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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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오 제4대 황제
말황제 | 末皇帝

출생
242년
손오 단양군 건업현
(現 장쑤성 난징시)
즉위
264년 9월 3일
손오 단양군 건업현
(現 장쑤성 난징시)
사망
284년 4월 12일 (향년 42세)
서진 하남군 낙양
(現 허난성 뤄양시)
능묘
북망산(北邙山)
재위기간
손오의 황제
264년 9월 3일 ~ 280년 5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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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부춘 손씨

호(皓)
부모
부황 소헌문제
모후 소헌황후
형제자매
4남 1녀 중 장남
배우자
정실 황후 등씨
후궁 미인 장씨, 부인 장씨
자녀
34남

원종(元宗), 호종(皓宗)
별명
팽조(彭祖)
작호
오정후(烏程侯) → 귀명후(歸命侯)
제호
말황제(末皇帝)
연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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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흥(元興, 264년 ~ 265년)
감로(甘露, 265년 ~ 266년)
보정(寶鼎, 266년 ~ 269년)
건형(建衡, 269년 ~ 271년)
봉황(鳳凰, 272년 ~ 274년)
천책(天冊, 275년 ~ 276년)
천새(天璽, 276년)
천기(天紀, 277년 ~ 280년)


1. 개요
2. 생애
2.1. 즉위 이전
2.2. 폭군이 되다
2.3. 오나라 멸망 후
3. 가족 관계
4. 평가
5. 미디어 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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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삼국시대 손오의 4대 황제이자 마지막 황제. 시호가 없어서 말황제나 오정후(烏程侯) 혹은 귀명후(歸命侯)라고 불리기도 한다. 는 원종(元宗), 호종(皓宗). 별명은 팽조(彭祖)로 양주 오군 부춘현 사람.

손권의 삼남이자 황태자였던 손화[1]의 아들이다. 《삼국지연의》에서는 119회와 120회에서 등장한다.

사실 손호의 치세 기간은 엄밀한 의미에서 삼국 시대가 아니다. 손호가 즉위할 당시에는 이미 263년에 촉이 멸망하여 삼국 체제가 붕괴된 상태였으며 얼마 못가서 위도 멸망했기에 재위 기간 동안 서진과 함께 존속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서진 시대에 더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유선손권에 묻혀서 그렇지 재위 기간이 16년으로 꽤 길다.


2. 생애[편집]



2.1. 즉위 이전[편집]


아버지 손화가 승상 손준의 명령으로 자결한 후, 적모 장비(張妃)도 손화를 따라 죽었으므로, 친모인 하희에게 양육받았다.

경제 손휴 시대에 오정후(烏程侯)에 봉해졌다. 서호의 백성 경양이 손호의 관상을 보고는, 매우 고귀한 사람이 될 것이라고 했다. 손호는 속으로는 기뻐했지만, 티를 내지 않았다.

수신기》에 따르면 오나라 손량 오봉 2년 5월에 양선현의 이리산에서 큰 돌이 저절로 섰다. 이는 손호가 허물어졌던 선조의 가문을 계승하여, 다시 그 지위를 복위할 때임을 알려준 것이다. 오나라 손휴의 영안 4년 안오현의 평민 진초가 죽은 지 이레 만에 다시 살아나 무덤을 뚫고 나왔다. 오정후 손호가 망하였던 자신의 가문을 이어 받아, 제위에 오를 징조였다.

손휴가 죽을 때, 촉나라가 멸망했고, 남쪽의 변경인 교지에서는 반란이 일어나 국가가 혼란스러웠기에 사람들은 훌륭한 군주를 얻기를 희망하고 있었다. 만욱은 손호의 옛 친구였는데 그는 손호가 총명하다며 복양흥, 장포 등과 협의해 손호를 제위에 올리길 희망했다.

복양흥과 장포는 손휴의 아내, 주부인에게 손호를 후사로 삼도록 하라고 권유하였다. 주부인은 "나는 지아비를 잃은 과부인데, 어찌 사직의 걱정을 알겠습니까? 단지 오나라가 멸망하지 않고 종묘가 의지할 곳이 있으면 됩니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그들은 손호를 제위에 올렸다. 황제가 될 당시 손호는 23세였다.


2.2. 폭군이 되다[편집]


손호는 즉위 초에는 선정을 베풀어서 현명한 군주로 칭송받았다. 그런데 이게 3개월도 못 갔다. 오히려 폭군이 되어 보천의 건의로 건업에서 무창(우한)[2]으로 천도하고 토목 공사를 자주 일으키며 향락과 주색잡기에 빠졌다. 또 국고가 바닥나는데도 사치를 부렸고, 화리를 공격하러 가면서 수많은 후궁들을 데리고 진군하다가 추위를 이기지 못한 병사들의 반란 모의를 듣고 돌아오기도 했다. 손호의 애첩들도 막장이어서 어떤 여자는 사람을 시장에 보내 백성들의 재물을 빼앗기도 했다.

266년 손호가 무창(武昌)에 있을 때, 오흥군(吳興郡)의 시단이라는 사람이 자기 백성들이 고달파하는 것을 기회로 삼아 10,000여명의 백성들을 이끌고 손호의 이복동생인 손겸을 협박하여 건업으로 가서 손겸을 황제로 세우려고 했다가 정고제갈정에게 토벌되었다. 손호는 동생을 독살하였고 그의 모자를 모두 죽였다. 또 다른 동생 손준(孫俊)은 장승의 외손자로 곧 손화의 적자였는데, 총명하여 말재주도 뛰어나 멀리서까지 칭찬이 자자했으나 손호는 그도 죽였다.

당시 화핵의 상소를 보면 대제 손권 이후의 오나라의 막장 상황이 그대로 드러나는데, 손권이 죽은 이후부터 권신들이 정권을 전횡하며 안정과 생존의 근본을 잃게 되었고, 한 순간의 이익만을 추구하며, 여러 차례 군대를 일으켜 창고에 쌓아놓은 것을 기울여 다 사용하였으며, 병사들은 수고하고 백성은 빈곤하게 되어 한시도 안정을 얻지 못하게 되었으며 지금 생존하고 있는 자들은 부상을 입고 남은 무리들이고, 고통과 슬픔이 있는 백성뿐이라서 군용물자는 텅 비게 되었고, 창고는 부실하며 베나 비단을 내리는 것은 추위와 더위를 막기에 넉넉하지 못하며, 게다가 산업을 잃어 가가호호가 곤궁하고 굶주린 사람들이 관청의 공급에 의지하여 구제되고 있다고 했다.

또 그는, 경도(都)의 많은 관원들이 각자 백성을 징용하면서 백성의 힘을 헤아리지 않고 있어 항상 규정된 한계 가까이 이르고, 추수할 달이 되면 기한 내에 부세를 납입하도록 질책하며 관원들은 백성들의 파종할 시기를 빼앗았지만, 금년의 세금을 재촉하고, 만일 체납하는 자가 있으면 재물을 기록하여 몰수했기에 백성들이 빈곤하며 입을 것과 먹을 것이 부족하다고 했다. 지금 창고는 부실하고 백성은 노역을 하고 있으며, 굶주린 자가 먹을 수 없고, 수고로운 자가 휴식할 수 없으며, 공로 있는 자가 상을 받을 수 없으니, 군주는 백성의 세 가지 희망을 저버렸기 때문에 원망하는 마음이 생기고 공을 세우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이정도면 가히 오나라는 손호 때부터 이미 망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특히 손호는 살인도 밥 먹듯이 해서 그가 죽인 인물들은 다음과 같았다
  • 복양흥, 장포: 손호를 제위에 올린 것을 후회했다가 손호에게 주살당하고 삼족이 멸해진다.
  • 서소: 항목 참조.
  • 주부인, 손만, 손공: 265년 7월, 손호는 손휴의 아내였던 주부인을 핍박하여 죽였다. 주부인의 시신을 정전에서 장사지내지 못하게 하고는 병들어 죽은 것처럼 꾸몄다. 또한 손휴의 네 아들을 오의 작은 성에 몰아넣고, 나이가 많은 순으로 둘을 죽였다.
  • 이욱, 서존: 270년에 이욱과 서존이 교지를 정벌하러 가는 길에 건안 길이 불편하다고 풍비를 죽이고 돌아오자 하정은 이 일을 손호에게 알려 이욱과 서존의 가족들까지 모두 사형시키게 한다.
  • 장미인: 아버지를 죽인 것에 대해 원망의 말을 하자 때려 죽이고[3] 그녀의 언니 장부인을 새로 후궁으로 삼았다.
  • 장준, 손분, 손봉: 270년에 손호의 좌부인(장부인)이 죽자 손호가 너무 슬픈 나머지 집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심지어 손호가 죽었다는 소문이 돌면서 손분(손권의 오남)과 손봉(손소의 아들, 손책의 손자) 둘 중 하나가 뒤를 이어야 한다는 풍문까지 돌았다. 장준은 이 말을 믿고 손분에게 미리 잘 보이기 위해 손분의 어머니 중희의 묘를 청소했는데, 이 일이 손호한테 알려지면서 장준의 삼족이 멸족되었다. 또한 손분, 손분의 다섯 아들, 손봉도 주살되었다.
  • 만욱,[4] 유평, 정온: 271년에 만욱, 유평, 정봉이 손호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자기들끼리 정무를 보기로 약조했는데 이 발언이 손호의 귀에 들어가서 272년 연회에서 만욱과 유평에게 독주를 보내 죽게 만들었다. 이 시점에서 정봉은 이미 사망한 상태라 아들 정온이 대신 처형당했다.
  • 왕번: 항목 참조.
  • 하소: 항목 참조.
  • 위소: 항목 참조.
  • 장상[5]: 항목 참조.
  • 누현, 누거: 항목 참조.
  • 차준, 장영: 항목 참조.
  • 웅목: 항목 참조.

그가 총애했던 간신들은 다음과 같았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대부분 손호 자신이 죽였다.
  • 잠혼 : 《연의》에선 환관이지만 정사에서는 아니다.
  • 장숙 : 손호에게 죽었다.
  • 하정 : 손호에게 죽었다.
  • 진성 : 손호에게 죽었다.
  • 조보 : 육개의 상소에서만 언급되는 간신.
  • 하희 : 손호의 모친. <등부인전>에 따르면 모친 하씨(하희)가 손호를 항상 좌우했다.
  • 하식, 하홍, 하장 : 손호의 외가족으로 권세를 믿고 교만하고 방자하게 굴어 백성들이 근심했다.

화핵육개 같은 자들이 이런 행위를 막기 위해 상소문 수백장을 올렸지만 손호는 모두 무시했다. 나중에 육개는 육항이 외지에서 많은 병사를 이끌고 있어 어찌하지 못했지만 육개와 육항이 연달아 죽자 그의 가족을 모두 귀양보내고 화핵 또한 얼마 못가 면직시켰다.

그리고 손호는 신하들을 모아놓고 주연을 베풀면, 항상 모두가 취해 쓰러질 때까지 마시게 했다. 할아버지한테서 가장 안좋은 것만 물려받았다... 그때 환관들을 시켜 이들을 감시하게 했고, 거나하게 취한 신하들에게 황제의 뒷담을 유도하는 등 속마음을 떠보게 했다고 한다. 여기서 불평불만을 하거나 폭언을 하는 신하들을 골라냈으며 정도의 차이에 따라 목을 베거나 벌을 주었다고 전한다.

후궁은 수천 명이나 되었는데 오나라는 제대로 된 후궁제도가 없었으므로 손호는 후궁들에게 황후의 인새를 마구 나누어 주었다. 또, 궁안으로 물살이 센 물을 끌어들여 궁녀들 가운데 그의 마음에 들지 않는 자는 모두 죽여 그 물로 흘러가도록 했다. 또한 형벌도 아주 가혹해서 사람의 가죽을 벗기거나 발을 끊거나 사람들이 곁눈질하고 쳐다보는 걸 싫어하여 사람의 눈을 뽑았다고도 한다. 다만 <손호전>의 주석에 따르면 서진의 시중 유준(庾峻)[6] 등이 손호의 시중 이인(李仁)에게 이게 정말 사실이냐고 물었는데 이인은 전해진 게 잘못된 것이며 천하의 악이 모두 그의 탓으로 돌려지기 때문이고 또 설령 그런 일이 있었다고 한들 손호가 죄인을 벌할 권리가 있고 곁눈질하는 건 신하로서 오만무례한 것인데 죽인다고 해도 무슨 문제가 있느냐고 해 물은 사람들이 수긍했다고 한다.

그러나 손호가 사람을 잔인하게 죽인 게 와전이 되었다고 해도 막장은 막장이었다. 시기가 얼마나 막장이었으면 설영 같은 경우는 손호 정권에서 높은 직위에 올랐다는 까닭만으로 진수에게 의심스럽다는 평을 받았을 정도. 진수는 손호가 부당한 형벌을 남용하였으므로, 죽거나 쫓겨난 사람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고 아래 사람마다 두려워하여 모두 하루하루 생명을 보존하기를 원하고, 아침에 저녁의 일을 헤아리지 못했으며 사납고 미련하며 잔혹한 법령을 마음대로 시행하여, 충성스럽게 간언하는 신하를 주살하고 참언하고 아첨하는 자는 승진시켰으며, 그 백성들을 학대하여 부리고, 음란하고 사치스러움이 극에 달했으니, 마땅히 허리와 머리를 분리시켜(...) 백성들에게 사죄시켜야 했고 은혜를 지나치게 베풀었다고 했다.

손성 역시 손호의 죄는 떠돌이 도적같고 잔학함은 주왕걸왕을 넘어섰으니 그냥 닥치고 효수해서(...) 원혼들에게 사과했어야 한다며 귀명후라고 우대한 것은 잘못이고 천벌을 행하여 죄 지은 자를 쳐서 억울하게 죽은 백성들을 조상(弔喪)하지 않았으니, 사납고 혹독한 자에 대한 계율이 없게 되었다며 당시 서진 정권을 깠다. 진수와 손성은 하다못해 후주 유선에 대해서도 암군, 혼군이라고 까긴 했지만 참수, 요참하라는 말까진 하지 않았는데 손호는 볼 것도 없이 바로 인수분해(...)해서 천하에 사죄시켰어야 한다고 했을 정도면 손호가 얼마나 막장이었는지 알 수 있다.

상광이란 점술사가 손호에게 수레를 타고 낙양에 입성할거라 예언을 하자,[7] 나라 사정은 생각지 않고 서진을 공격할 생각을 했다. 그리고...

이 당시 진나라에서도 오나라의 막장 상황을 알고 있었는지 사마염에게 올린 보고서 중 하나에는 "지금이 아니면 오나라를 멸망시킬 수 없습니다. 손호가 집권한 지금이 절호의 기회입니다."가 있을 정도였다. 실제로 합비와 건업 사이에 흐르는 강은 사실 아무도 건너지 못한 강이었다. 손권장료에게 얻어터지기도 했으나 반대로 조휴서성에게 얻어터졌으며 조진하후상 역시 반장에게 얻어터진 곳이 거기였다. 이런 난공불락의 요새인 건업도 손호가 다스리는 곳이라서 함락시킬 수가 있다는 말이 있었으니 손호의 됨됨이가 얼마나 막장인지 알 수 있다. 다만 합비나 건업이 워낙 난공불락인지라 실제로 사마염은 공격루트를 교주로 선택했고 그것도 곽마가 반란을 일으킨 틈을 타서 오나라를 절묘하게 멸망시켰다.


2.3. 오나라 멸망 후[편집]


결국 280년에 사마염(晉)에게 대공격을 받아 오나라는 멸망한다. 손호는 왕준, 사마주, 왕혼에게 각각 사자를 파견해 항복 의사를 전했다. 그는 '한나라가 천하를 통치할 능력을 상실하고 구주가 분열되었을 때, 내 조상들은 강남을 차지했는데 지금 대진은 천자가 일어나 은덕을 사해에 펼쳤으며 어둡고 우매하여 구차하게 편안하려고 하여 천명을 아직 깨닫지 못했으나 오늘에야 이르러서야 천자의 육군을 두려워하게 되었고, 감히 천조의 넓은 도량과 빛나는 은덕에 기대 머리를 숙여 귀순하겠다'고 했고 이게 받아들여져 백성들을 구제하기를 희망할 뿐이라고 했다.

그리고 <강표전>에 따르면 외삼촌 하식에게 '하늘이 오나라를 망하게 한 것이 아니라 내가 망하게 했고 무슨 얼굴로 선대 4명의 황제를 뵈어야 하느냐!'고 편지를 보냈고, 신하들에게는 '자리에 있는 여러 해 동안 정교가 흉패하여 마침내 백성들로 하여금 도탄속에 궁핍하도록 만들었으며 스스로 궁실에 거하면서 무거운 질병을 끌어안고 계책이 부족하며 생각하는 바가 중도를 벗어나 많은 것이 황당하고 참람했고 주변의 소인들로 인해 참혹함이 생기고 포학한 독이 횡류하니 충성스럽고 순종하는 사람들이 해를 입었으며 어두워서 깨우치지 못하고 그 막힌 바를 찾아보니 내가 그대들을 저버린 탓이라고 했고 초나라를 버리고 한나라를 섬긴 장량진평처럼 서진의 조정에서 출사하라'고 편지를 보냈다. 최소한 자기가 나라를 망쳤다는 자각은 있었던 듯 하다.

280년 3월 15일, 왕준이 가장 먼저 도착해 손호의 투항을 접수하고 그의 결박을 풀어주며 관을 불태웠다. 사마주는 손호가 자신에게 인수를 주었기 때문에 사자를 파견해 손호를 돌려보냈다. 서진군에게 붙잡힌 손호는 가족들을 데리고 서쪽으로 옮겨 5월 1일에 낙양으로 압송되었으며 사마염은 그에게 귀명후(歸命侯)의 칭호를 내렸다. 또 손호의 태자 손근을 중랑으로 임명하고, 아들 중에서 왕으로 봉해진 자는 낭중으로 임명했다. 의복과 수레, 밭 30경을 주고 해마다 곡물 5,000석, 돈 50만 전, 비단 500필, 솜 500근을 주도록 했다. 《진서》 <무제기>에 따르면 오의 옛 명망 있는 사람들은 재능에 따라 순서대로 발탁하고 옛 오나라 황실인 손씨와 대장 중 사망한 가솔은 수양(수춘)으로 이주시켰다.

그래도 진나라에 끌려가서 바보짓만 한 유선과는 다르게 비굴한 모습을 보이진 않았다. 예를 들면 낙양에 끌려가 사마염 앞에 무릎을 꿇은 손호에게 사마염이 '짐이 이런 자리를 만들어놓고 그대가 오기를 기다린 지 오래다'고 하자 손호는 '신도 남쪽에서 이런 자리를 만들어 놓고 폐하를 기다렸습니다'고 받아넘겼다.

똑같은 항복 군주라 할지라도 유선은 정말 심하다 싶을 정도로 사마염의 말을 잘듣고 고분고분하게 완전히 순종했는데에 비해[8] 손호는 이런 식으로 사마염에게 계속 딴죽을 걸며 그를 부정하려 들었다. 하지만 사마염은 이를 진지하게 여기지 않았으며 손호를 일종의 코미디언 정도로 보았다.[9]

가충에게 왜 사람 얼굴을 벗겼냐는 조롱을 받자 "남의 신하가 되어 그 임금을 해치려드는 무리는 그같이 벌해야 마땅하다"고 쏘아줬다고 한다.[10] 이는 위나라 황제 조모사마소를 토벌하기 위해 궐기했을 때 가충이 이끄는 병사에게 조모가 살해당했던 사건을 은근히 암시하는 것으로 우회적으로 가충을 공격한 것이다.

일설에는 이것을 질문한 자가 가충이 아니고 왕제라고 하며 사마염과 왕제가 바둑을 둘 때 질문한 것이라고 하는데 왕제가 손호에게 "듣기로 당신은 사람의 얼굴 가죽을 벗기고, 사람의 발꿈치를 자르는 것을 좋아한다고 하던데 왜 그런 것인가?"라고 질문하자 손호가 대답하길 "신하가 군왕에게 무례하면 그것은 낯짝이 없는 짓이다. 그래서 그의 얼굴 가죽을 벗기는 것이 가장 적합한 벌이다." 그리고 당시 왕제의 두 발이 곧게 펴져서 사마염에게 닿을락말락 하니 그것도 추가로 조롱하는 패기를 보여준다.

세설신어》에서 나온 일화로, 또 한번은, 사마염이 여러 신하들을 불러서 연회를 베푸는데, 가무로 흥을 돋구고 있었다. 이때 손호에게 "듣기로 너희 오나라의 음악이 괜찮고, <이여가>(爾汝歌)[11]를 즐겨 부른다는데, 귀명후(손호), 그대가 한 수 불러주면 어떤가?" 그때의 가치관으로 보자면 손호는 항복했음에도 일국의 군주였으니 배우처럼 노래하게 시키는 것은 모욕적인 일. 하지만 손호는 정말로 노래를 부른다.

옛날에는 와 이웃이었는데, 지금은 의 신하다. 에게 술 한잔을 올리니, 는 만수무강하라.

(昔與爲隣, 今與爲臣, 上一杯酒, 令壽萬春)

당연히 일국의 황제에게 하기에 너무나도 무례한 내용이다. 하지만 손호의 이 대응을 좀 더 해석하자면 는 스스로 짐이라고 부르지만, 나는 너(汝)라고 부르겠다. 이건 가 나에게 그렇게 하라고 한 것이니,[12] 의 잘못이다.[13] 자신의 체면을 지키면서 상대방을 무안하게 만들 수 있는 뛰어난 대응으로, 이런 것을 볼 때 여러모로 대비되는 촉한과 동오의 최후 군주스러운 일화들이다.

다만 손호의 이런 모습을 근거로 그의 패기나 비굴하지 않은 면모를 너무 고평가하는 것도 곤란하다. 당대의 명분론적으로 보건 현대인도 이해하기 쉬운 현실주의적 관점에서 보건 일국의 황제였던 자가 적국에 투항하여 무릎꿇고 칭신하며 목숨을 구걸하고 살아남은 것으로 이미 더할나위없이 완벽하고 철저하게 비굴한 모습을 보여준 셈이고, 이렇게까지 비굴한 모습을 보인 이후에 말재주를 좀 부려 자신의 체면을 지키고 상대를 무안하게 만들었다고 해 봤자 참기름 한 드럼통 쏟고 깨알 두어개 주운 셈이다. 차라리 나라가 망했어도 어떻게든 재기할 기회라도 노렸다면 그거야말로 비굴하게 굴복하지 않는 당당한 모습을 보여준 셈이겠지만... 그랬으면 당연히 사마염이 손호를 살려두지 않았을 것이다. 애초에 손호가 보여준 패기있는 모습이란 것도 진짜 뭘 하겠다는 뜻이 아니라 내가 힘이 없어서 정복당하기는 했지만 너를 마음속으로 존중할 생각은 없으니까 죽이던 살리던 맘대로 하라 정도의 의사표현에 불과했기에 손호가 대놓고 개기는 것을 뻔히 보면서도 굳이 죽일 필요가 없어서 가만히 놔뒀던 것. 그리고 손호 본인도 어차피 자기 기반이 없는 걸 아니까 무슨 짓을 해도 사마염을 직접 죽이려고 들지만 않으면 사마염이 성격파탄자가 아닌 이상 자신을 내버려둘 거라는 걸 알고 막나간 것이라고 보는 게 맞다. 말하자면 개인 수준에서는 재치도 있고 담력도 있는 인물이었다고 인정할 수 있겠지만 이게 황제였던 자로써 패기있는 모습이라 보기는 어렵다. 손호가 일반 황족이었다면 멋지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겠지만.[14]

그렇지만 낙양으로 간 지 4년 만인 284년에 죽었고, 북망산에 묻혔다. 그리고 그의 무덤 바로 옆에는 훗날 백제의자왕이 묻히게 된다. 또한 유선이나 고구려연남생, 연남산 형제도 여기에 묻혔다.


3. 가족 관계[편집]




4. 평가[편집]


무제 사마염 앞에서 처신을 최악으로 하고도 사마염이 그를 죽이기는커녕 오히려 일국의 군주다웠다며 대놓고 우대했다. 무능함을 확신하게 해준 유선조차도 지속적인 감시를 받았고, 후손들도 집단이주시켜 계속 감시하고 있었던것과 대비된다. 이는 역설적으로 이 자가 사마염에게, 그리고 당대의 다른 이들에게 어떤 평가를 받았는지 알 수 있다.

오의 멸망에 있어서 손호의 구실은 결정적인 것으로 평가받으며, 배송지손권 최악의 뻘짓인 이궁의 변에 대해서도 어차피 태자인 손화가 제위를 물려받으면 그 다음은 손호니까 오의 멸망은 정해져 있었음이라고 평가했을 정도다.[15] 단 이는 손화를 폐한 것이 옳았다기보다는 이궁의 변보다도 손호가 끼친 악영향이 동오 멸망에 더 결정적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봐도 손호가 즉위한 것 자체가 이궁의 변으로 오나라의 정치 시스템이 망가졌기 때문에 벌어진 결과물이라 이궁의 변이 동오의 멸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이나 다름이 없다.

물론 진나라 사관인 진수가 정당성을 위해 손호를 폭군으로 날조했을 가능성도 의심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는데 손호 시기에 수많은 신하들이 어처구니없이 죽임을 당한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날조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 무엇보다 진수가 기록하지 않은 조모의 살해 과정의 경우 배송지가 다른 사서를 인용해가면서 내용을 추가하여 비판했지만 손호에 있어선 그런 것도 없었다. 즉위 석달만에 복양흥장포 같은 공신들을 죽이고 삼족을 멸하는 스케일의 사건을 날조할 수 있을 리는 만무하고, 나라 꼴이 개판인데 5,000명의 궁녀를 두는 등의 막장 행각도 검증이 된다는 사실[16] 또한 감안해야 한다.

다만 위에서 이미 언급했듯이 손호의 성격의 형성에 부모의 억울한 죽음이 어느 정도는 작용했음을 감안하면[17] 애초에 손권이 이궁의 변이라는 병크를 저지르지만 않았어도 정상적으로 성장했을지도 모른다.

무능하고 어리석긴 해도 최소한 나쁜 사람 취급은 받지 않아 동정론이 있는 유선과는 달리 손호는 평범한 폭군으로 평가된다. 유선은 비록 무능할지언정 유선 자신이 직접 나라를 말아먹진 않았다는 점에서[18] 둘은 암군폭군의 차이를 설명하기 좋은 예시 중 하나다. 폭군보단 차라리 암군이 낫다는 예시이기도 하고.

나라를 중흥시키려고 노력했다는 평도 있지만, 이것도 말이 안 되는 게 이때 오나라는 그냥 헬게이트였다. 이 시기 일어난 반란이 적지 않았으며, 특히 교주 같은 경우는 아예 진나라 쪽으로 넘어갔었던 적도 있었다.[19] 잦은 토목 공사, 자주 바꾼 연호, 여러 번 이루어진 천도, 많은 숙청 등으로 보았을 때, 황제로서의 중앙 집권이나 권위에 다소 집착하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게다가 중신 육개나 정봉 등이 손호를 폐출하려는 시도나 손호를 빼고 정무를 보자고 담합을 했다는 것[20]은 이 인물이 황제로서 멀쩡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애초에 280년에 망한 것도 오나라가 잘해서 280년에 망한 게 아니라, 원래 오나라를 먼저 잡으려다가 유선이 황호에게 권력을 밀어주고 촉한 내부가 무너져가는 걸 보고 지금 멸망시켜야 후환이 없다고 생각해서 사마소가 촉한으로 목표를 수정한 점. 뒤이어 선비족 독발부의 수령 독발수기능의 난이 터져서 서진이 오를 공격할 여력이 없었다는 점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합비라는 지형적 특성 상 난공불락이라서[21] 손호는 거의 날로 먹다시피 하면서 진나라에 대해 방어하는 게 가능했는데 정작 곽마가 난을 일으킨 것이 원인이 되어 일남이 뚫려버리자 초고속으로 멸망해버린 것이다. 만약 합비가 오나라 방향으로는 진출하기 쉬운 지형이었더라면 손오가 즉위한 지 얼마 못 가 오나라부터 털렸을 것이다.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삼국지》판 연산군이라 하면 비슷할 것이다.


5. 미디어 믹스[편집]



5.1.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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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9, 10, 11

파일:external/san.nobuwiki.org/0519.jpg
삼국지 12, 13, 14

삼국지 3에서 처음으로 등장했는데 6탄까지는 능력치가 조금 구린 정도였지만 7부터 능력치는 백하팔인 중 하나에 낄 정도로 나빠졌다. 그런데 12탄부터는 다시 쓸 만하다.

촉한이 멸망한 이후인 264년에 즉위하기 때문에 시리즈에 따라서 일반적으로 최대 263년까지의 시나리오만을 다루는 삼국지 시리즈의 특성 상 손호가 초기부터 군주로 등장하는 시나리오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단 9탄은 제외.

삼국지 3에서의 능력치는 육전지휘 69/수전지휘 23/무력 70/지력 62/정치력 51/매력 46로 이 시리즈에서만은 반장과 비슷한 능력치이다. 그러나 후반부 인물에게 박한 코에이답게 작은 할아버지인 손익보다 모든 능력에서 밀린다.

삼국지 6에서 그나마 무력과 매력이 70대 후반으로 무기 좋은 거 하나 껴주면 거의 90 가까이는 상승한다.

삼국지 9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10/무력 31/지력 40/정치력 10. 혼란과 매도가 있다고는 하지만 누가 당해줄까. 몽충이 있으니 후반기 시나리오, 영웅집결에서 배 셔틀이나 시키자.

삼국지 9의 if 시나리오 중 하나인 264년 서촉 동란 시나리오에서 손호가 군주로 등장한다. 진나라와의 규모, 인재 차이는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며, 무엇보다 이때가 되면 S급 장수들은 육항 빼고 모두 사망한 상황에다 새로 등장하는 장수들은 B급인 모경, 육경, 양직 3명뿐이고, 발탁 무장마저 군주의 의리과 야망를 그대로 이어받는지라 오 처지에서는 암담함의 연속.

삼국지 10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13/무력 28/지력 30/정치력 5/매력 4로 백하팔인의 한 자리를 차지하였다. 총합 80은 유선보다도 낮을 정도.[22] 특기는 2개 있지만 일제 특기는 통솔력이 13인 손호에겐 진주 목걸이일 뿐이고 나머지 하나는 폭군답게 주호.

삼국지 11에서도 백하팔인의 자리를 지켰으며, 능력치 중 정치력과 매력이 각각 6, 3이다. 당연히 특기도 없다.

삼국지 12에선 짤린 줄 알았으나 PK에서 등장했다. 그런데 능력치가 엄청나게 버프되어 나왔다. 전작에서 28, 31이던 무력과 지력이 70대로 올라갔을 뿐더러 정치력 또한 23으로 올라갔다. 능력치 평균이 전작보다 무려 3배 가까이 올라간 것이다. 특기도 많은 편이라 그런대로 쓸 만하다. 전법은 공성강화로 백도어용으로 쓸 만하다. 일러스트도 평범한 살찐 폭군이던 전작들에 비하면 묘하게 멋있어졌는데, 자세히 보면 무서운 얼굴로 오른손에 도검을 든 채 노려보고 있다.

무력은 조금 오버하게 버프한 것으로 보여도 지력은 위의 일화들과 같이 군주로서의 자질은 마이너스지만 개인은 상당히 똑똑한 면모를 보인 것을 볼 때 적절한 고증에 가깝다. 사실 무력과 정치력 또한 권신에 휘둘려 막장테크를 타던 오나라에서 토목 공사 등의 정책을 실천할 정도로 영향력이 있으며, 호족 세력 등이 어마어마한 집권 구조에서 암살당하지 않고 통치했다는 걸 보면 이해할 만한 수치다. 물론 증조할아버지큰할아버지가 워낙 먼치킨에 소문난 미남이기까지 했으니....

삼국지 13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41/무력 73/지력 71/정치력 23. 특기는 수영 5 단 하나. 전수특기도 당연히 수영이고 전법은 특공지휘.

삼국지 14에서의 능력치는 통솔 13, 무력 28, 지력 31, 정치 6, 매력 4로 삼국지 11때 처럼 다시 백하팔인급으로 되돌아왔다! 정확이 말하면 통솔력이 2배 넘는 28, 무력이 4배 넘는 45, 지력이 4배, 정치력이 17 하락한 것이다. 개성은 사역, 징세, 저돌, 낭비, 악명, 주의는 아도, 정책은 침략황폐 Lv 1, 진형은 어린, 학익, 전법은 도발, 친애무장은 만욱, 잠혼, 혐오무장은 누현, 보천, 위소, 유평이다.


5.2. 영걸전 시리즈[편집]


삼국지 공명전에서 오나라의 뒤치기로 공명이 북벌중단 후 복귀하고서 강릉으로 공격해 들어갈 때 원군으로 등장한다. 강유와 일기토가 있고 일기토를 볼 경우 사로잡힌 뒤 촉한과 오가 화친하면서 석방된다.[23] 삼국지 공명전 GBA판에서는 손호가 손등으로 교체됐다.

삼국지 조조전 온라인에서는 무력, 지력, 통솔, 민첩, 행운 능력치의 총합이 100도 되지 않아 이 게임에서 유일한 백하일인으로 군림하고 있다. 병과도 노병계로, 정말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5.3. 삼국전투기[편집]


손화의 시첩 하희에게 안겨있는 모습으로 첫 등장. 개 같은 성격 때문에 개로 패러디되었고, 소개컷에서는 작가 공인으로 '개놈'이라는 칭호를 얻기도 했다. 손견이 정말 호랑이 자체로 그렸던걸 보면, 손호가 개인 것은 아마 이런 의미도 있어서라 보는 의견도 있다. 눈가의 점 등으로 보아 바우와우바우로 추정되었고, 영안 전투(3)에서 성장한 모습이 나오며 확정되었다. 전투외편 8-3편의 타이틀 컷을 차지하기도 했다.

영안 전투 편에서 처음 등장. 태자인 손완이 너무 어려 복양흥과 장포가 새 황제 후보를 찾을 당시 만욱의 추천을 받아 황제가 됐으며, 초기에는 적극적으로 구휼 활동을 하는 등 훌륭한 정책을 펼쳤지만 3개월도 안 되어 폭군으로 돌변하고 오나라를 멸망으로 몰고 가기 시작하는데,[24] 손호가 원래 폭군 체질이었거나 손화의 복수를 위해 작정하고 오나라를 멸망시켰다는 뉘앙스의 서술이 있다.[25]

전투외편 8편에서 손호 이야기가 조금 더 묘사된다. 손호는 제위에 오르고 폭정을 펼쳤는데, 우선 손휴의 부인과 아들들을 전부 처단했고, 뜬금없이 무창으로 천도하기도 했으며, 주색과 사치를 일삼아 국고가 거덜날 정도였다고 한다. 손호는 마음에 안 드는 신하는 아무렇지도 않게 죽였기에 승상이었던 육개 정도를 제외하면 일반적인 신하들은 상소는 커녕 눈도 못 마주칠 정도였다고 한다.

손호의 흥청망청한 생활에 백성들만 뼈빠지게 노역과 조세를 부담해야 했으며, 이러한 노역에 지친 백성들이 산적이었던 시단을 중심으로 밀집해 난을 일으키기도 했지만 너무나도 간단히 제압했다고 묘사되었다. 손호는 시단의 난을 제압하고 무언가 자신감이 생겼는지 수도를 무창에서 건업으로 도로 되돌리고 후궁을 엄청나게 늘리며 궁까지 새로 지었다. 그의 재위 16년 중 이제 겨우 3년차였지만 그 동안 나쁜 군주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보여줬다고 묘사되었다.

268년경, 시단의 난도 제압하고 후궁도 뽑고 궁도 새로 지은 손호는 자신감이 넘쳤고, 이에 의욕이 넘친 손호는 합비 공략을 결심하여 정봉에게 합비 공략을 명하지만 실패했다. 이듬해 육개가 죽은 뒤에는 그의 가족들을 죄다 건안으로 유배를 보내기도 했고, 270년경에는 다시 정봉을 합비로 보냈다. 정봉은 이번에도 실패하지만, 그 손호도 차마 정봉은 죽이지 못하고 대신 애꿎은 도군을 처형했다.

폭정을 펼치면서도 황제 노릇을 16년 동안이나 한 까닭은 백성과 소호족에게 강했으나 대호족과 서진에게 눈치를 봤다며,[26] 최훈은 아예 원래는 손오가 270년에 사마준, 양호 등이 대오전선으로 전진 배치되어 서진한테 망했을 것이지만 독발수기능의 난으로 인해 10여년 더 숨이 붙었다고 기술한다. 작중에선 내추럴 본 폭군으로만 묘사되며[27] 아예 멍군으로 불린다. 폭군이라는 점을 나타내기 위해서인지 상어 이빨이 특징이다.

서릉 전투 편에서는 무슨 자신감인지 화핵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점쟁이의 말만 듣고 대군을 끌고 북진하려 했지만 폭설 때문에 무산됐다.[28] 보천이 진에 투항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자길 못 믿고 거기서 투항을 하냐며 난감해했다.

육항의 분전으로 보천의 난이 제압되자 손호는 이 승리를 기점으로 제대로 미쳐 날뛰게 되었다고 묘사되었다. 자신을 빼고 정치를 하려 하였다는 빌미로 만욱과 유평을 제거하려고 하였고 이미 죽은 정봉 대신 그 아들 정온을 처형했다.

삼국 통일 편에서는 오언이 건평에서 진이 함선을 건조하고 있다는 걸 알아채고 병력 증원을 요청했지만 서릉과 강릉에 병이 잔뜩 있는데 뭘 굳이 증강하냐며 거절했다. 그 밖에는 손호의 패악질이 끊이지를 않아서 점점 스스로 고립되어 갔다고 언급되기도 했다.

진에서 본격적인 오 정벌에 나서며 여기저기서 패전소식만 들려오자 왜 하나같이 힘도 못쓰고 무너지냐고 화내기도 했다. 신하들은 이에 이게 다 잠혼 때문이라고 말했으며, 손호는 잠혼 때문인 거냐고 반문하기만 했지만 신하들이 알아서 잠혼을 쳐죽였다. 이후 도준이 돌아오자 그에게 진의 수군을 막을 방법이 있냐고 물었다. 도준은 대선으로 진의 작은 함선을 제압할 수 있다고 말했지만 출항 당일 병사들이 전부 도망가며 작전은 시작조차 하지 못했고, 결국 손호는 왕준이 오자마자 바로 항복을 선언했다. 이 와중에 오 멸망 후 손호를 초대한 사마염이 자리를 만들어놓고 기다린지 오래라고 하자 손호 역시 자기도 자리를 만들어놓고 기다린지 오래됐다며 해맑게 받아치는 건 덤이다.


6. 둘러보기[편집]


오서(吳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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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손화는 남로당쟁 당시 황태자 자리에서 쫓겨나 장사왕으로 봉해져 유배를 갔으며, 나중에 제갈각이 주살당할 때 제갈각의 조카가 손화의 아내라는 점 때문에 손준에게 살해당했다.[2] 삼국시대의 형주 강하에 속했다.[3] 그리고는 또 그녀가 그립다고 그녀의 모습을 닮은 목제 리얼돌을 만들었다...[4] 손호의 옛 친구였음에도 죽였다.[5] 장굉의 손자다.[6] 다만, 이 시점에서는 이미 죽었기 때문에 그의 아들인 유민이 맞을 것이다.[7] 실제 역사를 생각한다면 항복하여 그렇게 된다는 뜻인데, 손호는 자신이 이겨서 그렇게 된다는 의미로 착각한 것이다. 마치 고대 그리스의 델포이 신탁에서 "전쟁을 일으키면 (자신의) 거대한 왕국을 무너뜨릴 것"이라는 예언을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해 전쟁을 했다가 패배했다는 리디아의 왕 크로이소스의 일화와 비슷하다.[8] 하다못해 사마소는 나라가 망한게 꼭 지탓은 아니라고 해도 죄책감은 있어야 하는거 아니냐고 깠고, 극정도 유선에게 "나라가 망했으면 좀 슬퍼하는 척이라도 하십시오" 라고 했을 정도로 순종했다.[9] 놀라울 것도 없는게 손호는 능력도 인성도 최악이라서 사실상 오나라를 말아먹은 군주이며, 손호 위주로 반란을 일으킬 정도의 기반도 명망도 없는 인물이었다. 사실상 아무런 위협이 안되는 인물이니 좀 건방진 말 몇마디 하는 정도로 과민반응할 필요도 없었던 것. 예를 들어 유선의 경우 촉한 멸망 이후 종회와 강유가 중심이 된 반란이 있었고, 촉한 자체가 국력은 약해도 명분이 상당히 강한 국가였던만큼 유선을 중심으로 한 반란이 일어나면 곤란한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유선에 대한 감시도 심했고, 유선은 철저하게 '난 다른 뜻이 없으니 살려주시오'란 어필을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반면 손호는 저런 식으로 막나가도 사마염 입장에서 웃어넘길 정도로 아무 위협이 안됐던 것이다.[10] 출처: 《자치통감》.[11] 汝자를 넣어서 부르는 노래.[12]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여가>가 너를 넣어서 부르는 노래다.[13] 당연히 만수무강하라는 말(令汝壽萬春)도 정말 잘 살으라는 의미가 전혀 아니고 '잘먹고 잘살거라 원수놈아'라는 의미다.[14] 사마염은 부패하긴 했지만 기본적인 군주로서의 성격 자체는 큰 문제가 없었던 인물이다.[15] 단, 손화가 정상적으로 제위를 계승했다면 손화의 정실 부인의 자식인 손준이 서출 장자인 손호보다 혈통 면에서 우월하므로 꼭 손호가 황제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가 황제가 된 것은 비정상적인 제위 계승이라 나이가 목소리를 낸 거고. 그리고 손호의 포악한 성격이 이궁의 변 때문에 생겼을 수도 있기 때문에 (상식적으로 자기 아버지가 이유없이 갈려나가는 상황에서 맨정신인 이가 몇이나 될까?) 이것은 결론적으로 너무 결과론적인 판단이자 개연성 없는 가정이다.[16] 오 멸망 후 거둔 전리품에 실제로 5,000명의 궁녀가 있었으며, 이들은 고스란히 사마염이 흡수해 거대 하렘을 건설했다고 분명히 사서에 기록되어 있다. 여담이지만 백제의 마지막 군주 의자왕은 실제로 3,000명의 궁녀를 거느리기는 커녕 궁녀를 다 합해도 200여 명 남짓으로 추정된다. 혹자는 중화 문화권에서 전통적으로 1, 3, 5, 7, 9의 위계를 쓰기 때문에 훗날 의자왕이 궁녀 3,000명을 거느렸다는 낭설이 돈 데에 망군 손호의 5,000 궁녀 이야기가 영향을 주지 않았겠는가 하는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대륙에서 황제를 했던 손호가 5,000명 클라스이니 그보다 한 격 낮춘 3,000명으로 조작해 의자왕에게 손호와 같은 망군의 이미지를 씌우기 위함이 아니었느냐는 해석이다.[17] 손화가 죽었을 때 손호 나이 만 11세. 아버지가 억울한 죽음을 맞았다는건 충분히 인지할 수 있는 나이니 이로 인해 성격이 삐뚤어졌을 가능성이 없진 않다.[18] 유선은 환관이자 간신황호와 친해지게 되면서 말년에 그에게 정치적인 권한을 주어 정치적으로 막장이 되며 암군이 됐지 그 이전까지 무능함과 별개로 어느 정도 자신의 일을 하였고 암군이 됐을 시에도 손호처럼 신하들을 죽이지도 않았다.[19] 손휴 사망 직후, 교주에서의 폭정에 못 견딘 사람들이 봉기하여 진나라에게 교주 땅을 넘겼다. 이후 오나라가 다시 어찌어찌 탈환했으나, 279년에 곽마라는 인물이 교주에서 난을 일으킨다. 교주에서의 이러한 정세 변화가 간접적으로 오의 멸망을 앞당기게 하였다.[20] 모두 불발로 끝났다. 역모의 뉘앙스로 보기도 어려운 게, 육개는 죽을 때까지도 나라 걱정이었으며, 정봉은 흉신 손침을 축출한 핵심 인물이었다. 물론 손호 입장에서는 역모가 맞기는 맞았다(...). 손호가 국가의 이익에 반하는 인물이니까 당연하다면 당연하지만.[21] 위나라의 입장이나 오나라의 입장 둘 다. 조비조휴서성한테 털리는 등 여기는 건널 수 없는 강이었다.[22] 물론 유선은 총합 85 중 매력이 64로 매력빨이 절대적이긴 하다.[23] 234년 공명의 6차 북벌 직후의 이벤트로 다뤄진다. 즉, 손호는 원래대로라면 이 시기엔 태어나지도 않았어야 한다.[24] 손호를 추천했던 만욱 본인은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니었다며 당황했고 복양흥과 장포는 손호를 제위에 올린 걸 후회했다가 손호에 의해 삼족이 주멸됐다.[25] 억울하게 죽은 아버지 손화의 복수를 한다는 관점에서 보면, 오나라를 멸망시키는 것은 오나라에 대한 최고의 복수인 셈이다. 해당 편의 마지막 컷에서 "아니면... 어쩌면... 흠... 에이 설마 아니겠지." 라고 떡밥을 던졌다. 또한 손호의 성장한 모습이 나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손화가 휘둘리기만 하다 죽었다고 한탄하는데, 손호는 그런 손화를 보고 비통한 눈물을 흘리며 손화를 부른다. 이는 작품 내에서 손호가 유일하게 슬픔을 표하는 장면이다.[26] 다만 손호의 재위 기간에도 서진에게 시비는 많이 걸었고, 위의 이여가에 대한 일화나 교주를 두고 다툰 점을 미루어 볼 때 서진에 대한 것은 다소 애매하다.[27] 물론 최훈도 미심적은 부분에 대해서 지적하긴 하지만 작중 묘사는 그냥 폭군의 묘사다.[28] 작 중에서는 오나라 입장에서 하늘이 도왔다고 서술되어 있지만 사실 진짜로 왔다면 진 입장에서도 골치를 썩힐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당시 진에서도 꽤 큰 사건이 터졌던 찰나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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