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포이 항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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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세포이 항쟁은 반제국주의, 민족주의에 기반한 독립운동과는 차이가 크다. 해당 사건이 반란·폭동인지 항쟁·의거인지 이름을 붙이는 것은 해당 사건을 보는 정치적 입장에 따라 다를 수 밖에 없다. 영국의 경우 독립전쟁과 반란을 병기하는 상황이고, 인도와 같이 대영제국식민지였던 아일랜드의 경우 독립전쟁으로 서술하고 있다. 인도 내부에서도 독립운동으로 보며 영문 위키는 1차 독립전쟁(First War of Independence)이라고 한다.


1. 배경[편집]


영국은 1757년 플라시 전투에서 프랑스인도 제후의 연합 세력을 꺾어 벵골 지배의 길을 연 뒤 1764년 북사르 전투에서 무굴 제국 및 아와드와 연합한 벵골의 항쟁을 분쇄하고 벵골 지배를 공고화한다. 뒤이어 18세기 중후반 인도 남서부를 장악한 마이소르 왕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19세기 전반 인도 북중부의 마라타 동맹, 북부의 시크 왕국 세력을 물리치면서 1세기만에 인도 반도를 평정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무굴 제국의 틀과 크고 작은 지역 왕국은 아직 존속하고 있었다. 영국의 지배는 인도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 매우 심각한 변화를 가져왔다. 또한 이에 대한 불만과 적대감이 인도인 사이에 널리 퍼져 있었는데 지역 왕국들의 구지배층 사이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우선 산업 혁명 당시 영국에서 들어오던 무수한 면직물 등으로 인하여 인도 현지 경제가 붕괴되었다. 그 당시 면산업의 중심지였던 다카는 15만이나 되던 인구가 3~4만으로 줄어 들었다. 설상가상으로 동인도 회사토지개혁 등으로 중소농민들이 땅을 잃게되자 이들은 동인도 회사에 불만을 품게 되었다. 또한 선교사들의 포교와 동인도 회사 행정부의 인도인 무시가 심했다. 당장 1853년 창설된 법무위원회에서는 자문위원들이 전원 영국, 유럽인들이었으며 인도인이 단 한 명도 없었다.

한편 동인도 회사도 인도의 군소 번왕국들을 병합했는데, 동인도 회사 사장이었던 댈후지(1812~1860)는 적법한 후계자가 없다고 동인도회사에서 판단했을 경우 영국에 종속된 번왕국의 영토를 합병할 수 있다는 규정을 내세웠다.[1][2] 이 수법에 눈뜬 채로 영지를 잃은 왕족들 중 나중에 항쟁에 가담하는 락슈미 바이도 있었다.


2. 세포이 용병들[편집]


인도에 주둔한 영국 육군에는 많은 인도인 용병들이 있었는데, 1850년 당시 영국군 269,000명 중 영국인은 46,000명에 불과했다. 이들은 이슬람, 힌두교, 시크교 등등 다양한 종교 신자들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이들 용병을 가리켜 '세포이(sepoy, 페르시아어의 'sipahi'에서 유래)'라고 불렀다. 이들은 영국 동인도회사가 인도 정복을 위해 고용한 것이었다. 영국은 이들을 출신지역에 따라 3개군으로 나누어 배치시켰는데, 각각 벵골군, 봄베이군, 마드라스군이었다.

그러나 이들 사이에도 처우에 대한 불만이 있었는데, 우선 연공에 따라 진급을 시키는 영국 육군의 진급 제도를 적용하다 보니 나이가 어느 정도 있던 세포이들은 상대적으로 진급에서 불이익을 겪었다. 또한 힌두교도 상층 카스트들은 인도의 바깥 세계로 나가는 것을 꺼렸는데[3], 영국인들이 해외 원정을 요구하면서 세포이들과 갈등을 빚었고 영국 측에서는 이에 해외 원정을 거부하는 세포이들을 해고하도록 하는 지침으로 대응했다. 그래도 먹고 살려고 입대한지라 참고 있었는데 1856년 제정된 일반 복무 규정에 의하여 벵골군의 상당수는 해외 원정에서 제외되었다.

게다가 이들의 수가 늘어나자 동인도 회사 측은 경비를 아끼려고 세포이들의 퇴직 연금 지급을 중단했다. 특히 벵골군 세포이들은 퇴직금 부담을 줄이려고 봄베이군이나 마드라스군보다 급료까지 적게 받는 와중에 이 일이 터져 버렸다. 여기에 1856년 아와드 지역이 병합되자 세포이들은 자기 지역에서 누려온 토지세 특권이 축소되는 것을 우려하고 있었다. 사실상 세포이들은 토지세 특권을 이유로 세포이업을 세습 가업으로 삼고 있었다. 즉 세포이 항쟁의 배경에는 종교적 이유 외에도 생업적 문제와 기득권 사수가 있었다.

3. 화약 탄포 문제[편집]



(영화 '만갈 판데이' 중. 엔필드 강선 머스킷의 장전 및 사격 방법. 1분 40초부터 보면 된다. 사실 동영상 앞부분에 탄포를 싣고 움직이던 마차가 파손되어 탄포가 거리로 쏟아진 부분도 해당 장면의 복선이다.[4] 단, 원형 머스킷 볼이 들어가는건 고증오류로, 동물성 기름이 사용된 원인이 하술될 미니에 탄과 프리쳇 탄의 특성에서 기인하기 때문이다.)

(1분 40초. 실제 미니에 탄의 장전 및 사격 방법.)

(9초. 실제 프리쳇 탄의 장전 및 사격 방법. 종이 탄피의 끝단을 찢는 장면이 생략되어있다.)

영국군과 세포이 간에는 산발적인 충돌이 있었다. 1857년 3월 29일 벵골군 세포이였던 망갈 판데이(1827~1857)가 지휘관의 명령에 불복하고 지휘관의 말까지 쏘는 하극상을 벌이자 연대장은 판데이의 체포를 명령하였으나 단 한 명을 제외한 모든 세포이들이 지휘관의 명령을 거부했다. 그 외에도 아그라 등 많은 도시에서 충돌이 있었다. 이는 1857년 5월 10일 델리 북쪽 미루트에서 발생한 '화약 탄포 문제'를 게기로 항쟁으로 발전했다.

하지만 단순한 화약 탄포가 일을 크게 만든 것은 바로 영국인이 돼지의 기름을 탄약 종이에 칠했다는 소문이 돌았기 때문이다 당시 세포이들은 총을 장전하기 위해 총탄의 종이 부분을 입으로 물고 뜯어야 했는데 힌두교도들은 소를 신성시하고, 무슬림들은 돼지를 부정한 것으로 여겼으며, 세포이로서 징집된 사람들은 대부분 이 두 종교 중 한쪽을 믿고 있었기 때문에 군대가 발칵 뒤집힌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특히 힌두교도는 쇠고기를 입에 대면 카스트를 강등당하게 되는데 벵골군 세포이들은 상층 카스트가 많았기 때문에 다른 지역보다 더더욱 분노했다고 한다. 본래 세포이들은 카스트에 상관없이 모집했으나 벵골군의 경우에는 플라시/북사르 전투로 인해 이 전투에 참여하지 않은 상층 카스트를 모집하고, 이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힌두교 의식/방식도 허용하였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로 인해 벵골 세포이들은 영국 문화에 더더욱 반감을 가지게 되었다.

사실 근거 없는 소문은 아니었다. 당시 전장식 머스킷에는 흑색화약 정량을 종이에 납탄과 함께 싸서 끈으로 묶거나 접착제로 밀봉하는 페이퍼 카트리지를 사용했는데, 이를 사용하려면 종이로 된 화약 탄포 한쪽을 이빨로 찢어서 탄포 안에 든 화약을 총구에 부어 넣은 뒤, 입안에 있던 뭉쳐진 카트리지 종이를 총알 뒤에 넣어 화약이 새어나오지 않도록 하는게 원칙이었다. 따라서 이 시기의 페이퍼 카트리지는 방수를 위한 왁스 코팅과 윤활을 위해 탄약이나 총열에 동물성 기름을 소량 도포하는 정도로 충분했고, 정기적으로 총열을 청소하며 기름칠을 해주면 되었기에 크게 문제시 되지 않았다. 게다가 당시 다른 국가와 달리 영국 교범에선 종이탄피의 화약부를 뜯어내는게 표준이다보니 총알에 미약하게 기름이 발라져 있어도 세포이들 입장에선 잘 알아차리기 힘들었다.

그런데 새로 보급된 엔필드 1853 강선 머스킷은 미니에 탄과 프리쳇 탄을 사용할 수 있는데, 해당 탄환들의 형상적 특성[5]으로 인해 총알이 충분히 윤활되어야 할 필요가 생겼다. 이에 따라 미니에 탄의 경우 총알 외부에 파인 홈에 기름이 잔뜩 먹여놓았고, 프리쳇 탄은 아예 탄환이 들어있는 페이퍼 카트리지 하단부를 기름에 흠뻑 적셔놓았다. 이렇게 대놓고 총알에 동물성 기름이 발라져 있던게 화근이었다.

사실 영국 당국의 생각은 기존 총알과 별로 달라진 것도 없는데[6], 총신에 기름을 바르지 않아도 되고, 총도 가벼워진데다가 장전하기도 쉬우니 세포이들은 분명히 좋아하겠지였고, 이것 때문에 세포이 전원에게 이 총을 지급하려고 했다. 진영이 자꾸만 어수선해지자 여기에 이 문제에 대해 영국인 장교들이 "그럼 니네들이 새로 만들어서 밀랍이나 양기름으로 코팅하셈"이라고 말한 것이 결정적인 화근이었다. 즉 기름 문제는 사실로 받아들여졌기 때문. 나중에 영국이 조사한 결과 소기름은 확인되었으나 돼지기름은 확인되지 않았다고 하는데 어쨌든 이 사건은 인도인들의 대대적 분노를 부르게 된다.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심각해지자 영국 측에서는 교본을 수정해 손으로 뜯어도 되는 방향으로 수정할 것을 권고했으나 대부분 시정되지 않았고, 오히려 명령을 거부하는 세포이들을 하극상으로 불명예 제대, 심지어는 교수형까지 시켰다. 영국군도 처음에는 이런 세포이들의 불만을 접수하고 장교들이 이를 개선할 것을 본국에 정식으로 건의했지만 본국에서는 별것이 아닌 문제로 무시해버렸다. 식민지 현지의 문화에 무지하고 종교 문제의 민감성이나 폭발성에 무지하여 일어난 대표적인 문화충돌의 사례.


4. 전개[편집]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600px-Indian_revolt_of_1857_states_map.svg.png

세포이 항쟁 당시 분포도. 검은색은 세포이 반란 중심지역. 남색은 항쟁 중 정부는 영국을 지원했으나 군대는 주로 반란을 도운 지역. 파란색은 영국 지지 지역. 황색은 항쟁의 영향을 받은 영국 지배지역. 연두색은 중립지역. 흰색은 영국 직할 지배지역.

세포이들은 순식간에 델리를 점령하고 무굴 황제의 통치 부활을 선언했다. 여기서 항쟁은 더욱 퍼져나가 중부 인도로 세포이 항쟁이 확대되면서 전혀 새로운 양상이 나타나는데, 대다수의 소작농민들이 참여하면서 '반란'이 '항쟁', '독립운동'의 성격을 띄기 시작한다. 동인도 회사의 토지개혁으로 심각한 경제적 곤란을 겪던 소작농들은 처음부터 확실하게 동인도회사와 영국에 대한 거부를 명확히 하고 있었고 여기에 인도 문화를 부정하는 영국에 대한 문화적 반감도 매우 뚜렷하게 나타났다.

항쟁은 빠른 속도로 확대되고 농민과 시민도 참가해 영국의 지배는 위험에 빠졌다. 그러나 영국 정부는 가만있지 않아 대규모 군대를 파견해 9월 델리의 세포이군을 격파한 다음 무굴 황제를 체포했다. 여기에 이 항쟁은 강력한 통일 지도조직을 가지지 못한 것도 커다란 한계였다. 세포이 모두가 참여한 것도 아니었다. 75개 연대중 44개 연대나 참여한 벵골군과는 달리 봄베이군은 3개 연대만 동조했다.

마드라스군은 영국을 지지했는데 여기에는 민족적 배경이 있다. 마드라스타밀족이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지역이다. 무굴 제국의 전성기에도 타밀족은 완전하게 복속되지 않았고 자체적으로 정복전쟁을 벌였으며 타 민족들과 구분되는 독자적인 문화를 발달시켰다. 때문에 타밀족은 현재까지도 타 민족 특히 북인도의 아리안족들과 언어와 문자 모두 다른 걸 사용하고 사이도 영 안 좋다. 게다가 타밀족은 대부분 불교라서 화약을 감싼 기름종이에 어떤 기름을 썼는지 별로 신경 안 썼다.

한편 이 항쟁에 대해 여러 힌두교 번왕국 및 시크교도들은 오히려 영국에 협조적인 태도를 보였는데, 번왕국들은 락슈미 바이나 나나 사힙처럼 동인도 회사에게 영지를 잃은 왕족들을 제외하면 항쟁에 가담할 이유가 없었고, 시크교도들은 시크교를 탄압했던 '무굴 제국의 부흥'을 받아들이기 힘들었고 교리상 고기를 가리지도 않아 탄포 문제도 신경을 쓰지 않았던 것. 영국은 이 때문에 시크교도가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던 펀자브 지방의 토후와 손을 잡을 수 있기도 했다.

이후에도 세포이 항쟁은 여러 지역에서 소모적인 활동이 있었으나, 결국 영국군의 압도적인 기술력과 화력을 당해내지 못하고 1858년 7월에 완전 진압되었다. 이 와중에 세포이들은 포로들과 민간인들을 매우 우대했는데 여성들에 대한 성폭력도 거의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결국은 항쟁이 장기화됨에 따라 점점 과격해지게 된다. 특히 칸푸르에선 반란군 지도자 나나 사힙이 포로와 민간인들을 학살했는데 남자들은 전부 죽이고 여자들을 강간한 후[7] 아이들과 같이 정육용 칼로 토막 내 살해하고 우물에 던졌다.

당시 영국군은 저소득층이 돈을 벌고자 서로 오려던 경우가 허다해서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약탈이나 강간과 같은 전쟁범죄가 워낙 흔했고 영국 여론도 이걸 비난하지 않았다. 게다가 이는 영국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들도 마찬가지였다. 약탈, 민간인 학살을 저지르거나 시체를 뒤져 물건을 차지하는 부하까지 가차없이 교수형시킨 웰링턴 공작 아서 웰즐리는 영국에서도 괴짜로 취급받았다.[8]

반란군 포로들은 영국 육군에서 배신자를 처형하는 방식인 야포의 포구(砲口, 대포 입구)에 머리가 위치하도록 묶은 뒤 포탄을 쏴 머리를 날려 버리는 방법으로 처형됐다. 실제 사진도 남아 있다.


5. 이후[편집]


인도 통치 개선법
제1조 지금까지 동인도 회사가 점유했거나 통치했던 영토와 그 권력을 영국 여왕 폐하가 대신한다.
제2조 여왕 폐하의 국무위원 중 한 사람은 동인도 회사가 가졌던 권력과 그 의무를 모두 가지고 실행한다.
제39조 동인도 회사의 토지, 부동산, 금전, 저당품, 상품, 재산, 그 밖의 부동산과 동산은 이 회사의 자본금과 배당액을 제외하고 폐하에게 귀속된다.

항쟁 이후, 영국은 무굴 제국 황제를 폐위시켜 추방, 무굴 제국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한다. 이듬해 1858년에는 인도 통치 개선법이 하원되어 동인도 회사가 영국 정부에게 모든 권한을 넘기고 해체되었기에 아예 직접 통치로 전환한다. 이후 총독에 의한 정치를 지나 1877년에는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이 '인도의 황제' 자리에 올라 황제를 칭하고 영국령 인도 제국이 세워진다. 무굴 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바하두르 샤 2세영국령 버마로 귀양을 가서 쓸쓸하게 죽었고 그의 아들들은 영국에 대항한 죄로 투항한 황후 지낫 마할의 세 아들을 제외하고 전원 처형되었으며 딸들은 영국 장교의 이 되었다.

당시 영국은 제2차 아편전쟁도 겪었기 때문에 양쪽에서의 전쟁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어 정책을 수정하게 된다. 정작 청나라는 영국이 세포이를 진압하는 동안 그냥 손놓고 있다가 박살나지만 물론 식민지를 위해서가 아닌 본국을 위한 것이었고 인도인의 처우가 나아지거나 정치적 권리가 더 생기는 것은 아니었다.

사건의 발단을 제공한 동인도 회사의 댈후지 사장은 세포이 항쟁 1년전인 1856년에 임기를 마치고 영국으로 귀국했는데, 세포이 항쟁이 터지자 마자 영국 국내에서 사태를 만든 가장 큰 원흉이라고 손가락질 당하면서 정치 생명도 끝나고 4년 뒤인 1860년에 죽었다. 게다가 생전에 쌓은 공로로 댈후지 백작후작 작위로 승작하는데 성공했으나, 아들이 없어서 락슈미 바이같은 이유로 후작 작위는 단절당하고, 백작만 겨우 사촌에게 계승했다.

문제가 된 엔필드 1853 패턴은 종전처럼 머스킷 볼을 사용하는 구식 카트리지를 쓸 수 있도록 내부 강선을 갈아 평평하게 만든 엔필드 1858 인도 패턴으로 개조되었다. 이는 필연적으로 명중률 및 위력의 저하를 불러왔으며, 총열 두께가 줄어듬에 따라 폭발사고가 빈번해지게 되었다.


6. 여담[편집]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330px-Mangal_Pandey_movie_poster.jpg

세포이 항쟁을 다룬 영화로 2005년, 인도에서 제작한 아미르 칸 주연의 'Mangal Pandey'(망갈 판데이)가 있다. 900만 달러로 제작하여 인도에서 2200만 달러를 벌어들이며 흥행은 그럭저럭 거둬들였다. 물론 그 전에도 영화화가 몇 번 되었다.

셜록 홈즈 단편 시리즈인 셜록 홈즈의 회상록 가운데 하나인 '꼽추 사내'(The Adventure of the Crooked Man)에서도 세포이 항쟁이 줄거리에서 중요한 배경 사건으로 나온다.

2016년 12월, 영국에서 새 5파운드 지폐를 발행했는데 여기에 수지가 사용되었다는 보도가 나오면서 영국 내에 거주하는 채식주의자 및 힌두교도 공동체[9]들 사이에 패닉이 벌어졌다. 세포이 항쟁 때처럼 전쟁이 벌어지지야 않겠지만, 본질적으로는 같은 상황이다.

당시 영국에서 그려진 선전물도 있는데 영국을 상징하는 사자[10]인도상징하는 벵갈호랑이에게 죽은 여자의 복수를 위해 벵갈호랑이를 공격하는 그림이다.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3: 아시아 왕조 인도 캠페인이 이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문제의 발단이 된 페이퍼 카트리지는 옛날에나 쓰이던 방식이고 요즘은 그런 쪽 관심 있는 사람이나 알법한 방식이기에 저연령층 대상으로 한 역사 만화책에서는 총 닦는 기름이 문제됐다고 묘사된다.


7. 둘러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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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로마 제국브리타니아를 정복할 때 부디카비슷한 방법으로 영토를 빼앗겨 반란을 일으켰다.[2] 해당 규정을 요약하자면 번왕의 적법한 아들만 후계자의 자격이 있다는 내용이다. 후계자가 단절되기 딱 좋은 상황.[3] 힌두교 마누 법전에는 한 번이라도 바다에 나갔다 돌아올 경우 이전의 계급과 상관없이 무조건 최하위 계급인 수드라로 강등한다는 규칙이 있었기에, 특히 높은 카스트는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는 것을 꺼렸다. 예를 들어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도 영국으로 유학을 가기 전에 집안의 친척들이 이 마누 법전을 근거로 하며 반대했기에 이를 심각하게 고민했다.[4] 거리의 들이 쏟아진 탄포로 우르르 몰려드는 것 자체가 동물기름을 사용했다는 의미이다. 기본적으로 동물성 기름중에 공업용으로 쓸 정도로 생산성이 제대로 나오는건 소기름돼지기름이다.[5] 원추형의 뭉툭한 부분을 총신에 넣어야하는데, 하필이면 그 부분의 속이 파여있기에 강선이 파인 총열 내부에 걸릴 가능성이 있다.[6] 앞서 언급되었듯 기름 자체는 기존에도 있었다. 다만 미니에 탄의 홈에 대놓고 발라져있거나 프리쳇 탄의 페이퍼 카트리지 하단부에 듬뿍 적셔진 것 처럼 대놓고 보이지 않았고 영국인들도 딱히 문제시 되지 않은 사항을 알려주지 않았을 뿐[7] 다만 이 문제가 영국에서도 논란이 되었다. 영국인 관리들이 직접 현장을 방문하여 여성들의 시체를 조사해 보았으나 강간 흔적은 찾지 못했다고 한다.[8] 인도적인 이유도 있지만 민간인들이 적성 세력으로 돌아설 위험성 때문에 막았던 것이다.[9] 힌두교도가 분노한 건 현대사회에서는 수지가 대부분 소에게 채취되기 때문이며 채식주의자의 경우 비건 계열은 음식뿐만 아니라 일상용품도 동물로 된 것은 먹고 쓰지 않기 때문이다.[10] 영국에는 사자가 안 살았지만 영국에서는 옛부터 사자를 상징으로 사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