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초 영랑동 백골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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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상가 주차장의 백골들
3. 이들은 누구인가
4. 유사 사건
5. 둘러보기


시신을 조사하는 국방부유해발굴감식단

1. 개요[편집]


2017년 6월 29일, 강원도 속초시 영랑동의 횟집 공사현장에서 신원미상의 백골 사체 16구가 집단으로 발견된 사건.

시신들의 신원과 시신들이 유기된 이유에 대해서 갖가지 의문점들을 낳았지만 어떠한 단서도 나오지 않아 진전이 없는 상태로 시신이 발견된 이유에 대해 여러 추측들이 제기되었지만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아 더 큰 의문점만 남았으며, 6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이렇다 할 열쇠는 나오지 않고 있다.


2. 상가 주차장의 백골들[편집]


2017년 6월 29일 오전 10시 15분쯤 강원도 속초시 영랑동의 한 횟집 상가 인근에서 주차장을 조성하기 위해 땅을 파던 굴삭기기사가 유골 5구를 발견하고 경찰에 신고했다.

사건 당일 오후, 유골이 처음으로 발견된 현장에서 반경 1m가량 떨어진 위치에서 여섯번째 시신이 발견되었고 이후 현장에 출동한 경찰이 이틀간 현장조사와 발굴작업을 실시하면서 총 16구의 시신이 확인되었다.

유골은 현장 인근의 수령이 50년가량 된 은행나무의 약 1.6m 아래에 집단으로 매장되어 있었으며 수사관이 치아 등을 검시한 결과 약 20대 전후의 청년들로 추정되었다. 일부 유골 중에는 두개골이 부서지는 등 형태가 온전하지 않은 것도 있었다.

3. 이들은 누구인가[편집]


경찰은 유골이 집단으로 발견되었고 인근 지역에서 6.25 전쟁 당시 전사자의 유해가 발견된 전적이 있는것으로 보아 유골을 6.25 전쟁 당시 국군 전사자나 또는 그와 관련된 시신으로 추정하고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에 현장을 인계했다. 다만 전쟁 전까지는 여기가 북한 영토였고, 아군의 동해 함포사격 공세끝에 수복된 곳이라 저항하는 공산군과 맟서다 전사했을 가능성이 아주 없지는 않다. 북측은 정전협상 초기에는 삼팔선으로 되돌아가자고 주장하였고 실제로 속초 시내는 38선에서 25~30 km 떨어져있다.
그러나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은 시신에 총상 등의 흔적이 없고, 영랑동 일대에서는 국군과 인민군/중공군간 직접적으로 전투가 벌어진 기록이 없으며, 검시결과 각 변사자의 연령대가 다양하고, 군복 단추, 군장 부속품, 탄피나 실탄등 국군 전사자 유해발굴현장에서 흔히 발견되는 유류품이 나오지 않는등의 이유로 해당 시신들을 전사자 유해로 보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현장에서 철수했다.[1]
경찰은 인근 주민들을 대상으로 탐문수사를 펼치고 속초시청 담당자들을 조사하는 방법으로 변사체들의 신원과 유해가 발견된 이유에 대해서 수사를 진행했으나 뚜렷한 결과를 밝혀내지는 못했다.

경찰은 속초시청 공무원들과 속초문화원 직원들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1953년 3월 31일 조선인민군 공군속초항을 공습해 함경남도 단천 출신으로 강원도 속초시에 정착한[2] 부두노동자 5명이 부두하역 작업 중 사망했고, 이들을 영랑호변에 안장한 것을 시작으로 일대에 공동묘지가 조성되어 1990년대까지 68기가 안장되었다가 일대를 관광지로 개발하면서 고성 등지로 이장되었다는 사실을 확보하고 이장되지 않은 묘지일 가능성에 대해 조사를 벌였다.
그러나 시신을 매장할때 사용했을 관의 파편이나 수의조직들이 발견되지 않았을 뿐더러 일정 거리를 두고 묘역을 조성하는 공동묘지의 배치 방식과 달리 유골이 한데 뒤섞여 있었다는 점이 발목을 잡았다.

  • 가설 3: 해일 희생자들?
경찰은 주민들을 상대로 벌인 조사에서 1963년 일어난 해일에 휩쓸려 사망한 사람들의 시신을 수습해 묻었다는 증언을 확보했다. 그러나 1964년 일본 니가타현에서 일어난 지진의 여파로 속초 일부 해안에서 해일이 발생한 적은 있지만 당시 공식적으로 집계된 피해규모는 없었다.

  • 가설 4: 실종된 어부들?
경찰은 1968년 10월 24일 동해안을 강타한 폭우와 해일로 속초에서 150여채의 가옥피해와, 5,900여명의 이재민이 발생하고 어민 33명이 사망, 실종된 사실을 바탕으로 변사자의 신원을 당시 실종된 실종자로 보고[3] 속초 문화원과 함께 자료조사를 실시했다. 그러나 이 역시 결정적인 증언과 증거자료가 없어 해일 실종자설도 추측의 영역으로 남겨둘 수밖에 없었다.

몇십만명이 이상이 죽은 것은 확실하나 정확히 누가 얼마나 죽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은 보도연맹 학살의 피해자일 가능성도 있다. 더구나 해당 학살은 피해자 수습이 완전히 이뤄지지 못했기 때문에 일설에 힘이 실리기도 한다. 그러나 이 역시 근처 증언, 증거자료는 부족하다. 무엇보다 이 가설은 중대한 오류가 있는데, 전쟁 전 속초는 북한이었다. 오히려 북한 치하에서 죽은 사람들이라 기록이 안 남았다고 보는 편이 일리가 있다.

  • 가설 6: 속초 무장공비 사건 당시 알려지지 않는 피해자들
속초 무장공비 사건 당시 공식적으로 집계되고 난 후 알려지지 않은 피해자가 있을 수 있다. 그 시기에 맞게 실종신고가 들어온 정황 등을 살펴보면 될 듯 싶다.

도대체 이들이 누구인지에 대한 의문점들은 아직도 해소되지 않고 있다.

4. 유사 사건[편집]



5. 둘러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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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08년 서울 대학로 백골 사건에서도 비슷한 해프닝이 있었다.[2] 속초시북위 38도선 이북 지역으로 소련군정인민위원회의 통치를 받았고, 한국전쟁 당시까지만 해도 북한 영토였다. 현재 연천군철원군, 화천군38선 이북 지역들은 본래는 북한 영토였던 것이 한국전쟁당시 한국군에 점령되면서 한국 영토로 편입된 것. 또한 속초는 함경남도와 지리적으로 가까워 많은 실향민들이 정착했는데 이들이 정착한 정착촌이 바로 아바이마을이다.[3] 주민들의 증언은 이것이 와전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