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덕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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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 | 神德王后


대한제국 태조의 계후
신덕고황후 | 神德高皇后


파일:서울_정릉_정자각_미술_2006년(출처___국립문화재연구소) 문화재청.jpg

정릉 전경
출생
1356년 7월 20일(음력 6월 14일)
고려 서해도 곡주부
(現 황해도 곡산군)
사망
1396년 9월 23일(음력 8월 13일)
(향년 40세)
조선 한성부 판내시부사 이득분 사저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능묘
정릉(貞陵)
재위기간
조선 왕비
1392년 8월 25일 ~ 1396년 9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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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곡산 강씨
부모
부친 - 상산부원군 강윤성
(象山府院君 康允成, ? ~ 1358)
모친 - 진산부부인 진주 강씨
(晉山府夫人 晉州 姜氏)
배우자
태조 고황제
자녀
슬하 2남 1녀 [ 펼치기 · 접기 ]
장녀 - 경순공주(敬順公主, ? ~ 1407)
장남 - 무안대군(撫安大君, 1381 ~ 1398)
차남 - 의안대군(宜安大君, 1382 ~ 1398)

종교
불교
봉작
보령택주(保寧宅主) → 현비(顯妃)
전호
인안전(仁安殿)
휘호
순원현경(順元顯敬)
시호
조선: 신덕왕후(神德王后)

대한제국: 신덕고황후(神德高皇后)


1. 개요
2. 생애
3. 정릉
4. 평가
5. 가족 관계
6. 기타
7. 대중매체에서



1. 개요[편집]


태조 이성계의 계비이자, 조선 최초의 왕비. 무안대군, 의안대군, 경순공주의 어머니이며, 본관은 곡산.


2. 생애[편집]


상산부원군 강윤성(象山府院君 康允成)과 진산부부인 강씨(晉山府夫人 姜氏)의 딸로, 부계는 곡산 강씨[1]이고, 모계는 진주 강씨이다.

신덕왕후의 사촌 강우는 이자춘의 형 이자흥의 사위였는데, 이런 인연으로 이성계와 접촉할 수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남편 이성계보다 무려 21살 연하로 나이차이가 거의 부녀지간 수준이었다. 심지어 강씨는 이성계의 장남인 이방우보다 2살 어렸고 차남 이방과보다 1살 많았으며, 또 정종의 아내인 정안왕후보다는 1살이 어렸다.

언제 혼인하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1387년, 딸 경순공주가 이미 혼인을 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당시 강씨의 나이는 32살이었고 경순공주가 15~17살에 혼인을 했다고 보면 10대 중후반에 이성계와 혼인하였음을 추정할 수 있다.

조선이 건국되고 현비(顯妃)에 봉해져서 조선 최초의 왕비가 되었다. 태조의 지극한 총애를 받았으며 자신의 소생인 이방석을 세자로 만드는데 성공하였으나 얼마 되지 않아 신부전증으로 세상을 떠나게 되는데 정작 자신보다 21살이나 연상인 남편 태조는 74세에 승하하여 조선 역사상 두 번째로 장수한 국왕이 된다.

이후 존호는 신덕왕후(神德王后)라 하고 능호(陵號)를 정릉(貞陵)이라고 했다. 신덕왕후가 죽은 후 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면서 아들들인 이방석과 이방번은 끝내 이복형 이방원에 의해 살해당했고, 딸 경순공주의 남편으로 사위인 흥안군 이제도 참살당하면서 신덕왕후의 실질적인 혈통은 모조리 끊기게 되었다.


3. 정릉[편집]


신덕왕후의 능인 정릉은 원래 오늘날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에 있었다. 이미 고려시대부터 도성 안에 묘를 쓸 수 없었는데, 태조는 신덕왕후의 존재감과 권위를 유지하고자 경복궁 바로 앞에 정릉을 두고 원찰로 흥천사(興天寺)를 세웠다. 불교가 왕권의 비호를 받은 가장 큰 이유는 왕즉불 사상이므로 권위를 세우는데는 불교가 유교보다 훨씬 유용하니 전부 왕후와 세자의 권위를 유지하겠다는 정치적 포석이었다.[2]

그러나 태종이 즉위하면서 상황은 크게 달라진다. 태종이 신덕왕후 강씨에게 품었던 원한은 어마무시했는지(아니면 정치적 문제 때문인지) 즉위 후에 본격적인 '신덕왕후 지우기'에 나섰던 것. 우선 신덕왕후의 무덤으로부터 100보 밖에 있던 땅을 하륜 등 공신들에게 나누어줬는데, 그 자리에 공신들의 집들이 들어서는 것을 보고 태조는 말없이 울었다고 한다.

태종은 신덕왕후를 어떻게든 후궁으로 강등시키고 싶었던 듯 하다. 그녀의 위패를 종묘에서 치워버렸고, 기일이 되어도 조회도 파하지 않고 진행했다. 태조의 체면을 생각해서 제사는 지내주었지만 그마저도 왕후가 아니라 후궁의 예로 지냈다. 태조 사후에는 아예 정릉 자체를 외지로 옮겨버렸는데, 당시 양주목 관할이었던 오늘날 서울특별시 성북구 정릉동으로 이장시켜 버렸다. 마지막으로 능에 사용되었던 12지상들은 청계천을 치수한 김에 광교(오늘날 청계천 광통교)를 세워서 석재로 사용해 물 속에 거꾸로 처박아버렸다.

또한 1416년(태종 16년), 신하들에게 신덕왕후가 자신의 어머니인지 물어보면서 태조의 후궁인 성비와 비교하는 등 격하시키려는 시도가 보인다.# 태종과 신하들은 신의왕후가 살아있던 점을 들며 신덕왕후가 계모가 아니라고 하였고 오히려 후궁 성비에 비교하며 후궁에 가깝다는 의견을 결론지어 내었다.

태종의 아들 세종은 국가에서 주관하던 정릉 제사와 기신재제를 없앴다. 또한 이숙번변계량의 신덕왕후 적첩 논쟁을 들어 어떤 것이 맞는지 황희에게 물었는데 황희는 오래 되어 잊어버렸다면서도 “성비에 대한 제사도 3년 지나면 정릉과 같이 해야한다”고 말하면서 후궁 대우에 일조한다.#

태조 때 현비에 봉해진 이후에는 현비로 불리다가 죽은 이후에는 주로 정릉으로 불렸다. 태종 대에 완성된 <태조실록>에서는 강비라고 부르는 경우가 있었으나 이후에는 쓰인 경우가 없다.[3] 세종에서 선조 초기까지 보면 대체로 무덤의 이름을 따서 정릉으로 지칭되었다.

선조 대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신덕왕후에 대한 예우를 복권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그 근거는 비문에 그녀가 차비(둘째 왕비)로 적혀 있는 등 태조의 왕비임이 명백하다는 것이었다. 태종과 세종은 공식적으로 후궁으로 격하하지 않고 예우를 후궁으로 했었고 기록에서 그녀의 지위 자체는 후궁이 아니라 차비(둘째 왕비)였다.[4]

태종과 세종 이후 사실상 평민의 무덤으로 전락해 제대로 된 관리를 받지 못한지 172년이 지난 1581년(선조 14년), 선조가마 앞에서 강순일이 '자신은 국묘를 돌보고 있으니 군역에서 면제해달라.'고 격쟁했다. 당시 함흥에 있는 조선의 추존 4대조 왕릉을 관리하는 사람을 국묘봉사자라 해 군역을 면제했는데, 즉 강순일의 주장은 신덕왕후의 예우를 왕비격으로 복권해야 한다는 말과 같았다. 하지만 선조는 신의왕후의 직계 후손이라서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후 많은 신하들이 신덕왕후의 복권을 상소하지만 왕이 받아들이지 않는 일이 반복되었다.

그러다 300여 년 가까이 지난 1669년(현종 10년), 송시열 등 여러 신하들이 신덕왕후 능을 보수하는 문제에 대해 상소했을 때, 현종이 이를 가납[5]함으로써 드디어 신덕왕후의 위패가 다시 종묘에 모셔지고 무덤도 왕릉으로 수복되었다.

1669년 음력 8월 5일 신덕왕후가 복권되던 날 폭우가 쏟아졌는데, 백성들은 왕비의 원혼이 흘리는 눈물이라 여겼다고 하며 이후 존호를 더하여 정식 시호가 순원현경신덕왕후(順元顯敬神德王后)가 되었다.

대한제국 때는 신덕고황후(神德高皇后)로 추존되었다.


4. 평가[편집]


사실 신덕왕후의 위치는 어정쩡한 부분이 있다. 고려시대는 공식적으로 1부 1처였는데 국왕만 이 조건의 예외였다. <주례> 기준으로[6] 천자는 1후 3부인 9빈 27세부 81어처를 둘 수 있고 제후도 천자만큼은 못해도 일부다처가 가능했고[7] 경대부는 1처 2첩, 사(선비)는 1처 1첩이 가능하고 서민은 1처다.

그런데 고려시대는 금지였기 때문에[8] 제후 취급인 국왕을 제외하면 모두 공식적으로 1부 1처가 된다. 그래서 무신정권 시기 집권자인 최우 같은 인물들도 공식적으로는 1처만을 두었다.

전조(前朝)의 말엽에 대소 원인(大小員人)이 경외(京外)에 양처(兩妻)를 함께 둔 자도 있고, 다시 장가들고서 도로 선처(先妻)와 합한 자도 있으며, 먼저 취첩(娶妾)하고 뒤에 취처(娶妻) 한 자도 있고, 먼저 취처하고 뒤에 취첩한 자도 있으며, 또 일시(一時)에 삼처(三妻)를 함께 둔 자도 있어서, 그가 죽은 뒤에 자식들이 서로 적자(嫡子)를 다투게 되니 쟁송(爭訟)이 다단(多端)하였으나, 그 때에는 처(妻)를 두고 취처(娶妻)함을 금하는 법이 없었습니다. [9]

태종실록 태종 17년 2월 23일


그런데 고려시대 말기의 혼란으로 벌어진 지배층의 문란으로 인해서 가족 관계 파악에 곤란을 겪는데 이 때 등장하는 개념이 현지처이다. 지방 출신 인물들이 현지에서 결혼을 한 다음에 이 상황에서 개성의 중앙 귀족과 다시 결혼을 하는 폐단이 등장하는 것이다. 중앙 귀족들 입장에서는 그 사람이 지방에서 결혼을 했는지 아닌지 알 수도 없고 설혹 알았어도 먼저 결혼한 첫째 처가 귀족이 아니라면 정식 결혼으로 인정하지 않기도 하면서 실질적 중혼이 발생하게 된다.[10]

이를 경처(京妻)와 향처(鄕妻)라고 부르는데 이건 고려시대를 기준으로 보건 조선시대를 기준으로 보건 문제가 되는 행동이었고 당연히 이로 인한 분쟁이 봇물처럼 터지게 되었다. 이성계가 이 문제에 정확하게 해당되는 인물이었다.

애초에 첩 제도와도 별 상관이 없는게 정처가 둘이라 생긴 문제이기 때문. 애시당초 본처와 첩 사이에는 큰 신분 차이가 있으므로 어지간해서는 분쟁이 생길 일이 없다.[11] 경처와 향처는 둘 다 정식 아내고 격의 차이가 없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 당장 두 사람이 다 아들을 낳았다고 하면 가문의 적자는 대체 누구인가 라는 문제가 생긴다.

일반적으로 보면 '먼저 결혼한 신의왕후가 당연히 더 높아야 하는 것 아닌가?'라고 생각할 수 있고 이론적으로는 이게 맞기는 한데 신덕왕후 같은 경처는 기본적으로 중앙 귀족들과 하는 정략 결혼이라는데에 문제가 있다. 즉, 경처들의 배경이 향처들의 배경보다 압도적으로 든든한 것. 조선시대에도 짱짱했던 기존의 중앙 귀족들이 "내 딸내미가 첩 취급 당하는 것은 못 보겠다."라고 나섰다.

그래서 위의 분쟁들에서도 경처와 향처 모두 정처로 인정되고 그 자손들도 적자로 인정받는 법이고 예법이고 다 뛰어넘은 사례가 속출하는데 이게 다 혼맥으로 얽혀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저 분쟁도 사실 적서 차별이 아니라 재산 분쟁이 대부분이었다. 경처 자식이나 향처 자식이나 전부 적자이기 때문이다.

강씨는 동북면 변방 출신의 장수였던 이성계를 중앙에 연결해서 결국 왕위에 오르게 하는 데 적극 지원했다. 그러나 일찌감치 사망하는 바람에 아들 이방석의 권위를 유지해주지 못했고 무인정사 이후 후계 구도를 어지럽혔다는 책임을 뒤집어썼다.

신덕왕후는 이방석을 세자로 만들어주고도 그를 밀어주지 못했다. 왕비의 아들이기에 이방석이 세자가 되었는데 그 왕비가 죽어 국모의 자리가 공석이 되었다. 태조는 세자를 지키기 위해 신덕왕후의 릉을 경복궁 지근거리에 조성해 그녀의 권위와 존재감을 유지하려 했지만 죽은 사람의 권위는 한계가 자명했고 신덕왕후의 죽음을 기점으로 세자의 보호막은 한없이 약해졌다.

태조의 향처인 신의왕후 한씨는 조선 개국 전에 사망했기에 신덕왕후는 별 문제 없이 조선의 초대 왕비가 될 수 있었다[12]. 하지만 만약 신의왕후가 조선 개국 때 살아있었다면 서열 싸움이라든가, 고려 때처럼 정실부인을 여러 명 두도록 할 것인지에 대한 갈등이라든가, 어느 쪽을 왕비로 세우느냐 같은 걸로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을 것이다. 정작 이성계는 두 아내의 서열 문제에 대해서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물론 이성계는 강씨만 중전으로 세움으로써 그녀 소생인 2남 1녀만 적자로 만들어서 정통성을 세울 생각이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씨 소생의 아들들은 이 때 모두 장성한 상태였고 그들 중 몇몇은 이미 고려시대부터 조정에 출사하여 이성계를 도와주고 있었다. 그런 아들들을 갑자기 서출처럼 대우한다면 그들의 불만이 폭발할 거란 건 바보가 아닌 이상 알 수 있을 것이다. 단순히 한씨 소생 아들들 뿐만 아니라 그들과 엮여 있는 수많은 가문들도 마찬가지로 불만이 폭발할 게 뻔했다.

물론 신덕왕후가 주도적으로 이리 한 게 아닐 수도 있지만 이성계의 어리석은 결정으로 왕실에 분란이 일어났을 때 그녀가 보다 융통성 있게 행동하면 이를 막을 수 있는 여지는 충분히 있었는데, 문제는 그녀가 전혀 그렇게 하지 않아서 결국 1차 왕자의 난이 발발한 계기가 되었다. 물론 융통성이 문제라기보단 권력욕이 문제였으므로 태조가 신덕왕후 소생 왕자를 세자로 삼을 생각이 있었던 시점에서 이미 소용없는 짓이라고 할 수 있다. 만약 그녀가 정말로 자식을 살리고 싶었으면 융통성이 아니라 권력욕을 버렸어야 했다.

차라리 신덕왕후의 장남 이방번이 세자로 책봉되었다면 그나마 위에서 말한 정식 왕후의 큰아들이니 어찌되었건 적장자는 적장자라는 논리가 어느 정도 먹히고, 적어도 동복형제들인 이방번과 이방석이 이복형제들인 신의왕후 소생의 왕자들에게 맞서 끈끈하게 뭉칠 소지라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세자 자리에 후처의 큰아들도 아니고 둘째 아들, 전체 형제들 가운데서 빼도박도 못할 막내가 책봉되었으니 해명을 위해 혓바닥이 점점 길어질 수 밖에 없었다. 하루아침에 멀쩡한 사람에게 망나니 낙인을 찍어버리고 찬밥 신세로 만들어놓고는, 그저 친형제라는 이유만으로 세자를 도와줄 것이라고 여기는 건 너무 낙관적인 생각이었다. 결국 이런 안일한 인식은 신의왕후 소생 왕자들의 무력사태가 발발하자, 바로 그 세자의 친형제인 이방번조차 이방석을 돕지 않고 방관하기만 하는 파국을 초래해버렸다.

결국 이방석의 명분이 매우 취약했던게 가장 큰 문제. 1차 왕자의 난 때 방원이 수천 명의 병사들을 동원했는데 이 많은 병사를 동원할 수 있었던 것도, 수도 왕궁이 고작[13] 수천 명의 병사에 넘어간 것도 이방석에게 정통성이 빵빵했다면 있을 수가 없는 노릇이다. 심지어 제대로 된 전투조차 없었다.

신덕왕후의 시댁은 이미 자신과 비슷한 상황을 이미 한 번 겪은 바 있다. 바로 시백부 이자흥, 시아버지 이자춘이 시계조모인 한양 조씨 집안[14]과 싸워 천호직을 쟁취해냈으며, 자신의 남편인 이성계 역시 적장자인 이원계를 제치고 전주 이씨 가문의 당주 노릇을 한 것은 물론 아예 이원계를 서장자로 격하시켜버리기까지 했던 것이다.[15]

큰왕자들이 그녀 소생들과 나이 차이가 적거나 능력이 보잘것 없었으면 모르되, 다른 이들은 몰라도 사실상의 적장자인 이방과와 다섯째 이방원은 경력이나 능력 면에서 분명히 후계자로서의 자격이 충분했고, 조선 기득권층과 학맥, 관맥, 혼맥도 탄탄했다.[16] 신덕왕후 본인이나 곡산 강씨 집안에서야 이성계의 중앙정계 정착에 자신들만한 공로자가 없다고 믿었겠지만 수많은 전장에서 종군하며 아버지 이성계를 구국의 명장으로 활약할 수 있도록 떠받친 이방과나 그 살인적 난이도의 고려 문과를 패스해 전주 이씨 가문을 동북면 촌뜨기에서 어엿한 문벌가문으로 편입시켜준 이방원의 공로는 절대 그에 못지 않았다.

동북면에서부터 동고동락해온 왕실 종친들도 한씨 소생들에게 팔이 굽어있었고, 하필이면 정도전과 손을 잡은 탓에 사대부들의 지지를 확보하는데도 실패했다. 심지어 그녀의 외조카 신씨(신덕왕후의 여동생의 딸)는 신덕왕후의 면전에서 이방원을 편 들었고,[17] 신씨의 오빠이자 신덕왕후의 또다른 조카인 신극례는 아예 이숙번과 부하들을 숨겨주고 거병 당시부터 병력을 지휘한 무인정사의 핵심 지도부였다.

이성계가 곁가지들에게 잘 대해주긴 했다. 자기 자식은 물론 얼자인 이복 동생 이화와 그 어머니 김씨를 잘 대우했고, 아버지와 천호 자리를 다투었던 이복 숙부 이완자불화의 아들 이지도 어렸을 때부터 자기 집에 데려와 키우다시피했다. 그걸 보고 큰 왕자들도 이를 본받을거라는 생각을 가졌는지 모르겠지만, 이성계는 가주로서의 아량을 베푼 것이고, 큰 왕자들은 그 가주가 될 기회를 빼앗겼으니 이 역시 사리에 맞지 않았다.[18] 차라리 이방과를 밀어주고 자신과 자기 자식들을 잘 대해주기를 기대하는 게 몇백배는 현실적이었다.[19][20]

신덕왕후가 이방과가 아닌 이방원을 밀어줘도 큰 문제는 없었다. 먼저 조선 개국 이전에 이방원은 신덕왕후와 사이가 매우 좋았으며[21] 특히 왕위계승 차원에서 이방원은 스스로의 야망도 있었지만 조선 건국에 지대한 공로를 세웠기에, 실력으로만 봐도 충분히 세자가 될 자격이 있었다. 더구나 아들들 중 연장자이자 실질적 적장자인 이방과도 왕위에 큰 욕심은 없던 점을 감안하면, 다섯째 아들인 이방원이 세자가 되어도 다들 납득했을 것이다.[22]

특히 왕위에 오른 후 이방원의 행보[23]나 1차 왕자의 난 이후 형 정종에게 왕세자 자리를 인정 받기 전까지[24] 조용히 있었던 행보를 봐도 이방원은 자신의 손윗 형제들에 대해 걱정하고 있었지 신덕왕후의 기우와 달리 동생들에 대해 어떤 경계심도 없었다.[25][26]

만약 신덕왕후가 욕심을 버리고 이방원을 더욱 밀어주는 처세술을 보였으면 자신을 왕위에 오르게 도와준 계모와 이복동생들을 눈엣가시로 여기긴커녕 오히려 더 잘 대해줬을 것이다.[27] 실제로 후대의 광해군도 자신을 크게 지지해준 계모(정확히는 아버지의 후궁인 서모) 인빈 김씨와 그녀 소생의 이복동생들을 극진히 대우했다.[28]

이러나 저러나 큰 왕자들의 즉위로 딱히 신변의 위협 같은 것을 느낄 건덕지도 없었던 신덕왕후의 무리한 이방석 책봉이 더더욱 비판을 받는 것이다.

그나마 이의를 제기하자면, 동복형제간의 결속과 이복형제간의 결속이 어땠을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이방원부터가 이복형제들은 잔인하게 죽였지만 동복형제는 반란을 일으킨 형제마저 살려서 잘먹고 잘 살게 해주었다. 이방간이 2차 왕자의 난을 일으킬 당시 이성계가 '네가 이방원과 아비가 다르냐, 어미가 다르냐'라고 일침하며 어머니의 핏줄이 같음을 언급한 기록 등, 이복과 동복의 결속이 차원이 다름을 알 수 있는 점들이 많으며 심지어 역성혁명의 한복판에서 함께 싸운 동복형제들이다. 이방과가 동복동생들을 제치고 이복동생을 왕세자로 삼아줄 걸 기대하는 게 훨씬 현실성이 떨어지는 상황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그녀가 반드시 자신의 아들을 왕으로 올려야 할 당위성도, 절박함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29] 동복의 결속을 기대하기엔 오히려 이방번이야말로 동복동생의 위기를 수수방관하며 어부지리를 노리다가 둘 모두 죽고 말았다.

그녀로서는 일단 이방석이 즉위하고 나면 사태가 종결되리라고 생각한 모양이지만, 설령 태조가 생전 퇴위 등을 통해 어거지로 이방석에게 승계를 해줬다고 한들 방석의 재위 중에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리라는 보장이 전혀 없다.[30] 그렇다고 큰왕자들을 사전에 제거하자니 이들과 엮인 사대부 집안들, 나아가 이화, 이천우 등의 방계 종친들에게까지 대대적이고 광범위한 숙청이 동반되어야 하는데 이거 까딱 잘못했다가는 이방석 치세가 초장부터 개판나기 딱 좋은 일이다.[31]

이방원의 그 만렙 정치력을 형성한 한 축이 관직경험인데, 과연 이방석이 그 정도의 정치력을 가질 수 있을까? 이방원이 괜히 "이 나라가 이씨의 나라냐, 정씨의 나라냐?"를 외친 게 아니다. 실제로 그 구호가 적어도 왕족들에게는 먹혀드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동서고금을 통틀어봐도 왕위계승에서 밀린 왕족은 언제나 분란의 씨앗이었고, 그런 씨앗을 무려 넷이나[32][33] 만들어놓은 이상 어느 한 쪽은 제 명에 못 사는 건 예약된 일이었다. 게다가 앞에서도 지적했지만 하필이면 손잡은 정도전부터가 그의 절친인 남은조차 인정하는 어그로꾼인 탓에[34][35], 중도세력 포섭 같은 게 될 턱이 없었고 그런 스승에게서 배운 이방석이 제대로 된 정치세력 형성은 가능했을지도 의문이다.[36] 설령 위의 형들은 모두 숙청을 하든 뭘 하든 제어하고 이방석이 성공리에 왕위에 오른다 한들, 그 다음의 왕위계승에서는 어떤 대환장파티가 벌어질지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일이다.[37] 그나마 실질적 실력이 출중했던 태종-세종의 사례조차도 끝끝내 안 좋은 방향의 선례로 남아 조선에서 적장자 세습 원칙 확립에 무려 1세기를 날려먹게 만든 것을 보면[38] 이방석의 경우는 아예 왕조를 초장에 끝장내버릴 수도 있는 일이었다.

마지막으로 그렇게 밀어줬던 이방석은 사고를 치고 다녀서[39] 오죽하면 그 태조 이성계조차도 친히 놀려고 해도 놀지 못하게 하라는 엄명을 내렸을 정도다. 실질적 라이벌이라 할 수 있는 이방원은 적어도 이런 사고는 안 쳤다.

5. 가족 관계[편집]


  • 친정
    • 아버지 : 상산부원군(象山府院君) 강윤성
    • 어머니 : 진산부부인(晉山府夫人) 강씨

  • 시가
    • 배우자 :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 1335년 10월 27일 - 1408년 6월 18일)
      • 장녀 : 경순공주(敬順公主, 출생 미상 - 1407년 8월 7일) - 경무공 흥안군(景武公 興安君) 이제(李濟)에게 하가
      • 장남 : 무안대군 방번(撫安大君 芳蕃, 1381년 - 1398년 10월 6일)
        • 며느리 : 삼한국부대부인 왕씨(三韓國府大夫人 王氏)
      • 차남 : 폐세자 / 의안대군 방석(廢世子 / 宜安大君 芳碩, 1382년 - 1398년 10월 6일)
        • 며느리 : 폐 현빈 류씨(廢 賢嬪 柳氏)[40]
        • 며느리 : 현빈 심씨(賢嬪 沈氏, 출생 미상 - 1448년)


6. 기타[편집]


전하(殿下)가 대답하기를,

"몽주 등이 장차 우리 집을 모함하려고 하는데, 어찌 앉아서 망하기를 기다리는 것이 합하겠습니까? 〈몽주를 살해한〉 이것이 곧 효도가 되는 까닭입니다."

하였다. 태조가 성난 기색이 한창 성한데, 강비(康妃)가 곁에 있으면서 감히 말하지 못하는지라, 전하가 말하기를,

"어머니께서는 어찌 변명해 주지 않습니까?"

하니, 강비가 노기(怒氣)를 띠고 고하기를,

"(公)은 항상 대장군(大將軍)으로서 자처(自處)하였는데, 어찌 놀라고 두려워함이 이 같은 지경에 이릅니까?"

하였다.

- 《태조실록》 권1 <총서>, 정몽주가 조준 등을 처형코자 하니, 태종이 정몽주를 죽이고 일당을 탄핵하다


아들인 이방원이 독단적으로 선죽교에서 정몽주를 죽인 것을 안 이성계가 대노하여 아들인 이방원을 크게 혼냈을 때 바로 옆에서 이 장면을 전부 다 지켜본 사람이 바로 신덕왕후였다고 한다. 실록의 기록에 의하면 이성계가 이방원에게 정몽주 참살 건으로 크게 화를 내는 자리에 신덕왕후가 곁에 있었지만 이성계가 너무 화를 크게 내서 그녀도 어쩌지 못했다고 한다. 그렇게 아버지에게 한창 한소리를 듣던 이방원이 나중에 "어째서 어머니께서 변명해 주지 않으십니까?"라고 말하자 그제야 신덕왕후가 "공(公)은 항상 대장군(大將軍)으로서 자처(自處)하였는데, 어찌 놀라고 두려워함이 이 같은 지경에 이릅니까?"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성계와 신덕왕후의 첫 만남 이야기가 설화처럼 내려오기도 한다. 호랑이 사냥을 하던 이성계가 목이 말라 우물을 찾았을 때, 냉수를 빨리 마시면 탈이 날 것 같아 버드나무잎을 불며 천천히 마시라고 버드나무잎을 띄운 물바가지를 준 여인이 있었는데 이때 이성계가 그 여인의 지혜와 미모에 한 눈에 반했는데 그 여인이 신덕왕후라고. 왕건장화왕후의 설화를 그대로 배낀 듯 하다.


7. 대중매체에서[편집]









[1] 신천 강씨의 분파 중 하나. 현대에 들어 신천 강씨와 통합한 2개의 분파 중 하나이기도 하다. 그래서 신덕왕후를 신천 강씨의 일원으로 설명하는 경우도 있다.[2] 태종이 정릉을 밀어버린 것도 사감에서 비롯된 행동이 아니라 아버지의 심중을 헤아리고 자신의 권위를 세우고 신덕왕후와 이방석을 후궁과 서자로 격하시키기 위함이었다.[3] 후대에 폐서인이 된 왕비는 '성+비'로 된 명칭으로도 불렸다.[4] 조선 초에는 고려의 체계가 어느 정도 남아 있었는데, 차비는 '왕의 두 번째 정실부인'을 의미한다. 후에 계비와 거의 같은 의미로 사용되는 단어가 되었기에 신덕왕후는 '계비'로 여겨지게 된다.[5] 그나마도 처음에는 석물 복원 정도만 하려 했지만 신하들이 연일 요청하자 종묘 배향까지 받아들인 것.[6] 신분에 따른 차등이 있는 것은 분명한데 몇 처 몇 첩을 허용할 것인가는 책마다 시대마다 다르다. <주례>를 꼽은 것이 <예기>에도 인용되는 등(1후와 3부인 사이에 6궁이 들어간다는 점만 다르다.) 가장 기본적으로 언급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경대부 미만은 다처가 허용이 안 된다.[7] 조선왕조실록 태종실록관련 기사 서열에 차이는 있으나 일정 숫자까지는 처로 인정받았다.[8] 사실 첩이 아니라 정처를 둘 이상 두는 것이 금지였다.[9] 법이 없었다고 설명하는데, 이는 고려시대에 일상생활은 기본적으로 관습법 체제였기 때문이다. 즉, 의례에 따라서 예법이 정해지고, 이것이 문제가 될 때에만 공식적 판결이 나오는데, 1부1처와 첩금지 역시 이 부분에서 드러난다.[10] 사실 고려시기 지방의 인재들이 개경에 올라와서 과거에 급제하면 관료가 되는데, 고려시대까지는 전국에 관리가 파견되는 것이 아니였기에 관리가 되는 인재는 앞으로 본인이 살아가게 될 개경에 대하여서 많은 어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개경에 거주하는 명문가에서는 본인의 딸을 본인과 같은 명문가와 혼인시키는 것이 아니라면 지방에서 올라온 인재를 사위로 삼아서 같이 데리고 살 수있는 방법을 많이 사용하였다. 이렇게 처가와 사위가 서로간의 이득이 되는 방향에서 혼인관계가 형성되었다.[11] 사실 조선에서도 첩보다 후처 쪽이 더 재산 분쟁이 많았다.[12] 신의왕후가 왕비로 추존된 시기는 정종이 즉위한 이후다.[13] 조선의 상비군은 아무리 잘 나갈때에도 4~5만 수준이었다. 그 대부분이 최전선인 북부 국경지대나 남부 왜구 출몰지역에 배치되어 있음을 생각하면 수천의 군세는 당연히 수도와 왕궁을 들어엎고도 남았다. 그보다는 그 수천 군세를 끌어모을 수 있었던 이방원 측의 명분과 여기에 달라붙은 기득권층의 친이방석계에 대한 강력한 반발에 주목할 일이다.[14] 과 그 집안 외손인 이완자불화(李完者不花)[15] 즉, 이성계의 전주 이씨 가문은 이성계가 즉위하기 전에도 이미 계승권 문제로 인해 다투는 일이 많았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이성계도 이런 일에는 둔감했다고 할 수 있었다. 애시당초 고려 중심지도 아닌 함경도였고 유교식 계승법이 아닌, 속된 말로 가주 꼴리는 대로 계승하고 있었던 것.[16] 이방원의 경우 처가 및 처가를 통해 직접 얽힌 사돈 가문만 겹사돈인 사촌 형 이천우의 집안을 제외해도 8곳에 달했다. 게다가 장인 민제가 자기 스승이라 민제의 제자들이 곧 이방원파라고 해도 좋을 상황이었다.[17] "정안군(靖安君)이 세자가 되면 심히 인망(人望)에 합할 것입니다. 지금 이방석을 세우니 필경은 반드시 좋지 않을 것입니다."[18] 반대로 적장손이지만 가주 지위를 이자춘에게 빼앗긴 이자흥의 (양)아들 이천계는 이후 이성계를 죽이려들었다.[19] 이방과는 개국 당시에도 이미 30대 후반에 접어들도록 정처에게서 자식이 없던 상황이니 잘만 했으면 이방과가 이방석을 세제로 책봉하도록 딜을 거는것도 불가능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실제 방과-방석의 나이차도 25살이나 되어서 현대 관점에서도 사실상 부모자식이라 해도 좋을 수준이었고 신덕왕후가 이방과를 세자로 지지하면 아무리 정치력 끝판왕인 이방원도 딱히 명분 찾기가 어렵다. 이방과는 자신의 동복 형에다 적장자인 이방우가 창왕 옹립으로 왕위계승에서 밀려난 상황에서 누구나 다 인정하는 사실상의 적장자였다.[20] 다만 당시 정황상으로는 가장 유력한 인물은 역시나 이방원이었다. 이방과는 무장으로서는 뛰어났지만 정치에 대해는 문외한이었고 오히려 유학자이자 과거 급제까지 한 관료 출신에 각종 인맥도 빵빵한 데다가 조선왕조 개국에도 가장 공이 컸기 때문. 그리고 무엇보다 본인부터가 왕위에 적극적이기도 해서(이방과, 이방의는 왕위에 별로 관심이 없었고, 이방간은 능력이 없었다.) 사실 가장 적임자였다.[21] 신덕왕후와 그 아들들이 위험에 처했을 때 이방원이 구한 적도 있으며 정몽주 살해 건으로 아버지에게 성토당하자 방원이 도움을 청한 사람도 신덕왕후였고 신덕왕후 역시 방원의 편을 들어 오히려 태조를 닦달했다. 조선왕조실록에도 나오는 내용이다.[22] 물론 원역사의 2차 왕자의 난이 보여주듯 이방원 세자 책봉에 이방간이 반기를 들었을수 있기에 완전 납득까진 어려웠을 것이다. 물론 금방 진압은 되겠지만 어쨌든 친형제의 반기는 단순히 무시할 수 있는것이 아니다.[23] 왕위에 오른 이방원은 외척인 민씨 형제와 세종의 외척인 심온의 숙청을 제외하면 공신들에게 명예퇴직을 권유하거나 힘이 없는 명예직으로 이직시키는 식으로, 가급적 온건하고 깔끔한 방법으로 공신들의 힘을 제어하며 왕권을 강화했다.[24] 사실 이방원은 형 이방과의 양자로 입적했기 때문에 왕세제가 아니라 왕세자다. 애시당초 이렇게 된 이유 자체가 형의 적장자가 되어 정당하게 왕위에 오르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왕세제라면 형인 방의와 방간에게 우선권이 있게 된다. 그래서 이방원이 세자가 되기 전 후계 자리를 두고 2차 왕자의 난이 벌어졌던 것이고.[25] 다만 이것만으로는 보장할 순 없다. 앞날은 어떻게 될 지 모르고 특히 권력과 관련해선 더 그러니까. 애초에 신덕왕후도 욕심 때문에 상식에 어긋나게 제 자식을 세자로 밀었는데 이방원이라고 그러지 않았으리란 법이 없다. 특히 태종은 아버지가 반대하는데도 정몽주를 백주대낮에 죽인 사람이다. 태종이 관대한 면모를 보여주는건 어디까지나 왕이 된 이후지 왕이 되기 전에는 이방간을 제외하고 보면 정적들에게 꽤나 냉혹한 인물이었다.[26] 하지만 태종이 냉혹한 것은 어디까지나 정적들이었고 형제들에게는 비교적 온건한 편이었다. 이방번과 이방석을 죽이기는 했지만 이 둘은 당시 사정상 태종이 죽이지 않으면 안 될 상황에 놓여 있었다. 사실 이 둘이 살아 있으면 왕위가 문제가 아니라 목숨도 간당간당한 처지다. 정몽주, 정도전도 사실 별 차이가 없었고. 그에 비해 왕위에 욕심이 없었던 형 정종과는 우애가 매우 좋았고 이방간도 비록 난을 일으키긴 했지만 그래도 박포를 처형하는 정도로 그쳤다.[27] 이렇게 되면 방번과 방석은 그냥 배다른 동생일 뿐이니 죽일 필요따윈 눈곱만큼도 없다.[28] 이후에 인빈 김씨의 손자인 능창군을 유배보내어 인빈의 아들이자 능창군의 아버지인 정원군이 실의에 빠져 죽게 만들고 정원군의 장남인 능양군(후일의 인조)가 복수심을 갖게 만들었지만 이건 역모사건에 연루되어서로 딱히 일부러 핍박한 것은 아니다. 다만 정원군 집에 왕기가 있다며 집 빼앗은건 핍박이라고 할 수 있긴 하다. 허나 당시 광해군이 옥사와 토목공사에 미치도록 집착한걸 감안하면 딱히 인빈 자손이라서 건드린게 아니라 아무나 건드리다 보니 재수없게 걸린 것으로 해석해야 할 듯하다.[29] 물론 대종보다는 소종이 좋고 아무려면 일개 왕족보다는 왕이 좋긴 하다. 근데 그것도 역량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문제는 이방과는 무(武)에서 이방원은 문(文)에서 재능이 있던 반면 이방번과 이방석은 문무 어느쪽에서도 특출난 재능이 없었다. 후계자들의 기량이 이렇게나 미달인데 억지로 후계자로 밀어봤자 그 결과는 뻔하다.[30] 훗날 이방석보다 훨씬 더 강력한 정통성을 갖고 있던 단종도 쫒겨난 일이 있었으니 틀린 말이 아니다.[31] 이성계가 아들들을 권문세족 등에게 장가보낸 것이 역으로 작용하게 되는 셈인데 이들은 이성계 일가와 혼맥이 있기에 당연히 조선왕조를 지지하는 이들이다. 그런데 자기들을 숙청하려 한다? 지지층을 제손으로 날려먹을 뿐만 아니라 지지층과 적대관계가 되어버린다. 당장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자신의 어린 아들인 히데요리를 위한다고 조카인 히데츠구를 죽이며 그와 혼맥으로 얽힌 이들까지도 처벌했다가 이들 가문들이 반 도요토미로 돌아서 결국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동군 편에 서서 싸웠다.[32] 이방과, 이방의, 이방간, 이방원. 이방우는 이미 장자 자격을 잃었고 조선 개국 이후 얼마 안가 사망했으며 이방연은 일치감치 사망했다.[33] 사실 이방번까지 합치면 다섯이다. 실제로 이방번은 이방석이 위기일 때 전혀 구해주러 가지 않았으니 그 또한 어떻게 될 지는 모를 일이다.[34] 하도 어그로꾼이다보니 태조의 심복으로서 실권은 쥐고 있었지만 정작 신하들 중에서 최고 자리는 조준에게 내줬어야 했다.[35] 애초에 정도전은 우왕 초에 쫓겨난 이후로 오랫동안 관직에 복귀하지 못해서 현실정치에는 미숙할 수 밖에 없는데 실제로 공양왕 시기에 동료들과 정적탄핵을 모의해놓고는 자신의 실수로 계획이 누설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36] 그리고 방석이 보위에 오르게 되면 십중팔구 정도전은 신의왕후 소생 왕자들을 전부 숙청하려 들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사실 동복형 방번이라고 결코 안심할 수 있는 노릇도 아니었다. 즉, 1차 왕자의 난은 단순히 이방원의 권력욕 때문만이 아니고(없지는 않았을 테지만 그게 다는 아니었다.) 언젠가 일어났을 일이었다.[37] 이방석이 상처하고 계비를 들여서 서로 다른 외가를 가진 적자들이 생겨난다거나, 설령 계비 같은 문제가 없어도 정비의 적자들을 끼고 야심만만한 처가가 한 판 벌인다거나 등등 시나리오는 수도 없이 나올 수 있다. 당장 이방석 본인부터가 이복형들은 둘째치고 동복형까지 정치적 이유로 제껴버려서 어떤 일이 벌어지든 이방석은 입이 백개라도 할 말이 없다.[38] 단종 이후 처음으로 적장자가 왕위에 오른 사례가 연산군이었다.[39] 실록의 기록으로는 남의 가축을 멋대로 쏴 죽이거나 궁안에 창기를 들이거나 공부를 게을리하는 등의 일을 벌였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니 걸러들어야 한다는 관점이 있음을 감안해도 야사에서조차 이방석의 자질을 높이 평가하는 경우는 사실상 없다시피 하다.[40] 조선 개국 후 왕세자 방석과 혼인하여 왕세자빈으로 책봉되었으나 1393년(태조 2년) 6월 19일, 현빈 류씨는 내시 이만간통한 일이 발각되어 이만은 참수되고 현빈 유씨는 폐서인되어 사가로 쫒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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