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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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한국의 현대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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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
서정 갈래
서사 갈래
1910년대
상징주의 시(김억) · 현대적 자유시(주요한)
신소설(이인직)(이해조)(최찬식)
1920년대
'동인지 시대'
감상적·퇴폐적 낭만주의 시(이상화) ·
김소월[1] · 한용운[2]
감상적·퇴폐적 낭만주의 소설
(김동인)
자연주의 · 사실주의 소설
(염상섭)(현진건)
신경향파 문학
국민 문학파
(민요 운동 · 시조 부흥론)
신경향파 문학
국민 문학파
계급주의 문학
계급주의 문학
1930년대
시문학파[3](모더니즘 시) · 생명파 · 전원파
모더니즘 소설[4] · 장편소설[5] · 농촌소설[6] · 역사소설[7]
1940년대
~ 광복
청록파 · 저항시(이육사)(윤동주)(신석정)
'국문학의 암흑기'[8]
광복 ~
1950년대
이념시(연간조선시집) · 해방기념시집 · 순수시
귀향 소설 · 분단 문학

전쟁시 · 모더니즘 시 · 서정시
전쟁소설 · 분단 소설 · 귀향 소설
1960년대
현실 참여시
순수 서정시
참여문학
순수문학
1970년대
민중시 · 노동시
민중 소설 · 농민·어민 소설 · 노동 소설 ·
순수 소설 · 중간소설 · 대중소설
1980년대
민중시 · 서정시 · 해체시
노동 소설 · 연작소설 · 역사 장편 대하소설
1990년대
~ 현재
생태시 · 해체시(도시시 · 일상시) · 메타시
일상 소설 · 다문화 문학
장르소설
[각주]
[각주]

고전문학 · 장르문학




1. 정의
2. 배경
3. 순수문학에 대한 인식
4. 업계의 사정
5. 관련 문서


1. 정의[편집]


순수문학()에는 광의와 협의가 있다. 광의의 순수문학은 철학·사학을 포함한 넓은 의미의 문학에서 사회참여를 추구하는 참여문학과 대비되는 사회참여 반대 성향의 시·소설·희곡을 가리키는 문학 용어이다. 한편 협의의 순수문학은 통속적인 내용을 소재로 재미 그 자체를 추구하는 대중문학 또는 장르문학같은 개념과 대비되어 순수하게 예술성을 추구하는 문학을 지칭할 때 쓰는 용어이다. 즉 장르문학과 대비되는 입장에서는 참여문학도 순수문학에 들어가는 셈. 다만 후자의 순수문학이 융성했던 시절에도 무조건 예술성만 추구하는 소설만 있었냐면 사실 그런것은 결코 아니었으며 드라마영화를 통해 2차 창작되는 경우도 많았는데 로맨스적인 요소나 협객물적인 요소를 넣는 경우도 허다했다.


2. 배경[편집]


과거에는 문학 작품의 도구성과 사회 참여적인 면모를 부정하는 문학 작품이나 문학 사조를 의미하기도 했다. 한국에서는 순수문학과 참여문학을 구분하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일제 강점기나 해방 이후의 남북분단, 6.25 전쟁, 군사독재 등의 질곡으로 가득한 근현대사의 영향으로 저항문학, 리얼리즘 문학이 크게 융성했기 때문이다.

한국 문학계에서의 순수문학-참여문학 논쟁은 1960년대 조선일보 지면에서 벌어진 이어령김수영의 논쟁이 유명하며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후에는 게오르크 루카치, 가라타니 고진 등의 해외 문학평론가들의 저작이 수입되면서 이러한 논쟁은 현재 거의 일단락된 상태. 지금은 순수문학의 범위가 상당히 넓어져서 사조에 따른 분류는 의미가 없다.

흔히 순문학이라고도 한다.

실질적으로는 신춘문예문예지 등을 통해 등단한 작가들이 발표한 단편소설이나 장편소설, , 산문 등을 뜻하게 되었다. 그게 뭐야? 같은 반응도 있을 수 있겠지만 발행 매체에 따른 장르 구분법도 유효하다. 원래 비평이나 장르 구분은 별의 별 개념을 다 끌어오니 이런 구분도 안 될 이유는 없다. 대비되는 용어로 대중문학, 장르문학등이 있다.

원래 소설류의 산문문학은 순수문학에 포함되지 못했다. 이는 과거 사람들의 인식과 과거의 출판 환경 등의 문제 때문이다.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함축적이고 운율이 있는 시와 같은 것이 문학이고, 돈 벌려고 내용이나 늘려 하류계층이나 읽는 소설 따윈 종이낭비라는 것. 이는 소설이 원고에 쓰인 글자 수에 따라 돈을 받던 역사에서 비롯된 인식이다.


3. 순수문학에 대한 인식[편집]


현재 대한민국에서는 본래의 뜻보다는 주로 대중문학 내지는 장르문학에 비교되는 전통적인 문학이라는 뜻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보다 중립적인 표현으로 '기성문학', '사회참여 문학'이 있지만 순수문학의 사용이 압도적. 당연히 이에 문학적 논쟁이 따라붙는다. " '순수문학'이 아닌 현 세대의 장르문학은 순수하지 않으냐" "문학의 순수함을 어떤 기준으로 논하냐" "문학에 순수함이 존재하냐" "문학의 순수함이 무엇이냐" 더 나아가 "그렇다면 문학은 무엇이냐" 같은.

문장력은 '순수문학'이 현 장르문학과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훨씬 정제되어 있다. 한국은 500년 이상 성리학을 중심으로 한 문치국가였고 그런 문학을 정도로 여겨온지라 해방 후에도 문장의 아름다움을 수십 년간 절차탁마한 기성문인들의 글 솜씨는 대다수가 작문교육을 제대로 받지 않은 채 우후죽순 쏟아져 나오는 장르문학 작가들의 의성어, 비문, 한자어 남발 장르문학에 비해 고급스러운 것이 사실이다. 시간의 힘을 이길 수는 없는 것이다. 한편 독자들을 끌어당기는 서사의 맛은 어딘가 밋밋한 것도 사실이다.[1]

또한 단순히 문장력을 제외하더라도 표현이나 묘사, 소설의 구조와 개연성, 사용하는 기법, 인물의 입체성 또한 일반적으로 순수 문학의 수준이 훨씬 높다. 그야 당연할게, 순수 문학은 소설을 학문화 시켜 분석하고 전문가 수준으로 전공하는 사람들이 주로 쓰는 분야이다. 장르 문학의 경우에는 대부분이 문예창작학과는 커녕 국어국문학과도 전공하지 않은 사람이 대다수다.[2] 그렇기에 전체적으로, '소설' 자체의 수준은 순수 문학과 장르 문학을 비교하기가 힘들다. 누군가는 이것을 읽고 예술 작품에 우위가 어디 있느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이는 순전히 비전공자들의 오해일 뿐이다. 문학은 분명히 '학문'의 영역에 발을 들이고 있다. 작품의 가치를 재단하여, 우위를 가리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물론 수학이나 과학처럼 정해진 답, 공식이 있는 것처럼 딱딱 맞아 떨어지지는 않는다. 작품의 가치나 수준을 재단하는 기준이 어떻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3] 단순히 '문학'과 '소설'로서의 수준과 가치를 재단하자면 순수 문학이 매우 우위에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리고 이것은 딱히 이상한 것이 아니다. 그야 당연할게, 물리학을 전공한 뒤 박사 학위까지 딴 사람과, 단순히 인터넷에서 떠돌아 다니는 물리학 지식을 습득한 사람을 두고 누가 더 물리학에 대해 잘 아는가를 논하자면, 백이면 백 전자의 경우를 인정해줄 것이다.

순수문학이란 말이 확립된 배경은 복잡하다. 광복 이후 대한민국의 문학은 시대의 등불이었다. 오늘날 사람들이 시위의 목적으로 촛불을 들듯 작가들은 문학이란 양식의 촛불을 든 것이다. 광복 이후에서 90년대 초반까지 발간된 작품의 태반은 사회참여적 문학이었다고 보면 된다.

암울한 정치 상황과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 그에 대한 대중의 관심에 따라 사회참여적 작품이 쏟아졌으며 현실이 영화보다도 더 영화같다보니까 더욱 비정상의 정상화에 대한 열망이 커질 수밖에 없기도 했다. 해외에서는 화석 취급 당하는 장르인 시집의 비중이 유난히 높았던 이유도 같다. 이제는 한국에서도 화석 이처럼 순수문학은 주류로써 비평이나 상업적으로 중요하게 다뤄질 수밖에 없었던 배경이 있었다. 단지 특정 장르의 우월성을 드러내기 위한 용어라기보다는 이를 하나의 군(群)으로 묶어서 구분해야할 필요성이 있었던 것이다.

문단이 작품을 평가하는 데 중요한 기준 중 하나는 작품이 얼마나 현실과 우리 사회의 모습을 반영했는가의 여부이다.[4] [5]

생각해보자. 누군가는 모든 예술이 현실의 문제점을 말해야 할 필요가 있냐고 생각할 것이다. 이는 분명히 틀린 말은 아니다. 반드시 현실의 문제를 말하고 정치를 끌어낼 필요는 없다. 그렇게 하지 않더라도 작품의 가치는 다른 면에서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점에 대해서는 문화 연구의 이론을 빌어 생각해봐야 한다. 감각적 즐거움에만 몰두한 예술들이 대중 매체를 사로잡았을 때, 그때는 언제나 인류의 위기였고 세계적인 혼돈이 몰아쳤었다. 나치즘은 TV를 선동의 1등 공신으로 삼아 퍼졌고 이 때문에 문화 연구라는 학파가 탄생했다. 결국 예술은 어떠한 사회적 의미도, 현실적 고민도 만들어 내지 못하는 유희거리로 전락할 수 밖에 없었다. 단순한 유희거리로 전락해버린 예술 매체. 사람들은 점점 현실의 문제는 잊어버리고 오늘만을 살게 된다면 이건 우민화를 유도하는 수단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예술은 현실을 짚어내야 한다'는 말은 괜히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장르적 대중소설은 비평의 테두리 밖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시장이 작다 보니 좋은 작가가 모이지 않고, 좋은 작가가 없으니 작품의 질은 떨어졌다. 또 번역서는 상대적으로 유명작만 들어오니 국내작의 조악함이 두드러질 수밖에. 기껏 양질의 작품을 불법유통 수입해도, 중역은 기본에다가 질 나쁜 번역, 내용 축약 등을 거쳐 멀쩡한 작품을 충공깽한 막장소설로 바꾸는 사례도 비일비재했다. 출판사가 할 일은 안 하고 돈 버는 데 급급해서 싼 값에 대충 찍어댔던 것이다. 이런 과거가 순수문학 외에는 저급한 문학이라는 인식에 일조했다.

하지만 80년대 이후 민주화가 이루어지고 순수문학의 영향력은 1990년대와 2000년대 초반을 거치며 급속도로 위축되었다. 기본적으로 80년대, 최소 90년대 이전까지 순수문학은 고등학생 이상, 최소 교육받은 사람들만 즐기던 고급 취미였고 이때부터 국민들의 대다수인 노동자들이 순수문학을 접할 기회가 거의 없었다. 수백 년 전부터 상놈들은 글을 배워봐야 해가 된다고 생각했던 조선시대를 겪어오면서 생긴 대중과 순수문학과의 괴리를 좁힐 수 있었던 70년대 고등교육 수료자들의 증가 때 순수문학이 이런 대중들을 포용하는데 실패했고, 순수문학을 받아들인 쪽은 오직 국어 실력을 늘리고자 했던 정부의 교육정책의 일환으로 국어 교과에 편입되어 학력고사, 수능문제의 도구로만 활용되며 대중과의 괴리를 좁히지 못한 것.

순수문학과 그 외 문학 간의 경계도 점점 옅어지는 추세이나, 비평적, 상업적인 필요성에 의해 여전히 순수문학이라는 개념은 이어지고 있다.

4. 업계의 사정[편집]


순수문학과 그 외 문학 분류를 무시할 수가 없는 이유는 도서관이나 서점의 분류법이 엉망이 되기 때문이다. 도서관은 표준이 아니되 사실상 표준에 따라 분류하기 때문에 영향이 덜한 편이지만, 서점은 다르다. 이 분류법을 뒤엎으면 기존의 데이터베이스나 서가 분류를 다시 해야 하는데, 심한 경우엔 서가 리모델링까지 해야 하므로 서점은 굳이 이런 수고를 하려들지 않는다. 독자도 책 찾기 힘든 대격변을 겪느니 익숙한 분류대로 있기를 원할 것이다. 출판사로선 서점과 독자의 요구에 맞춰야 하므로 이런 구분법은 오래 유지될 것이다. 미터법이나 야드파운드법 등 여러 도량형이 통일되지 않고 계속 쓰이는 이유와 비슷하다.

한국 문단의 대부 백낙청고은을 한국 문단의 권력층으로 삼아 그의 성폭행을 고의로 은폐했다는 논란이 있다. 권력이 없다면 일개 파계승 시인에 지나지 않을 고은의 성폭력이 묵인된 것은 그를 동업자로 삼은 백낙청의 영향력이 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또한 도서정가제와 관련해서도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데, 장르문학 업계에서는 도서정가제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적지 않게 있었던 반면 반대로 순수문학 업계에서는 도서정가제를 강력하게 지지하는 출판사와 작가가 상당히 많았기 때문이다. 순수문학 업계에서는 도서정가제를 통해 작가들을 위한 사실상의 최저임금제를 도입함으로서 작가들의 수익을 보장하여 생계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입장을 내비치고 있다. 작가들은 법률상의 최저임금제의 혜택을 받을 수 없는 계층이어서 안정적인 수익이 보장되지 않는 현실에 직면하였으므로, 이를 해소하기 위해서 도서정가제를 통해 작가들이 사실상의 최저임금을 보장받을 수 있도록 새로운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 순수문학 업계의 입장이다. 즉 순수문학 업계는 도서정가제를 최저임금제와 사실상 동일시하고 있어 작가들을 위한 복지 정책으로 받아들이고 있고 그렇기에 도서정가제를 강경하게 지지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을 보여주고 있는 칼럼.주소

이러한 순수문학 업계의 태도는 도서정가제를 반대하는 여러 소비자들과 장르문학계에게 강한 비판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수문학계에서는 10년 동안 업계 사정에 대해 잘 모르는 사회초년생 작가지망생에게 사기계약을 하는 불법적 제도를 합법화하려고 야욕을 드러내어 위상이 추락하고 있다. 이에 대해 대부 백낙청은 도서정가제를 찬성하는지 반대하는지 입장을 표한 적이 없어 독자들의 도서정가제가 악법이라는 호소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이 생겼다. 결과적으로 도서정가제 고집은 순수문학계와 출판계의 근본주의화를 가속시키고 있으며 유사사례로 한국의 개신교가 바로 가까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부정적 갈라파고스화가 우려된다.

순문학계는 백낙청을 비롯한 기득권의 고은 성폭력 및 도서정가제 추진 묵인 의혹으로 국민들에게 사회적 논란을 일으켜 트라우마를 안겨주는 등 닫힌 사회로 악화되어 업계를 쇄신해도 모자랄 판에 2020년 초부터 민음사문학동네에서 소설을 연재한 작가들이 실존 성 소수자의 삶을 소설 소재로 각색하지 않고 그대로 집어넣어 당사자들에게 소문이 퍼지는 바람에 아웃팅 피해가 연속으로 발생하였음에도 출판사들이 가해 논란을 일으킨 작가측에 대한 미온적인 대처로 문학도의 비판을 지속적으로 받고 있다. 이에 한 익명의 작가지망생과 전혜진 등의 일부 작가들이 '신경숙과 가해 논란을 일으킨 작가들이 내부 병폐의 연장선에 있다'라고 각성을 촉구하면서 사실상 절필에 가까운 비판문을 남기기도 했다. 자세한 것은 민음사와 문학동네의 논란 부분 참조.


5.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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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승전결과 같은 독자를 끌어들이고 대리만족을 주는 극적 장치와 배경과 달리 순수문학은 그러지 못하다. 보면 지나치게 현실적이고 답답하고 이게 지나치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가 되어 버린다. 쉽게 말하면 장르소설이 슈퍼히어로 영화 같다면 순문학은 독립영화 내지 예술영화와 같다.[2] 물론 국문과는 딱히 소설이나 시를 쓰는 것을 깊게 파고드는 학과가 아니다. 진짜 소설을 전공하는 학과는 문예창작학과이다.[3] 상업적 성공을 기준으로 잡으면 당연히 순수 문학은 장르 문학에 비빌 수가 없다.[4] 마블 히어로가 인기가 있는 건 보라 시대상을 반영해 그것에 대한 질문을 던졌기 때문이다. 수십년 전 엑스맨(인종차별), 스파이더맨(기레기와 사회적빈곤), 다크나이트는(9.11 테러로 미쳐가던 미국 사회의 모습과 미국이 불러낸 조지 부시라는 법을 초월한 주권자) 주권자의 함의를 다뤘다. 그러면 순문학은 그 가치를 다하는가? 아니면 현학적이고 좁은 굴에 갇혀 있는가?[5] 그러나 '예술은 현실을 짚어내야 한다.'는 것은 단순히 한국 문단만의 가치가 아니다. 이는 전세계의 순수 예술 분야 뿐 아니라, 온갖 다양한 장르의 대중 문화에서도 부각되는 가치이다. 학자들이 연구하고 분석하는 현실의 문제들은 대중에게 그대로 다가오기가 힘들다. 그리고 예술은 그러한 것들을 가장 세련되고 재밌게 풀어내 대중에게 다가가도록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