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라미스 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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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라미스 해전
시기
BC 480년 9월
장소
그리스 남부 살라미스 해협
원인
이오니아 반란 이후, 지속된 그리스와 페르시아의 갈등.
교전국
그리스 연합군
아케메네스 왕조
지휘관
테미스토클레스
에우리비아데스
크세르크세스 1세
아르테미시아 1세
병력
전함 371 ~ 378 척
전함 900 ~ 1,207 척
피해
헤로도토스 주장
전함 40 척
전함 200 척
결과
그리스 연합군의 승리
영향
크세르크세스 1세와 페르시아 원정군 주력의 철수.

1. 개요
2. 배경
3. 전조
4. 병력
5. 전황
6. 전투
6.1. 조우
6.2. 전투
7. 전투 후



1. 개요[편집]



기원전 480년 9월 살라미스에서 페르시아그리스 연합군 간에 벌어진 해전. 이 전투에서 그리스는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페르시아 해군을 격파,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중대한 전환점을 만들었다. 대중에게는 영화 300: 제국의 부활이 흥행하면서 많이 알려졌다.


2. 배경[편집]


테르모필레 전투에 서술된 배경과 동일하다. 요약한다면, 다리우스 1세 때 아테네가 이오니아 반란에 개입하였고 이에 그리스를 정복하기로 결심한 다리우스가 아테네를 공격했으나 마라톤 전투에서 패배했다. 다리우스를 이은 크세르크세스 1세는 6년간의 원정 준비 끝에 20만 대군과 1천 척의 전함을 이끌고 그리스를 침공했다.


3. 전조[편집]


테르모필레 전투에서 페르시아군을 저지하는 데 실패한 그리스군은 후방을 지킨 레오니다스 1세의 영웅적인 희생으로 인해 많은 병사수가 살아남아 철수한다.디스이스 스파르타 그리고 테르모필레의 패배로 아르티메스 해협에 있던 그리스 해군도 철수한다. 그리스 해군은 살라미스 해협으로 철수해 아테네 시민들이 시에서 철수하는 것을 돕는다. 이때 테미스토클레스는 페르시아군에 종군하는 이오니아 도시의 그리스계 시민들의 반란을 선동하는 글이 새겨진 비문을 남긴다. 일종의 삐라인 셈.

페르시아군은 남하하면서 주변에 있는 도시들을 파괴하고 약탈하면서 행군한다. 이들은 드디어 아테네에 진입한다.

그때 그리스 연합군은 코린토스 지협을 지키기 위한 준비를 한다. 만약 페르시아 해군이 이 지협을 그대로 통과해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직접 상륙하면 아무 소용이 없었기 때문에 반드시 그리스 해군이 페르시아 해군을 막아줘야만 했다. 이때 해군 지휘관이자 코린토스 시민인 아데이만투스는 코린토스 지협의 해안가로 철수해서 싸워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테미스토클레스는 이 주장에 강하게 반대하며 살라미스에서 페르시아군과 맞아 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살라미스 해협이 그리스가 페르시아 해군을 무찌를 수 있는 적합한 지형이라고 주장하였는데 결국 많은 장교들이 테미스토클레스의 주장에 동의하였고 따라서 살라미스 해협에 그대로 남게 된다.

실제로 코린토스 지협에서 방어하는 전략을 취했으면 그리스군은 필패했을 것이라는 평이 많다. 우선 역사적으로 코린토스 지협은 어느 쪽이 방자이든 상관없이 중요한 방어 지점으로 평가받으며 급조한 방책이 아니라 진지하게 장기간의 노력을 들인 성벽이 쌓여진 적이 있으나, 공격 측의 진지한 공세에 여러 번 뚫린 역사가 있다. 또한 육지와 바다를 동시에 방호한다는 것은 테르모필레와 아르테미시움의 전투의 패배로 알 수 있는 것처럼 결코 쉽지 않은 전략이었다. 코린토스는 아테네를 포함한 아티카 반도와 스파르타가 위치한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연결하는 목구멍 같은 곳이었는데, 이곳을 지킨다는 것은 역으로 일단 아티카 반도는 포기하고 대치한다는 의미였고 이 경우 페르시아와의 관계 설정이 서로 달라질 수밖에 없다. 마지막으로 테미스토클레스의 예상처럼 살라미스에서 해산한 그리스 연합군이 코린토스에서 다시 모두 집결할 것이라는 보장도 없었고, 페르시아 해군이 코린토스 만으로 진입할 것인지도 입증된 바 없다. 페르시아 해군이 펠로폰네소스 반도 후방으로 돌아들어간다면, 그리고 후방의 몇몇 도시국가들이 크세르크세스와 손을 잡는다면[1] 그리스 연합군은 그대로 패망한다. 당대인들도 이것을 우려하여, 헤로도토스가 아테네인 므네시필로스의 말을 인용하여 이를 설명하였다.

그렇게 되면 모든 사람들은 자신들이 살던 도시로 돌아갈 것이다. 에우리비아데스도 그 누구도 사람들을 단결시킬 수 없고, 함대는 외국으로 흩어지고 그리스는 어리석은 조치 때문에 패망할 것이다.


한편 아테네에 진입한 페르시아군은 도시를 장악하고 선단을 수리하느라 분주하였다. 이들은 이를 위해 2주 정도의 시간을 보냈다. 그동안 크세르크세스는 장군들과 전략 회의를 열었는데 이때 할리카르나소스라는 도시의 여성 지도자인 아르테미시아 1세는 살라미스에 머무는 그리스 해군을 공격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주장하고 그동안 점령한 곳을 다스리며 그리스 폴리스들의 내분을 기다려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크세르크세스와 그의 참모였던 마르도니우스는 이에 동의하지 않고 즉각적인 공격을 하기로 결정한다.

두 선단은 며칠에 걸쳐서 서로 대치하였다. 무엇이 이 살라미스 해전을 시작하게 하였는지는 모르나 기록에 따르면 이 해전이 일어나기 직전 크세르크세스는 그리스 해군이 살라미스를 빠져나가 달아날 것이라는 첩보를 얻었다고 하였다. 이 첩보가 그리스 측에서 페르시아군을 유인하기 위해 일부러 전한 정보인지 아니면 진짜 그들이 철수하려고 하였는지는 확실치 않다. 만일 후자라면, 페르시아 육군이 고린토스 지협으로 진군하고 있었으므로 그리스 해군이 이에 대응하여 육군과 함께 싸우기 위해 철수를 계획하였는지도 모른다.

어찌 되었건 크세르크세스는 이 첩보를 입수한 뒤 그의 해군을 보내 보내 그리스 해군의 퇴로를 봉쇄하기로 결정한다. 따라서 동트자마자 페르시아 해군은 전진한다. 그날밤 페르시아 해군이 움직이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테미스토클레스는 자식들의 가정교사로 쓰고 있던 시킨누스라는 페르시아인 포로를 시켜 크세르크세스에게 편지를 보내 그는 압도적인 페르시아군의 군세에 용기를 잃었으며 따라서 페르시아에 붙겠다고 전한다. 그 뒤 크세르크세스에게 말하길 그리스 지휘관들은 서로 내분을 벌이고 있으며 그 결과 펠로폰네소스 반도 출신들의 그리스 해군들은 단독으로 철수하기로 결정하였다고 말하며 페르시아군이 해협을 봉쇄한다면 승리를 명백할 것이라고 전하였다.

이러한 소식은 크세르크세스가 매우 고대하던 것이었는데 그 이유는 그는 계속해서 그리스인들 사이의 내분을 바라고 있었기 때문이었으며 따라서 이 소식에 완전히 속아 넘어간다. 따라서 그는 그날밤 즉시 그의 함대를 전진시켜 해협을 봉쇄하게 한다. 그리고 이 해전을 관람하기 위해 크세르크세스는 아이갈레오스 산의 벼랑 높은 곳에 황금 옥좌를 만들게 하였다.

이때 그리스 지휘관들은 서로 격렬하게 토론을 하고 있었다. 펠로폰네소스 출신의 그리스인들은 해협에서 철수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고 이미 투표 결정의 다수결의 원칙에 의해 거의 후퇴가 확실시 된 상황이었다. 즉 테미스토클레스가 크세르크세스에게 보낸 소식은 완전히 가짜는 아니었던 셈이었다. 이때 도편추방 당했었던 아테네의 정치가 아리스티데스가 밤에 찾아와 페르시아 해군이 해협을 봉쇄하기 위해 포진하였다고 테미스토클레스에게 전한다. 이러자 테미스토클레스는 페르시아 해군이 해협을 봉쇄했다고 자신이 말해봤자 안 믿을 것이고 아리스티데스는 테미스토클레스의 정적이기도 하며 정직함으로 이름 높았기에 내일 군사회의에서 모든 사람들에게 직접 이 말을 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이 소식을 들은 펠로폰네소스 장군들은 모두 전투를 하기로 결정한다. 다만 그 다음 날 전투 준비가 매우 신속하였다는 것을 근거로 지휘관들은 암묵적으로 살라미스 해협에서의 해전에 동의하고 있었지만 휘하 병사들을 설득하기 위해[2] 보여주기용 다툼을 벌인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실제로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 따르면 끝까지 후퇴를 주장하던 사람들이 테미스토클레스에게 "당신 나라는 이미 불타 버렸건만 굳이 다수결의 원칙을 깨려는 이유가 무엇이냐"라고 항의하자 테미스토클레스는 되레 "아테네는 불탔으나 없어지지 않았고 저 200척에 군함 안에 다 들어있다. 장군들이 끝까지 후퇴하겠다면 나는 저 200척을 끌고 이탈리아로 가서 신 아테네를 건설하겠다."라는 분열 협박까지 했다.[3]

다음 날 아침, 그리스군은 전투를 하기 위한 준비를 시작하였는데 페르시아 해군은 밤에 기동하느라 한숨도 못 잤으므로 피로가 심한 상태였다. 그리고 바로 그 아침에 페르시아 해군은 그리스 해군에 공격을 감행하였다. 정확히 언제 이러한 결정이 내려졌는지는 모르나 분명한 점은 페르시아군이 먼저 그리스군을 공격했다는 것이었다.


4. 병력[편집]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그리스 측에는 378척의 트리에레스(trieres, 고대 전함으로 3단 노선)가 동원되었다고 서술하였다. 그리고 실제 전투에 참여한 배는 366척으로 보이며 나머지 12척은 뒤에 남아 본부를 지키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기록에 나온 병력 구성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아테네는 절반 정도 되는 180척의 배를 동원했고 코린토스는 40척, 아이기나 30척, 시퀴온 15척, 에피다우로스 10척, 트로이젠 10척, 헤르미오네 3척, 메가라 20척, 암프라키아 5척, 레우카스 3척, 칼키스 20척, 에레트리아 7척, 케오스 4척, 낙소스 4척, 퀴트노스 2척, 크로톤 1척, 멜로스 2척, 시프노스 1척, 세리포스 1척, 그리고 스파르타(라케다이몬) 측에선 16척을 동원했다.

아테네는 전체 함선의 절반에 가까운 배를 동원하였고 따라서 테미스토클레스가 지휘권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나 다른 동맹시가 반대하였으므로 스파르타인들이 전체 함대의 지휘권을 갖기로 합의한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페르시아는 1207척의 트라이림을 동원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이들 중 200척은 태풍에 의해 파괴되고 50척은 아리테미시움에서 연합군과 대치하는 과정에서 파괴되었을 것이다. 살라미스에서 싸운 적이 있었던 아이스킬루스는 그가 상대한 함대의 수는 1207척이었다고 기록하였고 그중 207척은 쾌속정이라고 말하였다. 디오도루스 역시 1200척이라고 기록한다. 또한 에포루스 역시 1207척이라고 기록하였다. 플라토는 1000척 이상이라고 말하였다.

1207척은 동시대인 472년에 작성된 기록이며 또한 그리스인들은 그 정도의 배와 싸웠다고 다들 믿고 있었다. 기록이 일관된 만큼 많은 현대 학자들도 1207척의 배와 싸웠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어떤 학자는 이 1207척은 트로이에서 등장한 그리스 연합 함대의 수이므로 이는 페르시아 선단의 수로 바뀌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현대 대부분의 학자들은 파괴된 배와 주둔등의 이유로 1207척이 몽땅 살라미스에서 싸웠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르테미시움 해전에서의 손실, 몇 번의 폭풍우로 인한 손실(아르테미시움 해전 당시 에우보이아 섬 후방으로 돌려 앞뒤로 포위하려던 페르시아 함선 200여 척이 갑작스런 폭풍우에 전멸했다고도 한다) 등을 제한다면 약 600에서 800척의 배가 동원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5. 전황[편집]


크세르크세스는 그리스인들이 이렇게 강하게 저항할 줄은 예상하지 못한 듯 하며, 이는 그가 진군할 때 꽤 늦장을 부린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이미 9월이 되어 겨울이 다가오고 있었고 따라서 많은 수의 병력을 보급하기가 곤란해질 것이고 또한 크세르크세스가 페르시아를 오랫동안 비워둘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크세르크세스는 조급해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리스인들은 코린토스 지협에서 집결하여 도랑을 파고 성벽을 건축해 놓은 뒤 이 좁은 길목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테르모필레 전투에서 보여주었듯, 그리스군은 정면에서의 싸움에 매우 강했으므로 크세르크세스가 코린토스 지협을 육군으로 제압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4] 따라서 크세르크세스의 최선은 해전에서 승리하여 펠레폰네소스 반도를 해군과 육군의 합동 작전을 통해 공격하는 것이었고 따라서 그에겐 해군에서의 승리가 절실하였다. 또한 그리스인들의 연합은 이례적인 것이었고 또한 테베 등 페르시아 측에게 돌아선 도시들도 많았기 때문에 만일 크세르크세스가 해전에서 승리한다면 그리스 도시국가들이 서로 내분이 일어날 가능성도 높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세르크세스가 굳이 해전을 치를 이유는 없었다. 이는 위에 아르테미시아가 지적한 대로 페르시아는 이미 그리스 동부 전역을 제압한 상태였고 따라서 군대가 이 지역을 지키면서 그대로 겨울을 나는 지구전으로 갈 수도 있었다. 비록 대군을 보급하는 문제가 있으나 페르시아 해군이 건재하였으므로 해로를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할 수도 있었다. 아르테미시아는 다음과 같이 조언한다.

만일 폐하께서 해전을 서두르지 않으시고 해군을 육지 가까운 곳에 정박시킨 다음 그리스인들과 대치만 하신다면 폐하께선 폐하의 목적을 달성하실 수 있습니다. 그리스인들은 폐하를 상대로 오랫동안 연합할 수 있는 자들이 못됩니다. 이들은 시간이 지나면 내분을 일으킬 것이고 폐하는 이렇게 쪼개진 자들을 각각 처리하신다면 결국 그리스인들은 흩어져 그들의 도시로 돌아갈 것입니다.


또한 페르시아 해군의 수가 워낙 많았으므로 페르시아는 해군을 둘로 나눠 한 선단은 그리스 해군을 견제하고 다른 해군으로는 페르시아 육군을 실어 날라 펠로폰네소스의 후방을 교란하는 방법도 가능하였다. 그러나 크세르크세스는 그해 안에 그리스를 정복하고자 하는 마음이 강했고 또한 페르시아 선단의 수가 많았으므로 자신만만하였다. 그 결과 그는 그리스인과 살라미스에서 해전을 치르기로 결정한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페르시아 해군은 그리스 해군보다 더 항해술이 능했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그리스 연합 함대의 절반 이상을 이루고 있는 아테네 해군의 대다수는 페르시아 전을 앞두고 급조된 것들이라 많은 승무원들이 바다에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당시의 해전은 배 앞쪽의 충각을 이용한 전술이 주류를 이루었고, 이를 효과적으로 구사하기 위해서는 숙련된 항해술을 갖추어야 했는데 그 점에 있어서 페르시아군이 우위에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그리스 전함은 페르시아 전함에 비해 더 무거웠다고 한다. 이는 몇 가지 이유를 추정해 볼 수 있는데, 3단노선의 특성상 여유가 생긴다면 바로바로 배를 뭍으로 올려 건조시켜야 하지만[5] 전력이 크게 열세였던 그리스군에게는 배를 건조시킬 여유가 없었던 때문일 수도 있고, 그리스의 호플리테스의 군장이 페르시아의 것보다 더 무거웠으므로[6] 그랬을 수도 있다.

어찌 되었건 페르시아 전함보다 그리스 전함은 더 무거웠고, 항해술 측면에서는 페르시아 해군이 앞섰으므로 항해술을 최대한으로 살릴 수 있는 넓은 바다에서는 페르시아군이 유리하고, 좁은 바다에선 그리스군이 유리하였다. 따라서 그리스가 페르시아를 이기기 위해선 이 페르시아 함대를 좁은 해역으로 끌어들인 뒤 싸워야만 했다. 아르테미시움 역시 좁은 해역이었으므로 그리스에게 유리했지만 거기서도 페르시아군이 진지하게 공격하자 위기에 처했기 때문에 그리스군, 특히 테미스토클레스는 더욱 좁은 해협에서 싸워야 한다고 인식하였고, 그렇기에 살라미스 해협에서의 전투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인식하였다. 반면 페르시아군에게는 살라미스 해전은 기껏 다 그려놓고 놔두기만 해도 완성되는 그림에다 덧붙이는 사족이나 마찬가지었다. 잘해야 본전이며, 실패하면 그림 자체를 망치는 최악의 선택이었던 것이다.


6. 전투[편집]


그리스 함대는 아테네 함대가 좌편에 그리고 스파르타가 우편에[7] 그리고 다른 함대는 중앙에 포진하였을 것이다. 그리스 함대는 아마도 두 줄로 포진했을 것인데 그 이유는 한 줄로 포진하기엔 해협이 좁았기 때문이다.

전투 전날 페르시아 함대가 전진하여 다음날 아침 그리스 해군의 퇴로를 봉쇄한 것은 틀림없어 보인다. 헤로도토스는 밤에 페르시아 함대가 이미 도착하여 한밤중에 그리스 함대가 도망가면 그 후미를 공격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었다고 하였으나 현대 학자들은 이 점에 대해 의구심을 보이고 있다. 이런 좁은 해협을 봉쇄하기 위한 기동과 배치를 어둠 속에서 한 것은 믿기 힘든 때문이다. 따라서 페르시아군은 그날 밤에 그 근방까지 와서 동틀 때까지 기다리고 있다 동트자 곧장 해협을 봉쇄했다는 학설이 유력하게 제기되고 있다. 페르시아 함대는 이 해협에서 3줄로 배치되어 있었고 그들 중 가장 강력했던 페니키아 함대는 그들의 우익을 담당하였다.

디오도루스는 이집트 함대는 따로 기동하여 후방에 페르시아 함대를 뚫고 달아날 그리스 함대를 요격하기 위해 배치되었다고 하였다. 그런데 헤로도토스는 이를 언급하지 않았으며 따라서 많은 학자들은 이 주장에 근거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적지 않은 학자들은 이것이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 외에 크세르크세스는 400명의 분대를 해역에 배치하여 혹시 배가 난파되어 떠밀려오게 될 그리스군들을 생포하도록 명령하였다.


6.1. 조우[편집]


파일:attachment/살라미스 해전/sala.png
그리스 연합군(청색)과 페르시아군(적색)의 기동
페르시아군이 언제 해협에 모습을 드러냈는지는 모르나 이들은 동틀 때까지 공격을 하지 않고 있었다. 이러는 동안 그리스인들은 전투에 대한 대비를 단단히 하고 있었고 테미스토클레스는 그의 병사를 모아놓고 연설을 하며 독려하였다. 살라미스 해전에 참가했던 아이스킬루스는 페르시아군이 접근하는 동안 그리스인들이 부르는 노래를 들을 수 있었다고 전한다.

헤로도토스는 코린토스인들의 배가 그들의 전선을 잠깐 벗어나 북쪽을 향해 이동하였는데 그것을 본 페르시아 함대가 돌진해 왔다고 전한다. 아마도 코린토스인들의 배가 움직이는 것을 보고 페르시아군은 이들 그리스인들이 겁먹고 흩어지고 있다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페르시아 함대가 돌진해 오자 코린토스 함대는 즉시 그들의 자리로 되돌아 간 뒤 페르시아 함대와 싸웠다.

페르시아 함대는 접근해 왔는데 해협이 급격히 좁아지며 페르시아 함대는 밀집되어 서로 부딪치기까지 했다. 그에 비해 그리스 함대는 질서 정연하게 서서 그들의 공격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두 함대가 격돌하기 전에 그리스 함대는 뒤로 물러나기 시작하였는데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이는 더 유리한 장소로 끌어들이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그리스인들은 뒤로 물러나는 동안 여자 유령이 나타나서 ‘얼마나 멀리까지 물러나려고 하나요’라고 말하는 환영을 보았다는 소문이 전해지고 있다고 하였다. 그렇게 그리스 함대가 물러나는 동안 그리스 함대에서 한 척의 배가 튀어나와 전진하고 있는 페르시아 배 중 하나에 돌진했다고 한다. 아테네인들은 이 배가 아테네 사람인 아메이니아스의 배라고 주장하였으며 아이기네티아인들은 이 배가 그들의 배라고 주장하였다. 어느 쪽의 주장이 진실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 돌진을 본 그리스 연합의 함대는 용기를 내어 페르시아 함대를 향해 돌진하였다.


6.2. 전투[편집]


두 세력이 전함으로 쓴 트라이림은 충각이 전방에 붙어있었고 따라서 두 함대는 서로 충돌하면서 전투를 시작하였다. 충돌이 끝난 뒤 침몰되지 않은 배엔 해병이 서로의 배에 건너가 전투를 개시하였다. 그리스인들의 해병은 모두 완전무장을 갖춘 호플리테스였고 페르시아인들은 보다 가볍게 무장한 페르시아 보병이었을 것이다.

그리스인들의 돌격에 페르시아인들은 그리스인들에게 밀리기 시작하였다. 이로 인해 전방의 배는 두번째 줄과 충돌하였고 두번째 줄의 배는 세번째 줄과 충돌하였다. 페르시아 해군의 우익에 있었던 페르시아 함대 제독 아리아비그네스는 전투가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곧 전사한다. 그 결과 페르시아군은 지휘관 없이 싸우게 되었다. 페니키안 함대는 그리스 해군의 강한 전진에 밀려 점점 해안에 다가갔고 마침내 이들은 흩어진다. 중앙의 그리스 해군은 쐐기 대형으로 페르시아 해군을 밀어 붙였고 그 결과 페르시아 해군을 둘로 쪼개는 데 성공한다. 때마침 페르시아의 트라이림이 그리스의 트라이림보다 높은 구조로 인해 풍랑으로 높아진 파도의 영향을 상대적으로 많이 받은 것도 크게 주효했다.

헤로도토스는 할리카르나소스의 지도자 아르테미시아는 팔레네 도시의 아미니아스의 배에 의해 추격당하고 있었다고 하였다. 아르테미시아는 추격에서 벗어나기 위해 다른 페르시아 전함을 공격하였고 그러면서 아테네인들에게 그들은 그리스군이라고 속였다고 한다. 그래서 아미니아스는 추격을 중단한다. 그런데 크세르크세스는 이를 보면서 아르테미시아가 그리스군과 용감히 싸운다고 생각하였고 또한 다른 해군 장교들의 우왕좌왕함을 보며 주변의 신하들에게 ‘나의 남자들은 모두 여자가 되었고 나의 여자는 남자가 되었군’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리스군의 맹공에 페르시아군은 당황하여 페레룸 쪽으로 철수하려고 하였는데 그때 아이기네티아인들의 배가 이쪽에 와서 대기하고 있다 그들의 측면을 공격하였다. 이 공격을 견디지 못한 몇몇 배들은 페르시아 해군 본부가 있었던 페레룸의 항구에 가서 하선하려고 하였는데 이를 본 아테네 장군인 아리스티데스가 자신의 병력을 하선시켜 이들을 추격하여 수많은 페르시아군을 전사시킨다.

헤로도토스는 정확한 페르시아군의 손실을 기록하지 않았다. 그러나 다음해를 서술하며 그는 페르시아 해군이 300척의 트라이림으로 구성되었다고 하였다. 이를 본다면 대략 300척에서 500척의 손실을 입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페르시아 해군은 그리스인들에 비해 수영에 익숙하지 않아서 더 많은 전사자가 나왔다고 한다.

이 전투는 상당히 큰 스케일로 진행되었으므로 전체적인 묘사를 하기 힘든데, 아마도 이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크세르크세스뿐이었을 것이다. 크세스크세스는 아이갈레오스의 높은 언덕 위에 앉아서 살라미스 전투를 처음부터 끝까지 관전했기 때문이었다. 전투가 끝난 뒤 몇몇 페니키아 선장들은 패배의 탓을 이오니아인들에게 돌리며 이들이 겁먹고 제대로 못싸워서 졌다고 주장하였다. 언덕 위에서 이오니아인의 배들이 아이기네티아인들의 배를 나포하는 것을 본 크세르크세스는 이 말을 듣고 크게 분노하며 페니키아 선장들을 명예로운 자에 대한 중상모략을 했다는 이유로 참수시킨다.


7. 전투 후[편집]


살라미스 전투 후 참패를 지켜본[8] 크세르크세스는 노발대발해 임시 가교를 지어 바다 건너 피신해 있는 아테네 인들을 공격하고자 하였다. 이때 크세르크세스는 흙으로 해협을 메우고 육군을 진격시키라는 무지막지한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하지만 그리스 해군이 이때 바다를 지배하고 있었으므로 이 시도는 무위에 그친다. 이때 테미스토클레스가 계략을 짜내 페르시아 포로 하나를 풀어주며 크세르크세스에게 "그리스가 헬레스폰트의 배다리를 파괴해 페르시아의 퇴로를 차단하려 하는데 대왕을 존경하는 테미스토클레스가 대왕을 위해 계획을 늦추기 위해 분전하고 있사오니 그 사이에 대왕께서는 속히 철수하소서"라 전하라 하였다. 첩보를 입수한 크세르크세스는 군사회의를 열었고 이때 마르도니우스가 패전사실을 밝히게 된다.

다음은 마르도니우스가 크세르크세스에게 말한 내용이다.

폐하, 우리가 처한 상황에 대해 너무도 낙담하시지 않기 바랍니다. 우리가 앞으로 해야할 일들은 인명에 관련된 일입니다. 만약 폐하께서 원하신다면 전군을 이끌고 펠레폰네소스를 공격하소서. 만약 폐하께서 기다리시길 원하신다면 제가 아뢴 바대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만일 폐하께서 철군하시기 바라신다면 저에게 다른 계획이 있습니다.

부디 그리스인들이 페르시아인을 비웃지 않게끔 해주소서, 그 이유는 우리가 진 이유는 페르시아가 약하기 때문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페르시아 인들이 매우 용감하게 싸웠음을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페르시아 인들의 명예를 생각하신다면, 그리고 폐하께서 철수하시길 원하신다면 많은 병력과 함께 귀국하시되 저에게 30여만의 병력만 고르게 하여 그리스에 남게 해주신다면 그리스인들과 그리스 땅을 폐하께 바치겠습니다.


헤로도토스는 애초에 280만에 달하는 병력을 페르시아가 동원했다고 서술하였다. 따라서 30만을 달라고 하는 것은 전체 페르시아군의 9분의 1 정도만 남겨달라는 뜻.[9]

크세르크세스는 바다를 지배하게 된 그리스 해군이 헬레스폰트의 다리를 끊고 페르시아와 본토의 보급을 차단할 것을 우려했기에 아르테미시아에게 조언을 구하고 나서 마르도니우스의 진언을 받아들인다. 따라서 마르도니우스는 그가 직접 선택한 정예 부대들과 함께 그리스에 남아 그리스 정복을 완수하기로 한다. 마르도니우스와 그의 병사만 빼놓고 모든 병력은 아티카에서 철수한다. 그리고 마르도니우스는 겨울을 나기 위해 보이오티아와 테살리아로 이동한다. 아테네인들은 겨울에 그들의 불탄 도시로 되돌아 갔다.

다음해인 기원전 479년에 마르도니우스는 아테네로 진격하여 다시 점령한다. 그 이유는 그리스 연합군은 그때까지 나와 싸우기보단 코린토스 지협을 방어하고 싶어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스파르타가 맹주로 있었던 그리스 연맹은 결국은 지협을 빠져나와 마르도니우스와 결판을 짓기로 결정한다. 그래서 이들은 아티카를 향해 진군한다.

마르도니우스는 보이오티아로 철수하여 그리스인들을 넓은 평지로 유인해서 그 두 세력은 플라타이아라는 곳에서 마주친다. 이곳에서 벌어진 플라타이아 전투에서 그리스군은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고 대부분의 페르시아군을 섬멸하여 페르시아 전쟁을 마무리 짓는다. 마르도니우스는 이 전투에서 이마에 그리스 병사의 투석을 맞고 낙마해 전사했다. 동시에 벌어진 미칼레 해전에서 그리스 연합군의 해군은 페르시아 해군의 대부분을 섬멸한다.

[1] 아테네와 스파르타 정도를 제외한 폴리스들의 정치적 입장은 의외로 유연할 수 있었다. 해당시점에서 아티카 반도를 점령한 페르시아였지만 아테네 정도를 제외하면 딱히 항복한 폴리스들을 약탈하거나 불태운 것도 아니었다. 실제로 만일 페르시아가 승리했다면 항복한 폴리스들은 정치적 자유는 박탈되었겠지만 약탈 같은 것은 없이 페르시아의 지방 소도시로 변했을 것이고, 스파르타는 아테네처럼 일단 불태워서 지운 다음에 지방도시로 재건되었을 것이다. 이 점이 잘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1, 2차 페르시아전쟁 시기 모두 싸우지 않고 페르시아에 항복한 폴리스들이 많이 나왔다.[2] 폴리스 군대는 스파르타와 같은 예외를 제하면 지휘관과 병사들이 거의 평등했다. 따라서 병사들을 설득하지 못한다면 지휘관이 의도한대로 군을 움직이기 힘들었다.[3] 당시 그리스 수군연합의 수는 다 합쳐도 아테네 함대를 따라잡지 못할 정도였다. 즉 아테네가 빠지면 연합은 껍데기일 뿐.[4] 다만 위에서 언급했듯, 해당 방어선은 역사적으로 몇 번이나 뚫렸다. 따라서 진지하게 육로로 들이친다면 돌파했을 가능성도 적지 않다. 우회할 경우 겨울 전에 제압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5] 특히 에게 해에는 매우 많은 조개 유충이 바다에 떠다니며, 이 유충이 배에 달라붙어 목재를 먹어치워 내구도를 크게 약화시킨다. 이를 막기 위해 3단노선에는 언제나 타르 등으로 배를 코팅하고, 시간이 날 때마다 뭍으로 올려서 배를 건조시켜 스며든 물을 제거한다.[6] 20명의 호플리테스 보병의 무게는 2톤에 달했다.[7] 당시 관습엔 최고 사령관 부대는 우익에 포진하였다. 스파르타가 전군의 지휘권을 갖고 있었으므로 우익에 포진하였던 것이었다.[8] 플루타르크 영웅전에는 절벽에 황금 옥좌를 놓고 앉아서 전쟁을 지켜봤다고 한다.[9] 실제 페르시아군의 규모를 100만 이상으로 추정하는 견해는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대략 25에서 50만 정도가 한계인데, 이것도 고대사 기준은 물론이고 현대까지도 찾아보기 어려운 대병력이다. 유럽 대륙 밖에서 안으로 들어온 병력으로 이에 비견할 정도의 규모라면 노르망디 상륙작전 시기의 상륙군 정도는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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