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종(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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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제6대 대왕
성종 | 成宗

파일:성종(고려).jpg
성종(가운데)의 동상[1]
출생
961년 1월 15일
고려 황도 개주
(現 경기도 개성시 송악동)
즉위
981년 8월 14일
고려 황도 개주 정궁
(現 경기도 개성시 송악동)
사망
997년 11월 29일 (향년 36세)
고려 황도 개주 정궁 내천왕사
(現 경기도 개성시 송악동)
능묘
강릉(康陵)
재위기간
고려의 정윤 및 개령군
981년 8월 11일 ~ 981년 8월 13일
제6대 대왕
981년 8월 14일 ~ 997년 11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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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개성 왕씨

치(治)
부모
부왕 대종
모후 선의왕후
형제자매
3남 3녀 중 2남
배우자
문덕왕후, 문화왕후
자녀
2
종교
불교

온고(溫古)
묘호
성종(成宗)
시호
강위장헌문의대왕
(康威章憲文懿大王)
양정헌명광효장헌강위문의대왕
(襄定獻明光孝章獻康威文懿大王)[1]
봉호
개령군(開寧君)
절일
천춘절(千春節) → 천추절(千秋節)[2]

1. 개요
3. 생애
4. 업적
4.1. 유교식 예법 도입
4.2. 불교 폐단 개선
4.3. 군대 편제 재편
4.4. 국가 조직 재편
4.5. 지방제도 개편
5. 가족관계
6. 평가
6.1. 개혁정책의 회귀
7. 기타
8. 요성 행차의 미스테리
9. 대중매체



1. 개요[편집]


고려의 제6대 대왕. 묘호는 성종(成宗), 시호는 문의대왕(文懿大王), 휘는 치(治), 자는 온고(溫古).


2. 묘호시호[편집]


공식 묘호는 '성종'(成宗), 묘호를 달리 불러 '성묘'(成廟)라고도 했다. 성종은 특이하게 태묘를 도입할 때 제후가 사용하는 5묘제를 따랐지만 선왕들에게 묘호를 바쳐 천자(天子)로 대우했다. 시호는 대부분 고려 임금이 그렇듯 2가지 버전이 있다.

종묘에는 두 가지 제도가 있는데 천자의 7묘제, 제후의 5묘제가 그것이다. 세간에는 고려가 처음 태묘를 세울 때 5묘제를 택하고 있어 성종 시기 일시적으로 제후국의 예를 따른 것이라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는 고대 중국에서 만들어낸 제도를 현재의 시각으로 도식화하여 받아들인 탓에 생긴 오해로, 실은 중국의 경우도 건국 초기에는 7묘를 채우지 못했다. 성종은 오히려 지방 세력을 억누르고 왕실의 권위를 강화하기 위해 절일을 도입하고 환구단을 설치하는 등 유교적 관념의 천자국 체제를 확립시킨 군주였다. 애초에 태묘라는 용어 자체가 천자국에서 쓰는 말이다. 모든 제도란 항상 엄격한 구속력을 가지고 적용되는 게 아니라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탄력적으로 운용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일부 단편적 사례를 끄집어 와서 천자제후를 구별짓고 단정하는 것은 주의가 필요하다. 당대에는 특이할 게 없었던 일상도 현대인의 고정된 관념을 가지고 끼워 맞추면 마치 그것이 특이한 사례로 잘못 인식되어 확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비슷한 사례로 중국에서도 천자의 6군(5군) 체제와 제후의 3군 체제를 군력의 필요 여부에 따라 탄력적으로 운용했던 사실을 들 수 있으며, 심지어 상국으로 모시던 금나라의 황제를 '폐하'(陛下)가 아닌 '전하'(殿下)로 부른 기록도 있다. "남송의 사신 위기(魏杞)와 강서(康湑)는 금나라 궁궐에 들어가 황제를 알현하고 효종의 국서를 전하였다. 국서에 따르면, '조카 송 황제 신(昚)은 삼촌 대금(大金) 성명인효황제(聖明仁孝皇帝) 전하(殿下)께 삼가 조아리며 서신을 올립니다'라고 하였다. 위기가 돌아갈 때 회신을 보냈는데 금 황제는 '조카 송 황제에게 국서를 보낸다'라고만 하여 존칭을 사용하지 않았으며 전하(殿下)라는 표현도 쓰지 않았다." 〈전사들의 황금 제국 금나라-동북아역사재단 연구총서, 29p〉|“大定五年正月,魏杞康湑入見,其書曰,侄宋皇帝眘謹再拜致書于叔大金聖明仁孝皇帝闕下.魏杞還,复書,叔大金皇帝,不名,不書謹再拜." 《金史·仆散忠義傳》

  • 《고려사》 <성종 세가> -총서-:
강위장헌문의대왕
(康威章憲文懿大王)

  • 《고려사》 <성종 세가> 마지막 조:
양정헌명광효장헌강위문의대왕
(襄定獻明光孝章獻康威文懿大王)

대표 시호는 후계자 목종이 올린 문의대왕(文懿大王)으로 묘호와 시호를 같이 불러 '성종 문의대왕'(成宗 文懿大王), 약칭 '성종 문의왕'(成宗 文懿王)이다. 현종(제8대)이 세운 현화사비에는 '성종 문의대왕'(成宗 文懿大王)으로 등장하며 시호를 생략한 '성종대왕'(成宗大王)으로도 나온다.
파일:attachment/tjdwhdfmd.jpg
북한 판문군 진봉리에 남아 있는 성종의 강릉(康陵)[2]

파일:고려 성종 강릉.jpg

최근 사진


3. 생애[편집]


고려의 역대 개령군
대수
작호
이름
초대
정윤(正胤) 개령군(開寧君)
왕치(王治)
2대
개령군(開寧君)
왕송(王誦)

태조와 제4비 신정왕후 사이의 아들인 왕욱[3]과 태조와 제6비 정덕왕후 사이의 딸인 선의왕후 유씨 사이에서 3남 2녀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형으로 효덕태자가, 남동생으로는 경장태자가 있으며, 여동생들로는 선왕인 경종(제5대)의 제3비가 되는 헌애왕후와 제4비가 되는 헌정왕후가 있다.

헌정왕후는 헌애왕후의 언니이자 성종의 누나일 확률도 있다. 현화사비에 나오는 구절

成宗大王之次姉也

에서 '손위 누이 자'(姉)가 있어 뜻풀이하면 성종대왕의 둘째 누나다. 그런데 오늘날도 누나의 남편을 '자형'(姉兄)이라 안 하고, '손아래 누이 매'(妹)자를 써서 '매형'(妹兄)이라 한다든가 누나나 여동생 상관없이 '남매'(男妹)라고 하는 것으로 보면 '손위누이 자'(姉)를 그냥 여자 형제 단순히 누이라는 의미로 쓰였을 가능성도 있다. 어쨌든 연구가 더 필요한 부분이다.

성종은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는다. 《고려사》에 성종이 겨우 젖니를 갈 나이가 되어 어머니를 여의었고, 또 어린 나이에 이르러서는 아버지마저 잃었다고 나와 있다. 젖니를 갈 나이는 7~8세를 말하는 것이므로, 선의왕후 유씨는 967년경에 사망한 걸로 추정할 수 있다. 아버지인 대종은 969년 음력 11월에 사망했다고 《고려사》에 나온다. 그래서 할머니인 황보씨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랐다. 이미 어릴 적부터 공부를 좋아하고 학문에 능했다고 한다.

경종이 말년에 정사에 뜻을 잃고, 향락에 빠져있던 중 병으로 쓰러졌는데 당시 그의 아들이었던 왕송은 아직 젖도 떼지 못한 어린 아이였다. 큰 혼란이 야기될 것을 염려한 경종은 자신의 사촌 동생이고, 누이 문덕왕후의 남편이며, 아내들의 오빠로서 아들의 외삼촌 겸 고모부 겸 당숙이 되는 성종에게 선위를 하고 붕어했다.

사실 성종에게는 효덕태자라고 불리게 되는 친형이 있었으나 아마 광종(제4대)의 사위라는 점이 형을 제치고, 왕위에 오를 수 있는 결정적 요인이 아니었을까 싶다. 또한 효덕태자는 동생인 경장태자와 달리 자식유무가 《고려사》에 나와있지 않아 일찍 요절한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사절요》에는 성종이 등극하기 전, 정윤(正胤)의 작위와 '개령군'으로 봉해졌다고 나와 있다.[4] 그리고 《고려사》에는 개령군 봉호만 나온다. 결국 성종이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즉위 후 학자 출신의 최승로를 등용해 그의 <시무 28조>를 받아들였다. 또한 서경장락궁에 가 경종의 아들 왕송을 자신의 후계자로 공인했다. 이 때 자신의 태자나 정윤으로 봉하지 않고, 자신의 봉호를 물려주는 특이한 방식을 썼다.

이후 거란의 장수 소손녕의 제1차 침입으로 평양 이북을 넘겨줄 뻔 했으나 문신 서희의 정확한 판단과 담판 성공으로 강동6주를 획득해 위기를 기회로 바꾸어 놓았다. 사실 이 대목은 서희의 개인 활약이 컸다. 서희를 제외한 조정의 대세는 땅을 떼어주자는 것과 항복론뿐이었다. 이때를 거란의 1차 침입으로 부르며 자세한 것은 제1차 여요전쟁서희 문서 참고.

38세라는 젊은 나이에 병으로 붕어했다. 붕어하기 직전 왕의 병을 낫게 하기 위해 대사면을 내리자는 말에

"사람 목숨은 하늘에 달렸는데 그래 봤자 뭐하며 나를 계승할 사람은 무엇을 가지고 새 은혜를 베풀 것이냐."

며 거절했다. 죽기 전 후계자 개령군을 직접 대면해 왕위를 전하였고 내천왕사(內天王寺)로 이동하였다. 궁궐 내에 있어서 '내'(內)천왕사라고 한 듯하다. 궁궐 안에 있는 제석원도 내제석원이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천왕사에서 붕어했다. 아들은 없었으며, 만 있었다.


4. 업적[편집]



4.1. 유교식 예법 도입[편집]


성종은 유교에 입각한 정치를 지향했지만, 엄연한 국교로 자리매김한 불교 역시 무시하지 않았고, 불교와 유교를 접목시켜서 고려에 유교적 제사를 도입했다.
천자와 그 일족의 생일에는 좋은 의미를 담은 명칭을 붙혀 축하하는 관습이다. 이를 '절일'이라 부르는데 당나라 때 시작된 제도로서 우리 역사상 성종이 처음으로 도입했다.

천자는 주나라의 예법을 유교가 정리한 체계를 따라 상제(上帝)와 5방제(五方帝)에게 제사를 지냈다. 이 제사를 '환구', 제단을 '환구단'이라 일컫는다. 하늘이나 천신 숭배 사상은 우리나라에서도 매우 오래 전에 자리잡았던 신앙이었지만 유교 예법을 따른 숭배 방식이 도입된 건 고려 성종 때가 최초였다.

신라 왕실에도 사직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지만 상세한 기록은 아니었다. 언제 세웠는지 어떻게 세웠는지 등 자세한 기록이 남아있는 사직은 성종 시기가 최초이다. 사직은 땅의 신에게 제사지내는 것으로 유교식 제사의 대표급이다.

태묘, 대묘 혹은 종묘라고 불리는 제사는 유교식 왕실 제사 중 가장 중요한 제사였다. 새 국가를 건국하거나 운영했던 군주들을 추모하고 존중하기 위해 지내는 제사로 천자의 7묘제, 제후의 5묘제가 규정돼 있었으나 당시 여건에 따라 탄력적으로 운용되었다. 고구려, 신라, 발해도 종묘가 있었다는 기록이 전해오지만 신라를 제외하고 기록이 다들 적거나 거의 없는 수준이다.

한국사 최초로 종묘에 군주와 같이 모셔질 배향공신을 선정했다. 초대 태조부터 5대 경종까지 공신을 뽑아 같이 모셨으며, 본인이 추존한 부왕 대종은 추존 군주이니 제외되었다.

'교'(敎)는 제후가 내리는 명령이라 알려졌으나 이 또한 중국의 제도 및 용어들이 고려에서는 그 내용이나 의미가 서로 다르게 사용됐던 경우를 간과하여 발생한 선입견으로, 고려 전·중기 천자국(天子國) 제도의 교서를 14세기 이후 제후국(諸侯國) 제도의 교서와 혼동한 결과 잘못 알려진 사실이다. 천자가 내리는 명령은 '성'(聖), '선'(宣)이라고 하는데 고려는 지금까지 성지, 선지를 사용했다. 하지만 성종 대에 교(敎)를 추가로 도입했는데 당대의 사료인 《보한집》에 따르면, 교서의 연원과 관련하여
“원수(元狩) 6년(B.C.127)에 처음 고(誥)를 지으면서 대신에게 고시(告示)하기를 교(敎)라 하였는데 이는 곧 진(秦)나라의 제도이다”
라고 서술되어 있다. 고려 전·중기에 천자(天子)의 명령서 중 하나였던 교서(敎書)는 제서(制書)·조서(詔書)·칙서(勅書) 등과 함께 해당 용도에 따라 정형화되었으니, 《동국이상국집》권별 표제에서도 권 33 <교서>(敎書)·<비답>(批答)·<조서>(詔書)로 나타난다. 뿐만 아니라 제31대 경효대왕(敬孝大王, 공민왕)이 반원정책을 시행한 이후 고려의 구제(舊制)를 복구한 시점에서 작성된 <죄삼원수교서>를 살펴보아도 역시 서두의 명칭을 선지(宣旨)라 했으며, 본문에 거론된 인물들에게는 칙서(勅書)·선시(宣示) 등의 용어가 사용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즉 성종은 고려 전기 광종과 더불어 유교적 관념의 천자국 체제를 확립하는 차원에서 중국의 여러 제도를 적극 도입했던 것이다. (노명호,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의 사료적 특성>, 2019)


4.2. 불교 폐단 개선[편집]


한편 태조의 <훈요 10조>에 포함된 '불교 숭상'에 따라 거행해 온 팔관회연등회를 즉위 직후 폐지했다. 일단 성종 개인이 유교적인 성향이 강한 이유도 있었겠지만 사실 이에는 꽤 복잡한 사정이 있는 것이 이들 두 행사가 전국적으로 치르는 거대한 종교 행사인 만큼 한번 지낼 때마다 엄청난 국비가 소모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모든 부담은 백성들에게 전가되는 터라 백성들의 힘겨움 역시 장난이 아니었다. 이러니 이러한 종교 행사보다는 일단 고려의 기틀을 잡는 것을 더욱 우선시했던 것이다. 다만 팔관회와 연등회는 현종(제8대) 이후에 금방 다시 부활해 고려가 멸망할 때까지 계속했다.


4.3. 군대 편제 재편[편집]


고려군 편제


[ 무신정변 이전 ]

고려 초기
국왕 친위대

내군 內軍

시위군 侍衛軍

군단 편제

보군
步軍

해군
海軍

마군
馬軍

(기)광군
(奇)光軍

개정군
開定軍

지천군
支天軍

천무군
天武軍

우천군
佑天軍

간천군
杆天軍

보천군
補天軍

성종 이후
12주 절도사 군단 편제

황주 우신책군
黃州 右神策軍

해주 천덕군
海州 天德軍

양주 좌신책군
楊州 左神策軍

광주 봉국군
廣州 奉國軍

충주 창화군
忠州 昌化軍

청주 전절군
淸州 全節軍

공주 안절군
公州 安節軍

상주 귀덕군
尙州 歸德軍

진주 정해군
晉州 定海軍

전주 순의군
全州 順義軍

나주 진해군
羅州 鎭海軍

승주 곤해군
昇州 袞海軍

현종 이후
국왕 친위대

공학군 控鶴軍

견룡군 牽龍軍

순검군 巡檢軍

부대 편제

경군(중군) 2군 6위


응양군 鷹揚軍

용호군 龍虎軍


좌우위 左右衛

흥위위 興威衛

신호위 神虎衛

천우위 千牛衛

금오위 金吾衛

감문위 監門衛


외군


별도 편제

주현군 州縣軍
주진군
州鎭軍
별무반
別武班
1품군 ~ 3품군
品軍


}}}
{{{#!wiki style="min-width: 100px; display: inline-block; min-width: 30%"
[ 무신정변 ~ ]

무신정권~최씨 무신정권 이후
국왕 친위대

위국초맹반 衛國抄猛班

후벽後壁

부대 편제
삼별초 三別抄
도방
都房
야별초 夜別抄
좌별초
左別抄
신의군
神義軍
우별초
右別抄
1번 ~ 6번

원 간섭기
국왕 친위대
지방군 편제
홀치 忽赤
익군
翼軍
대전홀치 大殿忽赤
세자부홀치 世子府忽赤
공민왕 이후
국왕 친위대 겸 중앙군
군단 편제

충용위
忠勇尉

근시위
近侍尉

별보위
別保尉

자제위
子弟衛

익군
翼軍




성종 이전에는 고려의 군대가 이원화되어 있었다. 중앙 정부에서 통제하는 국왕군과 지방의 호족들이 통제하는 사병들로, 고려는 이전부터 호족을 통제할 방법을 찾고 있었다. 제3대 정종은 거란의 침략을 빌미로 광군을 만들어 30만 대군을 형성했다.

그러나 300,000명에 달한다는 광군은 농업과 군역을 병행하는 부병도 못되는 수준으로 노역만을 담당하는 노동부대였다. 후일 고려의 지방군이 주현군으로 개편될 때도 광군은 노역만을 담당하는 1품군, 2품군, 3품군으로 편성되었으며, 20,000명이 채 안되는 1품군을 제외한 대다수를 차지하는 2품, 3품군은 아예 중앙조정의 통계에서도 빠져 있었다. 이들은 국왕군 소속이 아닌 지방 호족들의 군사로 채워져 일종의 예비군 형태를 띄었다. 이후에도 광종이 대대적으로 호족을 숙청했고, 성종은 이 때를 틈타 2군 6위 체제를 조직하여 구상했다.

고려는 군대를 크게 중앙군인 '경군'(京軍)과 '지방군'(광군·진수군→주진군·주현군)으로 구분했다. 경군개경과 주변 지역에 주둔했으며 경군 모두가 개경 및 개경 주변에 주둔했는지에 대해 논란이 있으며, 이는 경군의 인적 구성 문제와도 관련된다. 국왕의 직접 통제를 받는 군대는 2군 6위였다. '2군'은 응양군, 용호군이었으며, '6위'는 신호위, 흥위위, 좌우위, 금오위, 천우위, 감문위였다. 편제의 상•하는 응양군이 제일 높고, 다음 용호군 > 신호, 흥위, 좌위위 > 금오, 천우, 감문위 순이었다. 또 지방군은 각 지역과 각 국경에 주둔하며, 국왕이 임명한 관리가 통솔하는 주현군, 주진군이었다.

이중 중앙군인 2군 6위의 총병력은 편제상 45,000명이었지만 평시에는 이보다 적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문제가 되는 것은 2군 6위의 인적 구성인데 종래에는 세습군인들이 개경과 주변지역에 주둔하며 병력을 구성했다는 '군반씨족제설', 지방의 농민들이 순서가 되면 번상입역(番上入役)하여 병력을 구성했다는 '부병제설'이 대립했으나 최근에는 양자를 절충하여 전업군인과 번상입역하는 농민군 두 부류의 군인들이 병력을 구성했다는 '경·외군 혼성제설'이 학계의 지지를 받고 있다.

성종의 편제는 고려의 군대 편제에 크게 영향을 미쳤고, 그가 구상한 체제는 목종(제7대) 대를 거쳐 6위가 완성되고, 현종(제8대) 대에 2군이 설치되어 이를 바탕으로 국왕의 친위대인 견룡군, 순검군, 공학군 등이 추가로 만들어질 수 있게 되었다.

외군인 주현군과 주진군은 성종 대에 완성시키지 못했다. 이는 지방 호족들의 힘이 워낙에 강성했기에 사병을 혁파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성종은 이에 절충안으로 절도사를 제정해 각 지역의 호족 사병들로 하여금 절도사의 군단 밑으로 들어가게 해 점진적으로 힘을 빼기로 결심했다. 성종이 조직한 12주 절도사와 그 군단은 다음과 같다.

  • 현 이북 황해도 일대 주:
    • 황주(黃州) 우신책군(右神策軍) 절도사
    • 해주(海州) 천덕군(天德軍) 절도사

  • 대한민국 경기도 일대 주:
    • 양주(楊州) 좌신책군(左神策軍) 절도사 - 성종은 개경을 중심으로 남쪽 양주에 좌신책군을, 북쪽 황주에 우신책군을 만들어 수도를 보호했다.
    • 광주(廣州) 봉국군(奉國軍) 절도사

  • 현 대한민국 충청도 일대 주:
    • 충주(忠州) 창화군(昌化軍) 절도사
    • 청주(淸州) 전절군(全節軍) 절도사
    • 공주(公州) 안절군(安節軍) 절도사

  • 현 대한민국 경상도 일대 주:
    • 상주(尙州) 귀덕군(歸德軍) 절도사
    • 진주(晉州) 정해군(定海軍) 절도사

  • 현 대한민국 전라도 일대 주:
    • 전주(全州) 순의군(順義軍) 절도사
    • 나주(羅州) 진해군(鎭海軍) 절도사
    • 승주(昇州) 곤해군(袞海軍) 절도사

이 제도는 호족의 사병을 해체시키지는 못해도 최소한 중앙정부의 통제하에 둘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고, 목종 대에 북방 양계를 제외한 절도사 제도 폐지, 현종 대에 완전 폐지를 통해 주현군과 주진군 제도가 완성되는 것으로 그 사명을 다한다.


4.4. 국가 조직 재편[편집]


... 성종이 크게 제도를 새로 만들어 내외 관직을 정했다. 중앙정부엔 성, 부, 대, 원, 시, 사, 관, 국이 있었고, 지방제도엔 목, 부, 주, 현이 있었다. 관위에 계급과 정원이 있으니 일대의 제도가 준비되었다. 문종, 예종이 비록 조금씩 증감했지만 대개 성종의 옛 제도를 이은 것이니 자손이 서로 지켜 왔다. ...

《고려사》 <백관지> -서문- 中


고려 초기에는 태조신라태봉의 제도를 섞어 만든 6관제를 사용했다. 광평성, 내의성, 내봉성이 있었고, 내봉성 밑에 6관이 설치된 모습이었는데 성종이 당나라3성 6부제를 변형한 2성 6부제로 대체했다. 성종이 만든 2성 6부, 중추원-중서문하성 양부 체제는 조금씩 바뀌지만 전체적인 토대를 유지한 채로 원 간섭기가 시작된 충렬왕(제25대) 대까지 이어졌다.

성종은 기존 광평성과 내의성을 중서문하성으로 대체했다. 당제(唐制)에는 3성 중 중서성과 문하성이 최고 기관이었는데 성종은 중서성과 문하성을 합쳐 내사문하성(이후 중서문하성)으로 고쳐 중서문하성이 최고 기관이 되도록 했다. 또한 상서성을 두어 기존의 내봉성을 대체했으며 내봉성 6관을 상서성 6부로 대체했다. 상서 6부는 형부, 이부, 병부, 공부, 예부, 호부로써 업무를 나누었으며 각 부 아래에 하위 부서를 설치해 전문성을 높혔다.

그리고 배향공신한언공의 지원을 받아 중추원을 설립했다. 중추원은 '추부', 중서문하성은 '재부'란 별칭을 받아 양부로 묶여 고려의 최고 정부 기관으로 설정했다. 성종은 중추원을 숙위 직으로 보았지만 중추원은 점차 임금의 구두 명령을 전달하고, 국방에 대해 의논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신라의 관등이자 신분제인 골품제가 사라지자 고려는 다시 관등을 짜야 했다. 건국 군주였던 태조 신성대왕태봉의 품계를 참조해 고려만의 품계를 만들었다. 9품 16등위로 총 16단계의 품계가 있었으며 문관과 무관에 상관없이 모든 관료들에게 적용되었다. 태조가 만든 품계는 명칭이 없었고, 성종 초반까지 정식 관작의 품계로 활용되었는데 삼중대광, 중대광, 대광, 좌승, 대승 등 고려의 초기 품계들이 태조의 품계였다.

이후 성종은 북송의 품계를 도입했다. 북송의 품계는 문관의 문산계, 무관의 무산계(武散階)로 나뉘어 적용되었다. 이는 문•무산계 품계의 원조인 당나라의 영향과 북송의 문치주의의 영향이다. 북송은 또 제를 도입했다. 즉, 당제 → 북송제 → 고려제인 셈이다. 그리하여 15품을 만들어 총 15단계의 품계를 만들게된다.

이 품계는 제11대 문종 때 더 심화되어 29품 품계가 완성되었다. 개부의동삼사, 특진, 금자광록대부 등 성종이 만든 '문산계(文散階) 품계'는 성종 대에 적용되어 원 간섭기에 들어서는 충렬왕(제25대) 대까지 유지되었다. 성종의 문산계 품계는 정1품을 비우고, 종1품 개부의동삼사부터 시작하는데 품계에 맞추어 3사•3공 직에는 행수법이 적용되는 등 직위에도 여러 변화가 생긴다.

고려는 태조의 품계 때부터 문•무관의 품계에 차이를 두지 않았고, 이는 성종이 문산계를 도입해 개조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즉, 문•무 양반은 여전히 모두 하나의 품계하에 나뉘었다. 무산계는 말 그대로 형식만 남아 고려가 여진, 탐라 등의 제후들에게 봉했다.

원래 사용되던 태조의 품계는 '향직'(鄕職) 품계로 명칭이 정해지고, 정식 품계가 아닌 명예직으로 밀려나지만 태조가 직접 제작한 품계인만큼 그 존재감은 여전해 강감찬, 이자연 등 재상들과 척준경, 최충헌 등 권신이 봉해졌고, 제25대 충렬왕 대에는 다시 정식 품계로 일부가 합쳐지는 등 고려 말기까지 전해진다. 향직 품계 중 대광(大匡)은 조선시대의 품계에 들어갈 정도로 오래 갔다. 예를 들면 조선의 정1품 품계 대광보국숭록대부.

유수관은 제1수도 개경을 제외한 경(京) 단위 도시의 최고 기관이었다. 유수관의 직위는 외직으로 구분되어 개경에서 직원이 파견됐다. 성종은 동경을 추가로 설치해 도시의 격을 높혔지만 중앙정부 관료가 겸직하는 유수관을 최고 기관으로 두어 도시를 통제했다. 기존 서경은 낭관(廊官)이 최고 기관이었는데 낭관의 장관은 시중(侍中)으로 개경 광평성의 장관과 동급이었다. 성종은 서경의 독자성을 견제해 서경에도 유수관을 설치해 낭관을 대체했다.


4.5. 지방제도 개편[편집]


고려는 초대 태조부터 5대 경종까진 기존 신라의 지방 제도를 사용했다. 제6대 성종은 중앙정부의 지배력 강화와 더불어 지방 호족의 독립성을 누르기 위해 재위 14년 차인 995년에 대대적인 변혁을 일으켰다. 바로 10도(道)와 12목(牧)의 제정이었다.

지방 관제의 최고 단위인 (道)는 성종이 도입한 이후 조선 왕조, 대한제국에 이어 오늘날까지 사용하게 된다. 참고로 '도'는 원래 당나라의 제도로 성종이 당제를 수입한 뒤에 신라의 행정 지역 구분에 맞춰 개조한 것으로:
  • 관내(關內)
  • 중원(中原)
  • 하남(河南)
  • 강남(江南)
  • 영남(嶺南)
  • 영동(嶺東)
  • 산남(山南)
  • 해양(海陽)
  • 삭방(朔方)
  • 패서(浿西)
총 10개 도를 만들었다.

10도 아래에 대도시를 선정해 (牧) 12곳을 두어 절도사를 파견했는데 이는 위 군대 재편과도 연관된다.

물론 성종의 지방제도 개편은 12목을 설치함으로써 고려는 지방관 체계의 기틀은 잡았으나, 고려 왕조 내내 지방관이 파견된 곳보다 아닌 곳이 많았던만큼 조선시대의 지방관 체계보다 정교한 것은 아니어서, 바둑에서 포석 깔듯 12구역에 걸쳐 임시로 체계를 다진 것에 불과했다.

게다가 고려는 여전히 호족들의 세력이 강대했기 때문에 이 지방관들의 권한도 조선의 지방관들과는 비교하기 난처할 정도로 약했다. 조선시대 지방관들은 해당 지역의 행정권, 사법권, 군령권을 모두 가지고 적극적으로 행사할 수 있었으나 고려의 지방관은 기껏해야 외침이 있을 때 군령권 정도나 발휘하지 행정권이나 사법권은 여전히 지방 토호인 호족들이 쥐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니 고려 조정이 제대로 된 징세나 징병이 어려울 수밖에 없었고, 이런 허약한 행정력은 이후 고려가 여요전쟁 등 전란을 겪으면서 큰 부담으로 작용한다. 징병이든 징세든 전국에 걸쳐 공정하게 골고루 시행하지 않고, 되는 곳에서만 계속 뽑아먹은 것이다.

그러나 지방 호족들의 불만을 억누르고 지방관 제도의 기반이라도 다졌다는 데에 큰 의의가 있다. 이후 제8대 현종이 이 제도를 바탕으로 5도 양계 제도를 완성한다. 실제 성종 때에 도, 목 수준에서 머무른 지방제도 개편이 현종 땐 군현까지 무르익었다.

여요전쟁 피난길 당시 호족들이 장악하고 있던 지방에서 온갖 수난을 당한 현종 입장에선 중앙정부의 지방 장악력을 끌어올릴 절실한 필요성을 느꼈을 것이다. 다만 이때도 지방관은 예산 부족 등의 이유로 1/3 밖에 파견하지 못할 정도로 고려시대는 봉건제적 기질이 상당히 강하게 남아있었다.

북방의 서경은 제4대 광종때는 '서도'(西都)였지만 성종이 '서경'으로 복구했다. 태조는 개경을 중심으로 행정부서인 '개주'를 설치했지만 성종이 '개성부'로 변경했다. 개성부는 개경과 인접한 적현(赤縣), 적현과 인접한 기현(畿縣)으로 나뉘었고, 총 13현이었으며 개성부의 장은 개성부윤으로 했다. 개성부는 현종이 없애지만 제11대 문종이 다시 복구하고 제25대 충렬왕까지 계속 이어졌다.

1,000년 왕조 신라국은 태조 때 '경주대도독부'로 격하되었다가 없어졌지만 신라의 영향은 여전히 컸다. 이후 성종 6년(987년) 경주대도독부는 '동경'(東京)으로 승격되어 개경, 서경과 함께 '경'으로 존재하게 되는데 성종의 동경 설치는 신라 세력을 우대해 지방 세력을 안정시키고자 한 정책이었다. 《보한집》에는 이 때 동경의 원로들이 기뻐하여 신라를 중국의 주나라, 고려를 한나라로 비유하며 성종을 찬양한 시가 남아 있다. 동경은 현종(제8대)이 다시 격하했다가 복원하고, 무신집권기인 신종(제20대) 때 또 격하되었다가 고종(제23대) 때 복원된 이후, 원 간섭기가 시작된 충렬왕(제25대) 때 '계림부'로 격하되어 막을 내렸다.


5. 가족관계[편집]


첫 번째 왕후는 문덕왕후, 두 번째 왕후는 문화왕후이며, 후궁은 연창궁부인(延昌宮夫人) 최씨이다. 슬하에 딸 둘을 두었다. 성종의 딸들은 모두 현종과 혼인했다. 이 때문에 선왕의 아들이자 성종의 조카인 개령군이 목종으로 즉위했다.

고려 최초로 재혼한 왕후. 자세한 것은 해당 문서 참조.
훗날 현종에 의해 고려 최초의 대비가 된다. 자세한 것은 해당 문서 참조.
  • 원정왕후 김씨 - 현종의 제1비
  • 후궁: 연창궁부인 최씨 → 낙랑군대부인(樂浪郡大夫人) 최씨 - 최행언(崔行言)의 딸
사위인 현종이 즉위한 후에 '낙랑군대부인'으로 추증되었다. 자세한 것은 해당 문서 참조.


6. 평가[편집]


성종은 평이 극단적으로 다른 군주다. 성종 치세 17년 동안 고려는 그 뼈대가 통째로 교정됐다. 성종이 만든 제도는 충렬왕 대에 관제 격하를 당하기 전까지 개선만 있을 뿐, 전면 부정된 적이 없었으니 그 영향력을 알 수 있다. 《고려사》 <지>를 보면 어디서든 성종이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성종의 손이 안 닿은 곳이 없을 정도이다. 당장 이 문서의 업적 항목만 봐도 성종의 개혁이 얼마나 넓은 범위에서 이뤄졌는지 알 수 있다. 하지만 고려는 호족의 영향력이 큰 국가였고, 아무리 정종 ~ 광종 대에 피비린내나는 대숙청이 있었어도 지방 호족들의 힘은 막강했다. 그렇기에 성종 역시 이들을 완전히 무시하지 못해 북송의 귀족 중심 제도를 모델로 삼아 문벌 귀족의 탄생을 야기한 시초 비슷하게 지목되기도 한다. 결국 성종의 개혁은 노비환천법처럼 신분제를 공고히하는 부정적 효과도 가져오게 된다. 광종 대에서 정점을 찍은 왕권이 경종 대의 반동 정치로 왕권이 약화되었고 성종 본인이 직계로 된 것이 아니라 주위 세력의 추대로 왕이 된 것 또한 악재가 되었다.

성종은 왕실 문제에서 상당히 대인배스런 행보를 많이 보였다. 우선 본인이 한창 젊을 때 선왕 경종의 아들이자 본인의 조카인 왕송을 서경으로 데려가 자신의 '개령군' 봉호를 물려주었다. 아예 대놓고 왕송이 후계자임을 선포한 것으로, 선왕 경종과 친동생 천추태후를 배려하는 의미였다. 이렇게 함으로써 고려엔 국왕 사후 내전이 벌어지지 않게 되었다. 안종헌정왕후불륜을 저질러 사생아까지 낳는 스캔들이 벌어졌음에도 안종을 유배시키는 선에서 끝냈고, 헌정왕후가 사망하자 둘의 아들인 현종을 불쌍히 여겨 안종의 곁에서 지내게 했다. 제2대 혜종의 아들 흥화군, 제3대 정종의 아들 경춘원군이 이름조차 남기지 못하고, 숙부인 광종에 의해 숙청되어 사라진 것에 비해 매우 다른 결정이었다.

최승로의 <시무 28조>를 받아들인 탓에 문벌귀족 사회를 초래했는데 이는 고려 특유의 문치주의 및 신분 질서가 고착되어 12세기경에 무신정변이 일어나는 간접적 배경이 되었다. 성종이 제정한 노비환천법과 공신 우대책은 이후 부곡민과 음서제 형성에 영향을 주기도 했다. 그러는 동시에 광종노비안검법은 성종의 노비환천법으로 무효화되었다. 노비안검법은 부곡민 체제를 고치기에 적합했지만, 성종기에는 이를 틀어막은 경향이 크기 때문에 결국 부곡민은 일종의 농노 형태로 고려 멸망 때까지 남게 되었다. 물론 성종도 노비 환속의 제약을 두어 40세 전후에는 노비환천법이 통하지 않게 했지만 그저 미봉책이었을 뿐이다. 또한 동시에 중앙 호족의 경쟁 상대였던 지방 호족들을 향리로 굳혀버리기 위한 방법이기도 했는데 여기에 노비환천법과 공신 자손 우대 등으로 중앙 귀족을 강화했으니 왕권이 약해지면 바로 귀족 정치가 열리는 배경이 되었다.

초기 공신들과 후손들은 과거제를 반대했으며 관직을 대대로 물려주는 경향이 컸다. 최승로의 <시무 28조>는 과거제 자체는 비판하지 않았지만 공신 세력을 탄압하는 건 태조의 뜻에 어긋나는 것이라며 우회적으로 비난했다. 성종은 공신 세력에게 양보를 해줘야했고 이것이 음서제다. 음서제의 강화로 과거제는 효과가 반감되어 이후 이자겸의 전횡을 시작으로 무신 정권기에는 추천으로 사람을 뽑고 과거제 출신 문신들은 어용화된다.


6.1. 개혁정책의 회귀[편집]


거란이 고려를 상대로 1차 침입을 단행하고, 중앙군이 무너지는 와중에 전 민관어사 이자백이 문서를 올렸는데, 다음과 같다.

“태조(왕건)께서 나라를 처음 세워 왕통을 드리우셨는데, 오늘날에 이르러 충신이 한 사람도 없어서 갑자기 국토를 경솔하게 적국에 주고자 하니, 원통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옛사람의 시(詩)에서 말하기를, ‘천리의 산하(山河)를 가벼이 한 어린아이, 두 왕조의 문무백관이 초주(焦周)를 한탄하였네.’라고 하였으니, 대개 초주가 촉(蜀)의 대신으로서 후주(後主)에게 영토를 위(魏)에 바치라고 권하여 오래도록 웃음거리가 되었음을 일컫는 것입니다. 경솔하게 토지를 분할하여 적국에 주어버리는 것이 어찌 연등회(燃燈會)·팔관회(八關會)·선랑(仙郞) 등 선왕(先王)의 일을 다시 시행하고, 다른 나라의 다른 법을 따르지 않음으로써 국가를 보존하여 태평한 정치에 이르는 것만 하겠습니까. 만약 옳다고 여기신다면, 마땅히 먼저 천지신명에게 고하시고, 그 후에 저들과 싸울 것인지 강화할 것인지는 오직 성상께서 결정하시면 됩니다.”


즉, 직역하자면 전쟁의 와중에 연등회, 팔관회를 개최하고, 법 따위를 고치는 게 먼저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 무슨 정신나간 소리인가 하겠지만, 성종의 개혁과 그로 인한 영향을 봐야 한다.

당시 성종은 지방행정제도를 개편하고, 호족의 힘을 약화시키며 중앙군을 키우는 등 중앙집권화를 위해 노력했고, 그 유명한 <시무 28조>도 그 일환이었다. 당연히 지방세력과 호족들은 반발했지만 왕의 결단력에 유교 세력의 지지가 합쳐지자 개혁은 거침없이 진행되었다. 결국 지배층은 왕을 지지해 개혁을 밀어붙인 세력인 화풍파, 불교를 중히 여기며 개혁에 반대하던 기존 세력인 토풍파(또는 국풍파)로 분열되었으며, 화풍파가 우위를 점하는 구도가 여요전쟁 이전까지 지속되었다.

이렇게 성종의 개혁이 진행되던 중에 거란이 쳐들어왔고, 왕과 화풍파가 열심히 키운 지방군이 작살났다. 결국 고려의 지방군은 붕괴되고, 더 이상 남은 군사가 없어 자신들이 탄압한 지방 세력에게 군사를 빌려야 하는 상황이 온 것이다. 이런 와중에 전직 토풍파 출신인 이자백이 위의 문서를 올린 것이다. 즉, 저 문서의 진짜 의도는 "태조대왕과 우리 지방세력이 같이 뼈 빠지게 고생해서 나라를 만들었는데, 위나라한테 촉나라를 통째로 넘긴 초주 같은 집권 여당 놈들이 거란에게 땅을 내어 주자는 헛소리를 하네? 니네가 지금까지 우리한테 어떻게 했는지 알지? 당장 연등회, 팔관회 폐지한 거 취소하고, 너네가 지금까지 중국법 따라 했던 개혁 싹 다 취소해라. 그리고 너(성종)는 우리 다 보는 앞에서 천지신명한테 반성문 써서 보고해라. 그렇게 해야 우리(지방세력)가 군사를 내어 줄지 말지를 생각해 볼게."가 된다.[6]

결국 성종은 이를 받아들여 지방 세력의 요구를 전면적으로 받아들였고, 덕분에 개혁의 상당수가 도로아미타불이 된다. 어쨌든 성종이 이것을 받아들이자 토풍파의 당수인 서희[7]소손녕과의 강화를 이끌어내 강동 6주를 획득하며 위기를 넘기지만, 이로 인해 팔관회와 연등회가 복구되고, 지방 세력의 존재를 인정한 주현-속현 체제가 고려가 존재하는 한 유지된다.


7. 기타[편집]


  • 여러모로 조선의 제9대 성종과 흡사한 면이 많이 있다. 묘호가 '성종'(成宗)으로 서로 동일한 점은 둘 다 유교를 바탕으로 한 정책을 펼쳐 나라의 기틀을 잡았기에 업적이 비슷하여 이에 맞춘 묘호를 올리다 보니 서로 같은 묘호를 받은 것이지만, 이 외에도 부친이 군주가 아니었으며, 위에 형이 있음에도 운 좋게 왕위에 올랐다는 점, 사망했을 당시의 나이도 같으며(38세), 심지어 사후에 나라 꼴이 막장이 되었다는 것, 후임자가 재위 12년만에 폐위된 것까지도 모두 동일하다. 게다가 두 임금의 생몰년은 거의 500년 차이, 음력 기준으로 정확히 497년 차이로 딱 떨어진다. 고려 성종의 경우에는 사후에 거란의 침략이 있었고, 서북면 도순검사 강조가 군사력을 동원해서 조카 목종을 폐위하고 죽인 강조의 난 또한 일어나서 현종이 국가를 안정시킬 때까지 매우 혼란스러운 시기가 계속되었다. 조선 성종의 경우에는 자신의 뒤를 이은 아들 연산군이 희대의 폭군이었으며 중종반정이 있은 후에도 혼란이 계속되었다.

  • 유교적인 정책을 펼쳤다 하여 불교를 탄압한 것으로 오해받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오히려 유교와 불교의 조화를 꾀하는 편이었다. 비록 백성들에게 유교적 사상을 권장하기는 했지만 불교를 아주 억누르고 깎아내리는 면모까지 보이지는 않았는데, 불교가 이미 수백년이 넘도록 백성들 사이에서 신봉되어 토착 신앙과 결부될 정도로 뿌리깊게 자리잡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아버지 대종 왕욱과 조부 태조 왕건의 제사를 지낼 때 유교적인 제사 뿐만 아니라 백성들을 시켜 불공을 드리게 했던 기록이 남아 있다.

  • 한편 역대 고려 국왕 중 가장 친유교적인 군주이기도 했는데, 이로 인해서인지 두 여동생이 유교 예법에 위배되는 일을 저질러 처벌해야 했다. 두 여동생 모두 선왕 경종의 왕후였지만, 경종 사후에 둘 다 외간 남자들과 정을 통했기 때문이다. 첫째여동생 헌애왕후의 경우는 그녀를 한동안 유폐시킴과 동시에 내연남김치양을 장형으로 다스린 뒤 섬으로 유배보냈고, 둘째여동생 헌정왕후의 경우는 사생아를 낳은 후 그 후유증으로 승하했기에 그녀와 사통한 왕건의 8번째 아들이자 자신의 숙부였던 왕욱을 유배보내는 선에서 그쳤다. 그래도 조카이기 때문인지 헌정왕후의 아들은 한동안 궁궐에서 성장했다.

  • 성종이 태묘를 만든 뒤 태묘의 태조실에 안치시킨 도자기가 국내에 현존하고 있다.

8. 요성 행차의 미스테리[편집]


고려사 세가 성종 조 9년 (990년) 9월 기사는 다음과 같다

우리 태조(太祖)께서는 기회에 부응하여 세상에 내려와서 큰 덕으로 사람을 대하시니, 모든 고을이 내조(來朝)하여 삼한(三韓)이 편안해졌다. 존귀한 자리에서 남면(南面)하면서 서경(西京)을 처음 설치하고, 종실(宗室)의 친족을 보내 요충지를 지키게 하였으며 직무를 나누어 맡김으로써 각자 권한을 가지도록 하였다. 매년 봄과 가을을 맞아 직접 재계(齋戒)하고 제사를 지냈으며, 오랑캐를 막아 국경을 굳건히 하고자 하여 웅도(雄都) 평양(平壤)에 의지하여 우리 조종(祖宗)의 패업(霸業)을 공고히 하셨다. 그 후 성자(聖子)와 신손(神孫)들께서 서로 이음으로써 사직(社稷)이 편안해지니 혹은 전의 발자취에 기대어 〈그를〉 따라가기도 하였고 혹은 근신(近臣)에게 명하여 떠나보냈으니, 때가 닥치면 왕명(王命)으로 결정하니 역대의 풍속이 달랐다. 내가 그릇되이 부족한 재주로 외람되게 일찍이 〈선왕(先王)께서〉 돌아보고 의탁한 것을 이어받았으니, 선왕 때의 성대한 덕화를 생각하면 매번 간절한 마음으로 따르려 하고 지나간 날의 굉장한 계획을 듣자면 마치 얼굴을 맞대고 가르침을 받는 듯하다. 이제 하늘과 사람이 같이 경사를 누리고 원근(遠近)이 다 평안하며, 모든 농사꾼이 풍년을 함께 축하하고 곡식들도 모두 잘 여무는 데 올랐으니 10월을 택하여 요성(遼城)을 찾아가 조상들의 옛 규범을 행하고 나라의 새로운 법령을 펴고자 한다. 〈이번 행행(行幸)은〉 다만 관문(關門)과 산하(山河)의 형세를 살필 뿐 아니라 장차 아울러 백성의 안위(安危)를 알아보고 지방 관리의 숫자를 덜거나 더하며 산천(山川)에 올리는 제사를 깎거나 정하려는 것이다. 그 행차(行次)의 의장(儀仗)과 모시고 따르는 관료, 식사[御膳]와 악관(樂官)은 모두 마땅히 줄이고 덜어내며 서도유수관(西都留守官)과 연로(沿路)에 있는 주현(州縣)의 수령(首領) 및 여러 진(鎭)의 지휘관은 잠시라도 임소(任所)를 떠나지 말도록 하라. 〈이번 행차를〉 검소하게 하라는 나의 가르침을 받들어 그대들의 번화(繁華)한 풍습을 경계하도록 하라.


고려 태조가 서경을 처음 설치하였고 이 곳이 과거 웅도 평양이었음을 언급하다가 뜬금없이 10월에 "요성(遼城)" 을 방문한다면서 준비를 서도유수관에 시키고 있다. 10월에는 계획대로 서도 (서경)을 방문하여 백성을 위무하는 기사가 나온다.

이 경우 평양 = 서경 = 요성 이라는 등식이 성립되는데 통상 "요성"은 요양지방의 요양성을 의미하기에 이 기사가 단순한 오류인지는 연구가 필요한 대목이다.

9. 대중매체[편집]


  • 드라마 강감찬에서는 필름이 남아있지 않아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지만, 1화부터 26화까지 그의 치세가 묘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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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천추태후》에서의 성종

  • 2009년 KBS 드라마 《천추태후》에서는 배우 김명수가 연기했다. 여동생 천추태후주인공이며 선역인 탓에 완전한 악역은 아니지만, 주인공과 대립하는 역할. 경종 생전에는 천추태후와 함께 고난을 견디는 사이였으나, 신라계 유학파 신료들과 친해지면서 유학자 신료들의 감언이설과 이간질에 북방계 문신들과 친한 천추태후와 대립하게 된다. 최지몽이 예언한 것 때문에 목종이 어린 시절 어머니 천추태후와 따로 지내게 만들면서 목종의 정신병이나 성격 이상 등도 정황상 성종 탓인 것처럼 묘사해 버린다. 황제로서의 모습은 유교적 이상 국가를 건설하려 했으나 중요한 것이 현실의 벽에 부딪혀 무너져가는 군주로 나온다.

즉위 이후에는 친중화 정책을 펼쳤다는 기록 때문인지 외왕내제를 폐지하고 중국의 습속을 많이 본따며 유교적 이상에 입각한 국가를 만들려 한다. 무기를 녹여 농기구를 만들어 농업 생산량을 늘리고 백성의 생활을 돌보는 정책으로 초기에는 호평을 받지만 이는 거란의 1차 침략 때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는 원인이 되며 나중에는 천추태후거란과 싸우다 죽었다는 잘못된 정보를 받아 심적 충격을 받자 본인의 정책에도 회의를 품게 된다. 나중에 천추태후가 극적으로 돌아오면서 화해하고 멘탈을 추스르지만 그의 정책에 반감은 여전했던 천추태후가 자신의 아들을 왕위에 먼저 올리려 반란을 일으킨다. 이를 진압하는데는 성공하고 관련자들을 다 처벌하고 귀향보내는데 화해했던 여동생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사실에 또 충격을 받고 멘탈이 무너져버린다.
세월이 더 흘러 문화왕후가 정치에 관여하고 대량원군이 실종된 가운데 소찰리가 몰래 먹인 마약에 빠져 폐인이 되어버리고 날로 건강이 나빠져 오늘 내일하는 신세가 된다.후사 문제 때문에 귀양가있던 천추태후와 극적으로 화해를 다시 하고 선위 교서에 개령군을 올리는데 강감찬이 대량원군을 겨우 찾은 걸 알게 된 문화왕후가 막판 먹인 마약때문에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서 대량원군을 따로 왕위에 올린다는 교서를 내리려다 끼어든 강조와 몸싸움을 벌이던 도중 악화된 건강이 도져 그대로 사망하는데, 이후 위조 교서는 천추태후가 문화왕후의 죄를 묻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없애버리고 목종이 왕위에 오르게 된다. 천추태후를 적대시하고 악역에 가까운 반동 인물로 묘사된 탓에 중요한 모든 업적이 드라마에는 나타나지 않는데 모든 업적을 천추태후에게 빼앗겨 버린 목종보다는 나을 수도 있겠다.

[1] 서희 역사관 테마파크에 있으며, 성종이 바른말로 상소를 올린 정우현을 벌을 주려고 하자 서희가 간언을 한 뒤 정우현에게 높은 벼슬을, 서희에게 상을 주는 이야기를 토대로 만들어졌다.[2] 원래는 병풍석과 석축이 있었는데 농지 개발 과정에서 없어지거나 묻혀 버렸다고 한다.[3] 성종 즉위 후 대종으로 추존.[4] 출처 - 《고려사절요》 <경종 헌화대왕>[5] 그 땅이 태조 때에 얻은 땅인데다 지방 세력인 입장상 땅을 떼어준다는 것은 결국 자신들도 언제든지 같은 입장이 될 수 있다는 소리가 된다.[6] 사실 틀린 말은 아니게 된다. 자신들은 개국에 공이 있는 사람들의 후손들인데, 왕이 왕권을 강화한답시고 키운 화풍파가 땅을 떼어주자고 하니 지방 세력 입장에서는 거품 물 소리고[5], 키운 군대는 박살났으니 이들 입장에서는 "우리 조상들이 태조대왕과 함께 고생해서 나라를 세웠더니 공도 없는 것들이 왕 끼고 호의호식하면서 정작 나라가 위기에 처하니까 땅 떼어주자고 하고 군대도 제대로 되지도 않은 것들이잖아? 이러고도 니들이 권력을 가질 자격이 있어?"라는 심정이었을 것이다.[7] 서희가 토풍파의 당수라는 근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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