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가 히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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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가 히토미
曽我(そが ひとみ


파일:소가 히토미.jpg

출생
1959년 5월 17일 (64세)
일본 니가타현 사도시
국적
[[일본|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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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

한국명
민혜경
가족
소가 시게루
소가 미요시
여동생 소가 후미코
남편 찰스 로버트 젠킨스(1980년 결혼, 2017년 사별)
자녀 미카 소가 젠킨스, 브린다 소가 젠킨스
1. 개요
2. 생애
2.1. 일본으로의 귀국




1. 개요[편집]


1978년 8월 12일 일본 니가타현 사도섬 마노초(현 사도시)에서 북한 공작원에 의해 납북납북 일본인. 납치 당시 만 19세였고 어머니인 소가 미요시와 함께 납북됐다. 1965년 주한미군으로 복무하다가 월북한 미군 병장 찰스 로버트 젠킨스의 아내로 유명하다. 납북된 지 2년 뒤에 젠킨스와 결혼했으며 두 딸을 낳아 평양에서 살았다.

2002년 북일정상회담 합의에 따른 납북 일본인 귀국 조치에 맞춰 일본으로 귀국하였고 2년 뒤인 2004년 남편과 인도네시아에서 다시 만났으며 이후 젠킨스가 북한 귀국을 거부하면서 일본 사도섬에서 함께 여생을 보냈다. 일본으로 돌아온 후에는 납북 일본인 관련 강연이나 기자회견 등에 꾸준히 참석하고 있다.


2. 생애[편집]


1959년 5월 17일 일본 니가타현 사도섬에서 태어난 소가 히토미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간호조무사로 일하고 있었는데 1978년 6월 12일 어머니와 함께 시장에 다녀오다가 북한 공작원 3명에게 납치되어 북한으로 끌려갔다. 이때 공작원들은 납치 과정에서 그녀와 어머니를 분리시켜 버렸고 이후 히토미는 어머니를 두 번 다시 보지 못했다.[1]

북한 도착 후 평양에 배치받은 히토미는 2년 뒤인 1980년 초 찰스 로버트 젠킨스를 만났다. 1965년 주한미군으로 복무하던 중 월북한 그는 정착한 지 15년이 넘도록 결혼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북한 당국은 월북 미군들 중 유일하게 아내가 없는 젠킨스에게 영어를 가르치라는 명분으로 히토미를 소개시켜 주었고 두 사람은 동거를 시작하였다. 초반에 젠킨스는 본래 목적대로 영어만 가르치겠다고 했지만 당국은 젠킨스에게 히토미와 결혼할 것을 요구했다.[2] 두 사람은 동거를 시작하면서 서로에게 깊게 의지하게 되었는데 매일 밤 잠자리에 들기 전 서로에게 3번 키스를 하고 "사랑한다" 는 말을 일본어와 영어로 나눴다고 한다.

히토미는 납북당한 후 북한 당국의 강압적인 태도와 정책 때문에 끊임없이 불안에 떨었다. 젠킨스는 불안해하던 히토미를 위해 NHK 방송을 틀어 줬는데 히토미는 오히려 새파랗게 얼굴이 질린 체 "이런 걸 보면 처형당한다"고 소리치면서 방에서 나가 버렸다고 한다.

젠킨스는 히토미와 동거하며 그녀에게 더욱 사랑에 빠졌고 끊임없이 청혼했지만 히토미는 일본에 살 때만 해도 서양인을 본 적이 없어서 계속 청혼을 거절했다. 그러자 젠킨스가 지금 나와 결혼하지 않으면 정부가 당신을 또 어딘가로 데려갈지 모른다고 설득해 결국 히토미는 청혼을 받아들였다.[3] 만난 지 40일만인 1980년 8월 8일 두 사람은 결혼식을 올리고 부부가 되었다.

이후 젠킨스는 영화배우로 활동하였고 히토미는 가정주부로서의 삶을 시작하였으며 평양에서 거주하며 두 딸도 낳고 20여년의 시간 동안 여느 평양 주민들과 다르지 않은 삶을 살아가게 되었다.


2.1. 일본으로의 귀국[편집]


2002년 9월 17일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는 평양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나 북일정상회담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김정일은 납북 일본인 문제에 대해 북한의 조총련계 공작원들이 공모하여 일본인 11명을 납치한 것을 시인하고 공개적으로 사과했다. 이 회담은 일본 전역에 큰 충격을 안겼는데 그동안 음모론 정도로 여겨져 왔던 납북 일본인의 존재가 사실로 밝혀지며 일본 전역이 분노에 들끓었다.

북한은 북일정상회담의 합의대로 일본인 5명을 일시귀국시킬 것을 발표했는데 이 명단에 소가 히토미가 포함되었다. 그렇게 2002년 10월 15일 히토미는 납북된 지 24년만에 고향인 일본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한편 남편인 젠킨스는 그녀와 함께 귀국하지 않으면서 떨어지게 되었는데 젠킨스가 탈영병 신분이었기 때문에 일본에 돌아가는 즉시 미 군법에 의해 체포되고 형사처벌 받을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떠나기 전날 히토미는 곧 돌아올 것이니 잘 지내고 있으라며 활기차게 작별인사를 했지만 일본이 영구귀국으로 정책을 바꾸면서 히토미는 다시 평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4]

2004년 5월 2차 북일정상회담이 개최되었고 고이즈미 총리는 젠킨스를 직접 방문해 귀국할 것을 요청했다. 처음에는 형사처벌이 두려워 회의적이었던 젠킨스도 결국 마음을 돌리고 일본 대신 인도네시아를 상봉 장소로 합의했다. 2004년 7월 10일 히토미는 2년만에 남편과 두 딸을 인도네시아에서 상봉했다. 젠킨스의 인도네시아 방문 역시 일시 방문 개념이었으나, 젠킨스는 아내와 시간을 보낸 뒤 북한으로의 귀국을 거부하고 인도네시아에 머물렀다. 이후 미국 정부에서 젠킨스에 대한 선처를 발표하면서 부부는 일본으로 돌아갔으며 젠킨스가 부대 징계를 받은 뒤 사도섬에 정착했다.[5]

2005년 6월 젠킨스의 미국 방문에 동행해 처음으로 시어머니를 만났다.

이후 사도섬에서 남편과 함께 여생을 보내며 납북 일본인 피해 관련 기자회견과 강연 등에 등장했다. 2017년 12월 젠킨스가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두 딸과 함께 사도섬에서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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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02년 납북 일본인의 귀국 과정에서도 어머니인 미요시의 이름은 명단에 없었다. 납북 일본인들 사이에서도 그녀를 본 사람은 없다는 증언이 나왔는데 이로 인해 납치되어 북한으로 오던 중 이미 사망했다고 추정하기도 한다.[2] 젠킨스는 히토미가 한국어를 너무 잘 한 나머지 처음에는 일본인이 맞는지 의심했다고 한다.[3] 북한 당국은 계속 결혼하지 않던 젠킨스를 보고 설득도 포기한 채 반신반의하고 있었는데 젠킨스가 어느 날 나타나 결혼하겠다고 하자 어떻게 한 거나며 놀라워했다는 후문이 있다.[4] 젠킨스는 초반까지는 아내가 돌아올 것이라 생각하고 기다렸지만 1년이 지나도 아내가 돌아오지 않자 크게 절망했다고 한다. 심지어 술에 취해 김정일에 대해 욕두문자를 퍼붓기도 했다는데 다행히 간부들이 젠킨스와 친한 사이여서 그냥 눈감아줬다.[5] 이미 북한에서 세뇌교육을 받은 두 딸은 일본에 간다는 말에 매우 당황했지만 주일미군 기지에서 며칠 생활한 뒤 충격을 받고 북한으로 돌아가기 싫다며 잔류를 결정했다. 이에 한 주일미군 간부는 "주체사상도 달러 앞에서는 어쩔 수 없나보다"라며 농담했다는 후문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