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이닝 로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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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구 샤이닝 로어
1.1. 파장
1.2. 차별성&한계성
2. 신 샤이닝 로어
2.1. 멸망
3. 뒷이야기
3.1. 판권분쟁
3.2. 콘솔판 샤이닝 로어 및 원안관련 여담
3.3. 명작이었나?
3.4. 구샤로 축구복 이벤트 사건
4. 주제가


1. 구 샤이닝 로어[편집]


클로즈베타 2001년 12월~오픈베타 2002년 3월~2002년 9월 - 판타그램 산하.

1999년 콘솔게임으로 기획되다 전환되어 2002년 판타그램에서 출시한 한국3D MMORPG.

1.1. 파장[편집]


아는 사람들은 다 아는 명작으로 바람의 나라(게임), 뮤 온라인, 리니지가 삼분하던 온라인 계임계의 4천왕을 넘보리라 기대되던 타이틀중 하나였다. 첫 등장당시 여러가지 진보된 시스템으로 한국 MMORPG계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그 인기가 엄청난 속도로 확산되어 가입자수는 멀쩡한 리니지 유저들까지 빼올 정도로.

5주에30만, 5달에 100만, 이런 엄청난 성장은 패키지RPG로부터 온라인RPG 로의 세대교체와 바람의 나라&리니지 1&미르의 전설로 대변되던 2D그래픽 기반 게임으로부터 3D그래픽으로의 체제대전환이 격동적으로 동시진행되전 2001~02년기엔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허나 위상의 격하만큼 과장된 격상도 주의해야 한다면, 저런 선풍이 불었지만 개발사가 선전하던 수만 단위 동접자설은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2001년은 당시 이미 비교가 안되는 업계본좌던 엔씨소프트도 리니지1의 물리서버 1대당 기본 부담가능 동접자수는 5000~10000이었던 시기로, 구 샤이닝 로어의 클라이언트 서버수는 단 3개(루나,이니그마,시에나)에 불과했던 터라 판타그램의 처지에 엔씨 이상의 성과를 구현했을 가능성이 낮다는 현실사정은 그럴 공산에 신빙성을 더한다.

게임 클라이언트 상에서 보이는 기술 서버와 물리 서버간 대수가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며, 물리서버를 기술서버로 파티셔닝하여 원활하게 구동하는 방식은 당시 운용능력으로도 보통이되. 다만 앞서 비용대비 효과로 볼 때 해당 수치의 동접자를 수용기엔 2002년 기준으로 국내 어느 게임보다도 인프라 부분으로 많은 비용을 넣어야 했을 것이다. 이런 엄청난 가입자수 대비 동접자 수치가 거기 걸맞았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해석되고 있다.

1.2. 차별성&한계성[편집]


샤이닝 로어는 후세대 국산 MMORPG가 계승할 선각적 차별성이 수두룩했다.
  • 평생무료 선언. 샤이닝 로어가 시장에 폭발적 성장세를 구가한 원인격 요인.
  • 마비노기에 앞서 커뮤니티 공간을 따로 마련.
  • 생존 시스템. 예를들면 살기위해 매일 음식을 먹어야 한다거나...
  • 음식 만드는 요리사[1]나 기계 제작하는 엔지니어[2] 같은 신선했던 직업들. 차후 조합사[3]와 디자이너[4]라는 직업도 추가될 예정이었다.
  • 보조작업을 통한 경험치 획득. 요리사는 요리를 해서 경험치를 얻고 엔지니어는 무기제조를 해서 경험치를 획득할 수 있었다.
  • 게임 내에 존재하는 미니게임. [5]
  • 교환사기 방지 시스템.
  • 자유전직 시스템. 플레이어는 캐릭터를 아무때고 원하는 대로 전직시킬 수 있었다.[6]
대표적 요소를 나열하면 이렇다. 게임 플레이 자체는 단순한 몹 때려잡기 위주였다는 점은 변함이 없었지만, 레벨업 속도가 빨라서 당시 게임들에 비해 캐주얼한 느낌을 주었고, 라그나로크 온라인을 제외하곤 유일한 아기자기한 3D 그래픽을 자랑했던 동시에 최적화가 잘 되어 있었던 점도 포인트.[7] 수년 뒤 씰 온라인마비노기가 차례로 출현하기 전까진 라그나로크와 함께 한국 캐주얼 온라인 게임의 개척자라는 의의가 있다.

그러나 게임 내에서 저런 요소가 100% 구현되어있는 상태가 아니었고, 그래서 발매 당시에는 포립 주사위의 잔영을 서비스중이던 소프트맥스의 아류적 시도라는 비판도 동반되었다. 특히 예정되어있던 하우징과 나왔던 제작/생존 시스템 등은 생각보다 완성도가 부실했다. 즉 시도는 좋았으나 결과물이 그렇게 신통하지는 않았다는 것. 그리고 분명 기본적인 틀은 그당시 유행했던 몹을 때려잡는 재미에 중점을 두고 나머지 시스템은 보조적 위치로서 기존 mmorpg의 패턴과 일치하는 정체성을 갖고 있었다.[8]

더불어 당시에 부분유료화 및 캐쉬템이란 개념 자체를 생각할 수가 없던 그 시기에 수익원천에 대한 의문은 당연히 수반되었으며 그가 해결되기 전에 결국 자금 압박으로 판권을 엔씨소프트에게 팔아버리는 불상사가 생기고 말았다. 이 시점 이전의 샤로를 구샤, NC가 내놓은 샤이닝로어2를 신샤라고 부른다.

2. 신 샤이닝 로어[편집]


2002년 9월~2003년 10월 - 엔씨소프트 산하

당시 판타그램 이상윤 대표의 발언으론 이해관계의 적절한 합치로 상호이익을 누릴수 있으리라는 판단이었다고 하였다. 어디까지나 발언은, 더불어 샤이닝 로어를 MMORPG로 개발하였으나 여전히 PC 및 콘솔게임 제작을 샤로, NC피인수 주제의 인터뷰에서 그대로 언급하였기에 판타그램의 핵심 무게중심은 온라인 부문이 아니었음이 명확히 드러나는 바였다.

이런 환경이 일조했을지도 모르나 NC에 의해 새로 선보인 샤로는 기존의 샤로와는 완전히 다른 물건이 되어 나왔다. 자랑하던 자유전직 시스템이 삭제되는 것은 물론 더 나아가 샤로의 아이덴티티 였던 개성 넘치는 직업 시스템과 그와 연계되어 있던 기본 설정 자체가 완전히 뒤엎어져 버렸다.[9] 그에 더해 운영상의 파행이나 악재를 겪다가 결국 서비스 중단. 그리고 NC가 샤이닝로어의 서비스를 중단하며 유저들에게 준 것은 리니지 7일 무료이용권이었다. 그냥 닥치고 리니지나 하라는 소리다. 이 사건은 아직까지도 NC를 깔 때 에버퀘스트 강제 서비스 중단과 함께 유효한 양대 떡밥 중 하나다.

더불어 이를 본 일부 유저들은 NC가 리니지를 시장지위를 유지하고자 재정압박 시스템으로 판타그램을 삼켜버렸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혹은 판타그램은 처음부터 NC의 자회사라는 괴소문도 있었는데... 실제로 당시 2002년 엔씨의 판타그램 인수 및 샤이닝로어 매수는 우월한 시장지배자가 잠재적 경쟁자인 블루칩을 사전제거했단 정황과 인상에 이론을 제기할 여지가 없었다. 왜냐, 이런 일은 이 사례 이전에 없었기에.

당시 온라인 게임 자체의 절대수가 희소했기에 갓겜이든 망겜이든 어떤 게임이든 기본 수년씩 운영되는것이 당연시되던 시기, 기껏 타사가 제작해서 잘나가던 게임을 매입한 뒤에 1년만에 중지해버리는 사태는 정말로 기절초풍할 만큼의 초유의 사건이었다.

물론 이미 중견기업이던 엔씨소프트가 냉철한 경영을 유지한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하지만, 매입 후 투자확장없이 게임성 및 운영의 열화+악화만 거듭했다고 한다면 이는 판단미스로 인한 투자실패나 운영능력 미달로 인한 역량유지실패란 결론으로 귀결될 뿐. 규모작고 협소하던 그 때의 시장을 자금력 있다고 좌지우지하는 행위는[10] 2000년대 초기의 관행으론 공분이 일만큼 미증유의 상식외적 사건으로 게임잡지와 여론은 이를 비극으로 인식했다.

2.1. 멸망[편집]


NC는 샤로2를 말아먹은 이후 판권을 포기했고, 일부 구 유저들에 의해 프리서버가 생겼다.

샤이닝 로어는 개발사던 판타그램이 이후 본업인 콘솔+패키지 시장에서 대박을 쳤던 바람에 후속작이 탄생하지도 않았고, 타사에 의한 아류작도 개발되지 않았다. 2010년 엔플레버의 <이그니스 로어→ 아이엘>이 샤이닝 로어 제작진에 의한 정신적 후속작을 자처했지만 계승할 의의가 남아있다고 보기에 10년은 간극이 긴 세월이다. 한번 번쩍이는 불꽃으로 초기에 작열하고 석연찮게 섭종되었으며, 정식 후속작, 정신적 후속작도 아류작도 이후 등장하지 않았기에 이런 사정은 국내 온라인 게임역사에서 잊혀지지 않는 보석으로 본작이 기억되는데 크게 일조한다.

게임119에 샤이닝로어 부활 서명을 하는 부속 사이트에서 서명을 전달하러 간 적이 있었으나[11] 별 소득없이 돌아왔다. 이 사이트에서는 프리서버가 샤로 부활에 방해가 된다고 보고 프리서버를 근절하자는 분위기였다. 이 때문에 프리서버 운영자와 다른 유저들 사이에 분쟁이 있었다. 여담이지만, 흔히 샤로온이라 불리던 샤이닝로어 부활운동 본부는 초기엔 꽤 제대로 된 서명운동을 벌였지만, 말년에는 5~6명 뿐인 회원들의 친목장소화 되었다.[12]

3. 뒷이야기[편집]



3.1. 판권분쟁[편집]


판타그램이 엔씨소프트에 판권을 넘길 때, 다른 업체에 이중으로 넘긴 탓에 법정분쟁이 있었다.# 서비스 종료뒤에야 엔씨가 승소한건 아이러니.#

3.2. 콘솔판 샤이닝 로어 및 원안관련 여담[편집]


구 샤이닝로어보다 훨씬 이전, 원래는 드림캐스트 및 PC게임으로 발매예정이었으며 3D 싱글 액션 RPG였다. 룬 오하라 라는 파란머리소년의 바다를 찾아 여행하는 이야기로 구성된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만들어질 뻔한 게임이었으나, 당시 성행하던 불법복제 밎 온라인이라는 컨텐츠 유행의 흐름에따라서 어느 순간 소식이 두절되더니 갑자기 온라인게임으로 변경되어 등장했다. 이 콘솔판 샤이닝로어가 사실상 프로토타입인셈. 옛날 게임잡지를 보면 드림캐스트로 개발중이던 샤이닝 로어에 관한 글과 그림을 가끔 볼 수 있다. 제작팀장은 월간 플레이스테이션(나중에 게이머즈로 이름이 달라질때도 연재했다.)에서 '신훈의 멋대로 게임기행'을 연재했고 채널 어니언이라는 만화책도 냈었던 신훈.

콘솔게임으로 개발당시 일러스트레이션 및 캐릭터 디자인은 일본만화가 '무라마사 미카도'[13]를 기용해서 꽤나 의욕적으로 도전하는듯 했으나, 영 좋지 않은 타이밍에 드림캐스트의 몰락과 당시 휘몰아친 온라인 열풍에 장르가 변경된 듯.덕분에 미카도의 디자인은 묻혀져버렸다.[14]

여담으로 처음 기획당시 뿌렸던 자료들과 온라인게임으로 나왔을 때를 비교해보면 그나마 원형이 남아있는것은 풍차뿐으로, 원래대로라면 집집마다 지붕위에 풍차를 돌리고있는 그러한 시대를 배경으로하는 장황한 스토리를 기획했던것 같다. 샤이닝 로어라는 제목이 저 풍차의 이미지를 따왔다는 듯.

하지만 샤이닝 로어 온라인의 스토리가 애초에 기획되었던 RPG 샤이닝 로어의 엔딩 이후를 다루는 걸로 보아서, 당시에는 싱글의 제작에 미련이 남아 있었던듯 하다.

막 온라인으로 변경 된 후 일러스트레이션에는 스퀘어의 '듀프리즘' 원화를 그린 일러스트레이터를 기용했으나 이 일러스트레이터는 어떠한 사정으로 달랑 3개만 그려주고 잠수타고 그만둬 버렸다. 이후 신훈이 직접 코미케까지 쳐들어 갔으나 끝내 놓쳤다고 한다.[15]

그래서 아예 팀장인 신훈씨가 일러스트레이션도 맡다가 다른 사람을 썼는데,그때 기용한게 김안나라는 사람이다. 신훈의 멋대로 게임기행에서 신훈에게 태클걸던 안경 쓴 여자 캐릭터가 이 사람.이 둘은 샤이닝 로어 몰락후 함께 요구르팅을 제작했다.

안나는 요구르팅 오픈 후 다른 제작사로 이적, 아트디렉터로 활동 중이다. 정작 본인은 뭐로 밥 벌어먹고 사는지 모르지만.

안나 외 샤이닝로어 개발진 다수가 아이엘:소울 브링거 제작에 참여 했다고 한다. 자세한 내용은 아이엘 참조.

3.3. 명작이었나?[편집]


게임관련 커뮤니티라면 샤로를 기억하는 사람이 모두 사라지기 전엔 없어지지 않을 떡밥. '구샤로는 명작이었다 VS 그렇게 대단한 게임은 아니었다'. 특히 추억의 미화작용과 마이너성에 의한 사료부족, 현재 샤로를 전혀 알지 못하는 부류도 다수이기에 미스터리한 논제로, 일종의 가치평가 문제이다, 여기에 더해 항상 추가되는 의문 '구샤로가 신샤로로 넘어가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 것인가' 이다.

뜬금없지만 게임 및 전자오락에 심취했던 해담, 즉 야구선수 정수근은 거기 관련해 이하같은 발언을 했다고 한다.
게임의 재미는 둘째치고 수익모델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게임디자인이 가장 큰 패인이었다. 제작사는 물론 한국 게임사 자체가 온라인 게임 개발에 막 뛰어들기 시작한 시기였고, 다양한 시도들이 있었지만 수익모델은 정액제 외엔 찾아보기 어려웠다. 샤이닝로어의 경우엔 아기자기한 그래픽과 낮은 레벨업 난이도로 유저층을 넓힌 것 자체는 좋았지만, 레벨업 난이도가 너무 낮아 당시 사실상 만렙이었던 104 레벨을 일주일도 안 되어서 찍을 수 있을 정도였다. 때문에 정액제로 게임을 운영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말하자면 샤이닝 로어는 게임으로서 문제가 있었다기 보다는 상품으로서 문제가 있는 물건이었다..

반면 웹툰 작가 제카y는 이미 헬게이트가 열렸는데 NC가 폭탄인줄 모르고 샀다며 깠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문단의 링크 참고.

3.4. 구샤로 축구복 이벤트 사건[편집]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시즌을 맞아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을 응원하기 위해 샤이닝 로어에서 벌인 이벤트로, 극초반 뉴비용 필드 몹들에게서 국가대표팀 유니폼 아이템을 드롭하게 하여 '모두가 국가대표 축구복을 입고 응원하자'라는 취지는 참 좋았던 이벤트이다.

그러나 사건은 여기에 쓸 데 없는 옵션을 달면서 시작되었다. 그 옵션이란 한국 국가대표팀이 월드컵 본선에서 1승을 할 때마다 축구복의 능력치가 2배수로 늘어난다라는 것. 다들 아는 대로 2002년 한국 축구 국가대표팀은 월드컵 4강이라는 사상초유의 기적을 일구어 냈고, 그 영광은 샤이닝 로어에서만큼은 재앙이 되었다(...)[16]. 당시 한국은 4승을 했는데, 2배수가 네 번이니 2×2×2×2=16. 즉 축구복 능력치가 16배로 뻥튀기된 것이다(...). 이로 인해 축구복은 이미 게임 내부에서 구할 수 있는 모든 착용 아이템을 뛰어넘는 괴물급 방어구가 되었고 착용 제한마저 없었다. 그로 인해 샤이닝 로어는 1레벨부터 최고레벨 캐릭터까지 너도나도 축구복만 입는 세계최초 축구 MMORPG라고 해도 할 말이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게임의 레벨 디자인은 완벽히 붕괴했고 게임 내 시장은 마비됐으며, 죽을 고생을 해 가며 최고급 아이템을 구해왔던 하드 유저들은 괴물 축구복의 등장으로 인해 허탈해 했다. 이 시기에 상당수의 유저들이 이탈했으며 사실상 신샤로 이전인 이 때부터 게임에 망조가 짙게 드리우게 된다. 무조건 성공 안 될 것이라고만 예상하고 게임경제, 밸런스 전혀 생각하지 않고 무리하게 자극적인 상품들을 내지르는 이벤트는 매우 잘못된 것이 맞다. 예를 들어 2014년 던전앤파이터 월드컵 이벤트 때도 16강 장비보호권, 8강 100퍼 10강화권, 4강 증폭보호권 등을 걸었다가 대차게 욕을 먹은 적이 있다. 이런 식의 이벤트는 실패해서 상품을 안주게 되어도 '어차피 안줄려고 생각하고 이런 이벤트 지른다. 우릴 우롱한다'는 식으로 유저들에게 욕을 먹고 원망을 사게 되며, 성공하면 말 그대로 게임이 망하는 이벤트다. 즉 어떤 식으로든 게임 개발자에게 해가 되고 마케팅, 이벤트 부서를 원망하게 되는 이벤트인 것이다. 이런 이벤트가 아무 문제도 없다면 나중에 무슨 문제가 생기든 일단 사람 모아야되니 당장 크게 지르고 보자는 식으로 던져대는 모든 텅빈 공(空)약들이 아무 문제 없는 것들이 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 사건은 이후 온라인 게임의 기획의 잘못된 사례로 반면교사가 되어 두고두고 회자되게 된다.

월드컵이 끝난 이후 판타그램 측은 이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착용레벨 1이었던 축구복의 레벨 제한을 대폭 올려버리고, 이에 따른 유저들의 반발을 막고 풀려버린 축구복을 회수하기 위해 같은 레벨 같은 부위의 축구복 두 벌을 합성하면 착용 레벨을 누적 다운 시키는 기습 패치를 단행했지만, 레벨 업이 워낙 빠른 게임이다 보니 이미 상당수가 축구복 버프로 고레벨이 된 데다 큰 의미는 없었고, 오히려 축구복만 믿고 장비 파밍을 소홀히 하던 소프트유저들에게 큰 원성을 들었다.

제카툰에서 묘사한 당시 사건

4. 주제가[편집]



당시 SM 엔터테인먼트에서 기획한 '신비'라는 그룹이 부른 <Darling>의 PV. 물론 샤이닝 로어가 망하면서 이 그룹도 망했고, 지금은 골수 샤이닝 로어 유저들 정도만 기억할 추억의 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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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판타지로 친다면 마법검사 포지션의 하이브리드 직업. 요리를 던져 원거리 공격이 가능하면서 부엌칼로 난도질하는 근접 공격도 가능했다.[2] 판타지로 친다면 레인져에 가까운 직업. 로봇 디코이를 깔고 총기로 원거리 공격을 하거나 파티원에게 버프(무려 그라인더로 무기를 갈아준다는 설정)를 부여하고 포털을 여는 등이 가능했다. 이중 자신의 체력을 깍고 자신의 공격력을 크게 올리는 최종스킬이 전직 시스템과 맞물려 전사계 권장 육성트리의 핵심으로 꼽히기도 했었다.[3] 판타지로 친다면 연금술사나 쪽 포지션이 되었으리라 예상된다. [4] 판타지로 치면 방어 버프를 비롯한 아군의 보호에 특화된 성직자계 직업이었으리라 예상된다. [5] 결국 구현되지는 못했지만 UFO 캐쳐 같은 뽑기게임도 기획은 되어 있었었다. - 다만 어디까지나 미니게임의 영역이었을 뿐 과금 요소는 아니었다 추정된다. [6] 단, 당연히 페널티가 존재하기 때문에 신중하게 진행해야 했다. 이를테면 전직 후 당연히 레벨이 초기화 되지만 레벨업 요구 경험치는 전직 전 레벨을 반영했기 때문에 생각없이 전직했다가는 레벨 다운 이후 레벨 재수복이 어려워지는 상황을 맞을 수도 있었다. 전직 시스템의 핵심은 '기술을 배워 오는 것'(기술을 습득한 후 전직하면 직업은 바뀌지만 기술은 남는다.) 으로 각 직업별 스킬 종류와 습득 레벨을 잘 파악해 미리 계획을 세워둘 필요가 있었다. 이중 유명한 것이 엔지니어의 스킬로 자기 버프를 건 후 요리사의 근거리 난무 기술을 전사직의 높은 근거리 공격력으로 구사해 폭딜을 박아 넣는 일명 '다크 검사'. [7] 온라인 게임이면서도 당시 보급형 그래픽카드 였던 'GeForce2 MX'나 'Radeon 7200'에서 무난한 플레이가 가능했었을 정도. 여담으로 GeForce 2 에서는 수면이 그냥 밋밋하게 표현되는 반면 Radeon 7200에서는 물결이 묘사되는 차이를 보여서 저가 그래픽 카드 기준으로는 라데온에 더 최적화(?)된 모습을 보여줬었다.[8] 과도기를 거쳐 자체적으로 기존 패턴을 극복, 탈피해서 정체성 변동급 변화를 성취한 게임은 이후 마비노기가 최초가 된다.[9] 샤로의 세계관은 '환경이 파괴되어 버린 세계'인데 이게 어느 정도냐면 바다가 거의 증발해 버려서 사막화가 진행중인 상황이라 해적이 사라진 대신 사적이 활개치고 다닐 정도. 이런 환경의 변화는 마법의 쇠퇴로 이어졌고 이것이 다시 기술의 발달로 이어졌다는 설정이기에 게임에서도 마법사는 등장하지 않고 대신 '엔지니어', '요리사', '재봉사'등의 기술직들이 나왔던 것이다. 그런데 NC는 이런 설정을 깡그리 무시해 버린 채 기술직들을 치워버리고 그 자리에 소서러 같은 마법직을 넣는 식으로 리니지화 시키는 만행을 저질러 버렸다. 훗날 트릭스터M 등으로 드러나게 되는 NC의 IP파괴 행보는 이때부터 조짐이 보였던 것. [10] 사실 2010년대 말기에도 온라인 게임 시장은 한국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극도로 작다는 현실을 반추하면 이런 논의는 의미도 크지 않고 허무해진다.[11] 게임119 운영자 대깡과 부활운동본부의 운영진 둘이서 전달했다. 당시 NC는 판권 문제를 들먹이며 속시원한 해답을 주지 않았다.[12] 그 대여섯명의 회원들이 전부 운영진 권한을 가졌을 정도. 재밌는 사실은 그중에 성인은 하나도 없이 모두 중고등학생, 심지어 초등학생도 있었다는 것이다.[13] 국내에 카발리어라는 작품이 하나 소개되었으며 잡지사 기준으로 한국만화로 분류된다. 카발리어 항목 참조.[14] 여담인데 미카도는 자신이 그렸던 샤이닝 로어의 그 캐릭터들을 가지고 19금 상업지로 그려버렸다(...)[15] 멋대로 게임기행 단행본에 실린 이야기.[16] 당시까지의 월드컵 성적만 보면 그렇게까지 무리수인 옵션은 아니었다. 2002년 전까지 대한민국은 월드컵에서 단 1승도 거두지 못했다. 즉 전적만 보면 2배는커녕 0승으로 스탯 그대로 출시될 가능성도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