 인스타그램으로 "읽으면서 눈물이 났다. 앞으로도 그의 음악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발언했다가 비난하는 댓글을 여럿 받았다. 해당 문서에서도 알 수 있겠지만, 오야마다 케이고는 학창시절에 장애인 동급생을 학대하고, 거기서도 모자라 그 후 성인이 되어서도 반성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 여전히 자신으로 인한 피해자를 무시하고, 대중 앞에 대놓고 자신의 악행을 무용담 늘어놓듯 하고, 나중에 그것이 자신한테 크게 불리해지고 나서야 사과한 사람인데, 분위기 파악도 못하고 그러한 사람을 옹호하는 발언은 크게 질타를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로부터 불과 얼마전 2020 도쿄 올림픽 조직위원장 모리 요시로의 '여성 이사가 많아지면 회의가 오래걸린다'라는 발언에 대해서는 성차별적인 발언이라며 트위터를 통해 강도 높은 비난을 하며 사퇴를 요구했던 사람이, 정작 그보다도 더 심한 오야마다의 논란에 대해서는 어줍잖은 쉴드를 치는 모습에 전형적인 내로남불이라는 반응이 많았다.


10.3. 유희열에 의한 표절 논란에 대한 입장[편집]



10.3.1. 개요[편집]


  • 2022년 6월, 한 네티즌에 의해 가수 겸 작곡가 유희열이 소속사 안테나, 그리고 SK디앤디의 'episode'가 함께한 프로젝트 '생활음악'에서 발표한 곡 《아주 사적인 밤》이 사카모토 류이치의 《Aqua》와 유사하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이 소식은 SNS를 통해 급속도로 퍼지기 시작했고, 곧바로 유희열은 안테나의 공식 SNS를 통해 사과문을 게재했다. 사과문에서 유희열은 후속 조치를 마련하겠다는 공약을 내세웠지만, 며칠이 지나도록 감감 무소식이었고, 그 며칠이 지나는 동안 또 다른 표절 의혹들이 제기되면서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 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난 2022년 6월 14일, 사카모토 류이치의 소식을 국내에 전달하는 SNS채널 '류이치사카모토소셜프로젝트'을 통해 본 채널을 운영하고 있는 잇뮤직크리에이티브가 '유희열의 <생활음악>에 대한 입장문'을 게재한다.


유희열의 <생활음악>에 대한 입장문 (2022. 6. 14)
먼저 유희열 씨의 작품에 관련하여 진심 어린 메시지에 감사드립니다.
저희는 얼마 전, ‘누군가 당신의 ‘Aqua’라는 곡을 표절했다’고 한국의 한 유튜브 링크를 통해 제보 받았습니다. 사카모토 류이치와 우리 직원들은 즉시 두 곡의 ‘유사성’을 확인했습니다. 그러나 음악적인 분석의 과정에서 볼 때 멜로디와 코드 진행은 표절이라는 논점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판단했습니다.

저희는 종종 전 세계의 팬들로부터 유사한 제보와 클레임을 많이 받기 때문에 법적인 조치가 필요한지 여부를 결정하기 위해 각 사례들을 면밀히 분석하고 검토합니다. 앞에서 언급했다시피 위와 같은 이유로 유희열 씨의 곡은 어떠한 표절에 대한 법적 조치도 필요치 않다고 생각합니다.




나에게 본 사안을 제보해 주신 팬 여러분과 이 건에 대해 공개적으로 이야기하려는 유희열 씨의 솔직한 의도에 감사드립니다. 두 곡의 유사성은 있지만 제 작품 ‘Aqua’를 보호하기 위한 어떠한 법적 조치가 필요한 수준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나의 악곡에 대한 그의 큰 존경심을 알 수 있습니다.

나는 내가 사랑하고 존경하며 많은 것을 배운 바흐나 드뷔시에게서 분명히 강한 영향을 받은 몇몇 곡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내가 바흐나 드뷔시와 같은 수준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니므로 오해는 말아주세요.

모든 창작물은 기존의 예술에 영향을 받습니다. (책임의 범위 안에서) 거기에 자신의 독창성을 5-10% 정도를 가미한다면 그것은 훌륭하고 감사할 일입니다. 그것이 나의 오랜 생각입니다.

나는 여전히 내가 만드는 모든 음악에서 독창성의 비율을 높이기 위해 최선을 다합니다만 쉽지 않은 일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또한 예술을 아름답게 만드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유희열 씨와 팬분들의 아낌없는 성원에 감사드립니다.
유희열 씨의 새 앨범에 행운을 기하며 그에게 최고를 기원합니다.


사카모토 류이치




저희는 사카모토 류이치가 모든 것을 말했다고 생각합니다.
저희는 모두 유희열 씨의 새 앨범 발매와 성공을 기원하고 응원합니다.

주저하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시길…
추가적인 사항이 있을 시에는 언제든 연락 부탁드립니다.




10.3.2. 정황[편집]


  • 본 입장문은 사카모토 류이치 측에서 직접 발표한 공식 입장문이 아닌 개인적인 메시지인 것으로 밝혀졌다.

이후 한창 논란이 이어지던 끝에 유희열이 KBS 프로그램 유희열의 스케치북에서 하차를 하게 되면서, 해당 논란은 소강 국면에 접어들었지만, 이번 일에 대해 찜찜함을 버리지 못한 몇몇 언론사 관계자들이 화제성이 줄어든 후에도 잇뮤직크리에이티브의 관계자와 연락을 시도한 끝에 몇 가지 설명은 들을 수 있었으나 현재로써는 외부에 언급을 자제하길 요청하고 있다. 그 외 자세한 건 유희열 표절 논란 참조.


11. 여담[편집]


  • 별명으로는 교수(教授)가 대표적이다.# 세계의 사카모토(世界のサカモト)도 있다.

  • 의외로 다양한 예능방송에 출연하기도 했다. 우타방[30]이나 HEY!HEY!HEY!뮤직 챔프#와 같은 토크 방송 뿐만 아니라 80년대에 YMO 멤버들과 함께 THE MANZAI의 게스트로 출연하기도 했고 우리들은 익살족에 출연하기도 했고# 1990년대 초 일본의 유명 콩트 프로그램인 '곳츠에에칸지'에 게스트로 출연하여 '아호아호맨'이라는 코미디 연기를 펼친 적이 있으며# 몰카 콩트도 존재한다. 아카시야 산마 항목 하단 보면 알겠지만 여장을 하고 산마를 덮치기도 했다.

  • 뉴욕과 도쿄 양 쪽에 집을 가지고 있지만 2000년대 이후는 뉴욕 맨해튼의 집과 스튜디오가 주거지이다. 뉴욕에서 애용하는 단골 일식당의 BGM이 도저히 못 들어줄 수준이어서 직접 플레이리스트를 짜준 일화가 있다. NY타임즈 기사

  • 한국 출신의 세계적인 전위예술가 백남준 선생의 영향을 받아 그를 위한 곡 'A Tribute to N.J.P.' 를 내기도 했다. 2004년 발매한 개인 앨범 'Chasm'에 MC 스나이퍼가 한국어로 랩을 한 곡 Undercooled가 1번 트랙으로 포함되었는데, 전세계로 판매되는 해외 아티스트의 공식 앨범에 한국 래퍼가 한국어로 랩을 한 것은 유래없는 일이다. 이는 MC 스나이퍼가 그의 곡 'Baby don't cry'에서 사카모토의 The Sheltering Sky의 피아노 샘플을 사용하기 위해 연락을 하고 가사의 의미나 주제를 설명하며 교류를 가지게 되었는데, 당시 사카모토는 9.11테러에 꽂혀 이 곡을 작업하였고 '반전'이라는 주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어 적당한 래퍼를 섭외하려고 했는데,[31] 마침 교류중이었던 MC 스나이퍼가 표현하는 가사의 주제 등에 호감을 가져서 그를 참여시킨 것이라고 한다.[32] 2011년 1월 자서전인 '음악으로 자유로워지다'를 한국에 출간했으며, 2011년 1월 8, 9일 서울에서 10년만의 내한 연주회를 하였는데, 이는 한국 팬들이 트위터로 공연해달라는 요청이 있었고 '안 그래도 그런 고려를 하고 있다'라고 이야기가 나온 뒤 공연이 확정된 것이었기에 팬들의 기대를 들어주는 아티스트로 공인되었다. 스스로도 한국을 친하게 느끼며 이후에도 가능한 한 자주 들르고 싶다고 이야기하였다.[33] 그러나 10년만의 내한 공연이었던 점을 고려하면 그냥 그의 해외공연을 쫓아가서 보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2011년 이후로는 약 1년마다 한국에 오기 때문에 아쉬움을 달랠 수 있을 듯. 그러던 게 12월 9일 세종문화회관에서 트리오 공연이 확정. 이미 공연 예매는 여름쯤에 완료된 상황이다. 2018년 10월 4일에 열리는 부산국제영화제에 참가하여 2019년 개봉하는 영화 '안녕, 티라노'의 OST를 피아노 독주로 연주한다고 한다. 사카모토는 이 영화의 음악 감독을 맡았다.#

  • 2000년도 들어서 특이하게 Alva Noto라는 앰비언트 뮤지션과 자주 합작을 하곤 했는데, 굉장히 실험적인 성향이 강했다. 심지어 몇 차례 공연도 했던 모양. 앰비언트에 내성이 없는 사람들은 엄청난 아스트랄함을 느낄 수 있다. 해당 영상 그 외 Fennesz라는 앰비언트 뮤지션하고도 자주 합작하는 편이라고 한다.

  • 2018년 기사에 따르면 한국의 음악 프로듀서 정재일과 밴드 새소년에 관심이 있다 한다. 그리고 같은 해 뉴욕에서 새소년을 만났다. 새소년 에코백을 착용한 사진이 화제가 되었다. 링크

  • 2017년 10월 3일 개봉된 남한산성에서 음악감독을 맡았다. 한국 영화음악은 처음 참여한 것이다. 결국 <남한산성> 음악감독으로 2017년 11월 9일에 영평상(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음악상을 수상하였다. 자세한 건 링크 참조 이 후 대종상에서도 음악상을 수상하였으나 그는 그 자리에 참석하지 않았기 때문에 트로트 가수 한사랑이 그와 김지연 대표(싸이런 픽쳐스)를 대신하여 대리수상을 하였다. 그런데 작품과 전혀 상관 없는 사람이 대리수상했다는 논란이 커져 영화제의 위상이 많이 떨어졌다.


  • 특이한 영상을 찍었다. #1(비공개) #2[34]하츠네 미쿠도 뒤집어 쓰는 아저씨니까 말이다.# 원본 트윗 [35] 심지어는 데뷔 초기 시절에도 코미디 방송에 나올정도. 2분 14초 참고

  • 의외로 1980년대에 아이돌 곡을 제작한 적도 있다. 그 중 대표작은 오카다 유키코입술 Network. [36] 사실 옐로우 매직 오케스트라의 호소노 하루오미 역시 마츠다 세이코나카모리 아키나[37]의 곡에 작곡으로 참여한 것을 감안하면 이상한 것은 아니다.


  • 2020년 12월 12일 도쿄의 스튜디오에서 온라인 라이브 콘서트를 열었다. 일본에서 연말에 여는 피아노 콘서트는 2013년 이후 7년만이며, 이 피아노 라이브 콘서트는 한국 포함 세계 12개 국가 및 지역에서 동시에 중계되었다.

  • 전성기 시절의 마돈나의 뮤직비디오 Rain에 출연하여 감독으로 연기한 바 있다. 자신이 음악적 참여를 하거나 연출을 한 것은 아니고 그냥 단순 출연. 93년도 MTV뮤직 어워드에서 예술상과 촬영상을 수상한 작품으로 최신 뮤직비디오보다도 영상미가 오히려 더 뛰어나다.



  • 2003년 3월 5일부터 2023년 3월 5일까지 두달 간격으로 비정기 팟캐스트 방식으로 Radio Sakamoto를 진행했다.# 라디오 방송국 J-WAVE에서 내보내기도 했고 진행시간은 0시부터 약 한두시간 정도로 진행했고 사회돌아가는 이야기, 음악 이야기, 자신의 음악을 보내서 사카모토에게 오디션을 보내는 코너, 자신의 플레이리스트를 소개하는 코너 등으로 구성되었다. 마지막 회 방송은 타카하시 유키히로 추모 방송으로 오오누키 타에코가 진행을 담당했다.

  • 스코틀랜드 밴드 모과이의 2021년 곡 '리치 새크라맨토(Ritchie Sacramento)'의 제목은 사카모토 류이치의 이름에서 따왔다. 인터뷰에 따르면 모과이 멤버들이 사카모토의 이름을 잘못 이해한 데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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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장녀는 대학 시절 결혼했다 이혼한 첫째 부인과의 사이에 얻은 딸, 장남은 둘째 부인 야노 아키코가 데려온 의붓자식, 차녀가 둘째 부인 야노 아키코와의 사이에 얻은 사카모토 미우, 차남은 매니저 소라노 리카와의 사이의 사생아이다. 2006년 야노 아키코와 이혼한 뒤 따로 배우자는 없다.[2] 일본에서는 공문서를 포함하여 일본인의 씨명을 로마자로 표기할때는 서양식인 이름-씨 순서로 사용하는 것이 공식이었다. 2019년에서야 이 원칙이 폐기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적으로는 자신들의 씨와 이름명을 이름-씨 순으로 표기하는 예가 여전히 많다.[3] 비단 이런 문제는 일반인들만이 아닌 일본문화에 친숙한 사람들조차도 일본어를 잘 모르던 시절 패키지 등에 이름이 영어로 쓰여진 것을 보고 그 순서대로 이름을 익히게 되는 경우가 많이 있다. 유명한 게임음악가 코시로 유조같은 경우나 ZARD처럼 이름이 아닌 유닛명으로 활동하는 경우 그쪽에 큰 관심이 없을 경우에는 대체로 이름-성 순서로 기억해버리기 쉽다.[4] 도쿄도립 신주쿠 고등학교 재학 당시 고등학교 전공투를 결성했고, 무려 바리케이트 봉쇄를 단행한 바 있다.[5] 앨범 풀네임이 'Thousand Knives Of Ryuichi Sakamoto'라서, 일부 웹사이트에서는 이 앨범의 제목을 'Thousand Knives of' 까지만 표기하는 OME스런 경우도 있다. 앨범의 타이틀 곡 첫머리에서 사카모토가 읊는 음성변조된 한시는 마오쩌둥정강산 투쟁을 두고 지은 시 《정강산》인데, 이후 싱글컷되면서 시 낭독은 빠졌다. 이 외에도 마지막 트랙 The End of Asia에서는 동방홍의 선율이 어레인지되어 활용되는 등, 앨범 전반에 걸쳐 당시 사카모토가 품고 있던 중국 문화에 관한 관심이 녹아있다.[6] J-Pop을 비롯한 영미권 팝음악 전반.[7] 1983년 12월 '산개' (YMO는 해산을 스스로 이렇게 불렀다) 라이브 때의 모습이다.[8] 전자음악 관련해서 그룹 내 영향력이 컸기 때문도 있었지만, 젊은 시절부터 얼굴이 남자답게 잘생기기로 유명해서 특히나 알아보는 사람이 많았기에 자주 시달렸다고 한다. 평소에 사람들과 어울리는 걸 좋아하지 않던 젊은 시절의 사카모토는 이를 매우 힘들어했다.[9] 이상의 개인력은 자서전 '음악으로 자유로워지다'에서 참고하였다. 흥미로운 내용이 더 많이 담겨있으니 천재의 삶을 알고 싶다면 자세한 것은 자서전을 참고할 것.[10] 엄밀히 말하자면 이 곡은 YMO의 다른 멤버인 타카하시 유키히로의 곡이다. 사카모토의 곡이 아니다.[11] 사카모토 본인 말에 의하면 마이클 잭슨에 대해 잘 모르고 딱히 팔고 싶은 생각이 크질 않아서 생각없이 라이선스 비용을 크게 불렀더니 그냥 포기했더란 말이 있다. 곡이 들어갈 뻔했던 MJ 앨범이 그 Thriller였으니 이후 그냥 제발 넣어달라고 할 걸 많이 후회했다고 농담삼아 한 이야기. 다른 썰로는 앨범 프로듀서였던 퀸시 존스가 앨범이 너무 댄스곡 투성이라 완성도를 위해 반대했다는 설도 있다.[12] 마이클 잭슨의 초기 데모는 Thriller가 발매된 지 40년이 지나서야 오래 전부터 돈독에 오른 소니 뮤직에 의해 공개되었다. Behind the Mask (Mike's Mix)[13] Croatian Rhapsody로 유명한 막심 므라비차가 이 곡을 커버한 것도 매우 유명하다. 그 외에도 로튼 그래프티, 우타다 히카루, FACT(밴드) 등의 아티스트들이 커버를 하기도 했다.[14] 축약하자면, 어느 강제징용 된 조선인 군속이 소속 부대에 수감되어있던 연합군 포로들 중 한 명과 눈이 맞아서 사고를 쳤다가 걸려서 처형(할복)당하는 부분. '군인'과 '포로'라는 단어에서 이상함을 눈치챌 수 있듯이 남성들끼리 일어난 일이다. 애초에 영화 전체가 지금도 그렇지만 이 영화가 발표된 1980년대에는 문제가 안 될라야 안 될 수가 없는 동성애를 영화 내에서 중요한 장치로 매우 진하게 깔고 있는데다가, 전술한 '조선인이 부당하게 일본군에게 처형당하는 전개' + '조선인이 동성애를 저지르는 전개'에 당시는 일본문화가 개방될 수 없던 상황이라는 압도적인 쓰리 콤보 때문에 당연히 한국에서 정발이 될 리가 없었다.[15] OST를 맡기려는 감독에게 무슨 호기였는지 배역을 맡겨주면 한다고 했다고. 나중에 연기도 너무 어렵고 곡도 잘 안나와서 너무 힘들었다고 한다.[16] 한국어 더빙판에서는 이정구가 이 배역을 맡음.[17] 이 때 가이낙스에서 보내준 콘티를 보고 프레임 단위까지 타이밍을 맞춰서 OST를 썼는데, 정작 완성된 영화는 콘티와는 상당히 다르게 편집되어서 장면과 음악이 전혀 싱크가 맞지 않아 크게 실망했다는 일화가 있다.[18] 다만 담배가 원인일 가능성이 있는데 공연 영상을 보면 연주를 하며 담배를 피우거나, 인트로 영상에서도 피우는 모습이 보이는것을 보아 실제로 흡연자인 모양이다. 인터넷에도 흡연 장면이 꽤 있다.[19] 같은 YMO의 멤버였던 타카하시 유키히로도 데뷔 50주년을 기념하여 NHK 홀에서 9월에 라이브 공연을 가질 예정이었으나, 한 달 정도 지난 7월 12일 자신의 공식 홈페이지에서 뇌종양 투병 사실을 공개하면서 공연을 연기한다고 발표했다.[20] picnic 사카모토 류이치 전시회[21] 본인의 인터뷰[22] 관련 인터뷰[23] 2008년도 인터뷰에서 밝히길 14살 즈음에 드뷔시의 환생임을 반쯤 믿으며 그의 싸인을 연습해보는 정신이 좀 이상한 아이였다고 회고한다. 실제로 거칠고 반항적이었던 청년기적 인성과 여성편력도 닮았으며, 말년에 성품이 온화해진 것도 비슷하다. 우연의 일치라기에는 너무 안타까운 결말이나 끝내 그도 드뷔시와 같은 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24] 특히, 대학시절부터 민속 음악에 대한 관심이 많고 학위를 받은만큼 전 세계의 민속 음악들과 전자음악을 결합한 실험적인 음악들이 많다. 인터뷰 때마다 인도네시아 발리 섬은 뉴욕 바로 옆에 있는 것 같고, 일본 팝 음악은 마치 아랍 억양처럼 들리는 것 같다고 말했듯, 두 가지 이상의 문화를 이질감 없이 어우러지게 만드는 것을 좋아하는 것 같다. 특히, 한국의 국악에도 엄청 관심이 많다. 윤상의 음악에도 이러한 영향을 받아서 음악적인 다양한 시도가 많다.[25] 영화 속에 포함된 건 피아노 & 바이올린 어레인지 버젼. 원곡은 힙합 느낌이고 스스로 노래도 불렀다. 또한 Trey Songz가 부른 Can't Be Friends의 샘플 원곡이기도 하다.[26] 지구촌에 매설된 지뢰들을 제거해 무고한 희생자를 양산하지 말자는 취지의 기획앨범이다. 참여진만 해도 그 면면이 화려한데, 일본 측 아티스트들만 해도 UA, 테루(GLAY), CHARA, 사쿠라이 카즈토시, SUGIZO 등이 참여하는 등 일본음악 매니아들이 들으면 군침을 흘릴 구성. 해외 참여진도 브라이언 이노, 한국의 김덕수 사물놀이패 등등이 참여하는 등 그 면면이 화려하다.[27] '해리 호소노와 옐로 매직 밴드'나 '호소노 하루오미의 옐로 매직 오케스트라' 등의 명의를 썼다.[28] 사카모토 류이치의 Self-Portrait 역시 다카하시의 드럼.[29] 그의 인스타그램에는 사망 직전 부쩍 마른 모습, 그리고 그의 요양 생활을 함께 해온 아내 키요미 다카하시의 사진이 올라와있다.[30] 2004년 출연했을때 좌중을 압도하는 화려한 입담을 선보였다. 해당 방송에서 MC 스나이퍼와 콜라보한 undercooled 무대를 선보이기도 했다.#[31] 원래는 m-flo의 Verbal과 작업을 하려고 했었다고 한다.[32] 한국 공연시 특별 게스트로 참여하기도 했으며, 유희열이 피아노 연주를 대신하여 지상파 방송에서 공연한 버젼도 있다. 유희열도 사카모토를 매우 좋아하기에 이뤄진 퍼포먼스라고 함. 실제로 내한 공연에 유희열을 포함한 여러 아티스트가 다녀갔다.[33] 일본이나 영미권에서는 주로 40~50대의 중년 남성들이 그의 팬인데, 한국에 와서 봤더니 10대부터 30대에 이르는 젊은 사람들이 싸인회에 와 줄 서있는 걸 보고 여러 가지 의미로 감격했다고 한다. 아무래도 한국에서 일본 대중문화가 90년대 말에 개방되었기 때문에 한국의 중년들은 이 사람을 알기가 어렵다.[34] 실제로 보고 충격받을 사람들을 위해 내용을 요약하자면 여장하고 아카시야 산마를 덮치는 그런 내용이다. 당당하게 담배를 피우는 모습이나 방송에서 딜리버리 헬스(출장 성매매)로 개그를 치는 모습은 한국인이 보기엔 꽤 충격적일 것이다.[35] 어쩌면 이러한 관심 때문에 하츠네 미쿠 오케스트라라는 YMO 커버 앨범도 정식으로 허가를 내준 것으로 보인다. [36] 참고로 작사는 유키코의 같은 소속사 선배 마츠다 세이코(Seiko 명의로 참여). 화려한 작곡진과 절정에 이른 유키코의 인기로 커리어 처음으로 오리콘 1위를 차지하나 활동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돼 극단적인 선택을 해 동시에 마지막 1위 곡이기도 하다.[37] 참고로 사카모토 류이치 역시 나카모리 아키나의 Everlasting Love, NOT CRAZY TO ME 등의 악곡을 작곡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