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태권도연맹

덤프버전 :



{{{#ffffff 세계태권도연맹
世界跆拳道聯盟
World Taekwondo}}}
파일:세계태권도연맹 로고.svg
설립
1973년
주소
서울특별시 중구 세종대로 55
(부영태평빌딩 10층)[1]
회장
조정원[2]
링크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1. 개요
2. 국제태권도연맹과의 관계
3. 변화
4. 비판
5. 세계태권도연맹 시범단



1. 개요[편집]


세계에서 태권도를 대표하고 있는 국제적 태권도 단체다. 1960년대 전후해 설립된 대한태권도협회국기원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가 올림픽 태권도 운영에 대해 교섭하는 단체이기도 하다. 그래서 올림픽 태권도에 출전하려면 국적을 불문하고 WT 소속 선수여야 한다.[3]

창설 이래 세계태권도연맹(World Taekwondo Federation, WTF)이라는 공식명칭을 쭉 사용했지만, 21세기 들어 영어의 욕설의 약자와 똑같다는 지적이 일자 2017년 WT(World Taekwondo)라고 연맹 이름을 바꾸었다.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세계태권도품새선수권대회 등 여러 대회를 주관하고 있다.


2. 국제태권도연맹과의 관계[편집]


남한에 본부를 두고 있는 WT와는 별개로, 현재 북한이 중심이 되어 이끄는 국제태권도연맹(ITF)이라는 조직이 있다. 근데 사실 ITF는 원래 남한에서 창설된 연맹으로, 1960년대까지만 해도 WT가 아니라 ITF 쪽이 한국 태권도를 이끌었다. 이때 북한엔 태권도란 무술이 있지도 않았다. 그런데 현 상황이 된 것에는 ITF 태권도의 창립자 최홍희라는 인물이 그 중심에 있다.

태권도라는 명칭을 창안할 정도로 초기 태권도 역사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했던 인물 중 한명인 최홍희는 6.25 직후 현역 육군 소장 신분으로 있다가 한반도 군용무술이 없던 현실을 개탄하며 자신이 세운 오도관[4] 사범들과 1950년대 ITF 스타일 태권도의 원형을 자리잡게 한다. 그리고 이후 도장들을 통합해 스스로 대한태권도협회를 창설하여 총재직에 앉는 등 60년대까진 남한의 태권도 조직을 사실상 좌지우지하고 있었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군인 출신 최홍희가 민간 도장에 간섭해 나름 자부심을 가지고 있던 본인들의 무술을 멋대로 마개조한다고 느낀 상당수 태권도인(당시엔 주로 가라테 사범)들과 마찰을 빚고, 5.16 군사정변으로 이전부터 최홍희와 관계가 껄끄러웠던 박정희가 정권까지 잡게 되면서 이후 최홍희의 입지는 서서히 줄어들고 만다. 결국 최홍희는 대한태권도연맹 총재직에서 물러나 국제태권도연맹(ITF) 총재직을 맡게 되나, 당시 태권도는 남한에서도 확실히 자리잡고 있지 못하고 있던 처지였기 때문에 국제태권도연맹(ITF)은 딱히 실권이 없는 명예직이나 다름없었다.[5]

본인만의 태권도 철학이 확고했던 최홍희와 ITF가 유사단체를 만들어 파벌을 조장하고 있다고 비난하던 대한태권도협회는 이후에도 이런저런 트러블을 겪다 종국엔 대한태권도협회가 국제태권도연맹에서 탈퇴한다. 그리고 당시 ITF의 핵심이나 다름없는 회원국인 대한민국이 탈퇴하자 최홍희는 대한태권도협회에 대항하기 위해 대한태권도진흥회를 창설했지만, 이전부터 중복단체 통합작업을 벌이고 있던 문교부에서 중복 단체 불허 방침으로 허가를 내주지 않아 실패하고 만다.

결국 한국 태권도계에서 설 자리가 좁아진 최홍희는 정권과도 정치적 갈등을 벌이다 1972년 유신독재에 반대한다는 명목 아래 캐나다로 망명을 갔고, 북미권에서 인기를 끌다 80년대 들어 북한과 교류하며[6] 지원을 받아 공산권 국가에서도 세를 확장해 나간다. 다만 이는 ITF 분열의 단초를 제공하기도 한다.

한편, 대한태권도협회는 국제태권도연맹에 대항하기 위해 1973년 세계태권도연맹(WTF, World Taekwondo Federation)을 창설했고, 김운용 당시 대한태권도협회 총재가 세계태권도연맹의 총재직을 맡았다. 이후 김운용의 외교력과 정부의 지원 등으로 WTF는 IOC의 공인을 받고 나아가 2000년 올림픽 정식 종목으로 채택되는 위업을 이루는 등 2천년대 이후부턴 ITF를 확실히 역전하고 세계태권도계의 중심기관으로 자리잡게 된다.[7]

ITF 태권도는 구 공산권 국가에서 제법 수련인구를 가졌지만, WT 태권도가 올림픽 종목으로 채택되면서 90년대 이후 중국과 동유럽 등 다수의 국가들이 ITF를 탈퇴하고 세계태권도연맹에 가입했다.[8] 게다가 ITF는 2002년 최홍희 사후 북한/비북한계 등 여러 조직으로 분열되어 내분을 겪고 있는 상황이다. 다만 그럼에도 수련인구는 여전히 상당한 만만치 않은 단체긴 하다. 사실 지금 와선 양쪽 관계자들이 서로 뿌리는 하나라는 식으로 교류도 하고 덕담도 오가긴 하는데, 현실적 문제들이 있어 실제 통합이 될진 미지수다.


3. 변화[편집]


기원이 한국이다 보니 국제경기단체로서는 드물게 한국에 본부가 위치하고 있다. 정확히는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강남구 역삼동 635번지, 그러니까 국기원 건물 안에 있었다 (현재는 서울시 중구 소재). 그동안 총재를 비롯하여 임원의 대부분도 한국인이었고 공용어도 한국어였기 때문에 회의도 한국어로 진행했다.

그러나 2000년대 들어 올림픽 정식 종목 채택과 공산권 수교 영향 덕분인지 태권도가 급격히 세계화되면서 여전히 한국인이 상당수이긴 하지만 외국인 임원도 증가하고 올림픽 종목으로서 국제 기준에 맞추어가면서 많은 부분이 변하고 있다. 태권도의 공용어는 영어와 한국어였으나 2010년 10월 7일에 세계태권도연맹 임시 총회에서 한국어를 제외하였고, 한국어는 프랑스어, 스페인어와 함께 보조언어로 내려갔다. 물론 시작, 차렷, 정지 같은 기술 용어나 품새 등의 용어가 바뀌는 것은 아니며 '행정용어'에서 공용어가 영어로 바뀌는 것이다.

게다가 World Taekwondo 연맹 규약의 "WT Headquarters are permanently located in Seoul, Korea.(본부는 영구히 한국 서울에 둔다.)"는 조항이 존재했는데, 이 조항에서 'permanently(영구히)'를 삭제하는 등 한국 중심주의에서 국제 기준으로 옮겨가고 있다. 참고로 라이벌격인 가라테의 경우 세계가라테연맹은 스페인에 소재하고 있으며, 같은 올림픽 종목인 유도의 경우[9] 국제유도연맹 본부가 현재는 스위스 로잔에 있으며 회장직을 다양한 나라 출신이 맡고 있다. 현 회장은 오스트리아의 Marius Vizer. 심지어 1995년~2007년에는 회장을 한국의 박용성 두산 회장이 맡았으며, 덕분에 그시절엔 국제유도연맹 본부가 서울 동대문 두산타워에 있기도 했다.


4. 비판[편집]


연맹을 사실상 한국 쪽이 틀어쥐고 있다시피하다 보니 외국 관계자들 사이에선 불만도 상당하다. 그러다보니 2009년에는 세계태권도연맹 총재 자리를 두고 조정원 현 세계태권도연맹 총재[10]가 3선에 도전한 가운데, 총재 선거에 출마한 낫 인드라파나 연맹 부총재(국제올림픽위원, 태국)가 경쟁 후보로 나섰는데, 그 해 9월 18일 코리아오픈 국제 태권도 대회에서 당시 상용직 비슷하게 대한태권도협회 회장을 지내던 홍준표 한나라당 의원이 인드라파나 부총재를 지지하는 말을 하여 논란이 되기도 했다. 단순한 지지 발언 정도라면 이해가 가는데, 그 자리에서 이명박 당시 대통령을 거론하며 "대통령께서 외국인 총재가 나와야 한다는 내 말에 동의해주셨다."라는 정치적 발언까지 대놓고 해버렸다. 그러자 국제 행사를 정치쇼로 만들어버렸다는 야당과 태권도계의 반발까지 이어져 거꾸로 조정원 후보만 유리하게 되면서 홍준표는 오해였다고 애둘러 해명하였다. 결국 조정원 총재가 재선되면서 홍준표 협회장은 입지가 크게 줄어들고 지금도 국제 태권도계에서 따돌림을 받는다는 후문이 있다.

상기한 역사를 보면 알 수 있듯, 세계태권도연맹의 창설 자체가 정치적인 목적이 어느 정도 가미된 채 만들어진 감이 없지 않았는데, 당장 수장이던 김운용부터가 무도가가 아닌 외교관 출신으로 정권의 낙하산 인사로 투하된 사람이었다. 비록 김운용이 태권도를 올림픽 종목으로 만드는 등 업적이 있으나, 애초에 태권도와는 큰 연관이 없던 비태권도인 출신인데다 말년에는 비리 문제로 구속되며 불명예 퇴진하는 등 한계를 보여주기도 했다. 뒷돈을 받고 편파 판정으로 병역특례자를 양산하는 사건이 보도되기도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금까지 이어지는 큰 문제는, 쇼토칸 가라테 기반으로 20세기 중반에 창작된 무술인데 택견을 끌어와 유구한 한민족 전통 무술로 둔갑시킨 태권도역사 왜곡을 주야장천 주장하고 있다는 것이다.[11][12] 그나마 택견이 사장되었다면 그 정신이라도 계승했다는 식으로 정신승리라도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알디시피 지금도 택견은 유네스코 세계무형유산으로 등록되는 등 맥이 끊기지 않고 살아 남았으니 설득력이 없다.


5. 세계태권도연맹 시범단[편집]


2009년에 시범단이 설립된 이후 각종 행사 공연에 참석하였다. 2016년 스위시 제네바의 UN 사무소에서 공연을 펼쳤다. 2020년에는 이탈리아 갓 탤런트에 초청받아 출연하여 골든 버저를 받았다. 2021년에는 아메리카 갓 탤런트에 초청받아 출연하였고, 역시 골든 버저를 받았다.[13] 예선, 준준결승, 준결승, 합동공연, 결승, 훈련 영상, 인터뷰는 모두 유튜브에서 볼 수 있다.

이후 AGT 올스타즈에서도 다시 한번 모습을 드러냈다.[14]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03 12:07:45에 나무위키 세계태권도연맹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추후 춘천시로 본부 이전이 예정되어 있다.[2] 2004년부터 총재직을 하고 있으며 영어로는 Choue Chung-won이라고 공식 표기하고 있다.[3] 통합룰을 제정하자는 논의도 양쪽에서 오가곤 있지만 구체적인 합의가 이뤄지진 않았다.[4] 군대내 도장으로, 해방 전후 태권도의 기원이 된 이른바 5대관 중 하나였던 청도관 출신들이 많았다. 즉, 청도관->오도관->ITF 원형인 셈. 이후엔 정통성 확보를 위해서인지 청도관과 교류해 명예 4단증도 받는다.[5] 다만 처음 한국,베트남,말레이시아,미국,이태리 등 9개국으로 시작한 국제태권도연맹은 1년만에 40개국으로 숫자를 늘리며 세를 빠르게 확장한다.[6] 미국 태권도의 대부 이준구 관장의 말을 빌리자면, 태권도에 미쳐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밖에 볼 수 없다고. 현재 비북한계 ITF 관계자들은 북한에 태권도가 보급된건 당시 김일성이 북한에 태권도를 보급해줄 것을 부탁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며 북한도 ITF 회원국 중 하나일 뿐이고 배움을 원하면 갈 뿐이라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7] 김운용은 이러한 성과를 바탕으로 IOC 부위원장을 지내는 등 1990년대 세계 스포츠계의 거물로 활약했지만, 2001년 사마란치의 후임 위원장 선거에서 자크 로게에 패하면서 몰락한다. 업적도 많지만 비태권도인 출신인데다 말년의 비리 스캔들 때문에 태권도 명예에 큰 먹칠을 했다는 점에서 태권도인들에겐 여러 감정이 교차하는 인물.[8] 다만 중국처럼 ITF 수련자들이 여전히 혼재하는 곳도 있다. 중국에서 제법 유명한 태권도 사범 장룽도 ITF 계열. 사실 중국의 태권도 도입은 최홍희가 1986년 6월 국제태권도대표단과 함께 중국을 방문한 것이 시초다. 90년대 남한과 수교가 이뤄지면서 올림픽 버프 등으로 갈아타긴 했지만, 지금도 상당수는 북한계 ITF 출신 인물들이 도장 간판만 간 상태. 몸 따로 마음 따로?[9] 참고로 유도는 1964 도쿄 올림픽에서 시범 종목으로 등장한 이래, 1972년부턴 꾸준히 정식종목으로 이어지고 있다.[10]경희대학교 총장. 대학 설립자 조영식의 아들이다.[11] ITF쪽은 사실 관계를 인정했고 국기원 측에서도 사실상 인정하는 분위기다.[12] 가라테 역시 태권도의 탄생과정과 비슷하고 1920년대에 와서야 체계를 정립해서 탄생한 무술이다.[13] 최종 라운드까지 진출하였으나 순위가 발표되는 5위 안에 드는 데는 실패하였다. 참가를 위해 정식 단원이 아닌 NCTA 소속의 현지인들과 팀을 이뤘는데 한국과 미국에서 각각 준비하느라 어려운 점도 있었다고 한다.[14] 다만, 이전과 다르게 NCTA 소속의 현지인이 참가하지 않은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