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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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

설립
1945년 11월 22일,(78주년),
창간
1904년 7월 18일 대한매일신보,(119주년),
소재지
서초구 사옥
서울특별시 서초구 양재대로 2길 22-16 (우면동)
광화문 사옥
서울특별시 중구 세종대로 124 (태평로1가)
대표자
곽태헌
임원진
회장 김상열[1]
부회장 조억헌
발행·인쇄인 · 대표이사 사장 곽태헌
상무 이종락
상무 이호정

업종명
신문 발행업
상장여부
비상장기업
임직원
431명 (2023년 6월)
매출액
832억원 (2022년 연간)
영업이익
80억원 (2022년 연간)
순이익
52억원 (2022년 연간)
최대주주
서울미디어홀딩스·호반건설 (지분 47.58%)[2]
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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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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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3,501,117회 [A]
가입일
2012년 2월 7일

1. 개요
2. 역대 사시
2.1. 1965 ~ 1998: (구)서울신문의 다짐
2.2. 1998 ~ 2003: 대한매일의 다짐
2.3. 2004 ~ 현재: (신)서울신문의 다짐
3. 사옥
4. 지배 구조
5. 역사
5.1. 대한매일신보 시대
5.2. 매일신보 시대
5.3. 서울신문 시대
5.4. 민주화 이후 현황
5.5. 호반그룹의 인수
6. 관련 문서
7. 관련 문헌
8. 역대 임원
8.1. 명예사장
8.2. 회장
8.3. 부회장
8.4. 대표이사 사장
8.5. 부사장
8.6. 콘텐츠본부장
9. 주요 간부
9.1. 주필
9.2. 논설주간
9.3. 논설위원실장
9.4. 수석논설위원[3]
9.5. 논설고문
9.6. 편집 책임자
9.7. 편집위원실장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조간 종합 일간 신문.

1904년 7월 18일에 창간된 구한말의 대표적 민족지 대한매일신보의 지령과 창간정신을 계승했다. 대한매일신보는 일제가 대한제국을 강점하던 암흑시대 겨레의 독립자존을 일깨운 민족의 횃불이었다.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하며 빼앗긴 국권을 다시 찾는데 앞장서기도 했다. 서울신문은 격변하던 시대상을 기록한 우리민족 근∙현대사 그 자체이자 영욕이 함께 담긴 자화상이다. 한국 신문사에서 '최초'라는 수식어를 연이어 쏟아내던 혁신의 아이콘이기도 했으며 한국에서 현재 발행되고 있는 신문 중에서는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한다.

과거에는 오랫동안 기획재정부가 대주주로 있던 '공영' 성격의 언론사였으나, 2021년 하반기에 호반건설로 대거 지분이 매각돼, 호반그룹의 계열사로 편입됐다. 2021년에 들어서 3대 주주인 호반그룹이 서울신문 우리사주조합의 지분을 모두 인수하는 조건으로 협상에 들어가더니, 9월에는 지분의 인수가 최종 확정됐다. 이로써 호반그룹이 서울신문 지분의 절반 가량, 의결권의 절반 이상을 단독으로 보유하게 돼, 완전히 호반그룹의 자회사로 편입됐으며, 기획재정부 지분(30.49%)으로 인해 '준공영 신문'으로 남아있게 됐다.

주목할 만한 점은 2013년 적자 기업이었던 서울신문이 2014년부터 사세를 확대하며 꾸준한 성장을 이어오고 있다는 점이다. 종이신문과 디지털 영역의 조화가 이뤄지며 매체의 영향력은 해마다 증대되고 있다. 2013년 서울신문의 경상손익은 -59억이었으나, 이후 매년 꾸준히 경상이익을 기록하고 있다. 2022년에는 매출 832억원, 영업이익 80억원을 기록해 매출액 기준 5대 일간지로 자리잡았다.


2. 역대 사시[편집]



2.1. 1965 ~ 1998: (구)서울신문의 다짐[편집]


  • 나라의 이익을 앞세운다
  • 정치를 바른길로 이끌어준다
  • 경제를 뻗게 하는 길잡이가 된다
  • 사회를 밝게 하는 횃불이 된다
  • 문화를 꽃피우는 샘터가 된다


2.2. 1998 ~ 2003: 대한매일의 다짐[편집]


  • 공공이익을 앞세우는 신문
  • 국민복지에 앞장서는 신문
  • 민족화합을 앞당기는 신문
  • 2000년대에 앞서가는 신문


2.3. 2004 ~ 현재: (신)서울신문의 다짐[편집]


  • 바른 보도로 미래를 밝힌다
  • 공공이익과 민족화합에 앞장선다


3. 사옥[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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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신문 광화문 사옥

과거 본사 사무실은 서울특별시 중구 세종대로의 한국프레스센터에 위치했으며, 현재의 건물은 1984년 12월에 완공됐다. 건물엔 한국언론진흥재단, 한국방송광고진흥공사(공익광고협의회) 등이 입주하고 있다. 2021년 호반건설에 매각된 이후 2022년 한국프레스센터 재건축 추진을 위해 9월 30일부터 서초구 우면동 호반파크로 이전됐고, 기존 사옥은 취재·제작지원 업무만 하도록 했다.#


4. 지배 구조[편집]


주주명
보유주식수
지분율
기획재정부
2,535,973
30.49%
서울미디어홀딩스[4]
2,153,088
28.18%
호반건설
1,614,000
19.40%
자사주
1,078,705
9.96%
한국방송공사
672,164
8.08%
기타
323,099
3.89%
총계
8,318,033
100.00%

호반건설이 서울신문 인수를 완료한 2022년 1분기 기준, 호반건설과 호반건설의 자회사인 서울미디어홀딩스가 지분 합계 47.58%, 의결권 기준 합계 53.4%를 점유해 최대 주주이자 경영권을 보유한 소유주가 됐다.

5. 역사[편집]



5.1. 대한매일신보 시대[편집]


대한매일신보는 러일전쟁이 한창이던 1904년 7월 18일 영국인 배설(裵說:본명 Ernest Thomas Bethell 1872~1909)과 양기탁(梁起鐸 1871~1938) 등 민족진영 인사들이 합심해 창간했다. 대한매일신보는 시대가 낳은 '항일 민족언론의 총본산'이었다. 한글전용, 영문, 국한문혼용 등 3가지 신문을 냈던 점도 특징이다.

대한매일신보가 태어난 1904년은 한반도에서 힘의 균형을 이루던 주변열강의 각축전 양상이 또 한차례 뒤바뀐 상황이었다. 당시 대한제국 정부는 정초부터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 전운이 감돌고, 일본의 한국 침략 야욕이 더욱 뚜렷해지자 '국외(局外)중립'을 서둘렀다. 영국을 비롯,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등 서구열강의 주한외교사절들은 그해 1월 말까지 각각 본국 정부를 대신해 국외중립선언을 받아들인다고 대한제국 정부에 통보해 왔다. 그러나 일제는 이를 무시하고 비밀리에 러시아와 일전을 겨루기로 결의, 병력을 우리나라에 집결시킨 뒤 2월 10일 러시아에 정식 선전포고를 하고 전투에 들어갔다.

당시 우리 군의 실력으로는 일본의 침략을 도저히 막아낼 수가 없었다. 단 한가지 우리의 처지를 세계만방에 호소해 일본의 한국 점거가 부당하다는 사실을 알리는 길 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일제의 간섭을 받지않는 영자(英字) 신문 발행이 시급한 과제였다. 당시 국내에는 영어 등 서양어로 간행되는 일간신문이 하나도 없었다. 서양어 소식지라고는 미국인 헐버트(Homer Hulbert)가 내는 월간 영어잡지 코리아 리뷰(The Korea Review)가 전부였다. 독립신문 영문판(The Independent)이 폐간된 지도 4년이 지났다. 물론 황성신문(皇城新聞)과 제국신문(帝國新聞) 등 국∙한문판 신문이 있었으나 일제의 언론탄압에 눌려 제대로 구실을 하지 못했다.

"일제 간섭 받지 않는 신문을 만들라"

이런 상황에서 대한제국정부는 한국입장을 효율적으로 세계 여러 나라에 알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일본의 검열을 받지 않는 영자신문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이에 적합한 외국인을 극비리에 백방으로 찾았다.

파일:대한매일신보_창간호.jpg
■대한매일신보 창간호

데일리 크로니클을 그만두게 된 배설은 같이 해임된 토머스 코웬과 함께 서울에서 일간 영자신문을 창간하기로 뜻을 모았다. 배설은 서울에 와 취재를 하면서 양기탁을 알게 됐다. 양기탁은 고종의 영어 '통변인(通辯人)'으로 외교사절을 비롯한 외국인과의 통역을 맡고 있었다. 영자신문 발간을 생각하며 치외법권의 혜택을 누릴수 있는 외국기자를 물색하고 있던 한국정부로서도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극비리에 영자일간지를 내기로 의견을 모은 이들은 곧 창간 작업에 들어갔다. 이런 영자신문 발간 소문은 금방 장안에 퍼졌다. 코리아리뷰는 일간 영자신문 발행 소문을 소식란에 실을 정도였다. 소문은 곧이어 현실로 나타났다. 이들은 창간에 앞서 1904년 6월 29일 '코리아 타임스(The Korea Times)'라는이름으로 첫 시험판을 만들어 여론을 떠보았다. 시험판이 10여회 나오는 동안 한글로도 기사를 실어야 한다는 의견이 대두됐다.

파일:어니스트베델.png
■어니스트 베델

외국인 독자도 중요하지만 한국인들에게도 세상물정을 널리 알려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이렇게 해서 7월 18일 마침내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라는 한글과 영문을 함께 쓴 2개 국어 신문이 세상에 나오게 됐다. 영문 제호도 '코리아데일리뉴스(The Korea Daily News)'로 바뀌었다.

신문사 사장에는 배설이 취임하고 총무에 양기탁이 임명됐다. 배설은 이때 이미 일본에 있던 그의 아내와 아들을 서울로 불러와 한국에 정착할 생각을 굳히고 있었다. 양기탁은 처음에는 주로 영문기사를 번역하고 더러 논설 부분에도 보조 역할을 했으며 그 뒤 총무라는 직함으로 사업부 일을 전담하게 됐다. 원래 사업부 일은 배설이 총괄했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양기탁에게 많은 부분을 넘겨줬다.

●박은식·신채호·안창호…항일투사 의기투합

취재 편집 진용도 자연히 항일투사들로 짜졌다. 백암(白巖) 박은식(朴殷植)이 주필에 포진했고 당시 탐보원(探報員)이라 불렀던 기자급으로는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를 비롯해 최익(崔益)∙옥관빈(玉觀彬)∙변일(卞一)∙장도빈(張道斌) 등이 참여했다. 나중에는 안창호(安昌浩)∙이갑(李甲) 등 평안도 인사들로 구성된 구국운동 조직인 서북학회의 인사들도 가세했다. 을사조약반대와 국채 보상운동으로 독자가 급격히 늘자 한글전용판을 국한문혼용 영문판과 함께 만들었다. 신문사 사무실은 박동의 프랑스어학교 앞에 있던 설필림(薛弼林 본명 A B Stripling) 집으로 정했다. 지금으로 말하면 옛 중동고등학교 부근으로 짐작된다.

파일:단재신채호.jpg
■단재 신채호

대한매일신보는 1905년 11월 17일 을사조약이 체결되면서 더욱 진가를 발휘했다. 다른 민족지들이 일본의 철저한 검열로 손발이 묶인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 때 비판기사로 메운 대한매일신보 지면은 항일독립운동사를 빛낸 귀중한 기록으로 남아있다.

대한매일신보는 당시 을사조약체결 문제를 가장 심도있게 다뤄 일제의 혹독한 탄압을 받은 황성신문과 사장 장지연(張志淵)을 기사화해 일제의 야비함을 낱낱이 폭로했다.

11월 27일에는 당시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던 황성신문 기자와 신문에 실린 황성신문 관련 기사들을 종합정리해 한문과 영문 양면으로 된 호외까지 만들어 을사조약 체결 진상을 전국에 알렸다. 대한매일신보의 을사조약 반대운동은 나라를 지키지 못한 책임을 통감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지사들의 충절을 기리고 조약에 서명한 5명의 대신을 집중 성토하는 내용으로 이어졌다. 대한매일신보는 특히 민영환을 조약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린 충신의 우두머리였다고 치켜세우고 12월 1일자에 그의 유서 전문(全文)를 실어 숭고한 뜻을 기렸다.

●매국노 질타…국채보상운동을 이끌다

대한매일신보는 매국노들을 질타하는 기사를 거의 날마다 쉬지 않고 실었다. 매국노를 고소하는 글, 부끄러운 행위를 비꼬는 '매국대신(賣國大臣) 경축가' 가사, '역당(逆黨) 행위' 비난글 등이 주류를 이뤘다.

대한매일신보의 이같은 반일보도를 읽은 고종은 1906년 2월 10일 배설에게 '신문 및 통신에 관한 전권자(全權者)로 위임(委任)할 사(事)'라는 친필특허장을 내리고 매월 1000원씩 운영경비를 보조해줬다.

이듬해 대구에서 처음 시작된 '국채보상운동'은 대한매일신보 기사에 실려 전국으로 번져나갔다. 대한매일신보는 1907년 2월 21일자에 대구 민의소가 발표한 '국채 1300만원 보상 취지서' 전문(全文)을 싣고 '이천만 동포 가운데 조금이라도 애국충정이 있는 사람은 이에 적극 참여해달라'며 성금운동에 활을 당겼다. 지면이 그리 넓지 않은 형편에서 취지서 전문을 소개하는 것은 실로 파격이었다. 취지서 내용은 읽는 이의 심금을 울렸다. 이 국채보상취지서가 보도되자 곧바로 다음날 서울에서 '국채보상기성회'가 결성됐다.

국채보상운동 관련 기사가 하루도 거르지 않고 지면을 메우자 의연금을 내는 사람과 이를 모으는 '국채보상소'가 전국적으로 크게 늘어났다. 1907년 3월말 현재 국채보상소는 전국적으로 27곳에 이르렀으며 성금을 낸사람도 4만여명에 달했다. 남성은 담배 끊기 운동을, 여성들은 패물을 내놓으며 국채보상운동에 앞장섰다.

5.2. 매일신보 시대[편집]


일제가 대한매일신보 숨통을 조이기까지는 3년 이상이 걸렸다.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한 배설을 한국에서 쫓아내기 위해 두 차례(1907년 10월 14일, 1908년 6월 15일)나 재판에 회부하고 양기탁을 전격 구속(1908년 7월 12일)한 것도 그 일환이었다.

일제는 스티븐스 암살사건 기사(1908년 4월 17일자)와 '백매특날(百梅特捏)이 부족이압(不足以壓)-이태리(伊太利)(1908년 4월 29일자)', '학계(學界)의 화(花)(1908년 5월 16일자)', 두 논설 등을 트집잡아 배설을 고소했다. 양기탁은 국채보상성금을 횡령했다는 이유로 경시청 와타나베 경부가 7월 12일 밤 직접 회사 안에까지 들어와 연행했다.

마침내 통감부는 1910년 5월 21일 대한매일신보 사장 만함(Alfred W. Marnham)에게 700파운드의 큰 돈을 주고 대한매일신보를 인수하기에 이르렀다. 한일합방을 3개월 남짓 앞둔 시기였다. 대한매일신보를 사들인 통감부는 양기탁에게 발행을 맡기기 위해 의사를 물었으나 단호히 거절했다.

●항일 최선봉 대한매일신보의 비극적 종언

그래서 통감부는 합방조약 조인 때까지 대한매일신보 매입을 비밀에 부쳐둔 채 1910년 6월 14일 발행인 및 편집인 명의를 이장훈(李章薰)으로 바꿨다. 창간 때부터 신문제작과 경영을 도맡았던 양기탁은 발행인 명의가 이장훈으로 바뀐 그 날부터 자신은 신문에서 손을 뗐다는 광고를 내고 대한매일신보를 떠나고 말았다. 신민회를 만들어 비밀항일운동을 계속했던 신채호, 장도빈, 임치정, 옥관빈 등도 모두 물러났다. 항일운동의 최선봉에 서서 뜨겁도록 구국의 혼을 불사르던 민족지 대한매일신보가 비극적인 종언을 고하는 순간이었다.

대한매일신보를 총독부 기관지 경성일보로 흡수통합한 일제는 이를 동원해 식민통치 기반을 다져나갔다. 일제가 대한매일신보 지령을 잇게 하고 한글판을 존속시킨 것은 실은 독자가 많았던 대한매일신보의 위세를 빌려 민중을 설득하려는 목적이었다. 하지만 총독부는 1912년 3월 1일부터 한글판 신문발행을 중단하고 국∙한문 신문 제3면을 한글기사 전용페이지로 쓰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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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일보 사옥

경성일보의 한 부서에 지나지 않았던 매일신보는 1920년 들어 편집국으로 승격됐다. 이어 1938년 4월 29일 경성일보에서 독립, 매일신보(每日新報) 시대를 열었다. 그러나 경성일보는 매일신보 주식 45%를 갖고 있는 대주주였다. 여기에 총독부 주식을 합하면 매일신보는 종전과 조금도 달라진 점이 없었다. 매일신보는 36년 동안 줄곧 식민통치를 예찬하고 민족구국운동을 비판하는 곡필(曲筆)로 일관했다.

매일신보는 비록 부끄러운 기록이지만 일제강점기 연구에 없어서는 안 될 1차 사료(史料)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다. 일제에 어떻게 부역했고 민족지와는 어떤 점이 다른가에 대한 비교연구에도 빼놓을수 없다. 특히 일제가 우리말과 글 사용까지 탄압했던 암흑기에 유일했던 국문매체로 많은 문학작품을 실어 근대 문학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다. 기자 공개채용 제도를 도입하고 문예작품을 공모한 매일신보는 언론사적 측면에서도 연구대상이다. 매일신보는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강제폐간 당시 오갈 데 없어진 언론인들의 은신처 역할도 했다.

암흑기 유일한 국문매체…기자들의 은신처

매일신보는 인재의 폭넓은 등용을 위해 1918년 최초로 기자 공개채용을 실시했다. 이는 아는 사람의 소개 등으로 신문기자가 되던 당시 관행을 깨는 일대 혁신이었다. 홍난파(洪蘭坡)와 유지영(柳志永)은 이 때 높은 경쟁률을 뚫고 매일신보 기자로 뽑혔다.

총독부 기관지로서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매일신보 기자들은 사회 부조리와 모순을 파헤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1930년대말 '기생 박애란(朴愛蘭) 음독 자살사건'은 그 대표적인 예다. 24세로 권번(券番) 기생인 그녀는 돈많은 지주집 첩으로 가게 됐다.

그러나 따로 좋아하는 남자가 있어 끝까지 거절하자 기생어미가 창녀굴에 팔아 넘기려 했다. 결국 그녀는 견디다 못해 머리 염색약을 마시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매일신보는 이 사건을 계기로 인신매매가 공공연하게 행해지고 있던 사회비리에 초점을 맞춰 내막을 파헤쳤다. 그 결과 조선총독부는 한달 후 인신매매 행위를 엄단하는 총독부령을 발령해 빚에 묶여있는 기생 등을 무조건 해방시키도록 했다.

총독부 감시를 벗어날 수 없었던 매일신보는 정치기사로는 독자의 관심을 끌수 없다고 판단, 학예기사 쪽으로 눈을 돌렸다. 편집방향은 자연히 문학쪽에 비중이 실릴 수밖에 없었다. 신춘문예 제도를 최초로 시행한 것도 바로 그때문이었다.

매일신보는 이에 따라 문학전문기자를 채용하기도 했다. 그리고 독자문예란을 만들어 일반독자들의 글쓰기를 적극 장려하는 등 문학발전을 위해 전력을 다했다. 이 난을 통해 등단한 작가는 김형원(金炯元)과 노자영(盧子泳)이 대표적이다.

일제가 모든 민간지를 강제폐간하고 한민족문화와 언어를 말살시키기 위한 정책을 펴는 시기에 매일신보 책임은 더욱 막중해졌다. 다시 말해 매일신보는 우리 작가들이 작품을 선보일수 있는 유일한 터전이었다. 그래서 이인직∙조중환∙이해조∙이상협∙이광수∙민태원∙윤백남 등 1920년 이전부터 소설을 발표해온 작가들이 지면에 자주 등장했다.

5.3. 서울신문 시대[편집]


서울신문은 감격적인 1945년 8∙15 광복과 함께 민족의 진실된 언론기관으로서의 역할을 자임하며 그 해 11월 22일 역사적인 새출발을 한다. 국운이 완전히 기울어진 구한말의 마지막 등불이었던 대한매일신보의 위대한 민족정신과 구국필봉을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새로운 이름과 사명으로 다시 잇게 된 것이다.

민족대표 33인의 한분인 덕망높은 원로지도자 위창 오세창(吳世昌) 사장을 비롯한 주역들이 서울신문을 출범시키면서 '창간' 대신 '혁신속간'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점은 주목할 만하다. 1945년 11월 22일 혁신 속간호의 지령은 제1호가 아닌 제13738호였던 것이다. 대한제국 시절의 전설적인 항일신문 대한매일신보의 지령에, 일제가 대한매일신보를 강제수용해 발행한 매일신보 지령을 더한 숫자다.

●항일 민족정신 이어받아 '서울신문'을 열다

현재 서울신문의 지령은 역사적 재평가 과정을 거쳐 일제에 점령된 매일신보 시절을 제외하고 대한매일신보의 지령만을 승계하고 있다. 하지만 광복 당시 서울신문은 대한매일신보가 가진 위대한 유산을 물려받는 것은 물론 매일신보가 가진 아픈 교훈을 잊지 않겠다는 다짐에서 지령을 이어받았다. 물론 광복 당시 매일신보의 사원 600명을 비롯해 사옥과 윤전기 등 신문 제작 설비를 그대로 물려받았다는 것은 지령을 이어받은 가장 중요한 이유가 됐을 것이다.

당시 서울신문이 지령은 비판적으로 승계했지만, 지면은 명실상부하게 매일신보와 절연했다는 사실은 혁신속간호 곳곳에서 발견된다. 오세창 사장은 취임사에서 “일본제국주의의 괴뢰였던 매일신보로서의 성격은 완전히 불식되고 해방 직전의 유일한 국문지로서의 완비한 설비를 미 군정청의 후의로 동지제현이 맡아 관리해 해방조선의 대변기관인 서울신문으로 새출발을 하게 됐다”고 밝혔다.

파일:attachment/gwangbok3.jpg
■8·15 광복

서울신문은 혁신속간호 사설에서부터 '일당일파에 기울어지지 않는 공정한 언론보도'에 충실할 것임을 천명했다. 나아가 '독립완성의 시급한 요청과 민주주의적 질서수립'이라는 당면 과제에 매진할 것을 약속했다. 이같은 좌표는 해방공간 내내 진보적인 논조를 지향한다는 평가를 받으면서도 일방적인 좌파의 선전으로는 흐르지 않아 당시 서울신문이 한국신문사(史)에서 '중립지'로 분류되는 기초가 됐다.

역사적인 혁신속간의 위업을 담당했고, 이후 서울신문을 당대 최대 발행 부수의 권위지로 공인받게 하는 데 기여한 오세창 사장 이하 간부진은 자타가 공인하는 민족주의자였다. 위창 선생 자신이 한국 근대신문의 효시인 한성순보의 기자로 출발해 만세보, 대한민보 등 항일민족지를 창간한 이 나라 언론계의 선구자였다. 일제치하 조선, 중앙일보에 재직하던 시절 16회에 걸쳐 연재한 '백두산 탐험'으로 민족정기를 일깨운 주필 이관구와 국어연구에 선구적 역할을 한 편집국장 홍기문(洪起文) 이하 편집간부 역시 내로라하는 최고의 언론인들이었다.

여기에 역시 민족대표 33인의 일원이며 신간회 부회장등으로 독립운동을 해온 애당 권동진(權東鎭) 선생과 벽초 홍명희(洪命熹) 선생을 고문으로 추대함으로써 서울신문의 진용은 권위있는 민족의 대변기관으로서 한치도 모자람이 없었다.

작가 등용문 '신춘문예 시대' 본격 개막

제호는 이관구의 제의를 간부진이 숙의한 결과 '서울신문' 으로 확정해 1945년 10월 25일 주총에서 의결했다. '워싱턴 포스트' 등에서 보듯 수도 명칭은 국가를 대표하는 이미지를 심어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서울신문 제호의 글씨는 오세창 선생으로부터 서도(書道)를 전수받은 김무삼이 썼다.

서울신문사는 1949년 10월 작가로 향하는 화려한 등용문인 신춘문예의 공고를 처음으로 냈다. 다른 신문사에서도 신춘문예 현상공모를 실시했으나, 장르를 시, 동요, 동화에 국한시키고 있었다. 이때 서울신문은 과감하게 단편소설을 추가하면서 4개 부문에서 모두 17명의 심사위원을 초빙했다.

이렇게 첫 발을 내디딘 신춘문예는 6∙25 이후 5년동안 중단됐다가 소설가 이제하를 배출한 1956년 부활해 한국문학을 살찌운 문단의 산실로 굳건히 자리잡았다. 서울신문은 최근까지 소설가 한강·편혜영·임철우·하성란, 시인 나태주·이근배·박세미, 문학평론가 하응백·유성호 등 기라성 같은 인물들을 배출했다.

파일:hankang the greatest writer.jpg
■소설가 한강

서울신문 기자들은 6·25 전쟁 직후 모두 12차례 호외를 내며 최후까지 사옥을 지켰다. 서울신문은 이미 26일 6차례에 이어 27일 오후 4시까지 다시 5차례의 호외를 내며 11차례 호외를 찍어냈다. 이즈음 사내에선 “다른 신문사는 이미 해산해버렸는데 우리도 무슨 채비를 해야 할 것이 아니냐?”는 의견이 나왔다.

●전쟁에도 "최후까지 신문 제작"…8명 희생

최후까지 사옥을 지키던 박종화 사장 이하 간부들도 대책을 세우지 않을 수 없었다. “정부가 대전으로 내려간 이상 우리도 소사(素砂·현재의 경기 부천시와 서울시 구로구 접경지역) 정도까지 옮겼다가 사태 호전을 기다려볼 수는 있다. 그러나 문을 닫는 것은 좀 더 두고보자”는 결론이 내려졌다. 그래서 사장과 주필, 편집국장을 비롯한 기자, 공무국 요원 20여명은 회사에 남았다.

이때 조선과 경향 등 여타 중앙지는 이미 해산하고 문을 닫은 형편이었고, 동아는 27일 오후 4시 “전황이 절망적이고 더 이상 취재활동을 할 수 없다”며 호외 300장을 찍어 차에서 뿌리며 피란을 떠나버린 상태였다. 그러나 서울신문은 중앙언론사 중 유일하게 간부진과 사원이 끝까지 회사를 지켰다. 한강다리가 폭파된 이후 간부진과 사원들은 피란갈 방법이 없어 뿔뿔이 흩어졌다. 이후 태평로 사옥은 북한군의 수중에 넘어갔고, 북한이 '조선인민보'라는 선전지를 찍어내는 기관으로 전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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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파된 한강교

가슴 아픈 사실은 6∙25전쟁 당시 서울신문에서만 8명의 희생자가 나왔다는 것이다. 박종화 사장과 끝까지 사옥을 지키다 지프로 피신하던 비서 이승로는 신문인 최초의 희생자였다. 한강다리 폭파를 확인하고 남산 밑에 있던 주필 오종식의 집으로 피신하던 비서 이승로는 중동화백화점(현 신세계백화점) 앞에서 북한군의 총탄을 맞았다

같은 차에 탔던 상임감사 강병순은 은신 중 붙잡혀 북으로 끌려갔다. 이밖에도 이사 김경진, 출판국장 김진섭, 편집부국장 박종수, 사회부장 이종석 등이 납북됐다. 또한 사회부 기자 한규호가 종군 취재 중 순직해 애석함을 더했다. 한국전쟁에서 순직한 외국인 종군기자는 모두 17명, 국내 종군기자로는 한규호가 유일하다.

●구국의 영웅 '이순신 장군' 세종로에 세우다

전쟁 후 서울신문이 역사에 남을 공헌을 한 것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 등 세종로의 명소가 된 선열들의 동상 건립 사업이다.당시 서울시청앞 세종로 큰길 한가운데 녹지대에는 37기의 석고 위인상이 세워져 있었다. 미술대학생들의 작품으로 좌대를 포함해 평균 2m 정도 높이의 초라한 모습에다 그나마 석고상이어서 훼손되기 쉬웠다. 마침 서울시의 도시계획에 따라 이들 석고상이 철거되자 서울신문사가 나서서 새로운 모습의 동상 건립을 추진했다.

국내에는 제대로 주조된 동상이 없었던 상태라 위원회는 해외공관을 통해 외국 동상의 사진자료를 수집하는 한편, 1966년 11월 2일 건립대상 인물을 선정하기 위해 학계∙문화계∙관계∙교육계∙실업계 인사에게 127통의 설문을 발송했다. 이 가운데 가장 천거를 많이 받은 이순신 장군, 세종대왕, 사명대사 조상(彫像)을 1차 년도인 1968년에 건립키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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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광장 이순신 장군상

2년 동안의 산고 끝에 1968년 4월 27일 마침내 첫 동상이 건립됐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동상이 서울 중심가에 우뚝 선 것이다. 서울신문은 그날의 기쁨을 사회면 톱에 '겨레의 갈 길 밝혀 성웅 현신하다'라는 제목으로 보도했다. 대통령 및 3부요인, 200여명의 각계 인사가 참석한 가운데 높이 17m, 동양 최대의 동상이 그 위용을 드러냈다. 이어 14기의 동상이 연차적으로 세워졌으며, 각 조상마다 제각기 다른 특징이 강조됐다. 1972년 5월까지 5년에 걸쳐 모두 15기를 건립한 애국선열 조상건립위원회는 제막식을 가진 뒤 그 동상 관리권을 서울특별시 또는 유관단체로 이관했다.

장편소설 '객주(客主)'는 1979년 6월 1일부터 1984년 2월 29일까지 1465회에 걸쳐 연재됐다. 서울신문으로서는 최장기 연재 기록이다. 문학적 성과도 대단해 신문소설사(史)에서뿐 아니라 한국문단에 있어서 역사소설의 새 장르를 개척한 발군의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석간 체제였던 서울신문은 1980년 12월 2일자부터 조간 체제로 전면 개편됐다. 또 컬러텔레비전 방영이 시작된 1981년 다각적인 검토 끝에 국내 최초의 주간 TV 연예잡지 'TV가이드'를 탄생시켰다. 안방에 앉아 나이와 무관하게 모든 가족이 볼 수 있도록 만든다는 원칙을 세워 1980년대 중반 부수가 가장 많은 잡지로 큰 인기를 끌었다.

서울신문은 수명이 다한 보신각종 대신 새 종을 만드는 중주(重鑄)사업도 진행했다. 원래 걸려 있던 보신각종은 조선 세조 14년인 1468년 현재 탑골공원인 원각사에 걸기 위해 만들었다가 절이 없어진 후 1619년 보신각으로 달게됐다. 보물 2호로 지정된 보신각종은 몸통에 금이 가면서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 보관 중이다. 1985년 서울신문은 국민모금운동을 통해 7억 9600만원을 모아 보신각종 중주위원회(위원장 윤보선 전 대통령)에 전달했다. 1985년 8월 15일 새로 주조한 보신각종 첫 타종식이 열렸다.

●한국 신문사 큰 족적…CTS 첫 도입

1984년엔 미개척지로 남은 문화예술비평의 활성화를 위해 계간지 '예술과 비평'을 창간했다. 1985년 1월 1일 한국 신문사에 영원히 기록될 CTS(컴퓨터를 이용한 신문 제작 시스템)를 국내에 첫 도입했다. 같은 해 4월 6일엔 25개 국내 유관 언론단체와 5개 주한외국언론기관이 입주한 서울신문사·프레스센터 준공식이 열렸다.

당시까지 전통적인 활판신문 제작공정의 주체는 '납'이었다. 출고된 원고는 '문선부'에서 하나하나 활자로 바뀐 뒤 좀짜기나 모아짜기에 의해 지면으로 꾸며졌다. 그후 다시 지형을 만들고 연판을 부어 인쇄를 했다. 납을 녹여 쓰는데는 열이 필요했기 때문에 이 공정을 핫타입 시스템(Hot Type System)이라 불렀다. 이것과는 달리 납을 쓰지 않고 열처리도 필요없이 원고를 인자화하는 것을 콜드타입 시스템(Cold Type System)이라 표현했다. 이를 컴퓨터의 힘으로 해내는 것이 CTS였다.

CTS 제작은 TV가이드부터 시작했다. 서체∙행간 등 기본체제를 정하고 몇 차례 실습제작을 해본 다음 1984년 7월 14일 제100호부터 전면 CTS 제작을 단행했다. 10대가 중심인 독자들은 예상 이상의 좋은 반응을 나타냈다. 그해 11월 서울신문 시험판 제작이 시도됐다.

기본문자 크기와 1단의 배수∙행수 등 문자에 관계되는 지면 구성요소 전반에 걸친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가장 바람직한 기본체제가 확정됐다. 11월 22일 혁신속간 39주년 기념 특집호 가운데 8페이지가 CTS로 제작됐다. 그날 아침 반응은 대단했다. “정말 CTS로 만들었느냐”는 것이 관심있는 독자와 신문인들의 공통된 질문이었다.

●100년 신문사 첫 시도…'가로쓰기' 적용

10개월에 가까운 준비 끝에 1985년 6월 22일자로 '스포츠서울' 창간호가 세상에 나왔다. 창간호는 고정 12면, 특집 12면을 합해 모두 24면이었다. 그중 14개면은 컬러, 10개면은 단색이었다. 창간호는 지금까지 우리신문에서 볼 수 없었던 여러 가지 혁신적 체제와 내용을 갖추고 있었다.

컬러로 인쇄된 1면의 머리기사는 박종환 축구감독이 프로팀으로 간다는 특종기사였다. 이같은 편집은 창간사나 기획기사가 1면 머리를 장식할 것이라는 독자의 상상을 뛰어넘는 놀라운 편집이었다. 3호부터는 '프로야구 스코어'를 안내하는, 당시로서는 최첨단 방식을 채택했다.

그리고 한국 신문사 100년 역사상 처음으로 '가로쓰기'를 도입했다. 한글 전용 신문으로 젊은층의 관심이 집중됐다. 이 모든 것이 전면 전산제작이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스포츠서울 창간호는 70만부라는 엄청난 양을 인쇄했으나, 직접 구매하러 본사로 찾아오는 독자까지 쇄도해 30분 만에 동나는 진기록을 세웠다.

5.4. 민주화 이후 현황[편집]


서울신문은 1990년대 무한경쟁 시대를 맞아 편집∙제작 시스템 전반에 걸친 기술혁신과 시설확충을 통해 나름대로 경쟁력을 배가하는 데 힘썼다. 그 일환으로 91년 7월 구로동 제2공장을 준공한데 이어 양평동 별관에 실크스크린 인쇄기를 도입함으로써 폭주하는 인쇄물량을 감당토록했다. 1992년 5월에는 대구공장이 가동돼 서울과 대구에서 동시에 서울신문이 인쇄되는 전국 동시 발매 시대의 첫발을 내디뎠다.

1990년 7월에 여성월간지 '퀸'이 창간됐고, 1991년 12월 31일 시대 환경 변화에 따라 '선데이서울'이 지령 1192호로 휴간하는 대신 새 뉴스인물 주간지 '피플'을 창간했다. 정통문예지 '계간문예'도 1991년 겨울호로 창간호를 냈다.

●원고지를 버리다…전면 기자 입력 시대

1993년 6월 1일, 서울신문은 드디어 전면적인 기자 입력 시대를 공식 선언한다. 서울신문∙스포츠서울∙TV가이드∙뉴스피플 등 모든 매체의 기사작성 및 송고를 컴퓨터로 처리한다는 방침을 공식화한 것이다. 기자입력을 본격 추진한 지 3년만의 쾌거였다. 이로써 원고지와 펜은 3개 편집국을 위시한 기사출고 부서에서 영원히 자취를 감추게 됐다.

대신 그 차리를 차지한 것은 컴퓨터였다. 1992년 말부터 다량의 PC를 보급해 왔던 서울신문은 이 무렵 사실상 '1기자 1PC'를 현실화하는 데 성공했다. 그래서 3개 편집국의 원고마감을 앞둔 시간엔 너나 할 것 없이 분주하게 컴퓨터 자판 두드리는 모습이 낯설지 않은 풍속도로 자리잡게 됐다. 1995년 당시 3개 편집국에 지급된 기사입력용 데스크톱 PC는 361대, 노트북 PC는 123대였다.

인터넷 뉴스서비스인 '서울신문∙스포츠서울뉴스넷'은 1995년 11월 22일 개통됐다. 10년 전 국내 최초로 CTS를 도입해 성가를 높인 서울신문이 또 하나의 첨단 정보혁명을 실현한 셈이었다. 전자신문의 일종인 '뉴스넷'은 서울신문사가 발행하는 모든 매체의 정보를 컴퓨터망을 통해 독자들에게 전달하는시스템이다. 차세대미디어의 대표주자라 할 인터넷 서비스는 서울신문뿐만 아니라 국내 유수 언론사들도 그동안 개발에 박차를 가해왔던 사업이었다.

●차세대 미디어 선두 주자 '인터넷 서비스'

뉴스넷 개통에 맞춰 이를 전담할 뉴스넷부도 신설됐다. 또 24시간 뉴스넷 서비스체제를 위해 무정전 전기시설 및 컴퓨터 등이 확보된 별도 공간도 마련했다. 서울신문∙스포츠서울 뉴스넷은 네티즌의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초기부터 하루 접속이 15만여건을 넘더니 한달이 지날 즈음엔 하루 20만건에 이르렀다. 뉴스넷 이용자는 젊은층이 압도적이어서 차세대 미디어의 선두주자임을 실감케 했다.

2018년 7월부터는 토요일자 신문을 발행하지 않는다. 주52시간 노동시간 단축에 대응하기 위해 국내 종합일간지 중 최초로 주 5일 발행을 하게 됐다. 2022년에는 디지털 중심 조직개편을 위해 편집부문을 '콘텐츠본부'로 확대 개편한 뒤 기존 편집국과 더불어 신문국, 뉴미디어국을 새로 만들었다.

5.5. 호반그룹의 인수[편집]


2019년 6월 포스코의 지분전량(19.4%)을 호반그룹이 매입했다.

2020년 들어 정부에서 YTN과 서울신문의 지분 매각을 검토하자 서울신문 우리사주조합은 기재부 주식을 인수해 독립언론으로 거듭나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우리사주조합은 기재부 주식을 인수할 수 있는 자금이 없었고, 수백억원에 달하는 인수자금을 사원들이 대출 받고 10년간 원리금을 상환하겠다는 인수 계획을 발표, 투표에 부쳤으나 부결되고 만다. 이에 호반그룹은 우리사주조합에 지분인수 의사를 타진했고, 우리사주조합은 이를 총회에 부의, 투표로 조합원 총의를 모아 우리사주조합 지분을 호반그룹에 매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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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반그룹 호반파크

2021년 10월 8일 호반그룹이 서울신문을 인수하기로 최종 확정됐다. 호반그룹은 서울신문 우리사주조합 지분 29%를 추가 인수해 최대주주에 오르게 된다. 호반그룹은 서울미디어홀딩스를 설립해 서울신문, 전자신문, EBN 3사를 토대로 종합미디어그룹으로 거듭났다. 서울신문은 2024년 창간 120주년을 맞는다.

최우수 교정공무원을 뽑는 교정대상과 우수 청년농민을 뽑는 농어촌청소년대상을 1981년부터 시상해오고 있으며, 1959년부터 2003년까지 패왕전이라는 프로바둑기전을 개최한 바 있었다. 2022년에는 패왕전을 여자 세계대회로 부활시킨 세계 여자 바둑 패왕전을 창설했다. 2002년부터 서울 상암에서 '서울신문 마라톤(구 서울신문 하프마라톤)'을 매년 개최중이다.

6. 관련 문서[편집]




7. 관련 문헌[편집]




8. 역대 임원[편집]



8.1. 명예사장[편집]




8.2. 회장[편집]


이승만 정권기 시절에는 공보실장이 회장직을 겸하였다.

  • 이철원 (1952~1953)
  • 갈홍기 (1953~1956)
  • 오재경 (1956~1959)
  • 전성천 (1959~1960)
  • 최치환 (1960, 불취임)
  • 이관구 (1960~1963)
  • 김상열[5] (2021~ )


8.3. 부회장[편집]


  • 조억헌 (2022~ )

8.4. 대표이사 사장[편집]


대한매일신보와 매일신보 시절 사장 목록은 해당 항목 참조. 11~19대까지는 한국신문협회 회장을 자동 겸임하였다.

  • 초대 오세창 (1945)
  • 2대 하경덕 (1945~1949)
  • 3대 박종화 (1949~1954)
  • 4대 정등운 (1954~1956)
  • 5대 장기봉[6] (1956)
  • 6대 김형근[7] (1956~1958)
  • 7대 김법린 (1958~1959)
  • 8대 손도심 (1959~1960)
  • 최정우 (1960, 불취임)
  • 9대 오종식 (1960~1962)
  • 10대 양순직 (1962~1963)
  • 사장대행 김창엽 (1963~1964)
  • 사장대행 이상조 (1964)
  • 11대 김여원[8] (1964~1965)
  • 12대 장태화[9] (1965~1972)
  • 13대 신범식 (1972~1974)
  • 14대 김종규[10] (1974~1980)
  • 15대 문태갑 (1980~1984)
  • 16대 이우세[11] (1984~1986)
  • 17대 이진희 (1986~1987)
  • 18대 이광표 (1987~1988)
  • 19대 서기원 (1988~1990)[12]
  • 20대 신우식 (1990~1992)
  • 21대 윤형섭 (1992~1993)
  • 22대 이한수 (1993~1995)
  • 23대 손주환 (1995~1998)
  • 사장대행 김문진 (1998)
  • 24대 차일석[13] (1998~2001)
  • 25대 전만길 (2001~2002)
  • 26대 유승삼[14] (2002~2003)
  • 27대 채수삼[15] (2003~2006)
  • 28대 노진환 (2006~2009)
  • 29대 이동화 (2009~2012)
  • 30대 이철휘 (2012~2015)
  • 31대 김영만 (2015~2018)
  • 32대 고광헌[16] (2018 ~ 2021)
  • 33대 곽태헌 (2021.10 ~ 현재)

8.5. 부사장[편집]


  • 하경덕 (1945~1946)
  • 홍천 (1961)
  • 김창엽 (1963~1964)
  • 이상조 (1964~1965)
  • 윤흥렬[17] (1999~2002)
  • 김행수 (2002~2003)
  • 안용수 (2015/2018)
  • 윤여권 (2015~2018)


8.6. 콘텐츠본부장[편집]


  • 이종락 (2022~, 상무)

9. 주요 간부[편집]



9.1. 주필[편집]


  • 이관구 (1945~1946/1946~1947)
  • 홍기문 (1946)
  • 김무상 (1947)
  • 이건혁 (1948~1949)
  • 오종식 (1949~1952)
  • 정인봉 (1954~1956)
  • 전홍진 (1956~1958)
  • 김영진 (1958~1960)
  • 주원 (1964~1966)
  • 이종극 (1966~1973)
  • 한태연 (1973)
  • 남재희 (1977~1978)
  • 이진희 (1979~1980)
  • 주영관 (1980~1982)
  • 이우세 (1982~1984)
  • 이한수 (1987~1988)
  • 이동화 (1993~1996)
  • 김삼웅 (1998~2002)
  • 임영숙 (2003~2005)
  • 박재범 (2009~2012)
  • 이경형 (2015~2018)


9.2. 논설주간[편집]


  • 이한수 (1986~1987)
  • 이정연 (1991~1992)
  • 이재근 (1992~1992)
  • 김호준 (1997~1998)
  • 임춘웅 (1998~1999)
  • 우홍제 (1999~2000)
  • 손성진 (2017~2018)


9.3. 논설위원실장[편집]


  • 이정연 (1988~1989)
  • 박화진 (1993~1996)
  • 김호준 (1996~1997)
  • 우홍제 (1997~1999)
  • 임영숙 (2000~2001)
  • 이경형 (2001~2003)
  • 최홍운 (2003~2004)
  • 김영만 (2004~2005)
  • 신연숙 (2005~2006)
  • 염주영 (2006~2008)
  • 최태환 (2008~2009)
  • 박재범 (2009)
  • 이목희 (2009~2010)
  • 구본영 (2010/2012~2014)
  • 오병남 (2010~2012)
  • 곽태헌 (2014~2015)
  • 손성진 (2015~2017)
  • 문소영 (2018~2021)
  • 황성기 (2021~2022)
  • 진경호 (2022~)

9.4. 수석논설위원[18][편집]


  • 이동구 (?~2021)
  • 진경호 (2022)
  • 안미현 (2021~)
  • 황수정 (2022~)


9.5. 논설고문[편집]


  • 주영관 (1984~1988)
  • 반영환 (1993~1996)
  • 송정숙 (1994~1997)
  • 장윤환 (1998~2002)
  • 구본영 (2014~2016)
  • 곽병찬 (2018~2021)
  • 손성진 (2018~2021)
  • 김균미[19] (2022.10~)
  • 황성기 (2022~)


9.6. 편집 책임자[편집]


  • 편집국장(취재국장)
    • 이관구 (1945~1946)
    • 홍기문 (1946)
    • 김무삼 (1946~1947)
    • 정우홍 (1947~1948)
    • 이건혁 (1948~1949)
    • 우승규 (1949~1952)
    • 최상덕 (1952)
    • 고제경 (1953~1954/1956~1960)
    • 조동훈 (1954~1955)
    • 유완희 (1955~1956)
    • 김광섭 (1960~1961)
    • 김용장 (1961~1962)
    • 김현제 (1962~1963)
    • 박창수 (1963~1964)
    • 조기홍 (1964~1965)
    • 조용중 (1965~1966)
    • 전민호 (1966~1968)
    • 이자헌 (1968~1972)
    • 남재희 (1972~1977)
    • 이우세 (1977~1981)
    • 이한수 (1982~1986)
    • 함정훈 (1986~1987)
    • 김문진 (1987~1989/1990~1991)
    • 이정연 (1989~1990)
    • 서건일 (1991~1992)
    • 최광일 (1992~1993)
    • 이동화 (1993)
    • 김호준 (1993~1996)
    • 우홍제 (1996~1997)
    • 장정행 (1997~1998)
    • 정신모 (1998)
    • 황병선 (1998~1999)
    • 이경형 (1999~2000)
    • 최홍운 (2000~2002)
    • 김영만 (2002~2004)
    • 최태환 (2004~2006)
    • 강석진 (2006~2008)
    • 오병남 (2008~2010)
    • 이목희 (2010~2012)
    • 손성진 (2012~2013)
    • 곽태헌 (2013~2014)
    • 오승호 (2014~2016)
    • 김균미 (2016~2017)
    • 박홍기 (2017~2018)
    • 박찬구 (2018~2019)
    • 안미현 (2019~2021)
    • 황수정 (2021~2022)
    • 이지운 (2022~)

  • 신문국장
    • 김은정 (2022~)

  • 뉴미디어국장
    • 김태균 (2022~)

9.7. 편집위원실장[편집]


  • 임동수 (1982~1984)

[1] 호반건설 창업주이자 초대 회장 [2] 의결권 기준으로는 지분률이 53.4%로써, 단독 최대주주이자 지배주주이다.[A] A B 2023년 5월 14일 기준[3] 2명이 공동으로 하고 있다.[4] 서울미디어홀딩스는 호반건설이 서울신문 인수를 위해 지분 100%를 출자하여 설립한 자회사이다.[5] 호반건설 창업주이자 호반건설 초대 회장[6] 1980년에 언론통폐합으로 사라진 신아일보의 창업주이기도 했다.[7] 1957년에 생긴 한국일간신문발행인협회 초대회장도 겸임.[8] 전 민주공화당 중앙상무위원.[9] 전 중앙정보부장 고문, 민주공화당 의장고문.[10] 전 한국일보 사장.[11] 대구일보 및 조선일보 출신. 이후 한국언론회관 및 한국언론인금고 이사장 역임.[12] 서울신문 사장을 역임한 직후 바로 한국방송공사 사장으로 임명되어 영전하였고, 당시 KBS 노동조합이 낙하산 사장이라며 반대해 1990년 KBS 사태를 야기했다.[13] 전 국민일보 사장.[14] 본사 최초의 민선(공모제) 사장. 중앙일보 논설고문 역임.[15] 전 금강기획 사장, 그레이프커뮤니케이션즈 회장.[16]한겨레 사장.[17] TV광고 감독 출신.[18] 2명이 공동으로 하고 있다.[19] 이전에 바로 편집인을 지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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