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후삼국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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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역사
新羅歷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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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 新羅
Shilla (Silla)


파일:나말여초(927).png
10세기, 후삼국 시대의 멸망 직전 강역
기원전 57년 6월 8일
~ 서기 936년 1월 8일 (약 991년)

시대 구분
사로국
삼국시대
신라

통일신라
후삼국시대
신라

성립 이전
멸망 이후
통일신라
고려
위치
한반도 동남부 및 부속도서[1]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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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2년 ~ 936년
나말여초 시작
892년
견훤 칭왕
899년
원종·애노의 난
900년
견훤 후백제 건국
후삼국시대 개막
901년
궁예 고려 건국
1차 대야성 전투[1]
916년
2차 대야성전투
920년
3차 대야성전투
927년
후백제 서라벌 기습
930년
우산국 고려에 투항 및 복속
934년
운주성 전투
936년
신라 경순왕, 고려에 투항
신라 멸망


수도
금성(서라벌)
민족
신라인
언어
신라어 (고대 한국어)
문자
한자(이두, 향찰, 구결)
종교
불교(선종)[2]
정치 체제
군주제
국가원수
(황왕)[3]
주요 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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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대 효공왕,(897~912),
53대 신덕왕,(912~917),
54대 경명왕,(917~924),
55대 경애왕,(924~927),
56대 경순왕,(927~936),

국성
(金) · (朴)[4]
현재 국가
[[대한민국|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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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

(경상북도, 경상남도, 대구광역시, 울산광역시, 부산광역시)
1. 개요
2. 역사
2.1. 멸망 이후의 행보
3. 영토
3.1. 수도
3.2. 지방 통치
4. 정치
4.1. 관제
4.2. 군사
5. 외교
5.1. 한반도 외교
5.2. 해외 외교
6. 역대 군주
7. 대중매체
8. 비슷한 사례
9. 같이보기



1. 개요[편집]


나말여초(후삼국시대)의 주역으로, 궁예의 태봉왕건고려, 견훤후백제에 주로 관심이 많고, 이 시기의 후삼국시대 주역 중 하나인 신라에 대해서는 대중과 미디어의 관심이 적고, 신라를 중심으로 다루는 미디어 외 매체가 없다보니, 주로 후삼국시대의 후백제와 태봉 그리고 고려의 쟁패를 주로 다룬다. 하지만, 삼국시대, 남북국시대의 신라의 여력이 어디가지않았는지 920년 대야성 함락전까지 대야성에서 후백제의 공격을 여러 차례 방어했고, 신라에게 우호적인 세력들도 상당히 있었다. 그리고 927년 서라벌 기습으로 신라의 본토의 중심지인 서라벌이 함락당하기 전까지는 건재했었다. 그리고 후삼국시대에는 신라뿐만 아니라 후삼국 모두 호족세력을 기반으로 점차 국가로 성장해 나갔기 때문에 태봉이 망하고도 친태봉 세력이 고려에 대항한 기록도 있다. 이를 보면 후삼국 삼국간 국가간의 싸움이 아니라 후삼국 삼국에 속한 호족세력들 사이의 이합집산으로도 볼 수도있다.


2. 역사[편집]





남북국시대 통일신라나당전쟁 이후 200년정도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으나 9세기 후반에 들어서 국가 내에서 왕위를 놓고 권력 투쟁이 심해지고 지역 민심을 돌보지 않으면서 점차 지방의 통제력이 약해져 신라의 지배력은 나날이 쇠퇴하고 있었다. 그런 차에 결정적으로 원종·애노의 난을 계기로 신라 중앙군이 약한 모습을 보이자, 지방세력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반란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적고적 같은 단순 도적이나 군벌에 불과하던 반란 세력들은 비뇌성 전투 등 크고 작은 전투를 거쳐 크게 궁예견훤이 부상하게 되며 이들은 옛 국가들을 부흥시키겠다는 명분으로 왕에 오르고 나라를 세우게 된다. 통일신라의 북쪽은 궁예태봉을 세웠고, 남서쪽에는 견훤이 후백제를 세워 신라는 진흥왕 이전처럼 다시 경상도 일부에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국가로 전락했다. 그럼에도 대야성에서 후백제와의 전투에서 승리를 했고 나름 건재 했고 고려와 동맹을 맺는등 외교적 성과도 있었지만, 927년 서라벌 기습으로 후백제에 예속이 되고 김부였던 경순왕이 왕위에 앉혀지게 된다.

930년대가 되자 신라에 복속되었던 우산국탐라국도 신라의 영향력에서 벗어났다. 우산국의 백길과 토두는 고려에 공물을 바치며 속국이 되었고 탐라국은 독자활동을 하기 시작한다. 신라는 다시 고려와 동맹을 맺었지만 920년대와는 다르게 930년대 군사적인 동맹 관계에 가까워지고 936년 경순왕이 고려에 귀부하면서 신라는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2.1. 멸망 이후의 행보[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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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랑왕
미상
실직군왕
정간왕
김부
견훤
김위옹
왕기
조선국왕
탐라국왕
왕도
역대 탐라 성주





마지막 경순왕이 935년 고려에 귀부하면서 상당수의 왕귀족은 경순왕을 따라 개경으로 갔으며, 그의 사촌누이는 태조 왕건에게 시집가 신성왕후가 되고, 그 자신은 태조의 장녀 낙랑공주 왕씨와 아홉째 딸인 부인 왕씨를 새로 아내로 맞아들여 고려 왕실의 신라 왕족은 자연스럽게 고려 왕실에 흡수된다. 패서계 호족 외척가가 정치를 차지한 초기에는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으나, 이후 성종과 현종 때부터 패서계와의 균형이 형성되어 김씨와 박씨, 최씨 등 신라계 귀족가문은 고려의 주요 문벌귀족으로 정착하게 된다. 고려 전기에 문하시중을 지낸 경주 김씨만 해도 김원충, 김원정, 김경용 3인이 있었다. 최씨에서는 최언위, 최항, 최승로, 최숙, 최제안 등이 두각을 나타내었다.

경순왕을 따라가지 않고 경주에 남은 이들은 정치에서 배제되고 향리로 전락하기도 하거나 마의태자 사례처럼 아예 신분을 버리고 은둔해서 여생을 보내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래도 고려 3경 중 동경으로서 다른 지방보다 비중이 높았고, 그 중에서도 김부식의 증조부로서 금성을 경주로 개편할 때 주장(州長)이 되었던 김위영처럼 명문가를 유지한 경우도 있었다.


3. 영토[편집]


파일:나말여초(927).png
927년 후기 신라의 판도

국내에서 시판되고 있는 역사 책이나 현행 역사교과서에서 실려있는 후삼국시대 당시를 그린 한반도 지도에서는 보통 신라가 통일 이전 영토 정도를 갖고 있는 걸로 그려지지만 그건 후고구려와 후백제가 막 생겼을 때의 일이다. 후삼국시대 시기별로도 꽤 차이가 나는데, 우선 경상도를 다 차지하고 있는 것도 아니어서 대강 지금의 경상남도 대부분 지역과 경상북도 서쪽 절반은 후삼국시대 초기부터 신라 조정의 통제를 벗어나 있었다. 울산 지역에는 호족 박윤웅이 반독립상태였고 김해의 김인광은 가야의 부활을 기도했으며 진주왕봉규는 아예 중국에 독자적으로 조공하기까지 했다. 게다가 붉은 바지를 입은 도적적고적의 거점도 있었으니 경남 지역은 전부 사실상 독립국이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5]

다만 옛 가야 영역인 경남은 그렇다 쳐도, 경북 서북부가 고려에게, 경북 서남부는 후백제에게 꽤 일찍부터 이탈하고만 건 상당한 치명타였다. 경북 서북부는 그나마 광개토대왕-장수왕 시기의 '고려'가 50년 동안 실효지배했던 과거가 있고 이후에도 한동안은 신라 왕실로부터 의심 어린 눈초리를 받은 바 있으니 그럴 수 있다 쳐도, 신라 융성기의 기틀을 다진 자비 마립간-소지 마립간-지증왕이 역시 50년 동안의 적지 않은 세월, 인력, 물자를 기울여서 거의 왕실 직할령 수준으로 키워놓았던 경북 서남부가 후백제에게 넘어간 건 매우 의아한 결과. 경북 서남부 같은 경우 고구려는 물론이고 백제도 거의 넘볼 엄두를 내지 못했던데다, 나당 전쟁 시절에도 뚫린 적이 없었다. 견훤이 아무리 명장이었어도 신생국 후백제가 군사력만으로 그걸 얻어냈다곤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6]

후백제의 공격을 막을 요충지 대야성과 동해로 통하는 경북 지역은 그나마 신라의 충신들이 남아있어 후백제의 공격을 수 차례나 자력으로 막아내고 왕건에게 원군을 보내기도 할 정도로 아직 완전히 영향력이 없는 상태는 아니었다. 그러나 후백제에게 920년 대야성이, 927년에 서라벌이 함락당하고 경애왕이 살해당하는 과정을 거쳐, 우호적인 세력들도 궤멸당하거나 고려와 후백제에 줄지어 항복한다. 이후로는 후백제고려신라를 어느 정도 대우하며 10여년 정도 그래로 두었다가 고려의 압박으로 고려에 투항해 완전히 멸망하게 된다. 사실 경애왕 시절에도 지금의 영천인 고울부가 고려에 귀순을 청할 정도로 엉망이긴 했고, 경순왕 때는 그나마 명목상 받던 상전 대우도 완전히 사라져 귀부 이전에도 고려대왕 왕건을 모시는 신하로 사실상 격하되고 만다.

견훤에게 경남 합천의 대야성을 잃고, 고려와 후백제의 미묘한 균형이 고창 전투(930) 이후 안동 주변부까지 고려 땅이 되면서 깨진 후, 즉 멸망까지 약 5년 정도의 기간 동안에는 신라의 영토가 신라 건국 초기 수준으로 축소되었다. 삼국사기만 봐도 왕건이 직접 일어진으로 행차해 성을 쌓고, 경순왕은 경주와 그 주변만 겨우 다스린다고 할 정도였다. 일어진은 지금의 포항으로, 경주시에서 차로 30분이면 간다. 고려군이 맘만 먹는다면 대군을 이끌고 바로 오늘이라도 내 눈 앞에 나타날 수 있는, 말 그대로 내 앞마당까지 남의 땅이 된 것.

3.1. 수도[편집]




3.2. 지방 통치[편집]




4. 정치[편집]


여느 나라들의 말기가 그렇듯 상당히 혼란했다. 나라가 무너지는 시기에 진성여왕효공왕은 기록상 사치향락을 계속했으며, 이후 박경휘가 신덕왕으로 즉위하면서 이후 8대 아달라 이사금 이후 728년만에 박씨 왕조가 부활했다. 다만 단순히 박 VS 김으로만 보는 건 단견이다. 신덕왕은 헌강왕의 사위로서 즉위한 것이지 수백 년전 죽은 아달라 이사금의 원손으로서 즉위한 건 아니었으며, 신라는 사위에게도 왕위 계승권이 분명히 있었다. 918년에는 김씨의 복위를 주장하는 김현승의 난이 일어나기도 했지만 모든 김씨가 김현승의 의견에 일치단결했다면 경명왕이든 경애왕이든 왕위 유지는 불가능했다.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였으니, 어느 정도 정치적 식견과 능력이 있음을 입증한 경명왕과 경애왕의 존재를 당시 신라 귀족 사회가 대체로 승인하고 국론을 모은 것이다. 특히 박씨 왕조의 마지막 왕 경애왕포석정의 삽질로 암군으로 흔히 알려져 있지만 최근에는 정황상 균형외교를 하면서 나름대로 망해가는 국운을 살려보려고 애썼던 왕으로 재평가받는 편이다. 경애왕 문서 참조. 태조 왕건 등 창작물에서는 견훤서라벌 기습공격도 김씨 일부 간신들이 왕위를 되찾기 위해 박씨 왕을 해치워달라고 사주해서 일어난 일이라는 식으로 연출하기도 했다.

4.1. 관제[편집]








4.2. 군사[편집]






5. 외교[편집]






5.1. 한반도 외교[편집]


한반도 내의 외교관계 중 태봉와의 관계는 궁예태봉국이 시종일관 신라멸도라고 부르고, 신라에서 귀순해오는 자들은 모두 죽였다고 할 정도로 상당히 적대적으로 대해왔던 만큼 교류는 사실상 없었다.

태봉을 쿠데타로 무너트리고 즉위한 왕건고려는 비교적 신라를 떠받들어주고 시종일관 존중하며 우호적으로 대한 편이었다. 다만 신라가 여력을 완전히 잃고 서라벌로 축소된 시기에 가서는 대등한 위치, 혹은 관계가 역전되어 버린 형태로 나타나게 된다. 자세한 부분은 고려-신라 관계 문서 참조.

후백제와의 관계는 견훤후백제도 내내 신라를 공격했던 것이나 경애왕을 잔혹하게 처단한 사례 때문에 극단적인 반신라파로 여기기 쉽지만, 의외로 신라의 권위를 전혀 인정하지 않은 것은 아니어서, 삼국사기의 견훤전에 실려 있는 견훤과 왕건이 서로간에 주고받은 국서의 내용에서 간접적으로 확인이 가능하다. 여기에서 견훤왕건은 '존왕의 의(義)', '왕실을 높인다'는 식으로 신라 왕실을 형식적이나마 주군과 같은 위치에 놓고 있다. 칭왕하고도 이게 가능했던 이유는 신라도 대왕, 제(帝) 같은 형태로 표현되는 부분적인 외왕내제적인 면모를 띄고 있었기 때문이다. 경애왕 처단 후 그것이 신라 멸망으로 이어진 것이 아니라 김씨 왕 경순왕을 다시 세운 것도 견훤의 목적이 무조건적인 반신라정책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후백제 건국 초반 얘기다. 후백제의 견훤이 무슨 짓을 하든, 신라 왕실은 본디 신라 왕실 근위대 장교를 역임하기까지 했던, 게다가 신라 왕실의 직속 왕령지 출신인[7] 견훤이 다름아닌 신라 정규군을 선동해서 반란을 일으켜 백제란 나라를 부활시킨 행태는 도무지 용서할 수가 없는 상태였다. 때문에 신라 왕실이 고려와 후백제에 대한 외교에서 상당히 태도가 달라졌고, 이에 견훤은 가망이 없다 싶었는지 무력으로 신라 왕실을 굴복시키기로 마음 먹었다. 이후 후백제와 신라 사이의 관계는 정상적인 외교 관계가 없다시피 하는 방향으로 흘러간다.


5.2. 해외 외교[편집]


중국과는 당나라 멸망 이후 5대10국과도 관계를 유지했는데 후삼국시대 말기 영토들을 다 고려와 후백제에게 빼앗기고 서라벌만 지배하는 소국으로 전락해 점점 약화되어가고 있는 과정 속에서도 후당 등 중국의 5대10국에 사신을 보내는 등 나라를 지키기 위해 무엇이든 해보려고 했다. 다만, 후당은 신라를 망국으로 인식하고 책봉사를 보내지 않았고 오히려 신라가 아닌 고려를 한반도의 진정한 국가로 인식했다. 공교롭게도 후당 역시 후삼국시대가 끝이 나는 같은 시기에 멸망하고 말았다. 후당과의 조공은 경순왕 말기까지 있었다. 신라의 사신이 관직을 받고 조공과 공물을 보내는등의 기록이 있다. 여담으로 요나라에 신라 사신을 보냈다는 기록도 있다.927년 2월에는 병부시랑 장분(張芬) 등을 후당(後唐)에 보내 조공함으로써 중원의 국가와도 미리 친분을 맺어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려는 모습을 보였다. 이 때 신라는 서해안과 남해안 지역에 대한 통제력을 아예 잃어버린 상태였기 때문에 오늘날의 경남 진주 일대를 지배하고 있었던 반독립 세력인 왕봉규의 도움으로 남해안을 통해 중국의 중원으로 사신단을 보낸 것으로 보이며, 왕봉규도 덤으로 후당에 같이 조공해 '회화대장군'(懷化大將軍)의 관직을 하사받았다. 왕봉규가 비록 신라의 충신까진 아니라지만 경남 중부 해안 일대를 장악한 그를 견훤의 침략을 받아낼 탱커 역할이자 남해 바다를 통해 중국과 교류하기 위해 필요한 존재로 여겼을 수 있다.

경애왕 대에는 신라 멸망이라는 벼랑 끝에 몰린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해외 외교에도 나름 공을 들이게 된다. 《요사》 <태조본기>, 926년 1월 항에 거란 태조 야율아보기의 발해 상경용천부 함락전 때 거란 측에 서서 공을 세운 나라들로 해(奚), 회흘(回紇), 토번(吐蕃), 당항(탕구트), 실위(室韋), 오고 등과 함께 신라가 나오고 있다. 물론 당시 신라는 서라벌조차 겨우 방비하는 수준에 불과했기 때문에 상경용천부 공성전에 파병한 병력은 깃발만 보내는 형식적인 정도였거나, 또는 920년대 신라의 안보 상황을 감안하여 지지 선언 정도로 하고, 실제로는 도우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아보인다. 삼국시대 역사상 그런 사례가 한 둘이 아니기도 하다.

6. 역대 군주[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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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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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성왕
경덕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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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성왕
애장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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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2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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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덕왕
흥덕왕
희강왕
민애왕
제45대
제46대
제47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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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성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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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강왕
진성여왕
효공왕
제53대
제54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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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대
신덕왕
경명왕
경애왕
경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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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 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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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5대
제56대
진성여왕
효공왕
신덕왕
경명왕
경애왕
경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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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제2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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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신검


[[고려(동음이의어)#s-1.6|{{{#fbe673 고려
]] [[마진#s-3|{{{#fbe673 마진]] [[태봉|{{{#670000 태봉]] [[고려|{{{#670000 고려]]
궁예
왕건

발해
제13대
제14대
제15대?
대현석
대위해
대인선

탐라국
제43대
제44대
제45대
경직왕
민왕
자견왕









  • 효공왕 대에 이르러 후백제, 태봉이 정권을 세우고, 우산,탐라는 930년대까지 신라에 복속되있었다.

7. 대중매체[편집]




  • 마의태자(소설)(1928) (이광수 저)[8]

  • 후삼국기(1999) (박영규 저)[9]

  • 태조 왕건(2000) (이환경 저)[10]

  • 책략(2005) (박영규 저)[11]



  • 풍운 삼국지(1967)






8. 비슷한 사례[편집]


중국 삼국시대후한 정부에 빗대지만 이는 완전히 틀린 생각이다. 그러기엔 차이가 너무나도 크다. 후한 정부는 꼭두각시인 기간이 대부분이었지만 신라 정부는 경순왕이 왕건에게 귀부를 청하는 순간까지 그 기능을 정지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도적떼나 후백제의 침공으로부터 방어전을 수행하기도 했으며 경애왕처럼 독자생존을 위한 외교노선을 견지하기도 했고, 서라벌 함락 이후에도 왕이 교체되었다 뿐이지 서라벌 자체에 대한 행정, 군사, 외교력은 여전히 유지하고 있었다. 이 시기 신라는 국력이 심각하게 약해지면 약해졌지 후한의 헌제 때처럼 아예 황제의 직할령이 소멸하고 권신이 시키는 대로만 하고 사는 꼭두각시 역할은 하지 않았다. 고려왕건 역시 경순왕을 강압이 아니라 회유로 일관했으며 결국 귀순 선택도 신라 조정이 내부의 찬반회의 끝에 스스로 하게 됐다.

다만 실질로 보면 후한 정부보다 훨씬 사정이 나았다 해도, 국가간 순위나 국위적인 면에선 보면 오히려 정반대. 후한은 실질은 허수아비라고 해도, 선양을 통해 완전 소멸하기 전까지는 어쨌든 조위의 상국이었고 조위는 선양 이전엔 후한이란 나라 내부에 있는 후한 승상의 봉국이었지 독자적으로 존재하면서 외교를 주고받는 나라가 아니었다. 그러나 고려 같은 경우는 신라와 대등하게 외교 사절을 주고 받은 별도의 국가였고, 나중엔 아예 고려대왕이 신라왕의 상전으로 상하 관계가 완전히 역전되고 만다. 이런 점에서 보면 후한말보다는 춘추전국시대 주나라의 상황이 훨씬 더 가깝다고 볼 수 있다.


9. 같이보기[편집]











[1] 우산국, 탐라국. 우산국930년 이전까지 신라에 복속해있다가, 930년 이후 우산국의 백길과 토두고려에 복속을 요청했다. 탐라국은 신라에 복속되어있다가 이후 점차 독자적으로 활동한다.[2] 그 외의 토착신앙, 도교, 샤머니즘 등. 비록 불교 이외의 다른 신앙을 탄압하지는 않았지만, 국교는 불교였다. 애초에 불교 문화재의 양과 질을 비교하면 어떤 시대도, 심지어 현대까지도 한 수 접고 들어간다.[3] '황왕' 이라는 군주 칭호는 사서에는 안 나오고 오직 신라의 금석문에서만 나온다. 황제와 왕의 복합어로 외왕내제적 성격을 보여준다. 영어로 직역하면 'emperor-king'.[4] 통일신라기에는 경주 김씨의 독점 세습이 고착화되었지만 신라가 후삼국으로 다시 쪼개진 뒤 박씨가 다시 왕에 올라 신덕왕, 경명왕, 경애왕을 배출했다. 그러나 경애왕(박위응)이 후백제 견훤에 의해 죽고 56대 경순왕(김부)을 왕으로 옹립하면서 국성이 김씨로 돌아갔다.[5] 다만 김인광 세력은 지나치게 독립노선을 걷다가 소충자 소율희 형제에게 밀려났고, 소씨 형제는 신라 조정에 우호적이었기 때문에 남쪽은 다시 신라 세력권에 들었다.[6] 사실 김헌창 때도 해당 지역은 생각보다 쉽게 중앙으로부터 이반했던 만큼, 견훤도 비슷한 수법을 썼을 거라고 짐작은 되지만 명확한 근거는 없다.[7] 견훤의 출신지인 옛 사벌국 영역인 추풍령 일대는 지증왕, 진흥왕, 진평왕 등이 진골들의 영향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직속 군대를 양성하기 위해 많은 투자와 관심을 기울인, 말하자면 신라 성골 왕실의 개인 왕령지나 다름없는 지역이었다. 물론 이 일대에 대한 영향력은 무열왕계 왕실이 그대로 승계했다. 신라 왕실 근위대장 자리는 진골들의 영향력을 배제하기 위해 대대로 진골은 결코 임명될 수 없는 자리였고, 물론 그 장병들도 전원 견훤처럼 신라 왕실이 직접 육성한, 진골 및 6두품들과는 무관한 직할지들(추풍령, 죽령)로부터 자원 입대를 받았다. 육군본부 발간 한국군사사 제1권 참조[8] 신라 마의태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웠으나 사실상 궁예를 주인공으로 한 장편소설. 1926~1927년에 걸쳐 동아일보에 연재되었다. 1928년, 박문서관에서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 한국 근대문화사상 최초의 역사소설로 손꼽히는 작품으로 그 역사적 가치가 높으며 그만큼 판본도 매우 많아 지금도 쉽게 구할 수 있다.[9] 후삼국시대를 배경으로 한 대하소설. 1999년, 들녘에서 전 5권으로 출간되었다.[10] 왕건을 주인공으로 한 대하소설. 2000년, 밀알에서 전 10권으로 출간되었다. 후삼국시대 배경의 창작물 중 가장 높은 인기를 누렸던 드라마 《태조 왕건》의 각본가인 이환경이 자신의 극본을 소설화한 것으로, 덕분에 후삼국시대를 주제로 한 문학작품 중에서는 여전히 인지도가 높다.[11] 1권부터 5권까지 있다. 후고구려, 고려, 후백제뿐만 아니라 신라 시점으로도 쓰였다.[12] 후삼국의 시작은 효공왕대 시작되었다. 후백제는 900년, 태봉은 90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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