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룡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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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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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도수군통제사 · 선무공신
가족
아내 방수진

장남 이회, 차남 이예, 삼남 이면

맏형 이희신의 아들 이완 · 딸의 시아버지 홍가신

먼 친척 형 이광 · 19촌 이이

후손 (이봉상 · 그 외 후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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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류성룡 · 류성룡의 제자 허균

육군 동료 (이일 · 신립 · 권율 · 이경록)

수군 동료, 부하 (이억기 · 권준 · 김돌손 · 김완 · 김억추 · 나대용 · 무의공 이순신 · 배흥립 · 안위 · 오계적 · 이영남 · 이운룡 · 정운 · 준사 · 최호 · 송희립 · 우치적 · 어영담 · 황세득 · 송여종 · 김인영 · 신호 · 원균 · 배설 · 이언량 · 류형 · 진무성)

주군 (선조 · 선조비 의인왕후 · 분조 광해군)
생애
생애 · 전투 관련 · 여담
관련 장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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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룡검 · 백원 주화 · 충무공이순신급 구축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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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개요
2. 상세
3. 쌍룡검의 소재에 대한 기록
3.1. 조선시대
3.2. 일제강점기
3.3. 정리
4. 이순신의 검이 아니다?
5. 이순신의 다른 도검들
5.1. 현충사 소재
5.2. 충렬사 소재



1. 개요[편집]


鑄得雙龍劍 千秋氣尙雄 盟山誓海意 忠憤古今同(주득쌍룡검 천추기상웅 맹산서해의 충분고금동)

쌍룡검을 만드니 천추에 기상이 웅장하도다. 산과 바다에 맹세한 뜻이 있으니 충성스런 의분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같도다.

쌍룡검에 새겨진 글귀

雙龍劍

박종경의 돈암집 원융검기에 언급되는 충무공 이순신이 지니고 다녔다고 알려진 길이가 1장(약 3미터)이 넘는 초대형 환도. 이게 사실이라면 당연 대한민국의 국보로 지정됨이 아깝지 않은 보물이나 안타깝게도 100년째 행방이 묘연하다.

물론 아래 문단에도 나오듯 이 도검은 후대에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높아 현존하는 이순신의 장검과는 달리 정말로 이순신이 사용한 도검이었다는 확증은 없다.


2. 상세[편집]


파일:attachment/AKR20100708197800005_01_i.jpg
1910년 조선 미술 대관에 실려있는 쌍룡검이라고 흔히 알려진 사진. 다만 이 사진의 진위 여부에 대해서도 말이 많다. 검을 검집에 넣은 상태라 검에 새겨진 글귀를 확인할 수가 없고 이게 쌍룡검이 맞다는 확실한 설명 또한 전혀 해놓지도 않았으며 원융검기에 묘사된 쌍룡검의 형태와도 전혀 다르다.

이순신은 임진왜란 당시에 수군 최고 지휘관의 신분이었던 만큼 직접 무기를 들고 적과 교전한 사례가 없기에 이순신이 지니고 다닌 무기가 실제 전투에 쓰였는지 의장용인지 구분을 하는건 큰 의미가 없는 일임에도 이상하게 쌍룡검이 실전용 무기라는 수식어가 자주 붙는다. 그래서 쌍룡검을 소개할때마다 '이순신이 실전에서 사용했다'는 수식어가 항상 붙어다니지만 이순신이 실전에서 사용한 무기가 어떤 것이었는지는 사실 기록이 전혀 없다.

이 같은 인식은 현존하는 이순신의 장검이 길이가 2m에 가까워 현대의 검도 및 매체에서의 짧은 도검에만 익숙한 이들이[1] 막연히 이런 긴 검은 실전에서 사용할 수 없다는 지레짐작을 해서 자기들이 실전에서 사용할 수 있는 수준이라고 여기는 짧은 도검에 집착해서 만들어낸 망상일 뿐이다.[2]

더구나 원융검기에 묘사된 바에 따르면 쌍룡검은 길이가 1장이 넘는다고 묘사되어 있다. 즉 영조척으로 환산하면 3m가 넘으며 주척으로 환산해도 현재 남아있는 거환도와 길이가 비슷한 장검이다. 쌍룡검이 짧은 환도라는 인식이 붙은건 쌍룡검이라고 주장하는 흑백 사진으로 인한 것인데 이 사진에 나온 도검이 쌍룡검이라는 근거는 없고 원융검기에 묘사된 쌍룡검 묘사와 차이가 심하게 크다.


3. 쌍룡검의 소재에 대한 기록[편집]



3.1. 조선시대[편집]


사실 이미 18세기에 한 차례 실종됐다가 1811년 훈련대장 박종경에게 발견[3]되어 조선 전체를 한 번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전적이 있다. 다만 이것이 실린 《돈암집》권6 <원융검기>에는 "쌍룡검은 궁내부[4]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었다." 라는 기록만 남아있을 뿐 구체적으로 어디에 있는지 나와있지 않아 있다.

박종경의 기록에 따르면 1811년 가을에 병조판서 심상규로부터 이순신이 차고 다녔다는 칼 한 자루를 받았는데, 그 칼에는 '쌍룡검을 만드니 오랜 세월이 지날지라도 그 기운은 오히려 웅혼할 것이구나. 산에 맹세하고 바다에 맹세한 그 뜻, 충성을 다하려는 분노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같구나(鑄得雙龍劒 千秋氣尙雄 盟山誓海意 忠憤古今同)'라는 시(검명)가 새겨져 있었고, 박종경은 시구의 ‘쌍룡검’이라는 것에 착안해 다른 한 자루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나머지 한 자루를 탐문해 열흘 뒤 아산 사람으로부터 똑같은 다른 칼을 구했고 이후 이 쌍룡검을 충무공 이순신의 칼로 여겨 간수했고 이후 검이 궁내부 박물관이 소유하게 되었다고 기록해 놨다.


3.2. 일제강점기[편집]


1909년 대한민보[5]에서 "충무공의 군도는 동궐 내 박람회에 출품되었다."라고 했으며 1910년 사진집인 《조선미술대관》에 사진으로 모습을 드러낸 이후 행방이 묘연했으나 주간경향이 1912년 5월 26일자 권업 신문에 "동관 대궐에 이순신의 원융검(元戎劍) 및 조선 유물들이 있었지만 언제부터인가 다 치우고 그림이나 글씨같은 것들만 전시해놨다."라는 기사를 발견했다. 이 기록으로 궁내부 박물관 측에서 소유하고 있다가 어느순간 사라졌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후 일제강점기 초기에 행적이 점점 묘연해지기 시작해서, 현재는 1930년대에 촬영된 것으로 추정되는 사진 몇 장만 남아있다고 하나 그나마 그 사진들도 제대로 공개되지 않고 있다.


3.3. 정리[편집]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1. 이순신이 실전에서 사용. 이순신 사망 후 행방이 묘연.
2. 한 자루는 병조판서 심상규, 한 자루는 아산에 사는 어떤 이가 가지고 있었음.
3. 1811년 박종경이 두 자루의 쌍룡검을 얻음.
4. 이후 친위부가 소유하게 되었다가 궁내부 박물관 소유로 이동.
5. 1912년 이후 행적이 묘연.
파일:hankook-20011123.png
위에 서술된 내용이 보도된 2001년 11월 23일 한국일보 보도.

2010년 7월 10일 그것이 알고 싶다 방송분에서 추적을 해봤지만 찾은 건 애먼 사인검 마이너카피(?)인 삼인검이었다. 한 미 해병대 부사관이 조선칼과 왕관(Korean sword and crown)을 해외로 반출했다는 것을 발견했지만 그 이후의 조사는 힘들었다. 일본이나 미국 어딘가에서 가치도 모른채 떠돌고 있을 것이다(...) 만약 소장하고 있는 사람이 쌍룡검의 가치를 알게 된다면 그야말로 부르는 게 값이 될지 모른다. 대머리네 전당포에 올라오기를 기대하자.

그런데...


4. 이순신의 검이 아니다?[편집]


그런데 2019년 1월 7일 주간경향 1309호를 통해 국내 이순신 연구자 가운데 한 명인 역사평론가 박종평이 놀라운 견해를 내놓았다.충무공 이순신이 직접 사용했던 쌍룡검이라는 이름의 검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먼저 박종평은 고종 때의 문신 임헌회가 쓴 삼도수군통제사 이복연(李復淵·1688~?)의 묘갈명인 <통제사 이공 묘갈명(統制使李公墓碣銘)>에, 쌍룡검에 새겨져 있었다는 명문과 거의 비슷한 내용의 한시가 이복연의 시라는 기록과 그 내용이 있음을 제시했다.

"공(통제사 이복연)이 한 쌍의 장검을 만들고 ‘산에 맹세하고 바다에 맹세한 그 뜻, 충성을 다하려는 분노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같구나’라는 글귀를 새겼다(公鑄得一雙長劒 刻以盟山誓海意 忠憤古今同之句). 대개 공은 평생 이 충무공을 우러르며 그리워했기에 그 마음을 이처럼 시로 표현한 것이다"


또한 박종평은 다음과 같은 기록을 찾아내었다. 위에서 언급한 박종경이 쌍룡검을 얻었다는 시점과 거의 멀지 않은 시점인 1819년에 이순신의 후손 이호빈(李浩彬, 1777년∼?)이 저술한 <신정아주지>[6]라는 글이 있다. 이 신정아주지에선 현존하는 현충사 소장 장검과 쌍장검(쌍룡검)을 각기 따로 설명하고 있는데, 쌍장검은 이순신의 칼이 아니라 이복연이 만든 칼임을 기록하고 있다.

충무공에게 한 쌍의 장검이 있어 검면에 자명(自鳴)을 새겼다. 하나는 ‘석 자의 칼로 하늘에 맹세하니, 산하가 두려워 떨고(三尺誓天 山河動色, 삼척서천 산하동색)’, 또 하나는 ‘한 번 휘둘러 쓸어버리니, 핏빛이 산하를 물들이도다(一揮掃蕩 血染山河, 일휘소탕 혈염산하)’라고 했다. 지금까지 후손 집에 전해져 오고 있다.”-현충사 소장 장검에 대한 기록.


이복연은 단석(端錫)의 아들로 통제사로서 한 쌍의 장검을 만들었다. 검명은 ‘산과 바다에 맹세한 그 뜻, 충분은 예나 지금이나 같도다(盟山誓海意 忠憤古今同)’라고 했다. 모두 이 충무공을 우러르는 뜻이다[7]

”- 쌍장검(쌍룡검)에 대한 기록.


아울러 원융검기보다 이전의 기록으로 충무공의 4대손 이홍의(李弘毅)가 간행했던 <충무공가승>과 그로부터 약 90년 뒤인 1795년규장각에서 간행한 <이충무공전서> 모두 현충사 소장 장검만 언급하고 쌍룡검이라는 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다.

이러한 증거를 토대로, 박종평은 초대 삼도수군통제사였던 충무공 이순신이 실전에서 사용했다고 알려진 쌍룡검이라는 검은 사실 이순신의 것이 아니라 그의 후임인 이복연이 이순신을 경모하는 마음에서 그를 기리기 위해 제작했던 것이며 이를 후대에 이순신의 검으로 착각한 결과라고 주장하였다.

박종평에 따르면 이순신과 이복연 모두 아산 지역에 연고가 있고[8], 똑같이 이씨이며[9] 삼도수군통제사를 역임한 전력이 있어서[10] 더욱 착각하기 쉬웠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물론 충무공 이순신이 직접 사용한 검이 아니라고 해서 조선시대의 도검 유물로서의 가치가 손상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박종평의 견해대로 지금까지 이순신의 유물인 줄로 믿고 애타게 찾아다녔던 칼이 사실은 병조판서 심상규와 훈련대장 박종경의 오해에서 기인해 이순신의 유물로 잘못 알려진 것이었다고 하면 매우 김이 빠지는 것은 사실이다.


5. 이순신의 다른 도검들[편집]


충무공과 관련된 검은 총 8자루로 다음과 같다.


5.1. 현충사 소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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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충사에서 보관중인 거환도 2자루.

三尺誓天 山河動色 (석자 검으로 하늘에 맹세하니, 산과 강이 떨고)

一揮掃蕩 血染山河 (한번 휘둘러 쓸어버리니, 피가 강산을 물들이도다)

이순신 친필 검명[11]

길이가 2m에 육박해서 매체의 짧은 도검에 익숙한 선입견으로 인해 장식용으로만 인식이 되지만 총지휘관이 적의 습격을 받아 직접 전투에 나서야 할 경우 전투에 충분히 사용할 수 있는 검이다. 태구련 등을 생포한 뒤에 이들이 대장장이라는 증언을 확인할 겸해서 만든 물건.

길이 때문에 쌍수도라 칭하는 경우가 꽤 있으나, 그와는 전혀 다른 규격의 물건이다. 참고로 태구련 등은 임진왜란 훨씬 이전에 남해안을 노략질하던 왜구들에게 잡혀가 일본도를 납품하다가 요행으로 탈출한 도검장들이다.# 코등이와 손잡이 장식은 일본도의 양식이고 물고기 꼬리형 자루끝은 명나라 양식으로 꽤나 국제적인 디자인을 자랑한다.[12]

참고로 저 사진에서 보여지는 붉은 선은 이후 누군가가 페인트를 칠한 것이라는 것이 확인되며 문화재청에서 난리가 났다. 2015년 기준으로는 벗겨낸 상태.

본래 보물 326-1호로, '이순신 유물 일괄'에 포함되어 있던 유물이었지만, 2023년 국보로 승격되었다.


5.2. 충렬사 소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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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사에 소장된 4자루.[13] 왼쪽은 참도, 오른쪽은 귀도다.
여기까지가 현재까지 남아있는 이순신 관련 검이며, 여기에 쌍룡검 2자루를 합치면 총 8자루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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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검도에서 사용하는 진검은 검날 73cm, 자루 27cm로 규격화되어버리는 바람에 여기에 맞아야 실전성 있는 도검이라고 착각하는 잘못된 인식이 생겼다. 심지어 도검업체들이 이순신의 장검마저 여기에 맞춰서 개조해버리는 판국이다.[2] 육지 전투에선 리치가 긴 창이 진영을 잡고 싸우기엔 최적이었다. 하지만 좁고 진영도 못짜고, 비좁은 선상에 비해 너무 많은 사람들이 뒤엉켜서 칼부림을 벌여야하는 선상에선 동양•서양 할거 없이 검이 주력이었다. 당시 일본 주력 전술이 적 배에 갈코리를 걸고 당겨서 올라타 일본도로 싸우는 것이었다. 그나마도 일반적인 우치카타나로는 너무 길다하여 보다 짧고 가벼운 와키자시나 그것도 모자라 코다치나 탄토 등 더욱 짧은칼을 사용하기도 했다. 선상전투에서의 짧은무기 선호는 전세계 해적에게서 나오는 공통된 현상으로, 서양의 해적들 역시 짧은 한손검인 커틀러스와 단검을 선호했고, 중국 해군은 초창기에 육중한 한검 형식의 양손검을 썼다가 왜적의 짧은칼에 당하고 난 후로는 마찬가지로 짧은칼이 대세가 되었다. 그러므로 선상전투에서 기존 조선초기식 환도의 짧은 길이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더욱이 오늘날 장군의 권총처럼 당시 지휘관의 검은 휴대가 쉬운 호신용이자 규율을 잡기 위한 무장이었다. 그러니 일반적인 길이의 검은 단순 의장용이 아니라 철저히 실전용이었다.[3] 조선 후기 무기개설서 융원필비의 저자이자 순조의 외숙부이기도 하다.[4] 조선 말기, 왕실을 관리하는 일을 맡았던 관청.[5] 처음으로 시사만화가 실린 신문이다.[6] 아산의 다른 이름이 아주이다.[7] 李復淵 端錫也 以統制使鑄一雙長劍 銘曰 "盟山誓海意 忠憤古今同" 蓋慕李忠武之意也[8] 이순신은 아산이 외가였고, 이복연은 할아버지 때부터 대대로 아산에서 살았다.[9] 다만 이복연은 전주 이씨다.[10] 이순신은 초대와 3대, 이복연은 99대[11] 검 하나에 8자씩 새겨져 있다.[12] 조선 시대에는 군용 도검을 모조리 환도라고 불렀으므로 조선인인 태구련이 만든 이 검 또한 엄연히 환도에 해당한다. 애초에 환도 자체가 몽골식 곡도의 영향을 받았고 그 이전에 원류인 환두대도부터 사르마티아한나라의 영향을 받는 등 여러 국적의 디자인이 복합적으로 섞인 결과물이다.[13] 충무공 사후에 명나라에서 보낸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