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효원/선수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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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나무위키+상위문서.png   상위 문서: 서효원(탁구)


1. 개요
2. 프로 데뷔 전
3. 프로 데뷔 이후
3.1. 2006년~2010년
3.2. 2011년
3.3. 2012년
3.4. 2013년
3.5. 2014년
3.6. 2015년
3.7. 2016년
3.8. 2017년
3.9. 2018년
3.10. 2019년~2022년
3.11. 2023년



1. 개요[편집]



파일:서효원_프로필.png


탁구 선수 서효원의 선수 경력을 정리한 문서.


2. 프로 데뷔 전[편집]


초등학교 2학년 말부터 탁구를 시작하였는데, '운동을 하면 초코파이 2개를 준다.'는 체육선생님의 꾀임에 탁구부에 찾아갔다가 선수까지 하게 되었다.

원래는 공격수였지만 초등학교 4학년 때 키가 또래보다 큰 서효원을 코치가 수비수로 전향을 시켰다.[1] 수비수로 전향 후 초등학교 5학년부터 전국대회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3. 프로 데뷔 이후[편집]



3.1. 2006년~2010년[편집]


2006년 3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신생 실업팀이었던 현대시멘트[2] 탁구단에 입단했다.

다만, 유소년 시절 4강권에 드는 성적이긴 했어도 청소년 대표팀에는 뽑히지 못하는 등 각광받는 유망주는 아니었고, 설상가상으로 고3 때 러버 교체 이후 적응에 실패해 슬럼프가 왔고 무리한 연습으로 실업팀 입단 직후 허리디스크 판정[3]을 받았다.

이후 수술을 거쳐 1년이 넘은 재활을 견디고 복귀해 매일 12시간씩 재활하며 코어근육 강화, 런닝에 치중한 결과 체력과 파워가 늘어 선수로서 한 단계 도약했고, 입단 동기인 조하라, 남소미를 앞세워 종합선수권대회 3위를 차지했다.

2008년 대통령기 4강에 진출, 이어 삿포로 아시안컵에서 일본의 간판인 `아이짱' 후쿠하라 아이를 꺾는 `녹색 테이블 기적'을 연출하며 4위에 오르면서 팀 내 '에이스'로 불렸고, 조하라와 국가대표 상비군으로 월드투어에 참여할 가능성을 열었지만, 대침체로 재정적으로 어려워진 모기업 현대시멘트가 그해 10월 탁구단을 해체하면서 사실상 갈 곳을 잃을 처지가 되었다.

당시 세계 랭킹 100위권 밖이었고, 국내에서도 신생팀 돌풍으로 성장했지만, 크게 두각을 보이지 않았던 그저그런 선수였다. 이런 그녀에게 가능성을 발견하고 손을 내민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한국 여자탁구의 전설 현정화였다. 현정화는 한국마사회에 서효원을 스카웃했고 집중적인 케어와 훈련, 그리고 마사회의 지원까지 더해지면서 서효원은 점점 성장하게 되었고, 월드투어에도 참가할 수 있게 되었다.

이후 서효원은 2009년 3월 처음으로 세계랭킹 100위권에 진입했고, 2010년 2월 슬로베니아 오픈 여자 개인 단식 8강에 진출하며 탁구계에 서서히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3.2. 2011년[편집]


2011년 3월 제천실내체육관에서 진행된 '국가대표 선발전'에 A조에 참가해 10승 3패의 성적으로 조 2위에 올라 국가대표 상비군으로 선발되었다. 3월에 개최된 ITTF 월드투어 2011 폴란드 오픈에서 생애 최초 4강에 오른 서효원은 세계랭킹 100위권에 진입한 지 2년만에 50위권에 진입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그러나 이때 18살의 나이로 단숨에 세계랭킹 50위권에 진입한 탁구 신동 양하은에게 모든 스포트라이트가 쏠렸고, '유망주' 나이가 지난 '25세의 수비형 선수'는 언론의 관심 대상이 아니었다.

파일:서효원_2011_KOR.jpg
ITTF 월드투어 2011 코리아 오픈

그러다가 2011년 6월 29일~7월 3일 인천에서 열린 코리아 오픈은 서효원의 인생을 바꿔놓게 된다. 세계랭킹이 낮아 본선 시드를 받지 못한 서효원은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그룹별 예선부터 거쳐 본선에 오를 수 있었는데, 본선 32강 첫 경기에서 일본의 에이스이자 당시 세계랭킹 8위 이시카와 카스미를 만나 세트 스코어 4-2(5-11,11-8,17-15,7-11,11-9,11-8)로 격파하며 16강 진출에 성공했고 기세를 몰아 8강까지 진출한 것이다. 경기 내적으로도 큰 성과였지만 무엇보다 경기 외적으로도 어마어마한 변화[4]를 겪게 되었다. 나름 무명의 선수가 갑자기 받게 된 관심과 기대는 자칫하면 독이 될 수도 있으나 서효원은 더 자신감과 책임감을 가지고 경기를 하게 되어 실력이 크게 발전한 계기가 되었다고 훗날 인터뷰에서 밝혔다.

파일:SHW_2011.jpg
2011년 12월 종합선수권 우승 직후 서효원과 현정화

이후 12월 말 국내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제65회 종합선수권[5]에서 국내 최강자들을 연달아 격파하며 성인무대 데뷔 이후 첫 우승[6]을 하는 이변을 연출했다. 게다가 상대도 16강에서 국가대표 주전이던 석하정(세계랭킹 23위), 8강에서 탁구 신동 양하은(세계랭킹 20위), 4강에서 같은 수비전형 선수인 윤선애(세계랭킹 56위)를 꺾었고, 심지어 결승에서는 중국에서 귀화한 차세대 에이스 전지희(세계랭킹 33위)를 상대로 최종 스코어 4-0(11-5 11-5 11-8 11-3)으로 완파하면서 서효원 자신의 이름을 알리면서 세계적인 선수로의 가능성을 펼치는 시발점이 되었다.


3.3. 2012년[편집]


2012년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5월에 열릴 세계선수권에 참가하기 위해 상위 2위 이내의 성적이 필요했으나 8승 9패의 성적으로 10위에 그치면서 상비군에서도 떨어졌다[7]. 그 해 월드투어에서는 눈에 띄는 성과는 없었지만, 헝가리 오픈과 체코 오픈에서 8강에 올랐고 예선에서 떨어지는 일 없이 안정적으로 본선 진출을 하였다.

2012년 11월 MBC 탁구 최강전 결승전에서 여자 실업 최강팀 대한항공을 상대[8]로 빼어난 활약을 펼쳐 소속팀 한국마사회의 우승을 이끌었다.

한편 이 해 2012 런던 올림픽이 끝나면서 그동안 대한민국 여자 탁구계를 책임지던 에이스 김경아와 당예서, 박미영이 모두 은퇴하면서 녀자 탁구 국가대표에 '세대교체'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3.4. 2013년[편집]


상술된 이유로 2013년도 국가대표 선발전은 그 어느 때보다 경쟁이 치열했고, 서효원은 선발전에서 4승 5패의 빼어난 성적을 거두고 27살에 생애 처음으로 국가대표로 발탁되었고, 월드투어에서도 좋은 성적을 꾸준히 내기 시작해서 세계랭킹 30위권에 안착하고 국가대표 주전경쟁에서 우위를 보이기 시작했다. 이후 3월에 열린 2013 세계선수권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7라운드 1위로 대표팀 막차를 탐으로써 성인무대 진출 이후 처음으로 탁구 4대 메이저 대회(올림픽, 세계선수권, 월드컵, 그랜드 파이널스)에 참가하게 되었다.



출전한 광저우 월드팀 클래식에서 전반적으로 지나치게 긴장한 모습을 보이면서 경기력 난조를 보였고, 8강 일본전에서 이시카와 카스미, 히라노 사야카에게 완패하며 패배의 쓴맛을 보았지만, 겨우 일주일 뒤 코리아 오픈에서 이시카와 카스미를 꺾고 생애 첫 월드투어 우승을 차지해 세간의 우려를 말끔히 잠재웠다[9]. 이 우승으로 2013년 5월 세계랭킹은 21위에 올라 자신의 최고 기록을 갱신했다.

이후, 2013년 5월 파리 세계선수권에 참가하여 개인 여자 단식 16강(당시 대한민국 남녀 탁구 선수 중 가장 좋은 성적)으로 국내 1인자의 자리에 올라섰고, 6월 30일~7월 7일까지 부산 사직실내체육관에서 진행된 2013 부산 아시아선수권 대회에 참가. 3개월 전 광저우 월드팀 클래식에서의 치욕을 씻고 홍콩과의 단체전 8강에서 제 몫을 해냈고, 여자 개인 단식에서도 비록 16강전에서 당시 세계랭킹 1위의 중국의 에이스 딩닝에게 0-4로 완패해 홈에서 벌어진 대회에서 시상대에 오르진 못했지만, 서효원 본인에게 있어서 여자 탁구 대표팀의 주축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이후 텐진 동아시아 경기대회에서 중국의 주위링(세계랭킹 5위)을 꺾는 등 상승세를 보인 서효원은 11월 초에 개최된 폴란드 오픈에 참가해 두 번째 월드투어 우승[10]을 이루었다.

파일:서효원_세계랭킹그래프.jpg
2013년 서효원의 ITTF 세계랭킹 포인트 변화

이로써 서효원은 세계랭킹 43위(2013년 2월)→12위(2014년 1월)에 오르면서 엄청난 성장세를 보여주면서 TOP 10 진입에 조금씩 다가섰다.


3.5. 2014년[편집]


2014년 3월 세계랭킹 9위에 오르면서 드디어 생애 첫 세계랭킹 TOP 10 진입[11]했고, 4월 세계선수권 대회(4월 28일~5월 4일)에서 12강 진출[12] 이어진 2014 인천 아시안 게임 단체전에서 일본을 상대해 이시카와 카스미후쿠하라 아이에게 1승 1패를 거두는 활약을 했지만 팀은 2-3으로 또다시 패배했다.

이후 탁구공이 '셀룰로이드 재질'에서 '플라스틱 재질'로 바뀌는 대변화가 생겼고 탁구공의 변화로 많은 선수들은 회전량, 스피드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해 각종 이변들이 일어났는데, 서효원도 이후 참가한 월드컵 16강전에서 장화쥔에 패배해 조기 탈락의 수모를 겪었지만, 이후 월드투어 그랜드 파이널스[13]에서 준우승을 하는 쾌거를 이루었는데, 이는 역대 출전한 한국 여자 탁구 선수 중 역대 최고의 성적이다.




3.6. 2015년[편집]


첫 월드투어인 2015 쿠웨이트 오픈에서 8강에 진출하며 순조롭게 시작을 시작했고, 이어 2015 자이푸 아시안컵 예선 C조로 배정받아 인도의 무명 선수와 싱가포르의 위멍위에게 2승, 이시카와 카스미에게 1패를 거두며 본선 진출. 최종 성적 6위로 월드컵 진출을 확정지었고 세계랭킹도 3개월 연속 탑 텐을 유지하였다. 이후 2015 세계선수권에서 128강에서 미국의 자 프라치를 4-0으로 완파하며 64강에 올랐으나, 64강에서 같은 팀(한국마사회)의 박영숙을 만나 세트스코어 2-4로 패배하여 대회를 마감하였다.

파일:서효원_슈퍼리그.jpg
중국 슈퍼리그 경기 모습

2015년 5월 세계 최고의 탁구 프로리그인 중국 슈퍼리그(CTTSL)에 진출해 임대[14]로나마 경기를 뛰면서 월드투어에서는 벨라루스 오픈, 일본 오픈, 한국 오픈에서 꾸준히 8강에 들면서 좋은 성적을 유지했으나 8월에 들어서면서 2번 연속 32강 탈락, 심지어 64강 탈락을 하는 등 갑작스러운 부진에 빠졌다[15].



하지만, 9월 벨기에 오픈에서 세계랭킹 7위 펑톈웨이를 꺾으면서 세 번째 월드투어 우승을 하면서 세계랭킹 TOP 10에 재진입했다.

파일:2015파타야아시아선수권대회8강전.png
2015 아시아선수권 8강전 대한민국 vs 싱가포르

이후 2015 아시아선수권 단체전에 출전하여 혼자 2승을 거두며 8강전에서 강호 싱가포르를 격파하고 4강에 진출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위멍위를 세트스코어 3-1로 격파하며 기세를 올린 서효원은 단식 4경기에서 다시 한 번 출전해 싱가포르의 에이스 펑톈웨이와 대접전을 벌인 끝에 세트스코어 3-2로 꺾으며 팀의 4강 진출을 확정지었다. 준결승전에서 중국에 패한 여자탁구 대표팀은 동메달을 획득하여 3년 만에 아시아 선수권 단체전 메달을 목에 걸었다.


3.7. 2016년[편집]


독일 오픈과 헝가리 오픈에서 무난히 8강에 올랐고, 이어진 세계선수권 대회 단체전에서는 팀의 에이스로 맹활약을 하면서 예선에서 6전 6승을 올리며 팀을 본선 진출시켰고 독일을 상대로 2-3으로 분패했지만 컨디션은 최고조로 보였다.

그러나 세계선수권 직후 팔꿈치 인대가 60-70% 파열되는 부상을 당햇는데, 필사적인 재활로 경기 출전은 가능했지만 이후 월드투어에서 16강 탈락, 32강 탈락을 반복하는 등 제대로 된 컨디션을 찾지 못한 채 올림픽에 출전하였다.

파일:서효원_리우.jpg
2016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단체전 탈락 직후

결과는 안 좋았다. 먼저 치른 여자 단식에서는 16강은 미국의 릴리장을 상대로 4:1로 손쉽게 승리했지만, 8강에서 난적인 대만의 청이칭을 맞아 접전 끝에 3:4로 분패하여 탈락했다. 여기에 부상이 더 악화되면서 단체전 16강 루마니아 전 2단식에 출전했으나 다니엘라에 선수에게 0:3 셧아웃을 당하고 마지막 5단식에서는 3:2로 아슬아슬한 승리를 거두어 8강에 올랐지만, 싱카포르를 상대로 선봉으로 출전해 에이스 펑톈웨이와 맞붙었으나 0:3으로 완패. 2단식의 전지희와 3복식의 전지희/양하은 조가 분전하여 2:1의 스코어를 만들었으나 서효원이 4단식에서 다시 0:3으로 패배했고 5단식에 출전한 양하은이 펑톈웨이에게 패배하여 단체전에서 탈락하였다. 본인의 첫 올림픽이자 마지막 올림픽이 될 수도 있는 올림픽을 부상과 부진으로 허무하게 날렸고, 동료 선수들에 대한 죄책감으로 서효원은 패배 후 눈물을 보였다.


3.8. 2017년[편집]


올림픽 이후 몸 상태가 더 안 좋은 상황[16]이라 재활에만 힘을 쏟으면서 이로 인해 월드투어에 참가조차 할 수 없었으며 참가한 대회에도 32강에서 탈락하는 등 두각을 보인 2013년 이후 최악의 성적을 기록했다. 그나마 아시아 선수권 단체전에서 2회 연속 동메달을 획득한 것과 아시안컵 본선진출로 월드컵 진출한 것 정도로 끝이 안 보이는 부상과 부진, 그리고 31살이라는 적지 않은 나이는 반등하기에 어려워 보였다.


3.9. 2018년[편집]


2018년 1월 열린 국가대표 선발전에서는 6위로 대표팀에 선발되어 세계선수권 출전이 불확실했지만, 3월 독일 오픈에서 세계랭킹 6위 히라노 미우(16강), 양하은(8강), 세계랭킹 4위 펑톈웨이(4강)를 꺾으면서 결승에 올랐고, 천적 이시카와 카스미에게 패배하여 준우승을 했지만 경기 내용이나 결과 모두 그간의 부진을 깨끗하게 씻었다. 이후 아시안컵에서 본선 진출하여 월드컵 티켓을 획득하는 등 상승세를 이어갔고, 한때 30위까지 추락했던 세계랭킹도 12위까지 끌어올렸다.

파일:2018스웨덴세계선수권.jpg
2018 세계선수권 남북단일팀

4월 28일~5월 6일 스웨덴 할름스타드에서 열린 세계선수권 단체전에 참가했고 좋은 흐름을 이어가 5승 1패의 성적을 거두며 홍콩, 독일을 누르고 조 1위로 8강 진출을 확정지었다. 8강 상대는 북한. 전력상 한국의 우세가 점쳐졌으나 5월 2일 경기직전 남북 단일팀이 성사되어 자동적으로 4강에 진출하게 되었다. 4강 일본전에서는 서효원은 경기출전을 하지 않았고[17] 팀은 패배해 동메달을 획득하며 생애 첫 세계선수권 메달을 목에 걸었다.

7월 대전에서 열린 코리아 오픈에서 단식 8강에 올랐으며, 남북 단일팀으로 북한의 김송이와 복식조를 결성했다. 겨우 하루만 호흡을 맞췄지만 예선을 통과했고 16강에서 세계랭킹 1, 2위 주위링-왕만위 복식조와 3:4까지 가는 접전 끝에 분패했다. 8월에는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 게임에 주전으로 출전해서 8년만에 여자 탁구 단체전 동메달을 가져오는데 기여했고 본인 커리어 최초로 아시안 게임 메달을 획득했다. 하반기에는 월드컵에 출전해 8강에 진출했으며, 2016년 이후 2년만에 그랜드 파이널스 출전권을 얻으며 세계랭킹도 11위로 올랐다.



10월에 일본 탁구 프로리그 T리그의 'TOP 나고야'와 2018-19 시즌 임대 계약을 맺으면서 2019년 2월까지 경기에 출전하면서 중국 슈퍼리그 이후 두 번째 해외 프로리그 진출을 이뤘다.

12월 23일 제72회 종합선수권대회에서 전지희를 꺾고 7년 만에 두 번째 종합선수권 우승[18]을 차지했다.


3.10. 2019년~2022년[편집]


2019년 3월 시즌 첫 국제대회인 카타르 오픈에 출전했으나 32강 경기 직전 무릎 부상으로 기권했고, 이어진 4월 부다페스트 세계탁구선수권대회 여자단식에 출전해 16강[19]에 올라 그해 5월 ITTF 세계랭킹 10위에 오르며 약 4년 만에 TOP 10에 진입했다.

2021년 2월에 열린 2020 도쿄 올림픽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최종 6위로 탈락하며 출전하지 못했고, 11월에 열린 세계선수권 대회 단식에서는 8강에서 쑨잉사에게 세트 스코어 0대 4로 패배해 준결승에 진출하지 못했다.

2022년 2WTT 그랜드 스매시 싱가포르 여자 단식 본선 1회전에서 스웨덴의 린다 베리스트룀을 접전 끝에 3-2(11-8, 8-11, 11-6, 7-11, 13-11)로 이겼다.그러나 본선 2회전(32강)에서 홍콩의 리호칭한테 1-3(11-8,6-11,8-11,4-11)로 패하며 탈락했다.


3.11. 2023년[편집]


2023년 4월에 치러진 아시아 탁구 선수권 대회2022 항저우 아시안 게임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전체 4위로 다시 국가대표에 이름을 올렸다[20]. 이후 평창에서 열린 아시아 선수권 대회에서는 단체전 은메달[21]을 목에 걸었고, 단식에서는 왕만유[22]를 64강에서 일찍 만나 패하였다.

항저우 아시안 게임에서는 여자 단체전에서 일본에 지면서 동메달을 획득했고, 단식에서는 16강에서 대만의 정이징에게 패해 8강 진출이 좌절되었다.


[1] 수비전형은 장신 선수가 유리하기 때문에 당시 코치는 서효원의 키가 이미 159cm여서 장신 선수가 될 거라고 예상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후 키가 더 이상 자라지 않아서 2023년 현재 서효원은 수비전형 선수들 중 최단신이다.[2]한일시멘트의 자회사.[3] 병원에서 "선수생활이 끝났다."라는 진단을 내릴 정도로 부상은 심각했다.[4] 2011 코리아오픈은 대한탁구협회가 오랜만에 홍보에 신경을 써서 국내 선수들과 세계 탑 랭커들의 경기를 지상파에서 중계했다. 본선 32강 첫날 이시카와 카스미와 서효원의 한일전을 중계했는데, 랭킹 하위권인 서효원이 업셋을 일으킨 경기 내용 뿐만 아니라 예쁜 외모까지 주목 받으면서 하루종일 주요 포털 사이트 실시간 검색어 1위를 하게 된 것이다. 비인기 종목인 탁구 선수가 올림픽도 아닌 시기에 검색어 1위에 오른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결국 방송국에서도 16강, 8강 경기 모두 TV 중계를 해줬고 그때마다 실시간 검색어에 드는 등 서효원은 대중과 언론의 집중 관심을 받으며 탁구얼짱으로 불리게 되었다.[5] 1947년 제1회 대회를 시작으로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국내 최고의 전통과 권위를 가진 탁구 대회로 국가대표부터 초등학생까지 모든 선수들이 참가하며 'National Championship'의 지위를 가진 대회이다.[6] 수비수로는 윤기숙(1963, 1964, 1967), 박홍자(1979) 이후 역대 세 번째이자 무려 32년만에 종합선수권에서 우승한 수비전형 선수로 수비수들은 사실 국내 공격수들과 어릴 때부터 같이 훈련해 구질과 전략이 파악되었기 때문에 국내 대회에 매우 약하다.[7] 당시 상비군에는 상위 8명까지 주어졌다. 그래도 추천천수에 뽑히면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8] 선수로는 당예서(세계랭킹 20위), 석하정(세계랭킹 22위), 양하은(세계랭킹 26위)로 국가대표 주전급 선수였다.[9] 이 우승이 더욱 뜻 깊었던 것은 펑톈웨이(당시 세계랭킹 4위), 이시카와 카스미(당시 세계랭킹 9위)라는 세계랭킹 TOP 10 선수를 무려 두명이나 꺾으면서 우승을 차지했다는 점이다.[10] 사실 그동안 세계 10권 이내의 선수들에게는 해볼만 했지만 중국 선수들에게는 약했는데, 무려 3명의 중국 선수들을 격파하며 우승한 것이다. 물론 당시 중국은 2진 선수들이 참가했었다.[11] 대한민국 여자 탁구 역사로는 양영자-현정화-류지혜-김경아-박미영에 이어서 여섯번째로 TOP 10에 진입한 선수였다.[12] 본선 12강에서 서효원 본인은 단식에 두번 출전해 2승을 거두는 활약을 했지만 팀은 2-3으로 루마니아에게 패배하여 8강 진출에 실패했다.[13] 1년 동안 열린 월드투어에서 상위 16명만을 초대해 경기하는 것으로 올림픽, 세계선수권, 월드컵과 더불어 탁구 4대 메이저 대회 중 하나[14] 2015/2016 시즌에 지린팀 1년 계약을 맺었는데, 꾸준히 경기에 출장하면서 2016-17 시즌까지 계약을 연장했다.[15] 2016년 리우 올림픽 탁구 단식 출전권을 얻기 위해서는 국내 선수들 중 세계랭킹 2위까지 해야 하는데 전지희, 양하은이 치고 올라오면서 확실해 보였던 단식 출전권이 불안해 보였다.[16] 팔꿈치 인대는 80-90%까지 파열되었으며 왼쪽 무릎 부상도 심각했다.[17] 세계선수권 단체전은 3명만이 출전할 수 있는데 단일팀 상징성을 위해 반드시 출전시켜야 될 북한의 에이스 김송이가 서효원과 같은 수비전형으로 포지션이 겹쳐 서효원이 엔트리에서 빠졌다.[18] 2011년 32년만에 종합선수권 우승한 수비수였는데, 두 번째 우승으로 1964년 윤기숙 이후 54년만에 2번째로 2회 우승한 수비전형 선수가 되었다.[19] 2013년 이후 6년 만에 세운 본인의 최고성적 타이 기록.[20] 마지막 경기에서 오랜만에 양하은 선수를 이김으로써 4승2패로 양하은, 김나영과 동률을 이뤘지만 승자승 원칙에 따라 양하은과 김나영을 이긴 서효원이 김나영 대신 올라가게 되었다.[21] 8강에서 태국, 4강에서 홍콩과의 경기에 출전하여 승리를 거두었지만, 본인이 빠진 결승전에서 중국에 패했다.[22] 이 선수는 해당 대회에서 금메달을 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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