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레우코스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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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레우코스 왕조
Βασιλεία τῶν Σελευκιδῶν
Αυτοκρατορία των Σελευκιδών[1]

파일:셀레우코스 왕조 상징.webp
문장[2]

파일:Seleucid Empire.png

셀레우코스 왕조의 강역
기원전 312년 ~ 기원전 64년
성립 이전
멸망 이후
헬레니즘 제국
로마 공화국
수도
셀레우키아(기원전 312년 ~ 기원전 240년)
안티오키아(기원전 240년 ~ 기원전 64년)
정치 체제
전제군주제
국가원수
바실레우스
주요 군주
셀레우코스 1세(기원전 312 ~ 기원전 281)
안티오코스 3세(기원전 223 ~ 기원전 187)
언어
코이네 그리스어, 고대 페르시아어, 아람어, 히브리어, 산스크리트어
민족
그리스인, 아시리아인, 페르시아인, 유대인, 아람인, 인도아리아인
종교
고대 그리스 종교(국교)[3], 바빌로니아 종교, 조로아스터교, 유대교,[4] 불교
통화
드라크마(Τετράδραχμο)
면적
기원전 303년 3,000,000km2
기원전 301년 3,900,000km2
기원전 270년 3,200,000km2
기원전 240년 2,600,000km2
기원전 175년 800,000km2
성립 이전
마케도니아 왕국
멸망 이후
로마 공화정
파르티아 제국
박트리아 왕국
오스로에네 왕국
하스몬 왕조


언어별 명칭

한국어
셀레우코스 제국, 셀류쿠스
라틴어
Seleucidae Imperium
그리스어
Αυτοκρατορία των Σελευκιδών
Ἀρχή Σελεύκεια[5]
영어
Seleucid Empire
히브리어
הממלכה הסלאוקית
아랍어
السلوقيون

1. 개요
2. 역사
2.1. 셀레우코스 1세: 건국과 확장
2.2. 안티오코스 1세: 혼란 수습
2.3. 안티오코스 2세: 제2차 시리아 전쟁과 동방의 이탈
2.4. 셀레우코스 2세, 셀레우코스 3세: 멸망의 위기에 놓인 제국
2.5. 안티오코스 3세: 최전성기
2.7. 내전기
2.8. 안티오코스 7세: 재건 시도와 좌절
2.9. 끝없는 혼란(데메트리오스 2세 계열과 안티오코스 7세 계열간의 내전)
2.10. 최후
3. 정치
4. 지방 행정 / 법 제도
4.1. 헬레니즘 시대의 도시
5. 세금 제도
6. 경제
7. 군사
8. 사회/문화
9. 역대 국왕
10. 대중 매체



1. 개요[편집]


현대 그리스어 발음은 '셀레프코스' 제국에 가까우나, 당대의 코이네 그리스어 발음에 따라 '셀레우코스 제국'으로 통칭된다.

기원전 312년부터 기원전 63년까지 존속했던 서아시아 일대의 헬레니즘 계열 제국으로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후 디아도코이 중의 하나였던 셀레우코스 1세 니카토르가 창건했다. 수도안티오키아를 중심으로 시리아 일대에 핵심 기반을 두고 있었으므로 시리아 왕국이라고도 한다.

알렉산드로스 제국으로 통칭된 대왕의 정복 영토 중 동방 대부분을 차지한 그리스계 절대군주정 국가다. 최대 강역은 제국의 중심부인 아나톨리아 반도 중부와 남부, 레반트, 메소포타미아, 페르시아, 투르크메니스탄, 파미르, 인더스 계곡에 이르렀다.

헬레니즘 제국소아시아, 시리아, 페르시아 영토를 거의 모두 차지했으나 이집트의 경쟁 왕조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시리아 전쟁을 벌여 국력을 소모하였고, 각지에서 반란과 독립이 빈발하여 영토를 오래 유지하지 못했다. 서쪽에서는 로마, 동쪽에서는 아르사케스 왕조 파르티아에게 영토를 빼앗겨 기원전 2세기 말에는 시리아에 국한된 소국으로 전락했고, 기원전 63년 로마의 장군 폼페이우스에 의해 멸망하여 로마 제국의 시리아 속주로 편입되었다.


2. 역사[편집]



2.1. 셀레우코스 1세: 건국과 확장[편집]


파일:터키 디아도코이.png
건국 직후, 입소스 전투안티고노스 왕조(분홍색)를 분할하기 이전

셀레우코스 1세 니카토르는 필리포스 2세헤타이로이에 소속된 귀족 안티오코스와 라오디케의 아들로, 비슷한 나이대였던 알렉산드로스 3세와 함께 군사 훈련을 받고 철학자들로부터 교육받았다. 알렉산드로스 3세가 페르시아 원정을 단행했을 때 '소마토풀락스'(sōmatophulax: 국왕 경호원)의 일원으로서 동행했으며, 기원전 330년 파르메니온이 반란에 가담한 혐의로 알렉산드로스 3세가 보낸 자객에 의해 암살된 뒤 '은방패 부대'로 일컬어지는 '히파스피스트'(hypaspists)의 지휘관 중 한 사람이 되어서 히다스페스 전투에 참전했다. 기원전 324년 알렉산드로스 3세가 마케도니아 귀족과 페르시아 귀족의 화합을 이끌기 위해 수사에서 집단 결혼식을 올렸을 때, 그는 소그디아 귀족 스피타메네스의 딸 아파마와 결혼했다. 다른 장군들은 알렉산드로스 3세가 죽은 뒤 페르시아 여자들과 이혼했지만, 그만은 그녀를 지켰고, 아파마는 훗날 셀레우코스 왕조의 초대 황후가 되었다.

기원전 323년 알렉산드로스 3세가 바빌론에서 붕어한 뒤, 다른 장수들과 함께 페르디카스를 섭정으로 추대했고, 헤타이로이 지휘관 겸 천인대장에 선임되었다. 기원전 321년 페르디카스가 마케도니아로 보내려던 알렉산드로스 3세의 유해를 프톨레마이오스 1세가 도중에 가로채서 알렉산드리아로 가져가면서 제1차 디아도코이 전쟁이 발발했다. 그는 페르디카스의 이집트 원정에 동행했지만, 전쟁은 시간이 지날수록 페르디카스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급기야 메디아의 사트라프 페이톤과 아르기라스피데스, 안티오네스가 페르디카스를 암살했다. 코르넬리우스 네포스는 셀레우코스도 이 음모에 가담했다고 주장했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페르디카스 사후 새 섭정이 된 안티파트로스는 트리파라디소스에서 자신을 살해하려고 들었던 병사들을 막은 셀레우코스에게 보답하고자 바빌론의 사트라프로 임명했다. 당시 바빌론에는 페르디카스로부터 사트라프로 임명된 도키무스가 있었지만, 셀레우코스가 기원전 320년 10월이나 11월에 바빌론에 도착했을 때 싸우지 않고 도주했다. 바빌론은 제국에서 가장 부유한 속주 중 하나였지만 군사력은 미미했고, 페르시스의 사트라프 페우케스타스의 견제를 받았다. 하지만 셀레우코스는 개의치 않고 페르시아 신민들에게 선정을 베풀어 그들의 호의를 얻어냈다.

그 사이 제국은 다시 혼란에 빠졌다. 섭정 안티파트로스가 기원전 319년 사망하자, 폴리페르콘이 새 섭정에 등극했다. 그러자 안티고노스는 그를 인정할 수 없다고 선언하며 군대를 동원했다. 이에 폴리페르콘은 에우메네스와 동맹을 맺어 대항했다. 셀레우코스는 제국이 두 개 세력으로 분열된 상황에서 안티고노스의 편을 들었다. 얼마 후, 메디아 총독 페이톤은 파르티아의 총독 필리포스를 암살하고, 동생 에우데모스를 새 총독으로 삼았다. 이에 다른 사트라프들이 페우케스타스의 지휘하에 그에 맞서 싸웠다. 페이톤은 파르티아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참패하고 바빌론으로 도주했다.

기원전 319년 에우메네스와 그의 군대가 바빌론 북쪽으로 이동했고, 안티고노스가 그보다 더 많은 군대를 이끌고 추격했다. 기원전 317년 가을이나 겨울, 페이톤이 바빌론에 도착하여 셀레우코스와 합류했고, 에우메네스는 기원전 316년 봄에 수사의 사트라프들로부터 지원을 받아낸 뒤 티그리스 강을 건너서 바빌론으로 진격하려 했다. 셀레우코스는 이에 맞서 3중전차 2대와 작은 배 몇 척을 보내 건널목을 저지하게 했고, 홍수를 저지하기 위해 설치했던 장벽을 파괴해서 홍수를 유발하게 했지만, 이 모든 조치는 허사였다. 하다못해 에우메네스를 따르는 장병들에게 막대한 뇌물을 줘서 회유해보려 했지만, 이 또한 별 소용이 없었다.

결국 에우메네스가 티그리스 강을 건너 바빌론으로 진군하자, 셀레우코스는 저항을 포기하고 페이톤과 함께 안티고노스에게로 달려갔다. 안티고노스는 에우메네스가 지중해로 이동하는 걸 저지하는 임무를 맡았고, 셀레우코스는 소규모 병력을 이끌고 에우메네스의 퇴로를 차단했다. 이후 안티고노스는 파라이타케네 전투와 가비에네 전투에서 에우메네스를 격파하고, 그를 사로잡은 뒤 처형했다. 이리하여 제국의 실권을 장악한 안티고노스는 페이톤이 자신의 병사 일부를 매수해 반란을 도모하는 걸 눈치채고 곧바로 처형했다. 기원전 315년 여름 바빌론에 도착한 안티고노스는 셀레우코스에게 바빌론에서 벌어들인 수입을 넘기라고 요구했다. 셀레우코스는 이 요구를 거절했다가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50명의 기병과 함께 이집트로 달아났다.

프톨레마이오스 1세는 디아도코이 중 가장 강대한 세력을 갖춘 안티고노스에 공동 대응하기로 하고, 카산드로스, 리시마코스와 연합하여 기원전 314년 안티고노스를 상대로 전쟁을 선포했다. 기원전 314년 봄 안티고노스가 로도스 섬과 동맹을 맺고 티레를 포위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육군을 이끌고 티레로 향하는 한편, 셀레우코스에게 100척의 함대를 맡겨서 로도스를 압박하게 했다. 셀레우코스는 카리아의 사트라프 아산드로스로 하여금 프톨레마이오스와 동맹을 맺게 했고, 에리트라이를 공격하여 타격을 입히기도 했다. 뒤이어 키프로스로 이동한 셀레우코스는 메넬라오스가 이끄는 10,000명의 용병 및 100척의 함선과 합세한 뒤 키티온을 포위하고, 안티고노스 함대의 반격을 격퇴했다. 한편 프톨레마이오스는 기원전 312년 가자 전투에서 안티고노스의 아들 데메트리오스 1세 폴리오르케테스를 격파했다. 이 전투에서 안티고노스가 바빌론의 사트라프로 지명했던 아게노르의 아들 페이톤이 전사했다.

데메트리오스 1세가 트리폴리로 후퇴한 뒤, 프톨레마이오스는 시돈으로 진격하는 한편 셀레우코스에게 800명의 보병과 200명의 기병을 줘서 바빌론에 복귀하도록 했다. 셀레우코스는 가는 길에 페르시아인들을 모집하여 3,000명의 군대를 갖춘 뒤 재빨리 바빌론을 장악했다. 후대 역사가들은 셀레우코스 왕조의 역사가 그가 바빌론으로 복귀한 해인 기원전 312년에서 시작한다고 기술했다. 이에 위협을 느낀 안티고노스는 메디아의 사트라프 니카노르와 아리아의 사트라프 에바고라스에게 셀레우코스를 공격하라고 지시했다.

셀레우코스는 자신의 한정된 병력으로는 회전에서 절대로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하고, 기습을 감행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적군이 티그리스 강을 건너기 위해 준비중일 때 극비리에 접근하여 습지에 군대를 숨겨놓은 후, 밤에 기습 공격을 가했다. 에바고라스는 미처 피하지 못한채 전사했고, 니카노르는 달아났다. 남겨진 장병들은 셀레우코스에게 항복했다. 이렇게 해서 훨씬 많은 병력을 확보하게 된 셀레우코스는 메디아와 수사를 정복했고, 페르시아, 아리아, 파르티아와 같은 인근 지역에도 영향력을 행사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안티고노스는 프톨레마이오스와 휴전 협정을 맺은 뒤 기원전 311년 바빌론을 공격했다. 그러나 기원전 309년까지 이어진 전쟁에서 별다른 소득을 거두지 못하고 철수해야 했고, 양자는 곧 휴전 협정을 맺었다.

안티고노스가 지중해에 관심을 돌린 사이, 셀레우코스는 이란과 박트리아의 지배권을 굳혔다. 기원전 306년 찬드라굽타 마우리아가 탈취한 편자브와 서북 인도 일대를 탈환하기 위해 인도 원정에 착수했다. 그러나 찬드라굽타의 강력한 마우리아군을 상대로 고전하다가 1년만에 평화 협정을 맺었다. 셀레우코스는 아라코시아와 게드로시아, 드랑기아나 및 그 외의 모든 인도 접경 영토를 포기하고, 딸을 찬드라굽타와 결혼시키는 대신 인도 코끼리 500마리를 받았다. 원정을 마치고 본거지로 귀환한 셀레우코스는 카산드로스가 보낸 사절단으로부터 안티고노스에 대항하는 동맹에 함께하자는 제의를 받았다. 그는 이를 수락하고, 대군을 이끌고 소아시아로 진격했다.

파일:터키 디아도코이 7.png
입소스 전투로 시리아를 얻은 셀레우코스

기원전 301년, 리시마코스와 연합한 그는 입소스 전투에서 안티고노스를 상대로 대승을 거뒀다. 안티고노스는 이 전투에서 전사했고, 그의 영역은 프톨레마이오스, 카산드로스, 리시마코스, 그리고 셀레우코스에 의해 분할되었다. 리시마코스는 아나톨리아 서부를 가졌고, 프톨레마이오스 1세는 유대 지방을 차지했으며, 카산드로스의 동생 플레이스타르코스는 킬리키아와 뤼키아를 가졌다. 나머지 영토는 셀레우코스에게 귀속되었다. 그 후 자신이 얻은 영토를 확고히 장악하는데 10여년의 세월을 보냈고, 이때 많은 공을 세운 아들 안티오코스 1세를 294년에 공동 통치자로 삼아 동부 영토를 관할하게 했으며,[6] 자신은 서부 영토를 다스렸다. 그는 이 시기에 안티오키아와 셀레우키아를 건설했다.

기원전 286년 킬리키아를 공략한 데메트리오스 1세의 군대가 급료를 받지 못해 불만이 많다는 걸 눈치채고, 사람을 몰래 보내 거액의 돈을 줄 테니 자기 편에 서라고 꼬드겼다. 이후 킬리키아에 도착한 그는 데메트리오스 1세의 군대 앞에 투구를 벗으며 정체를 드러냈고, 장병들은 곧바로 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결국 데메트리오스 1세는 셀레우코스의 수중에 들어가 아파메이아에 수감되었고, 그곳에서 몇년간 감금되었다가 사망했다. 이후 리시마코스가 아들 아가토클레스를 살해하면서 민심이 등을 돌리자, 셀레우코스는 이를 기회삼아 소아시아 전역을 공략하기로 마음먹었다. 기원전 282년 겨울, 리디아의 코루페디움으로 진격한 그는 그곳에서 리시마코스를 상대로 맞붙어 대승을 거뒀고, 리시마코스는 전사했다. 이로써 자신의 제국에 서부 소아시아를 추가하였고, 발칸 반도로 진출할 발판이 마련되었다.

파일:터키 갈라티아 5.png
리시마코스를 멸하고 트라키아, 마케도니아까지 복속시킨 셀레우코스 (기원전 281년)

셀레우코스는 페르가몬 등 소아시아 해안가의 여러 도시국가로부터 충성 맹세를 받아낸 뒤 마케도니아와 트라키아를 정복하고자 헬레스폰트 해협을 넘어 발칸 반도에 진입하면서, 그리스의 여러 도시 국가에 자신을 민주주의와 자치권을 회복하기 위해 폭정을 저지르는 압제자들로부터 해방시켜줄 인물로 소개했다. 그러나 기원전 281년 9월 리사마키아 인근에 도착한 뒤 희생제를 치르고 있을 때 프톨레마이오스 케라우노스에게 암살당했다. 셀레우코스 1세의 급사와 함께 그가 염원했던 마케도니아와 트라키아는 프톨레아미오스 케라우노스의 수중에 들어갔고, 곧 켈트 인들의 침공에 시달리게 되었다. 셀레우코스의 아들 안티오코스는 곧 트라키아를 넘어 소아시아로 몰려오는 켈트족과 시리아를 침공한 프톨레마이오스 2세에 맞서야 했다.

2.2. 안티오코스 1세: 혼란 수습[편집]


파일:attachment/diadochi_275.png
기원전 275년의 셀레우코스 왕조

셀레우코스 1세가 암살된 뒤 왕위에 오른 안티오코스 1세는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소아시아로 진격해 부친의 군대를 고스란히 가로챈 프톨레마이오스 케라우노스와 전쟁을 벌였으나 쉽사리 승부를 가리지 못했다. 그 사이 시리아에서 반란이 일어나면서 전쟁을 지속할 수 없게 되자, 안티오코스 1세는 프톨레마이오스 케라우노스와 화해하고 마케도니아와 트라키아가 그의 수중에 있는 걸 허용할 수 밖에 없었다.

이후 비티니아의 니코메데스 1세가 이끄는 소아시아의 그리스 도시 연합에게 눈길을 돌린 그는 소아시아 서부 지역의 사트라프 파트로클로스에게 니코메데스 1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킨 지포에테스 2세를 도우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파트로클로스는 니코메데스 1세와의 전투에서 패하고 목숨을 잃었다. 기원전 279년 여름, 마케도니아 왕 안티고노스 2세 고나타스는 서부 소아시아를 공략하고자 군대를 일으켰다. 안티오코스 1세는 이에 맞서 그리스의 여러 도시와 연합했다. 이후의 전쟁 경과는 기록이 미비해서 알 수 없지만, 양측이 승부를 내지 못하고 화해한 것만은 분명하다.

기원전 278년, 켈트족이 소아시아 해안으로 쳐들어왔다. 그들은 해안가 마을을 약탈한 뒤 좀더 깊숙이 들어가면서 지나가는 곳마다 파괴와 학살을 자행했다.[7] 안티오코스 1세는 이에 맞서 군대를 일으켰고, 기원전 275년, 양측은 소아시아 한복판에서 맞붙었다. 병력에서 열세했던 그는 켈트족이 단 한번도 보지 못했던 전투 코끼리를 투입했고, 켈트족은 이 '괴물'들을 보고 전의를 급격히 상실하여 패주했다. 그는 이 전투를 계기로 소아시아의 그리스인들로부터 '소테르'(Soter: 구세주)라고 불렸다. 하지만 켈트족은 패배에도 불구하고 갈라티아에 정착하고 자신들만의 나라를 세웠다.

기원전 275년 말, 안티오코스 1세는 군대를 일으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를 기습 공격해 다마스쿠스를 탈취했고, 여세를 몰아 시리아 해안과 아나톨리아 남부를 점령했다. 그러자 프톨레마이오스 2세가 반격에 나서 빼앗긴 영토를 전부 탈환하고, 오히려 카리아와 시리아 대부분을 공략했다. 하지만 프톨레마이오스 2세가 시리아에 가있는 동안 키레나이카의 총독 마가스가 아내의 설득을 받아들여 독립을 선포하고 왕을 칭하자, 프톨레마이오스 2세는 안티오코스 1세와 평화 협약을 체결하고 물러났다.

기원전 261년 자신의 속국이었던 페르가몬 왕국이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와 손을 잡으려는 기색을 내비치자, 이를 응징하고자 군대를 일으켜 쳐들어갔으나, 그해 6월 2일 사르디스 근처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패배했다. 이때 중상을 입은 그는 곧 숨을 거두었고, 둘째 아들 안티오코스 2세 테오스가 뒤를 이어 왕이 되었다.


2.3. 안티오코스 2세: 제2차 시리아 전쟁과 동방의 이탈[편집]


안티오코스 1세가 죽고 안티오코스 2세가 왕위에 올랐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프톨레마이오스 2세는 즉각 휴전을 깨고 북진하여 이오니아의 몇몇 도시를 점령했다. 그는 이에 맞서고자 마케도니아의 안티고노스 2세 고나타스와 연합하여 함대를 지원받았고, 코스 해전에서 이집트 함대를 궤멸시켰다. 이후 남하하여 팜필리아와 이오니아를 탈환했으며, 뒤이어 밀레소스와 에페소스를 점령한 뒤 소아시아 그리스 도시국가들로부터 '테오스'(Theos: 신)라는 칭호를 받았다.

비슷한 시기에 트라키아를 공략하려 했지만 이렇다할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다만 비잔티움에서 그의 이름으로 동전을 발행했던 걸 볼 때, 비잔티움을 영유한 건 성공한 듯하다. 기원전 257년 프톨레마이오스 2세는 반격에 나서 시리아 일부를 공략하였다. 여기에 코린토스와 칼카스를 선동하여 마케도니아에 반란을 일으키게 했고, 안티고노스 2세는 어쩔 수 없이 그리스로 철수했다. 게다가 안티오코스 2세가 시리아 전쟁에 열을 올리느라 동방 속주에 별 신경을 쓰지 못하는 사이, 파르티아박트리아에서 사트라프들이 잇따라 반란을 일으켰다. 파르티아의 사트라프 안드라고라스는 독립을 선포했고, 박트리아 총독 디오도토스도 기원전 256년 셀레우코스 왕조의 지배권을 부정하고 자신이 왕이라고 선포했다.

상황이 이처럼 좋지 않게 돌아가자, 안티오코스 2세는 프톨레마이오스 2세와 화해하기로 하고, 아내 라오디케 1세와 이혼한 뒤 프톨레마이오스 2세의 딸 베레니케와 결혼했다. 안티오코스 2세는 전 아내 라오디케 1세가 일리온, 카리아, 키지쿠스 등 아나톨리아 전역의 다양한 지역에서 토지를 소유하도록 했고, 면세 해택도 줬다. 안티오코스 2세와 결혼한 베레니케는 안티오코스라는 이름의 아들을 낳았다. 그런데 기원전 246년 7월, 안티오코스 2세는 소아시아의 영지를 관리하던 라오디케 1세와 재회했다가 의문의 죽음을 맞이했다. 이후 제국은 멸망의 위기에 직면했다.

2.4. 셀레우코스 2세, 셀레우코스 3세: 멸망의 위기에 놓인 제국[편집]


파일:터키 지중해.jpg
3차 시리아 전쟁의 결과, 이집트에 지중해 해안 대부분을 상실하고 내륙국으로 전락할 위기에 놓인 셀레우코스 제국

안티오코스 2세가 갑작스럽게 사망한 뒤, 라오디케 1세는 자기 아들 셀레우코스를 '셀레우코스 2세'로 선포하고 소아시아에서 거병했다. 베레니케는 오빠였던 프톨레마이오스 3세[8]에게 구원을 청했고, 프톨레마이오스 3세는 즉시 출진하여 시리아로 행진했다. 그러나 시리아에 도착했을 때, 그는 누이 베레니케와 어린 외조카 안티오코스가 이미 라오디케 1세의 부하들에게 살해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에 격노한 프톨레마이오스 3세는 대대적인 원정을 감행하기로 작정했다.

기원전 246년에서 245년 사이,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해군은 아나톨리아 남서부, 이오니아, 트라키아 해안을 따라 원정하여 여러 해안 도시를 공략하거나 복속시켰다. 에페소스 총독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에게 지지를 표명했다. 또한 육군은 스파르타 출신의 용병대장 크산티포스의 지휘하에 시리아를 돌파하여 메소포타미아로 진격, 셀레우키아를 거쳐 셀레우코스 왕조의 수도 안티오키아까지 함락시켰다. 그들은 여세를 몰아 셀레우코스 2세가 도망친 바빌론을 향해 노도와 같은 기세로 진격했다. 훗날 프톨레마이오스 3세가 그리스어로 쓴 승전비에는 그가 메소포타미아, 바빌로니아, 엘람, 페르시아, 메디아, 그리고 박트리아까지 정복하고 "페르시아인들이 이집트에서 운반해온 모든 신성한 물건들"을 되찾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명백한 과장이지만, 이집트군이 티그리스 강을 건너 바빌론까지 위협한 것은 사실이다.

셀레우코스 왕조는 이제 멸망을 목전에 두는 듯했지만, 마케도니아 왕 안티고노스 2세 고나타스가 이끄는 마케도니아 해군이 안드로스 해전에서 프톨레마이오스 해군을 격파하며 키를라데스 제도를 함락시키고, 상이집트의 테베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프톨레마이오스 3세가 회군하면서 가까스로 멸망을 모면할 수 있었다. 기원전 244년, 셀레우코스 2세는 반격에 나서 안티오키아를 탈환했고 기원전 242년 시리아 북부의 내륙 지대를 탈환했으며, 다마스쿠스 주변 지역을 습격했다. 이에 프톨레마이오스 3세는 휴전을 제의했고, 기원전 241년 양국은 평화 협정을 체결했다.[9]

그러나 기원전 241년, 소아시아의 왕으로 삼아뒀던 안티오코스 히에락스가 반란을 일으켰다. 이보다 앞서, 안티오코스 히에락스는 기원전 246년경 어머니 라오디케 1세의 부추김에 따라 형에게 소아시아의 소유권을 요구했다. 바빌론을 잃을 위기에 몰려 있었던 셀레우코스 2세는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다. 이후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와 평화 협정을 맺은 셀레우코스 2세는 소아시아의 지배권을 되찾으려고 했다. 그러자 안티오코스 히에락스는 기원전 240년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갈라티아켈트족과 동맹을 맺고 앙카라 인근에서 셀레우코스 2세가 파견한 군대를 격파했다. 이후 히에락스는 켈트족을 물리친 후 소아시아의 지배권을 공고히 했다. 결국 셀레우코스 2세는 현실을 인정하여 기원전 236년 히에락스와 화평을 맺고 타우루스 산맥 서쪽의 모든 소아시아 영토를 할양했다.

형제간의 내전이 벌어진 사이, 제국 각지에서 불협화음이 일어났다. 기원전 238년, 파르티아의 사트라프 안드라고라스는 제국으로부터 독립한 뒤 사실상 왕으로 군림하다가 유목민족인 파르니족의 지도자 아르사케스 1세의 공격으로 피살되었다. 기원전 237년, 아르사케스 1세는 헤카톰필로스를 함락하여 새 수도로 삼고, 그 주변의 영토들을 공략했다. 셀레우코스 2세는 파르니족에 대한 원정에 나섰지만 별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셀레우코스 왕조가 이제 동방 영토를 되찾을 힘이 없다는 게 확인되자, 박트리아에 군림하던 디오도토스 2세는 자신을 그리스-박트리아 왕국의 왕으로 선포하고 기원전 235년 셀레우코스 왕조와의 모든 관계를 끊어버렸다.

한편, 소아시아에서는 안티오코스 히에락스의 위세가 나날이 쇠락했다. 페르가몬의 아탈로스 1세는 히에락스를 상대로 번번이 승리를 거두었다. 특히 기원전 228년 결정적인 패배를 당하자 히에락스는 셀레우코스 왕조의 중심지를 차지하길 희망하면서 타우루스 산맥을 넘어갔다. 하지만 셀레우코스 2세는 원정을 마무리하고 돌아와 있었고, 바빌로니아에서 히에락스를 몰아냈다. 히에락스는 소아시아로 도망친 뒤, 다시 트라키아로 도주했다가 기원전 227년 켈트족의 습격으로 살해되었다. 그러나 셀레우코스 2세의 치세도 오래가지 못했다. 기원전 225년 12월 말에서 낙마하여 죽어버린 것이다.

그 후 왕위에 오른 셀레우코스 3세는 소아시아를 잠식하고 있는 페르가몬 왕국의 아탈로스 1세와 맞서고자 소아시아로 원정을 단행하기로 했다. 먼저 삼촌 안드로마코스가 지휘하는 군대를 타우루스 산맥 너머로 보냈지만, 그는 아탈로스 1세에게 패한 뒤 생포된 후 이집트로 보내졌다. 이후 셀레우코스 3세가 친정에 나섰지만, 기원전 223년 4월 또는 6월 켈트족 출신의 아파투리오스와 공모한 장교 니카노르에 의해 암살당했다. 이후 동생 안티오코스 3세가 즉위했지만, 권신 헤르미아스가 정권을 잡자 아카이오스 2세, 몰론, 알렉산드로스가 잇따라 반란을 일으켰다. 이리하여 제국은 건국한지 90년만에 붕괴될 위기에 몰렸다.

2.5. 안티오코스 3세: 최전성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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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레우코스 왕조의 영역(기원전200년경). 그리스아나톨리아로 확장하기 이전, 이때 파르티아가 떨어져 나온 것이 확인된다.

안티오코스 3세는 권신 헤르미아스, 페르시아의 사트라프인 몰론과 알렉산드로스의 반란을 진압하고 동방이 안정되자 아나톨리아의 아카이오스 2세까지 토벌하면서 내전을 종식했다. 이후 제4차 시리아 전쟁에 착수한 그는 지난 전쟁때 상실한 영토를 탈환한 뒤 이집트를 침공했으나, 기원전 217년 라피아 전투에서 큰 실책을 저지르는 바람에 패배했다. 하지만 승리한 프톨레마이오스 측의 피해도 컸으므로 별다른 영토 손실 없이 휴전이 이루어졌다.

전쟁에서 돌아온 뒤, 대대적인 개혁에 착수했다. 문관과 무관으로 나뉘어 있던 관제를 개혁하여 문•무관의 대립을 없앴으며, 알렉산드로스 시대에 추진되었던 그리스와 페르시아의 제도를 혼합하여 제국의 실정에 맞게 만든 개혁을 완수하였다. 이 개혁으로 '스트라테고이'(장군; 페르시아의 사트라프와 유사한 제도)라고 불리우는 지방 총독들이 문•무관을 통합하게 되었다. 그리고 수도 안티오키아만으로는 광활한 제국령을 효과적으로 다스릴 수 없었으므로 리디아의 사르디스와 메소포타미아 셀레우케이아에 각각 행정 관청을 두어 각각 서방/동방을 관장하게 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는 그리스 문화를 동방의 문화보다 중시하였기 때문에 토착 세력의 반발을 야기하기도 했다. 한편 군주 숭배 사상을 확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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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오코스 3세 메가스의 확장(진한 파랑색)

개혁을 마친 안티오코스 3세는 10년에 걸친 대규모 동방 원정을 단행했다. 안티오코스 3세의 아나바시스라고도 하는 이 원정을 통해 아르메니아를 멸망시키고[10] 파르티아와 박트리아의 복종을 받아냈다.[11] 나아가 현재의 아프가니스탄 근방인 파로파미사다이의 인도계 군주와도 외교관계를 정립하고 코끼리도 많이 받은 그는 당당하게 시리아로 개선하였다. 시리아로 돌아온 안티오코스 3세는 프톨레마이오스 4세가 죽은 것을 알고, 기원전 198년 파니온 전투에서 프톨레마이오스 군대에게 대승을 거두어[12] 라피아에서의 패전을 설욕하고 팔레스타인을 차지했다.

안티오코스 3세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를 공격하기 전 마케도니아 왕국필리포스 5세와 동맹을 맺어 두었는데, 마침 필리포스 5세가 키노스케팔라이 전투에서 로마군에게 패배하자 이를 구실로 그리스 본토까지 넘보게 된다. 마침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패한 한니발 바르카가 셀레우코스 왕조에 망명해 왔고, 이에 고무된 안티오코스 3세는 대군을 일으켜 그리스 본토를 침공했다. 하지만 그리스 본토를 공격하러 간 선발대는 테르모퓔라이 전투에서 대패했고, 오히려 로마 측의 역공을 당하게 되었다. 안티오코스 3세가 직접 지휘한 마그네시아 전투에서 70,000명에 달하는 대군이 패배하면서 셀레우코스 왕조는 결정적인 타격을 입었다.

마그네시아의 패전은 파멸적인 결과를 초래했다. 안 그래도 한정되어 있었던 셀레우코스 왕조의 군사적 자산이 완전히 뿌리뽑혔으며,[13] 타우로스 산맥 서쪽 아나톨리아의 모든 영토를 상실했다. 거기다 엄청난 액수의 배상금까지 지불해야 했다. 안티오코스 3세는 배상금을 마련하기 위해 동방 약탈 원정[14]을 떠나다가 기원전 187년에 암살당했다. 형식적으로 복종하던 아르메니아와 파르티아, 박트리아는 셀레우코스 군사력의 몰락을 확인하고 다시 활개치기 시작했다.

2.6. 셀레우코스 4세, 안티오코스 4세: 수습기[편집]


파일:터키 셀레우코스 1.jpg
로마 공화국에게 크게 패배하고 아파메아 평화 협정을 체결한 후 셀레우코스 왕조의 영토

기원전 187년 7월 3일 안티오코스 3세가 암살된 뒤 황위에 오른 셀레우코스 4세는 로마에게 갚을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하기 위해 긴축 정책을 실시해야 했고, 동생 안티오코스 4세를 국내로 돌아오게 하는 대신 아들 데메트리오스(훗날의 데메트리오스 1세)를 로마에 인질로 보냈다. 또한 기원전 185년 아카이아 동맹에 사절을 파견해 부왕의 통치기간 동안 발효된 우호 조약을 갱신하였다. 페르가몬의 에우메네스 2세가 폰토스와 전쟁을 벌이자, 그는 폰토스를 돕기 위해 상당한 동맹을 소집했다. 그러나 로마인들이 타우루스 산맥의 횡단을 적대행위로 해석할 것을 우려하여 군대를 철수시켰다. 하지만 그는 로마를 공개적으로 반대하는 마케도니아 왕국페르세우스와의 동맹 맺기를 주저하지 않았고, 딸 라오디케를 그에게 시집보냈다.

<마카베오기>에 따르면, 셀레우코스 4세는 헬리오도로스를 예루살렘에 세금 징수 임무로 파견했다. 헬리오도로스는 예루살렘 제2신전의 금고를 털려고 했지만, 천사들에게 격퇴되었다고 한다. 이 일화가 사실인지는 알 수 없으나, 당시 로마에 내야 할 배상금을 어떻게든 마련해야 했던 그가 이교 신전을 대거 털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기원전 175년 9월 3일, 셀레우코스 4세는 그의 주요 관료 중 한 명인 헬리오도로스에게 암살당했다. 동기가 무엇인지는 기록되지 않았는데, 권력을 탐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그는 셀레우코스 4세의 막내 아들 안티오코스를 왕으로 추대하고 섭정을 자처했으나 몇달 만에 페르가몬의 지원을 받은 안티오코스 4세에게 처단되었다. 어린 조카 안티오코스는 왕좌에서 밀려나 은신처에 연금되었고, 기원전 170년 또는 169년에 사망했다. 현대 학자들은 안티오코스 4세가 왕권을 다지기 위해 잠재적인 경쟁자인 조카를 살해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안티오코스 4세는 사치스럽고 관대한 통치자로서 명성을 쌓았다. 안티오키아 거리에서 서민들에게 돈을 뿌리고, 면식이 없는 사람들에게 뜻밖의 선물을 주었으며, 아테네의 제우스 신전과 델로스 섬의 제단에 돈을 기부했다. 또한 안티오키아 교외의 다프네에서 최고의 향신료와 천을 사용하여 귀족들과 함께 호화로운 연회를 열었다. 이렇게 해서 귀족과 백성들의 지지를 끌어모으고 명성을 쌓던 중, 프톨레마이오스 6세의 후견인들이 지난날 안티오코스 3세가 정복한 코엘레 시리아, 팔레스타인, 페니키아의 소유권을 돌려달라고 요구했다. 양국은 로마에 사절을 보내 도움을 요청했지만, 로마 원로원은 굳이 개입하고 싶지 않아 어느 쪽도 손을 들어주지 않았다.

기원전 173년, 안티오코스 4세는 로마 공화국이 안티오코스 3세에게 부과한 전쟁 배상금을 전액 지불했으며, 로마와 우호 관계를 다지고자 동맹 협약을 새로 체결했다. 이후 이집트 공략에 착수하기로 결심하고, 기원전 170년 펠루시움 전투에서 이집트군을 격파하고 펠루시움을 점령하였다. 뒤이어 이집트 본토로 진격해 알렉산드리아를 제외한 모든 지방을 공략했고 프톨레마이오스 6세를 체포했다. 하지만 로마 공화국의 개입이 두려워 프톨레마이오스 6세가 멤피스에서 꼭두각시 파라오로서 계속 통치하게 한 뒤 귀환했다. 그가 철군하자 알렉산드리아 시는 새로운 파라오로 프톨레마이오스 6세의 동생 프톨레마이오스 8세를 선출했다. 두 사람은 갈등을 벌였지만, 로마의 중재에 따라 내전을 치르는 대신 이집트를 공동으로 통치하기로 했다.

기원전 169년 겨울, 마케도니아 왕국페르세우스 왕이 안티오코스 4세에게 자신과 연합하여 로마에 맞서 싸우자고 주장했지만 거절했다. 기원전 168년 프톨레마이오스 6세가 로마에 지원을 요청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즉시 함대를 키프로스로 보내 이집트 함대를 격파하고 키프로스를 수중에 넣었다. 이후 육군을 친히 이끌고 이집트로 진격하여 펠루시움을 추가로 공략하고, 하이집트를 점령하며 알렉산드리아 외곽에 진을 쳤다. 이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멸망하고 셀레우코스 왕조가 이집트를 석권하는 듯했다.

그러나 기원전 168년 6월 22일 피드나 전투에서 페르세우스의 마케도니아군을 섬멸하고 안티고노스 왕조 마케도니아 왕국을 멸망시킨 로마가 개입했다. 로마 사절 가이우스 포필리우스 라이나스가 안티오코스 4세에게 이집트와 키프로스에서 즉시 철수하지 않으면 전쟁을 선포하겠다고 경고했다. 안티오코스 4세가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하자, 포필리우스는 지팡이로 왕 주위에 원을 그리고, 안티오코스 4세에게 대답을 하기 전에는 원에서 한 발자국도 나올 수 없다고 했다. 안티오코스 4세는 지난날 로마에 인질로 가 있으면서 로마가 얼마나 강한지 파악했기에, 요구에 응하기로 했다. 대신, 셀레우코스 제국이 남부 시리아를 계속 영유하는 건 인정되었다.

안티오코스 4세는 이집트를 지속적으로 공략하는 동시에 그리스 도시들을 건설하고 육성하여 내실을 다지고자 노력하였다. 시리아 오론테스 강변의 에피파니아 시를 확장하여 수도교, 공의회당, 시장, 그리고 주피터 카피톨리누스 신전을 세웠다. 또한 또 다른 에피파니아 시를 아르메니아에 세웠으며, 페르시아 만에 안티오키아 조폐국을 세워 인도와 메소포타미아 강 하구의 지역 사이의 바닷길을 따라 무역을 담당하도록 했다. 그 외에도 여러 도시가 세워졌는데, 이 도시들은 각자 화폐를 발행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받았다.

한편, 안티오코스 4세는 제국 통합을 이루기 위해 제국의 국교인 그리스 종교를 전 신민이 따르게 하고자 노력했다. 제국 곳곳에 신전을 설치했고, 토착민들에게 기존에 믿던 신 대신 제우스를 섬기라고 권고했다. 이러한 정책은 곳곳에서 파열을 일으켰는데, 특히 유대에서의 반발이 심했다. 당시 유대교는 전통을 지키려는 하시아파와 헬레니즘을 선호하는 개혁파로 분열되어 있었다. 안티오코스 4세는 개혁파를 지원하였고, 이아손을 대제사장으로 선임하여 예루살렘에 체육관을 짓고 젊은이들에게 그리스 문명을 가르치는 걸 허락했다. 기원전 172년, 그는 모종의 이유로 이아손 대신 메넬라오스를 임명했다. 그러나 기원전 169년 안티오코스 4세가 이집트로 쳐들어갔을 때, 이아손이 반란을 일으켜 성채를 제외한 예루살렘 전역을 정복하고 메넬라오스의 많은 추종자를 학살했다.

기원전 167년, 안티오코스 4세는 자신에게 반란을 일으킨 전 유대 대제사장 이아손을 격파하고, 예루살렘의 특권을 박탈한 후 군대를 주둔시켰다. 이후 제우스 신전을 예루살렘에 세우도록 했고, 자신의 모습을 담은 동상을 세우고 그 발 아래에 제사를 지내게 했다. 그러자 유다 마카베오가 이끄는 하시아파가 반란을 일으켰고, 조기 진압에 실패해 마카베오 전쟁으로 커지면서 제국의 국력을 상당히 갉아먹었다. 이 마카베오 전쟁에서 셀레우코스 왕조는 수만 명의 대군을 투입했으나 유대인들의 결사적인 저항에 부딪쳐 계속 고전하는 통에 초강대국으로서의 위신이 크게 실추되었다.

기원전 167년 파르티아 왕 미트리다테스 1세가 헤라트를 점령하여 인도로 가는 길목을 차단하자, 친히 군대를 이끌고 동방으로 출진해 파르티아를 상대로 전쟁을 벌여 상당한 영토를 되찾았고, 아르메니아가 자신의 종주권을 인정하도록 강요했다. 그러나 원정을 지속하던 기원전 164년 11월 또는 12월 페르시아에서 나나야 신전을 약탈하게 한 직후 병사했다.

2.7. 내전기[편집]


안티오코스 4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안티오코스 5세는 당시 8세에 불과해서 시리아에서 마카베오 전쟁을 수행하던 리시아스가 섭정을 맡았다. 안티오코스 4세의 조카이며, 당시 로마에 볼모로 가 있던 데메트리오스 1세원로원에 귀국하게 해달라고 청했지만, 원로원은 장성한 데메트리오스보다는 어린 아이인 안티오코스 5세가 왕위를 물려받는 편이 셀레우코스 제국을 조종하기 쉬울 거라고 판단하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리시아스는 어린 왕과 함께 마카베오 전쟁을 이어가 유다 마카베오의 형제를 죽이는 등 몇 차례 승리를 거뒀으나, 안티오코스 4세의 친구이자 메소포타미아로 원정을 떠나있던 필리포스가 선왕의 붕어 소식을 듣고 귀국 중이라는 소식을 듣고, 이러다가는 권력 기반을 잃을까 두려워해 유다 마카베오와 평화 협정을 체결한 뒤 안티오키아로 돌아갔다. 그곳에 도착했을 때 필리포스가 이미 안티오키아에 도착했지만, 리시아스는 그를 무찌르고 안티오키아를 탈환했다.

얼마 후, 원로원이 셀레우코스 제국이 기원전 188년에 체결한 아파메아 조약에서 규정된 것보다 많은 군함과 코끼리를 보유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사절을 보내 항의했다. 리시아스는 감히 로마에 대적하지 못하여 군함을 침몰시키고 코끼리를 죽이는 걸 허용했다. 하지만 백성들이 이러한 굴욕에 분노했고, 기원전 162년 사절 중 한 사람이었던 그나이우스 옥타비우스가 라오디케아에서 피살되었다. 데메트리오스는 이 틈을 타 원로원에 접근해 자신을 왕으로 밀어주면 로마에 철저히 복종하겠다고 약속했다. 원로원이 이번에도 거절하자, 친구 폴리비오스의 조언에 따라 극비리에 로마를 탈출해 안티오키아로 잠입한 뒤, 귀족들을 포섭하여 기원전 161년 반란을 일으켜 수도를 장악하고, 리시아스와 안티오코스 5세를 처형했다.

데메트리오스 1세는 제국의 국력을 갉아먹고 있는 마카베오 전쟁을 끝내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기로 했다. 바키데스 휘하의 원정대를 파견하여 유대 도시들을 하나둘씩 공략하면서 유다 마카베오를 압박했다. 기원전 160년, 바키데스는 엘라사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고, 마카베오는 전사했다. 이로써 유대의 지배권을 확보한 데메트리오스 1세는 뒤이어 자신에게 반란을 일으킨 메디아의 사트라프 티마르코스를 직접 공격하여 전사시켰다. 티마르코스의 폭정에 시달렸던 바빌론 주민들은 그를 구원자라는 뜻의 '소테르'라고 불렀다. 여기에 카파도키아에서 왕을 칭한 아리아라테스 5세를 폐위시켰다.

그러나 로마 공화국은 셀레우코스 제국이 데메트리오스 1세의 통치하에서 다시 강성해지는 걸 원하지 않았다. 티마르코스의 형제 헤라클레이테스는 원로원에 출두해 자신을 안티오코스 4세의 아들이라고 칭하는 알렉산드로스 1세 발라스를 도와달라고 호소했다. 원로원은 그에게 자신의 왕국의 지배권을 주장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는 <세나투스 콘술툼>(senatus Consultum)을 제공했지만, 그 외에는 어떤 조치도 하지 않았다.

알렉산드로스 일당은 사비로 용병을 고용한 뒤, 페니키아 해안의 프톨레마이스-아케에 상륙했다. 그는 페르가몬의 왕 아탈로스 2세와 카파도키아의 왕 아리아라테스 4세의 지원을 받았다. 하지만 가장 강력한 도움은 이집트의 파라오 프톨레마이오스 6세로부터 왔다. 그는 군사적 지원을 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딸인 클레오파트라 테아를 알렉산드로스 1세 발라스의 반려자로 삼게 했다. 이후 3년간의 내전을 치른 끝에, 기원전 150년 알렉산드로스 1세 발라스가 데메트리오스 1세를 붙잡아 처형하고, 셀레우코스 왕조의 단독 군주가 되었다. 이렇듯 셀레우코스 왕조가 내전을 치르느라 혼란스러운 틈을 타, 파르티아는 미트리다테스 1세의 지휘하에 메디아를 침공하여 기원전 148년경 공략에 성공했으며, 뒤이어 엘리마이스와 페르시스 일대도 평정했다. 또한 기원전 147년경 엘리마이스의 왕 캄나스키레스는 셀레우코스 왕조의 옛 수도인 수사를 점령했다.

기원전 147년, 데메트리오스 1세의 장남이며, 가족이 피살될 때 가까스로 빠져나왔던 데메트리오스 2세가 라스테네스가 이끄는 크레타 용병대와 함께 시리아로 돌아와 여러 영토를 장악했다. 여기에 유다 마카베오의 동생 요나단은 야파와 아슈도드를 공략하였고, 프톨레마이오스 6세는 알렉산드로스 1세 발라스를 지원하겠다는 명분을 내세워 기원전 145년 시리아로 진군해 셀레우키아 피에리아를 포함한 해안가의 모든 셀레우코스 도시들을 장악하였다. 하지만 프톨레마이오스 6세는 곧 편을 바꾸기로 하고, 클레오파트라 테아를 알렉산드로스로부터 떼어낸 뒤 데메트리오스 2세와 재혼시켰고, 북쪽으로 진군하여 안티오키아에 접근했다. 안티오키아 수비대 지휘관 디오도토스 트리폰과 히에락스는 프톨레마이오스군에게 도시를 넘겨주었다. 당시 킬리키아에서 반란군과 맞서고 있던 알렉산드로스는 이 소식을 듣고 급히 안티오키아로 돌아왔지만, 프톨레마이오스 6세와 데메트리오스 2세는 오이노파루스 강 전투에서 그를 격파했다. 알렉산드로스는 아라비아로 도망쳤지만, 곧 암살당했다.

데메트리오스 2세는 크레타 용병대와 이집트의 지원 덕분에 왕위에 오를 수 있었지만, 백성들은 그에게 복종하기 싫어했고, 시리아 남부 대부분을 정복한 프톨레마이오스 6세에게 셀레우코스 제국의 왕위에 올라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프톨레마이오스 6세는 로마가 헬레니즘 국가들이 통합되는 것을 절대로 용인하지 않을 걸 잘 알았기에, 데메트리오스 2세를 섬기라는 말을 남기고 이집트로 돌아갔다. 그러나 곧 문제가 터졌다. 크레타 군인들이 안티오키아 시내를 거리낌없이 약탈하자, 안티오키아인들이 대규모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진압군이 학살을 자행한 후에야 가까스로 질서를 회복할 수 있었다. 살아남은 시민들은 크레타 용병대와 데메트리오스 2세를 증오했다.

한편, 알렉산드로스 1세 발라스를 섬기다가 정권이 바뀐 뒤 축출당한 디오도토스 트리폰 장군은 아라비아로 도망쳤다가, 그곳에서 알렉산드로스의 어린 아들 안티오코스를 확보한 뒤, 그를 '안티오코스 6세'로 선포하고 안티오키아로 쳐들어갔다. 데메트리오스 2세는 이를 막으려 했지만, 병사들이 임금 삭감에 불만을 품고 디오도토스에 귀순하는 바람에 패했고, 아파메아와 안티오키아의 지배권을 빼앗긴 채 그는 셀레우키아 피에리아에 자리를 잡았다. 안티오코스 6세는 기원전 142년 또는 141년에 죽었고, 디오도토스가 스스로 국왕에 등극했다. 양자는 셀레우코스 제국을 양분한 채 대치했고, 유대 왕국을 포섭하여 상대를 압도하려 했다. 그동안 셀레우코스 제국의 속국으로 취급받던 하스몬 왕조 유대 왕국은 이 과정에서 완전한 독립을 얻을 수 있었다.

기원전 139년, 데메트리오스 2세는 동방 영토를 계속 잠식하는 파르티아에 대항하기 위해 출진했다. 처음에는 몇 차례의 소규모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기원전 138년 산맥을 넘던 중 매복에 걸려 패배하고 포로 신세로 전락했다. 이 여파로 셀레우코스 제국의 바빌로니아 일대는 파르티아의 영역으로 들어갔고, 나머지 영토는 디오도토스 트리폰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클레오파트라 테아는 셀레우키아 피에리아에서 농성하면서, 로도스에 있던 남편의 동생 안티오코스 7세에게 결혼을 제의했다. 안티오코스 7세는 즉시 승낙하고 셀레우키아 피에리아에 상륙한 뒤, 디오도토스와 격돌해 기원전 138년 중반 안티오키아를 탈환했다. 디오도토스는 도르로 이동한 뒤 농성전을 벌였으나 함락이 임박하자 해로를 통해 오르토시아로 탈출한 뒤 고향인 아파메아로 피신했으나 그곳에서도 포위되었다. 결국 기원전 138년 말 또는 기원전 137년 초 처형되거나 사로잡히기 전에 자살했다. 이로써 안티오코스 7세는 셀레우코스 제국의 단독 군주로 자리잡았고, 기원전 138년 10월경 클레오파트라 테아와 결혼해 외아들 안티오코스 9세를 낳았다.


2.8. 안티오코스 7세: 재건 시도와 좌절[편집]


안티오코스 7세는 집권 후 내우외환으로 쇠락해진 제국을 되살리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먼저 주변국과의 외교관계를 개선하고자 노력했다. 로마 역사가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에 따르면, 기원전 134년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가 히스파니아의 누만티아를 포위하고 있을 때, 안티오코스 7세가 선물을 보냈다고 한다. 또한 아테네와도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 아테네 시내에 그의 동상이 세워지기도 했다. 한편, 자신이 왕이 되는 데 크게 기여한 도시인 셀레우키아 피에리아를 기원전 138년 또는 137년부터 '거룩하고 불가침한 도시'로 지정하고, 면세 혜택을 부여했다. 또한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한 도시들에게 적절한 보상을 한 반면, 디오도토스 트리폰에게 충성을 바쳤던 도시들에게는 벌금을 매겼다.

<마카베오기>에 따르면, 안티오코스 7세는 집권 전에는 유대에게 달콤한 제안을 하였지만 집권 후에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친구 아테노비오스를 예루살렘으로 보내 다윗 성에 주둔한 셀레우코스 왕조의 수비대를 철수시키는 대신 유대 밖의 모든 유대인 소유의 성읍에 세금을 부과하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은 1,000달란트를 납부하라고 했다. 그러나 시몬이 100달란트만 납부하겠다고 했기에, 아테노비오스는 협상을 중단하고 돌아갔다. 이후 안티오코스 7세의 임명을 받은 에피스트라테고스는 팔레스타인에 주둔한 군대를 지휘하고 시민들을 다스릴 권한을 가졌다. 그는 케돈 시를 요새화하고, 유대와 여러 차례 무력 충돌을 벌였으나 패배했다. 기원전 135년 2월 시몬이 사위 프톨레마이오스에 의해 아들 마타디아, 유다와 함께 피살되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안티오코스 7세에게 자신을 도와달라고 요청했지만, 안티오코스 7세는 응답하지 않았다. 얼마 후 시몬의 셋째 아들인 요한 히르카누스가 프톨레마이오스를 몰아내고 대제사장에 등극했다.

기원전 130년대 중반, 안티오코스 7세는 마카베오 가문의 내분을 이용하기로 마음먹고, 유대로 진격하여 유대인이 사는 시골들을 황폐화시킨 뒤 예루살렘을 포위했다. 그는 성벽 주변에 이중 참호를 파고 도시를 매일 공격했다. 요한 히르카누스는 식량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전투를 치를 수 없는 자들을 도시에서 내쫓았다. 안티오코스 7세도 받아주지 않았기에, 그들은 전선 사이에 갇혀 굶어죽어갔다. 공성전이 1년간 이어지자 수세에 몰린 요한 히르카누스는 사절을 보내 평화를 요청했다. 디오도로스 시켈로스에 따르면, 왕의 고문들은 유대인을 전부 소탕하라고 권고했지만, 왕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유대인들이 모든 무기를 버리며 유대 밖의 도시들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이 세금을 내고, 예루살렘에 수비대를 두는 걸 수용하라고 요구했다. 유대인들이 수비대를 예루살렘에 두는 것에 거부감을 내비치자, 그는 수비대를 두는 걸 포기하고 대신 인질들을 인도받고 500달란트의 은화를 받기로 했다. 플라비우스 요세푸스에 따르면, 요한 히르카누스는 다윗 왕의 능을 도굴하여 확보한 은으로 배상금을 납부했다고 한다. 그 후 유대는 안티오코스 7세 치세 동안 셀레우코스 왕조의 봉신이 되었다.

이렇게 유대를 제압한 뒤, 안티오코스 7세는 파르티아와의 전쟁에 총력을 기울였다. 제국 전역과 유대 및 타국에서 보내온 병력까지 규합하여 수만명의 병력을 편성한 뒤, 기원전 131년 3월 동방으로 출정했다. 이후 파르티아와 3차례 맞붙어 모두 승리했고, 유프라테스 강 일대를 평정한 뒤 바빌론을 탈환했다. 당시 파르티아는 북부 영토를 수시로 습격해오는 유목민족을 막느라 주력군을 그쪽으로 돌렸기 때문에 안티오코스 7세의 공세에 전력으로 대응하기 어려웠다.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가자, 파르티아 군주 프라아테스 2세는 협상을 제의했다. 그러나 안티오코스 7세가 제시한 형 데메트리오스 2세의 무조건 석방, 파르티아가 빼앗아간 제국의 동방 영토 전부 반환, 공물 지급을 받아들일 수 없어서 협상이 결렬되었다. 기원전 130년, 안티오코스 7세는 다시 동쪽으로 진군하여 티그리스 강을 건너 제국의 옛 수도 수사를 탈환하고, 뒤이어 메디아 일대를 평정했다.

프라아테스 2세는 북부 영토를 습격해오는 유목민족과 평화 협약을 체결하고 그들을 용병으로 고용한 뒤, 반격할 기회를 노렸다. 데메트리오스 2세를 석방시켜 안티오코스 7세에 맞서 내전을 벌이도록 유도하는 한편, 적군이 파르티아 심장부에서 겨울 동안 주둔하면서 민중과 갈등을 빛는 걸 지켜봤다. 기원전 129년 2월 또는 3월, 파르티아 주민들이 봉기하여 마을에 주둔한 장병들을 포위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안티코오스 7세는 그들을 구하기 위해 소규모 기병대만 이끌고 달려갔다. 프라아테스 2세는 드디어 고대하던 때가 왔다고 판단하고, 그가 병사들을 구하느라 정신없는 사이에 엑바타나의 좁은 계곡에 군대를 매복시켰다.

얼마 후 병사들을 구출한 뒤 숙영지에 귀환하던 안티오코스 7세는 매복공격을 받았다. 고대 기록에 따르면, 친구들은 일단 후퇴하여 목숨을 보전하자고 권했지만 그는 이를 묵살하고 사력을 다해 싸우다가 전사했다고 한다. 아피아노스와 클라우디우스 아엘리아누스는 격렬하게 싸우다가 사로잡힐 위기에 몰리자 목숨을 끊었다고 기술했다. 이리하여 무너져가던 셀레우코스 제국을 회생시킬 명군이 될 수 있었던 안티오코스 7세는 허망하게 죽었고, 제국은 이후로 다시는 중흥의 기회를 얻지 못하고 끝없는 쇠락의 길을 걸어갔다.


2.9. 끝없는 혼란(데메트리오스 2세 계열과 안티오코스 7세 계열간의 내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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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소포타미아를 상실하고 유프라테스 강을 경계로 시리아 왕국으로 축소된 셀레우코스 왕조

안티오코스 7세가 허망하게 죽은 뒤, 파르티아에서 석방된 데메트리오스 2세가 복위했고, 클레오파트라 테아와 재혼했다. 파르티아 왕 프라아테스 2세는 곧 그를 공격하려 했지만, 동쪽에서 쳐들어온 사카족의 침략에 맞서 싸우다가 전사했다. 그 후 파르티아가 샤카족과 격렬한 전쟁을 벌이느라 다른 데 신경쓰지 못했기 때문에, 셀레우코스 제국은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얼마 후,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에서 클레오파트라 2세와 동생 프톨레마이오스 8세 사이에 내전이 벌어졌다. 데메트리오스 2세는 장모인 클레오파트라 2세를 돕기로 하고, 이집트로 원정을 떠났다. 그는 이집트로 가는 관문인 펠루시움 요새 밖에 진을 쳤지만, 프톨레마이오스 8세의 군대가 굳건히 버텨서 더 이상 진군할 수 없었다.

그러던 중 자신을 안티오코스 7세의 아들로 사칭한 알렉산드로스 2세 자비나스가 프톨레마이오스 8세의 지원을 받아 시리아 북부에 상륙한 뒤, 안티오키아로 접근했다. 당시 안티오키아 시민들은 데메트리오스 2세의 무능한 통치에 질릴대로 질려 있었기에, 어떤 왕이 오더라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안티오키아에 무혈 입성한 뒤, 라오디케아와 타르수스를 자기 편으로 끌여들었다. 데메트리오스 2세는 급히 회군하였고, 양자는 수년간 내전을 벌였다. 기원전 126년 초 다마스쿠스 전투에서 알렉산드로스 2세가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데메트리오스 2세는 프톨레마이스로 달아났지만, 거기에 머물고 있었던 아내 클레오파트라 테아가 성문을 닫아버리는 바람에 들어가지 못했다. 그는 배를 타고 망명하려 했지만, 티레 부근에서 붙잡혀 피살되었다. 알렉산드로스 2세는 데메트리오스 2세가 가지고 있었던 영역을 모조리 점령했고, 기원전 125년 승리를 기념하는 주화를 배포했다.

클레오파트라 테아와 장남 셀레우코스 5세는 이에 맞서 프톨레마이스 일대에서 왕을 자칭했다. 그러나 셀레우코스 5세가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고간 어머니를 원망하자, 클레오파트라 테아는 그를 암살하고 차남 안티오코스 8세를 새 군주로 세웠다. 기원전 124년, 안티오코스 8세와 프톨레마이오스 8세의 딸 트뤼파이나의 결혼이 성립되었다. 이후 프톨레마이오스 8세는 알렉산드로스 2세와의 관계를 단절하고 사위가 된 안티오코스 8세를 지원하고자 이집트군을 파견했다. 알렉산드로스 2세는 이집트군을 상대로 연전연패했고, 기원전 123년 최종적으로 패배해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안티오코스 8세가 클레오파트라 테아의 통제에 따르지 않으려 하면서, 모자 관계는 급속도로 악화되었다. 기원전 121년 아들이 사냥에서 돌아왔을 때, 그녀는 포도주 한 잔을 건넸다. 그러나 안티오코스 8세는 먼저 마셔보라고 강요하였고, 그녀가 저항하자 부하를 시켜 포박한 뒤 포도주를 강제로 먹였다. 결국 그녀는 포도주에 든 독을 먹고 죽었다. 이리하여 안티오코스 8세가 수년간 단독 군주로 군림했다.

기원전 116년, 안티오코스 7세의 외아들 안티오코스 9세가 망명지에서 돌아와 세력을 갖춘 후 이부형을 상대로 내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둘의 내전은 20여년간 이어졌고, 셀레우코스 제국을 두 개로 나뉘었다. 안티오코스 8세의 아내 트뤼파이나는 안티오코스 9세의 아내이며 그녀의 자매인 클레오파트라 4세가 안티오키아 외곽의 다프네 신전에서 붙잡히자 처형시켰다. 이에 격노한 안티오코스 9세는 이듬해에 전투 후 붙잡힌 트뤼파이나를 처형했다. 이렇듯 형제간의 갈등은 깊어졌지만 내전은 쉽사리 끝나지 않았다. 그러던 기원전 96년, 안티오코스 8세의 최고 관료 헤라클리온이 주군을 암살했다. 헤라클리온은 왕을 자칭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베로에아로 도주했다.

안티오코스 9세는 경쟁자인 이부형이 죽은 뒤 셀레우코스 왕조의 단독 군주가 되었으나, 기원전 96년 말 안티오코스 8세의 장남 셀레우코스 6세의 반격으로 전사했다. 셀레우코스 6세는 안티오코스 9세의 아들 안티오코스 10세를 암살하려 했지만 실패했고, 오히려 기원전 94년 안티오코스 10세의 공세를 막아내지 못한 채 몹수에스티아로 피신했으나, 그곳에서 주민들에게 다시 세금을 부과하려 했다가 폭동에 휘말려 비참하게 사망했다. 안티오코스 10세는 자리를 잡은 뒤 계모였던 클레오파트라 셀레네와 결혼했다.

기원전 93년 초, 셀레우코스 6세의 동생들인 안티오코스 11세필리포스 1세가 몹수에스티아를 약탈해 형 셀레우코스 6세의 복수를 단행했다. 이후 안티오코스 11세는 안티오키아로 진격해 안티오코스 10세를 몰아내고 몇달 동안 수도에서 통치했다. 안티오코스 10세는 병력을 재정비한 뒤 반격을 가했고, 기원전 93년 말 안티오코스 11세를 축출했다. 그는 셀레우코스 6세를 죽이는데 큰 역할을 하고 이로 인해 약탈을 당했던 몹수에스티아에게 보상하고자 자치권을 부여했다.

하지만 내전은 여전히 끝나지 않았다. 다마스쿠스에 할거하는 데메트리오스 3세는 형들을 죽인 안티오코스 10세에게 복수하려 들었다. 안티오코스 10세는 그와 몇년간 전쟁을 벌였지만 승패를 가리지 못했다. 그러던 기원전 92년 또는 기원전 88년, 안티오코스 10세는 길르앗의 여왕 라오디케가 파르티아와 싸우는 걸 도우러 갔다가 전사했다. 이후 데메트리오스 3세가 안티오키아를 점거한 뒤, 과거에 안티오코스 10세를 상대로 힘을 합쳐 대항했던 형 필리포스 1세와 내전을 벌였다. 기원전 87년, 필리포스 1세는 베로에아에서 데메트리오스 3세의 보병대 10,000명과 기병대 1,000명에게 포위당했다. 이에 파르티아에 구원을 요청했고, 파르티아 총독 미트리다테스 시나체스가 출진해 데메트리오스 3세의 진영을 포위했다. 물을 구할 길이 없어 수많은 병사가 갈증으로 고통받자, 그는 전의를 상실하고 항복한 뒤 파르티아로 끌려갔다.

필리포스 1세는 데메트리오스 3세가 파르티아로 끌려가면서 주인을 잃은 안티오키아를 점거했지만, 그의 지배권은 시리아 북부에 한정되었고, 시리아 남부는 다마스쿠스에서 할거한 막내동생 안티오코스 12세에게 넘어갔다. 그러던 기원전 83년, 필리포스 1세는 안티오코스 12세가 나바테아를 상대로 원정을 떠난 틈을 타 다마스쿠스로 쳐들어갔다. 그를 위해 성문을 연 도시 총독 밀레시우스는 새 주인으로부터 적절한 보상을 받지 못하자 반기를 들어 필리포스 1세를 다마스쿠스에서 몰아냈다. 이후 필리포스 1세는 역사 기록에서 사라졌는데, 그의 비문이 킬리키아의 올바 시에서 발견된 것을 볼 때 안티오키아로 영영 돌아가지 못하고 올바로 망명했던 것으로 보인다.


2.10. 최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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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89년경 셀레우코스 왕조 (청록색).[15] 위의 지도와 비교해보자. 약 150년 만에 영토가 20분의 1 이하로 줄어든 셈이다.

안티오코스 7세의 전사 이후 셀레우코스 왕조는 안티오키아와 그 근처의 시리아 지역만 간신히 유지하고 있었고, 왕실의 내전은 계속해서 일어나는 막장 상황이었다. 하지만 셀레우코스 왕조는 이 상태에서도 장장 수십 년 동안 생명 연장의 꿈을 이룰 수 있었으니, 다름이 아니라 주변의 거대 세력들이 이를 완충 지대로 삼았기 때문이다. 파르티아는 동쪽에서 쳐들어온 유목민들과 싸우는 한편 넓어진 제국의 세력을 굳히느라 여념이 없었고, 로마는 한창 폰토스와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땅과 돈만 많았다뿐이지 사실상 로마의 보호국 상태인 데다, 내부의 권력 투쟁은 셀레우코스 왕조에 비해 나을 것이 전혀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도 프톨레마이오스 6세의 중흥 이후 상황이 더 나았던 이집트는 종종 셀레우코스 내전에 개입해 참칭자를 왕으로 세우고, 다시 적통인 군주를 지원해 갈아치우는 형식을 반복하며 그렇지 않아도 쇠퇴해가는 경쟁국을 더욱 약화시켰다.

그렇게 근근히 버티던 셀레우코스 제국이었으나, 기원전 82년 안티오코스 12세나바테아와의 전쟁 도중 전사하면서 파국에 이르렀다. 아르메니아티그라네스 2세는 이 틈을 타 제국의 중심지인 안티오키아를 포함한 시리아 북부를 석권하였고, 다마스쿠스 역시 나바테아에 복종했다. 클레오파트라 셀레네가 아들 안티오코스 13세와 공동 왕으로 즉위했지만, 그들의 영향력은 시리아의 몇몇 해안 도시에 그쳤다. 안티오코스 13세는 기원전 75년 로마를 방문하여 자신을 셀레우코스의 왕으로 인정하고 원군을 보내달라고 요청했지만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했다.

기원전 72년 티그라네스 2세가 다마스쿠스를 정복하면서, 양분되었던 시리아가 아르메니아의 영역에 귀속되었다. 이후 기원전 69년, 티그라네스 2세는 프톨레마이스를 공략하고 그곳에 있었던 클레오파트라 셀레네를 붙잡아 처형했다. 하지만 루쿨루스의 로마군이 아르메니아를 공격하기 시작했기에 급히 돌아가야 했고, 안티오키아 시민들은 이 틈을 타 안티오코스 7세 계열의 안티오코스 13세를 옹립했다. 그러나 기원전 65년 필리포스 1세의 아들로, 데메트리오스 2세 계열이었던 필리포스 2세 필로로마이오스가 아랍 부족들의 도움을 받아 왕을 칭하면서, 내전이 또 발발했다.

기원전 64년, 폼페이우스미트리다테스 6세와의 전쟁을 종식하고 시리아에 당도했다. 안티오코스 13세와 필리포스 2세 모두 폼페이우스에게 접근해 자신을 왕으로 인정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폼페이우스는 내전이 끊임없이 지속되는 셀레우코스 왕조에게 시리아를 맡기면 위험하겠다고 판단하고 두 왕 모두 폐위한 후 시리아를 로마 공화국의 속주로 삼았다. 안티오코스 13세는 폼페이우스의 사주를 받은 것으로 추정된 시리아 부족장에게 암살되었고, 필리포스 2세는 이집트로 망명했다가 기원전 56년 이집트 여왕 베레니케 4세와 결혼하여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왕이 되려고 했지만 시리아 총독 아울루스 가비니우스의 강력한 반대로 무산된 뒤 곧 피살되었다. 이리하여 셀레우코스 왕조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3. 정치[편집]


국왕은 스스로 페르시아의 왕중왕(샤한샤) · 그리스의 대왕(메가스) · 신왕을 칭하여 자신이 페르시아인과 그리스인의 군주이며 신성한 존재임을 선언하고 왕권을 강화했다. 그리고 국왕은 자유와 민권의 수호자를 자처했지만, 셀레우코스 제국의 군주에게 이 칭호는 형식적인 것에 불과했다.

제국의 군주들은 자문 위원회를 구성하고 측근과 관료, 장군들과 함께 국가를 통치했다. 그리고 법적 분쟁 해결과 왕령지 관리, 화폐 발행과 같은 업무를 수행하고 지역 공동체와 도시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으며 민심을 얻기 위한 목적으로 일부 지역의 세금을 면제해주거나 감세하는 조치를 취했다. 토착신과 그리스 신들에 대해 경배하고 제례에 필요한 제물을 제공했으며 그리스 종교와 토착 종교를 따지지 않고 각지의 신전과 종교 단체를 후원했다.[16] 군주들은 제국에 헬레니즘 문화와 철학, 종교를 전파했으며 페르시아어를 익히고 토착 문화를 관대하게 수용해서 동 · 서양의 문화적 교류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후대로 갈수록 이들은 이러한 의무를 등한시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 시절의 그리스-마케도니아인들이 바르바로이에 대한 거부감만큼이나 오리엔트식 전제 왕권에 대한 거부감도 강했던 반면, 셀레우코스 제국 시대의 그리스-마케도니아인들은 세습적인 전제 왕권이라는 개념을 무리 없이 받아들였다.[17] 왕위를 노리고 반란을 일으킨 장군이 군사들에게 "왕을 치러 간다"는 사실을 숨겼다가, 군사들이 사실을 알게 되자 단체로 항명해버려서 반란이 실패한 경우도 있었다. 또한 왕들은 아무 거리낌없이 자신을 신, 구원자, 혹은 특정 신의 현신이라고 주장했는데,[18] 이러한 군주 숭배 사상은 안티오코스 2세 때 기반이 닦이고 안티오코스 3세 메가스 때 확립된다.[19]

그러나 이러한 왕권 강화 정책에도 불구하고 셀레우코스 제국의 군주들 중에는 암살당하거나 군사 반란에 휘말려 목숨을 잃은 이들이 상당히 많았으며 제국은 왕위 승계가 벌어질 때마다 왕위를 놓고 내전이 벌어져 국력이 약화되었다. 안티오코스 4세의 치세까지는 그런데로 내전의 상처를 잘 이겨내고 패권을 유지했지만, 안티오코스 4세가 급사한 뒤부터 벌어진 내전과 이 틈을 노린 외세의 침공에는 견디지 못하고 쇠퇴하고 만다.

그리스 본토는 정치 상황이 혼란스럽고 임금이 크게 하락하는 등, 일반 민중들에게는 영 좋지 않은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상당수의 그리스-마케도니아인들이 고향을 떠나 의지할 곳 없는 아시아로 인생역전을 노리며 몰려들었다. 가진 것 없는 그들이 성공할 수 있는 가장 빠르고 확실한 방법은 제국 전체의 통치권과 군대를 가진 군주의 호의를 입는 것이었다. 어떤 식으로든 왕의 눈에 든 이는 왕의 "친구", 즉 "필로이"가 되었으며, 이런 '친구'들은 왕의 개인적인 측근인 동시에 왕국의 지배 계층이었다.[20]

왕의 친구들은 필요에 따라 중앙 정부와 지방의 행정 및 군사 업무를 수행하고 군주에게 여러 가지 조언과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필로이' 중에서 일부는 출신 도시와 유력 가문들과의 연줄을 가지고 있어서 군주는 이들을 통해 지방 도시들과의 관계를 유지하고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었다. 이처럼 '왕의 친구들'은 군주에게 매우 유용한 존재였지만, 왕위 계승시에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선왕의 필로이들과 측근들을 총독과 주요 관직에 임명해 통치권을 확립하려는 현왕, 이런 현왕의 정책을 부추기고 출세하려는 필로이들간의 이해가 충돌해서 음모와 반란이 일어나고[21] 자기들끼리 지연 · 혈연으로 나뉘어 파벌 다툼을 벌이거나, 충언을 빙자해서 자신과 자기 지역에 이익이 되는 일을 제안하거나, 그리스인 왕비와 페르시아인 후궁의 자식들을 놓고 후계자 분쟁을 벌이는 등, 부정적인 측면도 있었다.[22]

독일의 역사학자 테오도르 몸젠이 쓴 《로마사》 4권에 의하면, 셀레우코스 왕국은 한 마디로 말해 중세 유럽의 신성 로마 제국과 비슷했다고 한다. 즉, 겉으로 보면 거대한 영토를 지배하는 강력한 제국인 듯하지만, 사실 내부 사정을 놓고 보면, 수많은 도시 국가나 영방 국가들로 분열되어 그 응집력과 단결력이 허약한 나라라는 것이다. 셀레우코스 왕국은 겉으로는 헬레스폰토스 해협에서 인도까지 지배하는 '왕중왕'이라고 과시했지만, 사실 그 내구력은 형편없었다는 것이 몸젠의 해석이다. 그렇기에 단단한 응집력으로 무장한 로마가 부각되자, 셀레우코스 왕국은 그 흐름을 막지 못하고 무너져 내렸다고 한다. 실제로 거대한 영토를 지닌 셀레우코스 왕조가 마그네시아 전투 한 번의 패전으로 계속 쇠퇴일로를 걷다가 힘없이 무너진 것에 반해, 로마는 칸나이 전투아라우시오 전투 등 수많은 패전을 겪었어도 무너지지 않고 오히려 패전을 곧바로 만회하여 셀레우코스 왕조보다 훨씬 오랫동안 강건히 존속한 사실을 보면 상당히 설득력이 있는 견해다.

그러나 상술된 견해는 100년 전의 몸젠이 피력한 것으로서 셀레우코스 제국에 대한 연구와 조사가 많이 이뤄진 현재에 와서는 설득력을 상당히 많이 잃어버린 학설이다. 셀레우코스 제국은 마그네시아 전투 이후에도 중동에서 계속 패권을 유지했으며 파르티아나 박트리아, 아르메니아 등의 국가들은 셀레우코스 제국이 내전에 돌입하기 전까지는 제국의 패권에 도전하지 못했다. 안티오코스 3세 사후에 즉위한 셀레우코스 4세와 안티오코스 4세의 노력으로 제국은 다시 중흥을 맞이했으며 안티오코스 4세의 정책과 여러 분야에 걸친 개혁은 마카베오 반란이 일어난 팔레스티나 지방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성공적이었다. 제국이 정말 쇠퇴하게 된 것은 안티오코스 4세가 전염병으로 급사하면서 일어난 내전이 끝도 없이 일어나 국력을 박살낸 것 때문이었으며 마지막으로 안티오코스 7세의 파르티아 격퇴와 중흥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면서 제국은 마지막 희망을 잃고 몰락했다.

4. 지방 행정 / 법 제도[편집]


라이벌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와 마찬가지로, 셀레우코스 왕조 역시 소수의 그리스-마케도니아 엘리트를 중심으로 제국을 운영했다. 이 그리스-마케도니아인들은 헬레니즘 문화에 대한 자부심과 바르바로이와 외래 문화에 대한 거부감이 대단했으며, 토착 피지배층과 공감할 만한 요소가 거의 없어서 항상 긴장 관계를 유지했다. 하지만 제국의 영토는 엄청나게 넓고 그리스-마케도니아인들은 소수였기 때문에, 셀레우코스 왕조는 원활한 통치를 위해 토착 엘리트들을 통치의 하부 구조로 적극 끌어들여야만 했다. 그 결과 그리스-마케도니아 엘리트들의 직접적인 통제력은 헬레니즘 문화 시설과 수비대가 있는 도시 지역에 한정되었고, 그 외의 지역은 마을 촌장이나 부족장, 지방 귀족들을 통해 간접 지배했다. 심지어 토착 세력이 강한 곳, 예컨대 파르스 등지에서는 아예 속국과 비슷한 왕조 체제가 자리잡기도 했다.[23]

알렉산드로스의 정복 이후에도 페르시아 제국의 행정망과 정부 조직이 계속 유지되었고 페르시아인 관료들 뿐만 아니라 많은 수의 페르시아인 지방관, 부족장, 왕족들도 충성과 봉사를 대가로 그 지위를 계속 유지했다. 알렉산드로스의 유산을 물려받은 셀레우코스 제국은 대제의 정책을 그대로 실시해 페르시아 제국의 제도를 기초로 하고 그 위에 그리스의 제도를 이식해서 행정 체제를 세웠다. 그래서 행정면에서는 아케메네스 왕조 시절의 조세 및 지방 행정 제도를 많이 답습한 편이었다.그리고 제국 정부는 국토를 페르시아의 거대한 지방 행정 단위인 '사트라피'로 분할하고 각 지방에 사트라프를 파견했다. 사트라프는 속주를 관할하는 총독으로서 징세권과 군사권을 행사하고 평소에는 행정 처리·병력 양성·평화 유지 업무를 수행했으며 휘하의 군관과 행정관, 재무관과 법관들이 사트라프를 보좌했다.

거대한 제국을 안티오키아 한 곳에서 통제하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일뿐더러 매우 비효율적이었다. 그래서 제국은 서방에는 사르디스, 동방에는 셀레우키아를 중심지로 삼아 각각 동·서방의 영토를 관할하고 행정력을 보조했다. 특히 셀레우키아는 동방의 각 지역과 대도시들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일을 담당했기 때문에 그 중요성이 매우 높았다. 동방에는 엑바타나, 헤카톰필로스, 라가이와 같은 대도시에 왕실 조폐소와 궁전을 건설하고 주요 거점으로 삼았다. 그리고 셀레우코스 제국은 알렉산드로스의 정책을 계승해서 아나톨리아 반도와 메소포타미아, 동방 지역에 '안티오키아'와 '셀레우키아', '아파메아'들을 건설하고 곳곳에 군사 식민지를 조성했다. 이러한 신도시 건설을 통해 제국 정부는 헬레니즘 문화를 전파하고 통치력을 강화했으며 경제적으로는 지역을 개발하고 상공업을 진흥시켰다. 다만, 이러한 조치를 취했음에도 불구하고 제국의 통치력은 상술했듯이 시리아와 메소포타미아, 군사 요충지와 대도시, 주요 육상 교통로가 있는 지역에서만 강할 뿐이었다.

사트라프가 총괄하는 '사트라피' 지방에는 하위 행정 단위로 히파르코스(Υπάρχος)가 담당하는 '히파르키아'(Υπαρχία), 에파르코스(Έπαρχος)가 담당하는 '에파르키아'(ἐπαρχία)를 설치해서 지역을 관리했으며 도시보다 규모가 작은 향촌 지역은 행정력이 약했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자치권을 주고 세금 할당량을 부과하는 등, 간접적으로 지배했다. 향촌 지역은 촌장(Komarchos, 코마르코스)과 유력자들이 다스렸고, 주민들이 마을 집회와 읍 집회 같은 민회를 결성해서 현안들을 처리하고 결의문을 작성하기도 했다. 추가적으로 군관인 천부장이 세금을 걷은 사례가 있기에 천부장들이 지역을 관리하는 일도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민족 공동체(πολίτευμα)는 부족장(Etnarchos, 에트나르코스)이나 귀족들이 통치하거나 공동체에서 결성한 위원회가 관리했다.

추가적으로 이란 고원이나 다른 동방 지역에 관한 사료는 없어서 연구가 어려우며, 사료가 남아 있는 서방 지역에서도 지역마다 체제나 제도를 달리 적용했기 때문에 섣불리 셀레우코스 제국의 체제를 짐작하기는 어렵다.

셀레우코스 제국의 법 제도는 그리스 법과 페르시아 법을 함께 쓰는 이중 체제였다. 그리스인들에게는 그리스 법을 적용하고 그리스인 법관이 사건을 심리하게 했으며, 반대로 페르시아인들과 다른 동방인들에게는 지역 관습법과 페르시아 법을 적용하고 모든 법적 분쟁과 사건은 지역 위원회에서 처리하게 했다. 대체로 지방과 향촌 지역은 페르시아인들이 많았기 때문에 아케메네스 왕조 시절의 법이 그대로 작동했으며 도시 지역은 그리스인들이 많았기 때문에 그리스 법을 많이 적용한 것으로 보인다. 페르시아인과 그리스인 사이에서 발생한 분쟁은 그리스 민법을 적용하고 그리스인 법관이 심리하게 해서 민족 간의 갈등이 벌어지면 그리스인이 좀 더 유리한 구조였다. 그리고 헬레니즘화가 이뤄짐에 따라 그리스의 영향을 받은 일부 페르시아인들이 자신들끼리의 계약이나 법적 분쟁을 그리스의 법으로 처리하는 일도 생겨났다.

4.1. 헬레니즘 시대의 도시[편집]


셀레우코스 제국의 도시들은 '폴리스' 지위를 받은 주요 대도시와 헬레니즘 제국들이 새로이 건설한 그리스계 신도시, 고대부터 존속한 토착 도시와 동맹 도시로 분류할 수 있다. 기본적으로 제국의 모든 도시는 어느 정도의 자치권과 토지,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다.[24] 그리스 도시들은 민주적으로 행정관과 민회를 구성해서 도시의 현안을 처리했으며 민회는 인구 부족에 고심하는 국왕을 위해서 자발적으로 신도시에 이주민을 보내주거나 소아시아와 페르시아의 그리스 도시들이 아르테미스 여신을 위한 기념 제전에 참여하는 등, 이 시기에도 매우 능동적이고 잘 운영되었다. 그리고 국왕은 도시와 이주민들이 필요로 하는 토지와 노예를 하사해 세금을 걷고 군대를 유지했으며 이를 이용해서 경제 활동을 촉진하고 더 많은 세수를 얻으려 했다.[25] 이러한 토지 하사는 정치 · 군사적 목적보다는 경제적인 목적이 더 크게 작용했다.

폴리스 지위를 얻은 대도시들은 정치적인 위상이 높았고 폭넓은 자치권을 누렸다. 경제적으로는 인구가 많고 상공업이 크게 발달해서 지역 경제의 중심지로 기능했으며 당시에는 자유와 독립의 상징으로 간주한 화폐 발행권을 가지고 있었다. 폴리스에는 상당한 숫자의 그리스-마케도니아인들이 거주했지만, 토착민 인구도 많은 편이어서 제국 정부는 대도시에 거주하는 페르시아인들에게 다른 민족들보다 더 높은 지위와 정치 조직을 구성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해서 협조를 구했다. 그리고 폴리스들은 국왕으로부터 면세나 감세 혜택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도시들에게 폴리스는 선망의 대상이었고, 많은 수의 도시들이 자기 도시의 명예를 드높이고 경제적 혜택 부여와 정치적 위상 강화를 위해 폴리스로의 승격을 소망했다. 추가로, 동맹 도시들도 국왕으로부터 화폐 발행권과 상당한 수준의 자치권을 부여받았다.

지방 행정 문단에서 상술했듯이 그리스계 신도시들은 알렉산드로스 대제가 세운 '알렉산드리아'들과 셀레우코스 제국의 군주들이 세운 '안티오키아'와 '셀레우키아', '아파메아'와 같은 도시들 및 군인과 퇴역병의 정착지가 발전한 것들이었다.[26] 안티오키아와 셀레우키아들은 아나톨리아 반도와 코엘레 시리아, 메소포타미아에 집중되어 있었으며 페르시아와 중앙아시아에도 일부 건설되었다. 그리고 제국 정부가 페르시아 서부와 중부에 세운 신도시들은 헬레니즘 문화와 시민권 제도, 그리스 법 제도와 종교에 기초한 체제를 이루었고 제국 동방 지역의 경제 · 문화 중심지로 기능했다. 이러한 신도시의 시민들은 사회적 권리를 부여받고 각종 편의 시설을 이용할 수 있었다. 제국 정부는 신도시들을 발전시켜서 통치력을 강화하고 경제 성장을 도모하려 했다. 이를 위해서 그리스로부터 이주민들을 끌어들이고 군인과 퇴역병들을 정착시켰으며 지원금과 토지, 노예를 지급했다. 이러한 정책은 성공적이었으나, 통치력 측면에서는 한계가 있었다.

제국 정부는 비그리스계 토착 도시들에게 어느 정도의 자치권을 허용하고 전통과 문화를 유지할 수 있게 허용했다. 토착 도시들은 관습법과 페르시아 법을 집행하고 계약을 체결했으며 토착 종교 시설의 재건과 확장, 자체적인 토지 소유도 가능했다. 그리고 제국 정부의 헬레니즘화 정책으로 인해 토착 도시에도 그리스인 공동체가 생겨나고 그리스풍의 체육관, 극장, 신전, 학교들이 건설되는 등, 그리스와 동방의 공존이 이뤄졌다.[27]

셀레우코스 제국의 도시와 도시 정책에는 문제점도 있었다. 국왕이 도시에 부여한 자치권은 제한적이었고, 폴리스가 아닌 도시는 그리스인이나 토착민 총독의 감시를 받았다. 그리스계 도시의 민회는 페리클레스 시대의 위상을 잃어버려서 군주의 개입에 무력하고 총독의 감시를 받아야 했다. 그리고 제국 정부는 토착 도시들을 차별해서 이들이 제국에 헌신한 것에 대해서 정치적 · 경제적인 보답을 해준다거나 그리스 도시만큼의 정치적 위상을 부여해주지는 않았다. 이러한 차별은 제국에 협력한 토착민 상류층들이 박탈감을 느끼게 만들고 토착민들의 불만을 키우는 등, 장기적으로 제국에게 불안 요소가 되었다.


5. 세금 제도[편집]


현대 정치학 이론상 셀레우코스 제국은 바실레프스(왕)를 제외한 신민의 사유재산을 인정하지 않는 형태의, 절대신의 대리자 통치 하의 전제군주정 국가다. 따라서 최정점의 바실레프스의 영향력이 미치는 곳의 모든 토지는 이론상 왕의 토지였고, 이는 곧 신민이 직접 세금을 내야 함을 뜻했다. 당연한 말인데, 이는 왕의 대리자인 지방지사(사트라프)가 토지의 크기에 따라 신민에게서 세금을 징수해 수도로 보냄을 의미했다. 즉, 셀레우코스 제국의 왕의 명령이 미치는 모든 땅은 왕실 토지로 간주됐고, 이에 의거해 국가는 신민에게 직접 세금을 징세했다.

셀레우코스 1세 니카토르와 그 후계자들은 광대한 영토를 차지했지만, 그 땅을 관리하는 방법은 알지 못했다고 오해 받는다. 그러나 셀레우코스 제국의 바실레프스들은 새로운 방법의 징세, 행정 기술을 만들어내지 못했더라도, 결단코 무능하지 않았다. 그들은 페르시아 제국의 세금 제도와 재정 운용 방식을 계승해, 이를 영리하게 활용했다.

화폐 발행과 활용은 셀레우코스 제국의 통치자들에게 중요한 세금 제도이자, 정치 선전 수단으로 활용됐다. 셀레우코스 군주들은 새로운 땅에 자신들이 개발한 세금 제도, 행정 제도, 법 제도 대신 페르시아의 것을 활용했고, 그들이 선호한 방식은 다리우스 1세의 세금 개혁에 기반한 은본위 세금 징세였다. 따라서 셀레우코스 제국 아래에서 지중해 세계는 화폐 경제가 발전하고, 이를 기반으로 현물 대신 화폐 징세가 보편화됐다.

셀레우코스 제국은 어느 정도의 변화도 일으켰다. 통치의 기반인 군사력과 관료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양의 현금(특히 은)이 필요했기 때문에, 제국 정부는 이전에는 현물로 걷던 조세를 현금으로 납부하도록 규정하고 신민들에게 화폐 단위로 직접세를 징수했다.[28] 여러 가지 부가세를 제정하고 통제 경제 체제를 구축해서 국가 경제를 강하게 통제했다.

제국 정부의 주요 세입은 은광을 비롯한 광산들이 많았던 소아시아, 시리아와 팔레스티나, 동방에 위치한 그리스 도시들, 토지가 비옥하고 수확량이 풍족한 메소포타미아에서 징수하는 세금이었다. 그리고 제국 정부는 샤트라피와 관료에게 지급하는 급료, 자문회 유지 비용, 신전과 도시에게 주는 기부금, 도시 건설과 이주민 지원 등, 다양한 분야에서 재정을 지출했으나 전체 지출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군비였다. 제국은 평소에도 전체 재정의 50% 이상을 군비로 지출하고 전시에는 그보다 훨씬 더 많은 비용을 소모했다. 추측컨대, 디아도코이들 사이에서 전쟁이 잦았던 만큼, 군비로 인한 재정 지출이 엄청났을 것으로 보인다.

각 지방에 파견된 샤트라프는 군주에게 공물과 세금 징수 현황을 보고하고 징수한 현물과 화폐를 저장했으며 샤트라프 휘하의 재무 관료들은 속주의 재정과 각 지방에 산재한 왕령지 관리를 담당했다. 그리고 제국은 관료와 군인들에게 화폐나 토지에 대한 수조권을 지급했다. 이러한 샤트라피 재정 제도와 급료 · 수조권 지급 제도는 비록 완전한 수준은 아니지만, 제국이 페르시아의 제도를 어느 정도 계승한 것이었다.

정부와는 별도로 재정을 꾸려나갔던 왕실은 왕령지의 농장과 삼림, 광산에서 보내오는 연공과 물자로 수입을 올렸다. 그리고 왕실은 배상금 청구와 전리품 확보, 왕령지 매매, 특별세 징수, 도시에 특허장을 부여하고 돈을 받는 등의 방식을 통해 재원을 마련할 수 있었으나, 왕실의 수입은 연공이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고 있어서 이러한 방식으로 얻는 돈은 임시 수입에 지나지 않았다.

셀레우코스 제국에서 가장 중요한 세금은 토지세였다. 제국 정부는 모든 토지의 농업 · 목축 생산력을 평가해 할당량을 정하고 왕령지와 신전, 도시와 마을, 지역 공동체와 민족 공동체 단위로 세금을 부과했다. 제국은 영토가 넓어서 각 지역별로 수확량과 생산품의 가치가 달랐기 때문에 관료들은 이러한 차이를 고려해서 세금을 할당하고 징수는 지방 관료들에게 맡겼다. 그러나 특정 지역에 편중적으로 세금을 징수하거나, 면세혜택을 일방적으로 내린 흔적은 없다.

토지 외에도 세금을 거뒀다. 제국은 가축 보유량에 맞춰서 유목민과 가축을 가진 인민들에게 목축세를 징수하고 왕령지에 소속된 목초지를 이용하는 사람들에게도 이용료를 걷었다. 일정 연령이 된 남성에게는 인두세를 부과하고 기술자 계급에 대해서는 공방의 기술자 숫자에 맞춰 인두세를 걷었다. 그리고 포로와 노예 노동을 쓰긴 했지만, 자유민들에게 부역을 부과해서 운하와 수로를 수리하고 도로망을 보수하는 등의 공공 사업도 진행했다.

제국 정부는 상공업에 대해서는 매우 다양한 종류의 세금을 징수했다. 각 지방과 하천을 통과하는 상품, 항구에 입항한 선박, 도시에 들어오는 상품에 통과세와 관세를 징수하고 소금과 목재, 금속, 사치품 등의 재화에 간접세를 매겼다. 그리고 도시에서 상품을 매매할 때는 상품세, 각종 상거래와 노예 등록, 부동산 거래를 할 때는 상업세를 징수했다.[29] 그밖에도 신자들과 부유층들로부터 막대한 기부금을 받는 신전들에는 신전세, 군주가 도시를 방문하면 그 도시의 인민과 지배층, 통치자에게서 접대세를 징수해서 체재 비용을 충당했다.

관료 숫자가 부족하고 관료제가 미성숙해서 확실하게 전체 지역을 통제할 수는 없었지만, 제국의 인구는 1천만 ~ 3천만 명에 육박했기 때문에 적당히 걷어도 상당한 세수를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광대한 제국의 수많은 지방에서, 각기 다른 제도를, 다양한 방식으로 적용했기 때문에 세금은 극도로 종류가 다양하고 복잡했다. 그래서 세금 제도의 운영과 관리는 정부에게 비정상적으로 큰 부담으로 다가왔고, 군주들은 관리를 포기하고 적당히 징수하거나 정치적, 또는 경제적인 이유로 정기적인 감세와 면세 조치를 취해서 스스로 부담을 '줄였다.'[30] 그리고 군주들이 조세 금납화를 밀어붙이긴 했지마는 도시의 영향권 밖에 위치한 향촌 지역들은 물물교환과 현물세 납부가 일반적이었다.


6. 경제[편집]


알렉산드로스 대제가 인도까지 이르는 새로운 교역로를 개척한 덕분에 헬레니즘 시대에는 인더스강에서 나일강까지 이르는 광대한 교역권이 형성되고 페르시아 제국이 저장해두던 막대한 귀금속이 시장에 풀려서 물가가 상승하고 투자와 투기 행위가 늘어났다. 그리고 화폐 경제가 중동 전체에서 일반화되고 공공 은행들이 당대의 대표적인 신용 기관으로 자리 잡았다. 또한 투기 · 매점매석 · 과열 경쟁 · 대기업 경영 · 보험과 광고의 성장과 같은 새로운 산업과 다양한 상업 활동들이 성행했다.

제국 정부는 세수를 늘리기 위해 상공업을 장려하고 상공업자들에게 편의 시설을 제공했다. 항만 시설을 개수하고 해상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전함을 파견했으며, 도로를 개설하고 운하를 건설했다. 그리고 제국 정부는 마을과 도시에 국영 공장과 점포를 세워서 재정 수익을 늘렸다. 결과적으로 대규모 생산·교역·재정 체계가 성장하고 국가가 경제계의 큰 손으로 등장했다. 그리고 이러한 헬레니즘 시대의 번영에는 대도시의 성장이 영향을 미쳤다. 도시화가 촉진되면서 상공업이 성장하고 정부 기능이 확대되었으며 자영농들이 소작농이나 예속농으로 전락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도시로 이주했기 때문이었다.[31]

상술했듯이 헬레니즘 시대는 번영했으나, 번영은 주로 지배자, 상층 계급, 상인들에만 누렸을 뿐, 농민과 도시 노동자들에게까지 그 이익이 돌아가지는 않았다. 3세기 아테네에서는 숙련 및 비숙련 노동자의 임금이 페리클레스 시대의 50% 이하로 떨어지고 생활비가 크게 상승했다. 그리고 대도시에서는 실업 문제가 심각해서 정부가 수많은 빈민들에게 곡물을 무상으로 배급해야 했다. 이로 인해 헬레니즘 세계에서 노예제는 쇠퇴했다. 이러한 현상은 스토아 철학의 영향이기도 했지만, 임금이 크게 하락해서 자유민 노동자를 고용하는 것이 노예를 구입하는 것보다 더 저렴해진 것이 주요 원인이었다.

제국 경제의 근간은 농업이었다. 강수량이 충분한 지중해 일대와 구릉 지역은 건지 농업, 강수량이 부족한 지역은 관개 농업 중심이었고, 티그리스 · 유프라테스 · 옥수스 강 일대는 운하와 강의 수로를, 페르시아와 중앙아시아에서는 지하수로망인 카나트 제도를 운용했다. 목축업은 제국 전체에서 이뤄졌지만, 국경 지역과 제국 내부의 유목민들이 목축업의 핵심이었다.

헬레니즘 시대에는 토지 소유가 집중되고 농업 노동자의 지위가 하락하는 현상이 일어났다. 군주들은 지주들의 토지를 몰수해 왕령지로 만들고 측근들에게 하사하거나 소작농에게 임대했다. 왕령지를 경작할 의무를 맡은 헬레니즘 시대의 소작농들은 추수 이전까지는 경작지를 떠나지 못하고 국왕이나 지주가 지대로 받은 곡식을 시장에서 최고가로 판매할 기회를 잡기 전까지는 곡식을 처분해서도 안 되었다. 소작농 중 일부가 파업을 일으키거나 탈출을 시도하면, 그들은 모두 세습적인 예속농이 되어 토지에 결박당했다. 독립적인 소농들 중에 상당수는 지주들과의 경쟁에 밀려 빚을 졌고, 빚을 갚지 못하면 예속농으로 전락했다.

상공업은 도시와 도시 근교, 향촌 지역에서의 식료품, 생필품, 각종 수공업 제품 거래가 주를 이뤘으며 사치품을 사고 파는 원격지 무역도 발달했다. 원격지 무역은 향신료와 상아, 값비싼 원목과 석재, 비단 등등의 사치품들이 주로 거래되었으며 제국은 아라비아 반도, 인도, 중앙아시아 등등 여러 지역과 교역을 진행했다.[32] 그리고 해상 무역은 운임이 상대적으로 많이 저렴해서 활발하게 이뤄진 반면, 육상 무역은 운임이 비싸다보니 원격지 무역은 해도 제국 내부에서 각 지역들끼리 교역하는 것은 미진했다. 도시에서는 상설 시장은 농촌 지역에서 열리고 화폐로 재화를 교환했다.

통치의 기반인 군대에게 급료로 지불해야 했기 때문에 제국은 세금을 계속 화폐로 걷어야 했고, 그래서 화폐는 제국 경제의 핵심이었다. 초창기 제국에서 유통하던 화폐는 대제의 장군들이 페르시아 왕중왕들의 재보를 획득한 것을 대제가 직접 화폐로 주조하거나 대제 사후에 주조된 것이었다. 셀레우코스 제국은 주로 은화를 발행하고 금화는 아주 적은 양을 발행했는데, 이전에 발행한 화폐일지라도 회수하지 않고 자유로이 통용시켰다.[33] 그리고 타국에서 주조한 화폐와 아테네와 같은 다른 국가에서 주조한 표준 화폐도 허용했다.

통화 발행은 평시나 전시에 재정을 마련할 때나 화폐가 부족해서 금고가 충분치 않을 때 시행했다. 셀레우코스 제국의 은화 함량은 아주 서서히 증가해서 BC 164년까지 50%로 상승했다. 그러나 경쟁국과의 전쟁과 영토 상실로 인해서 함량이 낮아지고 무게도 가벼워져서 지속적으로 가치가 떨어졌다. 이 때문에 타국에서 발행한 고순도의 중량 화폐들이 제국에서 축장되는 현상이 벌어졌지만, 경쟁국의 왕들은 자국의 통화를 수출하여 셀레우코스 제국의 경제를 무너뜨리는 모략을 쓰지는 않았다.[34] 그들은 경쟁국의 화폐를 자신들의 이름을 새긴 화폐로 재주조해서 선전용으로 쓰기만 했다.


7. 군사[편집]


셀레우코스 제국의 군대는 제국 존립과 관련된 핵심이었다. 셀레우코스 제국군은 그 핵심 부분이 그리스인과 그리스인의 피를 이은 현지혼혈인에 있었다. 따라서 그들의 양과 질은 매우 중요한 문제였고, 군대 체계 근간과 유지는 군주와 엘리트 집단이 이들을 어떻게 키우고 그 인구수를 늘리느냐와도 연관되어 있었다.

그리스 정복자들의 후손인 셀레우코스 왕조는 극소수의 그리스, 마케도니아 이주민, 협력한 현지인의 비율을 생각하면 군사적 위력에 대한 의존도가 높았다. 더욱이 국왕의 군위는 기본적으로 군사적 업적과 군 지휘력에 기반했다. 그래서 소수의 지배 엘리트가 인종적, 문화적으로 완전히 다른 다수의 토착민들을[35] 제대로 지배하려면 군대의 양,질은 더욱 중요했다.

그런데 제국의 중심부는 이들을 스카우트할 수 있는 그리스, 마케도니아, 지중해와 흑해 연안의 식민도시들에서 거리가 멀었고, 시간이 흐를수록 그리스 이주민의 숫자는 줄어들었다. 설상가상 셀레우코스 제국에겐 비슷한 문제를 가질 수 있는 헬레니즘 국가들이 경쟁자로 도사리고 있었는데, 몇몇 국가는 셀레우코스 제국 못지 않은 재정력을 갖춘데다 근무요건의 필수인 그리스와의 거리 문제에서 셀레우코스 제국보다 우위였다. 즉, 셀레우코스 왕조의 지배는 군사적 위력에 크게 의존할 수밖에 없었으며 국왕의 권위는 군사적인 업적과 군 지휘력에서 나오는 상황에서도 다양한 악조건이 산재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셀레우코스 왕조는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각지에 신도시와 군사 식민지를 건설해서 통치와 문화의 거점으로 삼고 그리스, 마케도니아 출신 퇴역병들을 창건자 셀레우코스 1세 니카토르 이래 퇴역병 정착지로 건설된 도시, 마을로 보냈다. 이 대표적인 군사 식민지가 퇴역병 정착지로 시작한 시리아 남부의 두라-에우포로스이다.

제국은 창건자부터 안티오코스 4세 시대까지 도시에 용병과 이주민, 퇴역병들을 적극적으로 정착시키고 이들에게 토지나 경제적 특권, 수조권을 주는 대가로 이들을 전시에 동원하고 군역을 세습하는 의무를 부과했다., 이들을 카토이코이(Katoikoi) 또는, 클레루코이(Klerouchoi)라고 부르는데, 이들은 제국 군사력의 근간이었다. 그러나 그리스 본토에서 오는 그리스-마케도니아 이주민의 숫자가 갈수록 줄어들고 마그네시아 전투 같은 군사적 실패로 인력이 줄어들고 그리스 인구가 많은 아시아 지역을 상실해 제국의 군사적 역량이 약화되었다. 그래서 나중에는 아시아 출신들도 클레루코이로 선발했으나, 장교나 정예 부대 자리는 늘 그리스-마케도니아인들이 독점하였다.[36]

셀레우코스 제국의 군사 장비나 편제는 거의 대부분 알렉산드로스 시절 마케도니아의 것을 답습하였으나, 비슷한 마케도니아식 군대를 가진 다른 디아도코이 국가들과의 전쟁 때문에 군대를 더욱 중장화되었다. 페제타이로이들이 사용하는 사리사의 길이를 늘리고 더 큰 방패를 사용하거나, 헤타이로이들의 방패나 다리 보호대, 마갑 같은 장비들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경무장 투창병이었던 펠타스트들도 펠타 대신에 더 큰 방패인 투레오스를 사용하고 갑옷을 입기 시작했는데, 이를 투레오포로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셀레우코스 제국은 마그네시아 전투 이후, 체인메일을 도입하고 로마군의 군제를 일부 도입했다. 사람들은 사슬 갑옷을 입은 군사들을 보고 흉갑을 입었다 하여 토라키타이라고 불렀고, 큰 방패와 사슬 갑옷, 칼을 쓰는 모습이 로마 군단병과 닮았다고 해서 셀레우코스 제국군이 "로마화"되었다는 오해를 낳기도 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5,000명 정도의 병사(아르기라스피데스)만이 로마식의 조직으로 재편되고 무구를 지급 받았을 뿐이며, 여전히 셀레우코스 제국군의 주축은 페제타이로이였다.[37]

셀레우코스 제국은 팔랑크스 특유의 경직성을 극복하고 부족한 병력을 확보하기 위해 페르시아 · 카르마니아 · 뮈시아 · 메디아 · 아라비아에서 기병대와 궁병대, 경보병대를 비롯한 많은 보조군을 데려왔다.[38] 이 동방인 군대는 봉신군 · 동맹군 · 용병 · 징집병 · 상비군 등 다양한 방법으로 동원했으며 다헤족과 같은 이란계 유목민들을 용병으로 고용하거나 자체적으로 그리스인들을 훈련시켜서 궁기병 전력을 갖추기도 했다.

제국은 이란 고원과 스텝의 유목민들과 접촉한 뒤부터 그들의 카타프락토이를 도입했으며 직접적인 도입 계기는 안티오코스 3세의 동방 원정으로 추측된다. 또한 셀레우코스 1세가 찬드라굽타로부터 코끼리 500마리[39]를 받은 뒤부터 전투 코끼리도 적극적으로 도입했는데, 코끼리에게 갑옷을 입히고 상교를 올려 무장을 강화하고 코끼리 호위용 부대를 따로 조직했다. 그리고 셀레우코스 제국은 경쟁 상대인 프톨레마이오스의 이집트 왕국이 인도에서 코끼리를 수입하지 못하도록 코끼리 수입 봉쇄 조치를 취해 이집트가 군사력을 강화하지 못하게 막았다. 이로 인해 이집트는 코끼리 수입처를 아프리카로 바꾸어야 했고, 시리아 전쟁에서 덩치가 작은 북아프리카 코끼리들이 덩치 큰 인도 코끼리에게 겁을 먹어 도망치는 바람에 전투에서 고전하는 쓰라린 경험을 겪어야 했다. 추가적으로 제국은 낫전차를 실전에 투입했으나, 페르시아 제국 시절과 마찬가지로 효용성은 별로 없었다.

셀레우코스 제국의 군사들을 묘사한 삽화들 #

8. 사회/문화[편집]


초창기 셀레우코스 왕조는 특히 헬레니즘 문화의 전파에 정력을 쏟았는데, 이는 특히 도시 건설을 통해 이루어졌다. 아무것도 없는 곳에 신도시를 건설한 경우도 있었고, 원래 있던 마을을 크게 확장하여 도시를 조성하기도 했으며 원래 있던 도시를 이름만 그리스 식으로 바꾸기도 하였다.[40] 이런 식으로 여러 곳에 거점 도시들을 만들고 그리스-마케도니아인들을 정착시켜 헬라스식 문화를 뿌리내리는 동시에 헬레니즘화된 토착민들을 양성하는 것이다. 또한 토착 엘리트들에게 헬레니즘 양식의 옷들을 하사하고 그리스식 이름을 주는 등 문화적인 혜택을 주기도 했다.

다만 이러한 시도는 왕조 초창기에만 이루어졌다. 우선 디아도코이 전쟁 이후 셀레우코스 왕조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양강 체제가 이루어지면서 둘이 박터지게 싸우느라 왕들이 도시 건설을 할 상황이 못 되었다. 게다가 사방에서 적이 쳐들어와 영토가 시시각각 축소되고, 그리스와 마케도니아 본토도 인구가 많이 유출되어 더이상 뽑아낼 인구가 없었기 때문에 신도시 건설은 급속도로 자취를 감췄다.

셀레우코스 왕조의 동방 영토 영유 기간이 그리 길지 않았기 때문에 도시화를 통한 헬레니즘 정책은 다른 곳에서는 점차 사라져 갔지만, 그 대신 박트리아 왕국이 바톤을 넘겨받아 헬레니즘 문화를 상당히 융성하게 했다. 우리나라 중고등학교 사회세계사 교과서를 보면 신라 시대 불상과 인도의 간다라 불상을 비교하며 헬레니즘 문화에 대해 서술한 내용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박트리아 왕국의 영향이다. 또한 왕조의 중심지였던 시리아와 지중해 연안 지역에서는 헬레니즘이 확고한 대세로 자리 잡았으며, 이는 이후 고대 로마 제국, 동로마 제국을 거쳐 이슬람 시대까지 시리아 및 지중해 연안 지대의 역사와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로마가 셀레우코스 왕조를 마그네시아에서 꺾을 때가 아이러니하게 셀레우코스 왕조의 절정기였고 그 중심에는 대왕이라 불리는 안티오코스 3세가 있었다. 알렉산드로스의 후계자들 중에 가장 국력도 강했던 나라였던지라 로마가 제정으로 변모한 뒤 셀레우코스 왕조의 의례를 많이 본받으려고 했다. 그래서 동로마 제국의 황제에게까지도 비슷한 의례가 전해졌다고 한다.


9. 역대 국왕[편집]




파일:04_seleucid.jpg

이름
재위 기간
가족 관계
비고
셀레우코스 1세 니카토르
기원전 311 - 기원전 281
시조
왕을 칭한 것은 기원전 305년
안티오코스 1세 소테르
기원전 281 - 기원전 261
셀레우코스 1세의 아들
페르시아 귀부인[41]
셀레우코스 1세의 혼혈
안티오코스 2세 테오스
기원전 261 - 기원전 246
안티오코스 1세의 아들

셀레우코스 2세 칼리니코스
기원전 246 - 기원전 225
안티오코스 2세의 아들
파르티아, 박트리아, 갈라티아 상실
셀레우코스 3세 케라우노스
기원전 225 - 기원전 223
셀레우코스 2세의 아들
암살당함
안티오코스 3세 메가스
기원전 223 - 기원전 187
셀레우코스 2세의 아들
동방 원정, 아나톨리아 상실
셀레우코스 4세 필로파토르
기원전 187 - 기원전 175
안티오코스 3세의 아들

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
기원전 175 - 기원전 163
안티오코스 3세의 아들

안티오코스 5세 에우파토르
기원전 163 - 기원전 161
안티오코스 4세의 아들

데메트리오스 1세 소테르
기원전 161 - 기원전 150
셀레우코스 4세의 아들
유대 상실
알렉산드로스 1세 발라스
기원전 150 - 기원전 146
안티오코스 4세의 아들이라 주장
데메트리오스 1세와 내전
데메트리오스 2세 니카토르
기원전 146 - 기원전 138
데메트리오스 1세의 아들
1차 재위.
메소포타미아, 이란 고원 상실
안티오코스 6세 디오뉘소스
기원전 145 - 기원전 140
알렉산드로스 발라스의 아들
디오도토스 트리폰의 꼭두각시
디오도토스 트리폰
기원전 140 - 기원전 138
왕가가 아님
왕위 찬탈자
안티오코스 7세 시데테스
기원전 138 - 기원전 129
데메트리오스 1세의 아들
파르티아에 패배해 전사
데메트리오스 2세 니카토르
기원전 129 - 기원전 126
데메트리오스 1세의 아들
2차 재위
알렉산드로스 2세 자비나스
기원전 129 - 기원전 123
안티오코스 7세의 양자라고 주장
프톨레마이오스 8세의 꼭두각시
클레오파트라 테아
기원전 126 - 기원전 121
프톨레마이오스 6세의 딸
길어서 각주로 처리[42]
셀레우코스 5세 필로메토르
기원전 126 - 기원전 125
데메트리오스 2세의 아들
어머니에게 암살됨
안티오코스 8세 그뤼포스
기원전 125 - 기원전 96
데메트리오스 2세의 아들
어머니를 죽이고 살아남음
안티오코스 9세 퀴지케노스
기원전 114 - 기원전 96
안티오코스 7세의 아들
안티오코스 8세와 내전
셀레우코스 6세 에피파네스
기원전 96 - 기원전 95
안티오코스 8세의 아들
안티오코스 9세를 죽임
안티오코스 10세 에우세베스
기원전 95 - 기원전 83
안티오코스 9세의 아들
내전 선수 1번
데메트리오스 3세 에우카이로스
기원전 95 - 기원전 87
안티오코스 8세의 아들
내전 선수 2번
안티오코스 11세 에피파네스
기원전 95 - 기원전 92
안티오코스 8세의 아들
내전 선수 3번
필리포스 1세 필라델포스
기원전 95 - 기원전 83
안티오코스 8세의 아들
내전 선수 4번
안티오코스 12세 디오뉘소스
기원전 87 - 기원전 82
안티오코스 8세의 아들
선수 1번 대타
클레오파트라 셀레네
기원전 82- 기원전 69
안티오코스 13세의 어머니
안티오코스 13세와 공동왕으로 즉위했지만 아르메니아 왕 티그라네스 2세에게 피살됨
안티오코스 13세 아시아티쿠스
기원전 69 - 기원전 64
안티오코스 10세의 아들
폼페이우스에게 폐위됨
필리포스 2세 필로로마이오스
기원전 65 - 기원전 64
필리포스 1세의 아들
폼페이우스에게 폐위됨


10. 대중 매체[편집]


방대한 영토와 막강한 국력을 지니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셀레우코스 제국에 대한 대중들의 인지도는 매우 낮다. 그나마 알렉산드로스 3세를 동경하는 서구권에서는 좀 낫지만, 한국 사회에서 셀레우코스 제국이라고 하면 1990년대 말엽까지만 해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43].

그러다가 2004년 발매된 PC 게임인 로마 토탈워가 한국을 비롯한 세계 각국에서 히트를 치고 나서야 비로소 로마 토탈워 속에 등장했으면서 실제로도 존재했던 셀레우코스 제국에 대해 알게 되었다는 반응이 많다. 실제로 로마 토탈워를 한 유저들 중에서도 가장 인기가 높았던 세력이 셀레우코스 제국이었고, 이러한 인기는 9년 후에 발매된 후속작 토탈워: 로마 2에도 반영되어 셀레우코스 제국이 더욱 강력하게 등장했다.

물론 구약성경에 실린 마카베오서 부분을 공부했던 사람이라면 셀레우코스 제국이 저지른 유대교 탄압에 대해 알고 있었으나, 국내 개신교는 엄격한 옛날식 한글 문법으로 작성된 성경을 공부할 만큼 보수적이라서 셀레우코스 제국이 아니라 시리아가 유대교 탄압을 했다고 잘못 알고 있었던 사람들이 더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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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리스어. 발음은 당대의 코이네 그리스어로 '아우토크라토리아 톤 셀레우키돈', 현대 그리스어로 '아프토크라토리아 셀레프키돈'에 가깝다. 또, Βασιλεία τῶν Σελευκιδῶν이라는 명칭으로 불리기도 한다.[2] 은 셀레우코스 왕조의 상징으로 셀레우코스 왕조가 주조한 수많은 동전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도안이다. 왜 하필이면 닻을 왕조의 상징으로 삼았는지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가설들이 있다. 다만 가장 주요한 가설은 셀레우코스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아래에서 해군 사령관으로 일할 때를 기념하기 위하여 닻을 상징으로 삼았다는 것, 혹은 상인들에게 셀레우코스 왕조에 아예 닻을 내리고 살라는 뜻의 프로파간다라는 설 등 다양하다. 셀레우코스 1세의 허벅지에 닻처럼 생긴 흉터가 있어서 닻을 상징으로 삼았다는 설도 있다.[3] 그런데 안티오코스 4세가 유대인들한테 고대 그리스 종교의 최고신인 제우스를 숭배하라고 강요했다가 오히려 유대인들의 반발을 사서 마카베오 전쟁이 일어나는 바람에 셀레우코스 제국은 더 큰 피해를 입고 말았다. 참고로 《성경》에 언급되는 '가장 흉측한 유다의 우상'이란 바로 그리스인들이 숭배했던 제우스의 신상을 말하는 것이다.[4] 안티오코스 4세가 박해했지만, 안티오코스 3세 때만 하더라도 왕의 공인을 받은 엄연한 합법 종교였다.[5] 아르케 셀레우케이아 [6] 이때 후처인 스트라토니케를 아들과 결혼시켰다.[7] 프톨레마이오스 케라우노스도 켈트족과 맞서다 전사했다.[8] 프톨레마이오스 2세는 이미 사망했다.[9] 이때 라오디케 1세는 프톨레마이오스 3세에게 넘겨졌고, 얼마 안가 처형되었다.[10] 이때 예르반두니 왕조(Երվանդունիներ)가 패망하고 셀레우코스 왕조에 충성하는 아르타쉐스라는 아르메니아인이 스트라테고스로 임명되었다. 하지만 10여 년 후 아르탁시아가 반란을 일으켜 아르탁시아 왕조(Արտաշեսյան)를 세워 셀레우코스 왕조는 지배권을 상실했다.[11] 파르티아의 수도 헤카톰필로스를 함락시키고 박트리아 군대 역시 초전에 무찔렀으나, 파르티아 왕가는 도망갔고, 박트리아는 수도 박트라에 틀어박혔으므로 수년간 포위했으나 점령하지 못했다. 결국 파르티아는 왕이라는 칭호를 쓰는 대신 안티오코스 3세에게 복종하기로 하고, 박트리아는 종주권을 인정받은 후 왕족간 통혼을 했다.[12] 이때 기병 전투에서 카타프락토이의 활용이 대성공을 거뒀고, 이로 인해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헤타이로이도 중무장화된다.[13] 마케도니아 팔랑크스 16,000명이 궤멸되었으며, 전투 코끼리 부대도 완전히 해체되었다.[14] 말 그대로 신전을 털어버렸다.[15] 셀레우코스 왕조의 땅은 사실 기원전 2세기 말에 저 정도 수준이 됐다.[16] 군주들은 바빌론과 페르시아의 신들에게 제물을 헌납해 토착민들의 지지를 얻으려 했다. 그리고 바빌론에서는 스스로 페르시아의 전통을 따른 왕임을 내세우고 지구라트를 유지·관리했으며 신년 축제인 아키투 의례에 참여했다.[17] 알렉산드로스 대왕 치세에는 마케도니아의 귀족들이 왕을 자신들의 대표로 보는 경향이 있어서 이들에게 전제 왕권을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그리고 알렉산드로스가 페르시아식 예법을 요구한 것에 대해서 그의 장군들이 반발한 것은 당시 그리스인들이 절을 하는 행위를 오로지 신에게만 하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리스인들에게 페르시아식으로 인간에게 절을 하라고 강요하는 행위는 신성모독이나 다름없었다.[18] 시조 셀레우코스 1세는 자신이 아폴론의 후예라고 주장했고, 그 증거로 닻의 형상(보통 셀레우코스 왕조가 등장하는 게임에 셀레우코스 왕조의 문장으로 등장)을 한 모반을 가지고 있다고 선전했다.[19] 경쟁 세력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이집트도 프톨레마이오스 2세의 치세때 왕조의 창건자인 프톨레마이오스 1세를 신적 존재로 만드는 군주 숭배 사상을 정책적으로 퍼뜨리고 고대 이집트 역대 왕조의 파라오들처럼 근친 결혼을 해서 이집트인들의 민심을 얻으려고 했다.[20] 이들은 '친구' - '영예로운 친구' - '최고의 친구' - '최고의 영예로운 친구'라는 4단계의 계급으로 분류하며, 가장 친한 친구에게는 왕관까지 허락했다. 그리스어로는 '필로스'라고 부르며 복수형은 '필로'이다.[21] 안티오코스 3세 메가스의 치세 초반에 중앙에서 국정을 농단하다가 안티오코스 3세의 역공에 숙청당한 헤르미아스, 이런 헤르미아스와 갈등을 빚고 기득권을 유지하고 싶어한 지방 총독들인 소아시아의 아카이오스 2세, 페르시아와 바빌로니아의 알렉산드로스&몰론 형제의 반란이 대표적인 사례이다.[22] 왕비와 후궁 가문간의 다툼도 벌어졌기 때문에, 왕은 가장 총애하는 자식을 공동왕에 임명해서 계승 분쟁을 막으려고 했다.[23] 이런 속국 왕조 체제는 파르티아 시대까지 이어진다. 특히 페르시아 지방의 군주들은 "프라타라카"라고 불렸는데, 독자적인 주화를 발행할 정도로 자치권을 가졌다. 후일 파르스의 번왕은 파르티아마저 전복시켜버리고는 사산조 페르시아를 건국한다.[24] 그리스-마케도니아계 시민들은 대부분 토지를 가지고 있었고, 이 토지들은 토착민 예속농들이 경작해주었다.[25] 특히나 폴리스 같은 대도시들이 노예에 대한 수요가 많았다.[26] 제국 정부는 신도시를 지으면서 원래 있던 토착 도시의 인구와 토지를 강탈하기도 했다.[27] 안티오코스 4세는 헬레니즘화를 받아들이는 토착 도시들에게 여러 가지 혜택을 부여하여 헬레니즘화를 독려했다.[28] 화폐 경제와 조세 금납화로의 전환은 군주들이 도시화 정책을 실시해서 화폐 경제가 발달한 도시들이 많이 생긴 덕분에 가능했다.[29] 노예를 매매할 때는 상업세와는 별개로 노예세를 매겼다.[30] 정치적인 지지가 필요하거나 지역민들의 호의를 사기 위한 목적으로도 감세 · 면세조치를 해주었다. 또한, 흉년이 들거나 자연재해로 피해를 입은 지역에 대해서도 감세와 면세 조치를 내렸다.[31] 그래도 여전히 대다수의 사람들이 향촌 지역에서 살았다.[32] 이렇게 거래한 사치품들은 주로 수도인 셀레우키아로 유입되었다.[33] 제국이 발행한 금화들은 선전용으로 쓰기 위한 목적이 강했다.[34]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다. 이는 경상수지 적자를 의미한다. 셀레우코스 제국에 자국의 화폐를 잔뜩 유통시키려면 셀레우코스 제국의 재화를 대량으로 수입해야 한다. 대영제국청나라의 물건을 수입하기 위해 전 세계의 은을 다 끌어모아다 바쳤던 것을 생각해보면 된다. 이는 결과적으로 셀레우코스 제국 경제를 자급자족 수준 이상으로 활성화시켜서 최종적으로는 더욱 강한 국방력을 소유하게 된다는 결론으로 이어지게 된다. 이후로 이 넘쳐나는 군사력이 어디로 향할지는..(…) 또한 기축통화국 지위라는 것이 이 시대에는 별 의미가 없었다. 이 시대의 화폐의 파워는 중앙은행의 신용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저 그 화폐를 만드는데 사용된 금속의 가치였기 때문이다.[35] 게다가 땅이 워낙 넓다 보니 피지배 종족도 매우 다양하다. 수천 년의 전통과 문화를 가진 이집트인들만 지배했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와 대비되는 부분이다.[36] 그래도 셀레우코스 제국은 라이벌인 프톨레마이오스조 이집트보단 상황이 훨씬 좋아서 페르시아를 완전히 상실한 안티오코스 7세의 치세에조차 몇 만에 달하는 대군을 동원할 수 있었다. 이집트는 그리스계 도시와 그리스인의 숫자가 적고 그리스와의 거리도 멀어서, 그리스계 도시들이 많고 그리스 본토에서 대규모 이주민을 받았던 셀레우코스 제국보다 훨씬 더 심각한 군사력 약화에 시달렸다.[37] 출처: Hellenistic infantry reform in the 160's BC[38] 라피아 전투에서 셀레우코스 제국은 아랍인 병력을 1만, 카르마니아인 군대를 5천씩이나 끌고 왔다.[39] 사실 이 코끼리들은 이미 늙어버린 코끼리들로 받은 지 얼마 안 돼서 많은 수가 늙어 죽었다.[40] 마케도니아나 북부 그리스 지명 (가령:에데사), 또는 왕가의 이름을 딴 지명이 많은데... 밑을 봐서 알다시피 왕의 이름이 태반이 셀레우코스 아니면 안티오코스다. 그래서 결과는? 안티오키아, 셀레우키아, 초대(?) 왕비인 아파마를 딴 아파메아 등 똑같은 이름의 다른 도시가 너무 많아 머리를 아프게 한다. 또한 그리스 지명을 딴 도시들 역시 상당히 헷갈리게 한다.[41] 이름은 아파마(apma) 정확히는 박트리아 계열, 대부분의 마케도니아 인들이 알렉산드로스 시절 결혼했던 페르시아 여인과 이혼했지만, 셀레우코스는 이혼하지 않아서 아파마는 왕비로 살았다. 아들 안티오코스 1세가 자신의 어머니를 기념하여 도시를 건설했다.[42] 알렉산드로스 1세 발라스, 안티오코스 7세, 데메트리오스 2세의 왕비 & 안티오코스 6세, 셀레우코스 5세, 안티오코스 8세, 안티오코스 9세의 어머니[43] 이는 한국 사회에서 고대 서양사에 대한 관심과 지식 자체가 매우 부족해서 생긴 일이다. 오죽하면 정식 역사학자도 아닌 수필가인 일본 작가 시오노 나나미가 쓴 로마인 이야기가 대히트하기 전까지 고대 서양사에 관련된 볼만한 대중 인문 역사 서적이 거의 없었을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