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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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별 명칭
히브리어
דְּבָרִים (d'varím, 드바림)[1]
아람어
ܬܢܝܢ ܢܡܘܣܐ
그리스어
Δευτερονόμιον (Deuteronómion)[2]
라틴어
Deuteronomium
영어
Deuteronomy
한자(한국어)
申命記[3]
중국어
申命記
일본어
申命記 (しんめいき)
기본 정보
전승되는 저자
모세
기록 연대
요시야 신명기(BC 622년경), 모세오경의 완결(BC 400년경)[4]
B.C. 1550-1200년경
분량
34장
주요 인물
모세, 여호수아, 갈렙

1. 개요
2. 내용
2.1. 법규
2.2. 구조



1. 개요[편집]


너, 이스라엘아 들어라. 우리의 하느님은 야훼시다. 야훼 한 분뿐이시다. 마음을 다 기울이고 정성을 다 바치고 힘을 다 쏟아 너의 하느님 야훼를 사랑하여라. 오늘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말을 마음에 새겨라. 이것을 너희 자손들에게 거듭거듭 들려주어라. 집에서 쉴 때나 길을 갈 때나 자리에 들었을 때나 일어났을 때나 항상 말해 주어라. 네 손에 매어 표를 삼고 이마에 붙여 기호로 삼아라. 문설주와 대문에 써 붙여라.

신명기 6장 4-9절[5]

(공동번역 성서)


야훼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이것이 내가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에게 맹세하여 그들의 후손에게 주겠다고 한 땅이다. 이렇게 너의 눈으로 보게는 해준다마는, 너는 저리로 건너가지 못한다."

야훼의 종 모세는 그 곳 모압 땅에서 야훼의 말씀대로 죽어

모압 땅에 있는 벳브올 맞은편 골짜기에 묻혔는데 그의 무덤이 어디에 있는지는 오늘까지 아무도 모른다.

그 후로 이스라엘에는 두 번 다시 모세와 같은 예언자, 야훼와 얼굴을 마주보면서 사귀는 사람은 태어나지 않았다.

신명기 34장 4-6, 10절 (공동번역 성서)

성경의 5번째 권.

모세오경의 마지막 권에 해당되는 책이다. 신명(申命)이란 계명(誡命)을 거듭 되풀이하여 알려준다는 뜻이다. 또한 예수사탄의 세 가지 유혹을 뿌리친 세 가지 말씀 모두 신명기의 내용을 인용한 것이기도 하다.

모세가 가나안 땅에 입성하기 전 이스라엘 백성들을 한자리에 모아놓고 어떻게 해서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지를 얘기한다. 이는 1세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갈렙하고 여호수아 빼고 하나님의 말씀을 안 믿었다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40년 동안 방황하던 끝에, 하나님을 의심했던 1세대 백성들은 모두 늙어 죽고 새로 태어난 세대들에게 경계를 삼기 위한 목적이라고 한다. 문학 유형으로 보자면, 법전인 동시에 모세의 유언이라[6] 할 수 있다.

아무래도 신명기의 많은 부분이 출애굽기와 겹치기도 하고, 창세기와 출애굽기처럼 극적인 에피소드도 없다보니, 많은 사람들이 신명기보다는 창세기나 출애굽기에 익숙할 것이다. 그러나 신학적으로 보자면 신명기의 위상은 Die Mitte des Alten Testaments(구약 성경의 중심)이며, 원숙한 신학뿐만이 아니라 문체적인 면에서도 매우 가치가 높다.

신명기의 언어는 수사학적으로 매우 세련된 산문이다. 이 언어는 삽입된 부문장들 위에 증축된 매우 팽팽한 복합문들의 물결치는 운율을 애호하고, 일종의 산문 박자Prosametrum에 정통하며, 본문을 수사학상 '이야기 열들'(특히 마소라 본문 이전 독서 전통의 중간 휴지 형식에 의해 확인된다)로 구분하고, 차례로 조화시킨 낱말 집합·조어造語·잦은 불완전 운각[7]

韻脚들을 사용한다. 그래서 조화와 암시적 효과를 지닌 엄숙한 인상을 준다. 표제어 반복과 주도 낱말 체계들이 개개 본문군을 조직하고, 다른 본문군과 함께 묶는다. 동기 부여와 근거 제시가 청중을 설득하려 애쓰며, 극히 합리적인 논증이 전개되고, 중요한 신학적 주제가 규칙적으로 반복되는 정식定式을 통해 청중의 의식 속에 기억되며, 특히 일곱 또는 그 몇 배의 전거에 의해 강조된다. …… 많은 점을 미루어 볼 때, 신명기 편저자들은 문학뿐 아니라 신학과 법에도 전문 지식을 가지고 있던 예루살렘의 주도적 엘리트 동아리들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그들은 이스라엘을 본원적 정체성으로 복귀시키고자 했던, 주로 제의와 정치에 정향된 개혁 운동을 떠받쳤다. 예컨대 '율법서'의 발견(2열왕 22-23장) 당시, 임금의 가장 중요한 두 관리였던 대사제 힐키야와 서기관 사판이 결정적으로 관여했다. 나중에 예레미야 예언자가 사관 집단(특히 게달리야)과 연결되었다. 나아가 신명기의 산문은 궁정의 문체 그리고 지혜 문학의 언어(아마도 특히 고급 관리 사회에서 많이 사용되었다)와의 관련성도 보여 준다.

게오르크 브라울리크G. Braulik OSB, "신명기", 에리히 쳉어Erich Zenger u.a., 《구약성경 개론》 Einleitung in das Alte Testament (분도출판사 2012), 241-242쪽


신명기는 흔히 '구약 성경의 중심'이라 지칭되니, 구약 성경이 문학사와 종교사의 시기·내용상의 기준점이요 이스라엘의 법·역사·예언에 대한 이해를 지속적으로 규정지었기 때문이다. 신명기는 구약 정경 형성에서 열쇠 역할을 수행하며, 아니 '결정점'結晶點을 형성하며, 나아가 토라라는 개념과 더불어 정경의 '핵 안의 핵'을 이루고 있다.

게오르크 브라울리크, 같은 책. 255쪽


일차적인 테 두르기를 통해 설정된 바로 이 해석학적 상황 속에서 신명기는 '야훼의 배타성'이라는 개념을 제시하며, 이는 히브리어로 네 개의 단어만을 내포하는 그야말로 간결하면서도 프로그램적인 형태를 띤다(6,4).[8]

야훼의 '유일성'은 아직은 유일신 고백은 아니나, 중요한 예비 요소에 해당한다. 신명기의 최후 편집은 한편 다른 신들의 존재를 명백하게 거부하면서 철저한 '유일신 신앙'을 표명한다. "야훼께서 위로는 하늘에서, 아래로는 땅에서 하느님이시며, 다른 하느님이 없다"(4,39). 민족의 하느님이 궁극적으로 아담과 하와의 하느님, 온 인류의 하느님이 되기 위하여 '보편화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신명기는 진정 '구약 성경의 중심'과 유일신적인 성경의 종교를 위한 근본적인 문헌을 이룬다.

Martin Rose, "신명기", Th. 뢰머Thomas Römer 외 공저, 《구약성경 입문》Introduction à l'Ancien Testament 제1권 (수원가톨릭대학교출판부 2019), 434쪽


'신명기는 출애굽기 후반부의 반복인데, 그게 그렇게 중요한 책인가?'이라는 생각이 나올 수 있으나, 후대의 수용이라는 맥락에서 보더라도, 유대교에서든 그리스도교에서든 매우 중요한 책이다.

유다교에서 신명기는 오경을 맺는 책, 곧 '토라의 완성'으로서 큰 의미를 지닌다. 탈출기에서 맺은 이스라엘과 하느님의 계약은 신명기의 권고와 많은 규정들로써 완성된다. 신명기에서 제시하는 삶, 곧 광야에서 계명을 지키며 장차 하느님이 주실 땅을 희망하며 사는 삶이야말로 유다인들의 운명이다. 신명기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전에, 곧 어디에 있든 계명을 충실히 지키는 삶 그 자체가 절대적임을 잘 표현한다.

라삐 시대 유다교 형성의 기초를 제공한 책도 신명기다. 라삐들의 613개의 계명 가운데 200개 정도가 직접적으로 신명기에 기반을 두었다. 특히 기원후에 라삐들은 신명 17,11을 독특하게 성찰하여, 필요한 상황이 되면 율법을 만들 수도 있다고 해석했다. 이 해석은 훗날 유다교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는데, 유다교 라삐들이 구약성경에 들어있지 않은 율법을 상황에 따라 새롭게 만들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신명기는 현대 유다교의 믿음과 실천에도 큰 영향력을 지닌다. 지금도 유다인들은 신명 6,4-9과 11,13-21을 매일 두 번씩 바쳐야 한다. 유다교의 핵심 전례문이자 토라를 읽기 전에 암송하는 또 다른 '셰마'는 신명 31,11에, 식사 후 바치는 기도(바르캇 하마존)는 신명 8,10에 기반한다. 이 밖에도 중요한 기도문에 인용된 신명기의 구절들도 셀 수 없이 많다. 이른바 '교육 신경'(6,20-25)은 유다인 어린이 교육에서 중요하며, 미쉬나에 따르면 '역사 신경'(26,5-8)과 미드라쉬적 해석은 학가다의 핵심이다.

유다교의 전례 또한 신명기에 기반하고 있다. 유다교 전례력의 중요 절기는 신명기에 설명되어 있다.(1,3) 또한 제2성전이 파괴된 뒤, 유다인들은 희생제를 멀리하고, 토라를 즐겨 읽으며, '마음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신명기의 신학에 기반해서 전례를 발전시켰다. 그 밖에 수많은 기도문이 신명기에 기반한다.

특히 유다교 특유의 사상, 곧 유일신, '거룩한 책(=토라)' 중심의 종교 등이 신명기에 신학적 근거를 둔다. 중세의 위대한 라삐 마이모니데스가 가장 많이 인용한 책이 신명기다. 그의 대표작인 『미셔네 토라』מִשְׁנֵה תּוֹרָה의 제목은 '신명기'를 따라 붙인 것이다. 사제 등 특정한 계층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토라를 읽어야 하고 아이들에게도 늘 가르쳐야 한다는 사상도 신명기에 기반하고 있다(신명 5,1; 6,7). 지금도 전통적인 가정에서 아이들이 말을 할 수 있는 나이가 되면 맨 처음 가르치는 말이 다음의 신명 6,4와 33,4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모세가 우리에게 율법을 명령하였으니 야곱의 모임에 소유로 준 것이다."

주원준, 《거룩한 독서를 위한 구약성경 주해 5: 신명기》, 바오로딸, 2016, 38-40쪽


마르코 복음서 12,28-30에 따르면 예수는, 하느님과의 계약의 이 근본 원칙 ― '백성으로서, 회중(교회)으로서 하느님 사랑하기'―을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는 계명'이라 언명했다. 특히 요한계 문서들이 "하느님에 대한 사랑"(요한 5,42) 또는 예수에 대한 사랑(요한 8,42)이라는 이 주 계명을 강조하고, 또 이것과 '계명 준수'의 결부를 강조한다(요한 14,15.21.23-24; 참조: 1요한 4,2-3).

구원의 구체적 양상으로서, 특히 구원의 사회적 차원의 설계로서 토라는 '새 계약'에서도 핵심으로 남아 있다비교 참조: 예레 31,33과 신명 30,1-14. 토라는 세부 내용에서는 변하지만(이는 이미 신명기 자체 내의 법규들 수정과 보완이 보여 준다), 또 따라서 당신 백성을 위한 하느님의 사회적 의도도 바뀌지만, 창조 질서에서 떨어져 나가 죄에 예속된 세상의 사회적 설계들에 맞선 토라의 대안은 동일한 것으로 남아 있다. 산상 설교(마태 5-7)조차 새로운 토라를 선포하지 않고 토라의 완전한 성취(5,48 참조), "더 큰 의로움"(5,20)을 선포하거니와, 이것을 산상 설교는 예수 추종에서 발견한다(5,17-20).

바오로의 율법 신학과 의인론은 사유 과정, 인용(예: 로마 10,6-9는 신명 30,12-14를 인용하는데, 신명 30,1-10의 지평을 염두에 둔 적절한 인용이다) 그리고 개념 정형화[예: "자기의 의로움"(로마 10,3; 참조: 신명 9,4)]에서 무엇보다 신명기를 전제하고 있다. 신명기 각색층脚色層들이 이미 '율법과 복음'의 변증법을 전개한다. 예컨대 신명기 6,24-25에 따르면, 이스라엘이 계명을 실천하는 것은 이스라엘 구원의 일부다. 율법을 준수함으로써 이스라엘은 이집트 탈출로 선사받은 자유를 구현하고, 또 하느님 앞에서 '의로운' 상태에 머물러 있게 된다. 신명기 9장에서는 죄인들의 의인義認이 가나안 민족들을 대적한 이스라엘의 전쟁 안에 암호화되어 있다. 이 전쟁은 이스라엘이 "자기의 의로움"(9,4)에 힘입어서는 이길 수 없는 소송처럼 보인다. 과연 이스라엘이 광야에서의 끊임없는 반항, 특히 호렙에서의 배반에도 불구하고 하느님 진노의 심판에 떨어지지 않고 약속이 땅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자비로운 은총 덕분이니, 하느님은 모세의 간절한 대청代請으로 우두머리 조상에게 하셨던 맹세를 기억하시고 이스라엘의 죄과를 용서하신다. 30장에서는 하느님이 죄스러운 이스라엘에게 마련해 놓으신 "마음의 할례"(30,6)가 언급되는데, 이것이 이스라엘에게 회심을, 그리고 사랑의 계명을 비롯한 토라의 모든 계명의 준수를, 또 그로써 자기 하느님과 함께하는 새롭고 복된 삶을 가능케 해 준다. 신약 성경의 새로운 면으로서,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 사건을 하느님 구원 행동의 구체적 형태로 들여오며, 또한 (다른 구약 성경 텍스트와 연계하여) 이방인들도 의인義認이라는 하느님 백성의 차원 안으로 데리고 들어온다.

게오르크 브라울리크, 같은 책, 264-265쪽



2. 내용[편집]


신명기에서 보이는 특징은 하느님을 잘 섬기면 크게 복을 받지만, 그렇지 않으면 크게 저주를 받을 것이라는 인과응보 사상이 강하게 내포되어 있다. 이는 모세 전통의 가장 강력한 핵심으로서 북왕국에 전래되어 오다가 북왕국이 아시리아에 멸망된 뒤에 남왕국으로 전파된 것으로 보인다. 욥기는 신명기의 인과응보 사상이 현실에 더 이상 적용되지 않는 순간 벌어지는 문제를 고민하고 있는 책이라고 볼 수 있다.

성서학을 공부하다 보면 문헌 가설에서 직접 나오기 때문에 친숙할 책이다. 이 가설은 모세 오경이 서로 다른 문헌들이 합쳐져 형성되었다는 가설로, 이 중 고전적인 설명에 의하면 오경을 크게 야훼계(J)[9]/엘로힘계(E)/신명기계(D)/사제계(P) 4종류의 문헌으로 나눈다.[10] 이 중 신명기계 문헌은 3번째로 형성된 문헌이며, 굉장히 열정적이고 반복적인 독특한 문체가 특징이다. 당장 레위기와 신명기에서 아무 율법을 골라, 각각 문장을 비교해 보자. 전자가 차분하고 간결한 느낌이라면, 후자는 불타오르는 듯한 문체다. 또한 신명기는 '오늘'이라는 어휘를 적절하게 사용하여, 율법이 단순히 지나간 과거의 가르침이 아니라, 모세의 가르침을 듣는 탈출 2세대, 더 나아가 이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 지금 실시간으로 적용되는 가르침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이를테면 신명기는 다음과 같은 식의 문체이다. 반복, 열혈, 오늘이라는 3개의 키워드를 감안하며 읽어보자.

가톨릭 새번역
개신교 새번역
2 우리 하느님께서는 호렙에서 우리와 계약을 맺으셨다. 3주님께서는 이 계약을 우리 조상들과 맺으신 것이 아니라, 오늘 여기에 살아 있는 우리 모두와 맺으신 것이다.
2 우리의 하나님은 호렙 산에서 우리와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3주님께서 이 언약을 우리 조상과 세우신 것이 아니라, 오늘 여기 살아 있는 우리 모두와 세우신 것입니다.
신명기 5장 2-3절

가톨릭 새번역
개신교 새번역
11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계명은 너희에게 힘든 것도 아니고 멀리 있는 것도 아니다. 12그것은 하늘에 있지도 않다. 그러니 ‘누가 하늘로 올라가서 그것을 가져다가 우리에게 들려주리오? 그러면 우리가 실천할 터인데.’ 하고 말할 필요가 없다. 13또 그것은 바다 건너편에 있지도 않다. 그러니 ‘누가 바다 저쪽으로 건너가서 그것을 가져다가 우리에게 들려주리오? 그러면 우리가 실천할 터인데.’ 하고 말할 필요도 없다. 14사실 그 말씀은 너희에게 아주 가까이 있다. 너희의 입과 너희의 마음에 있기 때문에, 너희가 그 말씀을 실천할 수 있는 것이다.
11오늘 내가 당신들에게 내리는 이 명령은, 당신들이 실천하기 어려운 것도 아니고, 당신들의 능력이 미치지 못하는 것도 아닙니다. 12이 명령은 하늘 위에 있는 것이 아니므로, 당신들은 '누가 하늘에 올라가서 그 명령을 받아다가, 우리가 그것을 듣고 지키도록 말하여 주랴?' 할 것도 아닙니다. 13또한 이 명령은 바다 건너에 있는 것도 아니니 '누가 바다를 건너가서 명령을 받아다가, 우리가 그것을 듣고 지키도록 말하여 주랴?' 할 것도 아닙니다. 14그 명령은 당신들에게 아주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당신들의 입에 있고 당신들의 마음에 있으니, 당신들이 그것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신명기 30장 11-14절

또한 신명기는 연설문의 구조로 쓰여진 책이기 때문에, 조용히 혼자서 읽는 것보다는, 낭독하는 것을 듣거나 소리 내어서 읽는 쪽이 더 즐거운 책이다.

신명기계 문헌은 BC 622년 요시야 임금의 개혁을, 특히 예루살렘 성전을 합법적인 유일한 성소로 격상시킨 중앙 집권 정책을 정당화시키는 데 기여했다. 열왕기하를 보면 요시야왕이 예루살렘의 대신전을 수리하다가 율법책을 발견했다는 대목이 나오는데 대체적으로 이 율법책이 신명기나 신명기의 원전이 된 문서로 여겨진다.

2.1. 법규[편집]


우선 신명기에서 그리스도인 독자에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계명은 단연 십계명이다. 신명기는 출애굽기와 함께 십계명을 명시하고 있는데, 둘을 비교하자면 출애굽기가 상대적으로 더 오래된 전승을 담고 있으며, 신명기에는 (요즘 말로 하자면) 더 사회 교리적인 시선이 담겨있다. 가령 안식일 계명의 경우 출애굽기는 "야훼께서 엿새 동안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시고, 이레째 되는 날 쉬셨기 때문"(출애굽기 20장 11절)이라고 설명하지만, 신명기는 그런 말이 없고 "그래야 네 남종과 여종도 너처럼 쉴 것이 아니냐?"(신명기 5장 14절)라고 설명한다. 또한 출애굽기 20장 17절은 이웃의 아내와 재산을 모두 "탐내서는"(חמד) 안된다고 말하지만, 신명기 5장 21절은 이웃의 아내는 "탐내서는"(חמד) 안되고 이웃의 재산은 "욕심내서는"(תִתְאַוֶּ֜ה) 안 된다는 세심한 단어 구분을 하고 있다. 물론 이것을 21세기식 인권 담론과 동일시할 순 없지만, 상대적으로 신명기가 약자에 대해서 더 세심한 배려를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고대 근동 문명은 인류사의 가장 오래된 문명이자, 구약성경 탄생의 배경이다. 고대 이스라엘은 크고 작은 이웃 민족과 교류하고 경쟁하며 자신의 독특한 야훼 신앙을 성공적으로 보존하고 벌진시켰다. 그리고 고대 근동의 언어, 문학, 법률, 사상, 종교 등은 자연스레 구약성경 본문에 크고 작은 자국을 남겼다. 고대 근동 종교의 맥락에서 바라보면 신명기계 신학자들이 독특한 야훼 신앙을 표현하기 위해서 주변의 문화를 창조적으로 수용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우선 신명기의 문학적 삼단 구조가 고대 근동 법전의 구성과 같다. 기원전 18세기 고바빌론 왕국의 임금 함무라비의 법전은 고대 근동 전역의 법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 함무라비 법전의 구성은 신명기와 같이 머리말(5-11장)에 이어 법전(12-26장)이 나오고, 축복과 저주(28장)로 마무리한다. 한편 신명기의 문학적 삼단 구조는 고대 히타이트 제국의 봉신계약과 많은 면에서 일치한다. 이 계약은 상하관계가 뚜렷한 충성계약이다. 곧 신명기는 하느님과 백성이 맺은 충성의 계약을 표현하는 데 알맞은 형식의 문서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백성과 하느님의 '계약'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또한 신명기 법전(12-26장)의 개별 조항도 고대 근동 법전의 일반적 방식에 따라 서술되는 경우가 많다. 이른바 '결의론적' 문장은(···한 경우, ··· 해야 한다) 수메르의 우르-남무 법전이나 고바빌론의 함무라비 법전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특정한 사례를 들어 설명하는 이런 문장은 개별 조항의 법적 한계를 잘 드러내는 장점이 있다. 이런 개별 조항들은 사건의 경과(20장 '전쟁에 관한 법'의 법조항 순서)에 따라 배열되거나, 법조항의 대상에 따라 '법조항 묶음'으로 존재하고(판관에 관한 법, 레위인에 관한 법 등), 이 묶음은 위계(하느님-선택된 백성-경제법)에 따라 배열되는 점도 고대 근동의 법전과 같다. 그리고 법전의 문학적 단위가 변화할 때, 특정 주제어가 제시된다거나 특정한 도입구가 존재해서 표지의 역할을 하는 점도 공통적이다. 이러한 서술 방식은 법률을 실제 사용할 때도 편래힜을 것이고, 법의 전체나 일부를 종교적 축제 때에 공표하는 데도 유용했을 것이다. 또한 법률의 암기에도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물론 이런 문학적 유사성 외에도 개별 조항의 의미와 배경을 이해하는 데 고대 근동 세계에 대한 지식이 널리 쓰인다. 이렇게 고대 근동의 법전과 신명기 법전을 비교함으로써, 우리는 신명기 법전의 '고대법'적 성격을 더 잘 알 수 있다.

주원준, 신명기 주해 中


또한 십계명 외에도, 고대 근동 법전의 형식으로 다양한 계명을 신명기에서 제시하고 있다. 고대 근동의 법전은, 함무라비 법전의 구조에서 볼 수 있듯 ㄱ. 서언 ㄴ. 좁은 의미의 법전 ㄷ. 맺는말(축복과 저주 포함)의 구조로 되어있는데, 신명기 5-28장은 이 구조와 비슷하게 서언(5-11장), 법전(12-26장), 맺는말(28장)의 구조를 취한다. 또한 5-28장은 율법인 동시에 계약 체결 형식의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 경우 특히 고려 대상이 되는 모델은 '히타이트' 종주(宗主) 조약이다. 히타이트 종주 계약은 ㄱ. 전문 및 역사적 서문과 원칙 선언 ㄴ. 게별 규정 ㄷ. 축복과 저주의 구조를 취하는데, 이 역시 신명기와 어느정도의 공통점을 지닌다. 특히 눈여겨볼 것은 ㄱ 단계에서 히타이트 종주 계약은 주군이 봉신에게 베푼 역사적 은혜를 제시한다는 점(예: 나는 너에게 이러이러한 은혜를 베풀었다)인데 이는 신명기도 비슷하다.

다만 고대 근동 세계의 역사 및 문화에 대한 지식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해석하기 어려운 서술들도 많이 있다. 가령 전쟁에 관한 율법을 보자. 신명기는 "히타이트족, 아모리족, 가나안족, 프리즈족, 히위족, 여부스족을 모조리 전멸시켜야 한다"(20,17)고 말한다. 이는 마치 전쟁 중인 이스라엘인 독자에게 가나안인 전멸을 의도하는 것처럼 읽힌다. 하지만 그러한 독법은 단지 현대인의 감수성과 충돌하는 것을 넘어, 신명기 본문이 의도하는 1차적 의미와도 거리가 멀다. 여기 제시된 민족들은 신명기가 저술될 때 이미 사라졌기에 이들 민족에 대해 유다인 독자가 느끼는 감정은 현대 한국인이 거란족에 대해 느끼는 감정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따라서 실생활에 문자 그대로 적용할 수도 없었다. 아래에서 게오르크 브라울리크가 지적하듯, "이 법은 가나안 원주민들을 꼬집어 열거하고(20,17), 훗날 다른 민족들에 대한 절멸 전술은 분명히 반대한다. 실제로 가나안인들의 근절을 겨냥했다면, 이 법은 대상 없는 요구를 한 셈이다." 오히려 신명기는 이미 쇠퇴한 과거의 민족들에 대해서는 절멸을 말하지만, 독자와 인접하여 사는 인근 민족들에 대해서는 절멸 언급을 피하는 곡예를 구사한다.[11]

신명기가 서술하고 또 명령하는 가차없는 폭력에 의한 땅 정복은 하나의 관념적 구상물이다. 이것은 신앙이 요구하는 철저함의 상징, 하느님께서 당신의 일을 역사 안에서 완수하신다는 사실의 상징이다. 이민족 전멸 명령의 정형화된 적용은, 가나안 땅 점유 이후의 전쟁들뿐 아니라 훗날 유배로부터 이스라엘의 귀향과 관련해서도, 단호히 배제된다.

열두 지파로 이루어진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을 완전히 정복하고 그곳 주민 전체를 전멸시켰다는 전쟁은, 그 가설을 신명기가 설계하고 그 가설의 성취를 여호수아기가 보도하지만, 역사상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그 땅 주민들의 씨를 말린 잔혹하고 거룩한 전쟁이라는 표상은, 오래된 전승 요소들[예컨대 전리품 획득을 포기하고 신에게 사람·가축·물적 재화를 완전(절멸) 봉헌하는 승전, 이른바 헤렘herœm전쟁에 관한 보도들. 이미 멸망한, 부분적으로는 전설적인 종족들 목록. 토박이 종족들의 추방을 포함한 땅 약속들]을 의도적으로 체계화하고 일반화한다. 이 은유Metaphorik의 개별적 모티브들(예컨대 군사적인 테러 위협)은 아무래도 신아시리아의 선전포고와 언어와 표상 세계에서 자극받은 것으로 보인다. 요컨대 이스라엘 초창기의 '사실史實적' 재구성을 의도했던 것은 아니니, 이민족 절멸 계명은 문학적으로 처음부터 우화적·종교적인 의미에서 말해진 것이다. 과연 이 계명은 일러야 요시야 시대에서, 즉 이 계명이 적용되는 종족들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시대에서 유래한다. 기원전 7세기 말엽인 그 당시 이스라엘은 이미 자기 땅의 큰 부분을 다시 잃었다. 적과 적의 소유물을 절멸시킨다는 헤렘이라는 개념은, 온 땅이 너희 소유이며, 너희가 하느님을 철저히 신뢰하기만 하면, 그분은 그것을 너희에게 넘겨주실 것이다, 또는 잃어버린 땅을 다시 마련해 주실 것임을 암시하고자 했다. 하느님은 당신을 믿고 순종하는 모든 사람을 위해, 당신께 맞서는 모든 자에게 압도적 승리를 거두신다. 여호수아기의 경우도 비슷한데, 이 책은 (신명기계 가나안 땅 정복 설화의) 이 발생사적 단계에서 신명기와 조화를 이룬다. 가나안 땅 점유가 처음에는 정탐자들의 보고를 듣고 난 이스라엘의 불신 때문에 좌절되었고(신명 1,32; 참조: 9.23-24), 여호수아 주도하에 성공했는데, 그것은 전적으로 하느님의 선물이었다(요약: 여호 21,43-45). 여기서 묘사하는 전투들의 철저성은, 여호수아기의 본디 의미에 따르더라도, 이스라엘 역사 초창기의 초토화 전술에 대한 사실史實적 확언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하느님 신뢰의 철저성에 관한 설화적 상징이다. 이 철저한 하느님 신앙(이에 근거해 이스라엘은 초창기에 자기 땅을, 즉 자신의 행운을 얻었다)의 전쟁 은유는 또한 훗날 수백 년간의 국가 존립 이후 실패한 역사의 뚜렷한 대조를 이룬다.

모세가 요르단 동쪽의 아모리족 임금들과의 헤렘 전쟁을 약설略說하기 전에, 신명기 화자話者의 중간 언급은 뒤이어질 야훼와 이스라엘의 정복 전쟁들과 이민족 절멸을 세계사적 '통례적'인 현상들로 상대화한다. 야훼께서 편을 드셨던(2,21.22) 이스라엘 이웃 종족들(2,12.23)도 이미 당시의 전 주민들을 결딴냈다.

신명기 7장의 관점에 따르면, 헤렘은 이스라엘에 대한 야훼 애착의 한 귀결이며, 이스라엘이 하찮고 숫자 적고 힘없지만 야훼에게 선택된 것은, 이 세상에서 그분의 역사적 행동의 도구가 되기 위함이다. 약속의 땅의 강력한 일곱 민족을 절멸(완전) 봉헌하라는 명령의 배경에는, 전쟁을 역사 안에서의 신의 '심판'으로 여기는 근동의 통상적 견해가 있다. 여기서는 인종차별주의적이거나 민족주의적인 경향을 정당화하려는 게 아니며, 참으로 겨냥하는 바는 인간의 행동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끝끝내 신뢰해야 할 이 세상에서 하느님 행동의 절대주권임을 이 관념의 보편주의적·신학적 단초가 분명히 알려 준다.

9,1-7에서 요르단 서쪽 땅의 정복이란, 은총과 공로에 관한 엄밀한 신학적 논증의 표현 수단일 따름이다. 이 논증은 이스라엘의 완고함을 염두에 두고, 가나안인들의 악함을 평준화한다. 그러므로 양쪽 모두 땅에 대한 권리 주장을 할 수 없다. 이스라엘이 자신의 끊임없는 거부·실패에도 불구하고 그 땅을 얻는다면, 그것은 오로지 야훼께서 우두머리 조상들에게 하셨던 맹세에 충실하신 덕분이다. 다시 말해, 순전한 은총의 선물이다.

20,10-20의 전쟁에 관한 법은 후대의 전쟁들과, 여호수아 지휘하의 유일회적 주민 절멸 정복 전쟁을 명백히 구별하고 있다(20,15-18). 이 법은 가나안 원주민들을 꼬집어 열거하고(20,17), 훗날 다른 민족들에 대한 절멸 진술은 분명히 반대한다. 실제로 가나안인들의 근절을 겨냥했다면, 이 법은 대상 없는 요구를 한 셈이다.

29,21-27은 유배를 앞서 내다본다. 그때에는 다른 민족들에게 대항하는 일이 아예 없어질 것이다. 다른 민족들은 이 재앙의 원인을 묻다가, 자신들의 대답을 통해 이스라엘의 하느님 야훼께서 역사 안에서 당신의 권리를 관철하셨다고 이스라엘과 함께 신앙 고백을 하게 될 것이다. 예전에 가나안의 일곱 민족을 그렇게 위험스러운 존재로 만들었던 상황이 반전된 것이다. 요컨대 그들은 이스라엘을 자기 하느님에게서 떨어져 나가도록 미혹할 터였다.

이어지는 30,1-10의 귀향 예언은 유배된 자들을 이민족들 사이에서 데려옴과 관련하여, 이집트 탈출 때와는 달리, 하느님의 폭력 행위에 관해 전혀 말하지 않는다. 특히 약속의 땅의 새로운 소유에 관한 예언에, 이민족 절멸에 관한 언급은 전혀 없다. 이스라엘의 집합과 약속의 땅으로의 귀환은 이스라엘의 폭력 행위 없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이는 원칙적으로 타당하다.

-게오르크 브라울리크, 같은 책, 259-261쪽


비슷하게, 신명기 22장 13-21절에 나오는 한 계명을 보자.

가톨릭 새번역
개신교 새번역
28어떤 남자가 약혼하지 않은 젊은 처녀를 만나, 그 여자를 붙들어 동침하였다가 들켰을 경우, 29그 여자와 동침한 남자는 그 젊은 여자의 아버지에게 은 쉰 세켈을 주어야 한다. 그가 그 여자를 욕보였으므로, 그 여자는 그의 아내가 되고, 그는 평생 그 여자를 내보낼 수 없다.
228 어떤 남자가 약혼하지 않은 처녀에게 욕을 보이다가 두 사람이 다 붙잡혔을 때에는, 29그 남자는 그 처녀의 아버지에게 은 오십 세겔을 지불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여자에게 욕을 보인 대가로 그 여자는 그의 아내가 되고, 그는 평생 동안 그 여자와 이혼할 수 없습니다.
신명기 22장 28-29절

오늘날의 통념으로는 강간 사건의 '피해 여성을 위해' 가해 남성이 결혼 의무를 진다는 게 기이하게 보이겠으나, 고대 사회에서 이런 의무가 없다면 피해 여성의 앞길을 더 고통스럽게 할 우려가 있었다. 강간은 피해 여성의 혼삿길을 망쳐놓는 일이었고, 금욕서원(민수기 30장)이라는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후손 없는 여성은 당대 사회에서 엄청난 조롱을 받아야 했다. 특히나 이는 사회 하층민에서 더 큰 문제인데, 여성의 경제적 자립이 오늘날보다 훨씬 어려운 당대의 상황에서는[12] 누군가는 혼삿길 막힌 이 여성을 책임져야 했다. 그렇기에 차라리 가해남성이 피해여성을 책임지게 하는 것이야말로 현실적인 구제 방법이었다. 때문에 아예 남성의 이혼 가능성까지 박탈하여 철저하게 여성의 생계를 보장한 것이다.

이렇게 생각해야만, 오늘날의 통념에는 기이하게 보이는 사무엘기 하권의 한 일화를 이해할 수 있다.

사무엘기 하권 13장이 전하는 이야기에 의하면, 다윗 시대에 왕실에서 다음과 같은 범죄가 일어났었다. 왕자 압살롬이 이복여동생 타마르를 강간하고는 결혼도 하지 않고 버려버린 것이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피해여성 타마르는 가해남성 압살롬에게 강간보다는 피해자에 대한 무책임이 더 큰 범죄라고 항의한다.

가톨릭 새번역
개신교 새번역
11 암논은 타마르를 끌어안으며 말하였다. “누이야, 이리 와서 나와 함께 눕자.” 12그러자 타마르가 그에게 말하였다. “오라버니, 안 됩니다! 저를 욕보이지 마십시오. 이스라엘에서 이런 짓을 해서는 안 됩니다. 이런 추잡한 짓을 저지르지 마십시오. 13제가 이 수치를 안고 어디로 가겠습니까? 또한 오라버니는 이스라엘에서 추잡한 자들 가운데 하나가 될 것입니다. 그러니 제발 임금님께 청하십시오. 그분께서 저를 오라버니에게 주시기를 거절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14그러나 암논은 타마르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는 타마르보다 힘이 셌기 때문에 강제로 타마르와 함께 잤다. 15그런 다음 암논은 타마르가 지독히 미워졌는데, 타마르를 미워하는 마음이 전에 타마르를 사랑하던 마음보다 더 컸다. 그래서 암논은 타마르에게, “일어나 나가라!” 하였다. 16그러자 타마르가 암논에게 말하였다. “안 됩니다! 저를 내쫓는 것은 조금 전에 제게 하신 행동보다 더 나쁜 짓입니다.” 그러나 암논은 타마르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고, 17시중드는 젊은이를 불러 “내 앞에서 이 여자를 밖으로 내쫓고 그 뒤에서 문을 걸어 잠가라!” 하고 일렀다. 18타마르는 긴 겉옷을 입고 있었는데, 시집 안 간 공주들이 보통 그런 옷을 입었다. 암논의 시종은 타마르를 밖으로 내보내고 그 뒤에서 문을 걸어 잠갔다. 19타마르는 재를 머리에 뒤집어쓰고 자기가 입고 있는 긴 겉옷을 찢었다. 그리고 머리에 손을 얹은 채 울부짖으며 계속 걸었다.
11그는 다말을 끌어안고, 함께 눕자고 하였다. 12다말이 그에게 말하였다. "이렇게 하지 마십시오, 오라버니! 이스라엘에는 이러한 법이 없습니다. 제발 나에게 욕을 보이지 마십시오. 제발 이런 악한 일을 저지르지 말아 주십시오. 13오라버니가 나에게 이렇게 하시면, 내가 이런 수치를 당하고서, 어디로 갈 수 있겠습니까? 오라버니도 또한 이스라엘에서 아주 정신 빠진 사람들 가운데 하나와 똑같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라도 제발 임금님께 말씀을 드려 보십시오. 나를 오라버니에게 주기를 거절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14다말이 이렇게까지 말하는데도, 암논은 다말이 애원하는 소리를 들으려고 하지도 않고, 오히려 더 센 힘으로 그를 눕혀서, 억지로 욕을 보였다. 15그렇게 욕을 보이고 나니, 암논은 갑자기 다말이 몹시도 미워졌다. 이제 미워하는 마음이 기왕에 사랑하던 사랑보다 더하였다. 암논이 그에게, 당장 일어나 나가라고, 소리를 버럭 질렀다. 16그러자 다말이 암논에게 말하였다. "그렇게 하시면 안 됩니다. 이제 나를 쫓아내시면, 이 악은 방금 나에게 저지른 악보다 더 큽니다." 그런데도 암논은 다말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도 않고, 17오히려 자기의 시중을 드는 하인을 불러다가 명령하였다. "어서 이 여자를 내 앞에서 내쫓고, 대문을 닫고서 빗장을 질러라." 18암논의 하인은 공주를 바깥으로 끌어내고, 대문을 닫고서, 빗장을 질렀다. 그 때에 다말은 소매에 색동으로 수를 놓은 긴 옷을 입고 있었다. 공주들은 시집가기 전에는 옷을 그렇게 입었다. 19이제 다말은 머리에 재를 끼얹고, 입고 있는 색동 소매 긴 옷도 찢고,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로, 목을 놓아 울면서 떠나갔다.
사무엘기 하권 13장 11-19절

당연히 이 계명을, 여성의 경제적 자립이 충분히 가능하고 결혼이 선택으로 취급 받는 현대 사회에서 그대로 적용하긴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신명기 저자는 기본적으로 자기와 동시대에 살고있는 독자들에게 말을 하고 있으며, 따라서 이런 문화적 맥락을 전제하는 독서가 당연히 필요하다.
또한 신명기 22장의 이 규정은 여성의 본성을 질타하거나 부정적으로 묘사하지 않고 오직 가해자의 폭력성을 문제 삼는다. 남자는 형벌로서 은 50세켈을 지불해야 하고 속죄성 결혼으로 신부 선택권을 잃었으며 여자를 내보낼 권리도 빼앗겼다. 가부장제 사회였던 고대 근동에서 이처럼 남성의 권리를 제한한 문헌은 찾기 어렵다.[13]

비슷하게, 25장 11-12절을 보자.

가톨릭 새번역
개신교 새번역
11두 사람이 싸울 때, 한 사람의 아내가 남편을 때리는 사람의 손에서 남편을 구해 내려고 손을 내밀어 그 사람의 치부를 붙잡을 경우, 12너희는 그 여자의 손을 잘라 버리고, 동정해서는 안 된다.
11두 남자가 싸울 때에, 한쪽 남자의 아내가 얻어맞는 남편을 도울 생각으로 가까이 가서, 손을 내밀어 상대방의 음낭을 잡거든, 12당신들은 그 여인의 손을 자르십시오. 조금도 동정심을 가지지 마십시오.
신명기 25장 11-12절

이 구절은 무엇을 의도하고 있는지 현대인이 이해하기 어렵고 때로는 우스운 느낌까지 준다. 그러나 신명기 25장은 5절부터 후손에 관한 규정을 나열하고 있으며, 특히 수숙혼嫂叔婚을 중요하게 다룬다. 이러한 문맥을 고려하여 읽는다면, 그리고 후손이 끊기면 재산을 친척이 상속한다는 것을 이해하고 읽는다면, 이것이 얼마나 심각한 중범죄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규정을 앞의 아홉째 계명의 풀이로서 '후손에 관한 규정'(5-10절)의 연속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 두 사람'이 싸우는 상황을 '두 형제'가 싸우는 상황으로 옮길 수 있기 때문이다(11절). 그렇다면 이 규정은 두 형제가 싸우는데, 한 형제의 아내가 시숙의 성적 능력을 훼손하는 경우를 다룬 것이다. 상속 재산을 자신의 자녀에게만 물려주기 위해, 시숙의 성적 능력을 고의로 상실하게 한 여자는 손을 잘라버리고 동정할 가치도 없다는 해석이다. 그러므로 5-10절과 11-12절의 두 규정은 한 쌍을 이룬다.

-주원준, 같은 책, 384쪽[14]



2.2. 구조[편집]


신명기는 문학적으로 잘 짜인 신학서다. 다음에서 보듯, 뚜렷한 표제어Überschrift가 한 단락의 시작을 알린다. 곧 한 단락의 첫머리마다 "이것은 …이다"가 나오고, 뒤이어 "모세가 … 말하였다"는 표현이 반복되는 식이다. 이를 따라 아래처럼 크게 네 가지 말씀으로 나눌 수 있다.

||말씀||표제어||

||첫 번째 말씀:||"이것은 … 말씀이다"(1,1)||

|| 회상과 권고(1,1-4,43)||"모세는 … 설명하기 시작하였다"(1,5)||

||두 번째 말씀:||"이것은 … 율법이다"(4,44)||

|| 가르침(4,44-28,68)||"모세는 … 말하였다"(5,1)||

||세 번째 말씀:||"이것은 … 계약의 말씀이다"(28,69)||

|| 계약의 말씀(28,69-31,1)||"모세가 … 말하였다"(29,1)||

||네 번째 말씀:||"이것은 … 축복이다"(33,1)||

|| 축복(33-34)||"그(=모세)가 말하였다"(33,2)||

-주원준, 같은 책, 17-18쪽


신명기 법전은, 19-25장의 편집과 연계하여, 십계명의 순서를 따라 체계화되었다. 이 '십계명식 편집'의 문학적 '본보기'로 이용되었을 직한 것들로는, 레위기 19장의 공동체 교리 문답과 에스겔서 18장의 일련의 교리 문답 양식의 가르침을 들 수 있다.

제1계명: 12,2-13,19

제2계명: 14,1-21

제3계명: 14,22-16,17

제4계명: 16,18-18,22

제5계명: 19,21장; 22,1-12(제5계명에서 제6계명으로의 연결 본문)[15]

제6계명: 22,13-23,15

제7계명: 23,16-24,7

제8계명: 24,8-25,4

제9계명: 25,5-12

제10계명: 25,13-16

유배에서 돌아온 이후 시기에 신명기 27장(요시야 계약 문서에 속하는 1절과 9-10절 없는)과 11,29-30이 삽입된 것으로 보인다. 이 삽입은 필경 예루살렘과 사마리아의 일시적 친선과 관계가 있는데, 이것은 오래 지속되진 않았지만 어쨌든 자취를 남겨 놓았다. 레위인들의 권리 주장도 기록으로 남았다(예: 10,8-9).

-게오르크 브라울리크, 같은 책, 24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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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말씀들"이라는 뜻. 원문의 첫 문장 둘째 어절에서 정관사를 뺀 것이다. "이것은 모세가 요르단강 건너편 바란, 도벨, 라반, 하세롯, 디자합 사이의 숩이 마주 보이는 아라바라는 광야에서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한 말이다.(신 1:1, 공동번역)"[2] "두 번째(δεύτερος) 법(νόμος)"을 의미하는 코이네 그리스어이다. 현대 그리스어로는 "Δευτερονόμιο(Defteronómio)"로 표기한다.[3] '神命記'로 착각하기 쉬우나, 여기서는 '거듭'이라는 의미의 '申'을 사용했다. '거듭하여 간곡히 하는 당부'라는 뜻인 '신신당부(申申當付)'를 떠올리자.
따라서 申命記이라는 한자명은 곧 그리스어 제목 Deuteronómion의 직역이다. 申(Deutero) + 命(nomión)인 것.
[4] 에리히 쳉어Erich Zenger 등의 《구약성경 개론》 Einleitung in das Alte Testament 한국어판 (분도출판사 2012)1013쪽[5] 인용한 이 구절을 유대교에선 '셰마'(Shema, 들어라)라고 하며, 날마다 외워야 한다. 또한 이 구절에서 명령한 대로 이 구절이 적힌 쪽지를 담은 통(Mezuzah)을 대문 위에 달아놓아고 기도 시에는 문자 그대로 이 구절을 지키기 위해 이 구절을 담은 작은 통(테필린)을 끈으로 이마와 왼팔에 묶고 기도해야 한다. 심지어 하레디들은 일상생활 중에도 테필린을 착용하고 생활할 정도이다.[6] 구약성경에서 유언은 매우 큰 의미를 지녔다.(창세 27장; 48장 9-16절; 50장 24절; 여호 23장; 2사무 23장; 1열왕 2장 1-3절; 2열왕 13장 14-18절; 토빗 14장 참조)[7] 시부(詩賦) 따위에서, 글귀 끝부분에 다는 운자. 각운과 비슷한 의미이다. [8] (발췌자 주석) 6장 4절의 신앙고백:
"YHWH(야훼 eloheinu(우리-엘로힘 YHWH(야훼 echad(유일"
이 네 글자 신앙고백은 다음 두 가지로 번역 가능하다. ①"(야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야훼이시다." (가톨릭 새번역. 유사 번역: 개역성경)"주님(야훼은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주님(야훼은 오직 한 분뿐이십니다." (개신교 새번역. 유사 번역: 공동번역)
[9] YHWH라서 Y가 되어야 할 거 같지만, 이 가설을 처음 만든 사람이 독일인이라 J가 되었다고 한다.[10] 다만 JEDP의 4출전 모델은 문헌 가설 중에서는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고전적 모델이며, 그냥 고전적인 견해는 이렇다는 정도로만 알아두자. 이 4출전 모델은 1970년경까지는 천하를 통일할 기세로 학계를 호령했고 따라서 알아둘 필요는 충분하지만, "1970년대부터 확고부동한 것처럼 보이던 이 가설이 흔들리기 시작"하였으며(정태현, 《성서 입문 하권》, 109쪽) "그 고전적 형태는 이제 동조자가 거의 없"다.(Erich Zenger u.a, 이종한 옮김, 《구약성경 개론》 163쪽) 비록 고전적 모델이 전적으로 완전히 거부된 것은 아니고 D와 P의 존재는 그 후로도 연구자들의 폭넓은(그러나 개별적 강조점들은 상이한) 동의를 얻고 있지만, J와 E는 "극히 의문시되거나 단호히 부인되고 있다."(《구약성경 개론》 163쪽)[11] 신명기는 에돔에 대해서는 "그들에게 싸움을 걸지 마라. 내가 세이르산을 에사우에게 소유지로 주었으므로, 너희들에게는 그들의 땅을 한 치도 주지 않을 것"(신명 2,5)이라 말하며, 비슷하게 모압에 대해서도 "모압을 괴롭히지도 말고 그들에게 싸움을 걸지도 마라. 내가 아르를 롯의 자손들에게 소유지로 주었으므로, 너희에게는 그 땅 어느 곳도 소유지로 주지 않을 것이다."(신명 2,9)라고 한다. 현대 한국인이 애증을 느끼는 대상이 거란족이나 선비족이 아니라 일본인, 중국인임을 고려하면, 신명기가 얼마나 의도적이고 정교한 곡예를 구사하는지 조금은 느낄 수 있을 것이다.[12] 이러한 이유 때문에 고대 근동에서는 가난한 사람의 대명사로 '고아와 과부'가 쓰였다.[13] 주원준, 같은 책, 346쪽[14] 같은 책에서 라삐들의 해석들도 소개하고 있다. 여기에는 1. 남편이 아닌 다른 남성의 성기를 만진 것 자체가 문제라는 해석 2. 상호 대등한 남자들 싸움에서 공정을 해친게 문제라는 해석(11절에는 남편이 싸움에서 밀린다는 묘사가 없다) 등이 있다. [15] 주원준 박사는 22,1-12를 제6계명에 연결한다. "'겉옷'(22장 3.5.12절), '씨'(9절), '밭'(10절), '갈'다(10절) 등은 성적 의미를 강하게 지닌 낱말이다."(주원준, 같은 책 33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