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봉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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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배경
2.1. 2차 제노전쟁
2.2. 양위팅의 만행
3. 전개
3.1. 5.30 사건과 반봉동맹의 결성
3.2. 쑨촨팡의 역습
3.3. 쉬저우 함락과 우페이푸의 거병
4. 결과
5. 참고문헌
6. 관련문서


1. 개요[편집]


1925년 10월, 장쭤린봉천군벌쑨촨팡직예군벌 사이에서 벌어진 전쟁. 쑨촨팡이 승리하여 오성연군의 총사령관으로 추대되었다.


2. 배경[편집]



2.1. 2차 제노전쟁[편집]


1924년의 2차 직봉전쟁펑위샹 등이 북경정변을 일으켜 대총통 차오쿤을 축출하는 내응을 통해 장쭤린봉천군벌, 돤치루이안휘군벌, 펑위샹의 연합의 승리로 끝났다. 이들은 중국 국민당의 영수 쑨원을 초빙하는 한편 돤치루이를 임시집정으로 추대하여 새로운 임시정부를 조직했다. 하지만 임시정부는 평화적인 통일을 이룩하고 민치의 기반을 닦으라는 세간의 염원과는 달리 명목상의 선후회의를 개최하여 자파의 세력 강화에만 집착할 뿐이었다.

한편 강절전쟁으로 일본으로 망명을 떠났던 안휘군벌의 루융샹은 2차 직봉전쟁을 계기로 귀국하게 되었다. 장쭤린은 장강 유역의 각성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구실로 톈진회의를 소집, 루융샹에 대한 불만을 표시하면서도 강소와 안휘 2개 성을 안휘군벌에 속하게 하여 루융샹이 지배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돤치루이에게 제안했다. 루융샹의 병력을 봉군이 수송해주고 경비까지 부담하겠다는 장쭤린의 제안을 돤치루이는 수용하였다. 돤치루이는 1924년 12월 11일 강서성장 한국균에게 강소독군을 겸임하게 하는 한편 치셰위안을 면직시키고 루융샹을 소환선무사에 임명하여 직예군벌인 전 강소독군 치셰위안을 토벌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장쭤린은 장강 유역으로 진출하고자 하는 야욕에 12월 12일 장쭝창에게 군대를 주어 루융샹을 돕게 했고 2차 제노전쟁에서 치셰위안은 패배하여 일본으로 달아났다.


2.2. 양위팅의 만행[편집]


그런데 장쭤린은 장강 유역을 차지하고자 하는 야욕에 1925년 8월, 장쭝창을 산동독군에, 장덩쉬안을 안휘독판에, 양위팅을 강소독판에 임명하여 안휘독판 왕읍당과 강소독판 루융샹을 축출하고 장강을 자신의 세력권에 넣었다. 봉천군벌의 확장에 경계심을 느낀 절강독군 쑨촨팡은 양위팅에게 동맹을 맺어 서로를 침범하지 말자고 제안했으나 양위팅은 오만불손하게 그를 대하면서 그의 분노를 돋울 뿐이었다.

한편 강소독군으로 부임한 양위팅은 강소군의 여러 사단장들을 함부로 대하면서 이들을 구박하고 모욕주었다. 양위팅은 취임 후 각 사단장들을 새로 위임했는데 천댜오위안(진조원), 백보산, 마옥인, 정준언 등이 부임인사를 오자 양위팅은 장쭤린의 목소리를 흉내내며 이들에게 매우 고압적으로 지시를 내려 분노를 샀고 습관적으로 강소군벌들에게 봉천만 못하다, 형편없다고 욕을 퍼부어댔다. 분노한 강소성의 군벌들은 쑨촨팡과 연대하여 봉천군벌에 대한 반격의 칼날을 갈고 있었다.


3. 전개[편집]



3.1. 5.30 사건과 반봉동맹의 결성[편집]


그러던 중 상하이에서 중국인 노동자가 일본인의 총에 맞아 죽는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이에 분노한 학생과 노동자들이 봉기하였고 조계지 당국은 이를 무력으로 진압하여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에 봉천군벌은 상하이에 주둔한 20사단장 형사렴을 6월 13일 상하이 계엄 사령관으로 임명하여 상하이 시내에 군부대를 진주시켜 치안을 유지하게 했고 장덩쉬안과 정희춘이 각각 1개 여단을 보내 도왔다. 상하이에 봉군이 증강되자 쑨촨팡은 봉천군벌이 강소성 다음에는 절강성을 노릴지 모른다 여겨 강소독군 양위팅에게 동맹을 제안했지만 전술했듯이 양위팅은 매우 오만불손한 태도로 쑨촨팡의 제안을 무시하여 쑨촨팡으로 하여금 오히려 위협을 느끼게 하여 봉천군벌에 반기를 들게 하였다.

이후 봉군은 상하이 시내에서 마약을 매매하고 약탈, 사기, 공갈, 강간 등의 각종 대민범죄를 자행했다. 이에 상하이와 난징의 시민들이 분노하여 봉군의 만행에 항의하는 민원과 시위를 벌였지만 양위팅은 안하무인으로 성난 민심을 무시했다. 봉천군벌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전국 각지로 퍼져나가자 쑨촨팡은 이러한 분위기를 틈타 천댜오위안, 백보산, 마옥산을 비롯한 강소군의 장령들 및 호북, 안휘, 강서성의 군인들과 결탁하여 봉천군벌을 치자는 계획을 꾸몄다. 이에 관해 장쭤린에게 보고가 들어갔지만 장쭤린은 밀고한 사람을 욕하며 정보를 믿지 않았다.

"망할 놈! 35년 동안 난 누굴 치지 않았으니 절대로 누가 날 치진 않을 것이다!"


장쭤린이 방심한 사이에 쑨촨팡은 자신의 막료 양문개를 펑위샹에게 파견했다. 펑위샹 역시 북경정변 이후 논공행상에서 제외되고 장쭤린이 힘을 믿고 자신을 함부로 대하는 것에 불만을 품고 있었는데 때마침 쑨촨팡이 펑위샹을 형으로 모시겠다고 제안하며 자신의 가계를 적은 란보를 보내오자 반색하며 쑨촨팡과 의형제를 맺었다. 양문개는 펑위샹의 대표 단기주를 데리고 항저우로 돌아와 펑위샹이 가세했음을 알렸고 쑨촨팡은 크게 기뻐했다. 쑨촨팡은 또한 하남독판 악유준을 만나 합작을 타진했고 이에 악유준은 휘하의 국민군 제2군을 동원해 가세하겠다고 약속했다.

10월 7일, 쑨촨팡은 항저우에서 안휘, 강서, 복건, 절강, 강서 등 5개 성의 대표를 모아 회의를 열고 봉군 토벌 계획을 상의했다. 대표들은 쑨촨팡을오성연군 총사령관으로, 주음인을 부사령관으로 추대한 다음에 10월 10일에 검열을 핑계로 강소와 절강 사이의 태호에 병력을 집결시켜 거병하기로 결정했다.


3.2. 쑨촨팡의 역습[편집]


10월 10일, 쑨촨팡은 태호추조, 즉 태호에서 실시하는 가을 군사훈련을 핑계로 전군 발동 명령을 내리고 휘하 부대에 상하이와 난징을 공격할 것을 지시했다. 10월 15일, 오성연군 총사령관에 취임한 쑨촨팡은 소속 부대를 5로로 나누어 총공격할 것을 지시했다.

먼저 4사단이 송강에서 형사렴이 지키는 상하이를 공격했다. 난데없는 침공 소식을 들은 양위팅은 중과부적으로 쑨촨팡을 당해낼 수는 없으니 병력을 보전하는 편이 나을 것이라 여겨 형사렴에게 상하이에서 철수할 것을 지시했다. 10월 16일 쑨촨팡은 상하이에 무혈입성하고 쑨촨팡, 하초, 주음인의 연명으로 장쭤린을 성토하는 통전을 보냈다.

지난 수개월 동안 봉군은 살인과 약탈로 우리 인민을 고달프게 하였다. 추하고 더러운 행동을 한 것은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는 바이다. 그들은 많은 피를 뿌리게 해 중외에 비웃음을 사고 있다. (...) 때가 오늘에 이르러 나 쑨촨팡은 참을 수 있어도 병사들은 참을 수 없고, 병사들은 참을 수 있어도 인민들은 참을 수 없다. 오로지 장쭤린 한 사람만 토벌하면 된다.

10월 19일에 손군이 진강을 점령하여 난징을 위협했고 20일에 난징성벽 바로 밑에 이르렀다. 당황한 양위팅은 독군서에서 강소군 장령회의를 개최하였는데 양위팅은 천댜오위안, 백보산, 마옥인 등에게 평소와 다르게 예의바르게 대책을 청했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 양위팅에게 원한을 가지고 쑨촨팡과 결탁한 상태였다. 회의 내내 강소군 장령들은 양위팅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아 회의는 좋지 않은 분위기로 끝났고 양위팅은 참모장 짱스이와 상의하여 정희춘의 부대를 난징에서 철수시켜 전멸당하는 것을 피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정희춘의 부대가 움직이기도 전에 천댜오위안이 이를 눈치채고 방판의 명의로 연회를 베풀어 정희춘과 휘하 대대장들을 모두 불러모았다. 그리고 이들에 술에 취한 틈을 타서 모조리 체포하여 정희춘 부대를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무장해제시켰다.

사태가 완전히 글러먹은 것을 알게 된 양위팅은 비밀통로를 이용하여 난징을 탈출했고 강북 포구에서 기차를 타고 봉천으로 달아나며 장덩쉬안에게 연락하여 철수할 것을 지시했다.


3.3. 쉬저우 함락과 우페이푸의 거병[편집]


한편 안휘에 주둔한 여단장 유익비는 쑨촨팡의 기습을 당해 단양에서 수시간 동안 교전을 벌였으나 중과부적으로 패하고 승려로 변장해서 봉천으로 겨우 달아났다. 장쭤린은 유익비를 보더니 오히려 칭찬했다.

"너, 돌아왔구나! 잘했다! 듣자하니 스님으로 변장했었다며? 자식! 강남에서 너만 쑨촨팡과 8시간이나 싸웠고 다른 놈들은 지 애비애미가 담력을 적게 만들었는지 총 한방 쏘지 않고 전부 투항했다!"


오히려 패하여 달아난 장수에게 이런 말을 할 정도로 봉군의 붕괴는 엄청난 속도였다. 쑨촨팡은 패주하는 봉군을 추격하여 11월 8일, 봉군의 잔여부대를 격파하고 쉬저우를 함락시켰다. 이로서 강소, 안휘 2개 성에서 봉군은 완전히 섬멸되었고 쑨촨팡은 10월 21일 의기양양하게 난징에 입성했다. 손군은 산동성경에 이르자 진격을 멈추었고 쑨촨팡은 소절감환민 5성 연군 총사령관 자격으로 5개 성을 통치하는 남방의 대실력자가 되어 난징으로 돌아왔다.

한편 지난 2차 직봉전쟁에 패해 패잔병을 이끌고 남하했던 우페이푸는 1924년 12월 17일에 한커우에 도착했다. 우페이푸는 우창에서 10개 성 대표를 소집하여 호헌군정부 수립을 선포하고 중화민국을 대표하여 일체의 권력을 행사하겠다고 발표했지만 우한의 각 단체는 이를 반대했다. 이에 우페이푸는 우한을 떠나 정저우를 거쳐 악주에 이르러 반봉의 기치를 규합했다. 1925년 10월 20일, 오성연군 총사령관 쑨촨팡을 중심으로 소요남을 비롯하여 20여명의 장령들이 우페이푸에게 전문을 보내 공동으로 장쭤린을 토벌할 것을 정중히 청했다. 우페이푸는 이에 응해 10월 21일 14개 성 토벌연군 총사령관에 취임하여 반봉전쟁에 참전하여 하남성을 공격했다.

일단 악유준의 국민군 2군도 우페이푸에게 가담했으나 우페이푸는 펑위샹에게 원한이 있었고 악유준도 우페이푸가 속이 좁은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경계했다.


3.4. 반봉사건[편집]


사태가 다급해지자 장쭤린은 일본 외유를 떠났던 명장 궈쑹링에게 귀국을 촉구하는 한편 의견을 모았다. 양위팅 등 주전론자들은 일단 진격을 멈춘 쑨촨팡보다는 북방의 펑위샹을 제압하여 북방을 안정시킨 후에 다시 남방으로 진격하자고 제안했다. 이에 장쭤린은 동북군을 6개 방면군으로 개편하여 리징린을 1방면군단장, 장쭝창을 2방면군단장, 장쉐량을 3방면군단장, 장덩쉬안을 4방면군단장, 장쭤샹을 5방면군단장, 우쥔성을 6방면군단장에 임명하게 했다. 그런데 이중에서 제일 비대한 것이 3,4 방면군의 부대로 3방면군 부군단장 궈쑹링이 실질적인 지휘관이었다.

10월 22일 궈쑹링은 장쭤린의 간곡한 청에 귀국하였다. 3,4방면군은 텐진 남북철로연선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10월 24일 궈쑹링은 3방면군 사령부를 조직하기 위해 텐진으로 갔다. 장쭤린은 펑위샹이 쑨촨팡에 가담하려는 듯한 움직임을 보이자 11월 상순에 베이징의 병력을 증강시키는 한편 펑위샹과 화평교섭에 들어갔다. 이와 동시에 장쭤린은 궈쑹링리징린에게 국민군 공격 준비를 갖추어 협상결렬에 대비했으나 궈쑹링은 보경안민을 이유로 이를 거절했다.

궈쑹링은 남방진출에 명분이 없다고 주장하며 보경안민할 것을 주장했으나 장쭤린은 남진을 주장하는 양위팅의 의견만 수용하여 궈쑹링의 주장을 듣지 않았다. 결국 궈쑹링은 장쭤린 하야를 요구하며 반봉사건을 일으켰으나 일본 제국관동군이 장쭤린을 지원하면서 패배하고 부인과 함께 체포되어 총살당했다.


3.5. 직봉풍전쟁[편집]


한편 펑위샹과 리징린은 11월 25일 장쭤린 하야 요구 통전을 보내 궈쑹링에게 가세하는 듯 했지만 악유준의 국민군 2군과 손악의 국민군 3군은 궈쑹링과 이미 밀약했으니 리징린을 치지 말라는 펑위샹의 제지를 듣지 않고 리징린과 경솔히 충돌하였다. 이는 리징린과 악유준, 손악 사이에 원한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리징린은 중립을 취소하고 펑위샹과 싸우게 되었고 펑위샹은 궈쑹링을 도울 형편이 되지 못한채 궈쑹링과 밀약을 맺은 것만 세상에 탄로나고 말았다. 이에 장쭤린은 펑위샹을 소인배로 여겨 신속히 제거해야 한다고 마음먹게 되었고 펑위샹에게 원한이 있던 우페이푸는 반봉사건이 일어나자 장쭤린 옹호 통전을 보내 장쭤린과 손을 잡아 공동으로 펑위샹 토벌을 결심했다. 결국 펑위샹 토벌이 통전되면서 직봉풍전쟁이 일어났다.


4. 결과[편집]


이렇게 북방의 소요가 끊이지 않는 와중에 남방에서 중산함 사건으로 국민당을 장악한 장제스국민당의 1차 북벌을 선포하게 되면서 기존 북양군벌의 몰락이 시작되게 된다. 펑위샹은 이후 북벌에 합세하여 직예군벌과 봉천군벌에 대한 원한을 설욕한다.


5. 참고문헌[편집]


  • 중화민국과 공산혁명, 신승하, 대명출판사.
  • 군신정권, 진지양, 고려원.
  • 중국현대정치사론, 장옥법, 고려원.
  • 만주군벌 장작림, 쉬처, 아지랑이.
  • 곽송령의 "반봉사건", 송한용, 역사학연구 19권, 호남사학회.


6. 관련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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