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진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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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생당

신진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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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명신당[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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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당우애
프롬 파이브
민사당
태양당
국민의 목소리
사회민주연합
개혁 클럽
자유개혁연합

파일:신진당 로고.svg
新進党(しんしんとう | 신진당
영문 명칭
New Frontier Party: NFP
약칭
新進(신진), NFP
한글 명칭
신진당
창당일
1994년 12월 10일
해산일
1997년 12월 27일[3]
전신
신생당, 공명신당, 일본신당, 민사당, 사회민주연합, 자유개혁연합
후신
자유당, 국민의 목소리, 개혁 클럽, 신당 평화, 여명클럽, 신당우애, 프롬 파이브, 태양당
이념
신자유주의, 신보수주의, 작은 정부
--
내부계파:
신보수주의[A]
신자유주의[A]
불교 민주주의[4]
사회민주주의[B]
보수자유주의[C]
자유보수주의[C]
중도주의
사회자유주의[5]

스펙트럼
중도 ~ 중도우파, 빅 텐트 정당
주소
도쿄도 미나토구 아카사카2초메 2-12
(東京都港区赤坂2丁目2番12号)
당수
오자와 이치로 / 10선 (, 32~41대)
부당수
요네자와 다카시[6] / 7선 (, 34~39대)
와타나베 고조 / 10선 (, 34~39대)
간사장
니시오카 다케오 / 11선 (, 30~36·38~41대)



참의원
40석 / 252석 (22.6%)
중의원
156석 / 500석 (31.2%)

1. 개요
2. 상세
3. 역대 당수
4. 역대 선거결과
4.1. 중의원 의원 총선거
4.2.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
5. 기타



1. 개요[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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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시작은 화려했으나, 마지막은 초라하게 망해버렸다.[7]

과거에 존재했던 일본정당. 1994년 12월 10일 창당하여 1997년 12월 27일 해산, 소멸하였다. 일본 정치사에 짧고 굵게 한 획을 그은 바 있다.


2. 상세[편집]






오자와 이치로신생당, 신당 사키가케(일부), 민사당, 일본신당, 자유개혁연합, 공명당, 그리고 에다 사쓰키 등 기타 사회민주연합, 우파사회당 계열과 자민당의 일부 구성원까지 한꺼번에 끌어모아서 만든 그야말로 당시 최대의 야당이었고, 존속 기간이 3년에 불과했만 일본사회당 몰락 이후 비자민/비사회 계열 야당들이 집결한 정당이라는 특이한 점이 있다. 창당 직후 초대 대표는 가이후 도시키 전 수상이었지만, 사실상 오자와가 모든 권력을 장악했다.

오자와가 이렇게 상당수 야당 세력을 규합한 이유는 딱 한 가지, 바로 자민당을 1:1로 꺾고 정권을 차지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1995년에 치를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 도전장을 던졌는데, 이 선거에서 개선의석을 두 배 이상(19석→ 40석) 늘리며 총 56석으로 약진에 성공했다. 참고로 무라야마 도미이치 수상이 이끌던 일본사회당은 16석, 다케무라 마사요시 대장대신이 이끌던 신당 사키가케는 3석으로 대폭망했고, 두 당과 대연정을 성사시키려던 자민당은 지난 참원선에 비해 46석으로 줄었지만 실질적으로 제1당을 유지했다.

이후 도시키가 대표에서 사직하고, 오자와가 1996년 초 당권을 잡고 제41회 중원선을 맡게 되었다. 중대선거구제에서 소선거구제로 바뀌면서 처음 치르는 선거였는데, 그야말로 자민당과 1:1 드림매치(!)를 성사시킨 것이다. 신진당은 355명의 후보를 낸 자민당에 비해 6명 많은 361명의 후보를 내면서 자민당보다 후보를 많이 내는 기록을 갱신하나[8], 결과는 하시모토 류타로가 이끄는 자민당이 239석, 신진당이 156석[9]으로 자민당의 승리로 끝이 났다. 결과적으로 자민당이 중의원 해산 직전 211석에서 28석을 더 불린 한편 신진당은 공명당이 합쳐진 점에서 창가학회의 선거 몰빵까지 받았는데도 중의원 해산 직전의 160석에서 오히려 4석이 깎이는 대참패를 했다.

이는 대연정으로 이탈한 구 사회당 지지층의 흡수에 실패했던 것이 그 요인으로 분석되며 때문에 구 사회당 지지층이 민주당이나 공산당으로 쏠리면서 결정적인 승부처라 할 수 있는 간토 지역에서 참패를 거두었다. 비록 구 사회당 지지층이 사회당에 실망하면서 이탈했지만, 애초에 신진당이 신보수주의에 가까운 노선을 따르고 있는지라 섣불리 지지하기에는 마음이 안 가던 상황이었는데 구 민주당이 창당되면서 표가 분산되었다는 것은 신진당에게 뼈 아픈 결과였다.

하지만 오자와는 선거 패배에 상관 없이 당 대표 직을 유지했고, 당 내에서는 분란이 커지게 된다. 오자와는 자민당과의 대연정으로 위기를 극복하려 했지만 상술하듯 자민당이 과반에 연립 내각을 이루고 있는지라 아쉬워 할 상황이 아니었고, 이 때 1997년 창가학회 세력[10]이 탈당해 공명당[11]을 재창당한 것을 시작으로 다른 세력들도 줄줄이 탈당하여 오자와의 자유당, 자민당으로의 복당 등 갖가지 고초를 겪은 끝에 신진당은 3년이라는 파란만장한 역사에 막을 내리게 된다. 이후 신진당의 주류 세력과 지지층의 대다수는 민주당으로 흡수되었고 오자와는 자유당이라는 군소 야당을 전전하다가 2003년 민주당에 합류한다.

1990년대 중반 당시의 웬만한 야당 세력을 하나로 모았기 때문에 非자민당, 非사회당계열의 일본 야당 인사들의 당적사에는 신진당이 꼭 들어가게 되어 있다. 신진당 소속이란 기록이 없는 야권 인사는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의 일본우정 민영화에 반대하는 의미로 자민당에서 민주당으로 이적하는 케이스나 90년대 중반 이전 일본사회당 소속이었던 의원들, 1998년 이후로 정계에 입문한 신인 정도다.

물론 당시 간 나오토하토야마 유키오구 민주당이 엄존했을 뿐더러, 일본공산당, 일본사회당, 신당 사키가케 출신들은 참여하지 않았다. 당초 구 민주당은 사회민주당 우파와 신당 사키카게가 연합해 창설된 당으로 나름대로 52석을 확보하는데, 1:1 매치를 부르짖은 신진당과는 달리 사회당 유권자들의 지지를 어느 정도 얻는 데 성공했다고 한다.

3. 역대 당수[편집]





4. 역대 선거결과[편집]



4.1. 중의원 의원 총선거[편집]


※ 의석 증감은 선거 공시 당일 의석 수와의 비교임.
연도(회차)
후보자
당선자
정당투표
지역구
비례
합계
(중복 제외)

지역구
비례
합계 [증감]
득표수
득표율
1996(41회)
235
133
361
96
60
156 [{{{#blue ▼4}}}]
15,580,053
28.04%


4.2.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편집]


연도(회차)
후보자
당선자
비개선
의석

총 의석 [증감]
정당투표
지역구
비례
합계
지역구
비례
합계
득표수
득표율
1995(17회)
?
?
62
22
18
40
17
57 [{{{#red ▲21}}}]
12,506,322
30.75%


5. 기타[편집]


  • 고베 대지진 당시 신진당의 참의원이었던 나카무라 에이치가 당시 화재가 재일조선인의 방화에 의한 것이라고 망언을 한 적이 있다.
  • 창가학회가 신진당에 들어온 적이 있어서 공명당 대표 야마구치 나쓰오도 이 신진당 소속이었던 적이 있다.
  • 도쿄도지사 고이케 유리코가 2017년 총선을 앞두고 희망의 당을 창당하자, 일본 정치계와 언론사에서는 제2의 신진당 꼴 날 수도 있다며 우려섞인 시선으로 바라보기도 했다.[12] 그런데 실제로는 제4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는 제1야당은 커녕 에다노 유키오입헌민주당에게도 밀려 제2야당이 되었다. 옛 민주당 - 민진당 출신들에게 알아서 기라고 말하며 대여공세보다 야권 내 밥그릇에 몰두하다가 신진당보다도 망해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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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존의 공명당 의원들 중 중의원 의원들과 참원선을 앞두고 있던 1995년 개선 참의원 의원들이 우선 신진당에 합류하기 위해 임시로 창당한 정당.[2] 각각 신당평화(중의원), 여명클럽(참의원)이라는 신당을 차렸다가 1998년 11월 7일 다시 공명당으로 통합하였다.[3] 법률상으로는 동년 12월 31일[A] A B 신생당 계열[4] 공명당 계열[B] 민사당 계열[C] A B 일본신당 계열[5] 사회민주연합 계열[6] 민사당의 마지막 중앙집행위원장이었다.[7] 위의 사진은 1994년 12월 10일 신진당 창당대회 사진이다.신진당 창당대회 영상 창당식은 말 그대로 화려함 그 자체였다. 오케스트라팀을 초청해서 베토벤의 곡인 교향곡 제9번을 연주하고, 환희의 송가를 제창했다. 그리고, 창당대회 사회는 배우 겸 탤런트 오카다 마스미(岡田眞澄)가 담당했고, 단상에는 국회의원들과 흰옷을 입은 어린이들이 있었다. 객석에서 신진당 깃발을 덮는 퍼포먼스로 창당대회를 마무리했다. 원래는 창당대회의 연출을 광고대행사덴츠에 맡기려고 했지만, 정당조성법 등 기타 문제점 등으로 인해서 창당준비위원회 자체적으로 연출을 담당했다.# 그러나, 3년 후의 모습은 창당대회와는 정반대로, 환희의 송가는 커녕 사랑과 전쟁 그 자체였다.[8] 55년 체제가 성립한 이후 중의원 선거에서 자민당보다 후보를 많이 낸 정당은 신진당이 사상 처음이었다.[9] 여야 전체로 보면 256(자민+사민+사키가케) vs 244(신진+구 민주+공산+제파+무소속)였는데, 결과 상으로 보나 의석 수를 까먹은 사회민주당, 신당 사키가케와 연립내각을 구성한 자유민주당의 승리였기에 이 정도 의석으로 정권 유지를 하기엔 충분했다.[10] 도쿄 지하철 사린가스 살포사건으로 옴진리교가 사회적 문제가 되면서 자민당이 종교법인법 개정을 추진하자 창가학회 측이 반발했고, 이로 인해 창가학회의 이미지가 악화되면서 공명당계를 당직에서 배제하려는 오자와와 갈등을 빚었다.[11] 정확히는 참의원 의원들의 여명클럽(黎明クラブ)과 중의원 의원들의 신당평화(新党平和), 그리고 독자 세력인 공명(公明)이 합쳐져서 1998년 재창당한 것으로, 공명당은 훗날 그 유명한 자민당과의 연정을 구성하게 된다.[12] 참고로 고이케 본인도 신진당 소속이기도 했다. 그녀가 정계 입문을 일본신당에 입당하면서 시작했는데 그 후 당이 오자와의 신생당 등과 합당해 신진당을 창당했을 때 그녀도 합류했고 신생당 소속으로 출마해서 당선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