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특별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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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장
서울特別市長
Mayor of Seoul Metropolitan Government


파일:제39대 서울특별시장 오세훈.jpg

현직
오세훈 / 제33·34·38·39대 (민선 4·5·7·8기)
취임일
2021년 4월 8일
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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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관
서울특별시장 공관
1. 개요
2. 특징
2.1. 가장 강력한 독이 든 성배
2.2. 서울특별시장 선거 100% 적중 지역
3. 법적 권한
4. 상세
5. 주요 인물
6. 역대 시장 목록
6.3. 역대 서울특별자유시장
6.4. 역대 서울특별시장
6.4.1. 관선 1차
6.4.2. 민선 1차
6.4.3. 관선 2차
6.4.4. 민선 2차
7. 생존 중인 전직 민선 서울특별시장
8. 역대 선거 결과
9. 역대 정당별 전적
10. 역대 후보별 순위
11. 역대 후보 득표율 순위
12. 시정 구호
13. 창작물에서의 서울특별시장
14. 관련 문서
15. 둘러보기



1. 개요[편집]


서울특별시장서울특별시를 대표하고, 그 사무를 총괄하는 광역자치단체장이다. 임기는 4년이며, 최대 3선까지 연임할 수 있다.[1] 중임에는 제한이 없으므로, 중간에 낙선하거나 중도 퇴임한 기록이 있으면 연속 재임 기록이 중단되고, 이후 다시 출마할 수 있다.[2]


2. 특징[편집]


대한민국의 수도인 서울특별시라는 상징성과 많은 인구 규모만큼이나 사업을 추진할 수 있는 권한[3]과 나라에 미치는 영향력이 크며, 정치적 비중도 크다.[4] 다른 광역자치단체장들이 차관급의 대우를 받지만, 서울특별시장은 유일하게 장관급 대우를 받는다.[5] 서울특별시는 '서울특별시 행정특례에 관한 법률' 에 의거해서 행정안전부장관의 지휘를 받지 않고 국무총리가 직할하도록 되어 있다.[6] 따라서 선술했듯이 장관급이라는 매우 큰 대우를 받으며, 의결권은 없지만 국무회의에 직접 참석하여 발언이 가능하다. 이는 옛날 조선 때도 비슷했는데, 관찰사(지금의 도지사) 등은 참판(차관)급(종2품) 대우에 그쳤지만, 한성부판윤(지금의 서울시장)은 판서(장관)급(정2품)이라는 상당히 높은 대우를 받았다.[7] 일제강점기에는 경성부가 된 특성상 경성부윤이라고 불렸다.

한국 정계에서는 경기도지사와 함께 대통령으로 가는 중간단계로도 여겨지고 있다. 다른 광역자치단체장들보다 월등히 높은 위상 때문에 서울시장을 거치고 나면 차기 대권의 유력 후보에 포함되고 거론된다. 그러나 실제 서울시장 출신 중 대통령이 된 사례는 이명박이 유일하고 박원순, 오세훈, 고건 등 차기 대통령 후보로 거론되는 이들 모두 끝내 대통령 당선에는 이르지 못했다. 서울시장 경력이 대권 도전에 도움은 되지만 꼭 그 지지도와 위상이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2000년대 중반 이후 경기도의 인구가 서울특별시를 추월하고 갈수록 격차를 벌리고 있지만, 서울특별시장의 특별 대우는 여전하다. 서울특별시장은 '수도의 시장'으로서 정치적 영향력 외에도 지방자치법에서 특례를 인정받아 지방자치법과 '서울특별시 행정특례에 관한 법률'을 통해 일부 특례를 적용받지만, 경기도지사는 다른 도지사들처럼 지방자치법만을 적용받기 때문이다. 다른 광역자치단체들의 경우 지방채 발행이나 자치사무의 감사를 행안부장관이 하지만 서울특별시는 행안부장관이 국무총리에게 손수 보고해야 한다. 또한 국가공무원의 임용 및 징계 등은 해당 주무부처 장관에게 있으나 대통령령에서 정하는 범위 내에서는 서울특별시장이 행사할 수 있다.[8]

다만 장관급의 대우를 받는다고 해서 명목상 서열까지 다른 광역자치단체장보다 높은 건 아니다. 전국시도지사협의회에서 서울특별시장이라고 특별히 권한이 더 크지도 않으며, 발언권도 똑같이 공평하게 받는다.

서울특별시가 설립하고 운영 중인 서울시립대학교의 운영위원장도 당연직으로 맡고 있다. 이 운영위원장을 이사장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심심찮게 보이는데, 서울시립대학교는 아직 법인화가 되지 않았으므로 이사장은 잘못된 표기이다.


2.1. 가장 강력한 독이 든 성배[편집]


선거
낙선자
비고
1995년
박찬종2
계속된 낙선[9]정계 은퇴
정원식3
낙선 후 정계 은퇴, 소속 정당인 민주자유당 참패 여파로 김대중의 정계 복귀
1998년
최병렬2
노무현 탄핵 소추안 제출 후 가결로 인한 정치적 역풍으로 한나라당 대표직 사퇴, 이후 정계 은퇴
2002년
김민석2
지방선거 패배 후 새천년민주당 제16대 대통령 선거 후보였던 노무현의 지지율이 떨어지자 탈당하여 정몽준 캠프로 이적하였지만 이후 노무현으로 단일화되며 복당하였고, 이로 인해 철새 이미지가 생기며 원내 복귀까지 장장 18년 소요[10]
2006년
강금실2
제18대 국회의원 선거 불출마 선언, 사실상 정계 은퇴
박주선3
이후 광주광역시 동구로 지역구 옮김, 4선까지 성공하며 국회부의장 자리까지 오르지만, 본인의 소속 정당인 민생당의 몰락과 3위 낙선으로 5선에는 실패[11]
2010년
한명숙2
이후 민주통합당 대표 역임과 제19대 국회의원 선거 참패, 불법정치자금 수수 혐의로 복역, 사실상 정계 은퇴
노회찬3
이후 정의당 원내대표, 2018년 드루킹 불법 정치자금 수수 사건에 연루되어 수사 중 투신자살
지상욱4
본인의 소속 정당인 자유선진당의 몰락, 새누리당으로 흡수 합당[12], 이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을 통해 원내 입성에 성공하지만 제2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낙선[13]
2011년
나경원2
선거 기간 동안 제기된 각종 의혹과 논란으로 인한 이미지 추락, 이후 동작구 을로 지역구를 옮겨서 4선 의원까지 성공하고 자유한국당 원내대표를 지내며 재기하였으나, 연이은 선거에서 패배[14]
2014년
정몽준2
버스비 70원, 정몽주니어 논란 등으로 인한 이미지 추락, 이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 불출마하고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계기로 새누리당을 탈당하며 정계 은퇴
2018년
김문수2
강성 친박으로 전향[15], 박근혜 석방 집회 참석과 전광훈과의 커넥션으로 인한 극우 이미지 고착화와 사실상 제도권 정계에서의 축출[16]
안철수3
막스 플랑크 혁신과 경쟁 연구소로 연수 후 정계 복귀, 차기 대선 지지율 급락[17]
2021년
박영선2
선거 기간 동안 잦은 실언과 네거티브 전략으로 인한 이미지 추락과 큰 표차로 참패하며 정치적 입지 좁아짐[18]
2022년
송영길2
정치적 입지 좁아짐[19] #, 더불어민주당 전당대회 돈봉투 의혹 사건 책임론과 그에 따른 탈당과 구속

특이하게도 서울특별시장 선거 패자는 그걸 끝으로 아예 정계를 떠나서 잊혀지거나, 정치 생활은 연명하되 상승세는 확 꺾이는 경우가 상당히 많이 보이는데, 다음은 그 목록이다. 위첨자 표시된 숫자(2, 3 등)는 서울시장 선거 순위이다. 당선인들 역시 이명박 전 시장 이후로 계속 끝이 안 좋다.[20]

다만 위에서 거론된 사례들을 비교해 보면 각 낙선자의 사례간에 차이가 커서 일률적으로 일일이 비교하기는 어렵고, 특이한 징크스라기보다는 그냥 서울특별시장이라는 직위 자체의 특수성 때문에 벌어지는 현상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할 수도 있다. 일단 서울특별시장 자체가 선출직 공무원 중에서는 수도이자 인구 900만 명 도시이기 때문에 정치적 위상이 높은 자리[21]이고, 정치적으로도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를 비롯한 주요 선거들마다 승패를 가르는 가장 중요한 표밭으로 여겨지는 서울특별시(수도권)의 지지를 얻어야 당선될 수 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 비수도권 거주자도 서울시장만큼은 누군지 알지만, 반대로 수도권 거주자는 경기도지사인천광역시장 정도만 알지 충청도나 전라도, 강원특별자치도, 경상도, 제주특별자치도, 대전광역시, 광주광역시, 대구광역시, 울산광역시, 부산광역시 등 지방 지역들의 시장이나 도지사는 누군지도 모르는 경우가 태반이다.[22]

하지만 정작 현재 기준으로 (민선) 서울특별시장을 거쳐 대통령에 이른 인물이라곤 겨우 이명박밖에 없는데, 이는 6공 이후 우리나라의 정치 제도 특징상 서울특별시장은 국내의 선출직 공무원 중에서는 사실상 2인자로서 소통령이라고 불릴 정도지만, 실제 업무라곤 지방자치단체의 장으로서 중앙 정계와는 한 발짝 떨어져 있다는 특성을 가지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대통령으로 이르는 정치적 경력을 착착 밟아나가고 있는 유력 대권 후보급 주요 정치인의 입장에서 보면 중앙 정계에서 물러나 서울특별시장에 도전하기보다 국회의원이나 장관 등 중앙 정계에서 두각을 드러내는 것이 더 매력적이고 안정적인 선택지로 여겨질 가능성도 충분히 높은 것.

실제로 역대 서울특별시장 선거에 도전한 주요 정치인들의 사례를 보더라도 성공적인 경력(국회의원, 국무위원 등)을 이어가고 있던 도중 서울시장 선거에 도전한 사례보다는[24], 일시적 정치 활동 중단이나 낙선 등으로 인해 기존 경력이 중단된 상태에서 다시 정치 무대에 복귀하기 위한 토대로써 지방선거에 도전하는 경우가 많았음을 알 수 있다. 대표적으로 역대 서울특별시장 중 가장 성공적인 정치적 경력인 대통령을 거친 이명박의 경우를 보더라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당시의 불법 선거 운동으로 의원직을 상실당할 위기에 쳐하자 자진 사퇴한 후 결국 피선거권을 박탈당했다가 사면 복권된 후 서울시장 도전으로 정계 복귀를 시도한 뒤 성공한 케이스다. 제16대 국회 당시 정치에 갓 입문한 초선 국회의원에 불과하였던 오세훈 서울시장 역시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불출마 선언을 하고 정계와 잠시 거리를 두고 있다가, 2006년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를 앞두고 정계에 복귀한 뒤 서울특별시장 선거에 출마해 당선된 케이스다.

이런 점을 종합해 보면 서울특별시장 선거에서 패배한 사람은 그것을 끝으로 정계를 떠나서 잊혀지거나 설사 정치 생활은 연명하되 상승세가 확 꺾이고 입지도 좁아지는 경우가 많은 이유가 무엇인지 쉽게 짐작해 볼 수 있다. 서울특별시장 자체가 선출직 공무원들 중 대통령에 이어 사실상 2위의 위상을 차지하고 있는 만큼 서울특별시장에 도전했던 정치인이 정치적 상승세를 보이려면 먼저 대권 주자급이 되어야 한다. 즉, 서울특별시장 후보급에서 경력이 상승할 길[25] 자체가 워낙 좁으니 그 좁은 길로 들어가지 못하면 상승세가 확 꺾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서울특별시장 후보급 경력의 정치인 정도라면 이미 정치 경력 자체가 상당히 긴 원로급 정치인[26]일 가능성이 높고, 나이 역시 적지 않을 가능성이 높으니 선거에서 패배하면 재기와 재도전을 하지 못하고 정계 은퇴 수순을 밟게 되더라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다. 더구나 지방자치단체장인 서울특별시장에 도전하는 정치인 중 중앙 정계에서의 경력이 단절되어 지방선거를 통해 정계에 복귀하려는 이들의 비중이 상당하다는 점도 생각하면 정계 복귀에 실패하면 정치적 은퇴 수순을 밟게 되는 것 역시 이상한 일이 아닌 셈.

뿐만 아니라 이명박 이후 서울특별시장을 거친 이들은 어째서인지 말년이 안 좋다. 이명박 전 시장의 경우 임기를 무사히 마쳤고 대통령까지 당선되었으나, 각종 범죄 사실들로 인해 징역형을 선고 받아 수감 생활을 했다가 2022년 12월에 사면되었다.[27] 오세훈 시장은 2011 서울특별시 무상급식 주민투표 개표 무산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재선 임기 시작 1년 1개월 만에 사퇴했다가 서울특별시장으로 복귀할 때까지 10년을 야인으로 지내야 했으며, 박원순 전 시장은 여비서 성추행 사건으로 피고소된 후 자살했다.

대통령 선거 출마를 위해 중도 사퇴를 한 초대 민선 시장 조순 전 시장을 제외하면 초선 기준으로는 모두 임기를 무사히 마쳤다. 하지만 이명박, 고건 전 시장을 제외하면 재선까지 포함했을 때 임기를 무사히 마치지는 못했다.

그리고 정태흥, 김종민, 송명숙, 권수정, 허경영 같은 소수정당 소속 후보들은 이런 징크스가 발동하지 않았기 때문에 거대 정당(민주당계 정당 및 보수정당)[28]과 유력 무소속 후보(박찬종, 박원순)에게만 한정된 징크스라고 볼 수 있다. 소수 정당 후보들 중 이 징크스가 걸려 말로가 좋지 않았던 김종철, 노회찬 후보는 그나마 이들 중에서는 이름값이 있는 후보였다. 즉 김종철, 노회찬 정도가 아닌 이상 소수 정당 후보들은 서울특별시장에 출마한들 사람들의 주목조차 못 받고, 거대 양당 및 유력 무소속 후보는 큰 관심을 받았다가 낙선, 혹은 당선되고도 불명예 퇴진하면 데미지도 거기에 비례해서 커지는 것이다.

2.2. 서울특별시장 선거 100% 적중 지역[편집]


서울특별시장 선거 적중 지역 결과
연도
당선인
중구
양천구
영등포구
강동구
1995년
조순
(42.4%)
조순
(44.1%)
조순
(41.8%)
조순
(41.7%)
조순
(39.8%)
1998년
고건
(53.5%)
고건
(54.9%)
고건
(54.5%)
고건
(53.9%)
고건
(52.1%)
2002년
이명박
(52.3%)
이명박
(50.1%)
이명박
(52.6%)
이명박
(50.9%)
이명박
(55.1%)
2006년
오세훈
(61.1%)
오세훈
(59.6%)
오세훈
(61.5%)
오세훈
(60.8%)
오세훈
(64.6%)
2010년
오세훈
(47.4%)
오세훈
(47.6%)
오세훈
(47.5%)
오세훈
(47.5%)
오세훈
(50.0%)
2011년
박원순
(53.4%)
박원순
(52.0%)
박원순
(53.5%)
박원순
(53.6%)
박원순
(51.6%)
2014년
박원순
(56.1%)
박원순
(55.3%)
박원순
(57.6%)
박원순
(56.3%)
박원순
(54.5%)
2018년
박원순
(52.8%)
박원순
(52.3%)
박원순
(53.2%)
박원순
(52.1%)
박원순
(52.7%)
2021년
오세훈
(57.5%)
오세훈
(56.8%)
오세훈
(57.5%)
오세훈
(58.4%)
오세훈
(59.2%)
2022년
오세훈
(59.1%)
오세훈
(58.5%)
오세훈
(58.8%)
오세훈
(60.1%)
오세훈
(60.6%)

득표율 차이(%p)
1995
1998
2002
2006
2010
2011
2014
2018
2021
2022
평균
양천구
0.6
1.0
0.3
0.4
0.1
0.1
1.5
0.4
0.0
0.3
0.47
영등포구
0.7
0.4
1.4
0.3
0.1
0.2
0.2
0.7
0.9
1.0
0.59

1987년 민주화 이후 1995년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부터 서울특별시장 선거는 총 10번을 진행하였다. 지방선거 8번, 재보궐선거 2번.

서울특별시는 자치구가 25개 있는데, 25개 자치구 중 10번의 서울시장 선거를 정확히 예측한 100% 적중 지역, 즉 구 개표 결과 1위와 서울특별시장 당선인이 일치한 지역은 딱 4개 구가 있다. 나머지 지역은 거의 대부분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한명숙 후보를 더 많이 지지하여 떨어졌다.
중구와 영등포구는 대표적인 상업지구로 지역 주민보다 외지인들이 더 많은 곳이고, 목동이 있는 양천구와 둔촌동이 있는 강동구는 주거 지역이다. 중구를 제외하고 나머지 3곳 모두 한강 이남에 있다. 서울시장 선거와 득표율까지 가장 가까이 맞히는 지역은 바로 양천구. 특히 2021년 재보궐선거의 경우에는 소수점 단위까지 일치하여 득표율까지 동률이 되었다. 아래는 서울특별시 전체 득표율과 해당 구의 득표율 차이를 정리해 놓은 것이다.


3. 법적 권한[편집]


서울특별시 행정특례에 관한 법률

제4조(일반행정 운영상의 특례)

⑤ 서울특별시 소속 국가공무원의 임용 등에 관한 「국가공무원법」 제32조제1항부터 제3항까지, 제78조제1항ㆍ제4항 및 제82조에 따른 소속 장관 또는 중앙행정기관의 장의 권한 중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사항은 서울특별시장이 행사하며[29]

, 이와 관련된 행정소송의 피고는 같은 법 제16조에도 불구하고 서울특별시장이 된다. <개정 2011.5.30.>

⑦ 서울특별시 소속 공무원 등에 대한 서훈(敍勳)의 추천은 「상훈법」 제5조제1항에도 불구하고 서울특별시장이 한다. <개정 2011.5.30.>


국무회의 규정

제7조(대리 출석) ① 국무위원이 국무회의에 출석하지 못할 때에는 각 부의 차관(행정안전부의 재난안전관리사무에 관하여는 이를 담당하는 본부장을 포함한다)이 대리하여 출석한다.

② 대리 출석한 차관은 관계 의안에 관하여 발언할 수 있으나 표결에는 참가할 수 없다.

제8조(배석 등)국무회의에는 대통령비서실장, 국가안보실장, 대통령비서실 정책실장, 국무조정실장, 국가보훈처장, 인사혁신처장, 법제처장, 식품의약품안전처장, 공정거래위원회위원장, 금융위원회위원장, 과학기술혁신본부장, 통상교섭본부장 및 서울특별시장이 배석한다. 다만, 의장이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경우에는 중요 직위에 있는 공무원을 배석하게 할 수 있다.

② 의장이 필요하다고 인정할 때에는 중앙행정기관인 청(廳)의 장으로 하여금 소관 사무와 관련하여 국무회의에 출석하여 발언하게 하거나 관계 전문가를 참석하게 하여 의견을 들을 수 있다.


서울특별시장은 국무회의에 배석할 권리 혹은 의무(과거)가 있다. 이는 대한민국 출범 후 참여정부 시기를 제외하고 서울시장에게 주어진 의무 혹은 권리였다. 단 참여정부는 서울특별시장(당시 32대 한나라당 이명박, 33대 한나라당 오세훈)에게 보장된 국무회의 배석 및 발언권을 박탈했다.[30]


4. 상세[편집]


임명직 시장 시절부터 현행 선출직 시장까지 국무회의에도 참석이 가능하며, 발언권은 있지만 의결권은 없다. 실제로 박원순 전 시장도 의결권이 없다는 것을 발언한 적이 있다. 관련 기사 국무회의에서 발언권과 표결권을 행사할 수 있는 국무위원들은 모두 국무회의 부의장의 제청에 따라 국무회의 의장이 임명한 자들[31]이고 그 외의 다른 배석 인원들은 모두 국무회의 의장이 직접 임명한 자들이다. 또한 모든 국무회의 안건들은 의장이나 부의장, 그리고 국무위원들에 의해서 제의되기 때문에 국무회의를 이끄는 주류에 반대 입장을 내는 참석자는 십중팔구 야당 소속 서울특별시장 밖에 없다.[32] 그래서 가끔씩 반대 의견이 나오면 이런 이유에서다.

장면 내각 시절에는 민선 서울시장도 각의(현재의 국무회의)에 의무적으로 참석했다. 이때 민선 서울시장이 김상돈 한 명뿐이고 임기도 몇 달 못 갔다는게 함정이지만. 5.16 군사정변으로 지방자치제도가 폐지되고 난 관선제 시절에는 당연히 서울시장도 국무회의에 의무적으로 참석했고, 1995년에 다시 민선 서울시장이 들어오면서 권리로 약화된 것이다. 그래도 민선 1기 조순 전 시장과 민선 2기 고건 전 시장은 다른 일정이 없는 한 화요일 정례 국무회의에 매주 참석했다. 2002년에는 이명박이 서울시장이 되면서 정무부시장을 대타로 보내는 등 조금씩 출석율이 떨어졌다. 그러다가 참여정부 시기(2003~2008)에는 서울시장의 국무회의 참석을 금지시켰다가 2008년이명박 정부가 출범하면서 다시 국무회의에 배석되어 당시 오세훈 시장(2006~2011)은 국무회의에 꽤 자주 참석했다. 3개월에 1회는 정례적으로 참석하고[33], 보통은 정무부시장을 배석시켰다. 그러나 박원순 전 시장 때는 정무부시장도 보내지 않아 국무회의 참석율이 10% 아래로 떨어지기에 이른다. 지금은 정말로 예산시즌 아니면 아예 서울시장이 국무회의에 찾아가질 않지만 정권이 교체되었고, 오세훈 시장은 이전부터 국무회의에 잘 참석했으므로 추이는 지켜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규정은 서울특별시장이 배석한다이지 배석할 수 있다아니다. 즉 현재까지도 규정상 서울시장은 의무적으로 국무회의에 참석해야 하는 존재이며, 약간 다른 관점에서 보면 서울시장이 아무리 마음에 안 들어도 대통령은 서울시장을 국무회의에서 기수열외시켜버릴 수 없다는 뜻으로도 읽어, 야당 서울시장의 국무회의에서의 발언권을 보장하는 규정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한편, 서울시장한테 출석 의무를 달아놓은 규정은 2008년 2월 29일에 생겼으며, 이렇게 대통령령 개정으로 서울시장에게 국무회의 출석 의무를 지워놓은 인물은 바로 서울시장 출신 이명박이다.

여하간 정치적 위치와 상징성 때문에 서울특별시장은 사실상 차기 대권주자로 보내기에 딱 좋은 위치이어서 뭇 사람들의 관심이 쏠린다. 정치에 관심 많은 전국의 시민들이 서울특별시장 선거에 많은 관심을 쏟는 것도 다음 차기 대선후보를 점칠 수 있는 지표 중 하나라서 그런 것이다. 이 테크가 아니어도 전·현직 시장이 가지는 정치적 가치는 어마어마해서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유력한 차기 대선 후보로 전·현직 서울특별시장의 이름이 오르내리는 것은 정치계에선 당연한 일로 자리를 잡았다. 아래 주요 서울특별시장만 봐도 한국 정치사에 크나큰 영향을 미친 사람들임을 알 수 있다.

윤보선, 이명박이 서울시장을 지낸 뒤에 대통령이 되었고, 허정고건국무총리로 지내다가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기도 했다. 특이한 점으로 서울시장 출신 총리는 허정, 고건 둘밖에 없어서 서울시장 출신 총리 = 대통령 권한대행이라는 것이다.

1994년 10월 21일 성수대교 붕괴 사고로 전임 시장(이원종)의 경질 이후, 후임 시장에 취임했던 우명규는 취임하자마자 첫 임무를 무겁게 시작했다. 그러나 성수대교 건설 당시 서울특별시청 건설본부장으로서 실무 총책임자였다는 게 밝혀져 11일 만에 자진 사퇴[34]하고 최병렬이 시장으로 임명된다. 그러나 최병렬 전 시장도 퇴임 전날에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가 일어나, 조순 전 시장은 취임식하자마자 바로 사고 현장으로 달려가서 상황을 살피고 첫 임무를 무겁게 시작했다.

역대 최연소 서울시장은 경성부윤 취임 당시 39세였던 김형민 전 시장이며, 그 다음은 40세였던 김현옥 전 시장이다. 민선 기준으로는 초선 취임 당시 45세였던 오세훈 시장이 있다.

시장에게는 재임 기간 동안 거처할 수 있는 공관이 제공된다. 위치는 종로구 혜화동에서 삼청동 공관촌가회동 서울재동초등학교의 인근으로 이전하였다. 기존의 공관은 서울 한양도성 전시안내센터로 리모델링되었다.

참고로 민선 구청장시의원 출신은 아직 없는게 특징이다. 구청장 출신은 시장은 물론 주요 정당의 시장 후보로조차 선출되는 일이 없다시피한데, 구청장의 권한이 동급인 자치시장보다 확연히 적고 반대로 서울특별시장은 동격인 광역시장이나 도지사에 비해서도 위상이 높다 보니 구청장 정도로는 서울시장을 노리기에 부족하다고 여겨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서울시내의 구청장만 해도 25명이나 되다 보니 서울 전체에서 단 1명 뿐인 서울특별시장을 노리기에는 정치적 관심도나 언론 노출 빈도가 크게 떨어질 수밖에 없기도 하다. 시의원은 시정을 견제하는 역할을 하지만, 권수정 10대 서울시의원이 유일하게 출마하였다.[35][36]

호남 출향민 비중이 높은 서울로 비록 초대 서울시장이 호남 출신이지만 민선 서울시장 중 호남 출신은 아직까지는 고건[37] 한 명뿐이다. 다만 호남 출향민들을 의식해서인지 박원순 전 시장은 임기 중 서울 부시장 3인을 호남 출신으로 기용한 경우가 상당히 많았다.[38] 또한 역대 민선 서울특별시장 중 위의 고건의 경우를 제외하면, 순수 서울특별시 출신은 아주 엄격하게 따지면 없다.[39]

역대 서울시장 선거에서 적중률 100%의 승패 판독기 역할을 한 자치구는 중구, 양천구, 영등포구, 강동구다. # 이 4개의 자치구는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부터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까지 각 선거의 서울시장 당선인들이 모두 승리한 지역이다. 다시말해 해당 지역에서 승리한 후보들은 모두 서울시장에 당선되었다는 의미다. 이 중에서 특히 양천구영등포구는 각 후보의 해당 지역에서의 득표율과 서울 전체 득표율이 비슷하게 나온 적이 많아 서울시장 선거 때 특히 주목을 받는다. #

그 외에도 송파구가 서울시장 선거의 판독기 역할을 했는데, 이는 송파구의 인구가 많은 것도 있지만[40] 다른 지역에서 인구가 많이 유입된 지역이기 때문이다.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접전 끝에 패배한 한명숙은 25개 지역구 가운데 17곳에서 승리하고도 오세훈에 패배했는데 오세훈이 승리한 지역 8곳 중 하나가 송파구였다. # 하지만 2011년 하반기 재보궐선거 당시에는 박원순이 아닌 나경원송파구에서 1위를 기록하면서, 적중률 100%의 족집게 지역에서 탈락했다. 그래도 재보궐선거를 제외한 정식 선거에서의 승자는 모두 맞혔기 때문에, 위의 4개 자치구와 함께 족집게 지역으로 종종 거론된다.


5. 주요 인물[편집]


  • 김형민: 초대 시장. 시작은 경성부윤이었다가 서울특별자유시장으로 직함명이 바뀌었다. 후임자가 대통령까지 돼서 워낙 유명해지는 바람에 상대적으로 묻혔으나 우남시가 될 뻔한 현 서울시 지명을 지켜내었고 그 외 다수의 일제 잔재 지명을 바꾸는 데에 기여한 인물이다.





  • 김현옥: 제14대 시장. 5.16 군사정변에 가담하여 제12대 경상남도 부산시장에 임명되었으며 부산시직할시로 승격시키고자 부산과 중앙을 새벽 열차로 왕래하면서 직할시 승격 필요성을 역설한 끝에 중앙의 승인을 획득하여 부산직할시 승격에 성공하고[41] 초대 부산직할시장(대수로는 13대)이 되었다가 몇 년 뒤 이 자리로 이임하였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서울특별시장 재임 시절 가졌던 불도저 시장이라는 별명의 원조가 되는 인물로, 파리의 오스만 시장에 버금가도록 서울과 부산에 대개조 사업을 벌였다. 1960년대 말 서울특별시의 주거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판잣집을 철거하고 시민아파트를 짓는 개발 정책을 주도했고, 서울전차 폐선[42]서울 지하철 기본 계획 수립도 이 사람이 했다. 오늘날 우리나라 아파트 문화를 연 장본인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너무 개발 정책에만 목을 맨 나머지 와우 시민아파트 붕괴사고를 일으키고 사퇴하였다. 나중에 내무부장관으로 영전한다.


  • 구자춘: 제16대 시장. 전임자가 만든 서울 지하철 계획을 자기 입맛에 맞게 적절하게 변형하여 지금의 서울 지하철 2호선, 서울 지하철 3호선, 서울 지하철 4호선의 서울시내 구간을 만들어냈다. 특히 2호선 계획 당시 지도에 줄 그어서 30분 만에 순환선으로 만들었다는 전설이 나름 유명.[43] 이러한 서울특별시 지하철 계획 변경으로 인해 강남 개발이 가속화 되었다. 별명은 황야의 무법자였다. 구 시장도 훗날 내무부장관을 지냈다.



  • 고건: 제22·31대 시장. 관선과 민선으로 2번 시장을 한 특이한 사례.[44] 임기 초부터 제일 중요한 시정 현안은 교통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교통관련 정책을 많이 펼쳤다. 2기 지하철동부간선도로를 개통시키고, 서울특별시 시내버스천연가스버스를 도입해 당시 심각했던 서울특별시의 대기오염을 대폭 감소시키는데 기여했다. 뒷날 국무총리 재임 중 대통령 권한대행맡았다.



  • 조순: 제30대 시장. 최초이자 5공 이전의 유일한 민선 서울시장이었던 제11대 김상돈 전 시장(2공)의 뒤를 잇는 민선 서울시장인 동시에 6공 최초의 민선 서울특별시장이다. 안타깝게도 시장에 당선된지 2일 후에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가 발생하는 바람에 취임식도 대폭 축소하여 간소하게 치르고 바로 사고 현장부터 가서 상황을 살핌으로써 첫 임무를 무겁게 시작하였다. 임기 중 통합민주당 후보로서 제15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기 위해 시장직에서 사퇴하였으나 지지율이 정체되며 대통령 선거 후보직에서 사퇴하였다. 직후에는 신한국당과 합당하여 한나라당을 창당하며 초대 총재가 된다.


  • 오세훈: 제33·34·38·39대 시장. 최초로 재선에 성공한 민선 시장이다. 뚜렷한 행정 성과, 반듯한 이미지와 외모로 강력한 차기 대권 후보로 거론됐지만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승리 아닌 승리를 거두며[45] 불안한 모습을 보이더니 2011 서울특별시 무상급식 주민투표 패배로 사퇴하였다. 그러나 중도 사퇴 후 10년 간의 공백기를 보낸 뒤 2021년 재보궐선거로 서울특별시장에 다시 당선되어 박원순에 이은 헌정 사상 두 번째 3선 서울특별시장이 되었고, 2021년 4월 8일 제38대 서울특별시장으로 취임하여 현재까지 시정을 이끌고 있다. 2022년 6월 2일,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헌정 사상 최초의 민선 4선 광역자치단체장, 최초의 4선 서울특별시장 자리에 올랐다.

  • 박원순: 제35-37대 시장. 위의 오세훈 시장의 사퇴로 열린 2011년 하반기 재보궐선거에서 당선되었다. 첫 출마 당시 아름다운가게참여연대 설립에 참여한 인권변호사 이력에 비해 인지도가 높지 못해 5% 정도의 인기 없는 후보였으나, 당시 야권 후보 안철수의 양보 및 적극적인 지원으로 인하여 극적으로 시장에 당선되었다.[46] 2011년 10월 27일에 취임하여 2014년 재선에 성공하였고 재선 임기 3년차에 들어서면서 조선 건국 이래 최장 기간을 재임하는 서울의 책임자(한성판윤과 경성부윤 포함)였으며 대한민국 헌정 사상 최초로 연속 3선에 성공한 서울특별시장이다. 그러나 재임 중 여비서를 성추행한 사건으로 피고소된 후 2020년 7월 9일 밤 북악산 부근에서 사망한 채로 발견되었다.


6. 역대 시장 목록[편집]


역대 시장의 사진과 주요 업적에 대해서는 서울시 홈페이지의 이 문서를 참고. 서울시 측에서는 초대 시장을 김형민으로 삼고 있다.
조선시대의 판한성부사 -> 한성부 판윤을 거쳐간 인물 2016명의 명단 중 일부는 이 곳에서 볼 수 있다.[47] 다른 자료로 서울특별시 조직변천사I(1987)의 부록[48] 있는데, 이 자료에서는 총 인원이 현재 시장인 39대 오세훈 시장까지 포함해도 1430명 밖에 되지 않는다.


6.1. 한성판윤[편집]


  • 판한성부사 (1395~1466)
조선 태조 시대인 1395년부터 세조 시대의 1466년까지 86명이 판한성부사를 거쳐갔다.
  • 한성 부윤 (1466~1567)
세조 시대의 1466년부터 명종 시대의 1567년까지의 142명이 한성 부윤을 거쳐갔다.
  • 한성부 판윤 (1567~1910)
명종 시대의 1567년부터 대한제국 순종 시대의 1910년까지 1716명이 한성부 판윤을 거쳐갔다.


6.2. 경성부윤[편집]


일제강점기 조선 경기도 경성부윤[49]
대수
이름
임기
정부
비고
초대
오바 간이치 (大庭寛一)
1910년 10월 1일 ~ 1912년 3월 31일
조선총독부
[50]
2대
가나야 미쓰루 (金谷充)
1912년 4월 1일 ~ 1919년 12월 3일
[51]
3대
사이토 레이조 (斎藤礼三)
1919년 12월 4일 ~ 1921년 8월 4일
[52]
4대
요시마쓰 노리오 (吉松憲郎)
1921년 8월 5일 ~ 1923년 2월 23일
[53]
5대
다니 다키마 (谷多喜磨)
1923년 2월 24일 ~ 1925년 6월 14일
[54]
6대
마노 세이이치 (馬野精一)
1925년 6월 15일 ~ 1929년 1월 20일
[55]
7대
마쓰이 후사지로 (松井房治郎)
1929년 1월 21일 ~ 1929년 12월 10일
[56]
8대
세키미즈 다케시 (関水武)
1929년 12월 11일 ~ 1930년 12월 11일
[57]
9대
안도 게사이치 (安藤袈裟一)
1930년 12월 12일 ~ 1931년 9월 22일
[58]
10대
이노우에 기요시 (井上清)
1931년 9월 23일 ~ 1933년 12월 4일
[59]
11대
다테 요쓰오 (伊達四雄)
1933년 12월 5일 ~ 1936년 5월 20일
[60]
12대
간자 요시쿠니 (甘蔗義邦)
1936년 5월 21일 ~ 1937년 7월 2일
[61]
13대
사에키 아키라 (佐伯顕)
1937년 7월 3일 ~ 1938년 11월 8일
[62]
14대
다카하시 사토시 (高橋敏)
1938년 11월 9일 ~ 1941년 1월 23일
[63]
15대
야노 모모로 (矢野桃郎)
1941년 1월 24일 ~ 1942년 5월 21일
[64]
16대
후루이치 스스무 (古市進)
1942년 5월 22일 ~ 1945년 5월 1일
[65]
17대
이쿠타 세이자부로 (生田清三郎)
1945년 5월 2일 ~ 1945년 6월 15일
[66]
18대
쓰지 게이고 (辻桂五)
1945년 6월 16일 ~ 1945년 8월 15일[67]
[68]
미군정 조선 경기도 경성부 군정부윤[69]
초대
제임스 킬러프 (James S. Killough)
1945년 9월 9일 ~ 1945년 11월 16일
미군정
[70]
2대
제임스 윌슨 (James Willson)
1945년 11월 17일 ~ 1946년 9월 27일
[71]
미군정 조선 경기도 경성부 민정부윤[72]
초대
이범승 (李範昇)
1945년 10월 25일[73] ~ 1946년 5월 9일[74]
미군정
[75]
권한대행
김성환 (金聖煥)
1946년 5월 10일 ~ 1946년 6월 29일
[76]
2대
김형민 (金炯敏)
1946년 6월 30일[77] ~ 1946년 9월 27일
[78]


6.3. 역대 서울특별자유시장[편집]


관선 서울특별자유시장
대수
사진
이름
임기
정부
비고
초대
파일:1대김형민.png
김형민 (金炯敏)
1946년 9월 28일 ~ 1948년 12월 14일
미군정
[79]
2대
파일:2대윤보선.png
윤보선 (尹潽善)
1948년 12월 15일 ~ 1949년 6월 5일
이승만 정부
[80]
3대
파일:3대이기붕.png
이기붕 (李起鵬)
1949년 6월 6일 ~ 1949년 8월 14일
[81]


6.4. 역대 서울특별시장[편집]



6.4.1. 관선 1차[편집]


관선 서울특별시장
대수
사진
이름
임기
정부
비고
4대
파일:3대이기붕.png
이기붕 (李起鵬)
1949년 8월 15일 ~ 1951년 5월 8일
이승만 정부
[82][83]
5대
파일:5대김태선.png
김태선 (金泰善)
1951년 6월 27일 ~ 1952년 7월 23일
[84]
6대
1952년 8월 29일 ~ 1956년 7월 5일
[85][86]
7대
파일:7대고재봉.png
고재봉 (高在鳳)
1956년 7월 6일 ~ 1957년 12월 13일
[87]
8대
파일:8대허정.png
허정 (許政)
1957년 12월 14일 ~ 1959년 6월 11일
[88]
9대
파일:9대임흥순.png
임흥순 (任興淳)
1959년 6월 12일 ~ 1960년 4월 30일
[89]
10대
파일:10대장기영.png
장기영 (張基永)
1960년 5월 2일 ~ 1960년 12월 30일
허정 내각
[90]

6.4.2. 민선 1차[편집]


민선 서울특별시장[91][92]
대수
사진
이름
임기
당적[93]
비고
11대
파일:11대김상돈.png
김상돈 (金相敦)
1960년 12월 30일 ~ 1961년 5월 16일


[94]


6.4.3. 관선 2차[편집]


관선 서울특별시장
대수
사진
이름
임기
정부
비고
12대
파일:12대윤태일.png
윤태일 (尹泰日)
1961년 5월 20일 ~ 1963년 12월 16일
국가재건최고회의
[95]
13대
파일:13대윤치영.png
윤치영 (尹致暎)
1963년 12월 17일 ~ 1966년 3월 30일
박정희 정부
[96]
14대
파일:14대김현옥.png
김현옥 (金玄玉)
1966년 3월 31일 ~ 1970년 4월 15일
[97]
15대
파일:15대양택식.png
양택식 (梁鐸植)
1970년 4월 16일 ~ 1974년 9월 1일
[98]
16대
파일:16대구자춘.png
구자춘 (具滋春)
1974년 9월 2일 ~ 1978년 12월 21일
[99]
17대
파일:17대정상천.png
정상천 (鄭相千)
1978년 12월 22일 ~ 1980년 9월 1일
[100]
18대
파일:18대박영수.png
박영수 (朴英秀)
1980년 9월 2일 ~ 1982년 4월 27일
전두환 정부
[101]
19대
파일:19대김성배.png
김성배 (金聖培)
1982년 4월 28일 ~ 1983년 10월 14일
[102]
20대
파일:20대염보현.png
염보현 (廉普鉉)
1983년 10월 15일 ~ 1987년 12월 29일
[103]
21대
파일:21대김용래.png
김용래 (金庸來)
1987년 12월 30일 ~ 1988년 12월 4일
[104]
22대
파일:22대고건.png
고건 (高建)
1988년 12월 5일 ~ 1990년 12월 26일
노태우 정부
[105]
23대
파일:23대박세직.png
박세직 (朴世直)
1990년 12월 27일 ~ 1991년 2월 18일
[106]
24대
파일:24대이해원.png
이해원 (李海元)
1991년 2월 19일 ~ 1992년 6월 25일
[107]
25대
파일:25대이상배.png
이상배 (李相培)
1992년 6월 26일 ~ 1993년 2월 25일
[108]
26대
파일:26대김상철.png
김상철 (金尙哲)
1993년 2월 26일 ~ 1993년 3월 4일
김영삼 정부
[109]
27대
파일:27대이원종.png
이원종 (李元鐘)
1993년 3월 8일 ~ 1994년 10월 21일
[110]
28대
파일:28대우명규.png
우명규 (禹命奎)
1994년 10월 22일 ~ 1994년 11월 2일
[111]
29대
파일:29대최병렬.png
최병렬 (崔炳烈)
1994년 11월 3일 ~ 1995년 6월 30일
[112]


6.4.4. 민선 2차[편집]


민선 서울특별시장
대수
사진
이름
임기
당적[113]
출신지
비고
30대
파일:30대조순.png
조순 (趙淳)
1995년 7월 1일 ~ 1997년 9월 9일

파일:민주당(1991) 글자.svg

강원 강릉
[114][115]
권한대행
파일:대행강덕기.png
강덕기 (姜德基)
1997년 9월 10일 ~ 1998년 6월 30일
행정1부시장
경남 진주
[116]
31대
파일:22대고건.png
고건 (高建)
1998년 7월 1일 ~ 2002년 6월 30일

[[새정치국민회의|
파일:새정치국민회의 흰색 로고타입.svg
]]

서울 종로
[117][118]
32대
파일:32대이명박.png
이명박 (李明博)
2002년 7월 1일 ~ 2006년 6월 30일

파일:한나라당 흰색 로고타입(1997~2004).svg

일본 오사카[119]
[120][121]
33대
파일:33대오세훈.png
오세훈 (吳世勳)
2006년 7월 1일 ~ 2010년 6월 30일

파일:한나라당 흰색 로고타입.svg

서울 성동
[122][123]
34대
2010년 7월 1일 ~ 2011년 8월 26일
[124][125]
권한대행
파일:권부시장.jpg
권영규 (權寧奎)
2011년 8월 27일 ~ 2011년 10월 26일
행정1부시장
경북 안동
[126]
35대
파일:35대박원순.png
박원순 (朴元淳)
2011년 10월 27일 ~ 2014년 6월 30일

[[무소속|
무소속
]]

경남 창녕
[127][128][129]
36대
2014년 7월 1일 ~ 2018년 6월 30일

[[새정치민주연합|
파일:새정치민주연합 흰색 로고타입.svg
]]

[130][131]
37대
2018년 7월 1일 ~ 2020년 7월 9일

파일:더불어민주당 흰색 로고타입.svg

[132][133]
권한대행
파일:B37CEA46-6375-4890-A888-7154035AD14E.gif
서정협 (徐正協)
2020년 7월 10일 ~ 2021년 4월 7일
행정1부시장
울산
[134][135]
38대
파일:38대오세훈.jpg
오세훈 (吳世勳)
2021년 4월 8일 ~ 2022년 6월 30일

파일:국민의힘 흰색 로고타입.svg

서울 성동
[136][137]
39대
2022년 7월 1일 ~ 현재
[138]

7. 생존 중인 전직 민선 서울특별시장[편집]





8. 역대 선거 결과[편집]


파일:서울특별시 휘장_White.svg 역대 민선 서울특별시장
1960
1995
1998
2002
2006
민주당

민주당


한나라당

한나라당

김상돈
조순
고건
이명박
오세훈
2010
2011
2014
2018
2021
한나라당

무소속



국민의힘

오세훈
박원순
오세훈
2022




국민의힘





오세훈





[ 펼치기 · 접기 ]
구분
주요 후보 득표율
1960년
1위: 김상돈 60.25%
2위: 장기영 32.35%
1995년
1위: 조순 42.35%
2위: 박찬종 33.51%
3위: 정원식 20.67%
1998년
1위: 고건 53.46%
2위: 최병렬 43.99%
2002년
1위: 이명박 52.28%
2위: 김민석 43.02%
2006년
1위: 오세훈 61.05%
2위: 강금실 27.31%
2010년
1위: 오세훈 47.43%
2위: 한명숙 46.83%
2011년
1위: 박원순 53.40%
2위: 나경원 46.21%
2014년
1위: 박원순 56.12%
2위: 정몽준 43.02%
2018년
1위: 박원순 52.79%
2위: 김문수 23.34%
3위: 안철수 19.55%
2021년
1위: 오세훈 57.50%
2위: 박영선 39.18%
2022년
1위: 오세훈 59.05%
2위: 송영길 39.23%



8.1. 1960년[편집]


{+1 [[파일:구 서울특별시 휘장(백색).svg}}} 서울특별시장
기호
이름
득표수
순위
정당
득표율
비고
1
계성범(桂性範)
388
6위

[[무소속|
무소속
]]

0.85%
낙선
2
안학순(安鶴淳)
266
10위

0.36%
낙선
3
최주열(崔柱烈)
301
9위

0.58%
낙선
4
정인해(鄭寅海)
180
14위

0.09%
낙선
5
송태희(宋泰熙)
124
15위

0.05%
낙선
6
이석점(李錫漸)
374
7위

0.73%
낙선
7
오인환(吳仁煥)
341
8위

0.64%
낙선
8
문용채(文容彩)
456
5위

1.01%
낙선
9
김상돈(金相敦)
217,475
1위

60.25%
당선
10
백준관(白陖寬)
181
12위

0.16%
낙선
11
김수룡(金水龍)
사퇴

12
이희운(李熙雲)
228
11위

0.20%
낙선
13
임병기(林炳亓)
등록 무효

14
김헌(金憲)
2,088
4위

2.68%
낙선
15
장기영(張基榮)
117,145
2위

32.35%
낙선
16
김득조(金得照)
150
13위

0.12%
낙선
17
정준(鄭濬)
22,794
3위

6.30%
낙선

선거인 수
1,226,079
투표율
32.73%
투표 수
401,338
무효표 수
-

8.2. 1995년[편집]


{+1 [[파일:구 서울특별시 휘장(백색).svg}}} 서울특별시장
기호
이름
득표수
순위
정당
득표율
비고
1
정원식(鄭元植)
1,001,446
3위

20.67%
낙선
2
조순(趙淳)
2,051,441
1위

42.35%
당선
3
박홍래(朴弘來)
25,054
5위

0.51%
낙선
4
고순복(高順福)
10,488
7위

0.21%
낙선
5
김명호(金明豪)
9,992
8위

0.20%
낙선
6
김옥선(金鈺仙)
17,728
6위

0.36%
낙선
7
박찬종(朴燦鍾)
1,623,356
2위

33.51%
낙선
8
정기용(鄭基用)
6,156
9위

0.12%
낙선
9
황산성(黃山城)
97,709
4위

2.01%
낙선

선거인 수
7,438,025
투표율
66.18%
투표 수
4,922,210
무효표 수
78,840

[서울특별시장 구별 개표 결과 보기]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서울특별시장 구별 개표 결과
정당



격차
투표율
후보
정원식
조순
박찬종
(1위/2위)
(선거인/표수)
득표수
(득표율)

1,001,446
(20.67%)

2,051,441
(42.35%)

1,623,356
(33.51%)

+428,085
(△8.84)

66.18%
종로구
21.87%
45.09%
29.47%
△15.62
66.45%
중구
23.47%
44.11%
29.05%
△15.06
67.16%
용산구
23.01%
41.18%
32.32%
△8.86
65.80%
성동구
20.36%
44.01%
31.97%
△12.04
66.04%
광진구
19.23%
43.04%
34.41%
△8.63
66.05%
동대문구
20.68%
41.84%
33.90%
△7.94
66.30%
중랑구
19.41%
40.56%
36.11%
△4.45
65.33%
성북구
20.64%
43.60%
31.97%
△11.63
66.06%
강북구
18.71%
45.20%
31.35%
△13.85
64.39%
도봉구
19.11%
42.16%
35.34%
△6.82
66.21%
노원구
19.62%
41.12%
35.59%
△5.53
67.51%
은평구
19.69%
43.27%
33.48%
△9.79
65.49%
서대문구
20.89%
44.64%
30.88%
△13.76
66.73%
마포구
21.11%
42.83%
32.60%
△10.23
66.23%
양천구
20.37%
41.80%
34.52%
△7.28
67.35%
강서구
22.11%
39.64%
34.69%
△4.95
66.57%
구로구
18.78%
41.60%
35.48%
△6.12
65.98%
영등포구
20.60%
41.89%
34.31%
△7.58
65.96%
동작구
21.31%
43.72%
32.08%
△11.64
66.23%
관악구
18.15%
48.30%
30.32%
17.98
66.79%
서초구
23.96%
38.46%
35.35%
△3.11
66.26%
강남구
25.27%
38.65%
33.29%
△5.36
65.70%
송파구
21.27%
41.84%
33.83%
△8.01
66.09%
강동구
20.33%
39.79%
36.47%
△3.32
66.44%


8.3. 1998년[편집]


{+1 [[파일:서울특별시 휘장_White.svg}}} 서울특별시장
기호
이름
득표수
순위
정당
득표율
비고
1
최병렬(崔秉烈)
1,512,854
2위

43.99%
낙선
2
고건(高建)
1,838,348
1위

53.46%
당선
4
이병호(李丙昊)
87,495
3위

2.54%
낙선

선거인 수
7,377,751
투표율
47.13%
투표 수
3,477,105
무효표 수
38,408

여담으로 최병렬 후보[139]와 고건 후보는 모두 관선 서울특별시장 출신으로, 이로 인해 전직 서울특별시장간의 대결로 주목을 받았다. 김대중 정부의 허니문 효과와 IMF 사태로 인한 한나라당 심판 열기에 힘입어 고건 후보가 서초구와 강남구를 제외한 모든 지역에서 승리하며 당선되었다.

8.4. 2002년[편집]


{+1 [[파일:서울특별시 휘장_White.svg}}} 서울특별시장
기호
이름
득표수
순위
정당
득표율
비고
1
이명박(李明博)
1,819,057
1위

52.28%
당선
2
김민석(金民錫)
1,496,754
2위

43.02%
낙선
3
임삼진(林三鎭)
28,034
5위

0.80%
낙선
4
이문옥(李文玉)
87,965
3위

2.52%
낙선
5
원용수(元容秀)
12,982
6위

0.37%
낙선
6
이경희(李京熹)
34,313
4위

0.98%
낙선

선거인 수
7,665,343
투표율
45.80%
투표 수
3,510,898
무효표 수
31,793

대한민국 제17대 대통령인 이명박이 당선된 선거다.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의 열기로 인한 투표율 저하로 인해 관악구를 제외한 나머지 지역에서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가 이겼다.

8.5. 2006년[편집]


{+1 [[파일:서울특별시 휘장_White.svg}}} 서울특별시장
기호
이름
득표수
순위
정당
득표율
비고
1
강금실(康錦實)
1,077,890
2위

27.31%
낙선
2
오세훈(吳世勳)
2,409,760
1위

61.05%
당선
3
박주선(朴柱宣)
304,565
3위

7.71%
낙선
4
김종철(金鍾哲)
117,421
4위

2.97%
낙선
5
임웅균(任雄均)
14,111
5위

0.35%
낙선
6
이귀선(李貴仙)
4,790
7위

0.12%
낙선
7
이태희(李泰熙)
4,481
8위

0.11%
낙선
8
백승원(白承元)
13,808
6위

0.34%
낙선

선거인 수
7,983,648
투표율
49.82%
투표 수
3,977,842
무효표 수
31,016

[서울특별시장 구별 개표 결과 보기]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서울특별시장 구별 개표 결과
정당


투표 수
(투표율)

후보
강금실
오세훈
전체
1,077,890
(27.31%)

2,409,760
(61.05%)

3,977,842
(49.82%)
◁ 33.74%p
종로구
19,369
(27.48%)
41,992
(59.59%)

71,240
(52.9%)
◁ 32.11%p
중구
15,382
(28.03%)
32,708
(59.62%)

55,369
(51.7%)
◁ 31.59%p
용산구
26,087
(27.45%)
58,427
(61.48%)

95,809
(51.1%)
◁ 34.03%p
성동구
35,842
(27.42%)
77,631
(59.40%)

131,927
(49.4%)
◁ 31.98%p
광진구
39,716
(28.36%)
83,209
(59.42%)

141,079
(48.1%)
◁ 31.06%p

동대문구

40,952
(26.92%)
92,583
(60.87%)

153,571
(50.3%)
◁ 33.95%p
중랑구
41,950
(27.17%)
94,016
(60.90%)

155,626
(46.8%)
◁ 33.73%p
성북구
52,218
(28.66%)
107,844
(59.21%)

183,552
(49.7%)
◁ 30.55%p
강북구
37,446
(28.20%)
75,788
(57.07%)

133,339
(47.8%)
◁ 28.87%p
도봉구
41,460
(28.27%)
88,101
(60.08%)

147,638
(50.6%)
◁ 31.81%p
노원구
70,050
(29.40%)
140,438
(58.95%)

239,926
(51.5%)
◁ 29.55%p
은평구
50,411
(29.30%)
100,572
(58.45%)

173,479
(47.2%)
◁ 29.15%p

서대문구

40,422
(29.55%)
80,851
(59.11%)

137,876
(49.7%)
◁ 29.56%p
마포구
46,057
(30.07%)
88,818
(57.98%)

154,442
(49.4%)
◁ 27.91%p
양천구
52,456
(27.34%)
117,983
(61.49%)

193,234
(51.7%)
◁ 34.15%p
강서구
59,119
(28.18%)
126,548
(60.32%)

211,567
(49.2%)
◁ 32.14%p
구로구
47,384
(29.09%)
96,508
(59.25%)

164,398
(50.1%)
◁ 30.16%p
금천구
28,326
(29.24%)
54,833
(56.62%)

97,796
(48.9%)
◁ 27.38%p

영등포구

45,339
(27.91%)
98,766
(60.81%)

163,818
(50.4%)
◁ 32.90%p
동작구
48,416
(29.33%)
95,686
(57.97%)

166,416
(50.7%)
◁ 28.64%p
관악구
66,667
(31.85%)

110,710
(52.90%)

210,854
(48.8%)
◁ 21.05%p
서초구
33,010
(20.18%)
117,293
(71.70%)

164,426
(51.9%)
◁ 51.52%p
강남구
39,314
(18.22%)
160,646
(74.45%)

216,768
(50.0%)
◁ 56.23%p
송파구
57,435
(24.35%)
155,062
(65.76%)

237,313
(50.8%)
◁ 41.41%p
강동구
43,062
(24.68%)
112,747
(64.64%)

175,779
(49.3%)
◁ 39.96%p


당시 열린우리당은 참여정부의 낮은 지지율 + 잇따른 재보궐선거 패배로 조직력이 아작난 상황이였고, 여기도 마찬가지였다. 실제로 오세훈 후보가 25개구 522개 동 전역에서 강금실 후보를 눌렀다. 이로써 3당 합당 이후 치른 지방선거에서 서울특별시에서 60%p 넘게 득표한 유일한 후보가 되었다.


8.6. 2010년[편집]


{+1 [[파일:서울특별시 휘장_White.svg}}} 서울특별시장
기호
이름
득표수
순위
정당
득표율
비고
1
오세훈(吳世勳)
2,086,127
1위

47.43%
당선
2
한명숙(韓明淑)
2,059,715
2위

46.83%
낙선
3
지상욱(池尙昱)
90,032
4위

2.04%
낙선
7
노회찬(魯會燦)
143,459
3위

3.26%
낙선
8
석종현(石琮顯)
18,339
5위

0.41%
낙선

선거인 수
8,211,461
투표율
53.90%
투표 수
4,426,182
무효표 수
28,510

[서울특별시장 구별 개표 결과 보기]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서울특별시장 구별 개표 결과
정당


투표 수
(투표율)

후보
오세훈
한명숙
[[서울특별시|

전체
]]
2,086,127
(47.43%)

2,059,715
(46.83%)

4,426,182
(53.90%)
표차 +26,412
0.60%p ▷
[[종로구|

종로구
]]
35,476
(46.04%)
36,910
(47.90%)

77,812
(56.01%)
표차 -1,434
◁ 1.86%p
[[중구(서울특별시)|

중구
]]
28,648
(47.55%)

28,410
(47.16%)
60,763[1]
(55.74%)
표차 +238
0.39%p ▷
[[용산구|

용산구
]]
53,285
(51.15%)

44,706
(42.91%)
105,005
(53.02%)
표차 +8,579
8.24%p ▷
[[성동구|

성동구
]]
63,448
(47.22%)
63,966
(47.60%)

135,277
(54.04%)
표차 -518
◁ 0.38%p
[[광진구|

광진구
]]
72,749
(46.08%)
76,420
(48.41%)

158,963
(52.70%)
표차 -3,671
◁ 2.33%p
[[동대문구|

동대문구
]]
74,536
(46.77%)
76,032
(47.71%)

160,497
(54.00%)
표차 -1,496
◁ 0.94%p
[[중랑구|

중랑구
]]
80,577
(47.13%)
81,517
(47.68%)

172,251
(50.10%)[2]
표차 -940
◁ 0.55%p
[[성북구|

성북구
]]
91,907
(45.19%)
99,316
(48.83%)

204,667
(53.36%)
표차 -7,409
◁ 3.64%p
[[강북구|

강북구
]]
63,231
(44.84%)
70,115
(49.72%)

142,061
(51.43%)
표차 -6,884
◁ 4.88%p
[[도봉구|

도봉구
]]
74,594
(46.98%)
74,789
(47.10%)

159,958
(54.62%)
표차 -195
◁ 0.12%p
[[노원구|

노원구
]]
119,567
(45.58%)
124,603
(47.50%)

264,044
(56.14%)
표차 -5,036
◁ 1.92%p
[[은평구|

은평구
]]
85,737
(44.77%)
95,666
(49.95%)

192,939
(51.26%)
표차 -9,929
◁ 5.18%p
[[서대문구|

서대문구
]]
64,769
(44.42%)
72,788
(49.92%)

146,827
(55.00%)
표차 -8,019
◁ 5.50%p
[[마포구|

마포구
]]
75,267
(43.79%)
85,882
(49.97%)

172,905
(55.13%)
표차 -10,615
◁ 6.18%p
[[양천구|

양천구
]]
101,350
(47.47%)

100,272
(46.96%)
214,849
(56.19%)
표차 +1,078
0.51%p ▷
[[강서구(서울특별시)|

강서구
]]
111,082
(46.05%)
116,689
(48.37%)

242,758
(53.34%)
표차 -5,607
◁ 2.32%p
[[구로구|

구로구
]]
83,846
(44.85%)
92,666
(49.57%)

187,965
(55.35%)
표차 -8,820
◁ 4.72%p
[[금천구|

금천구
]]
44,702
(43.45%)
52,451
(50.99%)

103,679
(52.60%)
표차 -7,749
◁ 7.54%p
[[영등포구|

영등포구
]]
84,999
(47.45%)

83,982
(46.88%)
180,352
(54.75%)
표차 +1,017
0.57%p ▷
[[동작구|

동작구
]]
81,914
(44.72%)
90,859
(49.60%)

184,233
(56.58%)[3]
표차 -8,945
◁ 4.88%p
[[관악구|

관악구
]]
93,184
(39.34%)
128,444
(54.23%)

238,367
(53.92%)
표차 -35,260[4]
14.89%p[5]
[[서초구|

서초구
]]
109,446
(59.07%)

65,626
(35.41%)
185,981
(54.44%)
표차 +43,820
23.66%p ▷
[[강남구|

강남구
]]
138,390
(59.94%)

79,094
(34.26%)
231,886
(51.21%)
표차 +59,296[6]
25.68%p[7]
[[송파구|

송파구
]]
149,228
(51.28%)

125,414
(43.09%)
292,420[8]
(54.18%)
표차 +23,814
8.19%p ▷
[[강동구|

강동구
]]
104,195
(49.99%)

93,098
(44.66%)
209,723
(54.08%)
표차 +11,097
5.33%p ▷


선거 이전 여론조사들에서는 오세훈 후보가 넉넉히 우세를 점하고 있었지만 뚜껑을 열어보니 출구조사에서 오세훈 47.4% VS 한명숙 47.2%로 두 후보 간 예상 득표율 격차가 0.2%밖에 나지 않는 반전이 일어났다. 뒤이은 실제 개표 과정에서도 두 후보의 순위만 4번이 뒤바뀌는 광역자치단체장 선거 역대 최고의 접전 승부[140]가 벌어졌다.

개표 초반에는 한명숙 후보가 앞서 나갔고, 한 때 2만표 이상 격차까지 벌어졌기에 자정을 넘긴 시각 한명숙 후보는 자체적으로 승리를 선언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도 잠깐, 개표율이 낮던 강남3구의 개표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며 이곳에서만 12만표 이상의 격차가 벌어졌고, 새벽 4시를 넘겨 오세훈 후보가 역전하였다. 최종적으로 오세훈 후보 0.60%p, 2만 6천여 표의 차이로 진땀승을 거두며 당선되었다.

당시 오세훈 후보는 서울 25개 자치구 중 강남구, 서초구, 송파구, 양천구, 영등포구, 강동구, 중구, 용산구 단 8개 구에서만 이겼다. 하지만 상당수의 민주당 우위 지역에서 5%p 이내 격차로 상당히 선방했고[141], 무엇보다도 강남3구에서 10%p~20%p 정도의 격차로 크게 이기면서 역전승에 기여했다.

한명숙 후보는 서울특별시 17개 자치구에서 승리했지만 한날 한시에 치른 서울특별시 기초자치단체장 선거에서 민주당 구청장 후보들이 크게 승리한 만큼 격차를 벌리지 못하며 상대적으로 부진했고[142], 결정적으로 강남3구의 몰표에 막혀 낙선의 고배를 마셔야 했다.

여담으로 12년 뒤, 비슷하게 제20대 대통령 선거에서도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143]경기도지사 출신인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를 상대로 불과 0.73%p 차이로 꺾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144]

참고로, 1년뒤 직을 걸었던 2011 서울특별시 무상급식 주민투표 결과에 따라 1년만에 중도 사퇴하여 다음해인 2011년 다시 서울시장 선거를 시행하게 된다.

8.7. 2011년[편집]


{+1 [[파일:서울특별시 휘장_White.svg}}} 서울특별시장
기호
이름
득표수
순위
정당
득표율
비고
1
나경원(羅卿瑗)
1,867,880
2위

46.21%
낙선
8
김충립(金忠立)
등록 무효

9
배일도(裵一道)
15,408
3위

0.38%
낙선
10
박원순(朴元淳)
2,158,476
1위

53.40%
당선

선거인 수
8,374,067
투표율
48.56%
투표 수
4,066,557
무효표 수
24,793

[서울특별시장 구별 개표 결과 보기]
2011년 하반기 재보궐선거 서울특별시장 구별 개표 결과
정당


투표율
후보
나경원
박원순
전체
1,867,880
(46.21%)

2,158,476
(53.40%)

48.56%
종로구
31,926
(45.62%)
37,770
(53.97%)

49.5%
중구
26,564
(47.65%)
28,965
(51.96%)

49.9%
용산구
50,847
(51.82%)

46,923
(47.82%)
47.4%
성동구
54,059
(45.32%)
64,766
(54.30%)

48.0%
광진구
63,128
(43.81%)
80,449
(55.83%)

47.4%

동대문구

65,140
(45.24%)
78,221
(54.32%)

47.6%
중랑구
68,501
(44.75%)
83,870
(54.80%)

44.4%
성북구
81,902
(42.74%)
108,976
(56.87%)

48.5%
강북구
54,531
(42.58%)
72,981
(56.98%)

45.2%
도봉구
64,110
(44.87%)
78,179
(54.72%)

48.5%
노원구
104,251
(44.08%)
131,293
(55.51%)

50.3%
은평구
78,252
(42.63%)
104,533
(56.96%)

46.2%

서대문구

55,181
(43.03%)
72,542
(56.57%)

49.0%
마포구
67,297
(42.01%)
92,375
(57.66%)

49.9%
양천구
89,227
(45.97%)
103,780
(53.47%)

50.4%
강서구
95,934
(44.13%)
120,537
(55.45%)

47.4%
구로구
71,850
(43.15%)
94,015
(56.46%)

48.5%
금천구
36,194
(41.12%)
51,418
(58.42%)

44.3%

영등포구

73,833
(46.01%)
86,069
(53.63%)

48.7%
동작구
73,341
(43.60%)
94,283
(56.05%)

50.8%
관악구
78,473
(36.85%)
133,587
(62.74%)

47.9%
서초구
111,014
(60.12%)

73,139
(39.61%)
53.1%
강남구
140,109
(61.33%)

87,657
(38.37%)
49.7%
송파구
140,183
(51.12%)

133,087
(48.53%)
50.3%
강동구
92,033
(47.98%)
99,061
(51.64%)

48.2%


상기한 바와 같이 1년만에 사퇴로 인해 남은 3년 시정을 맡을 시장 선거가 다시 진행되었다.

강남3구용산구를 제외한 나머지 지역에서 박원순이 승리를 거두었다. 세부적으로 보면 박원순 후보는 우세 지역에선 표 차이를 더 벌렸고, 스윙스테이트인 강동구, 중구, 양천구, 영등포구를 빼앗고 용산구에서 3,924표 차, 송파구에서 7,096표로 표차를 1/2 정도로 줄이는 데 성공하였다. 나경원 입장에선 강북에서 선전은 못한 건 물론 스윙스테이트였던 4개 지역을 뺏기고, 송파구, 용산구에서 표차가 반토막이 난 것이 패인이 된 것이다. 무엇보다도 나경원은 2011년 하반기 재보궐선거 중 서울특별시장 선거에 출마하기 위해 의원직을 사퇴했는데, 그녀의 지역구였던 중구에서도 박원순에 밀렸다.

8.8. 2014년[편집]


{+1 [[파일:서울특별시 휘장_White.svg}}} 서울특별시장
기호
이름
득표수
순위
정당
득표율
비고
1
정몽준(鄭夢準)
2,109,869
2위

43.02%
낙선
2
박원순(朴元淳)
2,752,171
1위

56.12%
당선
3
정태흥(鄭泰興)
23,638
3위

0.48%
낙선
4
홍정식(洪貞植)
17,603
4위

0.35%
낙선

선거인 수
8,441,594
투표율
58.63%
투표 수
4,948,897
무효표 수
45,616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 이후 아무래도 여당에게 불리한 상황인데 정몽준의 아들인 정예선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 관련으로 미개 발언을 하는 바람에 더 불리해졌다. 그리고 결국 박원순이 13.10%란 넉넉한 격차로 정몽준을 꺾음으로써 재선에 성공하였다.

특히 강남3구에서 엄청난 선전을 했는데, 강남구와 서초구에선 47%를 득표했고, 송파구에선 아예 52%로 정몽준을 꺾었다.

8.9. 2018년[편집]


{+1 [[파일:서울특별시 휘장_White.svg}}} 서울특별시장
기호
이름
득표수
순위
정당
득표율
비고
1
박원순(朴元淳)
2,619,497
1위

52.79%
당선
2
김문수(金文洙)
1,158,487
2위

23.34%
낙선
3
안철수(安哲秀)
970,374
3위

19.55%
낙선
5
김종민(金鍾珉)
81,664
5위

1.64%
낙선
6
김진숙(金眞淑)
22,134
6위

0.44%
낙선
7
인지연(印志涓)
11,222
8위

0.22%
낙선
8
신지예(申智藝)
82,874
4위

1.67%
낙선
9
우인철(禹仁喆)
11,599
7위

0.23%
낙선
10
최태현(崔泰賢)
4,021
9위

0.08%
낙선

선거인 수
8,380,947
투표율
59.89%
투표 수
5,019,098
무효표 수
57,226

서울특별시의 모든 구에서 더불어민주당 박원순 후보가 승리했다.

어떻게 보면, 역대 선거에서 가장 역사적인 단일화를 이루어냈다는 2011년 하반기 재보궐선거[145] 이후, 7년 만에 다시 만난 셈인데, 김문수안철수는 처음부터 네거티브 공세가 상당히 강했고, 박원순은 역대 최악의 네거티브를 입었다고 할 정도로 네거티브 공세가 심해져 있었다. 하지만 제19대 대통령 선거에서 문재인의 압도적인 승리에 힘 입어서 민선 서울특별시장 최초로 3선에 성공했다. 3선 임기까지 마치게 된다면 조선 시대 한성판윤까지 올라가도 박원순보다 오래 임기를 유지하는 이는 없다.[146]

자유한국당은 막판까지 서울특별시에서 압승할 거라는 행복회로를 돌렸다. 하지만, 박원순의 시정 평가는 중위권에서 아래로 내려간 적은 없는 편이다. 심지어 예전의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보이듯, 자유한국당이 서울특별시장 선거에서 이기려면 강남3구에서 압도적으로 이겨야 하는데, 강남3구에서도 박원순에 대해 괜찮아하는 의견이 적지 않았다.[147] 사실, 이렇게 된 건 오세훈의 실책이 컸다. 강남 워터파크의 문제도 있었고, 오세훈은 강남구에서 국회의원을 하고 강남구민의 전적인 지지를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한번도 물난리 문제를 개선하지 않았다. 그나마 공약을 안 했음 밉지나 않은데 토론에서 물난리를 개선하겠다고 말을 해놨으니 오세훈에 대한 부정 평가가 심할 수 밖에 없다.

여기다 DDP, 고척 스카이돔, 세빛섬오세훈 시정 때 디자인 서울특별시 정책의 일환으로 추진되어 이후 박원순 시정이 출범하면서 수익성이 있는지 감사원에다 의뢰한 결과 모두 엄청난 적자가 예상되었다. 이에 DDP는 무료시설을 없애고 모두 수익 시설로 돌려놓으며 자립시켰고, 고척 스카이돔은 원래 예산보다 더 쓰면서까지 설계를 변경하고[148] 반강제로 넥센 히어로즈를 입성시키고 나서 나름 성공하게 되면서 다른 지역에서도 돔구장을 만들어야 한다는 의견들이 나오고 있다.[149] 세빛섬은 마땅한 사용처를 찾지 못 해 방치되다가 영화 어벤져스 촬영지로 활용됐음에도 불구하고 무료로 입장하는 관광객이 늘었을 뿐이라 자립은 불투명한 상황이다. 이 외에도, 오세훈은 공군과 롯데월드타워에 관해서 군사적인 문제로 수차례 대립한 전례가 있었다.[150]

여튼 박원순은 (서울로7017 정도의 예산 낭비를 제외하면) 심야버스를 도입해 총알택시에 지친 직장인들을 상대로 대성공을 거뒀고, 실사판 타요 버스를 아이코닉스와 콜라보해서 스티킹을 해 운행하는 프로젝트도 성공하게 된다. 그 외에도 라바 지하철도 생겼다. 당연히, 아이들의 인기가 폭발했으며 타보겠다고 지방에서 올라오는 사람도 있는 모양. 결국 이 타요버스는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박원순은 이번의 당선으로 수많은 최초 기록을 얻었다. 최초의 3선 서울특별시장인 것도 있지만, 민선 최초로 비 정치인 출신이 무소속[151]으로 광역자치단체장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된 이후, 나온 선거까지 포함 모두 과반수의 득표율로 전승한 전무후무한 사례. 그 전설의 3+2+3=8전 전승 신화를 이루어 낸 이시종도 3선 충주시장을 하고 지역구 국회의원도 두 번이나 한 끝에 충청북도지사 3선을 한 것과 50%를 넘은 적이 단 두 번 있었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최초의 민선 서울특별시장이였던 김상돈도 국회의원 경력이 있었고,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 당선인이었던 조순을 빼면[152], 고건, 이명박, 오세훈 또한 국회의원 경력이 있었다.

김문수의 경우 큰 득표율 차로 2위로 낙선하긴 했지만 두 가지 면에서 선전했다고 볼 수 있다. 첫째, 관악구노원구를 제외한[153] 서울특별시 23개 구에서 20%를 넘기면서 안철수 후보를 누르고 2위를 차지했다는 점이다. 제19대 대통령 선거에서 홍준표강남구, 서초구, 용산구, 종로구를 제외한 21개 구에서 안철수에 밀리면서 3위를 기록해 자유한국당이 수도권에서 3위로 밀리는게 아니냐는 우려가 나왔는데 김문수는 강남3구 외 지역에서도 서울특별시 전반적으로 2위를 기록하며 이와 같은 우려를 불식시켰다.[154] 다음으로 부촌 지역의 보수표를 재결집시키는데 성공했다. 서울특별시에서 가장 보수세가 강한 부촌인 압구정동의 경우 제19대 대통령 선거 홍준표 41.93%에서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 김문수 52.11%로 10.18%나 상승했으며 강남구의 대치2동과 개포2동, 서초구의 반포본동과 반포3동, 용산구의 이촌1동의 결과를 뒤집으면서 중구의 을지로동과 회현동을 빼앗겼음에도 자유한국당의 1위 동을 13개동에서 16개 동으로 늘렸다. 이와 같은 부촌 지역의 자유한국당 재결집은 김문수 후보의 적극적 재개발 공약의 영향이 컸다는 분석이다.

가장 피해가 큰 대상은 바른미래당 안철수이다. 지난 대통령 선거에서 안철수는 비록 콘크리트 지지층을 자기 편으로 삼은 홍준표에게 밀려 종합 3위를 차지했으나, 적어도 서울에서는 2위였다. 그런데 이번 지방선거에서도 홍준표보다 지지층이 월등히 좁은 김문수에게 밀려버렸다. 호사가들은 안철수는 어차피 질 선거, 적어도 서울특별시에서 의미 있는 스코어를 보이며 2등을 차지해 최소한 야권의 대권 주자로 자리매김하려고 서울특별시장 선거에 나섰다고 추측했다. 만약 그렇다면 안철수는 결과적으로 최악의 선택을 하고 만 셈이다. 안철수의 서울특별시 득표율은 1년 전 대통령 선거와는 다른 양상을 띄었는데 대통령 선거에서는 지역구인 노원구 및 인근의 강북구, 도봉구 등의 지역에서 상대적으로 높은 득표율을 올렸으나 이번 지방선거의 경우 강남3구 및 용산구 등 부촌 지역에서 상대적으로 높은 득표율을 올렸다. 특히 근소한 득표율 차로 강남구가 아닌 서초구에서 서울특별시 득표율 1위를 기록했다는 점은 대통령 선거에서의 유승민의 경우와 거의 비슷한데 안철수 개인의 성향도 중도 보수 성향이 강해지기도 했고 바른정당과의 합당이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한편 노원구의 경우 대통령 선거 출마로 인한 사퇴 논란이 있었지만 그래도 전 지역구라고 주민들이 나름 밀어준건지 안철수의 득표율이 서울특별시 내에서 서초구, 강남구에 이어 3번째로 높았다.

어찌 됐든 더불어민주당은 서울특별시에서 시의회와 기초자치단체장을 휩쓰는데 성공했고 그 결과 박원순은 가히 서울특별시의 타노스라고 불리기 부족함이 없는 힘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8.10. 2021년[편집]


파일:서울특별시 휘장_White.svg 서울특별시장
기호
이름
득표수
순위
정당
득표율
비고
1
박영선(朴映宣)
1,907,336
2위

39.18%
낙선
2
오세훈(吳世勳)
2,798,788
1위

57.50%
당선
4
안철수(安哲秀)
사퇴[155]

6
신지혜(申智惠)
23,628
5위

0.48%
낙선
7
허경영(許京寧)
52,107
3위

1.07%
낙선
8
오태양(吳太陽)
6,483
9위

0.13%
낙선
9
이수봉(李守峯)
11,196
8위

0.23%
낙선
10
배영규(裵永奎)
634
12위

0.01%
낙선
11
김진아(金珍芽)
33,421
4위

0.68%
낙선
12
송명숙(宋名淑)
12,272
7위

0.25%
낙선
13
정동희(鄭東熙)
1,874
10위

0.03%
낙선
14
이도엽(李度燁)
1,664
11위

0.03%
낙선
15
신지예(申智藝)
18,039
6위

0.37%
낙선

선거인 수
8,425,869
투표율
58.19%
투표 수
4,902,630
무효표 수
35,188


파일:결과표.png

파일:재보선 동별 개표 결과.png

[서울특별시장 구별 개표 결과 보기]
2021년 재보궐선거 서울특별시장 구별 개표 결과
정당


투표 수
(투표율)

후보
박영선
오세훈
전체
1,907,336
(39.18%)

2,798,788
(57.50%)

4,902,630
(58.19%)
◁ 18.32%p
종로구
32,309
(41.26%)
43,255
(55.24%)

78,852
(59.6%)
◁ 13.98%p
중구
25,958
(39.98%)
36,881
(56.81%)

65,391
(57.4%)
◁ 16.83%p
용산구
39,280
(33.36%)
74,689
(63.44%)

118,460
(57.9%)
◁ 30.08%p
성동구
55,941
(37.17%)
89,924
(59.76%)

151,520
(58.7%)
◁ 22.59%p
광진구
69,179
(39.77%)
98,620
(56.69%)

175,342
(57.2%)
◁ 16.92%p

동대문구

69,406
(40.46%)
96,340
(56.16%)

172,922
(57.3%)
◁ 15.70%p
중랑구
81,450
(43.45%)
99,555
(53.10%)

188,880
(53.9%)
◁ 9.65%p
성북구
94,055
(42.79%)
117,596
(53.50%)

221,414
(58.5%)
◁ 10.71%p
강북구
66,451
(45.17%)

75,327
(51.21%)

148,390
(54.4%)
◁ 6.04%p
도봉구
68,848
(42.37%)
88,274
(54.33%)

163,628
(57.5%)
◁ 11.96%p
노원구
111,652
(42.02%)
145,073
(54.60%)

267,498
(60.0%)
◁ 12.58%p
은평구
104,281
(44.85%)
119,068
(51.21%)

234,238
(56.0%)
◁ 6.36%p

서대문구

67,277
(42.02%)
86,375
(53.95%)

161,388
(59.1%)
◁ 11.93%p
마포구
77,948
(40.66%)
105,676
(55.12%)

193,234
(59.7%)
◁ 14.46%p
양천구
91,182
(39.63%)
132,189
(57.46%)

231,478
(60.5%)
◁ 17.83%p
강서구
120.310
(42.56%)
152,517
(53.95%)

284,823
(56.4%)
◁ 11.39%p
구로구
89,385
(43.73%)
108,763
(53.21%)

205,837
(57.7%)
◁ 9.48%p
금천구
48,743
(44.82%)
56,238
(51.71%)

109,584
(52.2%)
◁ 7.69%p

영등포구

75,376
(38.33%)
114,765
(58.36%)

198,145
(58.3%)
◁ 20.03%p
동작구
81,367
(40.06%)
114,862
(56.55%)

204,664
(59.3%)
◁ 16.49%p
관악구
106,896
(44.44%)
122,604
(50.97%)

242,935
(53.9%)
◁ 6.53%p
서초구
60,029
(26.74%)
159,433
(71.02%)

225,574
(64.0%)
◁ 44.28%p
강남구
66,907
(24.32%)
202,320
(73.54%)

276,485
(61.1%)
◁ 49.22%p
송파구
114,468
(33.28%)
219,812
(63.91%)

346,139
(61.0%)
◁ 30.63%p
강동구
88,638
(37.83%)
138,632
(59.17%)

235,809
(59.3%)
◁ 21.34%p


전 자치구에서 이겼으며, 세부적으로 보면 5개 동을 제외한 나머지 동에서 전부 오세훈 후보가 이겼다. 그리고 이 선거로 인해 오세훈은 최다 득표수로 당선된 서울특별시장, 역대 가장 높은 득표율[*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61.05%의 득표율로 당선되었다.]로 당선된 서울특별시장이란 타이틀을 모두 갖게 되었다.

사전 투표에서도 오세훈 후보가 약 10만 표차로 승리하였다. 세부적으로 자치구별 사전투표 결과를 보면 25개 구 중 11개 구[156]에서 박영선 후보가 승리했다. # 그리고 국민의힘 오세훈 후보는 전체 425개 동 중에서 420곳에서 이겼고, 더불어민주당 박영선 후보는 5곳에서 이겼다.

8.11. 2022년[편집]


{+1 [[파일:서울특별시 휘장_White.svg}}} 서울특별시장
기호
이름
득표수
순위
정당
득표율
비고
1
송영길(宋永吉)
1,733,183
2위

39.23%
낙선
2
오세훈(吳世勳)
2,608,277
1위

59.05%
당선
3
권수정(權秀靜)
53,840
3위

1.21%
낙선
4
신지혜(申智惠)
12,619
4위

0.28%
낙선
5
김광종(金光宗)
9,000
5위

0.20%
낙선

선거인 수
8,378,339
투표율
53.17%
투표 수
4,455,161
무효표 수
38,242

[서울특별시장 구별 개표 결과 보기]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서울특별시장 구별 개표 결과
정당


투표 수
(투표율)

후보
송영길
오세훈
[[서울특별시|

전체
]]
1,733,183
(39.23%)

2,608,277
(59.05%)

4,455,161[1]
(53.17%)
표차 875,094
◁ 19.82%p
[[종로구|

종로구
]]
28,327
(40.45%)
40,145
(57.33%)

70,657[2]
(54.4%)
표차 11,818
◁ 16.88%p
[[중구(서울특별시)|

중구
]]
23,811
(39.92%)
34,866
(58.45%)

60,323[3][4]
(53.8%)
표차 11,055
◁ 18.53%p
[[용산구|

용산구
]]
34,614
(33.26%)
67,579
(64.93%)

104,787[5]
(52.6%)
표차 32,965
◁ 31.67%p
[[성동구|

성동구
]]
51,996
(37.55%)
84,320
(60.90%)

139,761[6]
(55.5%)
표차 32,324
◁ 22.45%p
[[광진구|

광진구
]]
62,217
(40.45%)
90,734
(58.31%)

157,005[7]
(51.4%)
표차 28,517
◁ 17.86%p
[[동대문구|

동대문구
]]
63,157
(40.63%)
89,470
(57.55%)

156,964[8]
(52.0%)
표차 26,313
◁ 16.92%p
[[중랑구|

중랑구
]]
76,660
(43.61%)
96,447
(54.86%)

177,701[9]
(51.0%)
표차 19,787
◁ 11.25%p
[[성북구|

성북구
]]
85,825
(42.80%)
110,962
(55.34%)

202,235[10]
(53.3%)
표차 25,137
◁ 12.54%p
[[강북구|

강북구
]]
58,962
(44.69%)
70,747
(53.62%)

133,390[11]
(49.7%)
표차 11,785
◁ 8.93%p
[[도봉구|

도봉구
]]
61,946
(42.09%)
83,072
(56.44%)

148,579[12]
(52.9%)
표차 21,126
◁ 14.35%p
[[노원구|

노원구
]]
102,771
(42.35%)
135,812
(55.96%)

245,152[13]
(55.5%)
표차 33,041
◁ 13.61%p
[[은평구|

은평구
]]
95,155
(44.50%)
114,391
(53.49%)

215,968[14]
(51.6%)
표차 19,236
◁ 8.99%p
[[서대문구|

서대문구
]]
61,182
(41.99%)
81,312
(55.80%)

146,970[15]
(54.1%)
표차 20,130
◁ 13.81%p
[[마포구|

마포구
]]
70,936
(40.83%)
98,271
(56.57%)

175,023[16]
(53.9%)
표차 27,335
◁ 15.74%p
[[양천구|

양천구
]]
82,777
(39.73%)
122,449
(58.77%)

209,694[17]
(55.4%)
표차 39,672
◁ 19.04%p
[[강서구(서울특별시)|

강서구
]]
108,938
(42.10%)
145,128
(56.09%)

260,947[18]
(51.7%)
표차 36,190
◁ 13.99%p
[[구로구|

구로구
]]
78,250
(42.02%)
104,643
(56.20%)

188,094[19]
(53.2%)
표차 26,393
◁ 14.18%p
[[금천구|

금천구
]]
46,314
(44.24%)
56,374
(53.85%)

105,833[20]
(49.7%)[21]
표차 10,060[22]
◁ 9.61%p
[[영등포구|

영등포구
]]
68,663
(38.22%)
107,910
(60.06%)

181,102[23]
(53.3%)
표차 39,247
◁ 21.84%p
[[동작구|

동작구
]]
74,678
(40.13%)
108,122
(58.11%)

187,383[24]
(54.4%)
표차 33,444
◁ 17.98%p
[[관악구|

관악구
]]
100,445
(44.76%)

119,009
(53.03%)

226,801[25]
(50.4%)
표차 18,564
8.27%p[26]
[[서초구|

서초구
]]
50,545
(26.47%)
138,050
(72.31%)

191,862[27]
(56.0%)[28]
표차 87,505
◁ 45.84%p
[[강남구|

강남구
]]
58,734
(24.45%)
178,621
(74.38%)

241,549[29]
(53.6%)
표차 119,887[30]
49.93%p[31]
[[송파구|

송파구
]]
105,890
(34.04%)
201,217
(64.69%)

313,297[32][33]
(55.0%)
표차 95,327
◁ 30.65%p
[[강동구|

강동구
]]
80,390
(37.85%)
128,626
(60.56%)

214,084[34]
(53.9%)
표차 48,236
◁ 22.71%p


오세훈 시장이 역대 2번째[157]서울 25개 자치구 424개 동에서 모두 승리하는 등 송영길 후보를 압도하며 압승했다. # 59.05%의 득표율을 얻어 송영길 후보를 19.82%p 차이로 이겼는데, 이 격차는 2021년 재보궐선거 당시 박영선 후보와의 18.32%p 격차보다 더 벌어진 결과다. 심지어 당시는 박원순 성폭력 사건, 한국토지주택공사 직원 부동산 투기 사건,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방역 실패란 큰 악재 3개가 있어서 더불어민주당에게 매우 불리한 선거였고, 그 때도 5개 행정동[158]에선 근소하게나마 이긴 걸 감안하면 송영길 후보 입장에선 매우 굴욕적인 결과를 만든 거나 마찬가지가 되었다 특히 송영길 후보가 기록한 득표율 39.23%는 이번 선거에서 非영남 지역 더불어민주당 광역자치단체장 후보 최저 득표율이다.[159]

이로써 오세훈은 역대 민선 광역자치단체장 중 최초로 4선을 한 광역자치단체장이 되었다.

9. 역대 정당별 전적[편집]



민주당계 정당
보수 정당
제3후보[160]
1회
조순
정원식
박찬종[161]



당선 42.35%
낙선 20.67%
낙선 33.51%
2회
고건
최병렬
-


당선 53.46%
낙선 43.99%
3회
김민석
이명박
-


낙선 43.02%
당선 52.28%
4회
강금실
오세훈
박주선[162]



낙선 27.31%
당선 61.05%
낙선 7.71%
5회
한명숙
오세훈
노회찬[163]



낙선 46.83%
당선 47.43%
낙선 3.26%
재보선
-
나경원
박원순[164]


낙선 46.21%
당선 53.40%
6회
박원순
정몽준
-


당선 56.12%
낙선 43.02%
7회
박원순
김문수
안철수[165]



당선 52.79%
낙선 23.34%
낙선 19.55%
재보선
박영선
오세훈
-


낙선 39.18%
당선 57.50%
8회
송영길
오세훈
-


낙선 39.23%
당선 59.05%

10. 역대 후보별 순위[편집]


  • 사퇴, 사망, 등록 무효 후보 제외.


11. 역대 후보 득표율 순위[편집]


  • 3% 이하 득표한 후보는 제외
  • 간선제 선거는 제외
  • 당선된 후보는 볼드체
선거

후보

득표율

순위

4회
오세훈
61.05%
1
1960
김상돈
60.25%
2
8회
오세훈
59.05%
3
2021
오세훈
57.50%
4
6회
박원순
56.12%
5
2회
고건
53.46%
6
2011
박원순
53.40%
7
7회
박원순
52.79%
8
3회
이명박
52.28%
9
5회
오세훈
47.43%
10
한명숙
46.83%
11
2011
나경원
46.21%
12
2회
최병렬
43.99%
13
3회
김민석
43.02%
14
6회
정몽준
1회
조순
42.35%
16
8회
송영길
39.23%
17
2021
박영선
39.18%
18
1회
박찬종
33.51%
19
1960
장기영
32.35%
20
4회
강금실
27.31%
21
7회
김문수
23.34%
22
1회
정원식
20.67%
23
7회
안철수
19.55%
24
4회
박주선
7.71%
25
1960
정준
6.30%
26
5회
노회찬
3.26%
27

12. 시정 구호[편집]


시장
슬로건
조순
-
고건
-
이명박
-
오세훈
맑고 매력있는 세계도시 서울
시민이 행복한 서울 세계가 사랑하는 서울
박원순
희망서울 - 함께 만드는 서울, 함께 누리는 서울
함께서울|함께 서울: 시민과 함께, 세계와 함께
내 삶을 바꾸는 서울 10년 혁명
오세훈
다시 뛰는 공정도시 서울
동행·매력 특별시 서울

13. 창작물에서의 서울특별시장[편집]



14. 관련 문서[편집]



15. 둘러보기[편집]







[1] 3선 연임 단체장이 나온 다른 몇몇 광역자치단체장과 달리 서울특별시장은 12년 연속으로 재임한 사람이 없다. 사상 최초로 3선 서울특별시장이 된 박원순2011년 하반기 재보궐선거로 당선되어 초선 임기를 시작했고, 3선 임기 중 성범죄 피소 직전 자살했기 때문이다.[2] 현직 시장인 오세훈이 예시. 민선 4·5기 서울시장직을 수행하다가 민선 5기 출범 1년이 약간 지난 후 2011 서울특별시 무상급식 주민투표에서 투표율이 33.3% 밑으로 뜨자 시장직을 사퇴했었다. 이후 10년 만에 2021년 재보궐선거에서 민선 7기 시장으로 돌아왔고,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재선에 성공하며 헌정 사상 첫 4선 민선 광역자치단체장이라는 유례없는 기록을 세웠다.[3] 상하수도를 비롯한 시군에서 다루는 업무 상당수를 손수 다루는 데다 서울은 특별시인 만큼 그 관할 구역 내에서 더 강한 권한과 위상을 지닌다.[4] 선출직 공무원으로 보면 경기도지사와 함께 대통령 바로 다음의 위상으로 정치권의 별칭이 소통령(小統領)일 정도. 경기도지사가 급증한 인구를 기반으로 갈수록 서울과 인구격차를 벌리면서 위상에 도전하고 있으나, 도지사와 시장의 권한 차이 문제로 인해 서울시장에는 아직 확고한 우위를 점하지는 못하고 있다.[5] 일단 선출직이고, 광역자치단체장들 중 유일하게 장관급 예우를 받는 만큼 위상에 있어 정치적 권력이나 실권 측면은 장관을 아득히 넘어선다고 보는 게 정설이다. 다만 어찌 됐든 지방직이라 국가직 위주의 국가의전서열 목록에는 없다. 본래는 (서울특별시장도) 국가의전서열에 있었지만, 2005년 참여정부 때부터 명단에서 빠졌다. 참고로 장관급 인사 중에서 제일 마지막 순번이었다.[6] 지방채 발행 등은 행정안전부장관이 승인하지만, 이 경우에도 국무총리에게 보고하여야 한다. 나아가 행안부가 서울시청 자치사무에 대해 감사를 하고자 할 때에도 총리의 조정을 반드시 거쳐야 한다. (서울특별시 행정특례에 관한 법률 제4조)[7] 한성판윤 또는 그냥 판윤으로도 불렸으며, 조선 초에는 한성부윤이 정식 명칭이었으므로 한성부윤 혹은 부윤으로도 불렸다.[8] 이로 인해 서울특별시의 행정부시장 2인과 기조실장의 경우 서울특별시장이 국무총리를 경유하여 대통령에게 임명안을 상신하여 대통령 명의의 임명장을 받게 되며, 행정안전부에서 국가직을 파견보내는 타 시도와는 달리 시장이 지명한 서울특별시청 내부 인사가 국가직으로 옷만 갈아입고 부시장 또는 기조실장이 된다. 더불어 서울시 소속 공무원의 상훈 수여도 타 시·도에서는 행정안전부장관을 경유해야 하는 것과는 달리, 서울특별시장은 대통령에게 바로 상신할 수 있다.[9]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1998년 7월 재보궐선거,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제17대 국회의원 선거.[10] 2002년영등포구 을 지역구 의원을 사퇴하고 출마한 서울시장 선거에서 낙선한 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는 낙선, 제20대 국회의원 선거비례대표로 출마했지만 역시나 낙선, 그러다가 2020년 제2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원래 지역구였던 영등포 을에 출마하여 장장 20년 만에 다시 당선되면서 마침내 원내 복귀에 성공했다. 또한 국회 복귀까지 텀이 길었던 과정에서 개인적으로는 비리로 인해 출마도 좌절되거나 이혼도 하는 등 사생활적인 면에서도 고충을 꽤나 겪었다.[11] 이후 2021년 말, 제20대 대통령 선거 국면에서는 당시 윤석열 후보를 지지하였고 본선에서 윤석열이 대통령에 당선되며 취임식준비위원장에 임명되었고, 국무총리 하마평에도 올랐지만, 국무총리로는 한덕수가 임명된다.[12] 이후 바른미래당새로운보수당을 거쳐 현재는 국민의힘 소속이다.[13] 다만 제21대 국회의원 선거 직후 2020년 6월에는 국민의힘 산하의 정책연구소여의도연구원 원장에 임명된다. 수도권 출신의 원외 인사라 당무 집중이 가능한 점이 고려됐다고 한다.[14] 제21대 국회의원 선거 낙선, 2021년 재보궐선거 서울특별시장 후보 경선 패배, 2021년 국민의힘 전당대회 당대표 선거 패배, 2023년 국민의힘 전당대회 당대표 선거 출마 좌절.[15] 박근혜 정부 이전에는 철저한 비박 정치인이었다.[16] 그러나 윤석열 정부 출범 후 경제사회노동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됐으며, 차기 고용노동부 장관 후보로 거론되는 등 기적적으로 정계에 복귀하는 데 성공했다.[17] 2021년 재보궐선거 서울특별시장 후보로 출마했으며 서울특별시장 후보 지지율도 40%대로 다시 급상승하긴 했으나 오세훈과의 범야권 단일화 경선에서 패하여 후보에서 사퇴했다. 그러나 자신이 단일화로 양보해준 오세훈이 당선되어 야권에서 생명의 은인으로 감사를 받고 있고 오세훈도 안철수와의 협치를 약속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윈윈이 되었으며 명예로운 패배가 되어 향후 정치 전망이 다시 밝아졌으며 이후 제20대 대통령 선거 출마 후 지지율이 한때 15%까지 급상승했으나 이후 상승세가 꺾였고 대선 막판에 과정이 매끄럽지는 못했지만 윤석열단일화하고 윤석열이 당선된 후 제20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위원장이 되었고, 2022년 6월 보궐선거 성남시 분당구 갑에 당선되며 3선 국회의원이 되면서 정치적 입지가 넓어질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국민의힘 제3차 전당대회에서 당대표로 당선된 김기현의 득표율의 절반도 못 미치는 득표율로 낙선하면서 대통령 선거 주자급이라 평가받던 정치적 위상에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18] 중소벤처기업부장관까지 사퇴하고 출마한 선거에서 패배하였기에 정치 경력이 끊어졌다. 또한 이 낙선은 박영선 개인에게는 첫 낙선이며, 특히 3선을 한 자신의 정치적 고향과 같은 구로구에서도 오세훈 후보에게 패배했기에 필연적으로 정치적 입지가 좁아질 것이다. 또한 더불어민주당에게도 연승하다 처음으로 패배한 선거라서 더욱더 뼈아프다. 또한 당시 선거를 진두지휘했던 이낙연과 친낙계 또한 엄청난 타격을 입고 나가 떨어졌다. 거기다가 제20대 대통령 선거에서도 이재명 후보가 윤석열 후보를 상대로 패배하여 당 전체가 다운된 상황이라 박영선의 정치적 입지가 되살아나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설상가상으로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국민의힘이 12년 만에 구로구청장을 탈환하는 등 더불어민주당 입장에서는 악재의 연속이다.[19] 본인이 5선 의원 및 인천광역시장을 하면서 정치의 시작과 끝을 함께 해 오고 다져 온 계양구 을 지역구와 정치적 고향인 인천광역시를 버리고 서울특별시로 거처까지 옮기면서 출마를 강행했으나, 대패하여 뱃지만 잃었다. 세간에서는 향후 정치적 행보가 불투명하다는 평가가 우세하다. 더군다나 2022년 1월에 일찌감치 제22대 국회의원 선거 불출마까지 선언한 상태라서 향후 정치인으로서의 길을 계속 갈지 어떻게 될지 모르게 되었다.[20] 이명박 또한 대통령 퇴임 후에 구속 된 만큼 끝이 좋다고 볼 수는 없지만 그래도 서울시장 퇴임 1년 후에 대통령이 되었으므로 서울특별시장으로서의 끝만 보면 매우 성공적이었다. 반면 오세훈(1·2기)은 무상급식 문제로 불명예 사퇴했고 박원순은 자살했으니 서울특별시장으로서의 끝이 최악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박원순이 사망하고 오세훈은 10년 만에 서울특별시장으로 복귀해 제2의 전성기를 달리고 있다.[21] 국무총리 및 장관직은 임명직이니 선출직의 위상을 가질 수 없고, 대한민국 국회의원의 경우 정수만 300석에 이르는 데 비해 서울특별시장은 광역자치단체장 17석 중 1석이다. 차관급인 타 광역자치단체장들에 비해 서울특별시장은 위에 썼던 것처럼 장관급이라 의전상 위상이 더 높다. 또한 광역자치단체장들은 장관직에 비하면 권한이 매우 강한 편에 속한다. 특히 경기도지사는 1360만의 인구가 거주하는 경기도의 대표자라는 점에서 서울시장과 비슷한 위상을 지니며, 21세기 들어서면서부터는 서울시장과 마찬가지로 당선되는 순간부터 잠재적 대권주자 후보군에 들어간다. 손학규, 김문수, 남경필, 이재명, 김동연 등이 그들이다.[22] 사실 이것도 어디까지나 케바케라 수도권 시도지사보다도 전국민에게 인지도가 높은 지방 시도지사는 드물게 있다. 대표적인 예가 홍준표 대구광역시장/전 경상남도지사다. 홍준표 시장은 서울특별시에서 4선 의원을 지냈고 유력 대권 주자로서 전국민에게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기 때문에 수도권 주민들이라 해도 홍준표 정도의 대권 주자급 지방 시도지사는 잘 알고 있다. 다만 여기에는 일종의 함정이 숨어있는데, 홍준표의 경우 그 이력에 <제19대 대통령 선거 자유한국당 후보> (2위), <초대 자유한국당 대표>, <제20대 대통령 선거 국민의힘 경선 2위>등 쟁쟁한 전국구 정치인 경력이 왕창 들어가있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그러니까 전국민이 홍준표의 이름을 알기는 잘 알 것인데, 그 이유는 그가 경상남도지사 및 대구광역시장을 지내서 아는게 아니라 주요정당 대표를 지내고 대통령 선거에서 2위까지 한 적이 있는 정치인이니 당연히 아는 것이 아니냐는 것. 말하자면 '개인적 지명도가 특별히 높은 인물이 광역지자체장을 역임한 사례'와 '해당 지자체장이라는 직위의 지명도'는 분리해서 생각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23] 단, 2011년 서울시장 보선에서 패배한 한나라당은 이듬해 새누리당으로 간판을 바꾸고 19대 총선과 18대 대선에서 연달아 승리하였다.[24] 광역자치단체장은 국회의원 및 국무위원과 겸임이 불가능하므로 시장 선거에 도전하려면 먼저 의원직 혹은 장관직부터 사퇴해야 한다. 즉 국회의원이나 장관에 재직 중이라면 일단 그 경력부터 포기해야 전국동시지방선거에 도전할 수 있다. 반면 국회의원과 국무위원은 서로 겸임이 가능하므로 장관+국회의원 경력을 유지한다면 그 위상은 서울특별시장에 비해 좀 떨어진다 해도 일단 탄탄한 중앙 정계 경력을 지속하고 있는 셈이 된다. 물론 2002년 김민석, 2011년 나경원, 2014년 정몽준, 2022년 송영길처럼 의원직을 포기하거나 2021년의 박영선처럼 장관직을 포기하고 서울특별시장에 출마한 사례도 적지 않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들의 경우 제각기 특수성이 있는데, 일단 2011년 나경원/2021년 박영선의 사례는 개인의 정치적 커리어 이전에 소속 정당의 서울시장(각각 오세훈/박원순)이 자폭하여 열린 재보궐선거라는 특수성이 있다. 즉 개인의 경력을 위한 도전이기도 하지만, 소속 정당의 입장에서 서울특별시장이라는 핵심 요직을 상대 당에게 빼앗기는 상황, 특히 처참한 격차로 패배하는 상황을 피하기 위해 일단 그 상황에서 경쟁력 있는 정치인에게 '당이 위험하니 험지로 나가달라'고 요청한 성격이 강하다. 즉, 해당 정당 차원에서 커리어상 적절한 정치인을 찾아 공천할 만한 여유도 없는 상황이었고, 어설픈 카드를 내밀었다가는 처참한 패배로 정당 자체가 큰 정치적 타격을 입게 될지도 모르는 상황[23]에서 두 정치인이 자신들의 희생 가능성을 감수하고 구원투수로 등판한 격이다. 또한 2014년 정몽준의 사례는 2002년의 전성기를 놓친 이후 장기간의 침체기에 빠져 있던 정몽준이 상황 타개를 위해 던진 승부수라는 성격을 가지고 있음을 고려해야 한다. 2014년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 당시 정몽준이 성공적인 정치 경력을 이어가고 있다고 보기에는 단지 대한민국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을 이어가고 있을 뿐, 여야를 불문하고 한손에 꼽히는 주요 대권 주자 중 하나이자 사실상 무소속이나 다름없는 일인 정당으로 거대 정당에서도 무시할 수 없는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던 전성기의 위세에 비하면 퇴조가 명확했다.[25] 서울특별시장까지 지낸 정치인 입장에서 정치적으로 더 윗급의 자리는 오로지 대통령 하나 뿐이라고 봐도 무방하고, 비슷한 위상의 자리라고 해도 국무총리, 거대 양당 당대표 정도밖에 없다.[26] 물론 2002년의 김민석, 2006년의 오세훈, 2011년의 박원순 같은 예외도 있다.[27] 사면은 됐지만, 비리로 인하여 이미 전직 대통령 예우는 박탈당한 상태라서 사면되었다 해도 경호와 경비를 제외한 기타 모든 예우들은 제공받지 못한다.[28]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 출마한 안철수 역시 그의 소속 정당인 바른미래당이 민주당계 정당과 보수 정당이 합당한 결과물이기 때문에 여기에 포함된다.[29] 이 조항에 따라서 서울특별시청에 들어가는 국가직공무원인 행정부시장 2인과 기획조정실장에 대한 인사권 역시 서울특별시장이 사실상 행사하며, 실제로는 시장의 임명제청에 따라 대통령이 임명한다. 따라서 대통령실 인사검증에서 탈락한 경우, 시장의 임명제청을 대통령이 거부할 수도 있다. 2021년 4월 오세훈 시장이 임명제청한 황보연 기조실장 후보자가 청와대 인사검증에 막혀 정식 임명을 거부당한 것이 그 예시.[30] 현안 관련 공무원을 국무회의에 참석시킬 수 있는 규정을 통해 청계천 복원사업 질의와 관련하여 이명박 전 시장을 국무회의에 출석시킨 적은 있다.[31] 예외로 헌법재판소 사무처장 및 법원행정처장은 각각 헌법재판소장대법원장이 임명하기에 국무회의 의장이 그 인사에 직접 개입할 수 없다.[32] 가끔씩 전임 국무회의 의장이 지명한 배석자의 임기가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그가 자리를 지켰다면 소수의견을 낼 수도 있다.[33] 보통 예산 문제다.[34] 문민정부 출범 초기 7일 만에 경질된 김상철 전 시장에 이어 두번째로 단명한 서울시장으로 남았다.[35] 민영삼 제4대 서울특별시의원은 전라남도지사에 출마했었다.[36] 서울시의원 출신들은 주로 구청장에 많이 도전하며, 구청장 출신들은 국회의원에 주로 도전한다. 구의원-시의원-구청장-국회의원-서울시장 순의 테크를 보통 타며, 더불어민주당 김성환 의원의 커리어가 이 테크를 아주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케이스.[37] 그나마도 본적이 호남이어서 호남 출신으로 분류된 케이스이며, 고건 본인은 서울 출신이다. 윤석열충청남도 출신인 부친의 영향으로, 충청 출신으로 분류되기도 하는 것과 비슷한 케이스.[38] 단, 박원순의 마지막 부시장들이었던 서정협(행정1부시장), 김학진(행정2부시장), 김우영(정무부시장)은 모두 비호남 출신이었다. 서정협은 울산광역시, 김학진은 경상북도 경주시, 김우영은 강원도 강릉시 출신.[39] 오세훈 시장이 그나마 제일 가깝다. 서울에서 나고 자랐지만, 본적이 경기도 용인시인 탓에 '성골' 토박이는 아니다.[40] 인구가 춘천시, 강릉시, 속초시, 동해시를 합한 것과 비슷하고 중구의 5배 이상이라 총선에서도 개표 속도가 가장 늦다.[41] 당시에는 정식으로 '부산직할시'의 이름은 얻지 못하고 '경상남도'만 빠져서 시장 직함명 역시 1981년 부산직할시 정식 개칭 전까지는 그냥 '부산시장'이었다. 다만 비공식적으로는 이때부터 이미 부산직할시라는 명칭이 통용되고 있었어서 지금은 소급 적용되었다.[42] 부산전차도 이때 동시에 폐선되었는데, 부산전차 폐선 계획을 최초로 수립한 사람 역시 김현옥 전 시장이었다. 다만 임기 내에는 실행하지 않고 후임 김대만 시장이 실행한 것.[43] 더 엄청난 것은 2호선 계획에서 영등포역 예정지 공사가 당시 기술로는 불가능해서 신도림으로 위치가 바뀐 것을 빼면 난공사라 할 것이 거의 없었다는 것이다. 구 시장은 포병장교 출신답게 지도 읽는 눈썰미가 상당히 뛰어났다.[44] 비슷한 사례로 서울시장은 아니지만 관선 1번 + 민선 3번으로 4번 도지사를 지냈던 심대평충청남도지사의 사례, 제25대 부산직할시장(관선)과 제31·32대 부산광역시장(민선)을 지낸 안상영부산시장이 있다.[45] 본인부터가 여론조사 결과와는 다르게 매우 아슬아슬하게 이겼고, 서울시의원 선거에서도 한나라당이 크게 패배하며 팔다리가 잘렸다.[46] 이 때 박원순이 서울특별시장 선거에서 깨고 올라간 상대가 다름아닌 나경원이었다.[47] 왜 이렇게 많냐면, 조선 시대의 한성부윤은 임기가 반년도 채 안 됐다.[48] 571p.~606p.[49] 주임관 3~5등으로 보했다. 이는 현재의 2~5급 공무원과 비슷한 지위이며 당시 일본군의 영관급 장교에 맞먹었다. 즉, 일반 시장, 군수와 같거나 위고 도지사보다는 아래인 셈.[50] 1년 183일. 에히메 현 현지사 등을 역임했다. #[51] 7년 247일. 판한성부사부터 서울시장까지 통틀어 최장 기간 역임자였으나 2019년 박원순이 이 기록을 깼다. 마산부윤 등을 역임했다.[52] 1년 244일. 함경북도지사 등을 역임했다. #[53] 1년 203일. 인천부윤 등을 역임했다. #[54] 2년 112일. 평안북도지사, 경상남도지사 등을 역임했다. #[55] 3년 220일. 함경남도지사, 전라남도지사 등을 역임했다. #[56] 325일. 함경남도지사 등을 역임했다. #[57] 1년. 함경남도지사, 경상남도지사 등을 역임했다. #[58] 285일. 함경북도지사 등을 역임했다. #[59] 2년 72일. 총독부 체신국장 등을 역임했다. #[60] 2년 167일. 경상북도지사 등을 역임했다. #[61] 1년 43일. 직속상관인 경기도지사 등을 역임했다. #[62] 1년 129일. 경기도 경찰부장, 내무부장 등을 역임했다. #[63] 2년 76일. 경상북도지사 등을 역임했다.[64] 1년 118일. 평앙부윤, 부산부윤 등을 역임했다. #[65] 2년 344일. 대구부윤 등을 역임했다. #[66] 44일. 마지막 일제강점기 경기도지사 등을 역임했다. #[67] 공식적으로 미군정에 사표를 제출한 날짜는 1945년 9월 15일이다.[68] 60일. 주로 총독부 본청에서 근무했으며 8.15 광복과 동시에 직무 이탈했다.[69] 미군정부윤(military mayor)과 한국인 민정부윤으로 이원화되어 있었다. 1945년 9월 9일 미군이 서울에 진주하면서 제임스 킬러프(James S. Killough) 소령이 군정부윤으로 시정을 맡았고 1945년 11월 17일 제40 군정중대가 경성부의 행정권을 인수하면서 제임스 윌슨(James E. Wilson) 중령이 맡았다.[70] 69일. 미 육군 소령.[71] 315일. 미 육군 중령.[72] 광복 당시 경성부윤이었던 일본인 쓰지 게이고(辻桂五)가 업무를 놓으면서 김창영(金昌永)이 추대되어 사무를 인계받아 경성부 행정을 담당했다. 김창영은 이후 미군정이 주둔하면서 경성부 부부윤(부시장) 겸 기획실장으로 임명되어 실무를 담당했다. 김창영을 초대 부윤으로 언급하기도 하지만 공식적으로 부윤으로 임명되거나 권한이 위임된 것은 아니다. 일본인 경성부윤과 부서장들은 미군정이 들어오고 나서 1945년 9월 15일에 사표를 제출했다.[73] 서울특별시史의 기록이다. 미군정 문서에는 10월 26일 임명되어 10월 27일부터 업무를 맡았으며 첫 번째 공식 행사는 10월 27일 대회의실에 집결한 공무원들을 대상으로 연설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74] 신병을 사유로 1946년 5월 9일 사표를 제출하여 수리됨.[75] 197일.[76] 51일. 경성부 총무부장. 이후에는 심계원 차장을 역임했다.[77] 서울특별시史 해방후 시정편의 기록이다. 동아일보 1946년 7월 7일 기사에서는 7월 1일 오후 2시에 취임식을 거행했다고 나온다.[78] 90일. 임기 중 경성부서울시로 개칭되면서 초대 서울특별자유시장이 된다.[79] 2년 78일. 해방 이후 초대 서울시장. 서울(특별자유시)이라는 명칭을 정착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한다. 초창기에는 경성부윤이었으나 곧 '서울시장'으로 개칭되었다. 여담으로 이승만 전 대통령은 미국의 워싱턴 D.C.처럼 서울시를 우남로 만들고 싶어했다.[80] 172일.[81] 69일.[82] 1년 266일.[83] 후임 김태선 취임까지 전예용부시장이 권한대행.[84] 1년 26일.[85] 3년 337일.[86] 김태선 전 시장이 내무부장관으로 잠시 자리를 옮겼다가 복귀할 때까지 이익흥 전 부시장이 권한대행.[87] 1년 160일.[88] 1년 179일.[89] 323일.[90] 242일.[91] 장면 내각이 들어서면서 시민들의 선거로 선출되었다. 하지만 얼마 안 있다가 5.16 군사정변이 일어나면서 서울시장은 30년이 넘는 기간 동안 대통령 임명직으로 회귀했다.[92] 이 당시의 지방선거는 시장, 도지사, 군수, 읍장, 면장, 시/도의원, 시/읍/면의원을 선출하였다. 현재의 전국동시지방선거와는 조금 다르다.[93] 선거 당시 당적.[94] 137일. 4.19 혁명으로 장면 내각이 들어서면서 선거를 통해 최초의 민선 시장이 되었다. 날짜를 보면 예상되지만, 1961년 일어난 5.16 군사정변으로 인해 임기를 반 년도 못 채우고 경질된다.[95] 2년 210일.[96] 2년 104일.[97] 4년 15일. 박정희 전 대통령의 오른팔이자 최측근으로 서울시장에 임명되어 불도저라는 별명답게 서울 대개조 사업을 추진했다. 그러나 와우 아파트 붕괴사고가 일어나 그 책임을 지고 사퇴했다.[98] 4년 139일. 임명직 시장 중 최장기간 재임. 그러나 육영수 저격 사건의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99] 4년 111일.[100] 1년 254일.[101] 1년 237일.[102] 1년 169일.[103] 4년 76일. 1986 서울 아시안 게임1988 서울 올림픽 성공의 주역. 재임기간 지하철 2, 3, 4호선을 완공하였다.[104] 340일.[105] 2년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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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속.
[106] 53일.[107] 1년 127일.[108] 244일. 새 대통령 취임일에 맞춰 퇴임했다.[109] 7일. 당시 매우 유명했던 인권 변호사 출신에 40대라는 젊은 나이로 참신한 이미지까지 갖추고 있어, 당시 최초의 민주 세력 정부였던 김영삼 정부의 주요 인사로 내세울 만했다. 하지만 시장 취임 후 곧바로 서울 근교에 위치한 수려한 본인 소유의 전원 주택이 그린 벨트를 무단 훼손해서 건축된 사실이 언론 보도로 드러남으로써 1주일 만에 자진 사퇴하였다. 여담으로 김대중 정부 출범 후에는 보수 세력으로 변신하였다. 역대 최단 기간 재임.[110] 1년 227일. 날짜를 보면 알겠지만, 성수대교 붕괴 사고가 일어난 그날 오후 7시에 문책성으로 경질되었다. 후에 민선 충청북도지사를 지냈다.[111] 11일. 경상북도지사를 하던 중에 이원종 전 시장의 경질로 급히 신임 시장에 임명되었지만 11일 만에 자진 사퇴했다.[112] 239일. 마지막 관선 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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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속.
[113] 선거 당시 당적.[114] 2년 71일.[115] 1997.9.9. 제15대 대통령 선거 출마를 위해 시장직 사퇴.[116] 293일.[117] 4년.[118] 2000.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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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 외국 태생. 실질적 고향은 아버지의 고향인 경북 포항.[120] 4년.[121] 임기 만료로 퇴임 직후 바로 제17대 대통령 선거에 뛰어들어 당선, 대한민국 대통령이 되었다. 민선 서울특별시장 출신 첫 대통령. 임명직 서울시장 출신 대통령으로는 2대 시장인 윤보선이 있다.[122] 4년.[123] 민선 기준 최초의 재선 서울특별시장.[124] 1년 56일.[125] 2011 서울특별시 무상급식 주민투표 당시 투표율이 33.3%에 못 미치자 사퇴했다.[126] 60일.[127] 2년 247일.[128] 무소속으로 당선되었으나 사실상 야권의 단일 후보였다. 재보궐선거 당시 한나라당 나경원 후보를 꺾었고, 시장 취임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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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입당한다.
[129] 201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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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당.
[130] 4년.[131] 2015.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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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당명 변경.
[132] 2년 9일.[133] 최초의 3선 서울특별시장. 역대 최장 기간 재임(8년 256일). 재임 중 사망.[134] 272일.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사망으로 인한 서울특별시장 권한대행.[135] 직전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사망 사실이 10일 0시(9일 자정)를 넘겨 확인되었기 때문에 실종 당일인 9일에는 임시로 직무 대리를 맡았던 것. 주된 차이가 시장으로서 현직이 누구냐 정도이다. 결재권자가 현직 시장인데 임시로 현상 유지의 범위 내에서 대결하는 자리가 직무 대리이고 권한대행자가 바로 최종 결재권자가 되는 것이 권한대행이다.[136] 1년 84일.[137] 두번째 3선 서울특별시장이고 임기 이후 재출마하여 당선된 세 번째 광역자치단체장이다. 이전에는 염홍철대전시장우근민제주도지사가 임기 이후 재당선된 사례가 있다. 오세훈 다음에는 홍준표경남지사유정복인천시장이 각각 대구광역시장인천광역시장에 재당선되었다.[138] 최초의 4선 서울특별시장. 임기를 정상적으로 마칠 경우 역대 최장 기간 재임 기록을 가져오게 된다. (통산 10년 139일).[139] 서울특별시 서초구 갑의 제15대 국회의원이었지만 서울특별시장 선거 출마를 위해 의원직을 사퇴했다.[140] 이후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 경기도지사 선거가 이 선거를 능가하는 초접전 선거가 되었다.[141] 특히 성동구, 동대문구, 중랑구, 도봉구까지 강북 여러 자치구에서 1%p 이내 초접전을 벌였다.[142] 실제 한명숙 후보가 승리한 17개 구 중 1만 표 이상 차이를 벌린 곳은 관악구와 마포구뿐이었다.[143] 문재인 정부검찰총장 출신으로 선출직이 없는 대선 후보로서 최초의 사례이다.[144] 역대 대선을 통들어서 득표율차가 가장 적게 난 것은 제20대 대통령 선거였다.[145] 오세훈이 서울특별시장직을 사퇴한 이후 재보궐선거가 있었는데, 한나라당에서는 당시 서울특별시 중구 국회의원이었던 나경원을 공천했고, 야권에서는 당시 서울특별시 구로구 을 국회의원이었던 박영선(민주당), 안철수(무소속), 박원순(무소속)이 야권 연대를 했고 이 중 박원순이 경선에서 승리해 서울특별시장 후보로 공천되었다. 선거 결과, 무소속 박원순 후보가 한나라당 나경원 후보를 7% 정도 앞서면서 당선되었다.[146] 그리고 박원순의 3선 임기는 미완으로 끝나게 되었다.[147] 서울특별시장 여론조사 박원순의 3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는 여론조사에서 강남3구의 긍정 평가가 50%를 넘겨버렸다.[148] 구일역의 설계를 변경해가면서 고척 스카이돔 방향 출구를 만들었고, 하필 일대가 헬게이트 터지는 경인로인지라 고척돔 인근의 도로를 다 뜯어고쳤다.[149] 사직 야구장, 대전 한화생명 이글스파크 같은 낡은 구장의 신축을 돔구장으로 해야한다는 주장이 있긴 하다.[150] 인근에 서울공항이 있다. 군용기가 공항에 안전하게 착륙하기 위해선 시야 확보=안전 확보가 최우선인데, 롯데월드타워가 세워지게 된다면 이 건물 때문에 시야 확보가 어려워지므로 활주로의 각도를 7도 가량 틀어야 한다며 공군이 반대하자 공군 의견은 그저 참고 사항일 뿐이라는 소리를 했다. 심지어 이런 논란도 있다. 안보를 외친다는 보수 정당의 서울시장이 현대전에서 지상 전력 만큼이나 중요한 공중 전력의 제공권 확보에 관한 사안을 무시해버린 셈.[151] 물론 당선 뒤로 민주통합당에 입당하지만.[152] 그나마 불출마 후 1998년 재보궐선거에서 강원특별자치도 강릉시 을에 출마해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니 국회의원 무경력은 박원순 전 시장이 유일하다.[153] 관악구는 서울특별시에서 민주당 지지세가 가장 강한 지역이고 노원구는 안철수의 전 지역구다. 두 곳 다 호남 출신이 많아 민주당 지지세가 강하다.[154] 물론 남경필이나 유정복도 경기도와 인천광역시에서 35%대의 득표율로 2위를 하긴 했지만 김문수의 경우 2위 싸움의 상대가 1년 전 대통령 선거에서 서울특별시 2위를 차지한 안철수라는 점이 다르다.[155] 2021년 3월 23일 국민의힘 오세훈 후보와 단일화 확정으로 사퇴했다. 후보 등록일 이후 사퇴하였기 때문에 투표 용지에는 인쇄되었으나, 기표란에 사퇴라고 표시되었다.[156] 종로구, 서대문구, 은평구, 성북구, 강북구, 도봉구, 중랑구, 강서구, 구로구, 금천구, 관악구.[157] 공교롭게도 1번째 기록도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오세훈 자신이 기록했다. 당시는 522개 동 중 522개 동 전역에서 이겼다.[158] 창신2동, 구로3동, 항동, 화곡8동, 성산1동. 그나마 이 5곳 중 구로3동과 항동은 당시 민주당 후보였던 박영선의 정치적 고향인 구로구 관할이다.[159] 역시 전 행정동에서 전패한 변성완서재헌은 득표율 상으론 송영길보다 처참한 결과를 만들어냈긴 하나, 적어도 2명은 영남권이란 보수세가 강한 지역이고 상대 후보와 체급 차이도 어마어마하여 정치 생명에 타격이 크다고 볼 수 없다. 반면, 송영길은 비록 인천광역시 출신 후보이긴 하나, 엄연히 5선 의원에다 인천광역시장까지 지낸 한 대권 주자였기에 더 굴욕적인 결과로 볼 수 밖에 없으므로 이는 정치 생명에도 엄청난 타격이 가게 된다.[160] 3% 이상 득표자만 기재.[161] 중도 성향 후보.[162] 민주당계 정당 후보.[163] 진보 정당 후보.[164] 민주당계 정당·진보 성향 후보.[165] 제3지대 정당 후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