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시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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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시헌의 수상 경력 / 보유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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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2010 광저우 아시안 게임 로고.svg
2010 광저우 아시안게임 야구 종목
금메달

2010



보유 기록
단일시즌 최다타석 무안타[1]
48타석


손시헌의 역임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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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시헌의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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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산 베어스 등번호 13번
홍원기
(1999.5.15.~1999)

손시헌
(2003~2006)


결번
결번

손시헌
(2009~2013)


허경민
(2014~)
NC 다이노스 등번호 13번
최재원
(2013)

손시헌
(2014~2019)


박준영
(2020~2022)
NC 다이노스 등번호 80번
김범준
(2019)

손시헌
(2020~2021)


박성재
(2022)
SSG 랜더스 등번호 번


손시헌
(2024~)


현역


A대표팀 참가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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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G 랜더스 No.
손시헌
孫時憲|Son Siheon

출생
1980년 10월 19일 (43세)
서울특별시 강서구
국적
[[대한민국|

대한민국
display: none; display: 대한민국"
행정구
]]

학력
서울화곡초 - 선린중 - 선린정보산업고 - 동의대[1]
신체
172cm|73kg|O형
포지션
유격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2003년 신고선수 (두산)
소속팀
두산 베어스 (2003~2013)
NC 다이노스 (2014~2019)
지도자
NC 다이노스 2군 수비코치 (2020~2021)
필라델피아 필리스 산하 마이너 연수코치 (2022~2023)
SSG 랜더스 2군 감독 (2024~)
병역
상무 피닉스 야구단 (2007~2008)[2]
정보 더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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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일직 손씨
등장곡
MC몽&서인영 - Bubble Love
ELLEGARDEN - Marry Me[A]
Moves Like Jagger(이상 두산 시절)
마룬 5 - Lucky Strike[A]
다이노코어 시즌 3 오프닝 - 우주를 향해(이상 NC 시절)
응원가
ELLEGARDEN - Marry Me[1]
에브리 싱글 데이 - Take My Hands[2]
마룬 5 - Lucky Strike[3]
함부르크 SV - Forever & Ever[4]
다이노코어 시즌 3 오프닝 - 우주를 향해[5][6]
구단 자체 제작 - 작사/작곡: M.H[7][8]
1. 개요
3. 지도자 경력
3.1. NC 다이노스 코치 시절
3.2. 미국 연수
3.3. SSG 랜더스 2군 감독
4. 플레이 스타일
4.1. 타격
4.2. 수비
5. 여담
5.1. 별명
5.2. 박경수 나비효과, 그리고 활약상
5.3. 이종욱과의 관계
5.4. 말말말
6.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前 야구 선수이자 現 SSG 랜더스 2군 감독. 선수 시절 포지션은 유격수.


2. 선수 경력[편집]




3. 지도자 경력[편집]


2019년 10월 11일 15년간의 선수 생활 은퇴를 발표함과 동시에 곧바로 지도자로서 팀에 합류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보직은 2군 수비코치. 지도자 연수 없이 곧바로 코치 역할을 맡는 것에 대해 팬들이 적잖은 우려를 표하기도 했는데, 코치 생활을 먼저 하면서 시스템을 파악한 후 해외 연수를 통해 부족한 부분을 채울 계획이라고 한다. 기간은 3년이다.


3.1. NC 다이노스 코치 시절[편집]


2019년 마무리 훈련에서는 많은 훈련량으로 선수들의 기본기를 향상시키고 싶은 코치가 되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으며,# 10월 29일 미국 마무리 캠프 출국 전 인터뷰에서는 팀의 10년을 이끌 유격수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기존에 있던 송재익 2군 수비코치가 폭행 사건으로 팀을 떠나면서 손시헌의 부담감이 가중되었다. 구단에서도 수비코치를 구할 것이라고 말은 했는데 아직까지는 감감무소식. 연수 경험도 없는 초보 코치가 수비 파트에서 육성을 해야 한다는 것에 대한 팬들의 우려의 시선도 있다. 다행히 김태룡이 수비코치로 합류하면서 이 부분은 해결됐다.



2군 스프링캠프에서 김철호, 김한별과 함께 훈련하는 영상

소속팀 NC가 2020년 한국시리즈에서 우승컵을 들어올렸지만, 2군 코치였기 때문에 엔트리에 없어 우승 현장에 참석하지 못했다. 선수 시절 준우승만 2005년 한국시리즈, 2013년 한국시리즈, 2016년 한국시리즈에서 3번 경험해서 우승 반지를 껴보지 못하고 은퇴했는데 아쉽게도 이번에는 1군 엔트리에 없어 그토록 원하던 우승의 순간을 지켜보지 못했다. 동갑내기이자 자신의 절친이며 마찬가지로 우승을 해보지 못하고 은퇴한 이종욱이 1군 코치로 엔트리에 합류해 우승 반지를 받은 것과 대비된다. # 자신은 절친 이종욱이 그 순간에 있었으면 됐다고 했지만 아쉬움은 있을 것이다. 이후 김택진 구단주가 2군 선수부터 코치, 직원들까지 모두에게 우승 반지를 준다고 해 그토록 원하던 우승반지는 낄 수 있게 되었다. #


3.2. 미국 연수[편집]


2021년 11월, 코로나 대유행이 다소 완화됨에 따라 손시헌이 그동안 미뤄둔 미국 메이저리그 코치 연수를 떠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3] NC 구단의 전폭적인 지원 하에 메이저리그의 선수 육성 시스템과 코칭 기술을 보고 배우는 시간을 갖는 것으로, 2021년 11월 기사에 따르면 NC 사정에 정통한 관계자는 “손시헌 코치가 12월 16일 출국해 미국으로 코치 연수를 떠날 예정이다. 최근 코로나19 팬데믹이 다소 소강상태에 접어들면서, 오래전부터 계획했던 미국 연수를 갈 수 있게 됐다”고 전했다.#

2022년 3월 이영미기자 인터뷰를 통해 오랜만에 근황이 전해졌다. 필라델피아 필리스 마이너리그 캠프에서 코치 연수를 받고 있으며, 가족들과 함께 미국 플로리다로 생활 터전을 옮겼다고 한다.



손시헌이 필리스에서 코치 연수를 받는 동안 팀의 수비 상태가 심각한 모습을 보여주면서[4] 빨리 코치 연수를 마치고 돌아와서 1군 펑고 좀 해달라는 팬들의 원성 아닌 원성이 컸었다.

3.3. SSG 랜더스 2군 감독[편집]


2023년 10월 31일, SSG 랜더스 2군 퓨쳐스 감독으로 간다는 보도가 나왔다.

이후 SSG 랜더스의 2군 감독으로 부임하였다는 공식 기사가 떴다.# 여담으로, 당일 아침에 김원형 감독의 경질과 대대적인 코칭스태프의 물갈이가 있었다.

선임 절차가 완전히 마무리되지 않아서 11월 1일부터 진행되는 마무리캠프 코칭스태프진에 합류하지 않았다.

일간스포츠 취재 결과에 따르면 SSG 2군 감독에 선임되면서 NC 다이노스 측에 연수 지원금을 반환였다고 한다.*

11월 2일 오전에 공개된 손시헌의 인터뷰 기사에 따르면 처음 SSG 랜더스의 제안을 받고 놀랐다고 하며 전신 SK 와이번스나 SSG 랜더스와 접점이나 인연도 없었고, 연수가 종료되는 대로 NC로 돌아갈 계획이었다고 한다. 제안을 받은 손시헌은 NC 다이노스 프런트와 상의를 했으며 김택진 구단주를 비롯, 프런트에서는 손시헌이 보장받은 보직이 2군 감독이면 축하해주면서 그쪽으로 보내주는 것이 맞다고 판단했다고 하며 김택진 구단주는 손시헌에게 "너무 좋은 기회다. 차후에 좋은 지도자가 돼서 다시 뵀으면 좋겠다"는 대인배적인 면모를 보였다고 한다. 또한 NC 다이노스 팬들에게는 죄송하고 감사하다는 입장을 보냈다.

11월 2일 선임 절차가 완전히 마무리되었다. 11월 3일 인천국제공항에서 출국해 가고시마 마무리 캠프에 합류하였다. 합류하자마자 총괄코치였던 이대수에게 인수인계를 받아 가고시마 마무리 캠프 총괄 지휘를 하게 되었다.

4. 플레이 스타일[편집]


2009 시즌 무렵에는 KBO 최고의 공수겸장 유격수로 평가받았는데, 2000년대 후반 유격수 판에서 박기혁은 공격력이 아쉽고, 강정호는 수비력이 다소 아쉽고, 나주환은 잦은 부상이 발목을 잡았기 때문. 그 덕분에 광저우 아시안 게임에서도 국가대표 주전 유격수로 발탁되었다. 다만 2012 시즌부터는 강정호가 압도적인 리그 최고의 유격수로 성장하며 백업이 되었고, 이후에는 김상수, 오지환 등과 강정호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에 진출한 이후에는 김재호의 타격 부문 성장과 강정호의 자리를 이어받은 김하성 등 어린 나이에 두각을 드러내는 유격수들의 등장으로 국대 자리는 내려놓게 되었다.


4.1. 타격[편집]




손시헌의 타격 폼[5]
타격 면에서는 상당히 공격적인 어프로치를 가져가는 편이다. 발이 느려 도루를 기대할 수는 없지만, 수준급의 컨택 능력과 그럭저럭 갭 파워 수준은 되는 파워[6]를 가졌고, 클러치 상황에서 극강 수준을 보여주고 있어 찬스에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스타일이라 할 수 있다.

2015년 초반에는 역대급 부진으로 인한 1할대 타율 탓에 지명수비, 1할 거포 등으로 불렸으나, 중반을 넘어서서 미칠듯이 끌어올린 타격감과 전에 없이 강해진 파워로 무려 13개의 홈런을 기록했다. 농담이 아니라 진짜로 NC 최고의 우타 거포라 불리고 있다.[7]


4.2. 수비[편집]


20-80 스케일에 80을 줄 수 있다는 강력한 어깨[8]와 큰 손, 안정적인 포구 동작과 물 흐르는 듯한 연계동작을 바탕으로 리그 정상급의 건실한 유격수 수비를 보여준다. 단신에서 기인한 짧은 리치와 스피드가 느리다는 단점 때문에 유격수에 최적화된 스타일은 아니지만 피지컬의 한계를 재능과 노력으로 극복해 리그 정상급 유격수 자리에 올랐다.



공격적인 핸들링을 통한 병살[9]
빠른 타구 판단과 강한 어깨를 앞세워 비교적 뒤쪽에 물러선 뒤 적극적으로 공에 달려드는 공격적인 수비를 펼친다. 제리 로이스터 감독은 "좌우 폭이 넓고 공격적이다"라며 손시헌을 KBO리그 최고의 수비수로 꼽기도 했다.기사

늘 믿고 보는 편안한 수비를 하는 편이지만 가끔씩 터지는 클러치 에러들이 있었다. 물론 유격수가 실책이 가장 많은 자리이기 때문에 실책 개수가 많은 것은 당연하나, 그 중 결정적인 상황에서의 에러들이 지금까지도 회자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2010년 플레이오프 5차전의 끝내기 실책성 포구미스[10]2013년 한국시리즈 3차전 실책.


5. 여담[편집]


  • 유격수 포지션에 대한 강한 자부심을 갖고 있다. 올스타전 때나 3루수로 잠깐 출전한 적이 있을 뿐 커리어 내내 유격수로만 뛰었으며, 어릴 때 부터 유격수 말고 다른 포지션은 매력이 없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 그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유격수의 자질은 유연성. 화려하고 강한 카리스마보단 부드러운 동작이 이루어 져야 최고의 유격수로 꼽힐 수 있다고 하면서 부드러운 수비를 보여주는 선수로 박진만김재호를 꼽기도 했다.

  • 나이를 먹을수록 더 신경 쓰게 되는 일은 체중 관리 라고 밝혔다. 손시헌은 유격수로 계속 뛰려면 순발력 유지는 필수라며, 단거리 러닝 훈련을 선호하는 편이라고 한다. 또 허리에 과부하가 걸리기 때문에 35살 이후로는 웨이트 트레이닝을 하지 않고 있다고.[11] 젊었을 땐 자주 근력 강화 운동을 했지만, 지금은 유산소 운동이나 줄넘기 등 기구가 아닌 몸으로만 할 수 있는 맨손훈련을 자주 한다고 한다.

  • 날렵한 몸을 유지하는 비결로는 역시 식단 조절을 꼽았다. 그렇다고 닭 가슴살만 먹는 극단적인 방법은 아니고, 경기 전에는 식사를 하지 않으며 야식도 먹지 않는다고 한다. 총각 시절에는 원정 경기 가서 동료 선수들과 같이 배달음식을 시키곤 했는데 아내가 야식을 안 좋아해서 그 영향으로 안 먹게 되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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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하 아시안 게임에 국가대표로 발탁되지 못하자 이에 반발한 팬들이 플래카드를 만들었는데 의도적으로 'Why not 손시?' 이라고 적었다. 바로 밑의 현수막은 제대로 써있고, 이 표기는 다니엘 리오스인터뷰를 인용한 것인데,[12] 이것이 잘못 와전되어 두산 팬들은 자기 팀 선수 이름도 제대로 모르는 얼빠들이라는 안 좋은 이미지가 생겨나게 된 계기가 되기도 했다. 다만 당시 기사에는 '앗, 이름이 틀렸다! 얼른 고쳐!'라고도 나와서 팬들이 오해할 만 했다. 이 후 엠팍에 올라온 후기에 따르면 현수막 제작업체 직원이 손시헌을 손시현으로 잘못 알아듣고 만들었다고 한다. 덧붙여 현수막을 제작한 사람은 나이가 어느 정도 있는 남성팬이다. 따라서 얼빠 운운하는 드립은 완전히 거짓이다.

  • 강정호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에 진출할 당시 강정호에 대해 소개하는 현지 사이트에서 강정호가 아닌 손시헌의 사진이 올라오는 헤프닝이 벌어져 졸지에 강제 메이저리그 진출을 했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오기도 했다.

  • 2015년 6월 12일, 마구마구2015에서 재평가로 신 엘리트카드를 출시했는데 그 중에 09 손시헌이 포함되어있어서 많은 유저들이 야알못이라고 비아냥대기도 했다.

  • 작은 키(170cm)에 비해서 손이 매우 크다. 세로 21.5cm, 가로 11.5cm. 기사 참조.

  • 과거 두산 시절 그의 패션센스가 팬들 사이에서 유명했는데, 빵모자에 선글라스, 패인 셔츠, 멜빵바지라는 패션 테러리스트의 모습을 보여주어 짤방거리가 되곤 했다. 불암콩콩코믹스에도 손시헌이 빵모자를 쓰고 나온다.빵모자 손시헌

  • 농구선수 양동근과 친분이 있다.[13] 종목은 다르지만 비슷한 시기 상무에서 군 복무를 했기 때문에 이 때 친해졌다고 한다. 또 손시헌의 아들이 농구를 좋아하기 때문에 비시즌에는 아들과 함께 양동근을 보기 위해 울산 현대모비스 피버스 경기 직관을 오기도 한다.

  • 마산깡패로 불리는 박민우가 때리지 않는 선수이기도 하다. 실제로 계속 롤모델이라고 언급했으며 심지어 라디오볼에 출연해 본인의 응원가를 불러달라고 했을 때도 손시헌의 응원가를 부를 정도로 손시헌을 존경한다. 손시헌이 홈런을 치고 덕아웃으로 돌아왔을 때 때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를 엄호하는 모습까지 보인다. 비시즌에는 손시헌과 함께 농구도 보러 다니고, 스프링캠프 때는 둘이서 그랜드 캐니언을 여행다녀올 정도로 성공한 덕후이다.[14] 더 자세한 내용은 박민우 문서를 참조. 그리고 우연히도 박민우는 손시헌이 은퇴한 후부터 잡음이 계속해서 나오고 있다. 2019년까지 쌓아왔던 좋은 이미지를 2년 연속 연봉협상 관련 논란, SNS 논란, 병역 특례 언플 등으로 모두 깎아먹었으며 NC 다이노스 원정숙소 방역수칙 위반 사건으로 화룡점정을 찍었다. 이로 인해 항간에선 손시헌이 제어기였던 게 아니냐는 우스갯소리가 나왔다.

  • 앱등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하며, 실제로도 두산에서든 NC에서든 항상 삼성에게 강했다. 두산에서 있던 11시즌 동안 유독 삼성 상대로는 3할을 기록하지 못한 적이 없을 정도로 통산성적에서 압도적인 기록을 뽑아내고 있다. 2005년부터 이상할 정도로 삼성 라이온즈와의 게임에서 강한 면모를 보이며 최준석 이후 오재원과 함께 대구 본즈로 자리잡았는데, 팀의 다른 타자들이 죽을 쑬 때 혼자서 멀티히트를 친다던가, 2013년 한국시리즈 때처럼 장타를 마구 때린다던가 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안타를 치지 못했을 경우에는 에러로 출루하기까지 하며 호수비 또한 작렬하는 편. 오죽하면 일부 삼성팬들 사이에서 2014년 FA 때 삼성에서 데려와서 2군에 고이 모셔두자는 의견까지 나오기까지도 했을 정도. NC 이적 후 2013시즌에 마산구장에서의 타율도 .313으로 높은 편이었다.

  • 하지만 삼나쌩이라는 인식과는 달리 가을야구에서는 가끔 실책 및 물방망이로 팀에게 결정적인 패배를 안겨줄 때도 종종 있었다. 2010년 플레이오프 5차전과 2013년 한국시리즈 3차전이 대표적이다.

  • 보이는 이미지와는 다르게 두산 시절까지는 팬 서비스에 대해 좋지 못한 소리를 들었다. 최준석, 양의지와 함께 두산 선수단 내에서 팬 서비스가 좋지 않기로 유명했으며, 친구인 이종욱이 팬 서비스가 좋았던 걸 생각하면 매우 비교됐을 정도. 다만 NC 이적 후에는 출근길에 싸인을 잘 해주는 등 팬 서비스가 좋아졌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

  • 나이에 비해 상당히 동안이다. 은퇴 당시 나이가 불혹이었는데 반해 30대 초반 시절의 외모를 꾸준히 유지해 온 편이다. 동안인 외모와 더불어 나이가 들어도 녹슬지 않은 유격수 수비 실력으로 인해[15] NC 팬들에게 신인 유격수로 불리기도 한다.

  • 은퇴 후 손시헌 만큼의 수비를 보여주는 유격수가 없었고 노진혁의 경우 평범한 타구는 그럭저럭 잘 처리하지만 '유격수' 치고는 아쉬운 수비 실력이었기에 NC 팬들은 꽤 자주 손시헌을 소환하며 그리워하는 편이다. 엔튜브 당장 현역으로 뛰어도 될 코치님은? 영상에서의 선수들의 평 또한 아직 수비 실력과 몸놀림이 한창이라고 한다. 2021 시즌에 김주원을 발굴해내면서 자연스럽게 소환 빈도가 줄었으나 아직 신인이고 실책이 많은 것을 감안하면 NC에서 가장 뛰어난 유격수는 여전히 손시헌이다.

  • 마룬 파이브의 러키 스트라이크를 등장곡으로 사용할 때. 보통 초구가 들어오고 나서 응원가가 연주되는 타 선수들과 달리 세계 야구 사상 최초로 등장곡과 응원가가 연동되는 선수였다. 채 타석에 올라서기도 전에 응원가가 울려퍼지는 모습을 보기 일쑤.[16]


5.1. 별명[편집]


  • 현역 시절 막바지에 팬들이 밀었던 별명은 고졸 유격수, 신인 유격수 이다. 40세가 된 2019 시즌에도 여전히 동안 외모와 경력이 무색하게 싱싱한 어깨, 그리고 탄탄한 수비력으로 안정적인 플레이를 보여주었던 손시헌에게 앞으로 20년 정도는 더 뛸 수 있을 거라고 붙여준 별명이었다.

  • 2015 시즌 NC 다이노스 갤러리에서 붙였던 별명은 거(포)유(격수). 2015년 9월 기준 나이테 클린업을 제외한 팀 내 최다홈런[17]을 기록 중이고, 윤성환에게 뽑아낸 데뷔 첫 연타석 홈런 등 은근히 임팩트가 큰 홈런을 여럿 기록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삼성의 홈구장이 대구 삼성 라이온즈 파크으로 바뀐 2016 시즌에 5:2 상황에서 바뀐 투수 심창민을 상대로 만루 홈런을 터뜨리며 단숨에 5:6으로 역전시킨 사례도 대표적이다.

  • 2016 시즌 롯데 자이언츠에게 15승 1패라는 현대 야구에서는 보기 힘든 상대 전적을 거둔 이후, 2017 시즌 미디어데이에서 주장 자격으로 참가해 "롯데와 8승 8패를 하면 억울할 것 같다"는 발언을 했는데, 시즌 상대성적이 7승 9패가 되어버리면서 꼴갤뿐만 아니라 모든 롯데팬에게 조롱하는 의미의 손억울 이라는 별명을 붙였다. 허나 팀은 준플레이오프에서 롯데 자이언츠에게 창단 첫 업셋을 거뒀다. 2017 시즌 NC는 롯데에게 정규시즌 열세 전적을 기록했지만 손시헌은 38타수 17안타 10타점, 타출장 .447/.475/.579 라는 진짜 억울할 수준으로 상당히 좋은 타격성적을 보여주었다.

  • 삼성 라이온즈만 만나면 압도적인 플레이를 보여주어 앱등이라는 별명이 붙여지기도 했다. 개인 통산 타율이 2할 5푼대의 타자인데 삼성을 상대로는 통산 3할 5푼이라는 무시무시한 성적을 기록하고 있으며 대 삼성전 타율이 가장 낮았던 2011년조차 .304라는 타율을 보여주었다. 심지어 삼성 상대로 누적 OPS가 1.5 가 넘어간다. 야구팬들 사이에서는 삼성 전력분석팀이 분석을 포기했다는 말까지 우스갯소리로 할 정도였다.

  • 문근영과 비슷하게 생겼다면서 국민 여동생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래서 몇몇 팬들은 손근영 혹은 문근영 친오빠라고 부르기도.

  • 두산 베어스 시절 별명은 부두목곰, 손션, 숏느님[18], 숏티브잡스[19], 옴니아 유저[20], 실책을 하는 등 삽질을 하면 숏레기가 되기도 했다. 그 외에도 포스트시즌 결정적인 실책을 저지른 탓에 이다손이라는 멸칭도 생기고 말았다.[21]


5.2. 박경수 나비효과, 그리고 활약상[편집]


박경수 나비효과를 받은 선수로 알려져 있다. 박경수는 당시 성남고등학교를 고교 정상으로 이끈 최고의 유격수였고, 한국의 국가대표 유격수 계보를 이어나갈 것이라는 기대까지 받던 선수였고, 하필 당시 LG 트윈스두산 베어스 양 구단은 유격수 자리가 동시에 공석이 된 차였다.[22]

두산은 어떻게든 최고의 유격수였던 박경수를 잡을 작정이었다. 그래서 성남고 시절 박경수와 키스톤을 이루었던 고영민을 2002년 2차 1순위 픽으로 지명하기까지 했다.[23] 그 다음해 어떻게든 박경수를 거액으로 잡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역시나 LG는 두산에게 있어 유망주 전쟁의 영원한 적이었다. LG에서 돈을 더 쳐주면서 박경수는 LG 트윈스에 입단하게 되었다.[24]

한편 손시헌은 '박경수가 오게 된다면 내가 설 자리가 없겠지'라고 판단하고 육성선수로 소정의 계약금까지 제시했던 LG를 뒤로 한 채 두산에 육성선수로 입단했다. 다만 박경수를 의식해서 두산을 선택했다는 사실은 어느 정도 맞지만 약간은 과장된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실제로는 고등학교 선배이자 비슷한 신체 조건을 가지고 프로에서 내야수로 성공했던 김광수 코치에 대한 믿음이 가장 크게 작용한 면도 있다. 앞에서 본 바 김광수 코치가 동의대 진학도 추천해 줬고, 동의대 연습을 보러 가서 감독과 손시헌에 관해 의논을 했을 정도였다. 그 뒤 2003년 7월부터 정식 선수로 승격해 곧바로 주전 유격수 자리를 꿰차고 1군에 모습을 보이기 시작, 2004년 본격적인 풀 타임 유격수로 활약한다.

비록 파워는 떨어지는 편이었지만 안정적인 포구 능력과 빼어난 강견을 바탕으로 덜덜거리던 두산 내야진을 안정시켰고, 2005년에는 타격에서도 개안하며 대한민국의 수준급 유격수로 변모하게 된다. 안경현과 키스톤을 이루다가 안경현이 1루수로 포지션을 옮기면서 고영민과 두산의 철벽 키스톤을 이루게 된다.

이 나비효과는 몇 년 후에도 이어져, 상무에서 제대하자마자 현대 유니콘스에서 방출당한 고교 동기 이종욱두산 베어스로 끌어들이게 되었고, 손시헌과 이종욱의 야구인생은 서로에게 영향을 계속해서 끼치는 상황으로 흘러가게 되었다.


5.3. 이종욱과의 관계[편집]



파일:시헌종욱14.jpg

왼쪽이 이종욱, 오른쪽이 손시헌. 2014년 3월 사진이다.

이종욱-손시헌, 전훈에서 꽃핀 우정
[인터뷰] 손시헌-이종욱, "우리는 사실 엇갈린 사이"
NC 지도자 된 '절친' 손시헌·이종욱
[이영미 人터뷰] 권오준 손시헌 이종욱, 절친 3인방의 야구와 우정
동반 은퇴식 앞둔 22년지기 이종욱-손시헌, "고생했고 잘했다","빨리 쫓아갈게"[손시헌 은퇴②]

고교시절부터 프로까지 오랜 세월 함께한 둘은 소울메이트, 영혼의 동반자라고 불리며 야구계 절친으로 매우 잘 알려져 있다.

손시헌과 이종욱은 선린인고 동기동창으로 두산 베어스에서 신고선수 신화를 함께 썼고, 2013년 시즌 종료 뒤 함께 FA 자격을 얻어 NC 다이노스에 둥지를 틀었다. 현대 유니콘스에 입단했지만 방출당한 이종욱을 위해 손시헌이 두산 베어스 입단 테스트를 주선한 적도 있으며 두산 시절에는 이른바 "화수분 야구"의 대명사로 불리기도 했다. 이적 후에는 젊은 팀 NC 다이노스에서 각각 외야와 내야의 사령탑으로서 두산 특유의 끈끈한 야구를 전수하기도 했다.[25]

손시헌은 이종욱을 친구이기 전에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외야수였고, 최고의 1번 타자라고 늘 얘기하고 다닌다. 이종욱이 은퇴하고 지도자 생활을 시작한 2019 시즌에는 코치님이라고 부르고 있다고 한다. 손시헌 "친구 이종욱이 그립네요"

둘의 인연은 선린인고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등학교 시절, 손시헌은 이종욱이 탄탄한 체격과 빠른 발, 다부진 외모로 어딜가나 눈에 띄어 친해지고 싶은 친구였다고 하며 이종욱은 손시헌이 키도 작고 곱상한 외모라서 야구를 잘 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팀에서 유일한 홍은중 출신 선수였던 이종욱이 고등학교 야구부 생활에 적응을 못하며 급기야 학교에 가지 않았고, 그때 손시헌이 그와 통화하려고 집으로 전화했다가 모친에게 이종욱의 결석 사실을 솔직하게 말하는 바람에 이종욱의 거짓말이 탄로나고 말았다고 한다. 당시 집에서는 이종욱이 야구하는 것을 반대했기 때문에 그때 손시헌이 이종욱을 붙잡지 않았다면 이종욱은 야구를 포기했을 거라고 술회한다. 이 사건을 계기로 둘은 가까워지게 되었다.

선린인고를 졸업한 후 이종욱은 영남대로, 손시헌은 뒤늦게 동의대에 들어가게 되었다. 대학 졸업 후 이종욱은 현대 유니콘스의 지명을 받았지만 손시헌은 지명받지 못했고, 고등학교 시절 인연을 맺었던 김광수 코치가 두산 베어스 코치를 맡게 되면서 손시헌에게 입단 기회를 주었다고 한다. 그래서 2003년 손시헌이 두산에 신고선수로 입단하게 되고, 그 해 7월부터 정식 선수로 등록되어 1군 경기에 나설 수 있었다.

반면 이종욱은 데뷔 첫 시즌을 마치고 상무에 입대해 병역을 마쳤으나 전역 직후인 2005년 말 현대 유니콘스에서 방출당했고, 이를 하소연하려고 친구인 손시헌에게 전화를 했는데, 그 때가 마침 구단 사무실에서 김태룡 단장을 만나 2006 시즌 연봉계약서에 사인을 하려던 순간이었다고 한다. 이종욱의 전화를 받고 손시헌이 김태룡 단장에게 이종욱을 데려올 수 있는 방법이 없냐고 물어봤고, 이종욱은 두산 베어스에 입단 테스트를 하러 가게 된다. 막상 이종욱이 테스트를 하러 잠실야구장으로 나가 보니 별다른 것이 없었는데, 그 이유는 손시헌이 김태룡 단장에게 "저보다 더 많은 연봉을 받아낼 선수이니 꼭 잡아달라"고 말했기 때문.[26]

2006년 말 상무 입대 전, 손시헌은 구단과 연봉협상을 하면서 자신의 연봉 인상분을 이종욱에게 주라는 제의를 하기도 했는데[27], 상무 제대 후 이종욱과 자신의 연봉이 같아진 것을 안 손시헌은 “입대 전에 한 말은 없었던 걸로 해달라”고 해 팬들에게 웃음을 주기도 했다.

서로 의견이 안 맞거나 할 때는 원수처럼 싸우기도 했다고 하는데, 오히려 다투고 나면 좋은 방향과 답이 나왔다고.#


둘의 우정은 이종욱이 출연한 배지현의 쓰리번트에서도 확인 할 수 있다. 이종욱이 경기 중 부상을 입어 기도가 막힐 뻔 한 순간 손시헌이 재빠른 응급처치로 목숨을 구해줬다고. "다치는 걸 보고 달려갔는데, (이종욱이) 의식이 없어 놀랐다"며, "목에서 피가 나더라. 응급 처지를 어떻게 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무의식중에 피가 흐르는 곳을 막았는데 나중에는 피가 입으로 올라왔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손시헌이 지압을 하자 입으로 피가 역류했고, 막혀있던 기도가 뚫려 이종욱이 숨을 쉬기 시작했다고 한다. 손시헌은 "이종욱이 병원으로 실려 갔고, 너무 걱정이 돼 경기를 빨리 끝내야 겠다는 마음에 내가 결승타를 쳤다"고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둘은 자녀들의 이름도 돌림자를 쓰고, 같은 아파트에 살면서 출근도 같이 하고, 한 차를 타고 출근한 적도 있다. 비시즌에 동반 가족여행도 함께 간 적이 있다고 한다.

이종욱이 선수 생활 은퇴를 한 2019 시즌에는 구단에서 계획한 은퇴식을 거절했지만, 손시헌이 2019 시즌 종료 후 은퇴를 선언하자 2020 시즌 중에 동반 은퇴식을 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5.4. 말말말[편집]


신고선수였기에, 다른 선수들과 차별점이 없으면 프로 무대에서 살아남을 수 없었다. 남들과 똑같이 연습해서는 앞서 나갈 수 없었다. 항상 공을 갖고 놀았다. 심심하면 공을 벽에 튕겼고 글러브질을 연습했다. 다리 밸런스가 맞게 움직이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이미지 트레이닝도 했다.

야구는 생각하고 움직이면 늦다. 몸이 먼저 반응하려면 엄청난 연습량이 필요하다. 그래서 ‘연습한다’가 아니라 ‘공하고 놀아야 한다’는 말로밖에 표현이 안 된다. 남들만큼 연습해서는 늘 수가 없었다. 이건 은퇴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2020년 7월 엔씨소프트 블로그 인터뷰


나는 그동안 여유라는 걸 모르고 살았다. 육성 선수로 출발한 덕분에 야구 인생 전체가 ‘생존’과 직결됐다. 어느 순간 지쳐있는 내 자신을 발견했다. 쉼 없이 달리기만 했던 삶의 끝이 보인 것이다. 이제는 그 달리기를 멈추고 또 다른 야구 인생을 만들어가려고 한다. 지도자의 밑바닥으로 내려가 단계를 밟을 것이다. 그 생활을 떠올리면 새로운 떨림이 전해진다. 무척 재미있을 것 같다.

2019년 10월 이영미기자 인터뷰, 선수생활 마지막 시즌까지 동행한 이동욱 감독한테 감사를 전하며.

[이영미 人터뷰] 코치 손시헌, “‘은퇴’라는 말을 할 수 있게 돼 감사하다”-<1>


선수 생활 중 큰 경기에서 실책한 적도 있고, 나 때문에 진 적도 있다. 그때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라는 생각에 집중했던 것이 지금까지 나를 견디게 해준 것 같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울 때라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반드시 있다.

동료 선수가 실수했을 때 감싸주고, “내가 병살 잡아 줄게”라는 이런 말 한마디 하는 것이 혼이 담긴 플레이, 최선을 다하는 플레이라고 생각한다. 야구는 팀원들이 “우리는 하나야” 하며 똘똘 뭉쳐 있는 분위기가 전력이 된다. 전력이 9인 팀과 1인 팀이 있을 때 1이 9를 이길 수 있는 힘은 선수들끼리 서로 도와주려는 강한 마음에서 나온다. 중심 선수들이 빠져도 버티고 우승까지 갈 수 있는 스포츠가 야구이다.

2020년 7월 엔씨소프트 블로그 인터뷰



6. 관련 문서[편집]


[1] 체육학 99학번. #[2] 2006년 11월 27일 ~ 2008년 11월 10일[3] 손 코치의 미국 연수는 NC와 마지막 FA 계약 당시 선수 측 요구조건 중에 하나였다. 당시 손 코치는 구단과 협상 과정에서 ‘은퇴 후 지도자 연수 지원’을 계약 조건에 포함시켰다. 그리고 2021년 겨울 코로나19 상황이 나아지자, NC는 계약대로 손 코치의 미국 연수를 추진하고 전폭적인 지원에 나섰다. 2019년 은퇴 직후 기사에도 해외 연수와 관련한 언급이 나온다.#[4] 특히 2023년은 시즌 초반 상당한 페이스의 실책을 기록했다.[5] 2016년 8월 4일 kt전 3루타.[6] 이는 상무 피닉스 야구단 제대 이후에 보이기 시작한 파워다. 입대 전에는 한 시즌 최다 홈런이 단 4개였다.[7] 팀 우타 선수 홈런 2위를 기록했다. 1위는 이호준.[8] 올스타전 이벤트로 벌어졌던 야수 스피드 킹 대회에서 손시헌은 최고 145km에 육박하는 강속구를 보였다.[9] 2018년 4월 10일 kt전.[10] 이 포구미스의 경우 워낙 타구가 느리긴 했지만 타자가 발이 그리 빠르지 않은 박석민이었기 때문에 당시 중계 중이던 허구연 해설이 타자 주자를 감안하면 손시헌이 너무 급하게 처리하려 했던 것이 아닌가 하고 평하기도 했다. 더군다나 5년 뒤 한국시리즈 4차전에서는 손시헌의 뒤를 이어 주전 유격수를 차지한 김재호가 9회 초 2사 만루 1점 차 상황에서 비슷한 타구 속도에 발이 더 빠른 구자욱이 타자였음에도 안정적으로 타구를 처리하면서 더욱 비교되고 있다.[11] 실제로 프로 선수들 중에도 유연성이나 순발력 유지를 위해 웨이트 트레이닝을 하지 않고 러닝, 스트레칭 등 유산소 운동 위주로 몸을 만드는 걸 선호하는 경우가 꽤 있다. 대표적인 케이스가 바로 임창용.[12] 그런데 광저우 국대에 선발되었을 때 영문 이름 표기를 정말로 Son Si-Hyun으로 등록했다.[13] 사실 양동근은 이범호와는 절친 사이고, 야구를 상당히 좋아하기로 유명하다.[14] 사실 13시즌에 끔찍한 수비실력을 가지고 있던 박민우가 리그 탑급 2루수가 된 것은 손시헌의 영향이 컸다.[15] 특히 유격수나 2루수가 35세 전후로 수비 범위가 급격히 좁아지거나 글러브에서 공을 빼서 송구하는 속도가 느려지는 등 노쇠화가 급격히 찾아오는 포지션이라는 걸 감안하면 상당히 롱런한 셈이다. 당장 두산에서 그의 후임 유격수였던 김재호의 급격한 노쇠화가 시작된 게 35세 시즌이었던 2020 시즌이었으며, 바로 이듬해인 2021 시즌부터는 주전 자리까지 박탈당했다.[16] 재밌는 점이라면 손시헌은 두산 시절에도 등장곡과 응원가가 Ellegarden의 Marry Me로 동일했다. 처음부터 그런 건 아니고 원래는 MC몽과 서인영의 Bubble Love를 등장곡으로 썼었다.[17] 11개. 2009년과 함께 개인 한시즌 최다 홈런이기도 하다.[18] Short+느님[19] 2012 시즌 유달리 삼성 라이온즈와의 경기에서 강하다고 두산 베어스 갤러리에서 나온 별명이다.[20] 2013년 한국시리즈에서 삼성을 상대로 미칠듯한 포스를 뽐내자 일부 네티즌들이 저런 파워는 옴니아를 써본 사람만이 삼성을 향해 내뿜을 수 있는 분노라며 붙인 별명. 손시헌의 통산 삼성 라이온즈 상대 전적을 보면 가히 천적 수준.[21] 이게 다 손시헌 때문이다를 줄인 말이다.[22] 각기 양 팀의 주전 유격수였던 유지현김민호가 노쇠화가 눈에 띄게 두드러진 상황이었다. 길어야 1~2년이라고 생각할 때, 최고의 유격수 유망주인 박경수가 절실한 상황이었다고 할 수 있다.[23] 박경수가 "영민이 형과 함께 뛰고 싶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당시 고영민이 고교 랭킹 1위의 2루수임에는 분명했지만, 투수 자원을 뽑았어야 한다는 지적이 있었다.[24] 두산이 3억 8000만원을 불렀는데, LG가 4억 3,000만 원을 부르면서 게임 끝. 열받은 두산은 2년 후 김명제에게 6억을 지르면서 박병호를 지명한 LG를 누른다. 하지만 김명제는 더딘 성장을 보여 실망감만 잔뜩 안겼고 설상가상으로 음주운전 사고로 하반신이 마비되어 야구선수로써의 활동을 마감했다.[25] FA 때는 반대로 이종욱이 손시헌을 설득해 같이 NC 다이노스로 이적하게 되었다.[26] 이외에도 당시 현대 프런트 과장으로 일하던 염경엽도 두산 측에 직접 연락해서 이종욱을 적극적으로 홍보했다고 한다. 팀 내부 사정으로 아까운 선수를 내보냈지만, 두산에서 자신의 몫을 해낼 선수라고 소개해줬다고 전해진다.[27] 2006년 당시 손시헌의 연봉은 1억 3천만원, 이종욱의 연봉은 2천만원이었다. 이종욱은 두산에 입단했던 당시 자신보다 연봉도 높고 팬들에게 인기도 많았던 손시헌이 부러웠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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