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포왜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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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포왜란
三浦倭亂


파일:삼포왜란.jpg

시기
1510년 4월 4일 ~ 1510년 4월 19일
장소
부산포, 제포, 염포
원인
교역제한으로 인한 왜인들의 불만
교전국
파일:조선 어기.svg 조선
파일:쓰시마 소 가문 문장.svg 쓰시마 소 가문
삼포 항거왜인
지휘관
파일:조선 어기.svg 경상좌도 방어사 황형
파일:조선 어기.svg 경상우도 방어사 유담년
파일:쓰시마 소 가문 문장.svg 쓰시마 다이묘 소 요시모리[1]
파일:쓰시마 소 가문 문장.svg 소 모리히로
파일:쓰시마 소 가문 문장.svg 소 모리치카
항거왜추 오바리시
병력
5,000명
약 4,000명~5,000명
병선100척
피해
군민 272명 사망
민가 800여호 파괴
왜인 300여명 사망
수백여명 포로
병선 5척 파괴
수십여척 파손
결과
조선의 승리
일본에 대한 지원 제한

영향
임신약조 체결

1. 개요
2. 배경
3. 전개
4. 결과
5. 기타
6. 같이보기



1. 개요[편집]


1510년(중종 5년) 부산포, 제포, 염포 등 삼포에서 일본인들에 의해 발생한 대규모 폭동.

15일 만에 진압되었지만 삼포 항거왜인(恒居倭人)과 대마도주가 합세한 세력과 조정의 진압군의 규모로 볼 때 전쟁에 버금가는 폭동 사건이었다.


2. 배경[편집]


고려 말 왜구의 침입 등의 문서를 참조하면 알 수 있듯이 조선 건국 당시 왜구들의 난동은 조선과 명나라, 그리고 일본의 무로마치 막부까지 골치를 썩이게 하는 요소였다. 사실 왜구들은 일본 정규군이 아닌 해적 집단이었기 때문에 조선과 중국을 넘어서 일본에도 많은 피해를 입혔다. 일본 전국시대에도 왜구가 상당히 많아서 일부 다이묘들은 왜구를 매수해서 전력에 보강하기도 했다. 조선 초까지도 왜구들이 기승을 부리자 상왕으로 물러난 태종은 1419년(세종 1년) 이종무로 하여금 대마도를 공격할 것을 명했고 정벌에 나서기도 했다. 조선은 대마도를 정벌하는 강경책으로 대마도와 왜구들에게 긴장감을 주는 한편 부산포와 염포(현 울산 광역시 북구 염포동 지역), 제포(또는 내이포, 창원시 진해구 웅천동) 등 3포를 개항하고 왜관을 두어 일본인들이 무역을 하거나 상업 활동을 하도록 하는 유화책도 병행했다. 그 결과 왜구들의 수는 많이 줄어들었다.

하지만 지속적인 왜구의 준동 때문에 당시 조선인들의 일본인에 대한 인식은 '범죄자 집단'이었고, 실제로도 당시 조선을 찾는 일본인들 중에는 행실이 불량하거나 밀수를 위해 들어오는 범죄자들이 다수 섞여 있었다. 즉, 조선 영내에 일본인들의 거주 구역이 들어서면 갈등이 심화될 것은 뻔한 일이었다. 초기에는 조선 조정이 일본인들의 숫자를 약 60명 정도로 제한했으나 점차 무역이 성행하고 상호간의 교류가 늘자 자연히 왜관의 일본인 수는 늘어날 수밖에 없었고, 급기야 세종 말년에는 불법 거주자가 2,000명에 육박했다. 그러나 조선 조정에서는 교린 정책의 하나로 이들에게 조선의 일반 백성조차 못 누리는 면세 등 다양한 혜택을 주었다. 그럼에도 일본인들은 그동안 고초도를 벗어난 어업 행위를 일삼는가 하면 심지어 하지 말라는 해적질까지 하며 조정의 공마선 약탈, 살인 등등 각종 범죄를 일삼았다. 이 때문에 조선 입장에서는 오지 마라는데도 눌러앉은 왜인들에게 유화책을 베풀었는데도 범죄나 일으키니 배은망덕하게 여겼다. 그러다보니 중종반정 이후 조선 조정은 왜관에게 강경책을 쓰기 시작하며 혜택들을 하나씩 줄여 나갔다. 그동안 불법으로 눌러 앉으면서까지 누렸던 혜택에 고마움을 느끼기는커녕 왜관의 일본인들은 부당하다고 느끼며 반발했는데, 여기에 더불어 이런 국가적 분위기가 불법이민자이자 범죄자 집단인 일본인들을 압박하고 엄하게 다루는 방침으로 흘러간다.

당시 부산포 첨사였던 이우증은 범죄를 저지른 일본인을 붙잡아 머리카락에 노끈을 묶어 천장에 매달고 그 노끈을 활로 쏘아 떨어뜨리며 공포에 떠는 일본인을 보고 즐거워하는 식의 놀이를 즐겼다. 이를 주위의 조선 군인들도 칭찬하고 좋아하며 따라하여 전 군영에 번졌다. 당연히 이 행위는 일본인들의 증오를 사게되었는데 일본인들은 자신들의 그간 저지른 죄의 반성이나 배상은커녕 겁을 준 게 괘씸하다고 여긴다. 이 와중에 쓰시마 도주의 내란 선동 지원 하에 결국 일본인들의 폭동이 일어났다.


3. 전개[편집]


1510년 4월 4일 일본인들은 약 4,000명~5,000명 정도의 사람들을 모아 대규모 폭동을 일으켰는데 아예 군대가 되어 각지에 불을 지르고 난동을 피웠다. 이러한 상황에 부산포와 제포 등이 함락됐다. 동래성[2]과 웅천이 공격당하는 등 피해도 컸다. 특히 조선의 병사와 민간인 272명이 죽었고, 재산 피해는 이보다 훨씬 심하여 민가 796호가 파괴되었다.

1510년 4월 13일 내란을 선동해놓고도 확전을 염려한 대마도주는 서계를 보내 강화를 요청하였으나 조선 조정에서는 황형(黃衡), 유담년(柳聃年, ? ~ 1526)을 경상좌우도방어사(慶尙左右道防禦使)로 임명하여 군사를 보내 이들을 토벌하였다. 1510년 4월 19일 제포에 모여있는 왜인들을 세 갈래로 포위하여 8시간 동안 협공한 끝에 물리쳤다.


4. 결과[편집]





폭동을 지원한 대마도주는 폭동이 진압되어 조선 조정에서 왜관을 폐쇄하자 곧바로 경제적인 어려움에 처하게 되어서, 폭동을 주도한 주모자의 머리를 바치는 등 여러가지로 교역 재개를 위한 노력을 했다.[3] 결국 대마도주와 왜인들, 그리고 대마도주의 요청을 받은 무로마치 막부의 지속적인 간청 등으로 인해 1512년에 조선 조정에서 임신약조를 맺고 교역을 다시 재개해줬다.

해당 조약의 내용은 삼포 거주 불허, 세사미두 및 세견선을 반감,[4] 삼포 중 제포(薺浦)만 개방, 제포 외 왜인은 왜구로 간주한다는 등의 내용이었다. 하지만 자신들이 일으킨 살인사건 때문에 얻은 제약, 또는 그나마 재개해준 혜택도 예전보다 줄어들자 괘씸하다고 여겨, 임신약조로 인한 교역량 축소에 불만을 품은 대마도주와 왜구들에 의해서 또 다시 사량진 왜변이 일어났다.


5. 기타[편집]


소기파라는 무관이 이때 활약했다고 한다. 그는 재물이나 승진에 큰 관심이 없었고 오로지 전투에만 전념하며 묵묵히 임무를 수행하던 장수였다고 한다. 원래 성종 때부터 북방 함경도에서 근무하며 잦은 여진족 소탕을 맡았기에 전투에 잔뼈가 굉장히 굵은 장수였으며, 왜란 당시 공격을 받던 웅천[5]의 현감으로 임명되어 진압에 참여했고 활을 잘 쏘았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삼포왜란 전해에는 성실한 근무태도를 인정받아 중종이 교지를 내려 몇차례 포상을 하사받기도 했다. 왜란 시점에서 소기파의 나이는 50대 초중반 정도로 추산된다.[6] 조선시대의 평균수명을 고려하면 상당한 고령이다. 실록을 살펴보면 포위되어 함락 위기에 몰린 안골포를 구원하러 병사 두셋을 데리고 돌격하여 활을 쏘아 포위를 풀고 쫓아버렸다는 기록이 있다.

여기까지만 놓고 보면 그저 유능하고 성실한 무관이지만 삼포왜란 당시에 사살당한 일본인들의 시체 사이를 뒤지다가 살아 있는 자가 있으면 칼로 배를 갈라 피를 얼굴과 손 등에 바르고 술을 꺼내 마시면서 그 시신의 쓸개를 손으로 꺼내어 씹어먹으며[7] 안주로 삼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이는 당대 조선인들도 그를 질색하며 끔찍하게 여겼고,[8] 그로 인해 전투에 능하고 재물이나 승진 욕심 없이 전투에만 전념하는 그의 성격이 마치 전투에 미친 괴물과 같은 면모로 비치게 되었다. 결국 소기파는 사람들 사이에서 야차라는 별명을 얻었는데, 그의 성씨인 소를 붙여 "소야차"라는 별칭으로 주로 불렸다고 한다.

이 야사나 전승같은 이야기는 놀랍게도 실록에도 기록되었다. 실록에 기록될 정도면 소기파의 기행은 조정에도 보고가 된 모양이다. 그럼에도 삼포왜란 종결 이후 일등군공으로 논공되었고, 이후로도 승승장구해서 전라도 수군절도사를 거쳐 병마절도사까지 역임했다. 당시 조선 사회에 왜인들에 대한 혐오가 만연해있기도 했고, 이들을 최전선에서 서로 죽고 죽였던 무인, 즉 당대 군인들 사이에서는 이루 말할 수도 없는 수준이었다. 당장 이우증 또한 왜인의 머리카락을 끈에 묶어 천장에 매달고 그 끈을 쏴서 맞추는 놀이를 즐겼다고 하니, 소기파의 행적은 당시 조선인들이 보기엔 이우중보다 과격한 수준이었다. 일각에선 저런 잔학한 행위를 한 것이 왜인들에게 경고하는 일종의 퍼포먼스인게 아닌가 하고 추측하기도 한다.

소기파는 과격하고 잔학한 행위와는 별개로 백성들을 잘 다스려 민심도 좋았는지 부령부사로 지내던 당시 그의 공로를 인정받아 포상을 받는다는 소식을 전하러 이장곤이 찾아오자 백성들이 부사가 떠나는 줄 알고 이장곤에게 달려와 "제발 부사님이 여기 더 계시게 해주십쇼"라며 간절히 부탁하기도 했다.[9]

현대의 관점에서 소기파가 저런 행적을 보인 것은 쓸개가 복수를 상징한다는 것을 떠나서 PTSD의 일종으로 볼 수도 있다. 아무리 죽은 동료나 백성들에 대한 복수심에 불탔다고 해도 저걸 맨정신으로 씹을 수는 없으니... 과거 함경도 근무 시절부터 잦은 실전을 치렀던 장군인데 거기에 더해 남방까지 내려와 실전을 치루어야 해서 허구한날 왜구를 썰고 병사와 백성의 시체가 널린 불타는 민가를 수도 없이 목격했을테니 당연히 정신이 많이 피폐해졌을 것이다.

6. 같이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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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쓰시마 소 가문의 제13대 당주로,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의 선봉이자 소 가문의 제20대 당주인 소 요시토시의 7대 전 당주.[2] 이 일이 있고 82년 뒤 이곳에서 동래성 전투가 벌어지고 또 다시 애어른 할 거 없이 동래성 주민들은 전부 학살 당한다.[3] 사실 애초부터 쓰시마 섬은 조선과의 확전을 원하지 않았다.[4] 계해약조의 200석 50척을 100석 25척으로, 차후 임진왜란 후 기유약조 시에 100석 20척으로 변화.[5] 현 경남 창원시 진해구[6] 정확한 출생연도를 특정하기는 어렵지만 소기파는 연산군은 물론 성종실록에도 등장하고 중종 22년 기사에는 그 나이가 일흔을 넘겼다는 기록이 있다.[7] 전근대의 동양 사회에서 쓸개를 먹는다는 것은 두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좋은 약재, 또 하나는 월왕 구천이 복수를 위해 곰의 쓸개를 먹고 증오심을 키웠다는 와신상담이라는 말처럼 피의 복수.[8] 당연하지만 식인은 어딜가나 혐오대상이다. 쓸개가 아무리 복수의 상징이라도 사람의 배를 갈라 치를 몸에 바른것도 모자라 쓸개를 직접 꺼내 씹어대는걸 목격하면 충격과 혐오감이 클 수 밖에...[9] 중종실록 7권, 중종 4년 2월 7일 기사 1번째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