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일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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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상세
2.1. 유대교의 경우
2.2. 가톨릭의 경우
2.3. 정교회의 경우
2.4. 이슬람의 경우
3. 종교개혁가들의 경우
3.1. 마르틴 루터가 보는 십일조에 대한 견해
3.2. 장 칼뱅이 보는 십일조에 대한 견해
3.3. 존 위클리프가 보는 십일조에 대한 견해
3.4. 존 웨슬리가 보는 십일조에 대한 견해
4. 대한민국 개신교의 경우
4.1. 개신교에서 말하는 십일조
4.1.1. 성공회의 경우
5.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6.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 tithe[1]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에서 자신의 수입의 일정 부분을 교단에 납부하는 것. 구체적인 액수와 수취 주체는 역사와 지역에 따라 천차만별로, 한국 개신교에서는 통상 수입의 1/10, 한국 가톨릭에선 1/30을 개인이 직접 납부한다.[2]

대한민국 세속법에선 종교 기부금으로 간주하여 연말정산 때 기부금 공제를 받을 수 있다.

십일조는 성경에서 선포된 성도의 의무로서 개신교의 성장동력으로서 교회의 선한 사역을 펼치는데 힘이 된다는 교계의 입장과 십일조 강요는 한국 개신교의 대표적인 폐단 중 하나로서 이미지 악화에 기여했다는 비주류계의 의견이 대조되고 있다.


2. 상세[편집]


십일조는 히브리어로 '마아세르'라고 하는데, 70인역 구약성서에서는 에피데카토르 또는 데카토스(10)이라고 했다. 구약의 원어를 살펴보면 '테부아'로서 열매, 증가, 수익이라는 의미가 있다. 모세의 율법이 정해지기 전에 십일조는 농사를 지어서 나온 수확물의 십분의 일이었다. 목축업은 맏물로서 첫새끼를 바치고 이후 목자의 지팡이 아래 통과하는 10번째의 것을 잡아 하느님께 바쳤 다[3] 월급생활자들이 많아서 보통 한국 교계에서는 달마다 내지만[4] 성서에 따르면 매 곡식의 수확 때마다 내어야 하는 것이고,[5] 상업을 하거나 먼곳에 있는 사람은 일정한 기간을 정하여 정산해서 내거나 절기가 되어 예루살렘으로 상경할 때 돈으로 내는 것이다.

성경에서 십일조에 대한 서술은 여러번 나오는데 크게 창세기에서 서술과 출애굽 이후에 하느님이 모세에게 명한 율법에 대한 서술이 있다.

먼저 창세기에서는 아브라함이 십일조를 드리는 장면과 야곱이 서약하는 장면이 나온다.

살렘 왕 멜기세덱은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다.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을 섬기는 사제였다.

그는 아브람에게 복을 빌어주었다. "하늘과 땅을 만드신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내리소서.

그대의 원수를 그대의 손에 부치신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 찬양을 드리어라."아브람은 자기가 가진 것 전부에서 십분의 일을 조건 없이 살렘 왕 멜기세덱에게 주었다.

아브람은 십일조를 드림에 대해 하느님께 어떠한 조건을 달거나 요구를 한 바가 없었음에도 살렘왕 멜기세덱은 먼저 아브람에게 다가가 하느님께 복을 내려달라고 기원하였다.

창세기 14장 18~20절 (공동번역)


그리고 아브람과 달리 야곱은 이렇게 조건부 서원을 하였다. "만일 제가 이 길을 가는 동안 하느님께서 저와 함께 하여주시고 저를 지켜주셔서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마련해 주시고,

무사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만 하여주신다면, 저는 야훼님을 제 하느님으로 모시고,

제가 세운 이 석상을 하느님의 집으로 삼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저에게 무엇을 주시든지 그 십분의 일을 반드시 드리겠습니다."

야곱의 서원은 아브람과 달리 비록 외면상 조건에 대한 보답의 형식으로 제시되고 있으나 내면적으로 믿음과 확신에 근거한 감사의 서원이었다. 이를 줄거주고 받을거 받는 상거래에서 체결되는 계약 관계로 보는 시각은 성경과는 맞지 않는 잘못된 시각이다.

창세기 28장 20~22절 (공동번역)

위의 구절에는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에게 '그대의 원수를 그대의 손에 부치신 하느님'이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왜 이런 말을 하였는고 하니 이전에 구절들을 보면 내용이 이렇게 된다.
소돔+고모라+3명의 왕이 엘람왕의 속국이었다가 엘람왕에게 반역->엘람왕이 빡쳐서 밑에 있는 왕 셋과 함께 반역한 왕 다섯을 발라버리고 소돔과 고모라를 싹 털어감.->이때 아브라함의 조카 롯도 소돔에서 살고 있다가 끌려감-> 아브라함이 소식을 듣고 조카를 구하기 위해 아브라함이 자기 부족의 가병 318명을 데리고 가서 적들의 군대를 쳐부수고 조카 롯을 구출+약탈해간 재물들도 다 전리품으로 획득.
이렇게 해서 전쟁에 이기고 조카도 구하고 전리품도 빵빵하게 가지고 돌아오는 길에 하느님의 사제 멜기세덱을 만나서 멜기세덱의 말을 듣고는 십분의 일을 그에게 주는 장면이다.
또 밑의 구절은 야곱이 형의 축복을 뺏은 걸로 인해 거의 집에서 쫓겨나듯이 외갓집으로 가는 길에 하느님이 꿈속에서 야곱에게 나타나서 축복하고 약속하자 야곱이 꿈에서 깨서 하느님에게 십일조를 서원하는 장면이다.

이 두 장면에서 참고해야 할 부분의 고대의 주종관계에 대한 부분이다. 고대로부터 중세까지 대부분의 주종관계 또는 계약관계에서 주인 또는 강대국은 아랫 사람에게 조공 또는 세금을 받고 대신에 그에 합당한 보호와 통치를 베풀었다.

세금의 역사에 대한 참고 기사 이 기사를 보면 고대의 세금의 세율은 다양했지만 보편적으로 10% 내외라고 나와 있다.사무엘상 8장에도 이스라엘에 왕정이 성립할 때 왕에게 바칠 세금으로 십분의 일을 바치라고 나온다. 이 십분의 일은 모세의 율법에서 제정된 십일조가 아니다. 왕에게 내는 세금이 신설된다는 뜻이다. 즉 이스라엘 국가가 세워지면서 기존의 종교적 십일조 이외에 별도로 정치적 세금제도가 신설됨을 알 수 있다. [6]

이와 같이 아브라함과 야곱의 행동과 서원에도 이런 주종관계에 대한 부분이 깔려있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이 나의 주인이요 보호자이니 하느님이 나를 이기게 해주셨으니까(또는 잘되게 하시면) 내가 하느님께 십분의 일을 보호비 또는 세금으로 내겠습니다.'와 같은 일종의 상거래처럼 외면상 조건에 대한 보답의 형식으로 제시되고 있으나 내면적으로는 믿음과 확신에 근거한 감사의 서원이었다. 이러한 믿음을 아시고 하느님은 아브라함과 야곱에게 먼저 보호와 창대하게 하리라 약속하셨던 것이다.

그 이후에 출애굽 이후에는 하느님이 이스라엘 백성과 왕과 백성의 언약을 맺고 모세를 통해 율법으로 십일조를 명령한 장면들이 나온다. 또한 이 때에는 십일조의 용처에 대해서도 나오고 있다.

땅에서 나는 곡식이든 나무에 열리는 열매이든 땅에서 난 것의 십분의 일은 야훼의 것이니, 야훼께 바칠 거룩한 것이다.

레위기 27장 30절 (공동번역)


너희는 해마다 씨를 뿌려 밭에서 거둔 소출 가운데 그 십분의 일을 떼어두었다가

그 곡식과 술과 기름의 십일조를 소와 양의 맏배와 함께 가져다가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당신의 이름을 두시려고 고르신 곳에서 그를 모시고 먹어야 한다. 그럼으로써 너는 너희 하느님 야훼를 길이 공경해야 할 줄을 깨닫게 될 것이다.

(중략)

너희는 삼 년마다 한 번씩 그 해에 난 소출의 십일조를 다 내놓아 성안에 저장해 두었다가

너희가 사는 성 안에 있는 레위인, 떠돌이, 고아, 과부들이 와서 배불리 먹게 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복을 내리실 것이다. 레위인은 너희가 받은 유산을 함께 받지 못한 사람들이다.

신명기 14장 22~23,28~29절 (공동번역)


레위기 27장 30절에는 땅의 십분의 일과 땅에서 나는 곡식과 열매의 십분의 일이 하느님의 것이라 하였고 신명기 14장 22절부터 29절까지에는, '해마다 씨를 뿌려 밭에서 거둔 소출 가운데 그 십분의 일을 떼어두었다가 그 곡식과 술과 기름의 십일조를 소와 양의 맏배와 함께 가져다가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당신의 이름을 두시려고 고르신 곳에서 그를 모시고 먹어야 한다. 그럼으로써 너는 너희 하느님 야훼를 길이 공경해야 할 줄을 깨닫게 될 것이다.' 하였다. 28절~29절에는 '너희는 삼 년마다 한 번씩 그 해에 난 소출의 십일조를 다 내놓아 성안에 저장해 두었다가 너희가 사는 성 안에 있는 레위인, 떠돌이, 고아, 과부들이 와서 배불리 먹게 하여라.' 하는 것이었다.[7] 레위인이란 쉽게 말하면 성소의 일을 돌보는 사람들, 즉 경제활동을 하는 계층이 아닌 성직자들이다. 그러니 그들이 먹고 살 양식은 십시일반해서 주고, 겸사겸사 어려운 사람들도 도우라는 취지인 것. 그리하여 특히 한국 개신교 계열 교단에서 십일조를 강요하는 문화를 비판하는 쪽에서는 현대의 성직자들은 교단에서 월급을 받고, 불우이웃들은 정부나 시민단체들이 공공사업이나 기부/봉사활동 등으로 돕고 있으니 성경의 십일조를 현재의 신자들에게 강요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후에 나온 십일조에 대한 구절들은 위의 레위기와 민수기에 나온 율법을 기반으로 서술되어진다.

2.1. 유대교의 경우[편집]


유대교의 경우에 기원후 70년에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와 함께 레위 지파로 이루어진 제사장들이 사라진 이후에는, 성전 참배를 토라 학습으로 대체하고 종교적 지도자의 역할은 랍비들이 대신하였으며 성전의 역할은 회당이 이어받게 되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레위 지파 제사장들에게 바치는 십일조 제도는 없어지지는 않았고 부득이한 제도상의 변화가 발생하게 되었다. 성전과 제사장이 존재하지 않게 되었으므로 제사장에게 바치던 십일조 제도는 사라질 수밖에 없었고, 그 대신 랍비에게 바치는 십일조로로 제도적 변화가 발생하였다.

초대교회 당시에 성전과 제사장이 존재하고 있을 AD 70년 이전까지는 랍비들에게 십일조를 바치지 않았다. '레위 지파의 제사장'이 거두도록 되어 있는 십일조를 만약 제사장도 아닌 다른 랍비들이 거두게 된다면, 이는 율법을 어기는 행위, 곧 하느님의 말씀을 어기는 행위라고 여겨 엄격히 금지 되었었다.

하지만, 로마군에 의해 AD 70년에 성전이 파괴되고 십일조를 받을 제사장이 사라지면서, 현실적으로 십일조를 받을 주체가 사라져 버렸다. 이로인해 회당의 랍비들에게 십일조를 바치게 되었다. 현대의 이스라엘인들에게 있어 랍비 이외에 십일조를 받을 더 적절한 직분자가 없는 관계로 현실적으로 랍비에게 십일조를 바침으로써 율법에 정한 십일조 의무를 최대한 이행해야 하는 것으로 여기고 있어 현대 유대교인들은 이를 이행하고 있다.

유대교 혹은 이스라엘에서 십일조가 사라졌다는 사실과 전혀 다른 허무맹랑한 말이 인터넷에서 떠도는데 이스라엘 현지 사정을 모르는 데서 기인한 오류이다.


2.2. 가톨릭의 경우[편집]


중세 유럽의 교회에서 교구민으로부터 수입의 1/10을 징수하기도 했는데 '10분의 1세', '10분의 1 교구세'라고도 했다. 고대의 유대교도에게 수입의 1/10을 하느님께 바칠 것을 명한 구약성서의 율법에서 연유한 것인데, 구약시대의 제사 의식에 참례하는 유대인들은 형편에 따라 포도주를 들고 와서 나누어 먹기도 하였고, 바쳐진 것의 9/10은 레위인들의 소득을 위해서, 1/10은 제사장들을 위해서 사용되었다.

특히 10세기에 성행한 사유교회제를 이용하여 세속 영주들은 자신들의 영민들이 바치는 십일조를 점차 사유화하여 갔다. 교회는 라테란 공의회(1078) 및 1179년 교황 그레고리오 1세의 교회 제도 개혁을 통하여 영주로부터 십일조를 환수하려 하였으나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그 대부분은 세속 영주의 수중으로 들어갔다. 소교구의 사제는 그의 생활과 교회의 관리·유지를 명분으로 곡물·포도주·가축·사료(이상 대십일조), 아마(亞麻)·가금(家禽)·채소(이상 소십일조), 개간지(開墾地:신십일조) 등에 십일조를 부과하였다.

그런데 이 중세 가톨릭식 십일조는 교회법이 아닌 세속법에 의해 행해진 것이었다. 한국에서는 '유럽에는 십일조가 없다'라는 말이 돌기도 하는데, 이는 오해이다. 교리상으론 중세에든 현대에든 십일조는 결코 폐지되지 않았다. 다만 프랑스 혁명 이후 유럽권에서 차츰차츰 교권과 속권이 더 엄격하게 구분되며 '세속법에 의한 십일조 보장'이 폐지되었을 뿐이다. 어차피 한국에서는 천주교든 개신교이든 국교가 된 역사가 없고, 따라서 한국의 그리스도교에서 십일조는 역사상 언제나 '세속법이 아닌' 종교적 자발성의 영역이었다. 내기 싫으면 교황이 찾아와도 강제로 받아낼 방법이 없다. 오히려 자발적 성격은 소위 진보적이라는 서유럽 가톨릭보다 한국이 훨씬 강하다.[8] 물론 종교적으로 의무라고 하더라도, 가난한 신자의 경우 주임 신부와 상담하여 사정을 설명하면 얼마든지 면제받을 수는 있다. 현대 유럽과 중세 유럽의 차이점은, 십일조를 세속법이 움직여서 뜯느냐 마느냐의 차이인 것이다.

가톨릭에는 십일조와 비슷한 것으로 '교무금'이란 것이 존재한다. 이는 교회법상 가톨릭 신자의 6가지 의무 중 하나(교회 유지비 부담의 의무)이며, 매년 일정 금액을 약속하여 납부한다.[9][10] 신자 재량에 따라 20분의 1, 30분의 1 정도만 내도 문제가 없으며 실제로는 교무금으로 얼마를 내든지 터치하지 않는 편이다.

교무금으로는 일반적으로 10분의 1에서 30분의 1 사이로 권장하지만, 그 이하로 책정하는 신자도 많다. 일부 본당 사제들은 교무금도 신자의 중대한 의무이므로 이를 소홀히 하지 말라는 설교를 하는 경우가 있기도 하다.

교무금을 내는 방법은 직접 사무실에서 현금으로 내기도 하지만, 최근에는 자동이체나 CMS출금 같은 방법도 많이 쓴다. 일단 각 본당에서 걷은 교무금은 전부 교구청으로 보내서 다시 각 본당에 필요한 만큼 나누어주고 교구청에서도 쓴다.

혼자 사는 어르신이라든가 생활보호 대상자, 학생(취준생, 공시생 포함) 등 교무금을 내기에 경제적 사정이 넉넉지 않은 경우, 본당신부와 면담을 하면 면제받을 수 있다. 또한 개인당으로 정산하는 게 아닌 가정당으로 계산하는 것이기 때문에 성인 신자라 하더라도 독립하지 않아 다른 가족이 내고 있다면 별도의 고지등을 하지 않으며 교리교사등의 성당 활동에도 지장은 사실상 없다.[11]

그래도 교무금은 가톨릭 신자의 의무사항이기 때문에 이걸 밀리게 되면 밀린 것의 일부든 전부든 일단 신자의 의무, 신자의 도리이기에 정산해야 하며, 서울대교구 같은 경우 교무금 정산을 하지 않으면 교적[12] 이동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

교무금 말고는 미사 성찬 전례 때 기본적으로 내는 봉헌금이 있고, 그 외에 2차 헌금이라고 부르는 특정한 목적[13]을 위한 별도의 봉헌금, 신자 개인의 특별 지향을 두고 자발적으로 내는 미사 예물[14] 정도만 있고 다른 것은 없다.

번외적으로 건축 등을 할 때 돈을 받기도 하지만, 이는 헌금이 아니라 건축 기금[15]이란 이름으로 받는다. 주로 우리 본당[16]을 건립하기 위한 자금으로 사용되며 돈을 낼 시 주보에 이름이 실리는 명단에 작게 실리게 된다. 본인이 원할 시 단체명이나 익명이 기입될 수 있다. "암만 건축기금이라 해도 이름이 실리면 결과적으로 돈 낸 사람을 우대해 주는 것이 아니냐"라는 식으로 천주교를 비판할 수 있겠으나, 헌금과 기금이란 의미의 근본부터 다르다. 이름을 등재하는 건 순전히 성당 자체적으로 감사를 표하는 것이기 때문에, 백만 원을 내든 달랑 몇천 원 정도만 내든 똑같이 이름이 실린다.[17] 그러므로 딱히 우대해주는 거라고 보긴 어렵다. 그리고 무엇인가를 홍보하고 싶으면, 차라리 주보, 각 성당 자체 제작 달력에 광고를 싣는 게 더 낫다.[18][19]

교무금, 헌금 등은 모두 종교 기부금으로 처리되므로 연말정산 때 기부금 공제를 받을 수 있다.[* 현금으로 헌금상자에 넣는 주일 헌금은 얼마를 냈는지 알 수가 없기에 공제 대상이 아니다. 그래서 연말 정산을 받기 위해 교무금으로 헌금 대부분을 내고, 미사 때 헌금함에는 천 원짜리나 오천 원 짜리를 넣는 신도들이 많다. 낼 사람은 내고 종교기관에 연말 정산 영수증 발급해달라고 말하자. 최근에는 교구청과 시중은행이 업무협약을 맺어[20] '교무금 통장'이라 하여 교무금을 언제, 얼마나 냈는지를 인쇄해주는 종이 통장으로 발급하기도 한다. 일부 성당은 사무실에서 '봉헌권'이란 이름으로 상품권 비슷한 것을 판매하는데 이것을 구매하면 그 내역도 교무금 통장에 인쇄해준다. 봉헌권을 구입한 신자는 그 봉헌권을 미사 때 헌금함에 넣기만 하면 된다.

일단 확실한 사실은, 일선 사제들이 대부분 증언하듯 천주교에서는 [21] 돈에 집착해서 믿음을 망치지 말라고 하는 것이 공통된 입장이다. 애초에 천주교가 중세 시절 면벌부 판매 등 각종 부패를 겪었고 이에 대한 교회 안팎의 큰 비판을 마주해야 했기 때문에 근대 이후로 헌금의 수급에 대해서는 상당히 조심스러워진 면이 없지 않아 있다. 성당 내 봉사자나 각 봉사, 신도 단체의 장은, 헌금을 얼마나 내느냐와 직책 임명 여부는 아무 관계가 없다. 실은 단체장이나 평신도회장(평협회장)은 규정/형식상으로는 신부가 임명하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주임 신부 의지로 독단적으로 임명하는 것이 아니라 각 단체, 신도회에서 덕망과 능력 있는 이를 선출하고 성당의 주임 신부에게 임명을 요청하는 식이다.[22] 게다가 천주교는 주민등록지를 기준으로 하는 철저한 교구제라서 어떤 성당에서 단체장, 직책을 맡았더라도 관할 성당이 다른 데로 이사를 가면 직책은 당연 면직이고, 다른 성당으로 전입하면 그냥 직책 없는 신도다. 신부에게 잘 보일 필요가 없다.

그러나, 상기했다시피 \교무금을 내는 것은 가톨릭 신자의 6대 의무 중 하나일 정도로 상당히 중대한 계명이기에, 만일 교무금을 악의적일 정도로 적은 액수로 내면 교리상 로 간주된다. 경제적인 개인사정이 있다면 30분의 1 미만을 내거나 본당 주임신부의 관면을 받아 면제받을 수도 있기에 경제사정에 따라 내면 되고 액수에 대해 크게 부담 가질 필요는 없으나, 기본적으로 본인이 소득이 있으면서 십일조에 반감을 표한다는 이유로 교무금을 일부러 내지 않거나, 돈을 조금이라도 아끼려고 교무금을 소홀히 내는 것은 고해성사를 봐야 할 대죄로 간주된다. 각종 고해성사 양심성찰 목록에 빠지지 않고 교무금/헌금 소홀에 대한 항목이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23]
여담이지만, 성경에서는 베드로에게 '재산을 전부 바쳤다' 고 말했지만 사실 절반만 바친 부부의 일화가 나온다. 분노한 베드로는
'파워 워드 킬'(...)을 날려 그 부부를 지옥으로 보내버렸다. 돈때문이 아니라 신을 속이려 해서라지만, 아무튼 돈문제는 조심해야 한다는 일화.

신자들의 자금 지원 없이 유지될 수 있는 제도적 종교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종교란 비종교인들이 흔히 오해하듯 어떤 세속적 요소도 없이 구름 위나 걷는 집단이 아니다. 천주교도 종교의 자유 원칙에 따라 이 세상에 존재하고 활동하는 조직이므로, 운영에 따른 일정한 자금 지원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 가톨릭 교회를 교무금이나 헌금을 통해 지원하는 의무는 교회법에도 중요하다고 명시된 신자의 의무 중 하나이다. 돈이 없거나 을 낸다는 그 자체에 거부감이 있는 신도는 봉사활동으로 대신 때우는 쪽을 택하기도 하며, 이 또한 크게 인정되는 분위기다. 어차피 돈 많이 낸다고 누가 우대해 주지도 않으며 신부도 전혀 표시를 내지 않으니, 신도들 사이에서 누가 얼마나 돈을 냈는지는 관심 밖의 일이다.(교무금을 각 가정에서 얼마나 내는지도 비밀이다. 10억을 내도 주보에 안 나온다.) 성당 주보에는 이번주 헌금과 교무금, 2차 헌금이 있으면 2차 헌금의 총 금액만 알려준다.

2.3. 정교회의 경우[편집]


정교회는 567년의 제3차 투르 공의회와 585년의 제2차 마콩 공의회를 포함한 초기 공의회에서부터 십일조를 해야 함을 일찍이 가르쳤다. [24]

정교회는 특별히 각 교인이 얼마를 교회에 바쳐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정해 놓지 않지만 교회가 운영되어야 하고, 자선 사업과 선교 사업이 행해져야 하며, 또 성직자들과 사무직원들에게 최소한의 생활비를 지급해야 하므로 교인들이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최대한 많이, 자진해서, 교회에 헌금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2.4. 이슬람의 경우[편집]


이슬람의 경우, 무슬림들이 지켜야 할 5가지 의무 중 '자카트(زَكَاة ; 희사 혹은 자선이라는 뜻)'라 하여 무슬림들은 ‎수입의 일부분을 바쳐야 한다. 샤리아 법에 따르면 1/40이 이상적이지만 재정적으로 여유가 있다면 더 내도 되고, 빈곤층일 경우에는 내지 않아도 상관은 없다. 체계적인 세금제도가 발달되지 않았던 전근대에는 복지세 및 종교세의 역할을 했지만 현대에는 현대적인 소득세나 법인세, 재산세 및 (부유한 산유국의 경우에는)석유와 가스수출기금(...) 등이 그 역할을 대체했기 때문에 부유층과 중산층이 자발적으로 내는 기부금이 되었다.

보통 이 돈은 와크프(وقف, 재단이란 뜻‎‎)로 들어가 새로운 성원을 짓거나 가난한 자들을 위해 쓰인다. 하지만 굳이 와크프에 내야 하는 건 아니고, 그냥 동네의 가난한 이웃들이나 여행객 등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베풀 수도 있다.[25] 간간이 이러한 자금들 중 일부가 테러 단체[26]로 흘러드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이외로는 사다카(صدقة‎‎)라는 헌금도 있는데, 이는 모스크에서 아무 때나 낼 수 있는 일종의 기부금이다. 자카트와는 자유로 낸다는 점에서 다르다.


2.5.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몰몬교)의 경우[편집]


자칭 회복주의 교파인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에서도 십일조가 매우 강조된다. 애초에 교회가 헌금으로 운영되기도 하고, 또한 조셉 스미스를 비롯한 역대 선지자들이 십일조의 중요성을 매우 강조했기 때문이다. 실제 십일조를 규칙적으로 내지 않은 회원들은 성전 추천서를 받을 수 없다. 성전은 몰몬들에게 매우 중요한 장소이며 특히 영원한 부부 및 가족의 연을 맺는 곳이기에, 십일조를 내지 못해 성전에 들어가지 못하는 몰몬은 영원한 부부의 맹세 및 가족 구성을 할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몰몬들은 매년 말 각 와드 및 스테이크의 감독과 십일조 정산을 위한 면담을 하게 되며, 감독은 이 때 지난 1년여동안 십일조 횟수 및 기록을 보여주면서 온전한 10%를 내고 있는 지에 대해 확인작업을 한다. 여기서 냈는지 안 냈는지에 대한 대답은 회원 본인의 양심에 맡긴다.


3. 종교개혁가들의 경우[편집]


종교개혁 시기에 모든 종교개혁가들은 십일조를 그리스도인이 지켜야할 중요하고 당연한 의무로 여겼으며 많은 말들을 남겼다.


3.1. 마르틴 루터가 보는 십일조에 대한 견해[편집]


토마스 뮌처가 이끄는 농민 세력이 제후들에게 작은 가축에 대한 소십일조(小十一租)를 면제해달라는 요구를 하면서 소요를 일으켰다. 이에 대해서 마르틴 루터는 구약 말라기서 3장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농민 세력을 '도둑놈들'이라는 거친 표현을 사용하면서 크게 비난하고 오히려 강력히 처벌할 것을 주장하면서 철저한 십일조 납부를 강조하였다. 마르틴 루터는 철저한 십일조 생활을 해야한다는 것은 그의 일관적인 입장이었다. 그렇다고 루터는 힘없는 농민들만을 비판한 것이 아니다. 지나치게 과도한 십일조를 거두고 있는 제후들에게도 마찬가지의 비판을 하였다. 이로 인해 마르틴 루터는 농민 세력과 제후들의 양편으로부터의 보다 큰 지지를 얻을 기회를 놓치게 되어 정치적으로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성서에 입각한 올바른 십일조에 대한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3.2. 장 칼뱅이 보는 십일조에 대한 견해[편집]


장 칼뱅은 "그리스도인들은 온전한 십일조를 바쳐야 한다"고 하며 십일조에 대한 분명한 입장을 밝혔다.
또한 장 칼뱅은 "마태오복음 23장 23절에서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십일조는 하느님께서 명하신 십일조로 다른 모든 성경말씀과 마찬가지로 동등하게 이행되어야 하며 생략되어서는 안 된다."라고 하였다.


3.3. 존 위클리프가 보는 십일조에 대한 견해[편집]


존 위클리프는 종교개혁에 참여하는 초기에는 "자율적으로 납부하는 십일조"를 주장하다가 후반부에 입장을 바꾸어 "예수님께서 십일조를 바치라는 명령을 확증하셨다"고 단언하고 의무적인 십일조를 주장하였다. 울리히 츠빙글리는 법적으로나 의무적으로 철저한 십일조를 주장하였다.


3.4. 존 웨슬리가 보는 십일조에 대한 견해[편집]


존 웨슬리는 십일조를 자주 강조하여 그가 언급한 말은 매우 많다. 존 웨슬리는 십일조의 중요성을 항상 일관적으로 언급하였다.

예를 들어, "모든 헌금 중에서 무엇보다 먼저 십일조를 준비하고 바쳐야 한다", "하나님께 마땅히 드려야 할 십일조를 작정하여 드려야 한다", "믿는자는 연보를 십일조만 하는 것으로 끝내면 안 된다.", "십분의 일만이 아니라 모든 것이 하느님께 속하며 하느님이 인도하시는대로 사용해야 한다.", "십일조를 바치지 않는 자는 황금에 마음을 둔 자이다" 그리고 "회개와 동시에 십일조를 계산해서 드려야 한다"라고 하는 등의 철저한 십일조 생활을 거듭 강조했다.

그리고, 마르틴 루터장 칼뱅은 십일조를 걷는 문제 뿐만 아니라 십일조와 함께하는 올바른 믿음과 정성 및 거둔 십일조 헌금의 올바른 사용에도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이와 같이 종교개혁기의 모든 주요 지도자들은 철저한 십일조 생활을 해야 함을 매우 엄격히 가르쳤다.


4. 대한민국 개신교의 경우[편집]


일반적인 십일조는 성경[27]에 기록되어 있듯이 레위자손이 성막에서 성무(聖務, 거룩한 일)를 하고 받은 보수와 같이 교회에서 성무에 종사 하는 이들의 생활비와 교회 운영비로 사용된다.

교회의 목사라고 십일조를 다 가져가는게 아니다. 성도들이 헌금한 모든 헌금은 교회에서 다 수납하여 교회 당회 및 공동의회의 결의에 따라 지출되며 사업을 집행하거나 각 부서에 배분 되며 목사 및 부교역자, 교회 직원, 청원 경찰, 청소인력, 식당인력, 방송인력 종사자[28] 들도 교회의 공동의회에 의해 정해주는 사례만큼만 보수를 받는다. 물론 교회가 커서 많이 주면 많이 받을 수 있다. 대신 큰 교회일수록 업무량이 많은 건 당연지사.[29][30]

4.1. 개신교에서 말하는 십일조[편집]


1. 민수기 18장에 하느님이 최초의 대제사장아론에게 십일조에 관하여 계시하는 부분을 시원으로 본다.

내가 이제 레위 후손에게 줄 것은 이스라엘 가운데서 거둔 십일조 전부이다. 이것은 만남의 장막에서 예배를 보좌한 보수로 주는 것이다.(공동번역)

내가 이스라엘의 십일조를 레위 자손에게 기업으로 다 주어서 그들이 하는 일 곧 회막에서 하는 일을 갚나니(개역개정)

구약 성경 민수기 18장 21절

간단히 요약하자면, 레위 지파는 제사장 직분을 담당하는 지파이기에 가나안 정복 과정에서 토지를 분배받지 못하였으므로[31][32]레위 지파에게 이스라엘의 나머지 11지파에서 10%씩 소득을 거두어 그들의 성무에 대한 보수를 준다는 내용으로, 달리 소득이 없는 성직자들의 생계비와 성막(성전) 유지보수비에 대한 것을 십일조로 준다는 이야기이다.

현대에서도 달라질 것이 없는 것이, 성직자라고 만나와 메추라기로 생활하는 게 아니며 신자들에게 제공하는 교회의 여러 업무 역시 공짜가 아니다. 신자들이 모여 하느님을 섬길 수 있는 장소를 마련하는 것은 구휼보다 앞서는 교회의 목적이므로 허술하게 할 수도 없다. 저 위에서 나온 것과 같이 하느님과의 계약을 국가와의 계약으로 본다면 세금으로 공무원들 월급을 주는 것과 헌금으로 교역자들의 월급을 주는 것은 같은 맥락이라 하겠다.


2. 신명기 12장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행하여야할 규례와 법도를 명령하는데 그 중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너희는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당신의 이름을 붙이시고 당신께서 계시는 곳으로 삼으시려고 너희 모든 지파 가운데서 고르신 그 곳을 찾아 그리로 가야 한다.

너희의 번제물과 친교제물과 십일조와 흔들어 바치는 예물과 서원제물과 자원제물과 소와 양의 맏배를 그리로 가져다 바쳐야 한다.

그 곳이 너희 하느님 야훼를 모시고 먹으며 즐길 자리, 너희와 너희 식구들이 손으로 일해 얻은 모든 것,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복으로 주신 모든 것을 먹으며 즐길 자리다.(5~7절)

(중략)

그렇게 되거든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당신의 이름을 두시려고 골라주신 곳으로 내가 명령한 모든 것, 번제물과 친교제물과 십일조와 흔들어 바치는 예물과 고르고 골라 야훼께 바치는 서원제물을 가져다 바쳐라.

너희는 너희 하느님 야훼를 모시고 그 앞에서 즐겨라. 너희뿐 아니라 너희 아들딸, 또 너희 남종과 여종, 또 너희처럼 유산으로 받은 몫이 따로 없이 너희 성문 안에서 사는 레위인들도 함께 즐기게 하여라.(11~12절)

(중략)

그러나 십일조로 바친 밀과 술과 기름, 소와 양의 맏배, 서원하고 드리는 갖가지 서원제물과 자원제물과 흔들어 바치는 예물은 너희가 사는 성 안에서 먹을 수 없다.

이런 것은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고르신 곳에서 야훼를 모시고 그 앞에서만 먹되 너희의 아들딸, 남종과 여종, 그리고 너희 성 안에 사는 레위인과 함께 먹어라. 너희 손으로 드린 이 모든 것은 너희 하느님 야훼를 모시고 그 앞에서만 즐길 수 있다.

너희는 삼가 그 땅에서 사는 동안 레위인들을 저버리지 않도록 하여라.(17~19장)

구약 성경 신명기 12장 中 (공동번역성서)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2가지 부분으로 볼 수 있다.
첫째는 십일조를 드리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이 한해동안 수고한 일에 여호와 하느님이 복 주심을 즐거워하는 의식 중 하나라는 점이다.
즉, 이스라엘 백성의 노동에 하느님이 복을 주셨음을 기억하고 그 복을 즐거워하여 헌금을 하는 것이 십일조를 드리는 11지파(현대의 평신도) 마음가짐이다.
두번째로 첫번째 입장과 같이 기업이 없는 레위인에 대한 보수의 개념으로 십일조를 드리라는 것이다. 특히 맨 마지막절에 보면 '살아가는 동안 레위인을 저버리지 말지니라'라고 명령까지 한 것을 보면 십일조가 여호와 하느님을 섬기는 레위지파의 보수라는 개념으로도 아주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 서양에서는 십일조가 폐지되었다고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국교로서의 지위를 박탈하는 과정에서 국가 규모의 강제사항 또는 조세로서의 십일조가 폐지되었다는 의미이며, 개인이 내고 싶은 만큼 내는 (십일조를 포함한) 헌금은 있다.

십일조를 내는 신자는 전체의 30% 가량으로 알려져 있는데, 십일조를 내는 신도들은 자신의 모든 소득이 하느님에게서 받은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리고, 예수님께서 십일조를 하느님께 믿음과 정성을 다해 바치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십일조에 별다른 반감을 보이지 않는다. 십일조 안 낸다고 교회에서 파문을 하는 것도 아니고, 내기 싫으면 안 내도 되고, 십일조 가지고 시끄러운 교회 있으면 교회를 옮겨버려도 그만이지만, 십일조는 바치는 신도들은 하느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야 한다는 시각 때문에 이와같은 태도와 시각에 반대를 한다. 또한 교회 입장에서 십일조가 줄어들면 수입이 확 줄어들기 때문에 십일조를 강조한다는 시각도 십일조는 바치는 신도들은 십일조를 오해함으로써 발생한 잘못된 시각으로 본다. 하지만, 십일조를 내지 않는 70%의 신도들은 기본적으로 십일조는 신자 개인의 자유일뿐이며, 교회라는 공동체 내부의 문제이므로 교회 외부의 사람이 관여할 일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4. 예수도 십일조를 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아, 너희 같은 위선자들은 화를 입을 것이다.

너희는 박하와 회향과 근채에 대해서는 십분의 일을 바치라는 율법을 지키면서 정의와 자비와 신의 같은 아주 중요한 율법은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십분의 일세를 바치는 일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되겠지만 정의와 자비와 신의도 실천해야 하지 않겠느냐?(공동번역)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십일조)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개역개정)

마태오의 복음서(마태복음) 23장 23절

예수가 율법으로서 십일조는 바치면서 진정으로 지켜야 할 정의, 자비(사랑), 믿음은 행하지 않는다고 비난하는 장면이다.
이 장면에서 예수이것(십일조)도 행하고, 저것(정의, 자비, 신의)도 실천하라고 했다. 모두 알다시피 마태복음은 신약서다.[33]

물론 엄밀히 따지만 예수의 공생애 기간은 구약의 시기에 해당한다. 그렇기에 예수도 생애에 걸쳐 구약의 모든 절기와 규례를 지킨 것이고, 보통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의 강림을 기점으로 본격적으로 신약의 시대가 열린 것으로 본다. 이 발언도 그런 맥락에서 온 것이다. 여기서 그의 쟁점은 명령받은 대로 십일조의 현물을 바치기는 하지만 예수가 공생애 기간에 했던 모든 발언의 효력은 영원히 지속되는 반면에 왜 이 십일조 발언만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지는 의문이다. 아무튼 마태오 복음서 23장 23절에서의 예수의 발언은 율법에 엄연히 존재하는 본질(정의, 자비(사랑), 믿음)이 빠진 십일조를 바치는 것은 심각한 문제가 도사리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가장 큰 계명인 신명기 6:4를 어긴다면 아무리 십일조를 많이 하더라도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이 말씀을 신약시대 십일조의 직접적 근거로 삼을 수는 있으며 율법의 본질인 정의, 자비(사랑), 믿음이 들어간 십일조라야 현금과 현물은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따라서 마태오 복음서 23장 23절에서 이것(십일조)도 행하고라고 언급되어 있으므로 이 말대로라면 구약의 형식적 규례들을 무조건 지킬 필요가 없어졌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즉, 십일조의 현물·현금의 형식적 규례도 존중되어야 할 것들 중 하나에 속한다. 예수가 율법을 폐하러 온 게 아니라 보다 완전히 하게 하려 옴이라 밝혔듯이, 이는 ‘이젠 복잡한 율법의 규칙들을 지킬 필요가 없다’고 여기는 세간의 관념과 달리 이는 사실상 그리스도인들의 도덕적 기준의 허들을 훨씬 높인 것에 해당한다. 너희들의 의가 바리새인들보다 낫지 않으면 결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함은 단순히 예수의 공로에 힘입어 들어간다는 차원을 넘어서, 구원받은 이는 실제로 모든 유대인의 규례를 편집증적일 정도로 철저히 지킨 바리새인보다도 더욱 나은 행실을 보일 것이라는 뜻이다. 크리스찬은 예수의 피로 값을 주고 산 노예가 된 것이기 때문에 자기 마음대로 인생을 살 권리가 없으며, 사나 죽으나 오직 주의 것이 된다. 따라서 그들이 소유한 모든 재산, 벌어들인 모든 수입도 주의 것이 되며, 시간도 인생도 돈도 방종하게 사용할 권리를 잃게 된다. 자원하는 마음을 통해 십일조는 우스울 수준으로 자기 전재산을 팔아 헌금하는 이들이 나오는데 이들이 바로 그런 예가 된다. 그러므로 본인의 신앙심에 따라 십의 이조, 삼조도 할 수 있겠지만, 그 정도로 마음이 굳지는 못하지만 초신자가 자기중심적인 삶을 탈피하고 진정 교회에 삶을 헌신하고 싶다[34]면 십일조는 그런 ‘나의 모든 것은 주의 것이다’ 를 표현하는 마음가짐을 표현하는 훈련의 시작점으로 좋기 때문에 전통처럼 남겨둔 교회가 많은 것이다. 즉 신약시대에 있어서 구약의 율법은 시작점에 해당한다. 이런 부분을 교육하지 않고 단지 개인의 사욕을 위해 헌금을 강조하며 여기다가 30배, 60배, 100배로 흔들어 돌려주실거다, 안 내면 벌 받을 거다 운운하는 교회는 걸러야 겠지만, 그와 별개로 십일조는 강제로 거두는 규칙은 아니지만 그 개인의 마음의 중심이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주는 지표가 될 수 있으며, 예수도 돈과 하느님을 겸하여 섬기지 못한다 가르친 바가 있을 정도로 돈이냐 하느님이냐의 선택은 중요하다고 강조한 바 있다. 마음의 중심이 있는 곳에 재물이 있다 하듯이 본인이 사랑하는 곳에 돈이 쏠리게 돼 있다.

결국 중요한 것은 본인의 하느님께 대한 감사하는 마음과 사랑이 핵심이다. 바울이 말하길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자는 모든 율법을 지켰다 하기 때문이다. 반면 모든 걸 다 바치고 자기 몸을 희생해 주더라도 사랑이 없다면 수혜자는 둘째치고 자신에겐 유익이 없을 것이라 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사랑 없이도 돈도 바치고 의무감에 도리를 다할 수는 있지만 반대로 사랑이 있는데 그게 표현되지 않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신약의 은혜 아래 거하는 그리스도인은 사랑을 하느님으로부터 받아 남에게 베풀 수가 있다. 그러므로 본질적으로 살펴봐야 할 것은 ‘십일조를 해야 되냐 말아야 되냐’ 가 아니라 ‘내가 사랑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35] 즉 이것을 고민한다는 건 이미 시작점부터가 틀린 것이다. 수 년 뒤면 세상살이와 호르몬의 영향으로 시들해진다는 남녀간의 사랑도 불타오를 땐 서로를 위하고 좋은 것을 사 주려 하며 모든 것을 내 주려고도 하는데, 하물며 위에서부터 내려받은 사랑은 어떠하겠는가? 교회에 오래 거하면서도 사랑 안에 자라가지 않고 돈에 계속 매여 있으면 신앙생활 어딘가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내가 진정으로 내가 소유한 모든 것은 실은 하느님의 것을 맡은 것일 뿐 내 것이 아니며, 주는 게 받는 것보다 복되며 이 세상은 잠시 있다 지나갈 곳이고 내세는 영원할 것이며 내가 얼마나 이웃을 사랑하고 자원하는 마음으로 베풀었는지에 따라 상급을 받을 것을 믿는다면, 십일조를 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자체가 심각한 고민거리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십일조가 이토록 큰 문제가 된 것은 한국 목사들이 감사와 사랑은 등한시 한채 금액만을 강조하여 이미지가 좋지 않은 것이 한 몫 했다. 기복적인 메시지를 내세우며 더 크게 돌려받을 것이라는 투자적 가치관의 설교, 안 하면 벌로 불행이 닥칠 거라는 공포 마케팅을 하고, 헌금으로 배를 불리며 돈 낸 양으로 사람을 다르게 대우하며 정작 신도들을 이끄는 덴 관심이 없는 이들 때문에 십일조 내라는 말 자체에 학을 떼는 풍조가 생긴 것이다. 그런 마당에 교회밖의 세간에서 일단 성경적으로 십일조를 낼 필요가 없는 것은 맞다고 하니 딱 여기까지의 반쪽까지의 사실만 듣고 ‘그럼 그렇지’ 하고 납득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하지만 신약에서도 구약의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는 성경말씀을 인용하고, 목회자와 과부를 돕는 장로들의 생계를 지원하라는 성경구절은 등장한다.[36] 그러므로 성경을 바르게 가르치고 가치관이 제대로 선 교회인지를 분별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힘들게 번 돈을 성경을 바르게 가리치지 않는 목사에게 바치는 건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크게 흠이 없는 곳을 찾았다면 그곳에 소속해서 형편과 마음이 허락하는 선에서 헌금을 내면 된다. 돈을 사랑하는 걸 경계하라는 가르침은 거듭 등장하고, 교회의 핵심이 결국 “하느님과 ~ 중 뭘 더 사랑하냐”의 연속인데 사람 사는데 돈이 워낙 중요하기 때문에 우상이 되기 아주 쉽다. 그런데 목사들 이미지 안 좋은 걸 다들 알기도 하고, “결국 돈 내라는 거잖아?” 하는 반응이 올 것도 알기 때문에 이 부분 설교를 할 때 마음을 편치 않아하는 사람들도 있다.정작 먹사들은 기똥찬 말빨과 양심의 가책 없이 헌금을 거침없이 요구하지만 이를 지양해야한다 무조건적인 지양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 목사는 십일조 등의 헌금에 대하여 설교할 때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에 철저히 근거하여 정확히 설교를 해야한다는 것이다.


4.1.1. 성공회의 경우[편집]


성공회에서는 교무금을 '월정헌금' 혹은 '십일조'라고 한다. 그러나 반드시 매달 소득의 10%를 교무금으로 납부할 의무는 없다. 자신의 경제적 형편과 양심에 따라 납부액을 정할 수 있다. 교무금 외에도 감사 헌금[37], 교회 개척 헌금, 건축 헌금, 장학 헌금 등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 중 어떤 것도 반드시 납부할 의무는 없다. 최근 들어 비대면 계좌이체도 받기 시작했지만, 천주교의 교무금[38]과 다르게 미사/성찬례와 별개의 헌금으로 땡치면 그만이기보다는 감사성찬례 중 봉헌함에 월정헌금/십일조를 바치는 게 진정한 봉헌이라고 보는 시각이 강한 편이다. 또한 월정헌금을 한번으로 퉁치는 것보다는 주 단위로 쪼개서 봉헌하는 것이 더 권장되는 편이다. 이는 감사성찬례에 대한 공동체적인 참여를 중시하는 성공회의 특성의 한 단면이라 할 수 있다.

성공회에서는 봉헌을 장려하기는 하지만 강권하지는 않는다. 신자 개인의 사정과 입장에 따라 헌금을 납부하지 않아도 상관없는 것이다.

또한 성직자들도 헌금을 납부한다. 주보를 보면 감사헌금, 특별헌금 명단에 주교나 신부도 있을때가 많다.


5. 대중매체에서의 등장[편집]


  • 늑대와 양피지 - 정교가 부과한 십일조에 대해, 윈필 왕국이 반발을 일으켰고 이에 교황이 윈필 왕국의 성직자들에게 성무 정지를 지시내리며 갈등이 커진 상황이 작중 배경이다. 15세기 경 유럽의 상황을 모티브로 삼았다.


  • Warhammer(구판) - 브레토니아에서는 이게 역전되어서 농노는 수확물의 10분의 1만 가지고 10분의 9를 귀족에게 바쳐야 한다는 막장 세율로 등장한다. 이른바 십구조로 햄탈워에선 아예 스킬트리에 십구조란 명칭을 쓰기도 한다. 브레토니아의 별명이 헬레통이 된 이유 중 하나.

  • Warhammer 40,000 - 인류제국은 각 행성마다 세금으로 인력이나 물자를 바칠 것을 요구하는데, 이를 제국 십일조(Imperial Tithe)라 한다. 종류는 세금 개념인 물질적인 십일조와 제국 방어를 위해 각 행성 병력(PDF)의 일정 비율(대체로 10분의 1)을 의무적으로 아스트라 밀리타룸으로 징집하는것이 대표적이나, 행성의 환경이나 상황에 따라 납부해야 할 것의 종류나 비율은 달라질 수 있다. 행성 총독이 십일조를 제때 납부하지 못하면 국세청인 데파르트멘토 익스악타가 행성을 침공해서 행성 총독을 갈고 추징해간다.

  • TCG 매직 더 개더링에서도 Tithe란 이름의 카드로 등장했으며, 그 이외에도 여러 카드의 이름에 들어갔다.(Mana Tithe, 십일조의 대천사) 이 카드들의 공통점은 전부 정의와 신성을 상징하는 백색이라는 것인데, 실제로 나온 카드들의 성능이 하나같이 깨알같으면서도 강력한 어드밴티지 효과를 지니고 있다. 워낙 사용하는 맛이 찰진지라 이 카드들을 쓰는 것만으로도 먹사들이 십일조를 빨아먹는 기분을 이해할 수 있을 정도(...).


6.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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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어 고어로 10분의 1(tenth)의 뜻으로 쓰였으나, 현재는 종교적 의미로만 쓰인다.[2] 반면 독일은 가톨릭과 개신교를 불문하고, 소득'세'의 약 8-9%를 국가가 수취하여 해당 교단에 전달하며, 그리스는 국교인 정교회 사제의 봉금을 국가가 직접 지급한다.[3] 레위기 27:26, 32[4] 미국처럼 월급보다는 주급 생활자들이 많은 곳에서는 매주 내기도 한다.[5] 농경 사회에서의 "수익"은 달마다 있는 게 아니라 1년에 1번, 추수할 때 얻어진다. 물론 곡식마다 수확시기가 다르기에 여러 곡식을 수확하면 여러번 내기도 한다.[6] 사무엘상 8장 10~18절을 보면 이스라엘의 첫 왕인 사울을 세울 때 사무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왕의 제도를 설명하는 내용 중에 이스라엘 백성들로부터 곡식과 가축의 십일조를 거두어 왕에게 세금으로 주어야 될 것이라는 구절이 나온다.[7] 22~23절은 예수가 가르친 가장 큰 계명(하느님 공경)을, 28~29절은 두번째로 큰 계명(이웃 사랑)의 순서와 같다[8] 가령 독일의 경우 종교세라는 형태로 국가가 교무금을 대신 징수하여 각 교단에 전달한다. 신자가 안 내려면 안낼 수 있지만, 독일 가톨릭에선 무임승차 신자들에게 성사를 제한하는 강경 대응을 한다.[9] 가톨릭 교회법 222조: (1)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교회가 하느님 경배, 사도직과 애덕의 사업 및 교역자들의 합당한 생활비에 필요한 것을 구비하도록 교회의 필요를 지원할 의무가 있다. (2)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사회 정의를 증진시키고 또한 주님의 계명을 명심하여 자기의 수입에서 가난한 이들을 도와줄 의무도 있다.[10] 교무금은 어려운 시절을 거쳐왔던 한국 천주교의 전통이고, 해외의 경우 교무금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 경우 헌금이나 나라에서 걷어주는 교회세로 성당의 유지비를 충당한다.[11] 보통 해당 성당을 오래 다닌 아이가 성인이 된 후 교리교사를 맡는 경우가 많은데, 교무금이 뭔지는 알아도 이때까지 교무금을 어떻게 내는지 자세히 모른다 해서 이상할 게 그다지 없다.[12] 신자 명부를 호적에 비유하여 교적이라고 한다.[13] 군인주간에는 군종교구로 보내는 것, 자선 주간에는 자선 단체에 기부하는 것, 해외선교 주간에는 해외선교 지원금 등.[14] 관습적이고 암묵적으로 정해진 최소한의 액수가 있긴 하지만, 어긴다고 경찰이 출동하거나 쇠고랑을 차지는 않는다. 손님 신부님이 오시면 손님 신부님 용돈 드린다고(...) 일부러 감사 미사 넣어서 미사 예물을 내는 분들도 있다. 물론 내든지 안 내든지 아무 상관없다. 비슷하게, 봉사활동으로 잘 알려진 이태석 세례자 요한 신부는 수단 현지 봉사를 위해 암 말기 상태에서 본당들을 돌면서 모금을 하기도 했다.[15] '건축 헌금'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16] 가끔은 다른 본당 건물[17] 이론상 몇백 원 내도 실릴 수 있지만(...)[18] 일부 본당에서는 해당 본당에 소속된 천주교 교우들이 운영하는 사업체(서점, 개인병원, 미용원 등)의 토막 광고를 싣기도 한다.[19] 꼭 관할 성당일 필요는 없는데, 가까운 거리, 같은 교구의 지역 정도로 가까운 데 업체가 있을 때 광고를 싣는다. 거리상으로 가까운데 행정 구역에 따라 나뉘어지는 각 본당의 해당 구역이 다를 경우도 마친가지. 먼 데라면 광고 효과가 없으니 주보나 달력에 실을 이유도 없지만.[20] 대부분의 교구는 우리은행에서 통장을 발행한다.[21] 천주교성직자수도자들은 배우자와 자녀가 없으니 큰 돈 들어갈 일이 많지 않고, 성당에는 사제관이 딸려 있고 교구청, 성지, 수도원 등 본당 소속이 아닐 경우에도 부속 숙소가 있다. 최소한의 기본적인 생활은 보장되어 있다. 해당 성당에서 헌금이나 건축 기금, 교무금이 얼마가 나오든 간에 자체적으로 쓰는 게 아니라 몽땅 상급 기관에서 보고 받아 관리하고 필요한 만큼 쓰라고 준다. 성직자의 수입은 고정되어 있고, 신도나 경리 담당자와의 유착을 막기 위해 몇 년 단위로 담당하는 성당도 바꾸어 교구 내에서 순회 부임하며, 기본적으로 성당 경리를 아예 따로 두기 때문에 성직자가 성당 수익으로 부정 부패를 저지르기 힘든 구조다.[22] 임기 만료, 공석이 생길 경우 신부가 덕망 있는 신도에게 자리를 맡아 달라고 권유를 할 수는 있겠지만, 누가 어떤 자리를 맡겠다고 할 때 본당 신부가 거부하는 일은 없다고 보아도 좋다. 신부는 어차 임기가 만료되면 떠날 사람이고, 신도들은 이사만 안 가면 온 가족이 평생을 한 성당에 다닐 수도 있으니...[23] 물론 상기했다시피 신자에 대한 외적 강제는 전혀 하지 않지만 말이다.[24] 십일조를 내지 않은 신자를 파문조치를 내릴 교회법의 근거를 마련하였다 https://www.matic.wiki/ko/Second_concile_de_M%C3%A2con [25] 그래서 가끔 중동지방을 여행하다가 대박을 맞는 배낭여행자들도 존재한다(...)[26] 당연히 그쪽 생각으로는 테러가 아니라 거룩한 전쟁을 수행하는 용사들이다.[27] 구약성경 민수기 18장 21절 내가 이스라엘의 십일조를 레위 자손에게 기업으로 다 주어서 그들이 하는 일 곧 회막에서 하는 일을 갚나니[28] 작은 교회라도 방송 종사자는 중요한 직책이다[29] 대기업이 연봉을 많이 주는대신 업무량이 많은 것과 동일.[30] 하지만 교회가 크면 사역자도 많다. 업무가 더 줄어든다. 작은 교회는 1인 무보수 다직책인 경우도 많다. 하다못해 점심이라도 사줬으면...[31] 성경에는 기업이 없으므로 라고 나온다.[32] 레위지파는 다른 11지파와 달리 하느님의 일을 전문적으로 할 구별된 지파가 필요했기에 하느님이 세운 지파이다. 구약성경을 보면 알겠지만 성전의 업무는 하느님이 지정하신 규칙대로 시행되어야 하며 그 규칙을 어기면 사망 또는 형벌이 임하기에 전문성이 필요했었다. 따라서 성전 업무에 전문성을 위해 아예 기업(분깃)을 주지 않았다.[33] 누가복음 11장 42절에도 동일한 구절이 나온다.[34] 헌금이 말씀을 바르게 가르치며 신자들을 양육하는 목회자의 생계를 지원하기 위한 정당한 사례금과 복음을 전파하라 한 예수의 지상명령대로 선교를 위한 기금으로 활용된다면 신약성경에 묘사된 건강한 초대교회의 모양과 흡사한 셈이 된다.[35]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아이돌 노래에서 흔히 불리는 남녀간의 사랑과는 다르다. 성경적 사랑은 어떠한가에 대해서는 고린도전서 13장을 참조.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걸 바탕으로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모든 것이라는 게 가르침이다.[36] 사도 바울은 스스로 천막을 지어 돈을 마련하기도 했지만 이는 복음 전파에 걸림이 없게 하기 위함이었지 본인이 헌금을 받을 자격이 없어서가 아니었고, 교인들이 자원하여 힘을 다해 모아준 헌금에 대한 감사의 편지를 쓰기도 했다.[37] 세례/전입 감사, 가족ㆍ친지의 관혼상제, 시험 합격, 취업 성공 등등[38] 이쪽은 성공회 월정헌금과 다르게 교무금과 주일미사 봉헌 헌금은 별개로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