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범석(1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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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민정당 벽보글씨.svg 원내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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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서범석
제2대
정성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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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당(1965년) 원내총무




대한민국 제2·4-8대 국회의원
서범석
徐範錫 | Seo Beom-suk


파일:서범석.jpg

출생
1902년 10월 19일
한성부[1]
사망
1986년 4월 2일 (향년 83세)
서울특별시 종로구 명륜2가 고려대학교 부설 혜화병원[2]
묘소
경기도 포천시 설운동 선영
본관
대구 서씨[3]

백봉(白峰)·육봉(六峯)
부모
아버지 서정희, 어머니 광산 김씨
형제자매
4남 중 장남
배우자
곽경봉[4]
자녀
슬하 1남 2녀
학력
양정고등보통학교 (졸업)
베이징대학 (정치경제학 / 중퇴)
의원 선수
6
의원 대수
2, 4, 5, 6, 7, 8
경력
조선일보 및 동아일보 근무
대한청년단 안암지단장
민주당 서울시당 부위원장
민주당 중앙상위부의장
내무분과위원장
민정당 원내총무
민중당 지도위원
민중당 운영위원
신민당 기획위원
신민당 총무위원장
신민당서울제8지구당위원장
6대국회 원내총무
신민당 지도위원회 부의장
제2·4-8대 국회의원

1. 개요
2. 생애
3. 선거 이력
4. 둘러보기



1. 개요[편집]


일제강점기 초기엔 3.1 운동에 참가한 독립운동가였으나, 이후 변절한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대한민국의 전 정치인, 본관은 대구(大丘), 호는 백봉(白峰)이다.


2. 생애[편집]


1902년 10월 19일 한성부(현 서울특별시)에서 제헌 국회의원을 지낸 아버지 서정희와 어머니 광산 김씨 사이에서 4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전라남도 광주군 부동방면 서남리(현 광주광역시 동구 서남동)으로 이주해 본적을 두었고, 광주군 광주면 수기옥정(현 광주광역시 동구 수기동)으로 본적을 옮기기도 했다. 1925년 당시에는 경기도 경성부 관수동(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관수동) 105번지[5]거주했다.

그는 숙종영의정을 지낸 서문중(徐文重)의 10대손으로, 고조부 서병순(徐秉淳)은 서문중의 6대 종손으로 종3품 선산도호부사를 지냈다. 조부 서병갑(徐丙甲)[6]은 1874년(고종 11) 정시(庭試) 무과급제하여 1876년 무신 겸 선전관(武臣兼宣傳官)에 제수되었던 무관이었다.

양정고등보통학교 재학 중이던 1919년 학교 대표로 3.1 운동에 참여했고, 일본 제국 경찰의 검거를 피해 중화민국으로 망명하여 베이징대학 정치경제학과를 다니다가 2학년 때 중퇴하였다.


파일:서범석(1902)-2.png

1925년 4월 30일, 경성부 종로경찰서에서 촬영된 사진.

이후 귀국해 조선일보 기자로 근무하다가 1925년 4월 22일 적기시위사건에 연루되어 경성부 종로경찰서에 송치되었고, 6월 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6개월,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고 출옥하였다. 같은 해 10월 공산주의자라는 이유로 박헌영·김단야 등과 함께 조선일보사에서 해직되었다.# 이후 시대일보 기자, 중외일보 기자를 거쳐 1927년 동아일보사 기자로 이직해 활동하였고 베이징특파원으로 근무하기도 했다. 1928년 1월에는 사회주의 청년단체 경성청년회에서 성명서를 발표하는 위원에 선임되기도 했다.


파일:서범석(1902)-1.png

1930년 9월 30일 모 경찰서 형사과 고등수배자 명단에 등록된 사진.

1931년 신의주부 주재 특파원으로 있다가 그 해 11월에는 봉천성 봉천시에 특파되었다. 특파원으로 근무하면서 같은 해 7월 일어난 만보산 사건을 적극 취재하는 한편, 봉천성 외교협회 간부와 접촉하여 한국인의 입장을 해명하는 등 충돌을 유화시키려 노력했다. 그후 1932년 7월까지 특파원으로 근무한 것이 확인된다.#

그 뒤 1933년에 조선일보 만주특파원으로 근무하던 신영우(申榮雨)와 함께 돌연 친일 성향의 신문 만몽일보(滿蒙日報)에 입사하여 편집국원으로 근무하게 되면서 사실상 친일로 전향하였다. 1934년에는 만몽일보를 퇴사하고 건축·토목회사 협동공사(協同公司)를 창설해 경영하기 시작했다. 1936년 12월에는 최린·박희도·이진호·신태악·성원경·조성근 등과 함께 조선인징병제 요망운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1937년 만주국의 선전기관 역할을 하던 봉천시 흥아협회(興亞協會) 간부로 있었다.##2 1938년 만주국 관변 정치 조직인 만주국 협화회 봉천시본부 선계공작간사회(鮮系工作幹事會) 실천부장이 되었다.

한편, 1937년 3월 조선민족혁명당의 기관지 「앞길」제2호에서는 서범석을 '일제의 주구' '관동군의 앞잡이' 등으로 칭하면서 월간 재만조선인통신(在滿朝鮮人通信) 사무장 겸 편집장으로 근무하고 있는 사실을 밝혔다.#

1940년 당시에도 봉천시에서 흥아협회 기관지였던 월간 재만조선인통신(在滿朝鮮人通信)의 주간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1941년에는 신징특별시의 동남지구특별공작후원회본부(東南地區特別工作後援會本部) 상무위원으로 있으면서 김일성을 비롯한 동북항일연군에 대한 귀순 권고문을 작성하는 등 후방공작을 일삼았다.# 그 밖에 봉천시에 있던 조선인 학교 동광학원(東光學園)의 이사를 지내기도 했다.

8.15 광복 후인 1948년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옹진군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한국독립당 오택관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같은 선거구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당선 이후 부산정치파동 당시 발췌 개헌에 반대하다가 국제공산당 혐의로 투옥됐다.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무소속으로 서울특별시 성북구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자유당 김일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이후 국회 내무위원장을 맡았다.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정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성북구 을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이후 민정당 원내총무를 맡았다.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1971년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어 6선 고지에 올랐으며 제7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당시 신민당 지도위원 신분으로 선거를 도왔다.

1973년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고흥문과 신민당 복수공천을 받아 서울특별시 성북구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고흥문 후보와 민주공화당 정래혁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이후 정계를 은퇴하여 경기도 용인에서 농장을 경영하였다.

1986년 4월 2일 서울특별시 종로구 명륜2가 고려대학교 부설 혜화병원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

3. 선거 이력[편집]


연도
선거종류
선거구
소속정당
득표수(득표율)
당선여부
비고
1948
제헌 국회의원 선거
경기 옹진군 갑[7]

[[무소속|
무소속
]]

6,945 (21.76%)
낙선 (2위)

1950
제2대 국회의원 선거
경기 옹진군 갑[8]
7,997 (42.47%)
당선 (1위)
초선
1954
제3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성북구[9]
8,684 (25.43%)
낙선 (2위)

1958
제4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성북구[10]


40,173 (67.69%)
당선 (1위)
재선
1960
제5대 국회의원 선거
58,586 (73.51%)
3선
1963
제6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성북구 을[11]

[[민정당|
]]

23,299 (42.38%)
4선
1967
제7대 국회의원 선거

[[신민당(1967년)|
파일:신민당 벽보글씨.svg
]]

52,413 (53.51%)
5선
1971
제8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성북구 을[12]
67,040 (65.50%)
6선
1973
제9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성북구[13]
79,169 (25.40%)
낙선 (3위)


역대 선거 벽보[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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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서범석 5대.png


파일:서범석 7대.jpg

제5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9[1])
제7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8[2])

파일:서범석 8대.jpg


파일:서범석 9대.jpg

제8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9[3])
제9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4[4])



4. 둘러보기[편집]














[1]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에는 출생지가 전라남도 광주부 광주읍 서광산정(현 광주광역시 동구 서남동)으로 기재되어 있다.[2] 1991년 현재 위치로 이전 개원했다.[3] 만사공(晩沙公) 경우(景雨)파. 대구 서씨 27세 석(錫) 항렬.[4] 郭敬鳳. 대한민국 초대 여자 경찰서장을 지낸 인물이다.[5] 현재 이 지번에는 호텔케이월드 청계가 들어서 있다.[6] 초명은 서광정(徐光正)이며, 1885년(고종 22) 종6품 부사과(副司果)로 재직 중에 서병규(徐丙圭, 徐丙奎)로 개명했다.# 족보명은 서병진(徐丙眞), 무보(武譜)에는 서광진(徐光眞)으로 등재되어 있다.[7] 제28선거구[8] 제29선거구[9] 제6선거구[10] 제9선거구[11] 제8지역구[12] 제9선거구[13] 제4선거구[14] 제헌국회 시절의 벽보부터 4대 국회까지의 선거벽보는 확인 되지 않고 있다. 이는 당시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선거벽보 보존의 필요성을 못 느껴 선거벽보를 보존하지 않은 것이 그 원인으로,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을 비롯한 1950년대 부터 정치를 시작한 원로 정치인들의 선거벽보 상당수를 확인할 수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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