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천읍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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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구조
2.1. 성벽
2.2. 성내
2.3. 성저


1. 개요[편집]


전라남도 순천시 중앙동·남내동·영동·행동에 있었던 조선시대 읍성. 순천부읍성이라고도 한다.
1912년, 읍성 북서쪽 순천선교부에서 바라본 풍경.[설명1]
1914년, 연자루와 옥천.

2. 구조[편집]


1900년대 순천읍성 추정[우승완,이석배,2008][윤현석,2012]

2.1. 성벽[편집]


1900년대 연자루.
1920년대 연자루. 유리창과 난간이 설치되어 있다.#
  • 연자루(남문): 순천의 상징적인 경관으로 랜드마크 역할을 했다. 1925년 철거되었다. 1976년 죽도봉에 복원되었지만 당대에 촬영된 사진과는 다른 모습이다.디지털순천문화대전[우승완,2015(1)]
  • 동·서·북문: 남문과 달리 옹성이 있었다.[우승완,2015(1)]
  • 해자: 동·서·북문 밖에 해자가 있었다. 남문 쪽은 옥천이 해자 역할을 했다. 중앙동·남내동·영동·행동의 바깥 경계가 해자가 있던 곳을 표시하고 있다.


2.2. 성내[편집]


1920년대 초반 시장[설명2]
  • 도로: 연자루와 객사를 잇는 길이 읍성의 중심 도로였다. 광장, 시장 등 여러 용도로 이용되었다. 이 중심 도로에서 동문으로 이어지는 길, 객사 서쪽 담장을 따라 북문으로 이어지는 길, 관아 구역 북쪽과 남쪽을 따라 서문으로 이어지는 길이 있었다.[우승완,이석배,2008]
  • 객사: 중앙동(법정동) 일대, 중앙로가 지나가는 부지가 객사 영역이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순천공립보통학교(현 순천남초) 교사로 사용되었다가 1920년대 후반 학교가 저전동으로 이전하면서 철거됐고 도로가 났다.[우승완,2015(2)]
    • 관풍루: 객사의 정문이었다.
  • 내아·관아: 중심 도로 서쪽에 면해 있었다. 현 삼성생명빌딩-청소년수련관 일대이다.
  • 시장: 연자루(남문)와 객사를 잇는 도로가 5일장의 중심이었다. 1929년 웃장으로 이전했다.[우승완,2015(3)]


2.3. 성저[편집]


  • 환선정(喚仙亭)): 1544년 동천변에 처음 지어졌다. 활터가 있었다. 조선 시대에 여러 번 중수되었다. 일제강점기에는 회의실, 교실, 불교 포교당 등 여러 용도로 사용되었다. 해방 후에는 교회당으로도 이용되다가 1962년 대홍수로 유실되어 현판만 남았다. 1988년 죽도봉에 복원되었지만 일제강점기 사진과는 다른 모습이다.디지털순천문화대전[김현진,2018]
19세기 지도에는 인근에 하중도가 있는 것으로 나온다. 이후 물길이 바뀌어, 1915년 지적도에는 연못으로 나온다(지도 참조). 이 연못은 1930년대에 메워진다.
  • 우선정(遇仙亭): 1871년 동천의 하중도에 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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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1] 왼쪽에 북문, 가운데에 객사, 오른쪽에 관아 건물들이 희미하게 보인다(지도 참조). 왼쪽 산은 죽도봉이다.[우승완,이석배,2008] A B 우승완, 이석배. (2008). 순천읍성의 토지이용 변화에 관한 연구. 한국주거환경학회지, 7(1), pp. 61-72.[윤현석,2012] 윤현석. (2012.11.28). 日, 1909년 의병 제압 위해 읍성 철거하며 첫 도로 개설. 광주일보.[우승완,2015(1)] A B 우승완. (2015.02.12). 순천읍성을 들여다 보다 1 순천광장신문.[설명2] 연자루에서 객사 방향(북쪽)을 바라본 모습이다. 객사가 1920년대 후반 철거되고 도로가 생겼으므로 그 이전 시기에 찍은 사진이다.[우승완,2015(2)] 우승완. (2015.05.22). 순천 최초의 근대 교육기관 ‘순천남초등학교’ 순천광장신문.[우승완,2015(3)] 우승완. (2015.06.12). 조선시대 장터와 순천 ‘웃장’ 순천광장신문.[김현진,2018] 김현진. (2018.10.25). 신선을 부르던 순천 환선정(喚仙亭)의 발자취. 순천광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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