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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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정부상징.svg 대한민국 국보 제1호
서울 숭례문
서울 崇禮門 | Sungnyemun[1]


}}}
위치
서울특별시 중구 세종대로 40
(남대문로4가 29, 숭례문)
분류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 성 / 성곽시설
시설
1동
건축시기
조선시대, 1398년(태조 7)
복구 2013년
소실
2008년 2월 10일
복원
2013년 4월 29일
지정일자
1962년 12월 20일
관리
문화재청 덕수궁관리소

1. 개요
2. 명칭
2.1. 숭례문(崇禮門)
2.2. 남대문(南大門)
3. 국보
4. 숭례문과 주변
4.1. 숭례문
4.1.1. 기능
4.1.2. 구조
4.1.3. 현판
4.2. 남지(南池)
4.3. 남대문시장
5. 역사
5.1. 조선시대
5.2. 개화기 ~ 일제강점기
5.3. 현대
6. 사건·사고
8. 다른 매체의 숭례문
9. 찾아오는 방법
10. 여담
11. 갤러리
12. 외부 링크
13. 국보 제1호
14. 같이 보기


1. 개요[편집]


숭례문(崇禮門)은 조선시대 한양도성의 남문(南門)으로 건립된 성문으로, 남대문(南大門)이라고도 불린다. 대한민국의 국보로 지정되었으며, 오늘날에도 서울랜드마크 중 하나로서 기능하고 있다.


2. 명칭[편집]



...정남(正南)은 숭례문(崇禮門)이니 속칭 남대문(南大門)이라 하고...

태조 5년 9월 24일 기묘 2번째기사

가장 잘 알려진 명칭은 숭례문(崇禮門)남대문(南大門)이 있다. 숭례문은 정식 명칭이자 현판에 쓰인 이름이라면, 남대문은 일반 명사로서 흔히 불린 명칭이다.


2.1. 숭례문(崇禮門)[편집]


숭례문(崇禮門)은 조선 왕조가 사상적으로 지향하는 바를 반영하여 지은 이름으로 볼 수 있다. 한양 도성의 주요 성문에는 오행(五行) 사상에 따라 해당 방위에 조선의 통치 이념인 유교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덕목, 즉 오상(五常)을 이루는 인(), 의(), 예(), 지(), 신()[2]을 대응시켜 이름을 지었는데, 특히 동문, 서문, 남문에 이러한 대응이 명확하게 나타난다.
  • 동: 인(仁)을 기르는 흥인(지)문
  • 서: 의(義)를 두텁게 하는 돈의문
  • 남: 예(禮)를 숭상하는 숭례문
  • 북: 같은 원리대로라면 "지(智)" 자가 대응되나, 북문은 거의 사용하지 않는 문이어서 그러지 않았다. <실록>에 의하면 숙문(肅門)이라 부르다가[3][4] 언젠가부터 숙정문(肅靖門)[5]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훗날, 숙종 대에 탕춘대성과 함께 홍지문(弘智門)이 세워지면서 빈자리를 메꾸었다.
  • 중앙 : 신(信)은 한양 한복판에 위치한 보신각(普信閣)이다. 그러나 보신각 역시 고종 대에 붙여진 이름이다.

남문의 이름인 숭례(崇禮)는 '예절(禮)을 높인다'는 뜻으로, 유교의 사서(四書) 중 하나인 《중용》에서 따온 말이다.

君子德性而道問學 (군자존덕성이도문학)

군자는 덕성을 존중하면서도, 묻고 배우는 것을 길로 한다.

大而. (치광대이진정미)

넓고 큼에 이르면서도, 정미함을 다하며

高明而道中 (극고명이도중용)

고상하고 현명한 것에 이르면서도, 중용을 길로 여기고

溫故而知新(온고이지신)

옛 것을 쌓아가면서도, 새 것을 알며

(돈후이숭례)

예를 높이는 것으로써, 돈독하고 두터워진다.

上不 下不(시고 거상불교 위불불부)

이 때문에 윗사람이 되어도 교만하지 않고, 아랫사람이 되어도 배반하지 않는다.

중용》 27장 中

정도전(鄭道傳)의 시문집인 『삼봉집』(三峯集)[6]에서는, 도성 팔문의 이름을 정도전이 지었다고 하였다.# 공식 기록에서는 확인되지 않으나, 다른 진술 중 정도전이 권중화 등과 함께 한양의 도시계획을 구상[7]하고 경복궁과 각 전각의 이름을 지어 바친 것[8], 한양의 팔경시(八景詩)를 지어바친 것[9] 등이 교차 확인된다.[10]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 이것을 인용하였다.#


2.2. 남대문(南大門)[편집]


숭례문은 "도성의 남쪽 대문"이라는 뜻의 남대문(南大門)이라고도 자주 불렸다. 정식 명칭이라기보다는 일반 명사로 시작하였으나[11], 조선 시대에도 숭례문보다 훨씬 보편적으로 불려온 명칭으로 보인다[12]. 특히 한문을 잘 모르는 서민의 경우 현판을 읽을 수 없으니 보다 직관적인 "남대문"이 지배적으로 쓰였으며, 실록이나 승정원일기의 언급 빈도로 볼 때 한문을 잘 알던 권력층에서도 "남대문"을 매우 자주 사용하였음을 살펴볼 수 있다.[13] 1996년까지는 "서울 남대문"을 공식 문화재 명칭으로 사용하면서 사실상 고유명사화되어 주변 지명도 전부 "남대문"을 사용하였고('남대문'시장 등), "숭례문"은 거의 잊혀질 정도였으나 이후 문화재 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서울 숭례문"으로 개칭하였다.

  • 일본과의 관련성

실록이나 승정원일기 등 당시 기록에 대한 접근이 용이해지기 전에는 "남대문(南大門)이라는 명칭은 일제가 강제로 개명시킨 이름이다(혹은 비하적 명칭이다)"라는 설이 꽤 유명했는데, 특히 숭례문 방화 사건 이후 시민들의 숭례문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이 속설의 영향을 받아 의식적으로 남대문을 피하고 숭례문으로 부르는 사례가 많아지기도 했다. 이는 잘못 알려진 일본어 잔재설의 대표적 예로, 상기했듯 조선시대부터 남대문이라는 이름은 널리 쓰였다.
이는, 1934년 일제가 사적 지정을 하면서 보물 1호로 숭례문을 "남대문", 보물 2호로 흥인지문을 "동대문"이라는 정식 명칭이 아닌 통상 명칭으로 등록했다는 사실이 와전된 것으로 보인다. 일제는 "남대문", "동대문"이 당대에 많이 쓰였기 때문에 명칭으로 쓴 것이지 다른 의도를 가진 것은 아니다. 하지만, 문화재 명칭으로 정식 명칭을 배제한 것은 바람직하지 않으며 대한민국 정부 출범 이후에도 1962년 일본의 문화재 목록을 답습하여 "서울 남대문", "서울 동대문"이라는 이름을 30년 이상 유지하면서 숭례문, 흥인문이라는 정식 명칭이 거의 잊혀지는 부작용을 유발하였다. 결국 1996년 "서울 숭례문", "서울 흥인지문"으로 이름을 변경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일제의 지배와 그에 대한 반감이라는 역사적 맥락에서 발생한 여러 속설의 하나로 이해할 수 있고 숭례문이라는 정식 이름이 다시 (조선시대보다도) 널리 알려지는 데에는 기여했다고 볼 수 있으나 아직까지 일부 영향력을 행사하여 거꾸로 "남대문"이 묻히거나 배제되는 부작용도 야기하고 있다. 하지만 예전에도 "남대문"이 널리 사용되었음이 기록에 잘 나와있으므로, 정식 명칭을 존중하는 의미라면 몰라도 이러한 이유로 "숭례문"을 굳이 고수할 필요는 없다.

  • "남대문"이라고 부른 기록의 예시

- 숭례문이 처음으로 언급된 조선왕조실록 태조 5년 9월 24일 기사부터가 '正東曰興仁門, 俗稱東大門. 正南曰崇禮門, 俗稱南大門'이라 하여 보통 동대문, 남대문으로 부른다고 설명하였다.[14] 여기서 속(俗)은 속되다, 천박하다가 아니라 '일반적으로, 세간에서는, 백성들은' 으로 해석하는 것이 맞다(우리가 흔히 접하는 "속칭~~이다"와 같은 맥락이다.). 백성들은 물론 신하나 군주들까지도 즐겨 남대문, 동대문 등으로 불렀다.

- 세종 9년 1월 26일 기사에는 '上曰: 明日置𧪚于南大門外愼以衷之家'라고 했는데, 여기서 상은 세종대왕이다. 그 외에 서애 유성룡, 한음 이덕형도 남대문이라고 부른 기사가 있으며, 실록을 쓰는 사관조차 성종14년 12월 4일에 보면 '南大門內行火, (남대문내행랑실화 연소십여간)' 이라 하여 남대문이라고 적어놓았다.

- 《매천야록》을 저술한 매천 황현(1855~1910)은 경술국치 16일 후 절명시를 남기며 자결한 인물로, 야사임을 떠나서, 일제강점기 이전의 기록임에 주목하자. 또 하나의 증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흥선대원군이 집권한 후 어느 공회 석상에서 음성을 높여 여러 대신에게 말하기를 “나는 천리(千里)를 끌어다 지척(咫尺)을 삼겠으며 태산(泰山)을 깎아 내려 평지를 만들고 또한 남대문을 3층으로 높이려 하는데, 여러 공들은 어떠시오?”라고 했다.[15] 이에 많은 재상들이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는데 김병기가 머리를 들고 말하길, “천리를 지척으로 하려면 지척이 될 것이고, 남대문을 삼층으로 하려면 삼층이 될 것입니다. 대감이 지금 무슨 일인들 하지 못하겠습니까? 하지만 태산은 본디 태산인데 어찌 쉽게 평지로 만들 수 있겠습니까?”라 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대원군은 오랫동안 생각에 잠겨있다가 말하길, “혼자 잘난척 하는군.”이라 했다. 대저 천리 지척이라는 함은 종친을 높인다는 뜻이요, 남대문 3층이라 함은 남인을 천거하겠다는 뜻이요, 태산 평지라 함은 노론을 억압하겠다는 말이다.

《매천야록》 권1, 갑오이전 상


3. 국보[편집]


국보 제1호라는 타이틀로도 유명한데, 가장 중요한 국보라는 뜻은 아니고 단순히 가장 먼저 국보로 지정되었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를 전자의 의미로 혼동하는 사람이 많아 지정번호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문화재보호법 시행령 및 시행규칙이 2021년 11월 19일부터 시행됨에 따라 공식적으로 '국보 제1호'라는 말이 없어지고 '국보 서울 숭례문' 으로 표기가 바뀌었다.


4. 숭례문과 주변[편집]



4.1. 숭례문[편집]



4.1.1. 기능[편집]



파일:0010100.jpg

도성도(대동여지도) | 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남대문이라는 이명이 알려주듯, 도성의 남쪽 대문으로서 기능하였다. 한양은 지형적으로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그 사이로 문을 냈는데 북쪽은 북악산이, 남쪽은 남산이 가로막고 있어서 숭례문은 남서쪽에 자리잡았다. 숭례문은 흥인문과 함께 도성의 가장 중요한 두 관문으로 여겨져[16] 문루 또한 2층으로 크고 화려하게 지었으며, 통행량도 가장 많았다. 숭례문은 주로 한양의 서쪽 교통을, 흥인문은 주로 한양의 동쪽 교통을 담당하였다.

숭례문은 국토의 북쪽으로는 의주로, 남쪽으로는 삼남로 등의 최종 관문이었다. 의주로는 가장 중요한 외교국이었던 중국과 통하는 길이며, 무악재를 넘어 돈의문 바깥에 있던 모화관(慕華館), 영은문(迎恩門)을 따라 숭례문으로 이어지는 길이 중국 사신을 영접하는 정식 루트였다. 따라서 숭례문은 대외적으로 조선의 수도인 한양을 대표하는 이미지 역할도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수록된 명 동월(董越)[17]의 <조선부(朝鮮賦)>에는 도성문 중 숭례문만이 따로 기록되어 있다.#)
삼남로는 삼남 지방(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교통로로 선비들이 과거를 보러가는 길, 임금의 행차길 등 다양한 기능을 맡았으며 특히 비중 높은 삼남 지방의 세곡과 물자가 마포(麻浦) 등 큰 나루터에서 하역하여 도성으로 수송되었다. 태종 대에는 물류 운송을 편하게 하기 위해 숭례문 근처 만초천(蔓草川)까지 운하를 뚫자는 의견이 나오기도 하였다.

한편, 도성 내에서는 광화문으로 뻗는 육조거리, 동서 방향으로 한양을 꿰뚫는 운종가(雲從街)와 함께 한양의 핵심 도로였던 남대문로(현재는 태평로가 뚫려있어 위상이 이전보다 축소되었다.)로 이어졌으며 그 끝에는 청계천에서 가장 통행이 많던 광통교(廣通橋)와 한양의 종루였던 보신각(普信閣)이 있었다. 성문 바깥으로는 칠패(七牌) 저자가 들어섰다. 1896년 도시개조사업으로 가가(假家)가 모두 정리된 이후에는 선혜청(宣惠廳) 내부에 창내장(創內場, 현 남대문 시장)이 들어서기도 하였다.

이외에, 숭례문은 한양의 비보풍수(裨補風水; 풍수 상 부족한 요소를 인위적으로 보충함)와 관련하여 여러 기능을 담당하였다. 숭례문으로 이어지는 경복궁의 오른팔은 지세가 낮아 기가 허(虛)하다 하여 바깥에 연못(남지南池)을 팠고, 그 안에는 불을 제압하기 위해 부적이 들어간 현무 조각을 넣기도 하였다. 또한, 음양사상에 관련하여 가뭄 때 기우제(祈雨祭)를 지내면서 숭례문(남문; 陽)을 닫고, 숙정문(북문; 陰)을 열어 음기(陰氣)를 강화하고[18] 장마가 시작되면 다시 숭례문을 열고 숙정문을 닫았다.


4.1.2. 구조[편집]


숭례문은 견고한 육축 위에 전면 5칸, 측면 2칸의 중층 문루를 가진 성문이다. 흥인지문, 팔달문 등과 함께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성문 중 최대 규모이다.

흥인문과 비슷하게 생겼지만, 공포 구조 등을 살펴보면 숭례문은 조선 전기 양식, 흥인문은 조선 후기 양식으로 확연하게 구분된다. (흥인문은 고종 당시 문루를 중건했기 때문이다.) 숭례문의 경우 전체적으로 장식이 소박하고, 부재가 굵고 짜임이 건실하여 조선 초기의 양식을 잘 보여준다.

지붕은 우진각 지붕이며, 2층 잡상의 개수는 9개, 1층 잡상의 개수는 7개이다.

숭례문의 현재 단청은 1961년 ~ 1963년 보수 당시 발견된 옛날 패턴을 참고하여 63년 당시 채색된 버전에 가깝게 복원하였는데, 이외에도 숭례문은 54년, (63년), 70년, 73년, 88년 등 여러 차례에 걸쳐서 단청을 다시 칠하면서 문양이 조금씩 변화하였기에 그 중 어느 것이 원본이다라고 하는 것이 조금 무의미한 측면이 있다. 다만 63년의 것이 유일하게 고증 비슷한 걸 한 사례이기에 복원 당시 참고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다른 조선 초중기 건물에 흔적처럼 남아있는 단청과 비교했을 때 조선 초 단청에 가깝기에 고증의 의미가 있다고 볼 수 있는 편. 최근 복원된 창경궁 명정문의 단청과 비교해볼 수 있다.

2010년 복원 당시 밝혀진 사실로 숭례문의 원래 기단은 지금의 지면보다 1m 60cm 정도 아래에 있었다. 즉 15세기 무렵의 도로는 현재보다 훨씬 낮았고, 상대적으로 숭례문의 성벽은 더 높았다. 다만 조선 후기로 가면서 점차 기단이 묻혔고, 안그래도 특히 흥인문이 행차 때마다 흙을 퍼내야 하는 문제가 발생하자 기단을 낮추라 하였으나[19] 지반 안정성 등 다양한 문제가 있었다. 복구 작업 시에도 구한말과의 연속성, 그리고 지반 안정성 등 다양한 이유로 지반은 드러내지 않은채 공사가 마무리되었다.


4.1.3. 현판[편집]


파일:서울_숭례문_현판과_우진각지붕_(촬영년도___2015년).jpg
숭례문 현판[20]

(중략) 문장과 필법에 대해 말씀드리자면, 비록 양녕이 달갑게 여기지 않은 바였지만 말을 하여 문장을 이루고 붓을 휘둘러 신묘한 경지에 든 것은 절로 숨길 수 없었습니다. 만년에 묘향산을 유람할 적에 절구(絶句) 한 수를 짓기를 ‘산 노을로 아침에 밥을 짓고, 덩굴에 걸린 달을 밤에 등불로 삼네. 홀로 외로운 바위 아래에서 자는데, 한 층의 탑만 그대로 남아 있구나.’라고 하였는데, 비록 문사(文士)로 이름난 자라 하더라도 이보다 뛰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 그 외 《동문선(東文選)》에 실린 장편과 단운(短韻)도 모두 굳세고 맑고 빼어나 사람들 입에 회자되고 있습니다. 게다가 그가 쓴 숭례문(崇禮門)의 편액(扁額)은 자체(字體)가 굳세고 생동감 있어 세상에서 칭송을 받았습니다. 당시에 태종께서도 양녕에게 문장과 글씨의 재주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셨으니, 양녕의 겸손히 스스로 감추는 실제를 이 한 가지 일을 가지고도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중략)

승정원일기》 영조 12년 6월 12일 자 기사, 양녕대군의 사당에 편액을 내려 줄 것 등을 청하는 유학 이명희 등의 연명 상소[21]

숭례문 현판 글씨는 그 자체로 명필로 꼽힌데다 도성의 정문이라는 본체의 상징성 때문에 세간의 관심과 사랑을 많이 받았다. 현대에는 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현판 작품으로 남았으며, 600년 세월이 흐르면서 흥미로운 이야기도 많이 전한다.

  • 기본 정보
현판은 가로 189cm, 세로 282cm, 높이 25.6cm로 궁중 현판 중 매우 큰 편에 속하며 전체 106kg에 달한다.

테두리목과 선대(현판 가장자리에서 길게 뺀 부분)를 구름모양으로 화려하게 조각하였다. 이러한 예는 고려 14세기의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현판이나 조선 초~중기 창경궁 명정전 현판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조선 후기로 갈수록 (특히 테두리목 부분이) 이러한 장식이 생략되고 단순 일자형으로 바뀌어 상대적으로 소박한 느낌을 준다. 조선 말에 복구된 경복궁 광화문, 경복궁 근정전 등은 모두 테두리목의 장식이 생략되었다. 이걸 이용해서 현판 테두리목의 장식여부에 따라 시대를 짐작할 수도 있는데, 연대가 오래된 현판일수록 테두리목과 선대의 장식이 부각되는 경향이 있다. 숭례문 현판은 이런 점에서 조선 초의 수법을 잘 간직하고 있다고 평가된다.
서체의 유형은 전형적인 설암체(雪菴體)로 평가되는데, 설암은 원나라의 승려 이부광(李傅光)을 지칭한다. 설암체는 특유의 전체적인 볼륨감과 굵고 뚜렷한 획으로, 멀리서도 잘 보여야 하는 현판 글씨의 특징과 맞물려 고려 후기~조선 전기에 현판 글씨로 크게 유행하였다. 숭례문 현판도 이러한 서체적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 글씨의 주인
양녕대군이 쓴 것으로 유명하지만, 사실 그것에 대한 직접적인 증거는 없는 상황이다. 조선시대에도 이미 대체로 양녕대군 글씨로 알려졌으나 작자를 밝히는 낙관이 없어서 진위를 의심한 몇몇 지식인들이 개인 연구로 이견을 제시했다. 다음과 같이 서적에 따라 대략 5명의 인물로 압축된다.
  1. 양녕대군 이제(李禔, 1394~1462) 설
이하 포함 거의 모든 책에서 일단 양녕대군을 언급한다.
  1. 신장(申檣, 1382~1433) 설
    • (추사) 김정희, 『완당전집』 - 따로 근거를 대지는 않았지만 “추사”라는 이름값 때문인지 굉장히 유명한 설이다.#
  2. 유진동(柳辰仝, 1497~1561) 설[23]
    • 정동유, 『주영편』 - 유진동 집안에 숭례문 편액 글씨를 연습한 종이가 여럿 전해진다는 소문과 함께 숙종 대 수리 당시 유진동의 후손인 유혁연이 편액 뒷면에 유진동이 썼다는 문구[“가정 모년 죽당(竹堂, 유진동의 호)이 쓰다”(嘉靖某年竹堂書)]를 발견했다는 이야기를 들어 유진동 설을 주장했다.
    • 이유원, 『임하필기』 - 고종 연간 숭례문 중수 당시, 경복궁 영건도감 제조로 있던 양녕대군 사손(祀孫) 이승보가 현판을 살폈더니 후판대서(後板大書)가 유진동의 글씨였다고 하는 이야기를 수록했다.[22] 저자는 양녕대군이 처음에 썼다가 모종의 화재 후 유진동이 다시 써서 걸은 게 아닌가 하는 추측을 제기했다.##
    • <별건곤> 1929년 9월 자 – 일제강점기 잡지로, “안평대군의 글씨는 오해요, 중종 시대 명필 유진동의 글씨”라는 대목이 있다.
  3. 정난종(鄭蘭宗, 1433~1489) 설
    • 이규경, 『오주연문장전산고』 - 편액을 양녕대군이 썼다는 통설을 인용한 후 서체가 정난종 글씨라고 지적하면서 정난종 설을 주장했다.#
  4. 안평대군 이용(李瑢, 1418~1453) 설
    • <별건곤> 1929년 9월 자 – 결론은 유진동 글씨라는 내용.
다섯 명 모두 당대에 손꼽히는 명필이었는데, 나름의 근거를 제시하는 주장도 있지만 모두 현재 현판에서는 확인할 수 없고, 또 각 인물의 다른 작품이 전해지지 않아서 정확한 고증은 현재로서는 불가능하다. 다만 2008~2009년 현판 보존처리 당시에 이뤄진 방사성탄소연대분석 결과 한 부재가 1474년~1554년 것(대략 1474년 이후 제작 또는 보수)으로 나왔기 때문에, 적어도 조선 전기 작품인 것만은 분명하게 되었다.
유일하게 확실한 것은 조선시대부터 숭례문 현판은 대체로 양녕대군의 글씨로 알려졌다는 것이다. 상단의 각 출처를 보면 알겠지만 (압도적인) 양녕대군 이외에는 한두 사례 정도만 보일 정도로 소수설이고, 대부분이 어떤 근거를 들어 양녕대군 설에 반박하는 내용이다. 이로 보아 양녕대군 작품이라는 것이 이미 조선시대에 정설이었음을 알 수 있다. 『동국여지비고』에서는 양녕대군이 썼다고 확정시함으로써 공식적으로 인정되기도 했다. 현대에도 문화재청에서는 『지봉유설』을 인용하여 양녕대군만을 언급하고 있다.
진실이든 아니든 이러한 인식이 의미있는 결과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양녕대군 후손들은 그의 필적을 보존하려는 의도로 (적어도 1800년대 초부터) 여러 차례 숭례문 현판의 탁본과 목판을 만들어 보관해왔다고 하는데, 이것이 현재까지 전해져 2008년 손상된 현판의 원형을 고증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 세로로 쓰인 현판
국내에 세로 현판[종액(縱額)]이 드물다보니 도성의 정문에 떡하니 걸린 거대한 세로 현판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고, 여기에 대해서 이런저런 해석이 등장했다.
가장 널리 퍼진 속설은 관악산의 불 기운이 경복궁에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 또는 오행사상에서 남쪽이 불과 연관되어 있다는 등의 주술적인 내용이다. 불(火)의 뜻이 담긴 崇, 禮를 세로로 세우면 ‘炎’이 되어서 맞불 또는 이열치열의 원리라는 설명이 가장 많다.
실제로 세종실록#에 나와있듯이 경복궁 오른편의 허한 기운을 보충하기 위해 숭례문 밖에 남지(南池), 안쪽에 지천사(支天寺)를 세우는 등 숭례문에 온갖 주술적 장치를 심어놓았으며, 이어 숭례문의 지대가 너무 낮아서 땅을 돋우어 산맥에 연결한 뒤 그 위에 문을 올리자고 세종대왕이 직접 언급했다. 성종 13년(1482)에는 한명회가 현재 알려진 것과 거의 동일한 논지의 언급을 한 기록이 있다.#[24] 사실 이들 기록에 현판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없지만, 정황적 근거가 많은 설이라고 하겠다.
혹은 유교 경전에서 그 근거를 찾는 경우도 있다. 논어 태백 편(泰伯 編)에
"興於詩, 立於禮, 成於樂"
이라는 문장이 있는데, “시(詩)에서 흥이 생기고 예(禮)에서 일어나고 락(樂)에서는 이룬다”는 뜻으로 가운데 문구로 인해서 숭례(禮)문 글씨를 세워서 썼다는 것이다. #
그냥 미학적 차원에서 보는 입장도 있는데, 세로 현판이 아무래도 시각적으로 더 장중해 보인다는 것이다.
한편 숭례문처럼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기는 어렵지만, 궁궐 안에서는 경복궁 집옥재, 창덕궁 어수문에서 세로 현판의 예를 찾을 수 있다.
  • 임진왜란 관련 전설
임진왜란 당시 숭례문 현판이 잠깐 없어졌었는데 광해군 시절에 이르러 숭례문 밖 남지 (또는 청파 배다리(靑坡舟橋) 근처 도랑) 에서 밤마다 빛이 났다. 그곳을 파보았더니 그 현판이 발견되어 문루에 다시 걸었다고 전해진다.[25] 『오주연문장전산고』##, 『한경지략』 등에 수록되어 있다.
  • 현판의 변형과 복구
2008년 방화사건 당시 문루가 화마에 휩싸이는 와중에도 소방대원의 긴급 구조작업으로 현판만은 (일부 파손되었지만) 비교적 온전한 상태로 살아남았다. 이후 복구에 필요한 고증자료를 모으다가 지덕사(至德祠, 양녕대군 사당)에서 현판 탁본을 제공받았는데, 현재의 현판과 대조해봤더니 몇몇 자획에서 차이가 있었다. 탁본이 구한말/일제시대 현판 사진들과 일치했기 때문에 진본임을 확인함과 동시에 해방 이후 한국전쟁 당시 현판이 파손되었고, 이것을 급하게 땜질하면서 글자에 변형이 일어난 것으로 추정되었다.
참고로 이 현판 탁본이 바로 양녕대군 사손(祀孫) 이승보가 1865~1871년에 현판을 확인하면서 만들었다고 알려진 그것이다.
이후 탁본을 기준으로 하여 원래의 글씨로 교정한 현판을 복구된 숭례문에 걸었다.
파일:현판 비교.png[26]파일:복원 전후 비교.png
<사진 출처 : 국립문화재연구소, 『숭례문 현판 보존처리』, 2009.>
2019년에는 2008년 9월 도난되었던, 숭례문 현판 글씨가 새겨진 목판이 발견되어 회수되기도 했다. 이것은 1865년 이승보가 얻어왔다는 탁본과는 별개로 그 이전인 1827년에 양녕대군 후손들이 기존에 보관하고 있던 것을 다시 새긴 것이다.#
상기된 내용을 포함해서, 숭례문 현판에 관한 전반적인 내용은 2009년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간행된 『숭례문 현판 보존처리』에서 확인할 수 있다.#
숭례문 글씨의 작자(作者)에 관한 서적의 일부 인용문은 다음 글을 참고하였습니다.#


4.2. 남지(南池)[편집]



파일:남지.jpg

숭례문 밖, 남지는 왼쪽에 있다.(도쿄 한국연구원 소장)
숭례문 바깥에는 커다란 연못이 있었는데, 이를 남지(南池) 또는 연지(蓮池)[27]라고 불렀다. 세종의 언급에 따르면 경복궁 서쪽의 지세가 약한 것을 보강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판 것이다.[28] 한명회는 주산(북악산)이 화산의 형국이기 때문에 불을 진압하기 위함이라고 언급하였다.[29] 이 둘은 모두 비보풍수(裨補風水)에 근거한다.

1629년(인조 7) 숭례문(崇禮門) 밖 남지(南池)에 인접해 있던 홍사효(洪思斅, 1555∼?)의 집에서 이루어진 기로회를 그린 작품이며, 남대문 밖 사저에서 이루어진 기로연의 장면을 농축하여 담았다. 남대문, 사저, 주변의 연지 등이 주요한 배경으로 나타나고, 전각 안에서는 노인들이 연회를 즐기고 있다. 이 작품은 17세기 이후 국가나 관아에서 공적으로 주최하는 노인회의 모임이 민간으로 저변화되고 있음을 보여 준다. (한국문화사) #

이 그림에는 장유(張維, 1587 ~ 1638)가 지은 「題耆老諸公南池賞蓮會圖」라는 제목의 칠언 율시가 담겨 있다. 계곡집(谿谷集)에도 수록되어 있다.#

흰 수염에 붉은 얼굴 날렵한 거동 / 白鬢紅頰共聯翩열한 분의 연세 팔백 년을 이루었네 / 十一人成八百年낙사의 하삭음 어찌 셀 수 있으랴만 / 洛社幾拚河朔飮곡강지(曲江池)의 연꽃 모임 또 다른 뜻이 있지 / 官池自有曲江蓮연꽃 향기 솔솔 용연인 듯 애애하고 / 香風入座龍涎暖코끼리 코 기울여 술을 잔뜩 따르누나 / 淥酒傾筒象鼻偏표거(飆車) 타고 학상선(鶴上仙)으로 하늘에서 놀기보단 / 鶴背飆輪大寥廓
영원히 지행선으로 사는 게 더 좋으리 / 不如長作地行仙

  • 임진왜란 직후 실종된 현판이 남지에서 발견되었다는 전설이 있다.[30] (다만 그 바깥 청파주교(靑坡舟橋)에서 발견되었다는 버전도 있다.)

  •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는 남지를 파내면 남인(南人)이 득세한다는 속설을 전하였다. #

순조(純祖) 23년(계미) 늦봄에 숭례문 밖에 사는 백성들이 돈과 곡물(穀物)을 서로 거두어 이 말라붙은 못을 다시 파내고 물을 채워 한결같이 예전 모습대로 만들어 놓았다. 그러자 갑자기 풍설(風說)이 나돌기를 ‘미수(眉叟) 허목(許穆)이 대각(臺閣)에 들어갈 때에 이 못을 팠었고 지금 또 이 못을 팠는데, 이 못을 파던 날에 정승(政丞) 채제공(蔡濟恭)이 복작(復爵)되었다.’ 하였으니, 이 못이 남방(南方)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남인(南人)에게 응험이 있는 것이고 남인 가운데 문과(文科) 급제자가 넷이나 난 것도 우연한 일은 아니다.

1896년 4월 자의 『독립신문』에는 "칠패 아침 저자에 고니라는 큰 새를 어떤 사람이 팔러 왔는데 그 동리 사람이 열냥을 주고 사다가 남문 밖 연못에 놓아주니 유적(幽寂)한 정취가 뭇 새와 달랐다. 이 새가 연못 물과 물고기를 좋아해 날아가지 않고 밤낮으로 논 지 한 달가량 되었다."라고 하며 남지에 방생되어 살던 고니에 대한 이야기를 전했다. 이후 열흘 뒤에는 "일전에 일본 사람이 강으로 사냥 가는 길에 고니에 총을 놓으려 하거늘 그 근처 순검이 팔을 붙들고 쏘지 못하게 하였다더라"라는 후속 기사를 전했다.[31][32]

  • 청동용두(靑銅龍頭)의 귀(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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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용두의 귀
등껍질 안에서 나온 종이 유물[33]
1926년 남지 터에 "조선우선회사"로 추정되는 건물을 짓는 과정에서 발견된 유물이다. 등껍질 부분은 뚜껑처럼 열 수 있고, 내부에서는 부적처럼 팔괘와 함께 화(火)자를 중심으로 수(水) 자가 가득 적혀 둘러싼 모양의 종이가 발견되었다. 등껍질 안쪽에도 동일한 문양이 새겨져 있다. 전문가들은 이것이 음양오행 상 "물"을 상징하는 현무(玄武)일 것이라고 추정하였다. (문화재청, "숭례문 - 기억, 아쉬움 그리고 내일", 2009)

남지는 위생 등의 문제로 1907년 숭례문 성벽 철거 전후로 매몰되었고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4.3. 남대문시장[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남대문시장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파일:gettyimages-980066434-2048x2048.png

숭례문 안쪽에 있던 대형 창고인 선혜창(宣惠倉)에 창내장(倉內場; 남대문시장의 전신)이 들어섰다.
숭례문은 지방 물자가 조달되는 한강과 가장 거리가 가까운 관문으로 근처에 조세 및 공물을 보관하기 위한 대규모의 창고가 세워졌다. 특히 임진왜란 이후 광해군 즉위년(1608)에는 대동법(大同法)을 시범적으로 시행하면서 선혜청(宣惠廳)을 신설하여 숭례문의 북쪽과 남쪽에 각각 북창(北倉), 남창(南倉)을 설치하였는데 이는 현재 북창동, 남창동의 어원이다.# 이후 한양 내외의 인구 증가에 따라 생활용품의 수요가 증가하면서 숭례문과 소의문 바깥에 위치한 칠패(七牌)에서 차츰 새벽에 열리는 사설 시장(조시朝市/난전亂廛)이 이루어졌다. 여기서 칠패란 어영청(御營廳)이 분담하여 방어하던 여덟 구역(패牌) 중 7번째로서 남대문 밖 남지(南池)까지의 영역을 지칭한다. 이곳에서는 쌀, 포목, 어물 등을 팔았으나 그 중 어물전(魚物廛)의 규모가 가장 컸다. 18세기 전반에는 이현(梨峴; 배오개), 운종가(시전; 市廛)와 함께 서울 최대 상업지로 성장하였다.#

이후, 1896~1897년 한양 개조 사업이 진행되면서 남대문 주변의 가가(假家) 및 시장을 모두 철거하고 전부 선혜청 내부로 몰아넣으면서 1897년 1월 남대문시장의 전신이 탄생하였다. 이곳은 남문(南門) 내장, 창내장(倉內場) 등으로 불렸으며 상설시장이었고 시장의 경계가 명확하여 재래시장의 성격이 보다 분명해졌다. 이곳은 상인과 고객 양측이 조선인 위주로 이루어졌으며 일제 강점기 내내 서울(경성)의 가장 큰 시장 지위를 유지하였다. 일제에서는 몇 차례 남대문 시장 중심의 상권을 해체하고 일제 중심 시장으로의 개편을 시도하였으나, 1901년 시장의 관리권이 왕실의 내장원(內藏院)으로 넘어간 후 1911년에 시장에 화재가 발생한 뒤에는 친일파인 송병준이 조선농업주식회사를 설립하여 곧장 시장을 인수하고, 1921년에는 일본인이 경영하는 형태의 중앙물산주식회사로 소유가 넘어가는 과정을 거치면서 남대문시장은 유지되었고 시장권은 오늘날의 형태로 구축되었다.실록사전


5. 역사[편집]


  • 1395년(태조 4년) - 숭례문 시공 (몇몇 매체에서는 태조 5년에 공사를 시작하였다고 기록되어있음)
  • 1398년(태조 7년) - 평도공 최유경 선생이 준공함
  • 태종의 맏아들이던 양녕대군이 숭례문 편액을 씀
  • 1448년(세종 30년) - 좌참찬 정분의 감독하에 '신작'이라고 칭할 정도로 개축
  • 1479년(성종 10년) - 중수
  • 1592년(선조 25년) 5월 3일 왜군 장수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숭례문으로 진입,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는 함정일까봐 여러 번 정탐병을 보낸 후 조심스레 흥인지문으로 서울 진입. 이 때문에 일제강점기에도 흥인지문과 숭례문은 헐리지 않을 수 있었다.
  • 1907년(광무 11년) 8월 1일(남대문 전투) - 일제가 군대 해산을 시행하자 이에 반발한 대한제국군 시위대 2개 대대가 이를 거부하고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 1907년(융희 원년) - 일본 황태자(뒷날의 다이쇼 덴노)가 방한하자 일제는 "대일본의 황태자가 머리를 숙이고 문루 밑을 지날 수 없다"면서 숭례문과 연결된 서울 성곽을 헐어버렸다. 성곽을 헌 자리에 도로와 전차길을 내고 숭례문 둘레에 화강암으로 일본식 석축을 쌓았다. 문 앞에는 파출소와 가로등을 설치했다. 일반인의 출입을 금지시켰다.
  • 1916년 - 〈고적급유물보존규칙〉 공표. 조선총독부에 고적조사위원회 설치
  • 1924년 - 조선총독부가 《고적급유물등록대장초록》을 간행. 1호 원각사지십층석탑 등 193점의 유물을 등록함. 숭례문과 흥인지문은 없었다.
  • 1933년 8월 9일 - 제령 제6호 〈조선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보존령〉 공포
  • 1934년 - 〈조선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보존령〉에 따라, 조선총독부는 보물 1호로 남대문을, 보물 2호로 동대문을, 보물 3호에 원각사지십층석탑을, 보물 4호로 보신각종을 지정했다.
  • 1962년 - 대한민국 정부는 조선총독부의 문화재 지정을 참고해서 남대문을 국보 1호, 원각사지십층석탑을 국보 2호, 동대문을 보물 1호, 보신각종을 보물 2호로 각각 지정
  • 1994년 11월 - 미술전문지 《가나아트》 40호가 미술인 70명에게 여론조사한 결과 서울의 랜드마크로 국보 1호 남대문이 33표로 1위로 선정되었다.
  • 1996년 11월 - 국보 1호 변경 주장이 이슈가 되어 문화재관리국이 서울시민을 대상으로 서울대가 자체학생들을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서울 시민 1,000명 중 67.6%가 변경에 반대했다. 문화재전문가 144명(문화재위원 49명,전문위원 95명)의 59.2%가 변경에 반대했다. 반면 서울대 학부 및 대학원생 262명 중 57%(150명)가 변경에 찬성했다. 변경 찬성 대답자들은 《훈민정음》을 1위로 지지했다.
  • 2002년 2월 - 문화재위원회는 서울특별시의 숭례문 근접 관광 계획을 불허했다. 불허 이유는 차량으로 인해 관람객이 위험에 처할 수 있고 복잡한 도로사정으로 숭례문을 차분하게 감상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 2003년 9월 - "일제는 돈의문 등 조선의 왕성인 궁궐과 성곽을 항일의 상징으로 보고 철저히 파괴했으나, 임진왜란 당시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숭례문을 열고 지나갔으며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흥인지문을 열고 지나갔기 때문에 역사적 가치가 있다며 보존했다."고 2002년 서울대 국사학과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오타 히데하루(太田秀春) 일본 도호쿠대학 특별연구원이 서울대 국사학과 기관지인 《한국사론》 49집에 발표한 논문에서 밝혔다. 평양성 일대에 현존하는 현무문과 칠성문, 보통문, 모란대, 을밀대, 만수대 등도 모두 청일전쟁 때 일본군이 승리한 것과 관련되는 유적이라 해서 고적으로 지정되어 보호받았다고 한다.
  • 2005년 5월 27일 - 숭례문 주변을 광장으로 단장함
  • 2005년 11월 - 감사원은 국보 1호를 변경할 것을 문화재청에 권고했다.
  • 2005년 11월 - 유홍준 문화재청장은 국보 1호 변경에 찬성했다.
  • 2006년 3월 1일 - 1907년 일제에 의해 출입이 금지된 숭례문이 이명박 서울시장에 의해 99년 만에 일반에 개방이 결정되어 3월 3일부터 일반인 출입이 가능하게 되었다.
  • 2008년 2월 11일 - 방화로 인한 화재로 반쯤 붕괴되었다.
  • 2013년 4월 29일 - 숭례문 복구 완료. 정식 개방행사는 5월 4일.
  • 2013년 10월 - 숭례문 부실복구 논란.


5.1. 조선시대[편집]


태조가 즉위하고 한양 천도가 확정된 뒤(1394년 10월) 종묘사직과 궁궐이 먼저 세워졌고(1395년 9월), 그 다음이 바로 도성이었다. 태조 5년 9월 24일 기사에서 도성 각 문의 월단누합(月團樓閤)을 짓고 남문 이름을 숭례문이라 했다고 언급하였으나, 실제로 숭례문이 완공된 기사는 태조 7년 2월 8일에 확인된다. 숭례문이라는 이름도 언제 지어졌는지 분명하지 않은데, 예를 들어 광화문을 태조 4년 9월 29일 기사에 이미 언급하고 있지만, 실제 광화문은 태조 7년 이후에 완공되었고 이름은 세종 8년(1426)에 지어졌다.# 이것은 현 태조실록이 1448년 증보 편수한 것이기 때문으로# 이 사이에 일어난 사실들이 섞여 있다. 숭례문 현판을 썼다고 알려진 양녕대군은 (사실일 경우) 태종 대에 글씨를 썼을 가능성이 높으므로 그 사이의 일은 알 수 없다. 첫 숭례문은 판사 최유경(崔有慶)의 감독 하에 완공되었으며, 태조 5년(1396) 10월 6일 자의 초축 상량문 2건이 남아있다.[34][35]

이후, 세종은 1443년(세종 15년) 한양의 풍수지리 관련 논의의 일부로써 숭례문이 낮아 경복궁의 오른팔이 약하므로 지반을 높게 하여 산맥을 연결하고 그 위에 문을 다시 쌓을 것을 제안하였고 대신들은 찬성하였다.[36] 그러나 공사는 바로 이루어지지 못하다가 세종 29년 신축이 결정되었고[37] 곧이어 세종 30년(1448) 완공되었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숭례문이 기울어지자 성종 10년(1479) 크게 수리하였다. 당시 동부승지 채수(蔡壽)가 숭례문을 중수하면서 옹성도 쌓자고 건의하였으나 성종은 "우리 나라의 민력(民力)이 넉넉하지 못하니, 어찌 한결같이 중국과 같을 수 있겠는가? 만약 옹성을 쌓게 되면 마땅히 민가를 헐어야 하니, 빈궁한 자가 어떻게 견디겠는가? 도적이 이 문에 이른다면 이 나라가 나라의 구실을 못할 것이니,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그러니 쌓지 말게 하라." 라 답하며 거절하였다.[38]

임진왜란이 터지고 나서 일본군이 휩쓸고 지나간 한양에 남은 건물은 숭례문과 흥인문 뿐이었다. 나머지 6문은 거의 100년이 지난 숙종 이후 돈의문광희문을 시작으로 하나씩 문루를 복구하였다. 숭례문과 흥인문이 성문으로써 기능을 다하였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어쨌거나 대전쟁을 빗겨가고 긴 역사를 이어나갈 수 있었다.

조선시대의 마지막 대공사는 고종 시기로 알려져 있다. 복구 공사 당시 해체 결과 고종 당시의 부재가 있어 적어도 지붕을 크게 들어내는 큰 공사가 있었음이 확인되었다.


5.2. 개화기 ~ 일제강점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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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례문(1890년대)
한양도성 성곽이 연결되어 있는 숭례문의 원형 모습.

개화기에 접어들면서 조선에 외국인들이 들어오고, 한양이 본격적으로 서양 세계에 알려지면서 한양에 들어오는 정문인 숭례문 역시 서울에 관광 온 외국인의 입을 통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다양한 방식으로 묘사되었다. 대표적으로 퍼시벨 로웰(percival lowell)은 1883년 조선을 여행한 기행문 "The Land of the Morning Calm"에서 서울에 입성하는 순간의 숭례문에 대한 인상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이윽고 가파른 길을 벗어나자 사람들의 통행이 많아지고 집들도 더욱 빽빽이 들어차 있었다. 그리고 일행이 한 모퉁이를 돌았을 때, 거기 거대한 성벽으로 둘러싸인 조선의 도시가 거짓말처럼 눈앞에 펼쳐졌다.

나는 그처럼 아름답고 색다른 풍경을 전에도 본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 순간에 본 것처럼 그렇게 완벽하게 내 어릴적 꿈을 상기시켜 주는 장면은 어디서도 보지 못했다. 그것은 마치 마술사가 빚어 놓은 무엇처럼 내 앞에 우뚝 솟아 있었다. 그것은 ‘숭례문’[영원한 의식의 문(The Gate of Everlasting Ceremony)]이었다. 남문인 숭례문은 서울을 에워싼 여덟 개의 입구 가운데 하나이다. 문 양편에는 마치 팔을 펼친 듯 위가 들쑥날쑥한 톱니 모양의 벽이 뻗어 있었고, 벽 너머로 기와지붕이나 초가지붕을 한 나지막한 단층집들이 즐비하게 서 있었다.[39]

Percival Lowell, "Chosun, The land of the morning calm", 1886, 76p. (조경철 역, "내 기억 속의 조선, 조선 사람들", 예담, 200)

한편, 서양에서 랜드마크라는 개념이 들어오면서 숭례문의 의미도 단순히 관문이 아닌, 서울이라는 도시 자체를 대표한다는 의미가 강화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국내에서도 숭례문을 한국을 홍보하는 엽서 등에 삽입하면서 숭례문은 외국인들에게 한국을 대표하는 표상 중 하나로 여겨지기 시작하였다.

숭례문의 성곽이 헐린 것은 그 존재 의미에 큰 변화가 생겼음을 의미한다. 1907년 숭례문의 좌우 성곽이 헐렸으며[40][41] 박제순, 이지용, 권중현 등이 고종에게 교통에 방해되므로 철거하자고 건의하여 이루어졌다.[42] 같은 해 10월 요시히토 황태자의 방한이 있었는데, 이와 연결지어 황태자의 방한과 맞추어 성벽을 헐었다는 주장도 많이 제기되는 설이다. 숭례문은 양팔을 잘리고 도로 한 가운데에 고립된 모양새가 되었다.
한편, 1907년 8월 대한제국군 시위대가 일제의 해산 명령에 반발하면서 벌어진 전투인 남대문 전투에서는 하필 숭례문을 일제가 차지해서 싸우는 바람에(당시 서울에서 가장 높은 곳이 성벽이었기 때문이다.) 숭례문에서 벌어진 최초의 실전 전투가 일제의 방어전이 된 씁쓸한 일도 있었다.

이로써, 숭례문은 서울의 관문으로서의 기능과 의미를 상실하고 관광물/랜드마크라는 정체성만이 남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일제 강점기로의 전환과 잘 대응된다. 이후, 서울의 관문 기능은 1900년 건립된 남대문역, 1925년 건립된 구 서울역이 역할을 이어받게 된다. 다만, 서울역이 절묘하게도 숭례문을 마주보는 자리에 지어져서 전통적 관문 및 랜드마크로서의 기능이 대신 강화되는 점도 있었다.

이러한 변화 이후에도 숭례문은 많은 사람들에게 도성과 함께 서울의 상징으로 여겨졌으며, 문학을 비롯한 여러 대중매체에 자주 배경으로 등장하였다. 어떤 신문 칼럼에서는 숭례문의 신세 한탄을 빌어 고립된 숭례문에 대한 측은지심을 간접적으로 드러내기도 하였다.[43] 일부에서는 민족 정신을 표현하는 하나의 수단이 되기도 하였다. 1933년에 발표된 <남대문 타령南大門打鈴>은 그 대표작이다. 이 작품은 치안 방해를 이유로 일제에 의해 금지곡이 되었다.

한양성중 사대문에 남대문이 으뜸일세

파루 소리 장단 맞춰 열고 닫던 문도 좋다

여는 때는 새벽바람 닫는 때는 저녁 연기

만호 장안 너만 믿고 잠꼬대도 깊었었다

넝쿨넝쿨 푸른 잎이 천만년을 기약더니

편갈리고 발이 잘려 열린 채로 해가 가네

열렸거든 닫히거라 닫혔거든 열리거라

닫던 사람 어델 가고 열던 사람 오는구나

<남대문 타령南大門打鈴>, 이고범 작사, 1933.


외국인들에게도 숭례문은 서울을 상징하는 요소 중 하나였다. 한국에서 결핵 치료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의료 선교사 셔우드 홀(Hall, Sherwood, 1893~1991)이 기획한 크리스마스 실(1932) 도안에서 숭례문과 황궁우가 등장하는데, 숭례문을 선정한 이유에 대해 "조선을 상징하는 보편적인 그림"임과 동시에, "결핵을 방어하는 성루"임을 상징하였다고 한다. 이외에도 다양한 엽서에서 숭례문은 서울의 상징이었으며 이는 일제에서 만든 엽서도 마찬가지였다.[44]

한국인 입장에서는 잘 와닿지 않는 사실이지만 일제가 숭례문을 보존한 이유에는 이를 일종의 개선문처럼 여긴 것과 무관하지 않았다. 사실상 실권이 일본에 넘어간 대한제국 말부터 일본은 교통을 위해 숭례문도 철거하려고 했지만, 숭례문이 임진왜란 당시 가토 기요마사가 지나온 성문이라는 이유로 보존될 수 있었다.

1904년부터 1908년까지 일본군의 조선 주둔군 사령관이었던 하세가와 요시미치는 교통 장애를 이유로 숭례문 제거를 추진했다. 하지만 당시 《한성신보》 사장 겸 일본인 거류민단장이었던 나카이 기타로가 "숭례문은 가토 기요마사가 한양으로 입성한 문입니다. 조선출병(임진왜란) 당시 건축물은 숭례문 외에 몇 남지 않았는데, 파괴하는 것은 아깝습니다."라고 설득했고, 이에 하세가와가 받아들였다는 내용이 오타 히데하루의 논문 《근대 한일 양국의 성곽 인식과 일본의 조선 식민지배 정책》에 실려있다.

다시 말해 일제는 숭례문을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의 '한양 점령'을 상징하는 기념물로 여겼으며, 훗날 한일합방과 함께 조선을 완전한 식민지로 만들면서 오랜 대륙 진출의 꿈을 이뤄낸 자신들의 역사를 빛내는 시초의 건축물로 취급했던 것이다. 일제강점기 당시 숭례문이 국보 제1호로 지정된 이유도 이 이유가 크다. 같은 이유로 고니시 유키나가가 통과한 흥인지문 역시 철거가 취소되었다.

숭례문은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관문인데다 서울의 역사에 맞먹는 시간을 같은 자리에 있었다는 속성으로 인해 시간이 쌓임에 따라 매우 다양한 기억과 복합적인 인식이 생기게 되었다. 35년의 비교적 짧은 시간 동안에도 당시 일제 및 총독부는 숭례문을 일제 치하 조선의 긍정적(소위 내선일체적) 상징으로서 여겼다면, 광복을 기다리는 어떤 한국인들은 숭례문을 나라를 잃은 민중을 대변하거나 그 상처를 어루만지는 대상으로 여겼다. 당시 일방적 갑이었던 일본 측의 역사적 고려는 숭례문을 보존하는 선택으로 이어졌으며, 결국 일제가 물러나면서 숭례문이 보존되었다는 사실만이 남았다. 가토 기요마사와 고니시 유키나가는 문화재 보존에 기여한 셈이다. (다만 가토 기요마사는 불국사를 태워먹었다)


5.3. 현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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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례문에 걸린 김일성[좌]과 스탈린[우]의 초상화 및 북한 국장
한국전쟁 당시 숭례문
해방 이후, 6.25 전쟁 당시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에 의해 김일성스탈린의 초상화가 걸리는 수모를 겪기도 했으며, 서울을 뒤덮은 융단폭격에도 숭례문은 살아남았다. 비록 건물의 일부가 피탄되어 무너졌으나 다행히 화재로 번지지 않아 전후에 복구할 수 있었다.

1961년~1963년 전면적인 해체 수리가 진행되었다. 방화 사건 직전의 숭례문은 이 때의 모습을 따른 것이다. 가장 중요한 문화재 중 하나이니만큼 최고의 장인들을 동원해 심혈을 기울여 작업이 진행되었다.

이 과정에서 용마루가 짧아지는 등 몇가지 변형이 있었다. 수리 이전 숭례문은 용마루를 길게 하기 위해 목구조 상의 추녀와 추녀마루가 일치하지 않았으나, 수리 과정에서 둘을 맞추면서 용마루가 짧아진 것으로 분석되었다. 이 부분은 2008 ~ 2013 복구 공사 당시 옛 사진과 도면을 참고해 수정되었다. 한편 단청은 이후 잦은 변경이 있었으나 이 때의 단청이 가장 고증에 충실하여 1963년의 단청을 기준으로 복원되었다. 당시 제작된 수리 보고서인『서울南大門修理報告書』는 2013년 문루 복구에 중요한 참고가 되었다.
  • 단청 변화

⠀[195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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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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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197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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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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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례문의 단청은 1954년, 1963년, 1970년, 1973년, 1988년 각각 재시공되었는데, 1954년 단청은 전후 복구에 따른 것으로 조선 후기의 양식을 그대로 따랐으며 1963년의 단청은 상기한대로 해체 수리 과정에서 적심에서 발견된 옛 부재에 남은 단청을 기반으로 한 것이다. 그러나 대기 오염으로 빠르게 색이 변질되자 1970년에 재시공하였고, 1973년에는 보다 화려하게 금단청을 입혔다가 1988년에는 서울 올림픽에 맞추어 단청을 재변경하였다.[45]

  • 국보 1호 관련 논란
숭례문은 1962년 문화재 보호법을 새로 제정하면서 국보 1호로 지정되었고, 그 이름이 주는 상징성으로 인해 오랫동안 한국을 대표하는 문화재로 인식되었고 대외적으로도 그러한 방향으로 홍보되었다. 그러나 역사적 맥락에서 볼 때 이는 1934년 일본이 보물 1호를 숭례문으로 지정한 데에서 비롯된 거라 논란이 이전부터 거셌다. 이 역시 숭례문이 국보 1호라는 상징성 때문에 대표적인 논란이 된 것이지 사실 숭례문에 한정된 문제가 아니기에, 한국 문화재 목록의 역사적 맥락, 행정 관리 등 문화재계 전체에 대한 담론으로 확장되었다.
해당 문제가 처음 공론화된 것은 1996년 광복 50주년 기념 차원에서 정부가 "역사바로세우기"의 일환으로 "일제 지정 문화재 재평가 위원회"를 연 것이다.# 이 때 일제 강점기에 지정된 503 건의 문화재에 대한 전체 재평가가 이루어졌는데, 국보 1호 변경 논란이 처음 수면 위로 떠올랐다. 이는 숭례문보다 가치가 높은 문화재를 국보 1호로 교체해야 한다는 취지인데, 해당 주장 측에서는 석굴암, 불국사, 훈민정음 등을 예로 들었다.# 이 때 당국에서는 "국보 "1호" 등 지정 번호는 가치 순이 아닌 지정 순서"라며 실제 교체는 이뤄지지 않고 "서울 남대문"을 "서울 숭례문"으로 이름이 교체되는 데에 그쳤다.# 이후 2005년에 같은 논란이 일어났으나 국민 여론으로 무마되었다.# 이 논란은 방화 사건, 부실 복구 논란 직후 재점화되었는데, 결국 문화재청 측에서는 2021년 지정번호를 사용하지 않기로 함으로써 추가적인 논란을 차단하였다.

숭례문은 수십 년 동안 섬처럼 고립되었는데, 이에 대해서 숭례문 본래의 관문으로서의 가치를 존중하지 않는다는 비판이 지속적으로 제기되었다.# 이후 서울시에서는 광장을 조성하여 2006년 3월 3일 개방하여 숭례문에 대한 접근성을 높였다. #


5.4. 2008년 방화 사건[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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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화 사건 7년 전인 숭례문의 모습 (2001년 4월)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숭례문 방화 사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건축 이래 큰 이변 없이 그 자리를 지켜온 숭례문은 2008년 2월 10일에 방화로 인해 대형 화재가 발생하여 반쯤 붕괴되었다.[46] 복원 작업은 5년 뒤인 2013년에 완료되었으나, 단청이나 목재 등에 대한 부실 공사 논란이 발생하였다.


6. 사건·사고[편집]


  • 1991년 8월에 만취한 50대 남성이 훔친 승용차를 몰고 숭례문의 철제 출입문을 들이받았다.
  • 1997년 2월에도 만취한 30대 남성이 일본인 관광객 2명과 함께 숭례문의 통제구역에 침입했다가 경찰에 체포되었다.


7. 숭례문 수문장 교대식[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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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례문 교대식 행사
전소하기 전날까지 숭례문을 지키는 사람(수문장)을 교대하는 의식을 보여주는 행사를 했다. 저녁때쯤 철수했다고 한다.

현재는 파수의식으로 대체하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수문장 교대식 문서 참조.


8. 다른 매체의 숭례문[편집]


  • 비행 FPS 게임 〈디센트〉 시리즈 3번째 작품의 서울 미션에서 등장한다. 해당 미션의 최종 장소인데, 주인공은 PMTC의 부조리한 면을 이곳에서 입수하며, PMTC에서는 그런 주인공을 죽이기 위해 Pyro-GL 2대를 보스로 보내서 상대하게 한다. PMTC가 개조해 놓았는지 처마에 레이저 포탑이 달려있다. 문제는 제작진이 상상하는 서울의 이미지가 실제와는 다르게 살짝 왜곡(?)되었다는 것이지만... 한글 간판도 등장하고 서울 느낌을 내려는 노력은 있었다.
  • 레이싱 게임인 〈그란 투리스모 시리즈〉(그란투리스모4(PS2)/그란투리스모(PSP))에서 서울 시가지 코스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의 다르나서스 정문에는 숭례문과 똑같이 생긴 오브젝트가 있다.
  • || {{{#!wiki style="margin: -5px -10px"파일:C7758-06.jpg}}} ||
    〈투모로우〉 한국판 포스터
지구온난화로 인한 빙하기가 배경인 영화 〈투모로우〉의 한국 한정 포스터가 얼어붙은 숭례문이다.
아랑전설2〉에서 최초의 외국 게임 속 한국인 캐릭터김갑환의 스테이지에 최초의 한국 스테이지로 등장했다.

9. 찾아오는 방법[편집]


서울 지하철 4호선 회현역서울역에서 약 400m 정도 걸으면 도착한다. 버스의 경우 옛 YTN타워 앞의 정류장이나 숭례문 정류장에 정차하는 버스가 많으므로[50] 이것을 이용하면 된다. 다만, 일부 노선들은 한쪽 방향에만 숭례문에 정차할 수 있기 때문에 미리 확인해야 한다.

중앙차로는 서울역 방향에만 설치되어 있으며, 서울역버스환승센터 7번 승강장은 숭례문 쪽으로 직결되어 있다.[51]

버스 정류장명 중 서울역 방향으로 "서울역, YTN"으로 된 정류장이 있는데, 정작 서울역에서는 이 정류장이 너무 많이 떨어져 있고 지하철 출구를 횡단해야 한다. 게다가 노숙자들을 보면서 횡단해야 한다.

정류장이 옛 YTN타워와 신한은행 바로 앞에 있고 이 정류장에서 숭례문이 코앞인데다가 YTN이 본사를 마포구 상암동으로 이전하게 되면서 정류장명도 숭례문으로 통일했다. 하지만 버스들은 여전히 수정하지 않고 그대로 서울역으로 표기하고 있다.

특히 경기도 버스들이 이 낚시성 표기를 많이 하므로, 수도권 외 지역에서 오는 사람들은 서울역과 숭례문을 오갈 때 유의해야 한다.


10. 여담[편집]




11. 갤러리[편집]


출처: 국가문화유산포털
파일:서울 숭례문_홍예기석 (촬영년도 : 2015년).jpg
숭례문의 홍예기석

파일:서울 숭례문_현판과 우진각지붕 (촬영년도 : 2015년).jpg
숭례문의 현판과 우진각지붕

파일:서울 숭례문 측면 전경 (촬영년도 : 2015년).jpg
숭례문 측경

파일:서울 숭례문 (촬영년도 : 2015년).jpg
숭례문의 문

파일:서울 숭례문_홍예 (촬영년도 : 2015년).jpg
숭례문의 홍예

파일:숭례문 홍예 천장(2015).jpg
숭례문의 홍예 천장

파일:숭례문 전경(2013).jpg
숭례문 원경

파일:신 십환.jpg
10환 지폐 전면에 담긴 숭례문

파일:남대문 시장과 숭례문(1904).jpg
1904년, 남대문 시장과 숭례문

파일:숭례문(1882).jpg
1882년의 숭례문

파일:봄 숭례문(2015).jpg
숭례문 춘경

12. 외부 링크[편집]




13. 국보 제1호[편집]



파일:정부상징.svg 문화재 설명문
조선시대 한양도성의 정문으로 남쪽에 있다고 해서 남대문이라고도 불렀다. 현재 서울에 남아 있는 목조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태조 5년(1396)에 짓기 시작하여 태조 7년(1398)에 완성하였다. 이 건물은 세종 30년(1448)에 고쳐 지은 것인데 1961∼1963년 해체·수리 때 성종 10년(1479)에도 큰 공사가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후, 2008년 2월 10일 숭례문 방화 화재로 누각 2층 지붕이 붕괴되고 1층 지붕도 일부 소실되는 등 큰 피해를 입었으며, 5년 2개월에 걸친 복원공사 끝에 2013년 5월 4일 준공되어 일반에 공개되고 있다.
이 문은 돌을 높이 쌓아 만든 석축 가운데에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을 두고, 그 위에 앞면 5칸·옆면 2칸 크기로 지은 누각형 2층 건물이다. 지붕은 앞면에서 볼 때 사다리꼴 형태를 하고 있는데, 이러한 지붕을 우진각지붕이라 한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기둥 위부분에 장식하여 짠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그 형태가 곡이 심하지 않고 짜임도 건실해 조선 전기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지봉유설』의 기록에는 ‘숭례문’이라고 쓴 현판을 양녕대군이 썼다고 한다. 지어진 연대를 정확히 알 수 있는 서울 성곽 중에서 제일 오래된 목조 건축물이다.
Ο 숭례문 방화 화재(2008.2.10)
2008년 숭례문 방화 사건(崇禮門放火事件)은 2008년 2월 10일 ~ 2월 11일 숭례문 건물이 방화로 타 무너진 사건이다. 화재는 2008년 2월 10일 오후 8시 40분 전후에 발생하여 다음날인 2008년 2월 11일 오전 0시 40분경 숭례문의 누각 2층 지붕이 붕괴하였고 이어 1층에도 불이 붙어 화재 5시간 만인 오전 1시 55분쯤 석축을 제외한 건물이 훼손되었다.


14.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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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로마자 표기법에서는 발음되는대로 적는 것을 우선시하기 때문에 Sungnyemun이 맞다.[2] 사단(四端)인 인/의/예/지로 한정하기도 한다.[3] 첫 기록: 태조 5년 9월 24일[4] 승정원일기에서는 순조 대까지 발견[5] 첫 기록: 중종 18년 6월 29일[6] 현전하는 본(本)은 1791년(정조 15) 보완[7] 태조 3년 9월 9일[8] 태조 4년 10월 7일[9] 태조 7년 4월 26일[10] 하지만 정도전과 무학대사가 한양의 주산을 두고 논쟁하였으며 무학이 "200년 후를 지켜보라"고 발언하였다는 등의 훗날 발생한 것으로 보이는 야사도 같이 수록되어 있다. 『삼봉집』에서는 임진왜란을 특별히 언급하지는 않았다. 또한 건춘문, 영추문, 신무문은 정도전이 지은 것이 아니다.세종 8년 10월 26일[11] 어느 성곽이나 남쪽 문은 남문 또는 남대문이라 불렸으며 특히 개성 내성의 남문은 공식 명칭이 남대문이었다.[12] 한성이 서울로 자주 불리고, 수원 장안문이 보통 북문으로 불린 것과 유사하다.[13] 단순 계산으로 <실록>은 '남대문' 252건, '숭례문' 203건이며 <승정원일기>는 '남대문' 212건 , '숭례문' 1516건이다.[14] 해당 실록은 1413년 3월 편수하고, 1448년 6월 증보 편수하였으므로 적어도 1448년 당시의 상황을 반영한 것이다.[15] 원문: 雲峴之始得政也, 甞因公會, 盛氣向諸宰曰, 吾欲引千里爲咫尺, 吾欲剗泰山爲平地, 吾欲高南大門三層, 於諸公何如.[16] 숭례문, 흥인문은 각각 남대문, 동대문으로 불렸으나 돈의문은 옛날에는 서대문이 아닌 새문(신문新門)이라고 불렸다. 규모도 평범한 1층 문루였다.[17] 1448년 홍치제의 등극을 알리기 위해 조선에 파견된 관리[18] 태종 16년 6월 5일[19] 영조 즉위년 11월 25일[20] 출처 : 국가문화유산포털, 서울 숭례문[21] 양녕대군 후손들이 양녕대군 사당인 지덕사(至德祠)에 편액을 내려달라고 영조에게 요청하는 상소문의 일부로써 전체 내용은 대부분 양녕대군에 대한 칭송이다. 문중 입장에서 당연히 최대한 포장해서 썼을 것이기에 행적 부분은 감안해서 봐야하지만, 적어도 당시 숭례문 편액이 양녕대군의 작품이며 잘 쓴 글씨라는 인식이 있었다는 것 정도는 짐작해볼 수 있다.[22] 이 때쯤 이승보가 현판 탁본을 떴다고 전해지는데, 이 탁본이 훗날 현판 복원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23] 유진동과 관련해서는 특이하게도 다양한 자료가 제시되고 있는데 2008년에 출간된 '죽당 유진동'이라는 책에서 숭례문의 현판에 관련한 내용을 총정리한 적이 있다.# 이 책에서는 중간에 작자가 바뀌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24] "신은 듣건대, 우리 서울(國都)의 주산(主山)이 화산(火山)의 〈형국(形局)이기〉 때문에 당초 도읍을 정할 때에 모화관(慕華館) 앞과 숭례문(崇禮門) 밖에 못을 파서 진압하게 하였는데, 신이 직접 본 바로는 병오년부터 화재가 끊어지지 아니하였으며, 전자에 이중(里中)으로 하여금 요령(搖鈴)을 가지고 길에 돌아다니면서 서로 경계하게 하였으니, 청컨대 이 법을 회복하게 하소서."[25] 원래 전통적으로 잘 썼다는 글씨는 괴이한 빛을 발한다는 식의 야사가 많다. 경희궁 정문인 흥화문 편액의 경우 글씨가 밤에도 빛난다고 해서, 근처 고개 이름이 “야주개”(夜照現)였을 정도다.[26] 중앙은 지덕사 소장 현판 탁본, 우측은 화재 당시 손상된 현판.[27] 신증동국여지승람#[28] 세종 15년 7월 21일[29] 성종 13년 11월 9일[30] 『오주연문장전산고』 ##[31] <허동현의 모던 타임스> (58) 빛바랜 사진으로만 남은 남대문 옆 연못, 南池 #[32] 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 #[33] 문화재청[34] 상량문 : 洪武二十玖年丙子十月初六日 判事嘉靖大夫中樞院使崔有慶正憲大夫全羅道觀察黜陟使李茂 推忠翊戴開國功臣資憲大夫完山府尹孫興宗 副判事前嘉善大夫開城府尹李之浩 前嘉善大夫戶曹典書石崇使前中直大夫司僕卿尹乙休 副使前司僕少卿景廉 判官前中郞將張仁哲前中直大夫司僕卿朴理 前書雲副正張璡 前中郞將權乙奇 司損司直兪英俊 前中郞將金建 前中郞將鄭壽山 前中郞將崔興國 前中郞將任富前中郞將金渚 前中郞將金允甫 前中郞將庚鼇山 常務錄事 都評議錄事前別將孫興夏 都評議錄事前別將張籍 別監役 前南部令朴貴生石手 某主 ○○ 鄭化 ○○…○賢布 富議 ○同…○天湜 金豆彦王持…○○ 軍人 全羅道完山府 任領內 合陸仟捌伯拾柒名 (考古美術同人會, 7~8쪽)[35] 서치상, "여말선초 목조건축 부재 묵서명에 관한 연구", 건축역사연구(2018), vol.27, no.3, 통권 118호 pp. 43-58 #[36] 세종 15년 7월 21일[37] 세종 29년 8월 30일[38] 성종 10년 1월 17일[39] The trail gradually became steeper, entered a defile, and passing through a cut in the hills emerged upon other suburbs more densely populated than those below. The travel increased, the house thickened; we turned a corner, and the great walled city of Korea lay spread out at our feet. / I have seen sights as beautiful, as strange, before; but I never beheld anything that so completely realized the fancies of my boyish dreams as what I stood gazing upon then. There they all lay spread out before me as if conjured up to life, —the imaginations of the time when, as a lad, my thoughts sped away from the pages of the "Arabian Nights" to the dreamy Orient. In front of me rose the south gate, —by name, "The Gate of Everlasting Ceremony,"—one of the eight clasps of the city's girdle. On either hand stretched a crenellated wall, encircling as with an arm the spot it loved. Protected within, nestling to it for safety from without, huddled the low one-storied houses, —a sea of roofs, some tiled, some thatched. archive[40] 지금의 대한상공회의소 앞쪽에 성벽같이 생긴 담벽이 바로 숭례문 성벽이다. 그리고 대한상공회의소 보도블록에는 성돌이 박혀있다. 성벽이 지나간 자리를 표시해 놓은것이다. 그래서 이름도 숭례성터길이다.[41] 여담으로, 이건 모르는 사람들이 많은데, 2008년 숭례문 복원할 당시 숭례문 옆 아스팔트 도로 위에다 붉은색으로 숭례문을 연결한 한양도성이 지나간 자리를 성돌 모양으로 표시해놨었다. 하지만 현재는 도로 재포장으로 인해 지워진 상태이다.[42] "동대문과 남대문은 황성(皇城) 큰 거리와 연결되어 있으므로 사람들이 붐비고 수레와 말들이 복잡하게 드나듭니다. 게다가 또 전차(電車)가 그 복판을 가로질러 다니기 때문에 서로 간에 피하기가 어려워 접촉사고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교통 운수의 편리한 방도를 특별히 강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문루(門樓)의 좌우 성첩(城堞)을 각각 8칸씩 헐어버림으로써 전차가 드나들 선로(線路)를 만들고 원래 정해진 문은 전적으로 사람만 왕래하도록 한다면 매우 번잡한 폐단이 없을 것 같습니다. 삼가 도본(圖本)을 가져와 성상께서 보실 수 있도록 준비하였습니다. 삼가 성상의 재결(裁決)을 기다립니다." 고종 44년 3월 30일[43] "오늘은 ○○ 행차의 자동차 바람뿐이오 미국 관광단의 인력거 행렬뿐이니 신세가 이 꼴에 무슨 소리를 하오리까". "구문팔자타령(九門八字打鈴)-남대문(南大門) (3)" , <동아일보>, 1928년 4월 26일.[44] 목수현, "관광 대상과 문화재 사이에서 -숭례문, 황궁우, 경회루를 통해 본 근대 ‘한국’ 표상 건축물의 위상-", 동아시아문화연구 제59집|15~42쪽|2014.11[좌] [우] [45] 문화재청, "숭례문 복구 및 성곽 복원공사 수리보고서", 2013 #[46] 붕괴 이후 사진을 보면 흔히 알려진 것과는 달리, 완전 붕괴되지는 않고, 어느 정도 남아 있는 것을 볼 수 있다.[47] 숭례문 바로 건너편에 신한은행 본점이 있다.[48] 월드맵 한정, 한국맵은 N서울타워[49] 이때 뽀로로 曰.엄청 큰 집이다.[50] 노선 목록은 이곳 참조[51] 그래서 742번, 750A/B번, 752번은 도로 구조 때문에 상행(수색, 신촌방향)은 서울역버스환승센터에 아예 정차하지 못한다.

관련 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