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록수(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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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줄거리
3. 등장인물
4. 영상화
5. 연극화
6. 기타


1. 개요[편집]


1회 원문(동아일보)

한국의 소설가이자 영화인인 심훈의 장편 소설이자 마지막 소설 작품.

1935년 동아일보 창간 15주년 기념 소설 공모전에 당선된 작품으로, 같은 해 동아일보에 연재되었다. 당시 활발히 전개되던 브나로드 운동(농촌계몽운동)을 그린 장편소설[1]로, 대중적인 성공을 거두었으며 그 날이 오면과 더불어 심훈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2. 줄거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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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계몽운동을 하던 젊은 학생 채영신과 박동혁은 어느날 모 신문이 주최한 농촌계몽운동 집회에서 발표자로 마주치며 뜻을 함께하는 동지임을 확인하는 만남을 갖는다. 두 사람은 의논 끝에 가난한 부모만 더 고생시킬 뿐 의미없는 학업을 그만두고, 식민치하 조선의 젊은 지식분자로서의 사명을 다하자는 결론을 내린 뒤 각각 청석골과 한곡리로 내려간다. 농촌계몽운동에 매진한다 한편 편지를 주고받으며 사랑을 키우고 3년간 계몽사업의 토대를 닦은 후 결혼하기로 약속한다.

영신은 극빈한 청석골에 파견되어 비좁은 교회당 건물을 빌려 야학과 여성협동조합(부인친목계)을 운영하는 중인데, 넘쳐드는 아이들로 인해 학당을 지을 일로 절치부심한다.
고향 한곡리에서 청년들을 조직해 농우회를 꾸리고 계몽운동을 하는 동혁은 일단 자기 고향인데다, 함께 일할 젊은 장정 친구들이 많다는 유리한 조건하에 영신보다 먼저 농우회관을 완공한다.
영신은 이에 자극받아 온갖 노고 끝에 청석학원을 건축하고 동혁을 초대하는 감격을 맛보았으나 낙성연에서 연설을 하다 기절하고 만다. 동혁의 재빠른 대처로 맹장염 수술을 무사히 받았으나 이미 건강이 극도로 상해 있음이 밝혀진다. 동혁이 영신을 간호하느라 자리를 비운 틈에 한곡리에서는 마을 지주요 고리대금업자인 강기천이 수작을 부려 농우회장 자리를 꿰어차고 회관도 차지한다.

이에 격분한 동혁의 남동생 동화가 회관에 불을 지른 후 도주하고, 동혁은 이 때문에 긴급체포되어 옥살이를 하게 된다. 영신은 정양[2]을 겸하여 일본 유학길에 오르며 가까스로 동혁을 면회하고 이것이 마지막 만남이 되었다. 그러나 유학생활은 영신에게 오히려 건강에 해가 되었고 맹장염이 재발하는 등 빈사상태에 가까워진다. 영신은 인생을 바친 일터에서 죽을 것을 결심하고 귀국하였고, 청석골에서 모두의 오열 속에 절명한다. 동혁은 출옥해서 영신의 관이 떠나기 직전에나 겨우 도착하여 마지막 길을 전송한다. 영신의 무덤가에서 실존적인 허무감에 깊이 빠지나 영신의 뜻을 계승하고 살아있는 한 나아가는 것만이 의미있는 일이라는 결론에 이르고 한곡리로 돌아가 새로운 시작을 다짐한다. 덤으로 강기천이 그답게 더러운 사연으로 죽었다는 소식[3]이 전해진다.


3. 등장인물[편집]


  • 박동혁
작품의 남주인공으로 전문학교[4] 재학생. 고향인 한곡리에서 농촌계몽운동을 하며, 농우회의 리더 역할을 맡고있다. 농우회의 주요 목표는 문맹퇴치 뿐 아니라 공동답을 함께 일구어 공동의 소득을 축적하는 것과 단합정신을 기르는 것. 운명적으로 만난 동지 채영신과 의기투합하여 학업을 중단하고 각자의 일터에서 분투하기로 약속한다.
농우회관 건립에 성공하자 마을 지주요 악명 높은 고리대금업자인 강기천이 회관 건물을 탐내나 동혁은 일언지하에 거절한다. 그러나 동혁이 잠시 한곡리를 비운 틈에 강기천이 끝내 수작을 부려 농우회의 회장직을 차고 앉는다.
이 사건을 통해 동혁은 회원 과반수가 강기천에게 소작 뿐 아니라 고리사채[5]에 묶여 있어 굴복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을 무겁게 곱씹으며 단합정신이니 한글강습이니 하는 사업보다 경제적인 압박에서 해방시켜주는 것이 먼저임을 깨닫는다. 이에 회원들과 의논하여 그간 공동으로 모았던 원금 정도의 금액을 가지고 강기천을 독대, 술과 회유와 협박을 동원하여 회원들의 빚을 이자 없이 갚는 묘수를 놓는다.
그러나 강기천이 결국 농촌진흥회 등 외부 유력인사들을 끌어들이고 마을 사람들 거의 전부를 매수하여 회관을 차지하자 동혁의 동생 동화가 홧김에 방화를 시도하고 동혁도 체포되어 옥고를 치른다. 출옥하자마자 영신의 죽음을 알리는 전보를 받고 장례에 간신히 참석한다. 연인의 무덤가에서 깊은 허무에 잠기나 영신의 뜻을 이어나가는 데 전념하는 것만이 의미있는 삶임을 깨닫고 힘차게 일어선다.

  • 채영신
작품의 여주인공으로 역시 전문학교[6] 재학생. 기독교 여성 연합회의 파견으로 청석골이라는 빈촌에서 문맹퇴치활동을 하고 있다. 동혁과 뜻을 같이하여 학교를 중퇴하고 청석골 계몽에 전념한다. 마을 유일의 젊은 식자로서 마을 남녀노소의 절대적인 신뢰와 지지를 받으며 혼자서 어마어마하게 다양한 사업을 감당한다. 한글 강습 뿐 아니라 아이들과 청년들의 정신적 지주, 여성들을 조직하여 생활향상 사업을 이끄는 지도자, 기부금 모집원, 간단한 병을 고치는 의사에 재판장 노릇까지 하는 판.
마을 교회에서 밤낮으로 아이들과 여성들에게 한글 강습을 하고 있는데, 당국에 밉보여 교회 건물이 낡았다는 구실로 강습 인원에 제약을 당하는 바람에[7] 가장 시급한 당면 과제는 학원 건물을 짓는 것.
동혁이 농우회 회관을 완공했다는 소식을 듣고 더욱 자극받아 백방으로 기부금을 얻어내려 노력하였고, 천신만고 끝에 염원하던 학원을 세우는데 성공한다.[8] 동혁을 초청하여 낙성연을 거행하는 기쁨을 맛보았지만 연설 도중에 급성맹장염으로 쓰러진다. 다행히 동혁이 잘 대처하여 병원에서 수술을 받았으나 재발 가능성이 있고 몸이 극도로 쇠약해져 있으므로 무리하면 안된다는 경고를 받는다.
이를 계기로 맹목적인 추진만이 능사가 아님을 깨닫고 정양과 학문 수련을 위해 일본 유학길에 오른다. 그러나 음식이 맞지 않고 향수병에 시달리는 등 유학생활이 오히려 독이 되어 맹장염이 재발하고 각기병 등 여러 병을 얻는다. 의사의 충고로 빈사상태에서 다시 조선으로 돌아간 영신은 청석골에서 죽을 것을 각오하며 병을 무릅쓰고 맹렬히 활동한다. 얼마 가지 못하고 청석골 사람 모두의 비탄 속에 생을 마친다.

  • 김건배
동혁의 죽마고우로 농우회에서 동혁 못지않게 중요한 역할인 선전부장을 맡고있다. 동혁보다 먼저 한곡리에서 야학을 시작한 선각자. 전직 교사였으나 불순분자 블랙리스트에 올라 옥살이를 하고 실직한데다 소작할 땅조차 얻지 못해 굶기를 밥먹듯하는 형편이다. 키크면 싱겁다는 말처럼 항상 낙천적으로 허풍 섞인 수다를 떨며 농우회 일에 임한다. 그러나 절대적인 빈곤에는 결국 굴복할 수밖에 없어 동혁의 부재중 기천이 회관을 뺏으러 할 때 기천에게 매수되고 농우회 회원으로 받아들이는 데 결정적인 한표를 주고 만다.[9] 동혁은 건배를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안쓰럽게 생각하였다.
마지막에 영신의 장례를 마치고 한곡리로 돌아온 동혁이 건배를 다시 찾은 자리에서 재등장. 건배 역시 월급 몇 푼에 쩔쩔매고 사는 군청 일을 그만두었고 동혁과 힘을 합쳐 농촌운동을 다시 시작하기로 한다.

  • 강기만
강고시[10]의 둘째 아들로 기천의 동생이다.
동경 유학 중 정양하러 와 있다고 하는 한곡리 최고 학벌. 돈밖에 모르는 형과 아버지와 다르게 나름대로 농촌운동을 지원하며 물심양면으로 참여하려 한다. 그러나 부잣집 도련님의 한계를 넘지 못하는 취미생활 정도라서 대체로 비호감. 비단옷을 입고 시찰하듯 어슬렁거리고 돌아다니고, '장에서 사온 괭이를 번쩍거리며' 농사에 무턱대고 덤벼들었다 골병이 나거나 '지푸라기를 꽂아도 안 넘어가는 텁텁한 수수막걸리'를 벌컥벌컥 마시고 며칠이나 설사를 하는 등 소소한 개그도 제공한다.
농우회에 기부금이나 물품 등을 종종 지원하고 농우회관 도서관에 대량의 책을 사서 기증하는 등, 사람이 비호감일망정 실질적으로 많은 힘이 된다. 농우회의 중추 사업인 공동답 또한 강기천 집안 소유의 땅을 빌린 것인데 기천과 싸워가며 이 땅을 얻어 준 것도 기만의 공.
중반에서 기천의 돈 500원을 훔쳐 서울로 도망갔는데, 이 때문에 기천이 돈에 안달이 나는 바람에 동혁이 밀어붙인대로 농우회 회원들의 빚을 원금만으로 털어주게 된다. 의도치 않게 결정적인 도움을 준 셈이다.
기천이 죽은 후 첩을 데리고 되돌아와 '송장은 뻗쳐놓고 대판으로 쌈'을 벌이는 추태를 벌였다는 소식으로 등장 끝.

  • 박동화
동혁의 동생으로 농우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착한 편이지만 워낙 혈기왕성한 성격에 술을 좋아하고 주정이 심해 동혁에게 꾸지람을 많이 듣는다.
술주정은 주로 부모가 집안 재산을 형의 학비로다 몰아주는 바람에 자신은 공부도 못해보고 장가도 못들고 썩고 있다는 내용. 화가 나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덤벼드는 시한폭탄이라 기천도 피해다닌다.
동혁이 없는 동안 기천에 의해 회관이 뺏길 위험에 처하자 빠르게 편지를 써서 동혁을 한곡리에 오게 하였고, 기천이 농우회 회원을 매수하여 농우회 회원으로 가입하였을 때도 정득과 함께 끝까지 반대하였다. 회관이 기어이 강기천 무리의 손에 넘어가자 화가 나서 또 술을 마시고 밤에 회관에 불을 지르려다 동혁에게 제지당한다. 그날로 도주하여 만주로 간 것 같다는 소식이 후일 전해진다.

  • 김정근
영신의 소꿉친구로, 어릴 때 부모가 결혼시키기로 약속한 관계이다.
황해도 금융조합 사무원으로 일하고 있다. 농촌계몽운동에는 아무 관심도 없고, 돈을 절약하여 결혼비용에 쓰는 것과 돈을 모으고 장변[11]을 놓아 잡화점이라도 열어 생활안정을 추구한다는 것만이 삶의 목적이다. 일등사윗감
냉정한 파혼 통보를 받고도 끝내 미련을 버리지 못해 질척거리다가 영신에게 준열한 설교를 듣고 나서 쓸쓸히 퇴장.

  • 강기천
한곡리의 메인 빌런. 고리대금업자이며 지주로, 한곡리와 그 인근 거의 모든 사람이 강기천에게 빚과 소작으로 묶여 있다. 지역 면협의원, 금융조합 감사, 학교 비평의원 등 여러가지 직함을 가진 마을 유지이기도 하다. 탐욕스럽고 인색한 것은 물론 시기심 많고 음란하고 간악한 인품으로 모두의 극혐을 사고 있다. 기만을 싫어하는 동화마저 기천과 비교하면 기만은 강가 집안의 중시조라고 한다.
농우회 자체도 마음에 안 들고 동혁에게 사람들의 신뢰가 쏠리는 것도 시샘이 나서 이래저래 동혁의 활동을 방해하려고 애쓴다. 그러다 농우회관을 짓자 그 건물은 또 탐이 나 동혁에게 회관을 팔도록 회유하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는다. 그러나 동혁이 청석골로 간 사이를 노려 농우회 회원을 매수하여 농우회에 가입, 회장이 되고, 이어 마을 사람 전부를 매수하여 진흥회 회장도 꿰어차고 소원대로 회관도 차지.
그러나 동혁의 연설에서 고리대금업을 들먹이는 망신을 당하여 앙심을 품고 있다가 동화의 회관 방화사건을 빌미로 동혁을 체포되게 만든다. 동혁이 옥중에 있을 때 매독에 걸려 민간요법인 수은으로 자가치료하다 중독으로 죽는다.

  • 백현경
기독교 여성연합회 소속의 유명인사로 부유한 엘리트 계층의 신여성. 영신을 아끼고 지도해주는 멘토지만 농촌현장에 뛰어들어 몸으로 구르는 운동가가 아닌, 입으로만 화려하게 나불거리며 뼛속까지 부유함에 젖은 기만적 지식인이다. 요즘으로 치면 노동운동에 취미 있는 강남좌파.


4. 영상화[편집]


상록수 원작 영화
상록수 (1961)
상록수 (1978)


심훈은 생전에 상록수를 영화화하려고 애썼지만, 일제 강점기의 상황상 뜻을 이루지 못했으며, 상록수가 당선된 이듬해 1936년에 상록수의 출간 작업 도중 갑작스럽게 장티푸스에 걸려 영화화를 보지 못하고 숨지고 말았다. 그가 죽고 난지 25년 후인 1961년에 신상옥 감독에 의해 영화화되었다. 신상옥이 감독한 《상록수》에서 채영신 역에는 당대 최고 인기의 여배우이자 신상옥 감독의 배우자인 최은희가, 박동혁 역에는 신영균이 캐스팅되었는데, 농촌의 아름다운 풍경과 배우들의 열정적 연기가 결합되어 훌륭한 영화가 되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 뒤에도 1978년에 임권택이 감독하고 김희라한혜숙이 주연으로 나온 영화도 만들어진 바 있다.


KBS TV문학관에서는 1985년에 200회 기념으로 제작되었다. 동혁 역은 김영철, 영신 역에는 김수연 등이 출연했다. 강기천 역에는 백윤식이 출연하는데, 원작에 비해서는 설정이 다소 나아져서 종반부에 동혁을 돕는 모습으로 묘사(대신 동혁과 함께 체포됨)된다. 마찬가지로 원작에서처럼 비참하게 죽는 일도 없다.


5. 연극화[편집]


상록수를 직접 뮤지컬화 한 것은 아니지만 2021년 상록수 문화제 기념공연에서 상록수의 실제 모델인 최용신을 소재로하여 "샘골강습소 최선생"이라는 뮤지컬을 공연했다.#


6. 기타[편집]


이광수의 대표작인 무정과 비교되는 소설이기도 하지만, 무정이 지나치게 설교조인데 반해 상록수는 브나로드 운동과 주인공들의 애정을 적절하게 결합하여 소설로서의 성과가 높다.

읽다 보면 한밤중 해변에서 사랑을 고백하고 키스를 나누는 등 로맨틱오글오글한 장면도 나온다.

채영신이 동혁과 약혼하는 해변의 장면에서 영신이 계몽사업을 위해 평생 독신으로 사는 미국 여성 '미스 빌링스'를 거론하고 동혁이 일언지하에 '공상'으로 치부해 버리는 대화, 후반부에 이르러 영신이 깊이 고민하며 동혁과 결혼한다면 '부엌구석'에 갇혀 농촌사업은 영원히 포기하게 될것을 깨닫고 일방적으로 파혼을 선언하겠다고 굳게 결심하는 독백도 있다. 이 대목들은 채영신 시대에서 100여년이 흐른 지금에조차 여성들이 결혼, 출산과 동시에 경력단절의 늪으로 빠지는 상황에서 시사점이 있다. 실은 해변에서의 약혼이란 것도, 동혁이 결혼을 '사랑하니까 마땅히 하는 것'으로 아무 고민 없이 생각하는 데 반해 영신은 자신의 사업에 미칠 영향 때문에 끝내 갈등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일단 3년이라는 약혼기간에 어떻게든 사업을 궤도에 올리면 어떻게 되겠지 하는 식으로 시간을 번 것에 불과하고, 결국 영신은 파혼을 결심하게 되기 때문이다.

시간이 된다면 교과서 지문만 읽지 말고 전문을 정주행하기를 권한다. 길이도 얼마 안된다.

해당 작품의 무대가 된 경기도 안산시 본오동 지역에는 이 소설을 기려 이름이 결정된 상록수역이 있으며, 안산시 2개 구로 분할됐을 때에도 본오동이 위치한 동부의 구 이름을 상록구로 지정하였다. 근현대 문학작품에서 유래한 지명은 국내에서는 전무후무한 일이다. 이 지역 명칭에는 상록수 또는 이 소설의 모델이 된 최용신의 이름을 딴 경우가 많은데, 상록수역 앞 길 이름이 상록수로이며, 상록수역 사거리를 거쳐 본오동, 사동, 해양동을 거쳐가는 도로 이름이 딴 용신로다. 그 이외에도 본오동과 사동을 잇는 구 수인선 구간의 고가교 이름 역시 상록수 아니면 용신x교 형식으로 붙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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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영신의 실제 모델인 최용신(崔容信, 1909~1935)의 사진
여주인공 채영신은 실존 인물을 모델로 하는데, 옛 안산시 지역에서 농촌계몽 운동을 펼치다 25세에 죽은 최용신이 그 주인공이다. 최용신은 1909년 함경남도 덕원군 현면 두남리[12]#에서 최창희(崔昌熙)의 2남 3녀 중 차녀로 태어났다. 이후 함경남도 원산시의 루시여자고등보통학교[13]를 거쳐 협성여자신학교[14]에 진학했다. 독실한 개신교(감리회) 신자였던 그녀는, 이웃을 섬기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 생각하여 농촌운동에 투신하기로 결심했다. 재학 중에도 농촌운동에 참가하여 경험을 쌓았고, 1931년에는 YWCA의 파견교사로 샘골(안산)에서 농촌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남주인공 박동혁 역시 심훈의 조카인 실존 인물 심재영에서 유래했다. 그는 경성공립농업학교(서울시립대 전신)를 나와서 문맹퇴치운동에 헌신했다. 경농에 입학한 이유도 심훈 선생에 영향이 컸는데, 심훈이 ‘농업학교를 나와서 농업과 농촌사회을 위해 일하는 것도 보람 있는 일’이라고 말한 것을 듣고 진학을 결심했다고 한다. 충남 당진에 가면 심훈의 기념관과 심재영 씨의 생가가 보존되어 있다.[15]

당시 농촌 아이들은 학교에도 가지 못하고 집안의 농사일을 돕고 있었는데, 최용신은 부모들을 설득하여 아이들을 학교로 데려왔다. 또한 한글성경을 가르치고, 수예, 재봉, 가사 등 실용적인 기술들도 가르쳤다. 그녀의 노력 덕에 농촌은 점점 더 개선되고 발전되었고, 가난과 무지 속에 살던 농촌 주민들은 계몽되었다.

공교롭게도 이 소설이 나오던 해인 1935년, 최용신은 과로로 인하여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자신이 활동하던 샘골강습소가 보이는 곳에 묻어달라는 최용신의 유언에 따라 장례를 지냈다. 처음엔 인근의 일리 공동묘지(현 뉴라성호텔 자리)에 매장했으나 안산시에 공단과 시가지가 확장되면서 김학준이 죽고나서인 1975년 6월 9일 현 위치로 이장했다. 최용신은 혼인을 하지 않아서 후손은 없으며, 약혼자였던 김학준 씨가 샘골강습소의 후신인 샘골고등농민학원의 이사로 활동하며 묘지를 관리하고 추모 사업을 진행했다. 두 사람은 김학준의 일본 유학이 끝나면 정식으로 혼인하려 했지만, 미처 끝나기도 전에 최용신의 건강이 악화되어 사망한 것. 김학준은 다른 여성과 결혼하여 2남 3녀를 두었고 1975년 향년 64세로 세상을 떠났는데 유언으로 최용신 옆에 묻어달라고 하여서 김학준의 묘 역시 최용신의 묘 옆에 있다. 현대에는 안산시에서 관리하고 있으며 최용신기념관이 들어서 있다. 최용신에 대한 거의 모든 기록은 그녀와 함께 농촌계몽 활동을 했던 류달영(1911-2004)이 상록수 소설이 유명해지면서 비슷한 시기에 출간한 그녀의 전기에 의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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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다만, 단순히 문맹을 탈피하는 계몽 운동을 비판하고, 문맹 뿐만 아니라 경제적 문제를 해결해야하는 운동으로 발전해야 한다는 과정에서 창작된 소설이라는 의견이 있다.[2] 靜養, 몸과 마음을 안정하여 휴양함.[3] 매독에 걸렸는데 민간요법을 믿고 수은을 태워 그 연기를 흡입하다가 중독되어 죽었다.[4] 고등농림학교[5] 회원들의 채무액을 총합하면 400원 남짓의 원금이 이자에 이자를 거듭해 1400원까지 불어났다![6] 여자 신학교[7] 150여명에서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는데 이를 80명으로 제한할 것을 명령받는다. 이 조치를 당해 밀려난 아이들이 끝내 떠나지 않고 바깥에서 넘겨다보면서라도 수업을 받으려 한다. 영신이 칠판을 창문에 내다 세우고 아이들과 함께 독본을 읽는 장면은 소설의 포인트.[8] 예산의 반액 이하를 쥐고 착수하여 직접 톱질에 모래나르기까지 막노동을 한다. 이렇게 무리한 결과...[9] 강기천이 군청 임시역을 주선해주며 동혁을 배신하게 한다.[10] 과거 금부도사였으며, 고리대금업을 하면서 부를 축적하였다.[11] 시장에서 하는 돈놀이로, 장이 서는 5일 단위로 이자를 계산한다.[12] 경주 최씨 집성촌이다.[13] 미국인 개신교 선교사가 세운 미션스쿨. 교명은 학교에 건축 기금을 기부한 미국인 선교사 Lucy Armfield Cuninggim의 이름에서 딴 것.[14]감리교신학대학교[15] 심훈은 당진에 내려가 심재영의 집에서 작품활동을 하기도 했으며 이주한 필경사도 심재영의 고택 인근이다. 현재 심재영 고택은 후손에 의해 관리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