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주 대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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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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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서주대학살은 조조의 서주 침공 당시 조조가 했던 학살이다.

한국, 일본, 중국의 『삼국지』 팬덤에서는 주로 서주 대학살이라고 부르나[1] 역사학자들이 공식적으로 쓰는 용어는 아니다.

2. 특징[편집]


1차 침공 당시 조조는 도겸의 관할지인 서주에 쳐들어갔지만 이기지 못했고, 서주의 백성들을 학살하며 돌아간다.

삼국지에서 이 정도의 학살은 유례가 없고, 지휘관인 조조의 용인 또는 주도가 있었거나 조조군이 지휘관의 명령이 안먹힐 정도로 군기가 안잡혀있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삼국지》에서 조조에 대해서 매우 호의적으로 평가한 진수마저 서주 대학살은 살육이란 단어로 묘사했다.

강발상(康發祥)이 이르길 승조(진수의 자字)의 <위지>에선 늘 회호(回護)함이 많았는데, 여기선 학살함이 많았다고 말하며, 직필(直筆)했다. 사실 이마저도 상당히 왜곡, 축소된 기록으로, 진수는 동탁의 양성 학살은 강하게 비난한 반면 조조의 서주 학살은 동탁의 경우보다 규모도 더 크고 노약자 가릴 거 없이 학살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냥 '잔륙' 한 단어로만 표현하며 이중잣대를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중국의 전통인 춘추필법 관점에서 보면 이는 문제가 없다. 춘추필법은 자국의 잘못은 최대한 감추는 경향이 있고 삼국지에서 자국은 조조와 위나라이기 때문에 남인 동탁의 학살은 대놓고 적은 반면 무제기의 주인공인 조조의 잘못을 최대한 감춘 것이다.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고 살육 한 단어로 후대에 사실을 알린 것으로 볼 수 있다.

2차 침공 때 다시 대규모 학살이 있었다. '백성의 시체로 강이 메워졌다'고 기록되었고, 진수 역시 백성을 잔륙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때 도륙된 사람들은 서주 토박이 외에 전란을 피하여 관중에서 이주해 온 피난민들도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조는 이때를 비롯해서 이후에도 몇 차례 저지른 학살에 대해 죄책감이나 후회가 전혀 없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위서》에서 조조가 임종을 맞이할 때 완성에서 조앙을 잃고, 정씨와 이혼하게 된 것[2]은 평생의 한으로 남았지만, 그 외에는 후회스러운 건 없다고 말했다. 이를 토대로 조조가 백성을 학살한 것을 후회하지 않았다고 짐작할 수 있다.

이때 조조는 아버지 뿐만 아니라 친동생과 기타 일족들을 모두 잃었다고 한다. 조씨 일가를 핵심 군부로 기용했던 그에게 일족의 몰살은 커다란 인적 손실이었고, 그에 대한 분노가 있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정사 삼국지》에서 민간인 약탈, 학살 및 포로 학살과 연관성이 전혀 없는 군벌은 거의 적은 편이며, 그 드문 예가 바로 유우오두미도의 장로 세력이다.

유비는 가는 곳마다 객장으로나마 대우 받았던 것 또한 그가 거느린 세력이나 유비 본인이 황제의 밀명을 받은 명분 덩어리였기 때문도 있지만, 백성들을 학살하지 않은 점도 한 몫 했다.

오두미도의 장로는 관리를 두지 않고, 오두미도 제자와 신도에게 행정과 사법권을 맡겼으며, 병자에게 자기 과실을 나누어 주거나 의사(義舍)를 설치해 쌀과 고기를 공짜로 의사 안에 두어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배불리 먹게 했다. 장로는 조조가 한중을 공격했을 때 파중으로 도주했는데, 측근들이 창고와 재화들을 불태울 것을 간언했으나 장로는 '보화와 창고는 국가의 소유다.'라고 해서 창고에 봉해놓고 떠나, 훗날 조조는 장로가 창고를 불태우지 않은 것을 높이 평가해 열후에 봉한 적이 있었다.


3. 학살의 이유[편집]


정사 삼국지》에 나오는 조조는 성격이 매우 감정적인 사람이었다. 친구인 원소가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비인간적인 만행들을 눈에 안 띄게 자행했다면, 조조는 자신의 감정에 매우 솔직했었던 것이다. 대표적인 예시가 '아들을 낳으려면 손중모 같은 자를 낳아야 한다.'라고 말한 것인데, 그 이후에 아차했는지 '원본초, 유경승의 아들들은 개돼지와 같구나'라고 덧붙였다. 덧붙이긴 했어도 당시 후계분쟁을 벌이고 있던 본인의 자식들인 조비, 조식을 저격한 발언인 것이 거의 확실한 상황이다. 이 외에도 호관에서 농성 중인 고간군이 항복하지 않자 모조리 파묻어버리겠다고 말했다가 조인의 충고를 듣고 철회하는 것처럼 조조는 몇몇 미디어에 나오는 모습처럼 냉혈한이라기보다는 본인의 감정에 솔직한 다혈질에 더 가까웠다.

그 때문에 아버지의 죽음에 분노해서 도겸을 없애려고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자 분풀이로 서주 사람들을 죽였다는 의견이 일반적이다.

"…조조의 속좁은 복수심이 (연주 소실의) 결정적인 원인이라고 볼 수 있다. 도겸을 향한 복수는 수많은 무고한 백성들에게까지 화를 미쳤다. 조조는 이러한 사태를 수습하기는커녕 더욱 번져가도록 내버려두었으며 이는 백성들에게 범죄행위를 저지른 것과 마찬가지다… (중략) 도겸에게 복수하겠다는 것에만 눈이 멀어서 자신의 기반을 닦는 것과 동시에 민심을 달래고 또 얻어야한다는 중요한 사실을 도외시한 것이다. 이는 정치적으로 큰 실책을 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중국의 사학자 장야신



4. 당시의 여론[편집]


역사상 잔혹한 일들이 끝도 없이 벌어진 고대 중국에서도 학살자를 좋게 보지는 않았다.

조조를 호의적으로 평가했다고 평가받는 진수는 『삼국지』 「무제기」에서 서주 학살에 대해서는 '잔륙(殘戮, 학살했다)'이라고 기술했는데, 《정사 삼국지》에서 저런 식으로 학살을 표현한 건 이게 유일하다.[3]

유송 시대의 인물인 배송지는 '남녀 수만 명을 사수에서 갱살(坑殺, 구덩이에 넣고 파묻어 죽임)하니 이 때문에 강물이 흐르지 못했다.', '모두 도륙하니, 닭이나 개조차 다 없어지고 폐허가 된 읍에는 다시는 행인을 볼 수 없을 정도였다.'[4], '죄 지은 도겸 때문에 그 속부(屬部)를 잔멸시킨 것은 잘못이다.'[5]라는 다른 사서 혹은 역사가의 평을 주석으로 인용했다.

후한서』의 저자인 유송의 범엽은 이 사건에 대해 '죽은 자가 수십만 명에 달하였다'라고, 그 규모가 어느 정도였는지 기술하고 있다.[6]

진림을 비롯한 당대 귀족들은 백성 학살보다는 명사를 죽이는 것에 더 큰 영향을 받았으나, 이건 지배층의 입장이고 백성들 입장에서는 무고한 자신들을 죽이는 것보다 두렵고 잔학한 일은 없었다.

문제는 《격주군문》에는 나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사실 관계만 놓고 본다면 원소는 조조의 도겸 공격을 도왔으나 그 내용은 빠져있고, 오히려 조조가 도겸에게 패했다고 써져 있다. 자신과 서주 학살은 연관이 없으며, 서주 학살 자체를 빼놓은 채 도겸에게도 지고 여포에게도 져서 변방을 전전했다고 쓴 것이다. 이를 근거로 서주 학살 자체가 없었던 일이라 주장하는 인물도 있다.

하지만 《격주군문》이라고 조조의 악행이 싸그리 다 나오는 것은 아니다. 『후한서』 「효헌제기」에서는 조조가 '협천자'를 한 후 누구를 죽였네 하는 내용도 나오고, 동승도 조조에게 주살당했는데 《격주군문》에는 언급이 없다. 결국 《격주군문》이라는 것은 조조 편, 혹은 중립 세력을 원소편으로 합류하게 만드려는 언론플레이이며, 언급이 안 되었다고 하여 없는 사건 혹은 심하지 않은 사건이라 치부할 수는 없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조조가 서주에서 큰 규모의 학살을 저질렀다는 것이 다른 군웅들을 원소편으로 끌어들이는데 유용한 언플은 아니라는 것이다.

게다가 《격주군문》에 직접적으로 나오지 않았다 뿐이지, 조조의 반대편에 선 이들은 조조의 정복 행위로 인한 잔학함을 명백히 고발하고 있다.

진림: '스스로 삼공(三公)의 관직을 차지하였으나 그 행위가 걸왕(桀王)과 도적의 모습이며, 나라를 더럽히고 백성들을 학대하였으며 사람과 귀신에게까지 그 독이 풀어졌다. 더욱이 그 천박한 정치는 가혹하고 참혹하였으며, 금령이 잇따라 갖추어져, 주살처럼 좁은 길을 채웠고 함정 구덩이가 길을 막아, 손을 들어 그물에서 빠져나가고자 하나 발을 딛는 곳마다 덫과 함정을 밟게 되어, 이에 연주와 예주에 걸려들지 않는 자가 없었으니, 도성 또한 탄식하는 원망이 있었다.'

유비: '(조조는) 천하를 찢고 어지럽히며 백성과 만물을 잔인하게 훼손했습니다'(한중왕표)

손권: '조조의 행위는 살육과 정벌이 지나쳐'(제갈근전)


다만 이는 조조의 행위가 전반적으로 잔혹했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지 서주에서 자행한 학살만을 지적하는 발언은 아니다. 이를 근거로 조조가 전반적으로 잔혹했던 것이 영향이 컸다고 주장한다면 몰라도 서주대학살의 영향이 컸다고 주장하는 것은 근거가 빈약하다. 또한 조조가 잔인했다고 주장하는 것을 넘어서 이러한 잔인함 때문에 통일할 수 있었던 것을 실패했다, 위나라가 단명했다 이런식으로 주장하는 사람들도 간혹 존재하는데, 조조가 잔인했던 것과 그것이 백성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는 또 다시 살펴봐야 할 문제이다. 그리고 조조가 백성들로부터 평판이 좋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것이 학살, 특히 서주에서 벌인 학살 때문인지는 역시 살펴봐야 할 문제이다.

'난세에는 다들 비슷한 짓을 했다'는 것으로 나아가는 주장이 있다. 몇몇 군벌들을 제외하고 대부분 군벌들은 민가에 대한 약탈을 자행한 기록은 발견되며, 이들도 다른 자들을 비난할 처지가 아니기는 하다. 하지만 약탈과 군 단위로 이루어진 대규모 학살극은 엄연히 다르고, 당연히 더욱 끔찍한 범죄다. 게다가 조조는 남녀 수만 명를 도륙하여 사수(泗水)가 막혀 물이 흐르지 않을 지경이었고,[7] 군량 부족으로 돌아가며 하구, 수릉 등 5개 현을 도륙해 닭, 개마저 모조리 죽이고 행인의 흔적조차 찾아보기 힘든 지경이었다. 이런 규모의 대학살은 그 당시 시대는 물론이고 중국사 전체를 살펴도 비슷한 사례를 찾아보기 힘들다. 간혹 단순한 약탈 수준의 사건이나 마을 몇 개 불태운 것을 가지고 피장파장의 논리를 들이대어 흔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지만, 전투 병력이 아닌 무고한 시민 학살한 사례는 그 예를 찾기 매우 힘들다. 실제로 흔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그래서 그 사례가 어떤 게 있느냐?" 라고 물어보면 앞서 말한 피장파장의 논리에 기대어 퉁치는 수준을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아래 글은 《삼국지》에서 군벌들이 백성들을 괴롭힌 기록들을 모아본 것이나, 그 어느 것도 서주 대학살의 규모 그리고 민간인 학살에는 비할 바가 못 된다.

  • 공손찬은 이민족에게만 강경했던 게 아니라 백성들에게도 가혹해 민심을 잃었다.
  • 원소는 '십상시 탄핵을 위해 관군을 흑산적으로 위장해 멀쩡한 마을을 불태우고 계엄령을 내린다. 십상시들을 죽인 뒤 낙양에 소집된 군대와 중앙군을 합쳐 흑산적을 토벌해 진상을 숨긴다'라는 계책을 하진에게 제의했고 하진은 실행했다. 또한 흑산적을 도륙하기도 했다.
  • 원술은 본인이 지배하는 지역의 백성들이 흉년과 기근으로 고통받는 와중에도 백성들을 돌보지 않고 쓸데없이 사치와 학정을 일삼아서 민심을 잃었다. 게다가 손견과 손책을 시켜 이곳저곳을 공격하기도 했는데 유표와 육강이 그 예시이고, 이 외에도 서주를 차지한 유비, 여포를 공격하기도 했다.
  • 동탁은 집권 기간 내내 폭정을 일삼으며 낙양을 황폐화시킨 건 이미 유명하고, 그 사후 장안을 차지한 이각곽사에 의해 그 일대가 쑥대밭이 되었다. 자세한 건 삼보의 난을 참조.
  • 여포는 권력 욕심 때문에 상관인 정원을 배신하여 죽이고 동탁 밑으로 들어간 뒤 동탁의 폭정에 협력했다. 이후 동탁과 사이가 틀어져서 동탁을 배신하고 죽인 뒤 이각곽사에게 패배한 후 장안에서 빠져나온 뒤 원소 밑으로 들어가고 기주에서 약탈을 일삼다가 원소에게 찍혀서 기주에서 도망친다. 이후 유비 밑으로 들어갔다가 유비를 배신하고 서주를 빼앗은 뒤 백성들을 약탈했다.
  • 도겸궐선과 손잡고 약탈을 일삼다가 그를 배신하고 죽였다.
  • 손견은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덮어줄 유력자인 원술의 비호를 받기 위해서 원술의 명령을 받아서 남양 태수 장자를 죽이고 민가에 대한 약탈을 자행했다고 한다. 손책은 동야를 도륙한 전적이 있다. 손권의 경우 환현을 점령하고 도륙한 적이 있으며, 황조를 공격하며 하구를 도륙한 사례가 있다.
  • 사마의공손연의 난 중 요동의 남성 7,000명을 죽이고 그 인골로 전승 기념비인 경관을 만들었다.

이러한 사례들은 조조의 학살과는 결이 다르거나 규모가 훨씬 작다. 위 사례들은 특정한 도시, 요새나 전투병력을 도륙한 사례, 혹은 백성들에게 가혹하게 굴고 수탈하는 행위이다. 조조처럼 짧은 시간에 점령한 여러 현들을 모조리 도륙해버리고 가축조차 남기지 않은 사례는 찾기 힘들다.

사마의는 숫자로만 봐도 비교가 안되며, 군으로 징발될 수 있는 남성만 죽였다.[8] 물론 저들이 잘못이 없다는 것이 아니지만 서주 대학살은 규모가 훨씬 컸다는 것이다.

다만 서진 말기의 혼란기에 석륵이 낙양을 빠져나가는 민간인을 포함한 10만명을 전부 죽인 사례가 존재한다.

결과적으로 조조가 서주를 침공하며 벌인 학살은 다른 학살들과는 규모가 달랐다. 지식인들이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고 민중들에게도 똑같이 인식되었다고 단정짓기는 어려운 것이다.

정사 삼국지》가 위진정통론에 입각하여 서술되었다고 본다면, 위의 뒤를 이었음을 자처하는 서진이 조조를 띄워주며 조조의 악행을 최대한 숨겼다고 볼 수 있다. 삼국지에서는 조조의 패전을 두루뭉실하게 넘어간 몇몇 사례가 존재하며,[9] 당장 같은 학살을 두고도 동탁이 영천의 백성들을 학살해 남자는 도적이라며 죽이고 여자는 비첩으로 만들었을 때 동탁은 흉역하기 그지없었다고 《정사 삼국지》는 기록한다. 그런데 똑같이 조조가 서주에서 백성들을 상대로 학살을 저지를 때, 진수는 같은 《삼국지》에서 단지 잔멸했다는 단어만 사용했을 뿐, 조조를 흉악하다고 하지 않았다.[10]


5. 민심에 대한 영향[편집]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역사적으로 조조에 대한 민심은 나쁜 편이었다. 우선 위진남북조 당대에는, 조조에 대한 민심이 나빴다고 볼 근거는 충분하지 않다. 하지만 손권, 장제[11] 등 삼국지 인물들의 언급을 통해 좋은 편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굳이 저들의 언급이 없었더라도 둔전제, 강제이주 같은 정책 때문에 조조는 기본적으로 민심이 좋기 힘들었다. 민간문화가 본격적으로 발달한 북송 이후로 민간에서 조조의 이미지는 좋았던 적이 없었다.

조조의 이미지가 나빠진 것이 나관중의 영향이라는 설, 성리학의 영향이라는 설, 금나라에 의해 남쪽으로 밀려난 남송에서 유비에게 동질감을 느꼈다는 설 등이 있으나 이는 조조의 이미지가 더욱 악화된 것에 대한 설이지 근본적으로 왜 조조의 이미지가 나빠졌는지는 설명할 수 없으며, 성리학, 남송의 설은 민간보다는 식자층에서 조조의 이미지가 나빠진 이유에 더 가깝다. 특히 북송 시대의 인물인 소동파도 이미 민가에서는 유비를 좋아하고 조조를 싫어하였다고 전하기 때문에 조조의 이미지가 나관중의 영향, 성리학의 영향으로 악화되었다 하더라도 그 이전부터 좋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민가의 아이들은 어려서부터 집안이 아주 가난하더라도 조금씩 돈을 모아 옛날 이야기를 들으러 간다. 삼국에 관한 이야기가 시작되어 유현덕이 패하여 어려움에 처하면 눈물을 흘리다가, 조조가 패하는 이야기가 시작되면 만인이 아주 즐거워한다. 이로써 군자와 소인의 영향은 백 대를 지나도 끊어지지 않음을 알 수 있다(塗巷中小兒薄劣,其家所厭苦,輒與錢,令聚坐聽說古話。至說三國事,聞劉玄德敗,顰蹙有出涕者;聞曹操敗,即喜唱快。以是知君子小人之澤,百世不斬。).

소동파(蘇東坡)의 지림(志林) 권1, 도항소아청설삼국어(塗巷小兒聽說三國語)에서


또한 남조 유송에서 편찬된 《세설신어》 같은 문헌을 통해 조조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가 존재한다. 이 책은 5세기에 편찬되었기 때문에 남북조시대의 민심을 확인하기에는 소식의 지림보다 훨씬 적합하다.

《세설신어》는 단순한 소설집이나 루머 모음집이지만, 당대 사람들이 특정 인물에 대하여 어떤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는지를 추측하는 데 이용되는 귀중한 사료이므로, 남북조시대 사람이 조조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알 수 있다는 데 큰 의의가 있다. 세설신어는 후대에 소설가(小說家) 서적으로 분류되었다. 기본적으로 소설가는 길거리나 마을에서 떠도는 이야기를 수집하던 자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비록 수집한 자들이 지배층이긴 하나 민중의 생각을 어느정도 담고있다고 봐야한다.

그렇다고 위진시대, 그리고 남북조시대에 민간에서 조조의 이미지가 나빴다고 속단하기는 힘들다. 먼저 소동파는 11세기의 인물로 태어난 시점이 조조가 사망한 220년과 800년 이상 떨어져 있는 인물이다. 800년 이후 민간의 여론을 가지고 그 이전에도 조조의 이미지가 나빴다고 소급적용하는 것은 억측이다. 그렇다면 중요해지는 것은 세설신어이다. 세설신어에서도 민중들이 조조를 싫어하는 장면이 나오면 소식이 묘사한 것처럼 민중에서 조조를 미워하는 행동이 그 이전부터 지속되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다음은 조조가 등장하는 세설신어의 일화들이다.

禰衡被魏武謫為鼓吏,正月半試鼓。衡揚枹為漁陽摻檛,淵淵有金石聲,四坐為之改容。孔融曰:「禰衡罪同胥靡,不能發明王之夢。」魏武慚而赦之。

「언어편」 中


南陽宗世林,魏武同時,而甚薄其為人,不與之交。及魏武作司空,總朝政,從容問宗曰:「可以交未?」答曰:「松柏之志猶存。」世林既以忤旨見疏,位不配德。文帝兄弟每造其門,皆獨拜床下,其見禮如此。

「방정편」 中


小庾在荊州,公朝大會,問諸僚佐曰:「我欲為漢高、魏武何如?」一坐莫答,長史江虨曰:「願明公為桓、文之事,不願作漢高、魏武也。」

「규잠편」 中


楊德祖為魏武主簿,時作相國門,始搆榱桷,魏武自出看,使人題門作「活」字,便去。楊見,即令壞之。既竟,曰:「門中『活』,『闊』字。王正嫌門大也。」

「첩오편」 中


人餉魏武一桮酪,魏武噉少許,蓋頭上題「合」字以示眾。眾莫能解。次至楊脩,脩便噉,曰:「公教人噉一口也,復何疑?」

「첩오편」 中


魏武嘗過曹娥碑下,楊脩從,碑背上見題作「黃絹幼婦,外孫虀臼」八字。魏武謂脩曰:「解不?」答曰:「解。」魏武曰:「卿未可言,待我思之。」行三十里,魏武乃曰:「吾已得。」令脩別記所知。脩曰:「黃絹,色絲也,於字為絕。幼婦,少女也,於字為妙。外孫,女子也,於字為好。虀臼,受辛也,於字為辭。所謂『絕妙好辭』也。」魏武亦記之,與脩同,乃歎曰:「我才不及卿,乃覺三十里。」

「첩오편」 中


魏武征袁本初,治裝,餘有數十斛竹片,咸長數寸,眾云並不堪用,正令燒除。太祖思所以用之,謂可為竹椑楯,而未顯其言。馳使問主簿楊德祖。應聲答之,與帝心同。眾伏其辯悟。

「첩오편」 中


何晏七歲,明惠若神,魏武奇愛之。因晏在宮內,欲以為子。晏乃畫地令方,自處其中。人問其故,答曰:「何氏之廬也。」魏武知之,即遣還。

「숙혜편」 中


魏武將見匈奴使,自以形陋,不足雄遠國,使崔季珪代,帝自捉刀立床頭。既畢,令間諜問曰:「魏王何如?」匈奴使答曰:「魏王雅望非常,然床頭捉刀人,此乃英雄也。」魏武聞之,追殺此使。

「용지편」 中


魏武帝崩,文帝悉取武帝宮人自侍。及帝病困,卞后出看疾。太后入戶,見直侍並是昔日所愛幸者。太后問:「何時來邪?」云:「正伏魄時過。」因不復前而歎曰:「狗鼠不食汝餘,死故應爾!」至山陵,亦竟不臨。

「현원편」 中


桓公入洛,過淮、泗,踐北境,與諸僚屬登平乘樓,眺矚中原,慨然曰:「遂使神州陸沈,百年丘墟,王夷甫諸人,不得不任其責!」袁虎率而對曰:「運自有廢興,豈必諸人之過?」桓公懍然作色,顧謂四坐曰:「諸君頗聞劉景升不?有大牛重千斤,噉芻豆十倍於常牛,負重致遠,曾不若一羸牸。魏武入荊州,烹以饗士卒,于時莫不稱快。」意以況袁。四坐既駭,袁亦失色。

「경저편」 中


魏武少時,嘗與袁紹好為游俠,觀人新婚,因潛入主人園中,夜叫呼云:「有偷兒賊!」青廬中人皆出觀,魏武乃入,抽刃劫新婦與紹還出,失道,墜枳棘中,紹不能得動,復大叫云:「偷兒在此!」紹遑迫自擲出,遂以俱免。

「가휼편」 中


魏武行役,失汲道,軍皆渴,乃令曰:「前有大梅林,饒子,甘酸,可以解渴。」士卒聞之,口皆出水,乘此得及前源。

「가휼편」 中


魏武常言:「人欲危己,己輒心動。」因語所親小人曰:「汝懷刃密來我側,我必說心動。執汝使行刑,汝但勿言其使,無他,當厚相報!」執者信焉,不以為懼,遂斬之。此人至死不知也。左右以為實,謀逆者挫氣矣。

「가휼편」 中


魏武常云:「我眠中不可妄近,近便斫人,亦不自覺,左右宜深慎此!」後陽眠,所幸一人竊以被覆之,因便斫殺。自爾每眠,左右莫敢近者。

「가휼편」 中


袁紹年少時,曾遣人夜以劍擲魏武,少下,不箸。魏武揆之,其後來必高,因帖臥床上。劍至果高。

「가휼편」 中


魏武有一妓,聲最清高,而情性酷惡。欲殺則愛才,欲置則不堪。於是選百人一時俱教。少時,還有一人聲及之,便殺惡性者。

「분견편」 中


조조가 부정적으로 묘사된다고 볼 수 있는 일화들이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민중에서 조조를 싫어했다는 근거로 사용하기엔 부족한 일화들이다. 세설신어에 수록된 조조 관련 일화들 가운데 대표적인 일화가 '몽중살인'이다. 하지만 일화를 자세히 살펴보면 단순히 조조를 미치광이로 묘사한 것과는 궤가 다른 일화이다. 해당 일화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조조는 주변 사람들에게 '나는 자는 도중에 누가 가까이 오면 그 사람을 공격하고도 눈치채지 못하니 주변 사람들은 조심하도록 하라'라 경고를 하였고, 한번 자는 척을 하며 누가 가까이 왔을 때 그 사람을 공격해 죽이자, 그 이후로는 조조 주변 사람들 중에 조조가 잘 때 가까이 오는 사람이 없었다. 이 일화가 수록된 편의 이름이 가휼(假譎)인 점에서 알 수 있듯이, 일화의 핵심 내용은 조조의 기만적이고 속임수 많은 성격이다. 자는 도중 타인이 근접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잘 때 가까이 온 사람을 죽이는 버릇이 있다고 거짓말을 한 후, 자는 척[12]을 하다가 가까이 온 사람을 죽여서 결과적으로 사람들이 '조조는 자는 도중에 가까이 온 사람을 죽이는 버릇'이 있다고 믿게 만드는 조조의 속임수, 꾀에 대한 이야기인 것이다. 긍정적인 일화는 아니지만 민중의 부정적인 이미지가 담겨있는 일화라 보기는 어렵다.

또다른 일화로는 조조군이 행군하던 중 급수로를 찾지 못해 군사들의 갈증이 심각해지자 조조는 '저 앞에 매실숲이 있다!'라 거짓말을 했고, 그 말을 들은 조조군은 입 안에 침이 고여 갈증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는 일화가 있다. 유부녀 보쌈으로 널리 알려진 원소와의 일화에서도 원소가 구덩이에 빠지자 조조는 '범인이 여기에 있다'라 거짓말을 했고 화들짝 놀란 원소가 구덩이에서 뛰쳐 나왔기에 둘 다 무사히 도망칠 수 있었다.

위의 일화들은 '민중에서 형성된 조조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다. 세설신어의 조조에 대한 부정적인 묘사가 민중에서 형성된 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과연 이 이미지가 학살 때문에 형성되었는지 불분명하다는 문제가 있다. 둔전제, 강제이주 같은 정책이 비록 조조 세력을 탄탄히 하는 것에는 큰 도움을 주었으나 백성들의 마음을 잃기는 쉬운 정책이었다. 학살을 제외하고서도 민중들 사이에서 조조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가 형성될 사건들이 많았다는 것이다.

또한 어느 한 지역에서 민심을 잃었다고 다른 모든 지역의 민심들도 같이 이반하는 것이 아니다. 대표적인 반례가 항우이다. 항우는 신안에서 진나라 병사 20만을 갱살했고,[13] 함양을 불태우고,[14] 제나라를 공격하며 성양을 도륙하고, 팽월과 싸우며 양(梁)나라 땅을 초토화하는 등 조조에 못지않게, 어쩌면 조조를 뛰어넘을 정도의 만행을 저지르고 다녔으나, 항우의 본거지인 노(魯) 땅[15]의 백성들은 유방과 그 부하들의 군대에게 포위되고서도 항우가 의심의 여지 없이 죽었다는 것을 알기 전까지는 항복하지 않았다. 아직 6국의 정체성이 남아있어서 타국 백성들을 도륙한 것이 초나라 사람들에게는 별 영향이 없었기 때문이라 설명할 수는 있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보면, 6국의 정체성이 희미해진 이후에는 오히려 심리적인 거리가 멀어졌을 가능성도 존재한다. 예를 들어 전국시대에는 평원, 임치, 즉묵, 거 등 제나라 소속이었던 여러 지역이 모두 '제나라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으나, 제나라가 망하고 그 정체성이 사라진 후에는 동래군 사람, 성양군 사람, 평원군 사람, 제국 사람 이런 식의 정체성이 형성되었다고 해보자. 과거 제나라라는 정체성이 있었을 때는 거현, 성양군 일대가 타국의 군대에 도륙당했을 때 '타국이 제나라를 침공했다'라 인식되었겠지만, 정체성이 사라진 후에 어떤 군벌이 거현, 성양군 일대를 도륙했을 경우에 동래군, 평원군 등 옛 제나라 땅에서는 '우리 이웃인 성양군 사람들이 도륙당했다'라고 인식하게 될 것이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다른 지역의 백성들이 조조에게 학살당한 서주 백성들과 동일한 정체성을 지녔다라고 단정지을 수 없다.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조조가 민심을 잃은 이유가 서주대학살 때문이라고 단정지을 근거가 부족하다.
2. 조조가 서주에서 벌인 학살로 다른 지역 백성들의 민심을 잃었다고 볼 근거가 부족하다.
3. 학살로 전국의 민심을 잃었다 하더라도 후대 백성들이 조조를 싫어하는 것이 당대에 생긴 악감정의 연속이라 볼 근거가 부족하다.[16]

위에 정리한 세 문장은 조조가 학살로 민심을 잃지 않았다라는 말이 아니다. 다만 민심을 잃었다라고 보기에는 근거가 부족하다라는 것이다.

간혹 조조는 서주대학살 때문에 민심을 잃어 통일하지 못했으니 서주대학살은 조조 인생 최대의 실책이다라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위의 주장이 참이 되기 위해선 첫째, 조조가 통일에 실패한 이유는 민심을 잃었기 때문이고, 둘째, 조조가 민심을 잃은 이유는 서주대학살 때문이어야 한다. 허나 조조가 통일에 실패한 이유가 민심을 잃었기 때문이라는 주장부터 근거가 충분하지 못하고,[17] 앞서 언급했듯이 서주대학살 때문에 민심을 잃었는지도 근거가 충분하지 못하다. 결국 위의 주장은 근거가 불충분한 주장인 것이다.

비슷하게 위나라는 조조의 서주대학살 때문에 민심을 잃어 단명했다는 주장이 있는데, 이 역시 근거가 불충분하다. 위나라가 사마씨한테 찬탈당한 이유가 민심 때문이라 볼 근거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찬탈당한 원인이 민심을 얻지 못한 것이라면 민심을 얻었다면 찬탈당하지 않았어야 한다. 하지만 군부를 친사마씨가 차지하고 대부분의 사족들이 사마씨를 지지하는 상황에서 백성들의 지지가 정권 유지에 얼마나 큰 도움을 주었을까? 민심을 얻었다 가정하더라도 위나라의 역사 40여년은 백성들에게 황제=조씨라는 인식을 남기기에는 부족한 시간이다. 이런 상황에서 조씨 부흥 운동, 혹은 반사마씨 운동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또한 조조가 대학살로 민심을 잃지 않았다 해서 조조의 후손들이 민심을 잃지 않았다고 단정지을 수 있을까?

결국 서주대학살과 민심의 관계에 대해 분명한 것은 학살당한 사람의 부모형제친척들이 조조를 우호적으로 보지 않았을 것이고, 적어도 서주의 백성들은 조조 생전에 조조를 좋아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 뿐이다. 나머지는 현존하는 사료로는 알 수 없는 영역들이다. 애초에 고대의 민심이란 것 자체가 알기 쉬운 분야가 아니기도 하고.



6. 학살에 대한 해석[편집]


현대에 서주 대학살이란 명칭이 한국 《삼국지》 팬덤에 의해서 부각되었다고 보는 이들이 있는데 그렇지 않다. 서주 대학살이라는 명칭과 이미지는 한국 팬덤이 만든 것이 아니라 2000년에 한국에서 발간된 한 일본의 《삼국지》 인물평가 서적에서 처음으로 등장했다.[18] 그뿐이 아니라 1980년대 중국에서 발간된 진순신의 《소설 제갈공명[19]이 이미 제갈량의 인생 여정을 서주 대학살에서부터 시작하며, 1996년에 발매된 《삼국지 공명전》에서도 제갈량의 어린 시절 회상으로 서주 대학살을 보여주고 있다. 공명전이 흥했으면 서주 대학살이 20년은 일찍 유명해졌을 텐데 오히려 그 문제 많은 《이문열 평역 삼국지》가 대세가 되어 버리는 바람에, 국내 삼국지 팬덤이 2000년대까지 《정사 삼국지》는 접근할 생각도 못하고 '대체 제갈량이 뭐 때문에 조조 제끼고 유비한테 간 거지?'라며 혼돈에 빠지느라 중국이나 일본에 비해 족히 20~30년 늦은 것이다.[20] [21]

제갈량의 남하시점에 대해서 조조의 서주 침공 이전인지 이후인지에 대한 제대로된 사서상의 언급이 없어 명확하지 않으나. [22] 제갈량의 남하시점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설령 제갈량이 남하 후 대학살이 진행되었더라도 자신의 고향을 파괴한 사람에 대하여 원한을 가지게 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제갈량의 친척들인 낭야군 양도현 제갈씨 다수가 위나라에 임관한 것,[23] 왕랑, 진교, 진등 등 서주 출신 인물의 다수가 조조에게 협력한 점[24], 서주 출신은 아니지만 조조가 공격한 지역인 화현[25]이 고향인 장패 역시 조조에게 적극 협력했다는 점에서 제갈량의 고향이 조조에게 박살이 나서 제갈량이 조조에게 임관하지 않았을 가능성은 낮다.

다만 상술했듯이 서주의 대학살이 당시부터 조조의 나쁜 이미지를 만들고 쌓아나가는 데 일조하였을 가능성은 충분하지만, 생각해봐야 할 것은 인권 사상이 오늘날처럼 발달한 것이 아닌 고대에 역사가들에게는 민중에 대한 대량학살보다는 자기와 같은 신분의 귀족 유명인사를 한두 명 죽이는 것이 더 크게 악행의 이미지를 불러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진수의 《삼국지》나 《후한서》 등의 기록을 보면 서주에서의 대학살보다는 오히려 현대에는 기억하는 사람도 거의 없는 명사인 변양을 살해한 일이 크게 언급되어 있고, 진궁조조를 배신하고 여포를 끌어들인 사건에 대한 설명, 진림의 격문 등에는 서주에서의 대학살에 대한 언급이 없다. 오히려 진림의 격문에서는 백성을 탄압했다며 천명을 거스른다는 내용보다는 조조의 선대인 조등조숭을 두고 대대로 썩어빠진 가문이라며 비난하는 내용이 더 많다. #

다만 진림의 격문에 서주 대학살에 대한 언급이 없다고 중요하지 않았던 사건이라 말할 수는 없다. 위에 설명되어 있듯이 조조의 학살을 강조하면 도리어 군웅들이 조조에게 두려움을 품고 싸우려 하지 않을 수도 있는 데다가, 또한 원소는 서주 침공 당시 장수 주령을 보내 지원했으므로 이 문제에 자유롭지 않았기 때문에 언급을 피했을 가능성은 충분한 것이다. 다만 주령을 보내 지원한 것은 원소가 '조조가 차마 저런 짓을 저지를 줄은 모르고 지원한 것'이라고 말하면 되는 부분이다. 애초에 조조는 초기에 원소의 지원을 받고 성장하며 협천자까지 하는 데 성공하였는데, 조조를 지원한 문제에 대해 원소는 상술한 논리, 즉 '조조가 그럴 줄은 몰랐지'로 대응했다. 조조가 서주를 공격할 때 주령을 보내 지원한 것도 같은 논리로 '조조가 민간인 학살하라고 지원한 게 아니었는데 조조가 지 맘대로 학살했다'라 말하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다. 이를 통해서 적어도 당대 지식인들의 시점에서는 서주에서의 학살이 명사 살해보다는 다소 중요도가 낮은 사건이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이 사건이 당시에 중요도가 낮았던 사건이라는 것에 대하여 조조의 악행을 상당히 부각시킨 《삼국지연의》에서는 언급되지만 관련된 전설이나 경극 같은 것이 찾아보기 어렵다라는 걸 근거로 삼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중국 역사상 어느 학살 사건도 전설이나 경극을 찾아보기 힘든 것은 동일하다. 그렇기에 서주대학살이 당시의 민중들에게 미친 영향을 과소 평가하는 것은 엄연한 비약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경극이나 소설 등은 기본적으로 재미가 있어야 하고, 이런 작품들에서 백성만 대거 죽어난 사건이었을 뿐 전세에 영향을 미친 큰 전투가 일어나지 않은 서주 대학살을 다룰 이유가 없다. 이것이 다루어진다면 재미와 대중성 둘 다 해치는 길일 것이다. 실제로 《삼국지 평화》를 비롯해서 대다수 경극에서 서주 전투 자체가 생략된 경우가 많다. 정리하면 서주에서 일어난 학살은 당대 대다수의 지식인들에게 비판받는 행동은 맞으나, 명사들 몇 명 살해한 사건보다는 중요도가 떨어졌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현대로 오면서 판단 기준이 달라진 지식인들은 명사들의 살해보다 이 사건에 더 큰 비중을 둔다.

한편 서주 대학살이 상대의 전투 능력을 말살하기 위한 초토화 작전이라는 식의 의견도 존재하는데 대표적으로 임용한 교수가 있다. 링크. 중세 몽골의 학살이나 조선시대 여진 촌락에 대한 예방전쟁 같은 것과 비슷하게 보는 듯 하다. 한국사에서 가장 유사한 것은 전략적 목적에 의한 학살이었으나 그것이 상대의 결집을 불러와 결과적으로 패전, 무시할 수 없는 적성세력 등장이라는 결과로 나타난 고려의 여진 정벌전이라고 볼 수 있다. 정치적 목적에 의한 학살인가, 아버지를 잃고 눈에 뒤집혀서 벌인 만행인가, 둘 다인가는 알 수 없으나 임용한은 첫째가 주된 이유라고 보는 듯. 여기서 이전 시대의 전쟁에서 이런 일(집단살해)은 자주 있었다는 것이며, 임용한도 도덕적으로 옹호할 수 없으나 당시 전쟁은 그랬다라고 넘어가는 듯하다. 물론 만약 조조가 전술적인 판단하에 행했다면 르메이미군2차대전일본의 민간인들도 생산 활동으로 전쟁을 간접적으로 돕는다며, 일본 주요 도시들에 있는 민가들을 폭격했던 것과 비교할 수 있다. 다만 임용한은 학자라는 입장 때문인지는 몰라도 모든 행동에 최대한 합리적인 동기를 부여해 설명하려는 경향이 강하다는 점은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그 원균에 대해서도 나름 억울하다는 식으로 설명하는 양반이다.#

그러나 이런 '전략적 판단'은 위에서도 지적했듯이 정작 본거지인 연주의 통제도 불가능할 정도로 서주에만, 그것도 학살에만 집중했던 점에서 설득력이 떨어진다. 게다가 1차 서주 출정 당시에는 본인도 상대적으로 열세인 전력으로 승패에 대한 확신이 없어서 가족들에게 일이 잘못되면 장막에게 가서 의탁하라고 했을 정도인데, 전략적으로 사고했다면 도겸의 신병을 확보하지 못한 시점에서 학살로 시간을 보낼 게 아니라 빠르게 철수를 하고 본진을 지켜야 했을 일이다. 윗 항목 조숭 일가의 몰살 기록 부분에 나와있듯이 서주 대학살 당시 조조는 본인의 친부와 친인척들이 서주 지역에서 도겸 병사들에게 살해당했다. 오늘날에도 가족을 그것도 부모를 살해한 원수는 불구대천의 원수인 것은 변함이 없지만, 효의 사상이 더 강했던, 유교이념이 지배하던 후한말 시절에는 증오심이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 조조가 감정적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일가친척의 죽음에도 냉철하게 전술적인 판단을 내려 초토화 전략을 시행했다기보다는 조조가 본인의 친부와 친인척들의 비참한 죽음에 눈이 뒤집혀져서 저지른 일이라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결국 현대에 조조가 새롭게 평가받기 시작하고, 또 인권 사상의 대두로 인해 민간인에 대한 잔혹행위가 용서받지 못할 범죄로 규정되면서, 기존에는 비중이 컸던 명사 살해에 대한 악행은 별거 아닌 수준으로 하락하는 대신에 비중이 덜했던 그의 악행이 새롭게 부각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조조의 학살에 대한 현대인의 시각을 전근대 중국인에게 동일하게 대입하기는 어려울 뿐더러 역사를 해석하는 바른 자세가 아니다.[26] 조조에 대한 반감은 어디까지나 황실을 핍박한 권신이었던 것과 명사들을 살해한 것이 주요 원인이기 때문이다. 조조의 학살을 이유로 조조에게 반기를 들었던 인물이 아닌 이상 조조에 대한 반감의 주요 원인 중 하나로 학살을 꼽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7. 《삼국지연의》에서의 서술[편집]


2차 삼국지 매체의 원조인 《삼국지연의》에서도 사실 이 사건에 대한 설명을 10회에서 분명히 하고 있다.

마침내 순욱, 정욱을 남겨 견성, 범현, 동아 3현을 수비하게 하고 그 나머지들은 다 죽이려고 달려서 서주로 왔다. 하후돈, 우금, 전위가 선봉에 섰다. 조조는 명령을 내렸다: 성(도시)를 얻으면 성 안의 백성들을 모조리 도륙하여 아버지의 원수를 갚도록 하라.
구강의 태수 변양은 도겸과 교분이 두텁고 서주의 어려움이 있다는 말을 듣고 스스로 병사 5,000명을 이끌고 구원하러 왔다. 조조는 이를 듣고 크게 노하여 하후돈으로 하여금 길가에서 그를 가로막게 하고 죽였다. 당시 진궁은 동군의 종사였는데 도겸과도 교분이 두터워 조조가 군사를 일으켜 원한을 갚아 백성들을 모두 죽여 없애려 한다는 말을 들어, 별밤이 오기 전에 와서(또는 급속히 와서) 조조를 보았다. 조조는 (진궁이) 도겸을 위하여 중재인이 되고자 함을 알았기에, 보려하지도 않으려 했으나, 옛 은혜[27]를 없애지도 못하니, 다만 부득이하게 초빙하여 군막 안에 들여 만났다.
진궁이 말하기를:
"지금 명공께서 대군으로 서주에 임하여, 존부(尊父, 부친)의 원한을 보복하며, 도착한 곳에서 백성들을 다 죽여 없애려고 한다는 말을 듣고, 아무개는 이로 인해 이곳에 일부러 와서 진언합니다. 도겸은 인인군자(仁人君子)이지, 이익을 좋아해 탐내고 의리를 저버리는 무리가 아닙니다. 부친께서 살해당하신 것은 바로 장개의 악행으로, 도겸의 죄가 아닙니다. 게다가 주와 현의 백성들이 명공과 무슨 원수진 것이 있습니까? 살육은 상서로운 일(또는 선한 일)이 아닙니다. 바라건데 여러 차례 깊이 생각하고 행동하시길 바랍니다."
조조가 노하여 말하길:
"공은 나를 버리고 갔는데, 지금 무슨 면목으로 다시 만나는 것이오? 도겸이 내 가족을 죽였으니, 맹세코 당연히 쓸개를 뽑고 가슴을 도려내어, 내 원한을 풀 것이오! 공이 설사 도겸을 위해 유세하더라도, 만일 내가 듣지 않으면 어찌할 것이오?"
진궁은 작별을 고하고 "나도 도겸을 볼 면목이 없구나!"라고 탄식하며 말을 몰아 진류태수 장막에게로 갔다.
한편 조조의 대군은 가는 곳마다 인민들을 살육하고 분묘를 파냈다. 도겸은 서주에서, 조조가 군대를 일으켜 보복하고 백성들을 살육한다는 소리를 듣고, 하늘을 우러러 통곡하며 말하였다. "내가 하늘에 죄를 지어서, 서주의 백성들이 이 큰 재난을 받게 했구나!"
遂留荀彧、程昱领军三万守鄄城、范县、东阿三县,其余尽杀奔徐州来。夏侯惇、于禁、典韦为先锋。操令:但得城池,将城中百姓,尽行屠戮,以雪父仇。当有九江太守边让,与陶谦交厚,闻知徐州有难,自引兵五千来救。操闻之大怒,使夏侯惇于路截杀之。时陈宫为东郡从事,亦与陶谦交厚;闻曹操起兵报仇,欲尽杀百姓,星夜前来见操。操知是为陶谦作说客,欲待不见,又灭不过旧恩,只得请入帐中相见。
宫曰:"今闻明公以大兵临徐州,报尊父之仇,所到欲尽杀百姓,某因此特来进言。陶谦乃仁人君子,非好利忘义之辈;尊父遇害,乃张闿之恶,非谦罪也。且州县之民,与明公何仇?杀之不祥。望三思而行。"
操怒曰:"公昔弃我而去,今有何面目复来相见?陶谦杀吾一家,誓当摘胆剜心,以雪吾恨! 公虽为陶谦游说,其如吾不听何。"
陈宫辞出,叹曰:"吾亦无面目见陶谦也!"遂驰马投陈留太守张邈去了。
且说操大军所到之处,杀戮人民,发掘坟墓。陶谦在徐州,闻曹操起军报仇,杀戮百姓,仰天恸哭曰: "我获罪于天,致使徐州之民,受此大难!"

10회에는 이런 구절이 있는데 《삼국연의》 본문, 정사마냥 시체로 강이 막혔다거나 하진 않지만 살육에 대해서 분명하게 여러 차례 기술하고 있다. 사실 저 구절이 없다고 정사에 비해서 축소 기재되었다고 보기도 힘든 것이, 정사도 전문을 참고해보면 알겠지만 '도겸전'을 제외하고는 시체로 강이 막혔다 하는 기술은 없기 때문이다. 도겸의 저 통곡도 조조가 자신 대신 백성들을 살육하는 것에 대한 통곡이다.

아니 오히려 《연의》의 묘사를 보면 나관중은 조조군이 '처음부터 다 죽이려고 서주에 왔다'고 하며, 조조의 명으로 만일 성을 함락시키면 그 안에 있던 백성을 다 도륙한다고 쓰고 있다. 또한 조조가 서주 백성들을 다 죽이려 하자, 진궁이 와서 말려도 조조는 분노로 눈이 돌아가 진궁의 조언을 내치는데, 이 과정에서 진궁의 입을 빌어 조조가 아버지의 복수를 한답시고 조조와 원수진 것도 없는 무고한 서주 백성들을 모조리 죽이려는 것이라고 말한다. 거기에 서주에서 일어나는 조조의 학살에 대해선 진수가 썼던 '杀戮(살육)'이라는 단어를 써서 분명하게 기술함으로서, 《정사 삼국지》에서 진수가 했던 표현과 동일한 강도로 '조조는 가는 곳마다 무고한 백성들을 살육했다'고 확실히 서술하고, 도겸의 말을 빌어 '이것은 서주 백성들이 받고 있는 큰 재난'이라고 묘사한다.

따라서 전근대시대 사람인 원말 명초의 나관중 입장에서도 조조가 한 황실을 핍박하고 명사들을 죽이는 것만을 악행으로 묘사하는 게 아니라 서주 대학살 역시 엄연히 '조조의 사악한 악행'으로 묘사하고 있으며, 이는 《연의》의 주인공이자 '의로운 자'인 유비가 중과부적인 상황임을 알고도 서주를 구원하는 것을 대조되는 구도를 짜는 것으로서 확실히 재확인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후로는 서주 대학살이 일절 언급되지 않는다. 유비나 원소나 손권 등이 이후 조조를 비난할 때도 서주 대학살에 관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고 '진짜 역적은 누구인가'라며 정통성에 좀 더 초점을 맞춘다. 이렇다보니 《연의》만 읽은 사람들은 이후에 나오는 더더욱 충격적인 사건들(ex. 동승의 의대조 사건, 장판파 추격전, 복황후 시해, 허도 대화재와 길막·길목의 난…) 때문에 오히려 서주 대학살에 대해서는 주목하지 못한다.[28] [29]

정확히는 동승의 의대조 사건 직후에 조조가 밀조를 받고 역적을 치러 왔다며 우기자, 유비가 '역적에게 밀조를 내릴 리가 없잖나. 밀조는 여기 있다'면서 동승의 의대조를 읽다가 열받은 조조의 전투개시 선언에 묵살당하는 장면이 나온다. 하지만 이렇게 백성들의 학살이 얼마나 중죄인지 다루는 장면은 유비가 자립하기 직전인 장판파 추격전이 사실상 마지막이며, 이후 삼국정립이 완성된 이후로는 위나라에서 길막·길목의 난처럼 대규모 항쟁이 벌어져도 추가 언급 없이 넘어간다. 흥미 위주로 진행되는 연의 특성상 핵심 주제가 '백성을 위해 일어선 영웅'에서 '천하를 통일해 평안을 가져다 줄 영웅'으로 바뀌었기 때문일 것이다.

8. 창작물에서[편집]


정사 삼국지를 비롯한 역사서들이 조명을 받기 시작하면서 이 사건은 서서히 알려졌지만, 그마저도 '군웅할거의 난세 속에서의 일반적인 학살 중 하나'로 인식되고 있었다. 그러나 조조가 재평가되면서 이 사건 역시 재조명되었으며, 재조명됨에 따라 이 사건은 조조의 대표적인 악행이자 치부로써 부각되었으며, 이는 조조에 대한 재평가의 기류를 막게 되었다. 이 사건은 여백사 사건과 결합함으로써 조조라는 캐릭터에 대한 해석이 바뀌게 되었으며, 그것이 바로 오늘날 조조에 대한 해석인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30]이다. 조조를 냉혈한이 아닌, 기존의 연의를 중심으로 해석된 '냉정하고 포부가 크고, 인재를 고루 등용하는 호걸'이라고 해석되는 매체들의 경우에는 대부분 이 사건을 은근슬쩍 축소시키거나 언급을 하지 않고 넘어간다. 심한 경우 아예 없었던 일 취급하고 넘어가는 경우도 있다.[31] 연의 해석에 미화를 안 넣으면 평소에는 괜찮다가도 한 번 눈 돌아가면 미쳐 날뛰는 또라이 정도의 해석이 나온다.

최근의 창작물들에선 제갈량이 본래 서주 출신임을 채용하여 제갈량이 어린 시절 이때가 트라우마가 되어 조조를 증오하게 되었다는 내용을 넣는 경우가 제법 있다. 대표적인 예시가 삼국지톡. 삼국지 공명전 시절부터 하던 건데

8.1. 요코야마 미츠테루 삼국지[편집]


침공만 다루고 학살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그 침공도 제대로 전투를 치르기도 전에 여포가 쳐들어와서 도겸 측에서 사자로 보낸 장비에게 쿨하게 화친에 응하는 척 하고 물러가는 것으로 나올 뿐이다. 오히려 이후 원술이 서주를 침공했을 때 서주 지역이 불바다가 되고 백성들이 살해 당하는 등 서주가 파괴되는 모습이 더 상세하게 나온다. 이 때문에 이후에 유비가 신야에 있을 때 박망파 전투에서 승리한 이후 조조가 직접 대군을 이끌고 친정하였을 때 백성들에게 도망가라고 써놓은 방문에 "조조가 오면 다 죽는다"고 써붙여 놓는데, 이 만화를 통해서만 삼국지를 접한 사람들은 '아무리 유비가 좋고 조조가 싫다 한들 살던 집도 버리고 따라갈 정도인가?' 하는 의문이 들다가 뒤늦게 이 사건을 알고 신야 백성들의 그 선택을 이해하게 된다.

8.2. 카츠마타 토모하루 삼국지[편집]


1부에서 부모가 살해당한 소식을 접한 조조가 분노하면서 군대를 보내 서주에 있는 모든 것들을 몰살하라고 명령을 내리는데, 이윽고 장면이 전환되며 서주의 백성들이 조조군의 병사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모습이 나온다. 근거지를 잃고 떠돌이 신세로 의탁해 있었던 유비 또한 이 소식을 들은 뒤, 서주 백성들이 자신을 부르는 절규가 줄곧 들리는 것 같지만 지금은 그러지도 못하는 상황을 매우 안타깝게 언급하기도 했다.

8.3. 소노다 삼국지[편집]


조순의 부음 소식을 들은 조조가 그야말로 피눈물을 흘리며 통곡하는데, 이 만화 최고의 명장면 충 하나이다. 서주 대학살 자체는 간략하게 묘사되지만, 학살로 인해 서주를 떠나는 어린 제갈량을 등장시켜 복선을 깔아놓는다.

8.4. 고우영 삼국지[편집]


분량 면에서 아주 간략하게 지나가 버린다. 하지만 묘사상으로는 조조의 학살이 인디언을 학살한 솔저 블루베트남전밀라이 학살에 대놓고 비유된다. 참고로 원작이 연재될 시기는 1970년대로, 아메리카 원주민은 그렇다 치고 베트남전의 학살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도 눈치가 보이는 시절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아주 명쾌하게 서주 대학살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를 내린 셈이다.

8.5. 이문열 평역 삼국지[편집]


저자는 온갖 부분에 확인도 안 된 정사 드립을 하며 작가의 사평을 집어넣지만, 유독 이 조조 대학살에 대해서는 전혀 평을 내리지 않는다. 장면 묘사에서도 조조의 직접적인 학살 묘사는 빼고, 다른 인물들의 입을 빌려서 이야기하는 식으로 두리뭉실하게 서술한다. 심지어 조조 사망 장면에서 꽤 긴 분량을 들어서 조조의 인생을 평가하면서, "조조가 시대를 넘어 역사의 악역이 될 이유는 모자란다."고 말하는데, 시대의 악역이 될 차고 넘치는 이유인 이 서주 대학살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언급도 없다. 이 작품이 작가가 조금이라도 조조를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부분에서는 시도때도 없이 정사 타령하면서 조조빠 티를 다분히 드러낸다는 것을 감안할 때, 의도적으로 서주 대학살을 언급하는 것 자체를 배제하면서 그 시대에는 다들 그랬는데 왜 조조만 뭐라고 하냐며 물타기를 한다.

8.6. 김경한 삼국지[편집]


조조가 무리하게 온 서주를 들쑤시며 집집마다 학살을 일삼는 통에 수 많은 명사들이 피난길에 오른다. 이 때 제갈량이 김경한 삼국지에 첫 등장을 하는데 형인 제갈근손책을 찾아가고 일족들을 제갈량에게 맡기면서 제갈량은 제갈씨 일족의 수장이 된다. 이 때 형주로 피난을 떠나는 제갈량은 그야말로 피눈물을 흘리는데 조조를 반드시 죽여버리겠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여기에서도 예외없이 조조의 잔악무도함이 여과없이 묘사되어 있다. 다만 조조쪽 변호도 들어가 있는데 이 배경을 알기 위해 조조가 바라본 조숭이 묘사되어 있다. 조조는 조숭이 아무리 병신 취급을 받아도 우리 아버지니까 최고라며 항상 아버지를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살았는데 그런 아버지가 살해당하자 눈깔이 뒤집히고 이성을 잃어 이 학살을 저지른 것으로 나온다. 조조에 대해 우호적이지만 잘못된 것을 잘못된 것이라 정확히 짚고 넘어가며 그 예시중 하나가 바로 서주대학살이다.

8.7. 화봉요원[편집]


조조와 곽가, 특히 암흑병법을 주창하는 곽가가 그 어느 매체보다 악랄하게 나와서 서주 대학살을 벌이는 이유부터 기가 막히다.

조숭은 그냥 서주 지나가다 병으로 죽었고, 조조의 가족 중 그 누구도 도겸과 그의 부하들에게 아무런 해를 당하지 않았으나(하후돈이 직접 그렇게 말했다.) 곽가의 암흑병법에 매료된(…) 조조는 조숭의 죽음을 도겸군에게 살해당한 것으로 위장하여 도겸군이 조숭을 죽였다는 거짓 소문을 퍼뜨리고, 조숭의 복수를 명분으로 서주를 공격해 서주 군민을 무자비하게 학살하여 악명을 천하에 떨치는 황당한 계책을 마음에 들어하여 웃으면서 받아들여 시작된다.

서주의 양민들을 무자비하게 1만 명 가량 도륙한 것은 사실이나, 조조가 새로 얻은 군사인 곽가의 암흑병법으로 30만을 학살했다고 헛소문을 퍼뜨린 것으로 설명된다. 서주 군민들에게 조조군의 잔혹성을 각인시킴으로써 저항할 의지 자체를 상실시켜 버리자는 어마어마한 뻥카.[32] 곽가 자신이 '대의를 위한 희생'을 결코 마다하지 않는 암흑병법을 구사하는 책사이기에 가능한 방법이었다.

한편 제갈량[33]은 1만 명에 달하는 학살의 희생자들을 보고는 그들을 부여잡고 '눈물조차 다 말라버렸다'고 독백하면서 심리적으로 조조 세력과 완전히 척을 지게 되고, 직후 제갈량이 요원화를 끌어들이고 조조군을 방해하면서 수경팔기간의 대립이 시작된다. 얼핏 보면 서주 대학살의 진상을 '그거 사실 뻥임 어떻게 그렇게 사람을 많이 죽여'로 일축해 버리는 황당무계한 전개지만, 합리적으로 따져 보면 은근슬쩍 말이 된다는 것이 함정(…) 애초에 서주 대학살 자체가 합리적으로 생각하면 말도 안 된단 말이 나올 만큼 막장이다 무엇보다 이러한 설명이 조조의 악행을 미화하려는 의도는 없이 곽가와 제갈량의 상반된 캐릭터성을 드러내고 여기에 따른 갈등을 표현하기 위한 묘사에 가깝기에, 매니아들 사이에서 거부감이 적었던 점도 있다. 오히려 이 학살로 인해 화봉요원의 조조와 그 조조를 뒤에서 휘두르는 곽가는 그 어떤 매체에서보다 더욱 잔인하고 사악하며 악랄하게 나온다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

8.8. 드라마 삼국[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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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삼국에선 위와 같이 조조가 자신의 군은 '서주를 점령하면 다 죽이라'는 명령을 내리는 장면이 나온다.
드라마 삼국이 주요 인물의 행동에 대해 재해석을 상당히 많이 한 작품인 만큼 조조가 수십만을 다 죽인다는 이유도 새로 달아놓았는데, 다름아닌 군량 부족이었다. 조조군은 관도대전 승리 후 하북을 제패하기 전까지 계속 군량 문제에 시달렸기 때문에 그럴 듯한 재해석이라고 볼 수 있다. 다만 명령을 내린 직후 여포가 연주를 공격했다는 정보가 도달하였고, 결국 조조군이 철수해버린지라 조조의 명령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게다가 사실 저것도 좀 이상한 점이 있는데, 점령하면 남녀노소를 다 죽이라는데 거기에 있는 병사가 아닌 사람도 다 같이 죽이란 소리다. 그 사람들은 병사가 아니니 포로도 아니다. 역으로 조조에 냉혹함을 보여주는데 자기 이득이 안 되면 수십만 정도는 그냥 죽여도 된다는 모습을 보여준다.


8.9. 대군사 사마의[편집]


드라마 시작시점이 서주 대학살 이후라 언급으로만 나온다.
사마의가 조비에게 조조가 가장 염려하는건 백성들의 민심이라고 하자 조비가 도겸이 조부를 죽이자 분노한 아버지께서 서주성을 도살했다고 하며 그런 아버지가 민심을 염려할거같냐고 대답한다. 그러지 사마의는 그때의 조조는 단순한 군벌이었지만 지금은 천하를 다스린다는 목적이 생겨 민심을 생각 할 수 밖에 없다고 대답한다.


8.10. 삼국지 시리즈[편집]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에선 대놓고 등장하진 않으나, 유심히 살펴보면 유추해 볼 단서들이 있다. 예를 들어 삼국지 10에선 189년 시랑군림 시나리오와 194년 군웅할거 시나리오에서 서주 휘하의 소패성과 하비성의 인구가 엄청나게 감소하여 있다.
하비의 인구는 217,000 → 77,000
소패의 인구는 99,000 → 31,000
특히 소패의 인구가 너무 적어 194년 시나리오에서 소패의 군주로 있는 유비는 이벤트를 꺼도 국력이 너무 허약해 차라리 방랑군을 편성해 다른 곳으로 이사가는게 나을 지경이 된다.

삼국지 12 PK의 '서주변천' 시나리오의 경우엔 아예 대놓고 조조가 서주에 사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학살을 명령하는 장면이 나온다. 순욱은 조조를 말리나 듣지 않자 "후대에 학살로 평가 받을 거다."라며 탄식하는 대사를 한다.

삼국지 14에서도 조숭 참살, 유비 소패로, 서주 선양 이벤트로 재현된다. 조숭이 살해당했다는 사실을 안 조조가 격노해 도겸과 그 수하들은 물론이고 서주 백성들에게까지 보복성 공격을 가하고 미축이 유비에게 구원을 청하면서 조조의 군세가 서주의 신민들을 몰살시키고자 침공한다고 언급한다. 이에 유비가 서주를 구원하며 서주 선양 이벤트로 도겸에게 서주를 물려받을 수 있다.

8.11. 삼국지 공명전[편집]


도입부에서 어린 시절 제갈량이 서주 대학살 때 조조군을 피해 달아나다가 서주를 구하러 온 유관장 삼형제를 몰래 지켜보는 모습을 통해 훗날 제갈량이 삼고초려를 하는 것에 대한 개연성을 부여한다.

8.12. 삼국지 조조전[편집]


"서주 보복전"이라는 미션이 있으며 조조가 주인공인만큼 학살 관련은 나오지 않는다. 다만 사적인 감정을 앞세워서 전쟁을 일으키는 것에 대하여 조조의 책사들과 유비 모두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심지어 저돌적인 이미지가 있는 하후돈도 출전하기 전에 말을 걸면 대놓고 말하진 않지만 다소 부정적인 태도를 보인다. 유비측의 입장에서 하는 타 게임들은 당연히 조조군이 우세하는 양상으로 나오지만 조조가 주인공인 이 게임에서 그대로 나오면 당연히 전투가 싱겁게 되므로 오히려 도겸군의 병력이 훨씬 많다.[34] 심지어 도겸군은 스토리상 침공당하는 입장임에도 오히려 적극 아군을 향해 공격한다. 제8턴 시작 때 유관장 및 조운 4부대가 지원군으로 등장하고, 여포가 복양을 공격한다는 소식이 전해지며 도겸과 화목할지 아니면 계속 공격할지 선택지가 뜬다. 어느 선택지를 골라도 나중에 백은갑옷을 얻게 된다.

반면 《삼국지 조조전 온라인》에서는 조조만이 주인공이 아닌지라 유비전, 도겸전 등 다른 주인공 입장에서는 그 묘사가 잘 드러나 있으며, 대학살 후 장소, 노숙, 제갈 일가 등이 조조를 피해 피신을 가는 모습이 나온다. 특히 제갈량전에서는 제갈량이 출사하고 타도 조조의 기치를 세운 근본적인 이유가 서주 대학살의 복수로 그려질 정도.

8.13. 창천항로[편집]


파일:attachment/서주 대학살/006.jpg
파일:서주 대학살(창천항로 애니).jpg
창천항로》에서는 서주 대학살이 확실미묘하게 그려진다. 일단 시체가 강을 메울 정도로 쌓인 모습이 두 페이지나 할애하여 묘사되고, 관우가 이를 보고 충격을 받고는 격노하며 "이런 게 무슨 왕의 패업이냐"고 일갈하는 장면을 넣는 등 대학살의 광경 자체는 아주 직접적으로 묘사된다.[35] 하지만 정작 조조의 의도 자체는 '아버지가 죽었다니 씁 어쩔 수 없지 도겸은 어차피 천하로 향하는 길의 방해물이니 조져버리겠다'(순욱의 독백) 정도로 묘사되고, 대학살의 원인은 약탈과 살육밖에 모르는 청주병을 무장시켜 주력으로 삼아 진격시켰기 때문인 것으로 나온다. 이미 출발 전부터 하후돈이 '청주병은 아직 도적떼 그 자체고 니 명성은 땅에 떨어진다'라고 경고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청주병이 조조 맹덕에게서 중황태을의 꿈을 보았다면 조조는 청주병들의 것이다'라는 이상한 논리를 내세운다. 이 대학살에 대해 유비는 '놈들에게 있어 전쟁은 땅따먹기고 일단 땅을 잔뜩 차지한 다음 거기에 원하는 천하를 그려 넣으려는 것이다'라고 짧게 평하고, 곽가는 '원래 패업은 힘으로 하는 거고, 조조 당신은 적이었던 청주병을 흡수하고 그 힘만을 중시해서 대 살육조차 단순히 병력의 힘이 드러난 것으로 치부했다'면서 '여기까진 좋았다'라는 맛이 간 평가를 내렸다(…).[36] 즉 굳이 요약하자면 서주 대학살에 대해 사적인 복수심이니, 광기니 하는 이유가 아니라 '청주병이라는 무자비한 병력을 풀어놓으면 일이 이렇게 되니까 이렇게 됐다' 같은 무미건조한 설명을 덧붙인 셈이다. 우스운 것은 조조의 캐릭터가 비정하고 잔인하기보다 선악을 초월하고 오명조차 신경쓰지 않기에 가장 합리적인 길을 택하는 침착한 초인처럼 묘사되고 있다는 점.

이를 니체의 위버멘쉬 개념을 통해 이해하고자 하는 시도도 있는데, 역사에서의 조조의 대학살은 위버멘쉬가 되지 못할지언정 창천항로의 등장인물로서의 조조의 인물상은 (현실의 조조를 말하는 게 아니다!) 어느 정도 이러한 이해에 타당성이 있다. 행위 자체에 있어서 선악을 위시한 기성의 잣대를 거부하고 스스로가 창출한 새로운 가치를 드러내는 자를 위버멘쉬로 칭하며, 최소한 창천항로에서의 조조는 기존의 선악과 별개로 가장 합리적인 (비록 이 합리가 창천항로의 스토리 내부에서만 핍진성을 가지며, 작품의 외부세계에선 그 어떤 가치잣대에 비추어도 말이 되는 부분이 없다고 할지라도) 선택지를 골라 양질의 가치를 창출해내는 것으로 묘사되기 때문이다.

서주 대학살도 인의도덕 같은 고리타분한 가치에 얽매이지 않고 천하 통일을 위해 해야 할 일을 하는 조조라는 식으로 넘기고 있는 것이다. 당연히 이런 평가는 실제 조조의 인물상과 거리가 멀다. 조조는 당대의 관습적/절대적 가치관이었던 유교의 충과 효라는 개념을 자신의 영달을 위해 편의적으로 수단화한 사람이지, 그걸 뛰어넘는 어떤 새로운 이념이나 비전을 제시한 적이 전혀 없다. 당장 서주 대학살을 자행한 명분부터가 자신의 아버지의 원수를 갚는다는 효 이데올로기였고, 구현령을 발표하면서 선언했던 '아무리 불인불효할 지라도 능력만 있다면 그것에 상관 없이 인재로 뽑는다'란 구호가 무색하게 자신에게 사사건건 반항하는 공융을 불효죄로 숙청했다. 또한 헌제를 옹립함으로써 '한 황실을 옹호하는 충신'이라는 충 이데올로기를 등에 업을 수 있었는데, 이는 조조가 원소 산하의 그저 그런 군벌에서 당대 최고의 권력자로 면모를 일신하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이렇게 당대의 지배적 가치관을 자신의 목적 달성을 위한 수단으로 철저히 이용한 조조를 '구시대를 혁파하는 개혁가'라고 고평가하는 것은 어폐가 있다. 물론 정치적 차원의 윤리와 개인적 차원의 윤리는 별개의 문제라는 게 마키아벨리를 효시로 하는 근대 정치 철학의 시각이기에, 정치가로서 조조에 대한 판단은 다소 다를 수 있겠지만, 인간 조조는 절대 위선자란 혹평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다.

무엇보다 근본적으로 서주대학살은 효의 가치를 내세운 의미있는 행보가 아니라 그냥 분풀이였다. 위 장야신의 평가에도 나오지만, 이건 그냥 말도 안되는 짓이었다. 연고지인 연주를 완전히 장악하기도 전에 서주를 침공했고, 군사적으로 준비가 되지 않았기에 점령에 실패하자 그 지역의 무고한 백성을 수십만이나 학살했다. 이로 인해 연주에서 민심도 나빠지고 (민심 악화와 별개지만) 반란도 일어나서 연주를 거의 통째로 뺏길 뻔하고, 서주에서 민심은 당연히 최악이 되고 오히려 향후 최대 라이벌이 되는 유비에게 "인의"란 이미지까지 씌워주었다. 굳이 따지면 군사/경제의 기반이 되는 백성들을 학살해 서주의 힘을 크게 약화시켰다고 볼 수 있지만, 잃은 것에 비하면 극히 미미한 것이다. 그렇게 해서 점령해봤자 인프라와 인구가 줄어든 서주를 안정화해야하는 건 본인이니까 이득이라고 볼 수도 없다. 즉 아버지를 잃은 슬픔에 순수하게 미쳐 날뛴 것에 어떻게든 의미를 부여하려니까 저런 억지 해석이 나온 것이다. 조조는 분명 천재였지만, 감정기복이 심하고 인간적인 결함도 있는 사람이었다.

8.14. 삼국전투기[편집]


학살 묘사자체가 아예 안 나오며, 그저 침공을 했다는 식으로 두리뭉실하게 표현하고 어거지로 대강 넘겼다.

비판을 받자 나중에 사마의 사후를 묘사할 즈음에 지나가는 투로 살짝 언급된다… 지만 사실 <북해 전투5>에서 폭발한 조조가 서주에 사는 쥐새끼 한 마리, 풀 한 포기 안 남기겠단 발언을 하긴 했다. 직접 표현은 안 됐지만. 근데 여담으로 이 부분 자체가 조조를 띄우기 위해 도겸을 찌질이로 만든 경향이 있다.[37] 정사 기록을 따르면 애초에 도겸이 조조를 친 건 찌질해서가 아니라 공손찬과의 동맹 때문이었다.[38] 또한 작가의 착각인지, 고의인지 모르겠지만 10여 성을 뺏긴 것도 또한 가을이라 기술되어 있으므로 조숭이 죽은 후이다. 애초에 1차 학살 자체가 조조가 도겸을 공격하였으나, 도겸의 수비가 굳어 어쩌지 못하자 후퇴하면서 화풀이 겸 학살을 한 것이다. 그러므로 도겸이 겁을 먹어 조숭 가지고 협박하다가 실수로 죽였다는 건 어폐가 있다. 애초에 위진세어와 오서가 충돌했는데, 오서의 기록을 무시하고 위진세어의 기록을 따랐다. 위진세어의 설명을 보면 알겠지만 이건 역사서가 아니다.[39] 이는 제갈량의 북벌 논란에서도 제기 되었듯이 작가가 사서간 애초에 위진세어는 사서도 아니다 내용이 충돌하면 그 신빙성에 의심이 가는 내용이라도 지 입맛에 따라 고른다는 면에서 비판의 여지가 있다.

다만 진궁이 조조를 비판하며 말렸으나 듣지 않자 결국 실망하고 배신하는 전개를 넣어 조조에게 비판적인 내용을 넣기는 했다. 하지만 이마저도 전쟁에 명분이 없다는 거지 학살이 동반되었다는 묘사는 들어가지 않았다.

8.15. 진삼국무쌍 시리즈[편집]


단 한 번도 서주 대학살을 다루지 않고 있다. 이미 조조를 야심차고 고독한 패왕으로 묘사하다 보니까 그의 이런 캐릭터에 해가 될 수 있는 서주 대학살 묘사를 의도적으로 안 넣는 걸로 보인다. 그나마 서주에서 싸우는 것도 조조가 세력을 확장할 때 도겸이 괜히 걸려든 걸로 묘사된다. 단, 6편 서주 전투 촉편에선 진지 대화에서 서주 병사들이 조조군을 가차없는 자들, 귀신 같은 존재라 칭하며 공포에 떠는 것으로 조조군의 잔학함을 간접적으로 묘사했다. 요코야마 삼국지 수준의 묘사라고 보면 된다. 진삼국무쌍 6편 드라마 CD에서도 언급된다. 6편처럼 한 줄기 스토리로만 진행되는 8편에서는 의외로 좀 더 직접적 묘사를 해준다. 시즌패스 3 노숙 IF 시나리오에서는 오나라가 서주를 손에 넣는 스토리가 나오는데, 서성이 서주 출신이라는 떡밥을 써먹어서 예전에 조조가 서주를 유린한 적이 있어서 자신도 서주 사람들이 위나라에 반감을 가지고 있다는 걸 잘 알기에 직접 설득할 수 있도록 허락을 받고 서주가 오나라에 붙게 하는 식으로 서주 대학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8.16. 토탈 워: 삼국[편집]


조조 세력의 첫 딜레마로 언급된다. 역사처럼 서주 침공을 감행할 수 있지만, 사방이 위험 천지인 세력의 위치를 고려해서 도겸에 대한 복수보단 세력을 성장시키는 선택을 할 수 있어 서주 침공의 발발 여부는 플레이어의 판단에 넘겨지는 것. 한편 유비 세력 또한 역사처럼 도겸을 도울지, 아니면 돕지 않고 힘을 기를지 여부를 결정하는 것이 첫 딜레마이다.

세 번째 DLC인 배신당한 천하 트레일러에서는 조조가 아버지 조숭이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분노하여 자신의 검을 바라보고서는[40] 이후 직접 대군을 이끌고 서주로 쳐들어가는 모습으로 끝난다. 이때 분노로 굳어있으면서도 한쪽 입가가 살짝 올라가 있는 표정을 볼 수 있다.

8.17. 삼국지톡[편집]


파일:서주대학살.jpg
오른쪽의 인물은 제갈량. 이 시점에선 겨우 13세.
삼국지톡에서는 아버지의 복수를 하기 위해 서주를 침공한 조조가 전황이 불리해지자 그냥은 못 간다고 저지른 일로 나온다.

그리고 서주에 붉은 비가 내리는 연출과 함께 창천항로의 묘사처럼 시체로 강을 메운 연출을 보여주었다. 조조의 인기가 높은 작품이지만, 여백사 살해 사건과 이 서주 대학살은 가감 없이 직설적으로 그려냈다. 게다가 이 작품에서는 군웅들이 아닌 서주의 평범한 백성들의 시각에서 대학살의 참상을 보여주기 때문에 그 잔혹함이 더욱 두드러진다. 낭야중학교 학생들이 "어떤 미친 놈죄 없는 민간인을 죽이겠어?"[41]하고 마음을 놓고 있다가 화를 당하며, 위의 사진에 나온 '시체가 강을 메운 광경'은 학살 당시 13살의 어린 소년으로 낭야중학교에 월반을 했던 제갈량이 목격한다. 창천항로에서 이 광경을 유관장 삼형제가 목격한 것과 대비되는 부분.

이 끔찍한 광경을 본 제갈량은 충격과 공포에 사로잡혀 눈물을 흘리며 쓰러졌고, 이 사건을 계기로 세월이 흘러 성인이 된 뒤에도 조조에게 깊은 원한을 품고 그를 평생토록 증오하게 된다. 형 제갈근도 당시 쓰러진 어린 제갈량을 두고 이 아이는 너무나 영특하여 이 지옥을 결코 잊지 못할 거라고 말했고 실제로도 그렇게 됐다.[42]

조조군의 병사들도 이런 무자비한 살육으로 인해 심신이 피폐해진 모습으로 묘사되어 언데드 비스무리한 몰골이 되었다. 유비는 이들을 보며 "이들도 한때는 백성이었으니 조조에게 협박이라도 당했나 싶었지만 아니었구나"라며 한탄하는 장면을 통해 조조군 하나하나가 이 학살의 책임에서 절대 벗어나지 못하다는 것을 보여준다.[43] 조조 본인조차도 아서스 메네실을 연상시키는 피폐한 모습으로 눈에 핏발을 세우고, 학살을 결심하더니 이후로는 광기에 빠져 완전히 망가진 몰골로 등장하고 있다. 전장에서 조조를 다시 만난 유비는, 조조를 향해 "한때 당신은 내 영웅이었으나, 지금의 당신은 영웅도 악당도 아닌 괴물이다"라고 매서운 비판을 가한다. 여러 모로 '학살의 참혹함을 매우 리얼하게 그려냈다'는 호평이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이 파트를 기점으로 조조에 대한 독자들의 인식이 추락했다.[44] 이후 조조는 관도대전 편에 들어서야 인기를 일정 수준 회복할 수 있었으니 얼마나 많은 독자들이 영향을 받았는지 짐작이 갈 것이다.

한편 이미 서주에서 귀환한 조조가 '아직 도겸을 끝장내지 못했으니 다시 한 번 서주를 치겠다'고 선언하여, 서주 대학살이 실제로 두 차례에 걸쳐 일어났음을 몰랐던 독자들은 '이 미친 짓을 한 번으로 끝낸 게 아니란 말이냐'고, 알고 있던 독자들도 '1, 2차를 합쳐서 묘사했던 게 아니었단 말이냐'고 함께 경악했다. 이 일로 순욱진궁도 조조에게 크게 실망하는데, 그나마 순욱은 자신이 조조를 다시 바르게 이끌어야 한다고 마음을 다잡지만, 진궁은 이미 여백사 일가족 살해 사건으로 조조의 본색을 봤던 터라 그에 대한 희망을 완전히 버리고 돌아서서 조조를 죽여 없애기로 작정한다.

다만 2차 학살은 1차처럼 직접적으로 묘사되지 않고, 조조가 서주성을 공격하는 장면으로 간략하게 넘어간 뒤 다른 인물에 의해 간접적으로 언급된다.[45] 대규모 민간인 학살을 연속으로 두 번이나 자세하게 묘사하는 것은 지나치게 자극적일 수 있으니, 이미 1차를 구체적이고 적나라하게 묘사한 만큼 2차는 묘사를 다소 생략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전략적으로도 크나큰 실책이라는 것을 상세히 묘사한다. 당장 이 일로 진궁장막은 조조에게 등을 돌렸고, 연주 전체가 반기를 들어 순식간에 갈 곳이 없어지며, 최대 동맹인 원소 또한 불똥이 튀는 걸 막으려고 조조와 연을 끊는다. 이로써 조조는 근거지도 동맹도 잃어 한때 완전히 끈 떨어진 연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장기적으로는 순욱과 이때부터 어긋나고 제갈량, 노숙을 비롯하여 서주 출신의 여러 인재들이 각지로 흩어져서 반 조조 세력에 임관하는 나비효과를 낳는다.

연의에서 서주 대학살이 이후로는 언급이 안 되는 것과 달리, 삼국지톡에서는 꾸준히 조조의 최대 악행으로 재차 언급이 된다. 여러 모로 역대 삼국지 관련 창작물 중 서주 대학살을 사서의 기록에 가깝게 묘사한 작품이다. 시즌 6 관도대전 3화에서 진궁이 유비를 조조와 싸우게 하기 위해 그를 부추기려고 "조조는 시체들로 서주 강물을 막은 괴물이면서 황제를 구한 영웅으로 이미지 포장 및 세탁을 한다."고 욕하며 같이 싸우자고 하지만 그 의도를 알아차린 유비가 단호하게 나오자 한 발 물러난다.

관도대전 24화에서 조조의 부인인 정영옥은 아버지를 따라 참전하겠다는 조앙을 말리면서 "네가 조조의 아들이 맞긴 하구나. 뼈빠지게 키워놨더니 되고 싶은 게 사람 백정이냐?"고 다그친다.[46] 조조가 서주에서 벌인 학살은 가족마저 손사래를 치는 악행임이 꾸준히 묘사되고 있다. 가후 역시 조조를 '시체로 강을 메우는 색골'이라고 비판하며 그런 아비에게서 태어난 조앙을 안타까워했다. 그래놓곤 쏴죽인다

관도대전 30화에서는 여포의 뒤치기로 서주를 잃은 유비를 따라 조조에게 망명한 미축에게 조조가 높은 관직을 주면서 서주의 민심 좀 잘 달래주라고 요구하는 한편 서주 대학살을 매우 가볍게 여기고 있음을 드러낸다. 조조 曰 "근데 말입니다? 우리가 큰 그림을 봐야지! 쬐그만 원한은 잊고! 함께 나라를 바로잡아야지 않겠소?" 시체로 강을 메립하다시피 한 게 쬐끄만 원한? 애초에 죽는 날까지 서주 대학살에 대해 반성이나 후회가 없던 양반이니 당연한 거지만…

관도대전 37화에서는 하후돈이 유비를 구하러 왔다가 왼눈에 화살을 맞자 화살을 뽑아 직접 눈알을 삼켜버린다. 그리고 그것을 이전을 비롯한 조조군 장졸들이 환호하자, 유비는 경악하면서 서주 대학살은 실수도 아닌 조조 개인이 원하여 조조군 전체가 기꺼이 그 명령을 따르고 실천한 짓임을 깨닫는다.

서주를 빼앗아 점거하던 여포 세력을 토벌한 후 조조가 유비와 함께 서주 백성들을 만나러 나오자 백성들이 환호하여 조조는 속으로 '그럼 그렇지. 나는 새도 떨어트리는 권력자인 이 몸에게 니들이 별 수 있냐.'며 비웃었지만, 정작 서주 백성들은 유비에게만 환호하고 조조는 안중에도 없어서 조조는 어이를 상실한다. 관도대전 60화에서는 아예 말에 앉아있는 조조를 밀치며 낙마시키는 상황이 벌어지고, 병사들이 칼을 빼들며 조조를 낙마시킨 백성들을 베려고 하자 황급히 말린다. 물론 백성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을 에워싸고 있는 백성들에게 역으로 린치당해 자기가 죽을까봐 무서워서 그런 것이다. 조조는 벌벌 떨면서 병사들에게 "여기는 적진 한복판이란 말이다!"라고 소리치기까지 한다.

이 장면들을 통해 서주 백성들은 절대 서주 대학살을 잊지 않았으며, 병사들은 그때처럼 조조가 명령하면 망설이지 않고 다시 서주 백성들을 죽여버릴 수 있는 모습을 보여줬다.[47] 이 와중에 유비는 조조의 심리를 눈치채고 황급히 자기는 한 거 없고 조조가 여포로부터 서주를 구했다고 립서비스를 해주나, 얕잡아보던 유비의 무서움을 깨달은 조조가 하비로 가려는 유비를 수도인 허창의 자기 옆집에 잡아놓게 된다.

제갈량이 19세로 성장해 재등장한 76~78화 에피소드에서는 제갈량의 PTSD가 됐으며, 고향을 작살내놓고 벌은 안 받고 오히려 잘 나가는 조조의 행보에 세상을 냉소적으로 보며 거의 자포자기에 가까운 청소년 시기를 보내고 있음을 보여준다.

관도대전 83화에서는 80~82회에 나온 논영회 에피소드 때 조조가 자신과 유비를 영웅이라고 칭하자, 집에 돌아가면서 서주 대학살은 무슨 밥상에서 물 엎은 것처럼 여기고 있냐며, 영웅은 무슨 얼어죽을 영웅이냐고 속으로 독설을 퍼붓는다.

적벽대전 33화에서 유비가 신야성 백성들을 거둘 때, 원래는 유비가 '피난이 아닌 퇴각이니 따라오면 안 된다. 그대들은 조조의 백성이니 조조가 그대들을 해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리려 했으나 피난민 행렬에 있던 한 노파가 서주대학살 당시의 참상을 기억해내고 '죽는 한이 있어도 따라가겠다'고 외친다. 유비를 따라간 형주 백성들 중에 서주 대학살 생존자들이 있었을 것이라는 정황을 반영한 묘사이며, 제갈량도 이들이 어린 시절 자신과 같은 일을 겪은 사람들이라는 것을 직감하고 유비에게 피난민을 거둘 것을 진언한다. 다만 유비군도 빠듯한 상황이었기에 유비는 이들을 양양성까지만 데려다 주기로 하였으나, 채씨 남매가 자기 백성을 버리고 조조에게 투항하려 하는 바람에 실망한 형주 백성들이 추가로 유비군 행렬에 합세하였고 유비는 이들까지 데리고 남하하기를 결심한다.

다른 삼국지 매체들에서는 대부분 잊혀지는 것과 달리 삼국지톡에서는 잊을 만하면 언급이 되면서 조조의 흑역사이자 치부임을 지속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론 이러한 묘사에 대해 너무 자주 나온다며 싫어하는 독자들도 있다. 허나 유비가 조조에게 실망하고 적대시한 계기가 된 사건이며[48] 후일 유비 진영에 합류하는 제갈량의 인생을 비틀어버린 사건이며, 오나라에도 당시의 피해자가 상당히 많이 있기 때문에 못해도 적벽대전까지는 지속적으로 잊을 만하면 언급될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비판은 본 작품에서 조조의 악행을 부각시키거나 조조를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경우가 많이 나온 것에 대한 반발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논영회조차 조조를 까는 방향으로 재해석해서 유비가 서주 대학살 얘기를 꺼내며 "영웅은 얼어죽을"이라는 식으로 조조를 조롱하자 댓글창에서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조조는 죽을때까지 후회하지 않은 일이지만 다른 인물들은 양심이 찔리긴 한 모양이다. 조조의 사촌인 조홍은 시즌 9 27화에서 조비가 아버지를 까자 술을 부어버리고 “너같은 코찔찔이 해피하게 해주려고 내가, 우리 모두가! 천년만년 저주 받을 인간 백정짓 한줄 아냐고!” 라고 일갈할때 배경으로 흑백의 서주 대학살 현장이 나온다.

8.18. 여자 제갈량[편집]


초반 프롤로그로 다뤄지며 피난 가는 제갈량과 제갈근이 조조에 대한 원한을 품고 남매가 함께 조조의 군대를 불살라버리겠다고 맹세한다.

8.19. 박봉성 삼국지[편집]


국산 삼국지 만화의 숨겨진 명작 취급 받는 박봉성 삼국지는 2000년대 초 작품답지 않게 참신하고 정교한 해석을 시도하는 부분이 여럿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이 서주 대학살이다.

조조가 서주 백성들을 학살하는 장면을 충실하게 제시하고 직접적으로 '서주 학살 사건'이라고 언급할 뿐만 아니라, 학살로 인해 극도로 악화된 서주 민심을 묘사하는 한편, 이 때문에 조조가 유비의 도움을 필요로 했다고 파악한다. 작중 조조는 순욱과 곽가의 경계도 마다하고 유비를 살려두는데 서주 백성들의 민심을 얻은 유비를 얼굴마담으로 내세워, 통치를 안정시키려는 한편 유비를 조조의 앞잡이 정도로 부각시켜 이미지를 추락시키려는 심산이었다.

조조군이 여포를 쫓아내고 서주에 입성하자 분위기는 매우 흉흉했다. 서주 주민들의 시선이 곱지 않고 야유 소리가 들리는 와중, 개선 행진을 벌이는 조조의 말이 돌팔매질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돌을 던진 것은 전쟁통에 아들을 잃은 한 노파로 그 노파는 "네놈 손에 죽은 수만의 원귀들이 아직도 눈을 감지 못하고 구천을 떠돌고 있거늘… 그 더러운 발로 감히 이 서주 땅을 밟으려 하느냐! 내 아들의 목숨을 살려내라. 이 살인마!" 하고 일갈하다가 조조군에게 죽을 위기에 처한다.

유비는 노파를 구해주며, 조조에게 노파의 잘못을 용서해줄 것을 요청한다. 조조는 이를 받아들이는 대신 서주 백성들이 조조를 적대시하지 않게 달래달라고 넌지시 제안한다. 유비는 제안을 받아 백성들을 위무하며, 서주성에 온 군대는 조조의 군대가 아니라 천자의 군대라는 명분을 드는 한편 '이 군대는 나 유비의 군대나 마찬가지인 셈'이라는 표현을 사용해 민심을 흡수해 버린다. 이는 조조의 계산과는 어긋난 결과로, 조조는 백성들에게 인망이 있다는 유비를 적당히 민심 수습용으로 써먹으려던 것이었으나 유비는 이를 역이용해 서주가 자신의 땅임을 못박아 버린 꼴이 된 것이다. 조조는 결국 자신의 판단이 틀렸음에 분을 삭인다. 유비라는 인물이 생각보다 훨씬 위험한 자임을 깨달은 것이다.

이후 서주성에서 유비 삼형제와 재회한 미축은 서주 백성들의 엄청난 환호에 조조가 내심 놀란 눈치라고 평하며, 여포와의 싸움이 끝나면 조조도 서주를 유비에게 내어주지 않을 수 없을 거라고 장담한다.

학살 자체를 다루는 데 그치지 않고 서주 주민들이 조조에게 갖는 감정, 그에 얽힌 조조의 노련한 정략과 유비의 맞대응을 대조시켜 라이벌적인 면모까지 부각시킨 데다가 유비에 대한 조조의 경계심 역시 설명해 내었다는 점에서 높은 만화적 완성도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2000년대 초에 이러한 해석이 등장해 설득력 있게 전달되었다는 것은 놀라울 정도다.

8.20. 기타[편집]


진순신소설 《제갈공명》에서는 제갈량이 조조에게 출사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 그가 어렸을 적에 겪은 서주 대학살을 설명한다.

작가 권오석의 소설 조조라는 소설에서도 서주 대학살이 언급되었다.

평설 인물 삼국지에서는 조조가 의도적으로 벌인 일이 아니라, 도겸이 백성들을 인간방패로 내세우고 뒤에 숨었기 때문에 생긴 일이라는 소리를 하기도 했다. 복수를 갈망하던 조조가 도겸의 목을 따러 가는데 방해가 되자 백성까지 죽이면서 전진했기 때문에 학살이 발생했고, 도겸은 더이상 안 되겠다 싶어 유비를 불렀는데 유비는 백성들을 뒤에 숨겨 보호했기 때문에 손건, 미축이 근거지까지 버리고 유비를 따라나선 계기가 된 것이라는 소리다. 하지만 이건 조조와 유비만 돋보이기 위한 전형적인 영웅관 위주의 해석이고, 현실적으로는 말장난에 가까우니 주의하자. 도겸이 어떻게 백성들의 뒤에 숨었다는 것이며, 그래서 백성들을 왜 죽였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논리도 없기 때문이다.[49]

침착맨은 개인 방송에서 이 사건에 대해 서주 대효도라는 드립을 날렸다. 정확히는 침착맨 팬카페의 한 유저가 '아버지가 죽었다고 그렇게 길길이 화를 내며 끝장을 보려 한 것은 대단한 효심이다'라며 '서주 대학살이 아닌 서주 대효도라고 불러야 옳다'고 주장했는데 이를 소개한 것. 침착맨 본인은 처음엔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하다가, 이후에는 조조가 저지른 학살을 전부 '효도'라고 돌려서 조조를 까는 식으로 써먹었다.[50]

Fate/Grand Order진궁전쟁에선 냉혹하게 판단하지만 이건 전투에 있어서는 그 편이 효율적이기 때문이고, 민간인을 상대할 때처럼 전투와 관계없는 상황에서는 나름대로 예절을 지키는데 조조를 따른 이유도 그 역시 자신과 비슷할 거라 생각하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조조는 그 둘을 나눠 생각하지 않는 인물이라 필요 이상으로 냉혹, 잔인하고 많은 희생을 내자 그날로 공사 구분 없는 인간이라 진저리를 치며 우정을 깨고 떠났다고 했는데, 그 공사 구분 없이 벌인 잔인한 사건이 정황 상 이거로 추정된다.

삼국지 가후전에서는 진규가 가후의 동문으로 나오며, 서주가 난세의 피난처 역할을 하므로 이 어마어마한 인구를 잘 정착시켜 서주의 힘으로 만들려는 계획을 세운다. 진궁은 이 책략을 빌려 조조에게 서주를 얻는다면 천하를 얻기 쉬워질거라고 말하며 조조 역시 장차 동탁과의 싸움이 격해지면 서주로 몰려드는 피난민들은 더욱 많아질테니 일리있는 계책이라고 여기지만, 정황상 훗날 조조는 서주의 잠재력을 두려워해 더 이상 난세의 피난처 역할을 하지 못하도록 대학살을 저지를 것으로 여겨진다.
[1] 일본에서는 한국처럼 '徐州大虐殺'(서주대학살)이라고 부르고, 중국에서는 약간 다르게 '徐州大屠杀'(서주대도살)이라고 표기한다. 바이두 백과사전 참고. '도살'이라는 단어가 다소 뜬금없어 보이지만, 중국어에서의 도살은 제노사이드의 뜻도 포함된다. 그래서 난징대학살이 중국어로 '南京大屠杀'(남경대도살)인 것이다.[2] 좀 다른 이야기지만 이 이혼도 전적으로 조조의 책임이었다…항복한 장수의 죽은 장제의 형의 아내 과부를 건드리고 장수를 암살하려고 했던 것.(…) 이게 명분이 되어 장수가 조조를 습격하였고 그 와중에 조조를 지키려던 전위랑 조앙이 사망한다. 조앙은 정씨에게 친아들은 아니었지만 친아들 이상으로 대했는데 조조에게 조앙을 죽은 일을 가지고 매섭게 대했다고 한다. 이런 정씨의 항의를 조조는 정씨를 친가로 보내는걸로 대응했지만 훗날 재결합하려고 용서를 빌었을때 정씨에게 문전박대만 당했다.[3] 범위를 넓혀서 반고의 『한서』를 살펴보면 번쾌, 역상이 동원(東垣)을 殘하였다는 언급이 나온다. 殘이 잔인하다라는 뜻이 있어 가치판단을 담은 서술처럼 느껴지지만 殘戮에서 殘은 죽인 사람이 많았다는 뜻으로 사용된 것이라 가치판단을 담고 있지는 않다. 그럼에도 조조에게 호의적이고 옹호하는 진수조차 조조가 저지른 이 대학살 만큼은 변명의 여지도 없는 학살자의 행위라고 확고히 못 박을 정도로 조조가 저지른 이 행위가 궤를 달리했음을 보여준다.[4] 순욱전에 인용된 조만전의 문장이다.[5] 무제기에 인용된 손성의 평이다.[6] 다만 후한서의 해당 부분은 삼국지에 주석으로 달린 조만전의 문장과 매우 흡사한데, 저술 시기는 조만전이 앞서므로 후한서가 조만전의 내용을 참고한 것으로 추정된다. 문제는 조만전에는 수십만이 아니라 수만으로 나온다는 것. 즉 후한서에 나오는 수십만이라는 규모는 범엽이 수사학적으로 쓴 문구이지 정확한 수가 아닐 가능성이 높다. 북위의 역도원이 저술한 수경주에서는 규모가 십만명으로 나오는 것 역시 범엽의 서술에 과장이 들어갔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 중 하나이다.[7] 이런 언급은 초한쟁패기에도 나온다. 항우가 한나라 군사를 격파하여 수수(睢水)가 흐르지 않았다고 한다.[8] 백기처럼 전략적으로 상대를 약화시키기 위해 한 학살에 더 가까운 사례이다. 단, 사마의의 경우 공손연을 죽이고 요동을 완전히 장악한 이후에 한 학살이므로 아직 도겸을 완전히 축출하지 못한 전시 상황에 일어난 조조의 학살과 단순히 비교하긴 어려운 점도 있다.[9] 굳이 조조가 아니더라도 위나라의 장수들은 물론 오나라의 장수들 역시 패전을 대충 뭉개서 서술한 경우는 많다.[10] 진수가 조조를 옹호했다고만 보기에는 애매한 사례이다. 굳이 조조가 아니더라도 동탁을 제외한 다른 인물들이 도륙한 행위를 진수는 강하게 비난하지 않았다. 조조를 옹호한 측면도 있겠지만 동탁이 희대의 역적 취급 받았다는 점 역시 간과해서는 안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조가 서주에서 벌인 학살처럼 넓은 지역에서 큰 규모로 벌어진 악행이 다른 일개 도시, 요새에서 벌어진 도륙과 비슷하게 서술되었다는 점에서 조조를 옹호했다고 볼 여지는 충분하다. 서주 대학살처럼 넓은 지역에서 벌어진 학살이 없기 때문에 비교대상이 없긴 하지만...[11] 오나라의 마지막 승상[12] 진짜로 자다가 사람을 죽인 일화가 아니다.[13] 규모는 실제보다 과장되었을 확률이 높지만, 적어도 세간에 떠돌던 이야기, 혹은 후대에 전해진 이야기에서는 20만이 갱살되었다고 전해졌을 것이다.[14] 이 두가지 사례는 진나라가 공공의 적이었다고 반론할 수는 있다.[15] 항우의 수도가 팽성이긴 했으나 항우가 처음으로 봉해진 곳은 노(魯)이다. 유방이 패공이 될 때 항우는 노공이 되었다.[16] 학살 이후로 시간이 흐르면서 악감정이 희석되었다가 모종의 이유로 다시 악감정이 심해졌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17] 조조가 적벽에서 승리했더라면 통일했을 것이라는 주장은 이견이 없는 편이다. 그렇다면 조조가 통일에 실패한 이유는 적벽에서 손권-유비 연합군을 격파할 정도의 능력이 안되었기 때문이지 민심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다. 이런 논점은 유비가 끝끝내 조조를 거부하고 그의 러브콜을 죄다 씹은 이유가 서주 대학살을 위시한 조조의 인성 문제였을지도 모른다거나, 적벽대전이 제갈량이 서주 때문에 조조에게 임관하지 않은 것으로 인한 나비효과였다거나 하는 관점에서 나오는 말인데, 후자는 몰라도 전자는 근거가 부족해서 2차 창작에서 재해석할때나 꺼내볼법한 관점이지 '정설'이 되기에는 힘든 가설이다.[18] 해당 책의 원본 출판 연도를 계산해보면 일본에서는 90년대에 이미 이런 개념이 존재했다는 소리.[19] 국내에는 1990년 처음 정발되었다.[20] 이 때문에 "제갈량이 약소 세력인 유비 세력에서나 승상이 됐지 사실 조조 휘하에선 말단에나 오를 실력이라 유비에게 출사했다"는 식으로 제갈량 폄훼가 이뤄지기도 했는데, 정사의 기록만 봐도 제갈량은 훌륭한 인재로 평가받았다. 최소한 조조 진영으로 임관을 못할 정도의 인물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서주 대학살 때문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으나 제갈량이 모종의 이유로 조조 대신 유비 세력에 임관하는 것을 선택했다는 말.[21] 중국과 일본이 《정사 삼국지》 혹은 《삼국지연의》를 바탕으로 실사 영상물, 게임, 만화 등 대중매체를 부단히 생산하면서 인물과 사건에 대해 정사까지 참고하는 해석과 재해석이 활발했던 반면, 한국의 《삼국지》 팬덤은 이런 매체 생산이 더뎠다. 물론 《고우영 삼국지》 같은 만화 작품들은 적잖이 나왔지만, 그 이전에 《삼국지연의》의 정역·완역 자체가 제대로 되질 않았다. 《모종강본 완역본》 나온 게 2000년대 후반의 일이니 말 다했다. 이문열은 제갈량이 조조에게 안 간 건 인재들이 넘쳐나니 자기가 가봤자 별로 높은 자리에 오르지 못할 것이 뻔해서 그랬다는 주장을 정설처럼 내놓았으나, 배송지는 제갈량이 최주평에게 '님이 조조 쪽에 붙어봤자 조조는 수많은 선비들을 거느리고 있어서 눈에 띄지도 못할 거임'이라고 이야기하는 대목에서 '제갈량 정도라면 아무리 조조 휘하에 선비가 많다 한들 출세하는 데에 전혀 문제가 없었을 거'라 주석을 달아놨다. 배송지의 개인적인 의견이긴 하나 서진 시절부터 제갈량은 이미 높게 평가되어 왔던 것을 감안하면 당대 사람들의 전반적인 평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것도 제갈량 본인이 밝힌 것이 아니라 제3자의 평가이긴 하지만.[22] 제갈현의 예주태수 관련 분쟁을 전후로 이전하였다면 조조의 침공과 비슷한 년도(193~195)에 남하했다.[23] 제갈량집에는 223년에 제갈량이 위나라의 인사들과 편지를 주고받았다고 언급되는데 화흠, 왕랑, 진군 같은 위나라의 명신들 가운데 알자복야 제갈장이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또한 조비의 1차 남정 때 조인 휘하 장군 중 제갈건이라는 인물이 존재하고, 관구검의 난 즈음에 첫 등장하며 촉한멸망전에도 참여하는 제갈탄이 있다. 당시 제갈씨는 본적이 낭야군 양도현 하나 뿐이었다.[24] 진교, 진등의 고향은 조조군의 침공 지역이 아니긴 했으나 왕랑의 고향인 동해군 담현은 도겸이 끝까지 농성한 곳이다. 비록 담현이 함락되진 않았으나 그 일대는 초토화되었을 가능성이 높다.[25] 연주 태산군 소속이다.[26] 당장 수호전에는 민간인을 학살하고 인육을 먹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나오지만 중국인들에게 인기가 많았다.[27] 《연의》에서 조조가 동탁 암살에 실패했을 때 진궁이 조조를 구해준 걸 뜻한다.[28] 결국 서주대학살이 악행으로 인지되었다 하더라도 정치적으로 흠결을 남길만한 사항이 아니었다는 것이다.[29] 간혹 학살을 일으킨 나라는 100년 이상 못갔다고 하는데 대량 학살을 저지른 원나라나 청나라는 100년 이상 버텼고 이들 국가들도 학살보다는 정치적인 문제로 망했다.[30] 실제 자료에는 이 모습에 제일 부합하는 사람은 숙적 원소이다. 원씨 가문이 멸문 되었을 때 자기 어머니가 있었다는 소리가 있고, 테러를 일으키려 하는 등 수단과 방법을 들키지 않게 사용한다.[31] 서주 대학살을 전략적으로 내세우기에는 무리가 크고, 그렇다고 이를 반영했다가는 조조는 쓰레기가 되기 굉장히 쉽다. 그리고 사람 좋은 유비는 정작 정말로 목숨 걸고 백성을 구한 영웅이라는 구도가 만들어져 버린다. 이를 유비의 야망이라고 치부해도 위선이든 야망이든 눈 앞에 사람을 구하는 행동은 올바른 행동이니 욕하는 것도 이상하다. 애초에 유비를 비난하기 위한 잣대를 그대로 조조에게 적용시켜버리면 조조는 인간이 아닌 그 무언가가 되어버리기 마련이다.[32] 조조의 부하 장병들이 그렇게 많은 수를 죽였다고 소문을 퍼뜨리면 주군의 명예가 더럽혀진다고 만류하지만 곽가는 되려 수를 더 부풀린다…[33] 여기서 제갈량은 10대 초반이었던 현실과 달리 수경팔기로 장성한 나이로 설정되었다.[34] 훗날 장판파 전투 등 스토리상으로 조조군이 우세여야 할 다른 전투에서도 이런 양상을 보여준다.[35] 여기서 일행은 기가 막히는 광경을 목격하는데, 시체가 강을 메운 덕분에 강줄기들이 평야로 흘러가서, 수량이 풍부해져 그걸로 농사 짓는 주민들을 보고 '조조의 정치는 (타인의) 피로 백성들을 살찌우는 것인가'라고 분노하게 된다.[36] 곽가가 부정적으로 평가한 부분은 '이렇게 검증된 청주병이라는 살육 병기를 보유하고도 대놓고 천하를 따먹지 않고 법이니, 농정이니 하는 내정에 힘쓰면서 시간 죽이는 이유가 뭐냐'라는 내용이다(…) 선 정복 후 내정의 기초를 모르느냐[37] 다만 정사에서 도겸은 탐관오리로 묘사되어 있다는 점에서 나름 고증에 맞긴 하다. 그러나 도겸이 조조와 싸웠고, 조숭이 이 과정에서 살해 당했기에 의도적으로 과한 폄하를 받는다는 지적도 있다. 서주 대학살의 결과로 이어지는 아이러니함을 낳았지만, 예전부터 서주에 살던 사람들은 물론 난을 피해온 난민들까지 정착해 살았다는 걸 보면 적어도 서주를 잘 다스린 인물인 건 맞다.[38] 공손찬과 도겸이 같은 라인이었다는 사실은 나중에 유비가 도겸을 도우러 가면서 언급하기는 했다. 같은 라인끼리는 도우며 살아야 한다나… [39] 곽반이 지은 필기 소설집이다.[40] 잘 보면 슬쩍 웃고 있다.[41] 후속 화들에서 조조는 서주 백성들을 벌레 취급하면서 '남김없이 몰살하겠다'고 단언하며, 자기 입으로 '서주는 내가 죽음의 땅으로 만들었다'고 말한다. 실수도 뭣도 아니고 명백하게 그리할 의지를 가지고 행한 짓이며, 그에 대해 일말의 죄의식도 없고, 서주 백성들은 모두 죽어 마땅하며 자신이 그들을 몰살해도 된다고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작가는 이후에 각주로 '조조는 죽을 때까지 서주 대학살을 후회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적어넣어 확인사살을 했다.[42] 이는 후에 이릉 전투를 앞두고 '촉의 적은 위이기 때문에 오를 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하는 제갈량의 의견에 정당성을 줄 수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학살이 벌어지기 불과 몇 분 전까지 제갈량은 내심 조조에게 출사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서주 출신의 인재들이 다른 지역으로 피난가고서 반 조조 기치를 내세우는 다른 세력에 가게 된 원인이 조조에게 있음을 묘사하는 연출.[43] 훗날 유비는 서주 전투에서 하후돈이 화살에 꿰뚫린 눈을 씹어먹으며 장수들과 웃으며 각오를 다지는 모습에 제정신이 아니라며 서주 대학살은 조조의 독선만이 아닌 부하들의 맹목적인 충성심도 함께한 것임을 깨닫는다.[44] 본격적인 학살 장면이 묘사되기 전까지는 조조에 대한 동정론도 어느 정도 있었으나, 학살 장면 묘사를 기점으로 몇몇 동정론자들도 전부 돌아섰다.[45] 각주로 학살을 또 벌였다고 적혀있기는 하다.[46] 조조와 정부인의 파국을 묘사한 29화의 덧글 중에는 '조조가 밖에서 학살을 저질렀지만 그래도 가족들에게는 잘 해줘서 참았으나 기어이 자기 자식을 병크로 죽게 만든 시점에서 정부인에게 조조는 짐승만도 못한 놈이 됐다.'는 내용이 공감을 받았다. 이외에도 작중에서 정부인은 조조가 불륜을 저지르던 학살을 저지르던 언젠가 천벌받을 거라며 화가 난다기 보다는 같이 산 세월이 얼만데 자기에게 막 대하는 것이 허탈하다는 말도 하였다.[47] 조조가 서주는 자신에 의해 무참하게 학살당했던 기억을 잊지않았음을 깨닫는 해당 컷에서 "잊겠냐?"라는 모든 독자들의 마음을 정리해주는 짧고 굵은 한마디가 베스트 댓글로 올라갔으며, 다른 베스트 댓글도 "너 같으면 잊겠냐. 강을 시체로 매웠는데?"라거나 "어떻게 잊냐 그걸"이라고 서주 백성들이 자신이 아닌 유비에게 환호를 보내는 걸 이해못하는 조조를 비판하는 내용이었다.[48] 정사에서 유비가 한중왕에 등극할 때 쓴 한중왕표에서 조조를 동탁과 형님, 아우 할 학살자라고 깠다. 손권도 조조의 학살과 정벌은 정도가 지나치다고 비판했다.[49] 애초에 (말도 안되지만) 설령 인간방패설이 진실이라고 하더라도, 그렇게 인간방패로 삼은 인간들을 주저없이 썰어버렸다는 점에서 조조의 잔학함이 감해지는 것은 아니다. 그저 서주대학살의 가해자가 조조 1인에서 조조와 도겸으로 확장되는 것 뿐이고, 수십만의 백성을 학살한 주체는 여전히 조조다.[50] 장판파 전투 당시 조조의 병사들이 조운과 미부인을 포위하고 다가오는 것을 묘사할 때 "병사들이 효도하러(…) 오는데…"라고 하는 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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