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책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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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배경
3. 특징
4. 관련 어록
5. 대중매체
6. 여담



1. 개요[편집]


세책가(貰冊家)[1]조선 후기의 도서대여점을 가리키는 말이다.


2. 배경[편집]


조선 초기에는 한반도에 민간 서점이나 공공도서관과 비슷한 시설은 존재하지 않았고 민간 서점이 등장한것은 조선중기의 일이었다. 물론, 향교와 서원을 비롯한 주요 교육시설에서는 책을 다량으로 갖춰놓을 필요는 있었기 때문에 각 향교와 서원에서 도서시설을 갖추어놓았기는 했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현대의 학교 부속 도서관과 비슷한 개념으로 존재한것이었고, 권세가 혹은 이름있는 명문가, 혹은 지역 관청과 규모있는 절 차원에서 목판 인쇄를 통해 책을 인쇄하기도 했으나[2] 이것이 민간서점의 발흥으로 곧바로 이어진것은 아니었다. 유교라는 학문을 국시(國是)로 삼아 신진사대부 계층이 상당한 수준의 교양을 갖춘 일반 백성들을 통치하던 조선의 상황을 생각해 보았을 때 이는 참으로 의아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보통 서적은 국가 주도 하에 인쇄한 것을 교서관을 통해 지방 관청과 교육기관으로 배포되었거나, 책쾌(冊儈)라고 불리던 책장수(서적 도매상)가 그때그때 필요한 서적들을 수급해 판매하는 방식으로 유통되었다.

중앙 정부에서 배포한 서적의 경우 무료이거나 염가인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나 발행량이 적어 어느 정도 이름난 가문이나 지방 관청 선까지만 배포되었으며, 책쾌를 통해 서적을 구매하자니 일반인 입장에서 가격이 매우 부담되는 수준이었다는 단점이 있었다.[3] 이러한 공급의 부족은 비용 문제에서 기인하였다. 지금이야 기계로 생산한 종이를 가지고 상당히 저렴하게 책을 찍어낼 수 있지만 당시 장인들이 수공업으로 제작하던 한지는 저렴할 수가 없었으며,[4] 비효율적인[5] 인쇄 공정은 필연적으로 비용의 상승을 이끌었다.

그러다 보니 교서관에서 발행, 판매하는 서책으로 민간의 수요를 총족하기 힘들다는 이유로 서점을 만들자는 상소가 나오곤 했으나, 그때마다 정승을 비롯한 높으신 분들의 반대에 부딪혀 좌절되었다. 필요성을 못 느끼는 것은 아니었지만, 책을 굳이 돈벌이 대상으로 삼는 것에 대해 거부감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다만 실록의 기록을 보면 1551년 명종대에 민간서점의 개점을 허용했다는 기사가 나왔으며, 임진왜란 직후에 남원에 세워진 박고서사 등 민간서점이 있었으리라고 짐작되는 기록들은 여럿 있다. 그러나 서점의 세가 본격적으로 확장된 때는 영조대의 일이었다. 아무튼 주요도시에 서점이 세워진다 한들, 책값이 부담스러운 수준은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한양을 중심으로 세책가라는 대여점이 등장하게 된다. 책을 사서 읽기에는 가격대가 비싸니 푼돈으로도 볼수있는 대여점이 등장한것이다. 세책가는 18세기에 처음 등장하였으며, 일제 시대까지 존속하였다.

참고로 19세기 당시의 기록들을 보면 서점은 지방에도 어느 정도 있었지만, 세책가는 한양 일대에 집중되어 있었다고 한다.

3. 특징[편집]


세책가에서 주로 취급하던 품목은 소설이었다. 위에서 언급되었듯 학습에 필수적인 사서삼경조차 제대로 유통되지 않았으니, 패관잡기라며 멸시를 받던 소설이 설 자리는 더더욱 없었다. 허나 소설을 대놓고 읽기도 쉽게 구하기도 어렵던 시절에도 수요자는 언제나 있었고, 이에 한글로 번역한, 혹은 창작한 소설을 필사하여 보급하는 이들이 자연스럽게 생겨나게 되었다. 이들은 주로 영리를 목적으로 필사한 책을 가가호호 방문하여 책을 팔던 책쾌나 가세가 기울어 빈한한 삶을 영위하던 문인들, 또는 여성 필사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사대부 집안의 여성 또는 궁녀가 대부분인 여성 필사자는 영리보다는 소일거리 또는 보관을 목적으로 필사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며, 빈한한 문인들은 생계유지를 위해 세책점에서 요구하는 대로 필사를 전담하기도 하였다.

책쾌라 불리던 서적중개상은 오늘날로 말하면 서적 외판원에 해당하는 전문 서적상으로 개인적으로 책을 팔러 돌아다니던 일종의 책 거간꾼이었다. 책쾌의 집에서 수천 종의 책을 깨끗이 베껴 쓰고 빌려주는 일을 했다고 기록한 채제공의 글을 참고한다면, 책쾌는 단순한 서적 거간꾼이 아니었다. 그들은 서적 유통에 관한 영업 노하우를 바탕으로 직접 책을 필사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필사하게 하면서 세책업에 뛰어들었던 선구자였다. 여하간 소설 독서를 위한 일련의 국문 번역과 국문소설에 대한 관심은 여성 독자 사이에서 지속되었다. 17세기 후반에 이르면 시장경제가 활기를 띠는 가운데 소설 역시 상품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이미 18세기 중반에는 전문적으로 필사한 책을 돈을 받고 대여해 주는 세책업이 성행했다[6]

여러 사람이 돌려 보는 책이다 보니, 세책가 책들은 다른 책들과 비교했을 때 상당히 튼튼한 편이었다. 표지는 삼베로 싸서 최대한 두껍게 만들었고, 책장에는 들기름을 발라 빳빳하게 만들었다. 그 외에 대여 도서라는 특성 상 책장 넘기는 부분은 글자를 쓰지 않아서 글자가 지워지지 않게 하였고, 각 장의 위쪽에 쪽수를 표기하였다. 평균적으로 한 권당 쪽수는 30장 내외였다고 한다. 일부 세책의 경우 마지막에 낙서를 자제해 달라는 등 세책점 주인의 말이 첨부되어 있기도 했다. 그럼에도 책의 훼손은 피할 수 없었고, 낙서 또한 세책점 주인들의 상당한 골칫거리였다고 한다.

당연하지만 상업적 목적이 짙은 만큼 '세책본'을 만들면서 원본 보다 더 많은 권수로 분권을 하는 경우가 많았고,[7] 기본적으로 필사로 세책본을 만드는 만큼 실수에 의해 혹은 의도적으로 원본과 다른 내용으로 수정되거나 다른 내용이 추가되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1910년 최남선이 한 세책집을 조사했을 때 120종 3,221권의 책을 보유하고 있었다 한다. 리즈 시절엔 엄청난 수량을 보유했을 것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출처

4. 관련 어록[편집]


"세책점이 한 군데 생겼다는 소문이 동네에 퍼지면 다투어가며 돈을 주고 책을 빌려다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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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화, [월탄회고록] 중


"근래 부녀자들이 경쟁하는 것 중 소설이 있는데 [중략] 비녀나 팔찌를 팔거나 빛을 내면서까지 싸우듯 빌려가 그것으로 긴 해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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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사서 (채제공 서문) 중


"말이 비록 허무맹랑하나 또한 장난으로 보기에는 우스운 말이 많으니, 착실히 보시고 부디 낙장은 마옵소서.[8]

이 세책 보는 사람은 곱게 보고 책에다 칙칙하게 글씨를 쓰지 마시고 그 무식하게 욕설을 기록하지 마시기를 천만번 바랍니다. 이 책에다가 욕설을 쓰거나 잡설을 쓰는 폐단이 있으면 벌금을 낼 것이니, 이후로 깨끗이 보시고 보내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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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세책에 쓰여 있던 세책가 주인의 말



5. 대중매체[편집]


역사나 서지학 관계자가 아닌 이상 생소할 수밖에 없는 이 용어는 2015년 드라마 밤을 걷는 선비세책방이 나온 덕분에 갑자기 대중 사이에서 알려졌다.


6. 여담[편집]


현대까지 남아있는 세책방 책들을 확인해 보면 대출자들의 낙서가 상당히 많이 남아 있다. 그 내용을 분석해 보면 당시 책 내용을 우려먹는 행위[9]가 빈번했으며, 서로의 부모 안부 물어보는 일음양의 조화를 찾는 일이 당시에도 빈번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

파일:세책가.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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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세책집, 세책점, 세책방이라는 표기 또한 통용되었으며 리다이렉트 처리되어 있다. 참고로 "새책방"이 아니라 "세책방"이다. 새로운 책(new book)이 아니다.[2] 이것이 현대까지 남은것이 유교책판이나 팔만대장경을 비롯한 여러 장경판이었다.[3] 중종 시절 지방 유생들이 책이 너무 비싸서 공부하기에 애로사항이 있다고 하소연한 기록이 남아 있다. 당시 필수 서적 중 하나였던 대학과 중용의 가격은 쌀 몇 섬과 맞먹었다고 한다. 참고로 "섬"은 현대로 따지면 거의 200kg에 달하며, 2020년 기준 쌀 20kg의 평균 시세는 약 53,000원대이다. 즉 (물가 차이는 있겠으나, 표면적으로 보았을 때) 책 한 권이 백만 원을 넘기는 수준이었단 의미다. 물론 서양에서도 저런 시절이 있었으나, 그건 양피지에 수도자들이 필사해 한 권씩 만들던 중세 시절 이야기다. 그러다 보니 많은 사람들이 책을 빌려 필사하는 애로를 감수해야 했다.[4] 실록 편찬이 완료되면 사초들을 씻어서 백지로 만들어 재활용했던 이유도 종이의 가격이 한 번만 쓰고 버리기에는 아까웠기 때문이었다. 비단 사초뿐만 아니라 상당수의 문서들도 그렇다.[5] 서양과 비교했을 때. 흔히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와 고려 시대의 금속활자를 가지고 누가 최초냐며 싸우는 일이 많은데, 사실 서양에서는 "누가 금속활자를 최초로 만들었냐"를 가지고는 별 신경을 쓰지 않는다. 실제로 구텐베르크가 최초로 금속 활자를 만든 것도 아니다. 구텐베르크가 지금까지 이름을 남긴 이유는 이러한 금속활자 인쇄를 쉽게 해주는 프레스기(포도주 제작을 위한 포도 압축기를 바탕으로 만들었다고 한다)를 발명하여 인쇄술의 시대를 앞당겼기 때문이다. 동아시아의 경우 사람이 일일이 목판이나 금속활자에 종이를 눌러 찍는 방식을 고수하였고 이로 인해 공정이 비효율적일 수 밖에 없었다.[6] 이상의 내용은 "조선의 베스트셀러"(이민희, 프로네시스, 2007)을 참고함.[7] 요즘도 그런데 옛날도 그랬겠지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겠으나, 현대 대한민국 출판계에서 번역서 출간시 분권을 하는 많은 경우는 두꺼운 책을 낼 경우 정가가 상승한다는 점과 튼튼한 제본이 어렵다는 점 그리고 인쇄 및 제본 사고시 대응이 어렵다는 점이 원인이다.[8] = "마음에 든다고 제멋대로 페이지를 찢어 가져가지 마시기 바랍니다"[9] 당시에는 책 한 권 당 액수를 책정했으므로, 한 권으로 충분히 정리할 수 있는 책을 여러 권으로 나누어 빌려주는 행위가 없지 않았다. 한 권짜리 만화책을 서너 권 혹은 한 챕터씩 분철하여 돈 주고 빌려준다고 생각해 보자. 기록에 따르면 한 권당 평균 쪽수가 30페이지 정도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