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콜피온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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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콜피온즈
Scorp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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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Scorpions_in_Melbourne,_Australia_17.10.2016.jpg
[1]왼쪽부터 미키 디, 마티야스 얍스, 클라우스 마이네, 루돌프 솅커, 파베우 몬치보다
국적
파일:독일 국기.svg독일
결성
1965년
독일 파일:니더작센 주기.svg니더작센 주 하노버
데뷔
1972년 2월
데뷔 앨범
활동
1965년 ~ 현재
멤버
클라우스 마이네(보컬, 기타)
루돌프 솅커(기타, 백킹 보컬)
마티아스 얍스(기타, 백킹 보컬)
파베우 몬치보다(베이스 기타, 백킹 보컬)
미키 디(드럼)
장르
헤비 메탈, 하드 록, 글램 메탈
레이블
라이노, RCA, EMI, Sony
링크
[파일:Scorpions-Logo.png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파일:X Corp 아이콘(블랙).svg
파일:페이스북 아이콘.svg[[https://www.youtube.com/c/scorpions

1. 개요
2. 역사
3. 밴드 멤버
3.1. 현 멤버
3.2. 전 멤버
4. 여담
5. 디스코그래피
5.1. 정규 앨범
5.2. 실황(공연) 앨범
5.3. 편집 (컴필레이션) 앨범



1. 개요[편집]


독일하드록, 헤비메탈 밴드.

1948년 8월 31일 서독 하노버에서 태어난 루돌프 솅커(Rudolf Schenker)와 1955년 1월 10일 출생한 마이클 솅커(Michael Schenker) 형제가 주축이 되어 1965년에 결성[2]된 스콜피온즈는, 1969년 보컬리스트 클라우스 마이네(Klaus Meine)를 영입하여 1971년에 녹음한 'Lonesome Crow'를 1972년 발표함으로써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여 크라우트 록[3] 사운드를 들려주어 약간의 주목을 받는다.

주 멤버는 리더이자 창립 멤버인 루돌프 솅커(리듬 기타), 클라우스 마이네(보컬), 마티아스 얍스(리드 기타)가 주축이고 이 외 베이스는 가끔 드럼은 자주 바뀐 편이다.


2. 역사[편집]


루돌프 솅커는 10대 초반 시절 때 스콜피온즈를 결성해서 친동생 마이클 솅커와 동네 친구들과 같이 동네 밴드 정도의 수준으로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러던 중 평생 같이 밴드를 할 클라우스 마이네도 만나게 된다.

당시 인기 영국 록밴드였던 UFO(밴드)가 순회공연의 오프닝을 맞던 중 기타리스트가 여권을 잃어버려 마이클 솅커를 대타로 빌려왔는데 UFO가 그를 맘에 들어한다. UFO의 구애에 마이클 솅커가 UFO로 이적하자 스콜피온즈는 최악의 상태를 맞는다.[4][5] 당장의 남은 투어 공연들은 루돌프 솅커의 친구였던 울리 존 로스(Uli Jon Roth)를 리드기타로 세워서 해결했다. 울리 존 로스는 자신의 밴드가 따로 있어서 활동을 계속할 수는 없었고 결국 스콜피온즈는 얼마 후 해체하게 된다.

이후 울리 존 로스의 밴드에 루돌프 솅커와 클라우스 마이네가 역으로 합류했고, 스콜피온즈의 이름이 상대적으로 더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밴드 이름을 스콜피온즈로 바꾸게 된다. 그렇게 새로이 구성된 멤버로 1974년 앨범 Fly To The Rainbow를 발표하여 정통 사이키델릭 록의 진수를 들려주었다. 조금씩 멤버 구성이 바뀌어가며 4개의 앨범을 내고 밴드는 일본에서 인기를 얻는 등 서서히 성과를 내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소속 레이블에서도 더 적극적으로 지원을 해주는 동시에 더 상업적인 앨범을 만들라는 요구를 했다. 울리 존 로스는 계속 사이키델릭 록을 하고 싶어했고, 변해가는 밴드의 정체성에 반발해서 밴드를 떠나기로 한다.

1979년 원년 멤버 마이클 솅커가 잠시 참여한 앨범 'Lovedrive'가 상업적 성공을 거두어 대형 밴드로 성장했다. 1980년과 1982년에 'Animal Magnetism'과 'Blackout'을 발매했고, 둘 다 플래티넘 인증을 기록하며 히트했고, 2년 후인 1984년에 발매한 'Love At The First Sting'은 대한민국에서 한때 엄청난 인기를 끌었던 파워 발라드 Still Loving You, 80년대 헤비 메탈의 대표곡 중 하나인 Rock You Like A Hurricane 같은 명곡들을 수록하여 음악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음과 동시에 미국에서 트리플 플래티넘을 기록하는 대박을 터뜨렸고, 곧 스콜피온즈는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또한 1985년에는 월드 와이드 라이브 투어를 다니면서 더욱 명성을 높였다. 이 라이브 투어는 앨범으로도 만들어져 미국 차트에서 14위를 랭크했다.

라이브 투어가 끝난 시점부터 밴드는 새 앨범의 제작에 착수했고, 3년이라는 긴 제작 기간을 거쳐 1988년 'Savage Amusement'가 발매된다. 앨범은 미국 차트에서 5위를 기록하고 역시나 플래티넘을 올리는 등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비평적으로도 성공한 듯 보였지만, 기존의 팬들과 평론가들 몇몇은 이 앨범을 기대에 못 미치는 다소 실망스러운 앨범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앨범의 대표곡으로는 스콜피온즈의 또다른 하드록 명곡인 Rhythm Of Love가 있다. 한편 앨범의 발매 후 밴드는 러시아에서 공연을 했고, 이 공연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러시아 투어 후, 스콜피온즈는 새로운 시도를 위해 프로듀서를 디에테르 디에르크스에서 키스 올센으로 바꾸게 되고, 1990년 'Crazy World'가 발매된다. 이 앨범은 비평적으로나 상업적으로나 가장 성공한 앨범이며, 700만 장이 판매되었다. 싱글로 발매되어 무려 1400만 장이 판매된, 명백한 스콜피온즈의 최고 인기곡인 Wind of Change, 애절한 멜로디가 계속 반복되는 Send Me An Angel 같은 히트곡들을 수록했고 이전까지 그저 독일에서 건너온 평범한 록 밴드였던 스콜피온즈를 유럽을 대표하는 전설적인 밴드로 만들어주는 좋은 성과를 거두었다.

핑크 플로이드의 전 리더 로저 워터스가 주최한 역사적인 The Wall의 베를린 장벽 라이브 공연에도 참가하였다. 유수의 독일 밴드들이 전부 참여한 이 콘서트에서 스콜피온즈는 서독을 대표하는 하드 록 밴드답게 첫 트랙인 In the Flesh의 부분을 맡았다.

레이블을 폴리그램으로 옮겨 1993년 발매한 'Face The Heat'은 이전의 앨범에 비하자면 정말 형편없는 성과를 거둔 실패작이지만, 잔잔한 발라드곡인 Under The Same Sun을 비롯해 스콜피온즈 팬들이 꽤나 좋아하는 곡들이 수록되어 있다. 1996년에는 'Pure Instinct'를 발매했고, 이 앨범에도 밝은 분위기의 파워 발라드 You And I 등 스콜피온즈 후기 사운드를 대표하는 곡들이 몇 곡 수록되어 있지만 이전 같은 성공은 되찾지 못했다.

'Pure Instinct' 이후에 발매된 앨범들은 전성기 시절에 비하면 유의미한 성과를 못내고 있지만, 몇 년마다 꾸준히 앨범을 발매하고 월드 투어를 하며 밴드의 건재함을 알리고 있다.[6]2010년 'Sting in the Tail'을 발표하면서, 앨범이 본인들의 마지막 앨범이 될 거라고 했고, 월드 투어를 가진 후 밴드를 해체하고 은퇴할 거라고 선언했지만, 투어 중 기를 잘 받은 모양인지 은퇴를 번복했다. 이후 2011년에 말 그대로 돌아왔다고 'Comeback' 앨범을 발표했다. 단, 해당 앨범은 신곡이 아닌 과거곡의 재녹음 음원만 수록한 앨범이다. 2015년 2월 20일, 멤버들의 나이줄이 50대 후반에서 60대가 넘어감에도 불구하고 새 스튜디오 앨범 'Return To Forever'을, 2022년에는 'Rock Believer'를 발표했다.


3. 밴드 멤버[편집]



3.1. 현 멤버[편집]


  • 루돌프 솅커 (리듬 기타/리더): 1965~1973(정식 데뷔 이전의 활동), 1974~현재(정식 데뷔 후 활동)
  • 클라우스 마이네 (보컬): 1969~1973(정식 데뷔 이전의 활동), 1974~현재(정식 데뷔 후 활동)
  • 마티아스 얍스 (리드 기타): 1978~현재 [7]
  • 파베우 몬치보다 (베이스): 2003~현재[8]
  • 미키 디 (드럼): 2016~현재 [9]


3.2. 전 멤버[편집]


  • 보컬
    • 베르너 호이어(Werner Hoyer): 1967[10](데뷔 전 멤버)
    • 베른트 헤그너(Bernd Hegner): 1967-1969 (데뷔 전 멤버)[11]

  • 리드기타
    • 카를하인츠 폴머(Karl-Heinz Vollmer): 1965~1967 (데뷔 전 멤버)
    • 울리히 보로빅(Ulrich Worobiec): 1967~1969 (데뷔 전 멤버)
    • 마이클 솅커: 1969~1973, 1978~1979
    • 울리 존 로스 (리드 기타): 1974~1978[12]

  • 베이스
    • 아힘 키르흐호프(Achim Kirchhoff): 1965~1968 (데뷔 전 멤버)
    • 로타르 하임베르크(Lothar Heimberg): 1968~1972 (데뷔 전 멤버) [13]
    • 프란시스 부흐홀츠(Francis Buchholz): 1974~1992[14]
    • 랄프 리커만(Ralph Rieckermann): 1992~2003 [15]

  • 드럼
밴드 초창기 때부터 여러가지 문제 때문에 자리를 제대로 잡지 못하였을 때 변동이 많았다.
  • 볼프강 지오니(Wolfgang Dziony): 1965~1972 [16]
  • 조 위먼(Joe Wyman): 1972 [17]
  • 베르너 뢰르(Werner Löhr): 1972~1973
  • 헬무트 아이젠훗(Helmut Eisenhut): 1973
  • 위르겐 로젠탈(Jürgen Rosenthal): 1974 [18]
  • 위르겐 페흐터(Jürgen Fechter): 1974~1975 [19]
  • 루디 렌너스(Rudy Lenners): 1975~1977 [20]
  • 헤르만 라레벨(Herman Rarebell): 1977~1995[21][22]
  • 커트 크레스(Curt Cress): 1995~1996 [23]
  • 제임스 코탁(James Kottak): 1996~2016[24]


4. 여담[편집]


  • 앨범의 커버아트들이 하나같이 전위적이고 선정적인 게 많아 사회보수적인 한국이나 미국 등지에서 검열된 채로 수입됐어야 했다. 우리나라에서 스콜피온즈 이름을 알린 'Lovedrive'부터가 교체된 표지를 사용했다. 미국의 월마트에서 선정적인 표지로 판매하는 것을 거부한 바람에 대체 버전을 만들어서 발매했어야 했다. 오늘날에 리마스터 버전이 나오고서야 검열 없이 원본을 사용한다. 가장 으뜸은 'Virgin Killer'의 표지로, 이 앨범은 너무 대놓고여서 지금도 인터넷 검색 시 검열된 버전을 사용할 때가 많다.[25]
  • 더 이상 선정적인 표지를 안 쓰게 된 Eye to Eye 이전까지의 앨범 중 무려 6개 앨범이 표지의 커버 아트로 인해서 크든 작든 물의를 일으켰고 그렇게 5개 앨범 표지가 교체되었다.
  • 밴드는 초창기 때 그렇게 인기가 없었는데, 그 이유는 밴드 활동 당시 독일에선 밴드 음악이 아닌 디스코가 유행했었기 때문에 기타들고 무대 위에서 기타 솔로를 보여주는 퍼포먼스 자체가 그닥 호응을 받지 못하던 시대였다고 한다. 이 때문에 마이클 솅커는 록밴드를 인정해주는 영국으로 가서 활동하고 싶었다고 한다. 아무튼 밴드와 록 음악의 볼모지나 다름 없던 상태에서 꿋꿋하게 록 음악을 해온 결과, 후대 독일 록 밴드가 왕성하게 활동할 수 있는 환경을 다져주었다.[26] 그 덕에 독일 국민밴드나 독일 록의 아버지라 불린다.
  • 루돌프의 동생인 마이클 솅커는 UFO로 이적했다가 본인의 그룹인 마이클 솅커 그룹(약칭 MSG)을 만들어 활동하고 있는데, 스콜피온즈의 전 드러머 인 헤르만 라레벨, 전 베이시스트인 프란시스 부흐홀츠가 그 쪽으로 가기도 했다. 마이클 본인은 몇 번이나 UFO와 함께 활동하기도 했다.
  • 리더가 루돌프 솅커이지만 밴드 음악 자체는 리드 기타리스트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밴드 기수를 마이클 솅커, 울리 존 로스, 마티아스 얍스로 나눈다면 이 세 기타리스트들의 재직 때의 앨범은 서로 다른 밴드라고 할만큼 음악적 스타일이 달라도 너무나도 다르다. 이는 루돌프 솅커가 프로 입장에선 리드 기타를 하기엔 다소 아쉬운 실력이 있기 때문에 밴드의 리드 기타 부분은 실력 좋은 멤버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고 자연스럽게 전체적인 밴드 사운드는 리드 기타의 스타일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
그렇다고 루돌프가 실력 없는 기타리스트는 절대 아니다. 리드 기타에 맞추어 주는 솜씨를 보자.



Coast To Coast에서 루돌프 솅커는 단순히 파워코드만 연주 할 줄 하는 실력이 아니라는 것을 볼 수 있다. 솔로잉만 잘 안될 뿐이지 왠만한 리프들도 충분히 잘 연주하는 실력이고, 무대위에서 시도때도 없이 달리가나 움직이는 퍼포먼스를 하면서 정확하게 연주를 한다. 그 이외에 Still Loving You 같은 곡만들어도 아르페지오 주법은 완벽하게 구사하는 등 리듬 기타로서 제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는 실력이다. 대부분 밴드들이 그렇듯이 리듬기타는 베이스 못지않게 좀 소외받는 이미지가 강하다.

  • 공연 시작 곡은 언제나 Coming Home이다.

  • 대한민국에서는 'Holiday', 'Still Loving You', 'Always Somewhere', 'Wind of Change' 같은 발라드곡이 유명해서, 발라드 전문 밴드로 인식되는 경향이 있다. 사실 앨범을 출시할 때마다 발라드의 비중이 비교적 높은 밴드이기도 하다. 클라우스 마이네의 허스키하면서도 맑은(?)[27][28] 음색과 애절한 발라드가 적절하게 어울린다. 이 때문에 1980년대에 한국 팬들이 무척이나 좋아했다.
  • 그렇지만 언제나 발라드 록 위주의 곡만 연주하는 건 아니라서 "Big City Night" 같은 강렬하면서도 신나는 음악도 있다. 무엇보다 당장 대표곡이 강력한 기타 리프가 돋보이는 Rock You like a Hurricane, No One like you인 스콜피온즈인 만큼, 대부분의 인식은 하드 록 밴드로 인식되고 있다.[29]
  • 아무래도 독일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밴드였다 보니 시대 상황을 투영한 노래도 있기 마련인데, 특히 'Wind of Change'는 독일 통일냉전 종식을 대표하는 음악이 되기도 했고, 통일 후에도 독일을 대표하는 곡 중 하나로 손 꼽힐 정도이다.

  • 2000년에 발매된 'Moment of Glory' 앨범은 같은 해 독일 하노버에서 개최된 2000 하노버 엑스포를 기념하는 앨범이다. 마침 하노버가 루돌프 솅커를 비롯한 원년 멤버들의 고향이기도 하고 멤버들의 조국인 독일을 위해 기획하는 앨범의 취지가 좋았는지, 대중음악과 타협하지 않는 콧대 높은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의 협연 섭외에 성공하며 엄청난 화제가 되었으며, 실제 음반평에 있어서도 현존하는 크로스오버 앨범들 중에 록밴드오케스트라가 협연한 최고의 음반으로 평가받고 있다.
  • 'Moment of Glory' 발매 1년 전인 1999년에 메탈리카가 내놓은 S&M(샌프란시스코 심포니와 협연)이 "역시 록과 오케스트라는 전혀 조화를 못 이룬다."라는 혹평을 받자 스콜피온즈의 'Moment of Glory' 역시도 그러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발매 이전에 존재했다.[30]
  • 이런 우려와는 다르게 이 앨범의 타이틀곡이기도 한 동명제목 'Moment of Glory'는 하노버 엑스포 2000의 주제곡으로 쓰이기도 했고, 한물 갔다는 평을 비웃기라도 하듯 클라우스 마이네가 시원한 창법으로 울림통의 끝판을 보여주는 명트랙 ‘Here in my heart’ 또한 아직까지 회자되고 있다. 가장 히트한 트랙은 ‘Rock You like a Hurricane'을 어레인지 한 'Hurricane 2000'으로, 이 트랙 도입부는 [31]. 베를린 필하모닉이 내는 사운드여서 그런지 여느 ost나 시그널뮤직들과는 격이 다르긴 하다. 다만 이런 분위기에 비해 실제 가사는 좀 거시기한 내용이다. 제목부터가 오늘 밤 내 여자를 태풍처럼 흔들어주겠어...라는 내용,.
  • 단 클래식 계에서의 평가는 그렇게 높다고만은 할 수 없는데, 저명한 클래식 평론가 노먼 레브레히트는 이 음반을 세상에 나오지 말았어야 할 20장의 음반에 이 음반을 선정하며 '제임스 본드 영화음악과 철 지난 롤링스톤스 음악을 뒤섞어놓은 노래이며,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몽유병 환자처럼 그저 반주를 따라갔다' 등으로 혹평을 하기도 했다.[32]
  • 당시 베를린필의 상임 지휘자였던 클라우디오 아바도는 아예 앨범 기획이나 레코딩에 참여하지 않았으며, 또한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차기 상임 지휘자로 내정된 상태였던 사이먼 래틀 역시 다시는 이런 연주가 있어서는 안 된다며 깎아내리기도 했다. [33]
해당 영상. 일렉기타가 벤츠다..
  • 밴드 본인들의 의사인지 음반사의 상술인지는 알 수 없으나, 유난히 컴필레이션 음반이 많다. 위키백과 독일판에 기재된 정규 앨범이 17장인데 비해, 컴필레이션은 무려 39장. 다만 스콜피온즈 공식 홈페이지에는 10장만 소개되어 있다. 영문 위키에서도 본인들이 인정한 저 10장만 기재돼있다.[34] 심지어 수십 년간 부른 발라드곡만 모아 놓은 "Scorpions still loving you"[35] 라는 것까지 있다.
  • 한때 'What U Give U Get Back'라는 노래가 김종서의 '영원'의 표절이라는 소문이 돌았으나, 첫부분이 우연히 비슷하게 들릴 뿐이라며 김종서 측에서도 문제삼지 않아 금방 가라앉았다. (록 보컬리스트로서 선배인 터라, 역시 록커 출신인 김종서가 그냥 뒀을 가능성도 있다. 신해철은 생전에 도용이 명확한 외국 유명 락 밴드의 곡도 그냥 묻어 준 적이 있다.[36] 저작권은 본인 사후 꽤 긴 기간까지 유효하므로 나중에 얼마든지 고소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 초창기에는 하드록보다는 블루스 록과 프로그레시브 록 성향에 가까왔는데, 이건 저 루돌프 솅커의 형제인 기타리스트 마이클 솅커가 밴드에 가입해 활동하면서 그런 성향으로 밴드를 이끌었기 때문이다. 마이클 솅커는 초기에 잠시만 활동하고 밴드를 탈퇴해 영국의 하드록 밴드 UFO에서 활동하다 또 그만두고 자신의 밴드 마이클 솅커 그룹(MSG)를 결성한다.[37] 그의 기타 연주가 워낙 뛰어났기 때문에 마이클 솅커 시절의 스콜피온즈를 가장 좋아하며 그리워하는 팬들도 엄청나게 많다.[38]
  • 마이클이 빠진 리드 기타리스트 자리는 75년부터 독일 사람인 울리히 로스(Ulich Roth,나중에는 Uli Jon Roth로 표기를 바꿈)로 채워 78년까지 활동했다. 이 사람도 기타 실력이 엄청난데, 헤비한 락보다는 블루스와 사이키델릭한 면이 강했고 마치 밥 딜런이 하드록을 하면 그리 될 것 같은 독특한 음색으로 보컬도 겸해서 75-78년의 스코피온즈 음악은 타 세대와 느낌이 꽤 다르다. 현재 스콜피온즈의 느낌으로 정착한 것은 후임으로 공격적인 기타 리프를 구사하는 마티아스 얍스가 들어온 이후. 사실 그룹의 최대 히트곡도 그 이후인 80년대 초-중반에 나왔다.
  • 참고로 마이클 솅커는 1955년생으로 형 루돌프보다 7살이나 어렸다. 밴드가 결성된 1965년에는 겨우 10살이었으며, 14세 때 되어서야 밴드에서 제대로 활동했다. 그런데 그 때부터 벌써 술을 마시고 말썽을 부리곤 했고, 결국 밴드 UFO에 이끌려 밴드를 뛰쳐나갔다. 그래도 형과 사이는 나쁘지 않은 듯 78년 러브드라이브 앨범에서는 여러 곡의 리드 기타를 쳐 주었다. (Coast to Coast를 들어 보면 실력을 다시 알수 있다.)[39] 2000년대에는 형과 함께 Dean의 플라잉 V 시그너춰 모델을 쓰며 같이 온라인/지면 광고에도 나왔다. 2018년 현재, 마이클은 딘의 엔도서 리스트에 그대로 있지만 형은 빠져 있다. 아무래도 형은 주로 쓰는 게 깁슨 플라잉브이라서 그런지도 모른다.
  • 스콜피온즈가 이만큼 성공한 데는 보컬리스트 클라우스 마이네의 유려한 보컬 덕이 크다. 은근히 클래시컬하기도 하고 하드록, 헤비메탈과 상당히 이질감을 보이면서도 또 묘하게 어울린다. 마이네 옹 특유의 쇳소리가 섞인듯 울림감이 강한 미성은 스콜피온스의 록 발라드 곡에서 엄청난 호소력을 가진다. 노래는 전부 마이네가 부르고(가사도 거의 쓰고...) 다른 멤버들(주로 루돌프)은 화음이나 넣는 정도. 다만 2대 리드 기타인 울리 로스는 리드 보컬로 노래도 꽤 했다.
  • 독일 밴드이고 하노버 태생인 주축 멤버(마이네, 솅커형제, 얍스) 뿐 아니라 거쳐간 멤버들도 대부분 독일인이나, 모든 노래 가사가 영어다. 당연 영어도 유창하게 잘 한다.[40] 그런데 마이네든 솅커든 영어로 인터뷰나 토크쇼에 나와서 말할 때와 자국 방송에서 모국어인 독일어로 말할 때 목소리와 말투가 다르다. 모국어를 쓰 때 훨씬 부드럽고 낮은 목소리라 중후한 느낌이 난다.
  • 해외 공연 때 그 나라에서 유명한 현지 노래를 자주 부르는 것으로 유명하다. 1996년 내한공연 때 녹색지대의 사랑을 할거야를 부른 건 국내 올드팬들에게 전설로 회자된다.
  • 공연 직전에 반드시 시바스 리갈을 마시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미디엄 크기의 시바스리갈을 온더 락 다섯 잔에 정확히 나누어 마신다고 한다. 이에 관해 내한 에피소드가 있는데, 어느 내한 공연 당시 스콜피온스를 위해 준비해 놓은 시바스 리갈을 한 스태프가 몰래 마시는 대형 사고가 발생했다. 결국 공연이 임박한 상황에서 공연 스탭들이 급하게 수소문을 하다가 찾게 된 것이 편의점에 있는 미니어처 시바스 리갈. 관계자들이 이걸 40병 정도 쓸어와서 준비를 했고, 이것을 본 스콜피온스는 박장대소를 하며 유쾌한 얼굴로 이 미니어처 술을 일일이 따라서 마셨다고 한다.
  • 2015년 8월 7일에 인천에서 열린 펜타포트 록 페스티벌에 내한했다. 보컬인 클라우스 마이네는 1948년생, 당시 나이가 무려 67세임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보컬을 선보여 팬들에게 환호를 받고 있다.
  • 2020년 현재 결성 55년이 된 대단한 장수 그룹으로, 주축 멤버 연령이 60을 넘었고 그 중 클라우스 마이네와 루돌프(1948년생 동갑 친구)는 2018년에 만 70살이 되었다. 그런데 그 둘은 뜨기 시작한 1970년대 중반부터 (당시 겨우 서른 살...)상당한 노안이었다. 마이네는 대머리, 클라우스는 넒은 이마에 콧수염을 길러서 30대에 40대 중반으로 보이곤 하였는데, 이후엔 그 모습 거의 그대로 40년 이상을 버티고 있어서 이젠 동안에 속한다. 멤버 중 리드 기타를 맡은 마티아스 얍스는 같은 포지션의 전 멤버인 마이클 솅커과 같은 1955년생으로 울리히 로스 후임으로 23살이던 1978년에 들어왔는데, 당시 모습과 현재 모습이 조금 살집이 붙은 거 말고는 거의 변화가 없는 동안이다.
  • 마이클 솅커가 인터뷰에서 스콜피온즈, 정확히는 형 루돌프의 행보에 대해 엄청난 비난을 하였다. 은퇴 번복 및 컴필레이션 음반에서 왜곡된 자신과 스콜피온즈에 대한 내용들 때문에 분노한 것으로 보인다. Lovedrive 당시 형인 루돌프와 스콜피온즈 멤버들이 다시 스콜피온즈에서 연주해달라고 부탁했고, 성사되어 원만히 앨범이 나왔었다. 그런데 이후 컴필레이션 앨범에선 "마이클이 당시에 재가입을 부탁했고, 스콜피온즈는 그걸 거절하다가 겨우 받아줬다."는 스토리로 적혀 있었다. 하지만 그 당시 마이클은 UFO에서 활동하던 중이라 스콜피온즈 앨범의 내용은 새빨간 거짓말이라는 것.[41]
그 이외에 형 루돌프는 "비주얼에만 신경쓰는 엔터테이너지 결코 음악인이 아니다."라고 비판을 했다.[42] [43] 이 때문에 예전처럼 마이클 솅커와 같이 하는 스콜피온즈 공연(UFO로 떠난 이후 한 번도 돌아온 적이 없지만, 게스트로는 자주 참여했다)은 보기 힘들 수 있다. 이렇게 한 동안 형제가 소원했던 건 사실이지만 이후엔 화해했는지 종종 같이 공연하고 다닌다.[44] 자세한 것은 마이클 솅커 항목 참조. 그리고 나이가 들수록 마이클이 형과 비슷해져 서로 닮아가고 있다. 여전히 힘찬 무대로 나이를 잊게 되는데, 2022년 기준 동생이 67세 형이 74세의 노인이다.

  • 성소가 아육대 리듬체조에서 선곡한 게 "Maybe I Maybe you"이다.

  • 한때 대한민국 국군 홍보파트에서 '캐리비안의 해적 OST'와 함께 대단히 사랑한(?) 그룹이다. 특히 2003년부터 KBS1을 통해 방영되던 국군 위문방송 청춘 신고합니다의 오프닝 무대가 Rock you like a hurricane이었는데, 이 곡에 맞추어 KBS 전속 무용단원들이 춤을 추고 항상 거수경례로 끝을 맺었다. 그리고 여자 구경하기 힘든 군부대에서 치어리더 복장으로 춤을 추는 무희들을 본 장병들의 반응은 이하 생략


5. 디스코그래피[편집]



5.1. 정규 앨범[편집]


  • Lonesome Crow(1972): 마이클 솅커 참여
  • Fly To The Rainbow(1974): 마이클 솅커 대신 울리 존 로스 참여
  • In Trance(1975): 이 앨범부터 커버 선정성으로 물의를 일으켰다. 기타에 올라 탄 여성의 유방이 그대로 드러난 사진으로, 시진은 그대로이지만 어둡게 처리해서 보이지 않게 한 표지로 바뀌어 나왔다.
  • Virgin Killer(1976): 선정적인 앨범 커버 중에서도 최악으로 10살 여아의 전신 누드를 싣는 바람에 앨범 제목과 나쁜 쪽으로 시너지를 일으키며 2015년 8월 스웨덴 법원에선 아동 포르노로 판결났다. 물론 1976년 당시와 현재의 기준이 다르긴 했지만, 이것 만큼은 밴드 멤버들도 본인들 의사가 아닌 레코드사의 결정이었다며 유감을 표했다. 관련 위키 글 https://en.wikipedia.org/wiki/Virgin_Killer 국내에 원래 표지대로 나왔다. 당시 대중적으로는 소아성애란 개념이 없었다.
  • Taken by Force(1978)
  • Lovedrive(1979): 국내에 본격적으로 알려진 앨범. Holiday[45]와 록 발라드의 명곡 Always somewhere가 실려 있다. 이 앨범 표지도 한국을 포함해 야하다고 여러 곳에서 교체되었다. 멤버들은 유럽 쪽은 가슴 드러내는 것쯤은 문제가 아니라서 그게 문제를 일으킬 거라고는 생각을 못 했다고 한다.
  • Animal Magnetism(1980): 중년 남성으로 추정되는 남자 앞에 (무언가 죄를 지은 것처럼) 무릎을 꿇고 있는 여성의 모습이 심히 도미넌트 혹은 수치플레이를 떠오르게 하는 커버 디자인이 압권이다. 심지어 이 여성의 옆에는 도베르만 핀셔도 같이 있어서 더욱 그런 분위기를 풍긴다.]
  • Blackout(1982): 여전히 국내 록 밴드들이 많이 커버하는, 날카로운 기타 리프가 일품인 히트곡 가 실려 있다. 뮤비도 있는데, 하드 록 밴드 치고는 뮤비를 냈다는 것이 상당이 이른 편이다.[46]

  • Love at First Sting(1984): 노 원 라이크 유와 함께 양대 히트곡인 가 실려 있는데, 국내에서는 Still loving you가 훨씬 더 인기를 끌었다.[47] 당시 디스코 클럽에서 쉬는 시간(블루스 타임)에 자주 틀었던 곡. 이 앨범 커버도 살짝 야한데, 당시가 5공 시절 광주 학살 이후 대 국민 유화 정책으로 막 풀어주던 때라서 그런지 국내에 그냥 나왔다. 외국에서는 멤버들 사진으로 바뀌어 나온 데가 많다. 재판은 멤버 사진을 넣은 클린 버전으로 나왔다.
  • Savage Amusement(1988)
  • Crazy World(1990)
  • Face the Heat(1993)
  • Pure Instinct(1996) : 한국에 발매한 것은 한국 팬들에 대한 서비스 멘트가 앨범 인트로에 들어있다. 이 판도 표지가 야하다고 바뀌었다.]
  • Eye Ⅱ Eye(1999)
  • Unbreakable(2004)
  • Humanity Hour Ⅰ(2007)
  • Sting in the Tail(2010)
  • Comeblack (2011): 그간 발표된 정규작품 속 대표 수록곡들('Still Loving You', 'Big City Nights', 'Wind of Change', 'No One Like You', 'Rock You Like Hurricane' 등)을 편곡하여 클라우스 마이네가 다시 부르기로 녹음한 일종의 베스트 음반이다. 비록 'Wind of Change'를 제외하곤, 곡의 음역이 낮추어져 있지만 노장이 된 클라우스 마이네의 보컬엔 여전히 혈기가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다. 단순 베스트 음반의 의미는 넘는 작품이기도 하다. 이 앨범에는 비틀즈의 명곡인 'Across The Universe' 커버곡도 수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곡에서 클라우스 마이네의 수려한 가창이 유독 아름답다.
  • Return To Forever (2015)
  • Rock Believer (2022)


5.2. 실황(공연) 앨범[편집]


  • Tokyo tapes(1978,79) 1978년 4월 공연을 LP 두 장에 담았다. 표지는 칼과 꽃이 있는 일본판(국내 정발판과 동일), 공연 사진을 넣은 국제판 두 가지로 나왔다.
  • Worldwide Tour(1985): 미국과 캐나다에서 플래티늄, 영국 독일에서 골드를 기록하며 잘 팔렸다.


5.3. 편집 (컴필레이션) 앨범[편집]


히트곡 모음이 1979년부터 2017년까지 무려 29가지(영문판 위키피디아 기준, 독일판에는 39개)나 나와 있어서 멤버들도 다 모른다.
  • Still Loving You(1992): Still loving you를 포함해서, 발라드 곡만 모은 앨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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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16~현재 라인업[2] 밴드의 시작이긴 한데, 루돌프가 17살에 동생 미하엘은 겨우 10살. 클럽에서 연주하던 동네 밴드였고 마이네 영입 이후가 제대로 활동한 거라 보아도 된다.[3] 독일산 프로그레시브 록, 하드록을 영어권에서 부르던 명칭. 독일 배추 절임인 자우어크라우트에서 나온 말로, 우리 식으로 하면 "김치 록"정도 된다. 다른 밴드로는 크라프트베르크, 노이!가 있다. 한국인이나 한국산더러 김치 어쩌고 하면 그다지 좋은 의미가 있지 않은 것처럼 독일 것에 크라우트를 붙이면 깔보는 의미인 멸칭이 되었으나, 일종의 고유명사처럼 대중적으로 사용된다. 그래도 독일 사람들에게는 하지 말자. 저먼 록, 도이치 록이라고 불러 주면 된다.[4] 이는 리더인 루돌프 솅커가 리드가 아닌 리듬 기타를 했던 탓도 크다. 록/메탈 밴드 특성상 곡 멜로디 중심을 좌우지하는 리드기타의 포지션이 중요한데 그걸 리더가 아닌 다른 멤버가 담당했기에 큰일이었다. 기타리스트 중심인 밴드들 보면 특정 멤버 부재 시 그 큰 공백이 얼마나 큰지 잘 보여준다. 루돌프는 믿을 만한 친동생이니 맡긴 건데, 나갈 줄을 몰랐을 것이다.[5] 루돌프 역시 리드 기타쪽으로 연습을 많이 하였으나 그쪽으로 실력이 전혀 늘지 않았다고 한다. 이 때문에 루돌프가 기타 솔로잉을 하는 모습은 거의 볼 수 없다. 그나마 가끔 Still Loving You의 솔로를 연주하지만 그렇게 현란하지도 않다. 그렇다고 루돌프 솅커의 기본기가 떨어지는 것은 절대 아니다. 리듬기타로서 그의 능력은 우습게 볼 만한 것이 결코 아니며, 걸출한 연주자들을 옆에 두고 굳이 솔로에 집착할 이유도 없다. 또 할 때는 하는 양반이라 3집 수록곡 Life's Like a River의 라이브에서 트윈기타 솔로를 멋들어지게 소화하는 모습도 보여줬다.[6] 사실 이런 밴드들은 주 수입이 앨범 판매가 아니고 공연이기 때문에 앨범은 계속 음악을 내고 있다는 지표일 뿐 실패라고 하기도 뭐하다. 그 유명한 롤링 스톤스도 전성기 시절은 따로 있을지언정 활동 자체는 꾸준하다. 공연 수입은 물론, 그 동안 히트곡의 저작권료만으로도 먹고 사는 데는 지장이 없다.[7] 전임 리드 기타리스트들의 명성이 워낙 넘사벽이라서 그렇지, 진정한 스콜피온즈의 기타리스트는 이 사람이라고해도 무관하다.[8] 폴란드 출신의 베이시스트, 스콜피온즈 가입 이전까지는 수많은 밴드를 전전하다가 스콜피온즈에 가입 후 꾸준히 활동 중이다.[9] 모터헤드의 드러머. 모터헤드의 리더인 레미 킬미스터 사망 후 밴드가 해산된 후 여러 세션 활동을하다가 마침 공백이 된 스콜피온즈 드러머가 되었다. 내로라 하는 정통 하드락/메탈 드러머 중에서도 독보적으로 실력이 뛰어나며 강렬한 파워의 더블 베이스가 인상적이다.[10] 그 독일 정치가 베르너 호이어가 맞다![11] 스콜피온즈가 이 당시엔 동내 밴드 수준이었고, 밴드 탈퇴 후엔 일반인으로 살았을 수 있다. 이 인물에 대해선 검색을 해도 이력이 아에 나오지 않는다.[12] 스콜피온스 재직시 이름은 울리히 로스 었다. 독일의 지미 헨드릭스라고 불릴 정도로 내로라하는 실력의 기타리스트이다. 하지만, 루돌프 셍커가 지향하던 단순하고 힘찬 대중적인 스타일과는 거리가 먼 개성이 강한 스타일을 가지고 있었다. 둘이 작곡한 곡들을 비교해 보면 스타일이 확연히 다르다. 결국 울리히는 4년 만에 밴드를 탈퇴하였다. 그가 참여한 앨범들은 매우 좋은 평가를 받긴하였지만, 골수 스콜피온스 팬이 아닌 일반 대중이 알고있는 스콜피온즈의 사운드는 울리히가 나가고 루돌프가 작곡을 독점 하면서부터 완성되었다. 탈퇴 후 자신의 밴드 일렉트릭선을 결성하여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13] 1983년까지 음악일을 하고 은퇴를 하여 일반인으로 살고 있다.[14] 스콜피온즈 데뷔 초창기 및 황금기를 같이 하였던 멤버. 울리 존 로스의 밴드 Dawn Road에서 같이 활동했던 멤버로서 드러머 위르겐 로젠탈(Jürgen Rosenthal)과 같이 가입. 울리 존 로스와 위르겐 로젠탈의 탈퇴 후에도 밴드에 남았다. 현 베이시스트인 파베우 몬치보다가 2022년 기준으로 18년차이며 그 이전까진 프란시스 부흐홀츠가 가장 오래 재직한 베이시스트였다. 마이클 솅커 밴드 3기의 멤버.[15] 이 양반도 꽤 오래 재직하였는데, 영화 감독을 한답시고 탈퇴하였다.[16] 여러 밴드를 전전하면서 드러머로 아직도 활동 중이다[17] 미국인 멤버로서 초창기 드러머, 아직도 드러머로 활동 중이며 스콜피온즈 멤버들과 만나는 모양.[18] 울리 존 로스와 Dawn Road라는 밴드를 같이하다가 같이 스콜피온즈에 가입. 베이시스트 프란시스 부흐홀츠도 같은 멤버였다. 하지만 군입대를 위해 바로 탈퇴를하고 전역 후 Eloy에서 활동. [19] 1980년대 말까지 음악인으로서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20] Steelover, Such a Noise 라는 밴드서 활동, 아직도 드러머로서 활동 중.[21] 스콜피온즈 황금기 시절 라인업의 멤버. 훗날 마이클 솅커 밴드 3기 멤버. 스콜피온즈 황금기가 지나고 한참 이것 저것 실험적인 음악을하면서 제대로 갈피를 못 잡을 때, 루돌프와 마티아스와 엄청 갈등이 생긴 후 탈퇴하였다고한다. 인터뷰를 보니 아직 스콜피온즈 멤버들과 화해는 안 한 듯 하다.https://ultimateclassicrock.com/herman-rarebell-quit-scorpions-hated-music/[22] 활동 당시 작사에도 상당히 기여했는데 대표적으로 "Rock You Like a Hurricane", "Make It Real", "Dynamite", "Blackout", "Arizona", "Bad Boys Running Wild", "Don't Stop at the Top", 그리고 "Tease Me Please Me"가있다.[23] 독일에서 상당히 유명한 드러머 세션이자 작곡가. 새 드러머를 찾을 때까지 잠시 세션으로 활동.[24] 역대 드러머들 중 가장 오랜 시간을 재적하였지만 2016년 알코올 의존증으로 인해 밴드에서 해고되었다.[25] 사실 이는 독일 록 그룹들의 특성이기도 하다. 독일, 네덜란드 등 서유럽 국가 자체가 성에 대해 개방적인 만큼, 록 그룹들의 이름이나 곡의 제목, 커버 아트에서 선정성이 나타나는 경우가 흔히 보인다. 대표적인 예 중 하나로 Die toten hosen과 같은 그룹이 존재한다.[26] Die toten hosen, Die Ärzte 등이 스콜피온즈의 활동으로 다져진 기반 위에서 성공한 그룹들 중 대표적인 예다.[27] 무슨 말인가 싶지만, 들어보면 진짜 그렇다. 아주 독특한 목소리이다. 약간 쇳소리도 섞여 있는데, 흔히 얘기하는 록커의 메마른 쇳소리(철금성)은 또 아니다. 노안 외모와 싱크로가 전혀 안 되는 것은 덤이다.[28] 국내 가수 중에서는 코요태의 신지가 비슷한 느낌이다. 허스키한데 맑고, 답답한데 시원한 보컬.[29] 그렇다고 한국 밖에서 발라드곡이 인기가 없다는 얘긴 아니다. 공연 때 발라드 히트곡을 부르면 관객 호응이 엄청나다.[30] 더구나 두 앨범을 프로듀싱 한 편곡자가 같은 사람이었기에 더더욱 그런 걱정이 들 수 밖에 없었다.[31] 국내 스포츠 방송이나 에어쇼같이 화려한 시작이 필요한 곳에서 많이 우려먹는다[32] 이 워스트 20 리스트들의 선정기준은 '좋은 의도로 기획되고 최고의 음악가들이 참여했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애초의 목적에서 너무나 벗어나 서투른 모방으로 전락한 음반'이었다.[33] 다만 임마누엘 파후드, 알브레이트 마이어 등을 위시한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유명한 솔리스트 연주자들은 대부분 레코딩에 참여하였다.[34] 영문 위키피디아에는 29장이 올라가 있다.[35] 대표적인 발라드곡 제목과 스코피온스가 아직 팬들을 사랑한다는 두 가지 뜻을 담았다.[36] 신해철이 1998년 영국에서 돌아온 후 결성한 그룹 모노크롬 활동을 같이 한 기타리스트 크리스 상그리디가 'Machine Messiah'에 들어간 기타 리프를 갖다 썼다.[37] 이 사이에 아주 잠깐 복귀하여 앨범 한 장을 낸 적 있다. 그게 바로 Holiday와 Always somewhere가 실린 국내 최고 히트 앨범인 Lovedrive.[38] 초기 앨범에만 참가했다가 첫 해외 순회 공연 때 때려치우고 유에프오로 갔기 때문에 국내 팬들은 대부분 그가 참여한 러브드라이브를 좋아하는 것이다.[39] 앨범 후기에 루돌프는 "참여해 준 동생에게 고맙고, 특히 같이 보아 준 어머니에게 감사한다."고 하였다.[40] 지금도 그렇고 독일이나 북유럽쪽에서 영어가 아닌 모국어로 활동하는 락/메탈 밴드들은 보기 어렵다. 일단 이들의 가장 큰 시장은 북미인 것도 크다. 스콜피온즈 결성 당시 때도 영국과 미국이 한참 밴드 시장이 컷을 때라 아에 처음부터 미국 시장 진출을 노렷을 수도 있다. 마이클 솅커도 이 때문에 영국으로 넘어갔었다.[41] 이미 러브드라이브 녹음 당시엔 후임 기타리스트가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고, 마이클의 연주 실력이 후임자보다 못한 것도 아니며 다른 그룹에서 그럭저럭 잘 나가고 있었기 때문에 복귀를 구걸할 이유가 없다는 상황만 보면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하지만 마이클이 완전히 자리잡은 건 아니었으니 누구 말이 맞는지는 모른다. 러브드라이브 앨범에도 연주자로서 이름만 올라가 있지 멤버 명단에는 없으며, 함께 순회 공연을 다닌 것도 아니다. 즉 스콜피온즈에 정식 재가입 한 것이 아니다. 그룹은 루돌프와 그 친구인 보컬 마이네가 같이 이끌고 있었지만 리더는 어디까지나 그의 형이기도 한 루돌프였기 때문에 루돌프의 주장도 근거가 있을수 있다.[42] 지금이야 평범하게 입고다니지만, 뭔가 화려하게 차려입었던 것은 80년대 쯤이었고 그 당시 대부분의 락 밴드들이 다 그러고 다녔다. 본인도 뭐라하기 뭐한게 마이클 솅커도 무대위에서는 비쥬얼에 상당히 신경을 썻다.[43] 루돌프의 연주 실력이 마이클보다 못한 건 사실이지만, 위에 상기되어있듯이 리듬 기타리스트로서는 결코 무시할 실력이 아니다. 리드 기타리스트가 바뀔 때마다 계속 성향이 바뀌는 가운데서도 그에 다 맞춰 절묘한 하모니를 보여준다. 메탈리카의 리듬 기타인 제임스 헷필드처럼 무대를 휘어잡는 능력은 일품이다. 공연을 하는 밴드로서 무대를 장악하고 관객들의 호응을 받아내는 역할이 얼마나 어려운지 밴드를 해본 사람들은 안다. 마이클이 이렇게 비판하는 것을 보면 뭔가 형제간에 다툴 일이 더 있었는지도 모른다.[44] 그런데 2018년에 인터뷰에서 또 형을 깠다. 2021년에는 "러브드라이브 당시 형이 밴드에 있어 달라고 전화로 울며 매달렸다."라고 더 심하게 깠다. 아무래도 뭔가 있나 보다.[45] 유전무죄 무전유죄로 유명한 지강헌 탈주 사건 때 인질 대치 중 틀어 달라고 했던 곡으로 아는 사람도 있는데, 그 때의 노래는 비 지스의 Holiday이다.[46] 뮤직비디오 혁신으로 꼽히는 A-haTake On Me가 1984년, MTV 시대를 이끈 다이어 스트레이츠Money fot nothing 뮤직비디오가 1985년이다.[47] 국내에선 여러 곳에서 BGM으로 자주 활용되던 베를린필과 협연한 Hurricane 2000이 훨씬 더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