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혜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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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혜랑
成蕙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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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936년 1월 14일[1](88세)
서울 종로구 계동
본관
창녕 성씨
학력
김일성종합대학

1. 개요
2. 망명
3. 근황



1. 개요[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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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2월 16일 김정일의 생일에 촬영된 사진. 왼쪽부터 성혜랑 본인, 조카 김정남, 모친 김원주, 딸 리남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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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등나무집 풀밭에서 성혜림, 어머니 김원주, 사촌언니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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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서울 왕십리 집에서 성혜랑-성혜림 자매.

1936년 서울 종로구 계동 출생. 성씨의 고향집은 그 유명한 독립운동가 여운형 선생 집의 바로 옆집(현대그룹 사옥 뒤쪽)이었다고 한다. 서울에서 진명여자중학교이화여자고등학교를 거쳐 1948년 부모를 따라 월북하였으며 김일성종합대학에서 물리학을 전공하고 교원 생활을 하다가 후에는 잠시 작가 활동을 했다. 남한에서 지내다가 피살된 이한영의 엄마이기도 하다. 아들인 이한영이 남한으로 떠난 뒤 서로를 그리워했고 십수 년이 지난 후에야 겨우 전화 연락이 닿아서 북한을 탈출한 후 아들과 재회할 날을 기다렸으나 아들이 피살되어 끝내 만나지 못했다.

김정일의 동거녀이자[2] 김정남의 어머니로 유명한 성혜림의 언니다. 사고로 일찍 남편을 잃고 평양에서 아들 이한영과 딸 이남옥을 키우면서 살다가 김정남이 학교에 갈 나이가 되자 김일성의 집으로 들어가 김정남을 돌보고 가르치는 일을 하게 되었다.[3] 그래서인지 김정일은 성혜랑과 성혜랑의 어머니 김원주까지 모두 좋은 대접을 해 주면서 깍듯이 대했다고 한다. 한때 북한 주민이었으나 현재는 서방으로 망명했다. 남한에는 '성혜림의 언니', '김정남의 이모', '이한영의 어머니'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서방으로 망명한 후에는 <남한에서 수기 소식을 전합니다>, 회고록 <등나무집>을 출간했다. 이들 수기에는 소식을 알 수 없었던 월북 예술인들의 이야기가 실려 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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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씨의 딸 이남옥 씨가 공개한 사진. 1990년 김정남과 같이 사냥을 나간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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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원산해수욕장에서 조카 김정남, 어머니 김원주, 딸 리남옥과 함께.


2. 망명[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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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이한영씨.

아들 이한영이 1982년에 스위스에서 먼저 남한으로 떠났고 1992년에는 딸 이남옥마저 서방으로 망명했으며 불어영어에 능통한 딸과 서방의 모 국가의 도움으로 1996년 1월 5일 러시아 모스크바를 탈출하여 스위스를 거쳐 서방으로 망명했다.[4] 서방으로 망명한 이유는 1982년에 이미 서방으로 탈출하여 대한민국으로 망명한 아들 이한영과 같이 살기 위해서였다. 성혜랑, 성혜림 자매는 유독 모성애가 강했는데 그것은 어머니이자 당시 신여성이었던 김원주의 영향인 듯하다.[5] 언니 성혜랑이 아들 이한영 때문에 망명한 것처럼 여동생 성혜림도 아들 김정남 때문에 망명을 거부한 셈이다.

하지만 아들 이한영은 어머니가 탈출한 지 1년 후인 1997년에 북한 공작원의 총에 맞아 숨졌다. 당시 이한영은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서현동 현대아파트에 살던 대학 선배 김모 씨에게 더부살이하고 있었는데 2월 15일 오후 9시 52분경 선배의 집 엘리베이터 앞에서 2명의 북한 공작원에게 총격을 받은 뒤 분당차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숨졌다. 특히 그날은 김정일의 생일이었다. 기사[6]


3. 근황[편집]


1995년 10월 20일 오후 6시경 아들 이한영에게서 걸려온 전화에 13년만에 극적으로 연락이 닿게 되면서 정부의 주선으로 같은 해 11월 15일 오빠 성일기와 러시아 외진 곳의 코스모스 호텔에서 47년만에 극적으로 만나 망명 의사를 밝히고 이듬해 1월 5일 아들 이한영을 만나러 남한으로 가기 위해 일기장, 약, 그리고 작가 출신답게 안톤 체호프의 단편소설 몇 권을 가지고 당시 살고 있던 모스크바에서 서방으로 망명했다. 이때 북한에 자극을 주지 않기 위해 당장 남한에 오는 것이 아니라 1~2년 정도 서방에 살다가 남한으로 올 것을 아들 이한영에게 미리 밝혔다.

1996년 당시까지만 해도 이한영은 남한에서 연이은 사업 실패로 좌절을 맛보고 있었고 국가의 도움도 더 이상 받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머니인 성혜랑은 자서전 <등나무집>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내가 고향으로 간다면 그래도 당국이 내 아들 뒤 정도는 봐주겠지" 하는 생각으로 탈출하였다. 그러나 그로부터 1년 후 이한영이 남한에서 암살당하면서 두려움을 느낀 나머지 그녀는 서방의 모처에 머물면서 드문드문 서울에 살고 있는 친오빠 성일기와 연락을 주고받고 있다고 한다. 대외적 활동은 전혀 하지 않고 있으며 그녀의 딸인 이남옥 씨가 드문드문 언론과 비공개 인터뷰를 하면서 그녀의 근황을 전하고 있다. 이남옥은 망명 후 프랑스에 정착할 수 있게 도움을 준 프랑스 정보기관요원의 아들인 프랑스인 남자와 결혼하여 아들 2명을 두고 남편과 함께 사업을 하고 있다고 한다.[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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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남은 그녀의 탈북 이후 북한 내에서의 입지가 약해졌고 설상가상으로 도쿄에서 밀입국을 시도하다가 강제추방되어 김정일의 눈 밖에 나면서 남동생 김정은에게 후계 다툼에서 밀렸다는 것이 정설이다. 하지만 오히려 성혜랑의 탈북으로 김정남이 김정일의 신임을 얻었다고 주장하는 의견도 있다. 한편 조카 김정남은 2017년 2월 13일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국제공항에서 독극물 공격으로 피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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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음력 1935년 12월 20일[2] 일부 언론에서 첫째 부인이란 식의 표현을 쓰기도 하지만 김정일과 성혜림은 정식으로 결혼한 적이 없다.[3] 김정남의 존재는 오랫동안 비밀이었기 때문에 학교 갈 나이가 되어도 입학을 할 수 없어서 이모인 성혜랑을 가정교사로 들여 공부를 시켰다.[4] 한국과 서방의 언론은 한때 "성혜림까지 같이 망명했다"고 보도했으나 성혜림은 스위스까지 따라왔다가 심경의 변화를 느껴 다시 모스크바로 되돌아갔다고 하며 2002년 모스크바에서 지병으로 사망했다.[5] 김원주는 자기를 따라 월북한 17살짜리 아들(성일기)을 북한 당국의 명령에 따라 남한에 내려보낸 후 두 번 다시 못 만나게 되자 그에 대한 죄책감을 가지고 평생을 살았다고 한다.[6] 공교롭게도 황장엽이 망명을 신청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하였다.[7] 이남옥의 남편은 현재는 대외적으로는 캄보디아에서 호텔 사업을 한다고 알려져 있지만 이는 위장이며 실은 프랑스 정보기관의 동남아시아 담당자로 파악된다. 조카뻘인 김한솔망명에도 개입하였다고 알려져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