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기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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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국회휘장(9대-19대).svg 대한민국 국회의원 (서울 강서구 갑)
제14대
박계동

제15-17대
신기남


제18대
구상찬
제18대
구상찬

제19대
신기남


선거구 분리
금태섭[1]
한정애[2]

파일:국회휘장(9대-19대).svg 대한민국 국회 정보위원장
제17대 전반기
문희상

제17대 후반기
신기남


제18대 전반기
최병국








대한민국 제15-17·19대 국회의원
신기남
辛基南 | Shin Ki-nam

파일:skn.jpg
출생
1952년 10월 16일 (71세)
전라북도 남원군 남원읍 향교리
(現 전라북도 남원시 향교동)
본관
영월 신씨[1]

마석(磨石)
필명
신영[2]
재임기간
제6·7대 도서관정보정책위원회 위원장
2018년 4월 9일 ~ 2022년 4월 8일
링크

파일:X Corp 아이콘(블랙).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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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아버지 신상묵, 어머니 박금옥[1]
형제자매
누나 신선희[2], 형 신기철[3], 남동생 신기도[4], 남동생 신기호[5]
배우자
김은주[6]
자녀
장녀 신하늘, 장남 신준선[7], 차남 신인선
학력
경성수송공립국민학교[8] (졸업)
경기중학교 (졸업)
경기고등학교 (졸업)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법학 / 학사)
서울대학교 대학원 (법학 / 석사 과정 수료)
병역
대한민국 해군 중위 전역 (교수사관)
종교
개신교(감리교)[9]
신체
180cm, 75kg, A형
소속 정당

의원 선수
4
의원 대수
15, 16, 17, 19
상훈
한글학회 우리말글 지킴이 (2003)
외솔상 문화부문 실천상 (2006)
약력
해군사관학교 교수사관
서울지방변호사회 인권위원 및 총무이사
제15대 국회의원 (서울 강서구 갑 / 새정치국민회의)
새정치국민회의 대변인
바른정치모임 대표
제15대 국회 후반기 문화관광위원회 간사
제16대 국회의원 (서울 강서구 갑 / 새천년민주당)
새천년민주당 최고위원
한국해양연맹 부총재
한국도서관협회 회장
열린우리당 정치개혁위원장
열린우리당 상임중앙위원
열린우리당 영입위원장
열린우리당 선거대책본부장
제17대 국회의원 (서울 강서구 갑 / 열린우리당)
열린우리당 의장
제17대 국회 후반기 정보위원회 위원장
민주통합당 상임고문
제19대 국회의원 (서울 강서구 갑 / 민주통합당)
신진보연대 상임고문
세계도서관정보대회 조직위원장
한국도서관협회 명예회장
더좋은민주주의연구소 공동이사장
복지국가만들기운동본부 공동본부장
더불어민주당 상임고문
대통령 소속 도서관정보정책위원회 위원장 (문재인 정부)


1. 개요
2. 생애
2.1. 소설가 신영
3. 논란
3.1. JMS 정명석 변호 논란
3.2. 아들 로스쿨 외압 논란
4. 여담
5. 소속 정당
6. 선거 이력
7. 둘러보기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작가, 법조인이자 전 정치인[3]. 열린우리당 의장, 15~17, 19대 4선 국회의원을 지냈다.

참여정부 시절 집권 열린우리당의 의장(2004년)을 역임하는 등, 참여정부 시기 열린우리당 실세 3인방, 이른바 천신정 중 한 명이었으며, 유력 차세대 대선 주자였다. 하지만 후술하는 각종 논란으로 이미지가 망가지면서, 결국 정계에서 밀려나게 된다.


2. 생애[편집]


1952년 10월 16일, 전라북도 남원군 남원읍 향교리(現 남원시 향교동)에서 친일반민족행위자인 아버지 신상묵과 어머니 밀양 박씨 박금옥(朴金玉, 1924. 5. 15 ~ 2022. 1. 3) 사이에서 4남 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경기고등학교(66회)[4], 서울대학교 법과대학[5] 법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법학 석사 과정을 수료했다. 대한민국 해군 장교(교수사관)로 만기 전역(1979년부터 1982년까지 해군사관학교 교수를 역임.)하였다. 최종 계급은 해군 항해병과 중위.

1982년 제24회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사법연수원을 14기로 수료한 뒤 변호사로 활동하였다. 1991년에 발생한 대흥동 국교생 살인 누명 사건 때 피의자 권 모 군이 강압 수사를 받았음을 밝혀내는 데 일조했다.[6]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정치국민회의 후보로 서울특별시 강서구 갑 선거구에 출마하여 현역 의원인 통합민주당 박계동 후보와 신한국당 유광사[7]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었다. 같은 해 당선된 정동영, 천정배천신정 소장파 트리오로 활동하였다.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천년민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2002년 새천년민주당 최고위원에 선출되었다.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열린우리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두 선거 모두 한나라당 김도현[8]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었다.

2004년 1월 열린우리당 전당대회 당의장(현 당대표) 경선에 출마했으나 정동영에 밀려 2위에 그쳤다. 다만 당시 열린우리당은 집단지도체제였기 때문에 상임중앙위원(현 수석최고위원)으로 당선되었다.

2004년 5월 정동영이 통일부 장관으로 입각하면서 당의장직을 승계하였으나, 아버지 신상묵일제강점기일본 제국 육군 헌병 오장으로 근무하며 독립운동가들을 잔혹하게 고문했다는 것이 드러나며 논란이 됐다. 그뿐만 아니라 다른 열린우리당 의원들의 가족 친일 문제가 터져나왔고 소설가 이문열은 신기남을 직간접적으로 저격하는 컬럼인 「겜뻬이 고쬬오니 게이부」를 중앙일보에 투고하며 뜨거운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이로 인해 참여정부의 친일 잔재 청산 작업은 타격을 입고 흐지부지되었으며, 노무현 대통령의 이른 레임덕에도 영향을 미쳤다. 결국 취임 3개월 만에 당의장 직을 사퇴하였다.[9]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통합민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한나라당 구상찬 후보에게 밀려 낙선하였다. 원외에 있는 동안 변호사로 활동하였는데, 2009년 4월 17일 여신도 성폭행으로 구속돼서 재판을 받던 JMS 정명석의 변호인단에 갑자기 추가등록 돼서 논란이 되었다.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통합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새누리당 구상찬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었다.

해군 출신답게, 제2연평해전을 다룬 영화 연평해전을 제작하는 데 힘을 보태는 등 제2연평해전 유가족 및 전상자의 보훈 활동에 힘썼다. 이 때 새누리당 소속 이병석 의원과 적극 협력하여, 당파를 초월한 모범 사례로 꼽히고 있다.

2015년 장남의 로스쿨 졸업 시험과 관련하여 압력을 행사하였다는 의혹이 제기되어, 2016년 1월 당 윤리심판원으로부터 당원권 정지 3개월의 중징계를 받았다.# 이에 따라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더불어민주당 공천을 받을 수 없게 되자, 더불어민주당을 탈당하고 민주당(2014년)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현역 프리미엄이 무색하게도 5명 중 5위라는 처참한 성적을 기록하며 낙선하였다.[10][11]

2016년 10월 31일 더불어민주당과 원외 민주당이 합당하면서 다시 더불어민주당 소속이 되었다.

2018년 4월 9일 대통령 소속 도서관정보정책위원회 위원장에 위촉되었다. 경력에 비하면 굉장히 한직이지만 국회의원이었던 2002년 한국도서관협회 회장, 2006년 세계도서관정보대회 조직위원장 및 한국도서관협회 명예회장을 지낸 이력이 있다. 첫 2년 임기를 수행한 후 2020년 연임이 확정되었다.


2.1. 소설가 신영[편집]


도서관정보정책위원장을 맡은 이후 소설가의 길에 뛰어들었다. 아주 뜬금 없는 행보는 아니고 본인부터가 도서관 활동을 많이 했던 인물인데다 꾸준히 소설, 문학에 관심을 가져왔었다고 한다. 본인이 바랬던 길이기도 하고 나름 준비를 많이 해서 그런지 데뷔작 '두브로브니크에서 만난 사람'은 평단, 대중의 평가도 좋았다. 소설 작가이자 서울대학교 국문학과 교수인 방민기 교수가 소설로 추천을 하기도 했으며 YES24에서 한국소설TOP100에 4주간 랭크되어 있기도 했다. 은퇴한 정치인이나 법조인이 뒤늦게 뛰어드는 소설이나 저서가 비교적 판매율이 저조한 걸 고려하면 소설가로서의 자질은 뛰어난 듯.

'두브로브니크에서 만난 사람'은 연애, 여행, 역사를 메인으로 하는 소설로 발칸 반도를 배경으로 하는데, 본인이 전문가일 수 밖에 없는 역사, 정치적 내용도 들어가다보니 고증과 특색있는 소재 면에서는 다른 한국 소설들보다 강하다는 의견도 있다. 결국 해당 소설이 한국과 크로아티아의 합작으로 영화화가 확정되었다.#

크로아티아를 배경으로 한 첫 한국 장편 소설이라고. 이 때문에 크로아티아에서는 눈여겨 보았는지 크로아티아 대사가 직접 신영을 초청해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고 한다. 이후 2021년 크로아티아에 번역되어 출간되었다.

2022년 두번째 작품인 '마요르카의 연인'을 내며 대통령 소속 도서관정보정책위원장을 이번 임기를 끝으로 마치고 정계와 공직에서 은퇴하겠다고 선언했다. 이후 완전히 소설가 신영의 길을 가고 싶다고.#

정치인 출신 작가들이 서적을 내더라도 논설, 역사, 정치와 관련된 서적을 내는 것과 다르게 신영은 순문학, 장르문학에서 연애소설 등을 쓰는 소설가로 직업을 바꾸었다는 점에서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다.


3. 논란[편집]



3.1. JMS 정명석 변호 논란[편집]


여신도 성폭행 문제로 구속된 JMS의 교주 정명석은 수십여명의 전관 변호사들로 선임해서 세간의 화제가 되었다.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의 변호인단을 능가한다는 소리가 나올 정도로 초호화변호인단이었는데, 대법원의 최종 판결이 나오기 직전인 2009년 4월 17일 갑자기 신기남 전 의원이 추가로 등재되면서 사회적으로 파문이 일었다. 당시 신기남의 측근은 "법무법인 대표로서 다른 변호사가 맡은 사건에 자동으로 이름이 올라갔을 뿐이다. 금전 거래도 없었고 실제 변호 활동을 한 것은 아니다”라고 해명하였다. 하지만 이 해명을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앞뒤를 제대로 살피지 못한 경솔한 행동이었다는 비판이 친민주당 성향의 네티즌들 사이에서도 나왔다. 신기남 측 “정명석 변론, 욕만 먹고...”

법조계에선 대법원 확정판결을 앞두고 재판을 지연시켜서 시간을 벌려는 JMS의 꼼수로 여겨졌다. 실제로 대법원은 4월17일 법무법인 한서가 신기남, 이종기 변호사 추가선임을 이유로 신청한 선고기일 연기 신청을 기각하고 예정대로 4월23일 재판을 열어서 징역 10년의 최종선고를 내렸다.

2012년 총선을 앞두고도 공천과정에서 이 문제가 불거졌지만, 신기남 측의 해명이 받아들여져서 공천심사를 무사히 통과하고 본선에서도 승리해서 국회에 복귀하는데 성공하긴 했다. 하지만 신기남은 이 사건으로 사이비종교에 부역하는 정치인, 돈만 주면 다 해주는 변호사 이미지가 생겨서 정치적으론 큰 타격을 받았고, 국회 복귀 이후에도 경력에 비해서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했다. 특히 반민주당 성향의 네티즌들이 이 문제를 집요하게 거론하면서 한동안 주요 커뮤니티를 휩쓸었기 때문에 대중적인 이미지는 상당히 망가졌다.

2009년 JMS 논란이 벌어졌을때 친민주당계 네티즌들도 '이제 신기남이 정치는 안하고, 그냥 돈이나 벌자는 생각이구나'라고 받아들였는데, 2012년 총선에 출마하자 상당히 뜬금없다는 반응이 많았다.


3.2. 아들 로스쿨 외압 논란[편집]


2015년 11월 당시 새정치민주연합(현 더불어민주당) 의원이었던 신 전 의원은 아들이 로스쿨 졸업시험을 통과하지 못하자 로스쿨 원장을 직접 만난 사실이 알려지면서 '구제 논란'이 일었다. #

이에 신기남은 부모 된 마음에 상황을 알아보고 상담하기 위해 찾아간 것이라며 의혹을 부인했지만, 당 윤리심판원으로부터 당원 자격정지 3개월의 중징계를 받았다.

이후 검찰은 신기남에 대해 직권남용 등의 혐의를 인정할 만한 증거가 없어 혐의없음 처분으로 사건을 처리했다. #


4. 여담[편집]


  • 1990년대 초반 KBS에서 방영했던 '여의도 법정'이라는 프로그램의 MC로 활동한 이력이 있다.[12]
  • 2002년 한국도서관협회 회장, 2006년 세계도서관정보대회 조직위원장 및 한국도서관협회 명예회장을 지낸 이력이 있다.
  • 아들 신인선내일은 미스터트롯에 출연하여 다시금 화제가 되기도 했다. 형 신기철은 트로트 가수로 활동했으며 조카 신인선이 미스터트롯에 출연하던 도중 사망했다.
  • 1999년 9월 27일 TV 내무반 신고합니다 해군작전사령부 편에 출신장교 신분으로 출연했다. #

5. 소속 정당[편집]


소속
기간
비고

[[정의평화당|
]]

1988
창당

파일:우리정의당 흰색 로고타입.svg

1988
당명 변경

[[무소속|
무소속
]]

1988 - 1996
정당 해산

[[새정치국민회의|
파일:새정치국민회의 흰색 로고타입.svg
]]

1996 - 2000
입당
정계 입문

[[새천년민주당|
파일:새천년민주당 흰색 로고타입.svg
]]

2000 - 2003
합당[13]

[[무소속|
무소속
]]

2003
탈당[14]

[[열린우리당|
파일:열린우리당 로고타입.svg
]]

2003 - 2007
창당

[[대통합민주신당|
파일:대통합민주신당 흰색 로고타입.svg
]]

2007 - 2008
합당[15]

[[통합민주당(2008년)|
파일:통합민주당(2008년) 흰색 로고타입.svg
]]

2008
합당[16]

[[민주당(2008년)|
파일:민주당(2008년) 흰색 로고타입.svg
]]

2008 - 2011
당명 변경

[[민주통합당|
파일:민주통합당 연두 로고타입.svg
]]

2011 - 2013
합당[17]

[[민주당(2013년)|
파일:민주당(2013년) 흰색 로고타입.svg
]]

2013 - 2014
당명 변경

[[새정치민주연합|
파일:새정치민주연합 흰색 로고타입.svg
]]

2014 - 2015
합당[18]

파일:더불어민주당 흰색 로고타입.svg

2015 - 2016
당명 변경

[[무소속|
무소속
]]

2016
탈당[19]

[[민주당(2014년)|
파일:민주당(2014년) 로고타입.svg
]]

2016
입당

파일:더불어민주당 흰색 로고타입.svg

2016 - 현재
합당[20]
정계 은퇴

6. 선거 이력[편집]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96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강서 갑

[[새정치국민회의|
파일:새정치국민회의 흰색 로고타입.svg
]]

29,671 (33.64%)
당선 (1위)
초선
2000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새천년민주당|
파일:새천년민주당 흰색 로고타입.svg
]]

45,406 (50.38%)
재선[21]
2004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63,331 (51.22%)
3선
2008
제18대 국회의원 선거

41,833 (41.28%)
낙선 (2위)

2012
제19대 국회의원 선거

64,187 (48.71%)
당선 (1위)
4선[22]
2016
제20대 국회의원 선거

6,496 (6.42%)
낙선 (5위)
[23]

역대 선거 벽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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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신기남 1996.jpg


파일:신기남 2000.jpg

15대 총선 (서울 강서구 갑)
16대 총선 (서울 강서구 갑)

파일:신기남 2004.jpg


파일:신기남 2008.jpg

17대 총선 (서울 강서구 갑)
18대 총선 (서울 강서구 갑)

파일:신기남 2012.jpg


파일:신기남 2016.jpg

19대 총선 (서울 강서구 갑)
20대 총선 (서울 강서구 갑)


7. 둘러보기[편집]










[1] #. 부원군파(府院君派) 30세 기(基) 항렬.[2] 작가로서의 이름.[3] 2022년 정계은퇴를 선언했다.[4] 고교 동기로 법조계에 김능환, 정계에 이주영, 진영, 경찰에 이헌만이 있다.[5] 서울대학교 태권도부 출신이다.[6] 권 모 군의 가족은 1993년 국가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청구 소송에서 일부 승소하여 8,000만 원을 받았다. 기사[7] 참고로 유광사는 그 후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열린우리당에 입당하면서 신기남과 잠시 같은 당이 되었고, 비례대표 가장 끝 번호였던 51번을 부여받아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8] 원래는 성동구, 광진구 기반이었으나, 느닷없이 강서구로 넘어와 2006년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강서구청장에 출마해 당선이 되었으나 부인의 선거법 위반으로 취임한지 1년만인 2007년에 구청장직을 상실하였다.[9] 후임자는 전당대회에서 3위로 상임중앙위원에 당선된 이부영 전 의원.[10] 사실 선거 전략을 단단히 잘못 짠 것이, 선거운동 내내 본인의 치적으로 홍보한 서부광역철도(대장홍대선) 유치의 경우 최대 수혜지역은 강서구청역의 신설로 전철 불모지 신세를 벗어나게 되는 화곡6동과 화곡본동의 북-동부 지역인데, 정작 이 두 곳은 강서구 병으로 옮겨갔고, 현재의 강서 갑 지역은 봉제산, 우장산에 가로막혀 있어서 그쪽과는 아예 생활권이 다르다.[11] 또한 그의 측근이었던 김형식 前 서울특별시의원이 청부살인사건을 일으키는 희대의 병크를 일으킨 것도 일정 부분 영향을 미쳤다. 김형식은 그의 보좌관이었고, 신기남이 지역위원장을 맡던 강서구 갑 지역에서 시의원을 맡고 있어서 신기남의 영향력으로 공천된 사람이었다.[12] 여의도 법정 오변호사 배변호사의 후속으로 여의도 법정 신변호사를 맡아 진행했다.[13] 새천년민주당에 흡수 합당.[14] 신당(열린우리당) 창당을 위한 탈당.[15] 대통합민주신당에 흡수 합당.[16] 민주당과 신설 합당.[17] 시민통합당과 신설 합당.[18] 새정치연합과 신설 합당.[19] 징계 및 공천 불복으로 인한 탈당.[20] 더불어민주당에 흡수 합당으로 자동 복당.[21] 2003.11 열린우리당으로 당적 변경[22] 2016. 3. 17 공천 배제에 반발해 민주당으로 당적변경[23] 2016. 10. 더불어민주당과의 합당으로 인해 더불어민주당 자동 복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