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랜드 청소년수련원 화재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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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랜드 청소년수련원 화재사고
씨랜드 靑少年修練院 火災事故
Sealand Youth Training Center Fire Accident


파일:external/www.civiltech.co.kr/sea_land_01.jpg

발생일
1999년 6월 30일 0시 30분
발생 위치



경기도 화성군 서신면 백미리
씨랜드 청소년수련의 집
,(現 경기도 화성시 서신면 밸미길 242-23
야자수마을카페)
,
유형
화재
원인
모기향에 의한 발화(공식)[1]
부실공사로 인한 누전[2]
인명피해
사망
23명[3]
구조
521명
재산 피해
알 수 없음
소실 면적
컨테이너 2·3층 전소

1. 개요
2. 피해
3. 건물 구조
4. 원인
5. 화재 진압
6. 피해 급증 원인
6.1. 허술한 소방안전시설
6.2. 인솔교사들의 무책임한 행동
6.3. 공무원들의 비리
7. 수습 과정
8. 수사 및 처벌
9. 사고 이후
10. 사상자
11. 유사 사례
12. 영향
13. 관련 자료
14. 둘러보기



1. 개요[편집]


피우지도 못한 아이들의 불꽃을 꺼버리게 누가 허락했는가 언제까지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반복하고 살 텐가

H.O.T.의 노래 아이야! (I Yah!)의 가사. 이 노래는 씨랜드 참사로 희생된 아이들을 추모하기 위해서 만들어졌다.


씨랜드 청소년수련원 화재사고( , Sealand Youth Training Center fire)는 1999년 6월 30일 0시 30분 경 경기도 화성군 서신면 백미리 궁평항 인근의 '씨랜드 청소년수련의 집'이라는 청소년 수련원에서 일어난 대형 화재 사고다.


2. 피해[편집]


당시 씨랜드에 있던 인원은 다음과 같다.
  • 서울 송파구 문정동 소망유치원[4] 원생 42명.
  • 안양 예그린유치원 원생 65명[5].
  • 서울 공릉미술학원 원생 132명.
  • 부천 열린유치원[6] 원생 99명.
  • 이월드영어학원 원생 74명.
  • 화성 마도초등학교 학생 42명 등 454명의 어린이와 인솔교사 47명[7] 등 총 501명.

사망자는 다음과 같다.
  • 유치원생 19명[8].
  • 인솔교사 1명.
  • 레크레이션 강사 3명
총 23명.

이 참사의 후유증이 채 가시기도 전에 정확히 4달 뒤인 10월 30일 인천 인현동 호프집 화재 참사가 일어나면서 많은 중고등학생들이 피해를 입는 참사가 터지고 말았다.[9]

3. 건물 구조[편집]


해당 수련원은 1998년 초부터 영업을 시작해 1999년 3월 수련원 인가를 받았으며 총 부지 면적은 11,606m² / 건축면적은 2,576m²로써 A, B, C동으로 분리되었다. 당시 A동은 658m²로 강의실 및 식당, B동은 156m²로 생활관/관리사무실/양호실/휴게실로 각각 이루어졌으며 특히 화재가 난 C동 건물은 1,762m² 규모로 1층 콘크리트 건물 위쪽 2~3층에 컨테이너 52개를 쌓아 외벽은 흰색 목재, 지붕은 샌드위치 패널로 마감된 건물로서 생활관 겸 지도자 숙소로 사용되어 총 59개 객실에 630명을 수용할 수 있었다.

문제는 컨테이너부터 저가 제품을 썼다는 것인데 해당 컨테이너는 두께 1.6mm 철판으로 열전도성이 강했으며 그 이음새에 용접도 아닌 실리콘을 바르고 목재나 샌드위치 패널 등 인화성 물질로 감싸져 있었고 화재 경보기는 작동을 멈췄고 소화기도 텅텅 비어 있어 초동진압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특히 건물 지붕에 사용된 샌드위치 패널은 한쪽 면에 벽체로 사용되는 철판이 빠져 내부의 스티로폼 단열재가 그대로 노출된 형태였고 각 방의 벽재도 스티로폼 단열재 위에 합판[10]만 올린 부실한 자재에 벽지만 대충 발라 때운 것이었다. 이렇다 보니 불길이 단시간에 걷잡을 수 없이 빠르게 번진 것은 물론, 단열재가 불에 타면서 대량의 유독가스가 발생할 수밖에 없었던 것. 게다가 컨테이너를 쌓아서 건물을 완공하는 데는 고작 15일밖에 걸리지 않았다.

당시 수련원 대표는 토지 실소유주 김 모씨였고 수련원장은 토지 임대자 박 모 씨가, 영업은 황 모 씨가 각각 맡았다. 게다가 수영장 자리는 원래 양어장 자리였는데 1987년에 시설주가 양어장을 수영장으로 불법 변경해 벌금을 문 바 있었으며 1997년에도 무허가 소규모 놀이동산을 차려 장사하다 적발된 바 있었다.


4. 원인[편집]


사고 하루 뒤 국립과학수사연구소는 원인 규명에 2~3개월이 소요될 것이라고 발표했지만 7월 2일에 갑자기 화재의 원인이 모기향 불이었다고 발표했으며 그게 잘못 엎어지면서 가연성 소재로 된 건물 내로 불길이 번지고 매캐한 독가스를 뿜어지면서 피해가 커졌다고 했다. 이후 법원 판결에서도 모기향이 화재의 원인으로 판단되었다.[11]

하지만 유가족들은 국과수가 사고 3일 만에 철저한 검증 없이 화재 원인을 발표한 데에 대한 의구심을 품었고 7월 6일 한국화재보험협회 실험에서 모기향을 피운 채 이불과 신문지를 놓고 2시간 동안 바람을 불어넣었지만 불이 붙지 않았다. 7월 9일 MBC <PD수첩>에서도 비슷한 조건으로 실험했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전부터 전기가 들어왔다, 안 들어왔다 했다는 목격자의 증언으로 보아 전기 누전을 원인으로 보는 게 사실에 가까울 거라고 대다수가 입을 모았다. 모기향 화재인 것과 전기누전 화재인 것은 사고 책임 소재에서 큰 차이가 있으며 전자는 모기향을 피운 소망유치원장에게 책임이 전가되고 후자의 경우라면 관련된 공무원들 여럿 모가지다.[12]

한편 유가족들은 사건 발표 다음 날에 분노한 채 국과수까지 갔으나 전의경에 의해 가로막혔고 수사 상황을 알기 위해 화성경찰서까지 갔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7월 23일엔 김종필 국무총리와의 면담을 요구하며 정부중앙청사까지 갔으나 버스째로 견인당했다.

정부의 엉터리 화재 원인 규명에 분노했던 유족 중에는 1988 서울 올림픽 여자 하키 은메달리스트 출신으로 대통령 훈장까지 받은 학부모 김순덕이 있었다. 그녀가 분노해 체육훈장을 반납하겠다고 나서자 그제서야 김종필 총리와의 1:1 면담 자리를 가지게 되었고 김 총리는 그 자리에서 재수사를 약속했다. 그러나 재수사는 결국 없었다. 심지어 김대중 대통령은 이러한 정부 방침에 대해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후술하겠지만 결국 김순덕은 거듭되는 대형 참사 속에도 달라지지 않는 대한민국 정부대한민국의 현실에 분노하며 자신의 훈장을 반납했고 자신의 가족들과 뉴질랜드로 영구이민(국적포기)을 떠났다.


5. 화재 진압[편집]


특히 많은 희생자가 난 사유들 중 가장 큰 원인은 사고 지역이 무선통신 난청 지역이라 신고가 늦었다는 점이다. 1999년 당시는 핸드폰이 보급되고 있는 시기긴 했지만 아직 보급 초창기여서 도시를 벗어나면 통화가 터지지 않는 음영 지역이 많았다. 즉 cdmaOne 기지국이 충분히 깔리지 않았다는 뜻이다.

오산소방서에 신고가 접수된 건 사고 1시간 후였고 게다가 소방서에서 씨랜드까지의 거리는 70km나 돼서[13] 고속도로에서 가능한 한 빠르게 질주를 해도 40분은 잡고 가야 하는[14] 긴 시간이 걸렸다.

또한 고속도로처럼 선형 좋은 도로도 40분인데 사고가 난 곳은 전형적인 농어촌 지역 비포장 산길에다 선형도 안 좋았으니 제 아무리 소방차가 신호 다 무시하고 달리고 새벽이라 교통량도 적었다고 한들 가는데 당연히 시간이 엄청 걸리는 건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다. 설상가상으로 당시 수련원 쪽으로 열려 있는 도로는 중형 승용차 1대가 겨우 지나갈 정도로 도로 폭이 좁아서 아예 소방차가 들어가지도 못했고[15] 다른 쪽 도로에는 수련원 측이 사유지라고 주장하며 쳐 놓은 철조망 및 쇠말뚝 등이 있었기 때문에 출동에도 어려움이 있었다.

화재 발생과 동시에 소방차가 출동했다고 쳐도 결국 화재 현장과 소방서의 거리가 멀어서 화재 발생 후 40분 이상 지나고 나서야 도착하게 되었다.[16] 관련 기사 결국 동원된 소방 인력만 553명[17]에 소방차 등의 차량도 67대가 넘게 동원됐지만 3분 만에 물은 동이 나고 유독가스와 화염 그리고 건물 붕괴 위험 등으로 화재 진압과 인명 구조에 큰 어려움을 겪었으며 끝내 어린이 19명을 포함한 23명은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6. 피해 급증 원인[편집]



6.1. 허술한 소방안전시설[편집]


화재를 처음 눈치챈 사람은 당시 학원 캠프 현장답사를 위해 씨랜드를 방문했던 송영규 태권도 관장이었다.

3층 천장에 연기가 퍼져나가는 걸 목격한 송영규 관장은 재빨리 근처에 있는 화재경보기를 눌렀지만 화재경보기가 울리지 않았다.

  • 비치된 소화기는 제조된 지 10년 이상이 된 노후 소화기였다.
  • 화재경보기는 아이들이 호기심으로 눌러 알람이 울릴 수 있다는 이유로 꺼 두었다.
  • 소화전은 고장이 나서 물이 나오지 않았다.
  • 당시 사고현장은 오산소방서하고 70km, 남양소방파출소하고는 30km나 떨어져 있었다.
  • 소방차들은 상당수가 10년이 넘은 노후차량이라서 대형버스보다도 못한 135마력에 불과해 꼬불꼬불한 국도를 달리는 동안 40km 안팎의 속도밖에 내지 못했다. 그 때문에 초기진화가 늦어진 것은 당연지사.
  • 처음으로 도착한 서신파견소 차량은 3분 동안 5,000리터의 방수포를 모두 쏘고 나면 물이 모두 바닥나 급수를 받아야 했지만 급수차가 제시간에 도착하지 못했다.
  • 설상가상으로 진입로가 비포장도로인 데다 승용차 한 대가 겨우 지날 수 있는 2.8m에 불과하였으며 수련원 입구가 바리케이드로 막힌 것도 한몫했다.

결국 송 관장은 있는 힘껏 목소리를 내서 불이 났다고 외쳤고 이제 막 잠이 깬 아이들과 교사들이 혼란에 빠져 정신없이 움직였다.

다행히 후술한 소망유치원을 제외한 다른 유치원, 학원, 초등학교 선생님들은 아이들과 같이 있었기에 송 관장의 소리를 듣고 얼른 일어나 침착하게 아이들을 인솔하였으며 또한 302호에 남아 있던 소망유치원 아이들도 아이들을 발견한 송 관장과 다른 선생님들이 달려와 구조하여 총 521명의 아이들은 무사히 구조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01호실의 소망유치원생 18명이 전원 사망한 까닭은 그 아이들이 씨랜드 3층의 한 개 방에 다 같이 자고 있었는데 불길이 급격히 번진 데다 어린이들의 안전을 책임져야 할 인솔교사들이 무책임하게 대응했기 때문이다.

당시 해당 유치원의 인솔교사들은 314호에 투숙했다고 증언하였으나 문제는 314호가 그 유치원생들이 자는 301호의 바로 맞은 편 방이었으며 최초 발화 지점도 301호였다.

6.2. 인솔교사들의 무책임한 행동[편집]


즉 314호의 인솔교사들은 충분히 화재 상황을 빨리 알아챌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상황을 알지 못했다고 진술한 것.

그러나 이와 상반되는 증언도 있었는데 당시 3층에 있었던 사람들은 314호에선 사람이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고 진술했다.

즉 314호가 아닌 아예 밖에 있었던 게 아니냐는 의혹도 있었다.

그 후 조사 끝에 충격적인 사실이 밝혀졌는데 바로 소망유치원 인솔 교사의 대부분이 밖에서 불을 피워두고 삼겹살하고 소주를 먹고 있었던 것이다.[18]

즉 교사들이 처음부터 아이들과 같이 있지 않았던 것이며 불이 났어도 술에 취해 있던 교사들이 제대로 대응을 할 수 없었던 건 당연했다.[19]

반면 전 소망유치원 원장 측은 후술할 2009년 <조선일보> 기사 인터뷰에서 본인을 포함한 인솔교사 3명 전원이 개신교 신자라 술을 안 마셨다고 했고 수련원 314호에 있었을 적에는 아픈 아이들이나 연락 온 어머니들이 없는지 교사들과 이야기했다고 주장했다.

결국 남겨진 302호의 아이들은 다른 선생님들에 의해 전부 구조되었으나 301호에 있던 어린이들은 아무런 빛도 없는 깜깜한 방 안에서 불길을 빠져나오지 못하고 그대로 질식해 목숨을 잃고 말았다.

초등학교 교사 한 명과 레크리에이션 강사 3명이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 불길 속으로 몸을 던졌다가 함께 변을 당했다.

그리고 3층에서 투숙했던 소망유치원 외에 2층에서 투숙했던 부천 이월드영어학원에서도 유치원생 1명이 희생되었다.

이렇듯 유아교사는 교사 업무 중 어린이들 옆에 꼭 붙어 있어야 하는 것이 기본임에도 씨랜드 사건 3년 후 발생한 광진구 어린이선교원 흉기난동 사건에서도 유아교사들의 자질 향상이 아직 멀었다는 것이 고스란히 드러났다.[20]

6.3. 공무원들의 비리[편집]


뿐만 아니라 수련원 측은 운영 과정에서 시공 및 감리회사 관계자들에게 뇌물을 먹이고 화성군 공무원들은 이를 묵인, 비호하였고 충격적이게도 김일수 화성군수가 불법 운영에 개입하기까지 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양두구육(羊頭狗肉)이라고나 할까? 밖에는 대가리를 걸어 놓고 안에서는 개고기를 판매한 격이었다.

그렇게 뇌물을 먹였으니 씨랜드의 수련원은 불법적인 구조로 운영이 가능했었고 안전검사 또한 무시할 수 있었다.

콘크리트 건물 1층 위에 컨테이너 52개로 가건물을 조합해서 운영하고 있었다.

게다가 건설비하고 운영비 절감을 위해 장부에만 철근콘크리트로 되어 있을 뿐 52개의 조립식 컨테이너 박스를 콘크리트로 된 건물 1층 위에 한 쪽에 13개씩 총 26개를 2개 층으로 쌓아 올린 가건물이었다.

정상적으로 지은 건물은 통상 불이 나더라도 무너지지 않는 반면 아무래도 가건물이다 보니 화재로 건물이 붕괴되었고 어린이 중 일부는 미처 대피하지 못한 채 참변을 당했다고 목격자들은 진술했다.

방 천장 등은 인화성이 강한 스티로폼하고 나무로 장식되어 있는 외벽이 불쏘시개 역할을 한 탓에 불길이 순식간에 확산되어 건물 전체로 확산되었으며 설상가상으로 건물 내부에 유독가스까지 가득 찼다.

여기에 한 술 더 떠서 수련원 밖으로 연결되어 있는 비상구라고는 길이가 50여 미터인 본 건물 양끝에만 위치해 있어 많은 어린이들이 미처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했다.

스티로폼 같은 가연성 소재로 인테리어를 한 것도 모자라 한 술을 더 떠서 전기설비도 무자격자들이 시공하였다.

이러니 불이 나면 쉽게 번지고 이 과정에서 유독가스까지 추가로 발생한 데다 정전까지 되는 바람에 건물 내부가 혼란에 빠진 것이다.

그런 불법 구조 탓에 소방차가 밖에서 물을 뿌리더라도 건물 안으로 제대로 들어가지 않게 되었다.

그야말로 엎친 데 덮친 격. 덧붙여서 컨테이너로 만든 건물이었던 데다 화재로 컨테이너 자체가 많이 약해져 있어서 물이 있어도 물을 뿌리기도 힘들었다[21].

그리고 위에서 기술했지만 소화기나 화재경보기 등의 방화(防火) 시설 점검도 뇌물을 받아먹었으니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심지어 당시 국민의 정부 역시 책임 대상으로 거론됐는데 1998년 국민의 정부 출범 후 범정부적 차원에서 '규제 완화'를 실시하면서 건축물 관련 법령이 느슨해졌고[22] 이것이 위법 행위를 키운 요인 중 하나가 되었다.

게다가 야외 수련 활동의 경우 초중고생(초등학교 5학년 이상 되어야 참여 가능) 대상인지라 교육당국에서는 유치원생들에 대해서는 숙박이 필요한 야외 수련 활동을 못하도록 지침을 두고 있다[23].

하지만 리베이트 살포 등 수련원측의 과열경쟁에다 유치원의 잇속 챙기기로 지침을 무시하기 일쑤였고 이 과정에서 안전은 아예 묵살되어 버렸다.[24]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낸 소망유치원은 참사 전날 서울시 강동교육청에서 개최한 '여름방학 생활지도를 위한 원장회의'에서 유아 숙박 수련 활동 금지를 시달을 받고서도 교육청의 지령을 무시하고 합숙을 강행했다[25].

눈가림식 설비 점검, 수련원 및 유치원 측의 잇속 챙기기, 안전 불감증이 겹친 참사였다.

뒤늦은 후회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결국 돈에 썩어빠진 어른들이 꽃다운 어린아이들의 목숨을 앗아가버린 꼴이 되고 만 것이다.

7. 수습 과정[편집]


피해자들의 상당수가 체격이 작고 골격이 아직 굳지 않은 유아들이라서 거센 불길로 인해 시신의 상태가 안 좋아 국과수 측이 신원 확인에 2달이나 걸릴 거라고 예상했지만[26] 치아 대조 및 유전자 감식, 병원 진료 기록 확인 등으로 7월 3일에 완료되었다.

반면 소망유치원생이 묵었던 301호의 맞은 편에서 자고 있던 마도초등학교 학생들이 대피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묵고 있던 2개의 방에 각각 1명씩 인솔교사가 같이 묵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도초등학교 측 인솔교사는 불이 나자 침착하게 학생들을 대피시킨 뒤 다시 들어가 다른 어린이들을 구조한 덕분에 몇 명의 어린이들이 더 목숨을 건졌다. 후에 두 인솔교사는 탈진해 쓰러졌고 소방관들이 한 명을 구조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김영재 교사(당시 38세)는 이미 숨을 거두었다. 이 외에 레크리에이션 강사 서태용(당시 21세), 채덕윤(당시 26세), 박지현(당시 23세)도 아이들을 구하러 갔다가 모두 목숨을 잃었다. 이들은 영결식 때 정부로부터 의사자로 인정받았다. 사태를 처음 파악한 송영규 태권도 학원 관장 부부도 아이들이 모두 탈출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다.

이 두 교사와 세 젊은 강사들의 희생, 송영규 관장 부부의 노력이 아니었으면 씨랜드 참사 희생자가 23명 초과로 늘어났을 것이다.[27] 반면 소망유치원 교사들은 한동안 세인으로부터 비난받았고 2009년 <조선일보>를 통해 해당 유치원 원장과 인솔교사 중 1명의 근황이 전해진 바 있었다.(기타 기사)[28]

당시 화재가 모두 진압되고 소방관들이 유치원 아이들이 갇혔던 방에 도끼로 문을 깨고 강제로 들어갔을 때 문에는 손톱으로 긁은 자국이 수없이 있었으며 아이들의 시신은 모두 창문 아래쪽에 모여 있었다고 한다. 이에 대해 소방관은 유치원생인 어린이들이 느꼈을 공포를 자신도 느꼈다고 했다.

8. 수사 및 처벌[편집]


경찰은 조사 과정에서 씨랜드-화성군청 간 온갖 비리 사실이 있었음을 밝혀냈고 이에 전국적으로 분노 여론이 폭발했다. 해당 시설 건축주 겸 수련원장 박재천[29]을 비롯해 공무원, 화성군수까지 구속 영장이 신청되었고[30] 사건 당일 술을 마셨던 인솔 교사들도 모두 구속되었다. 부지 소유주 김씨는 불구속 입건되었다.

최고 책임자 김일수 전 화성군수는 이 사건으로 인해 군수직에서 사임하였으나 무혐의로 풀려난 뒤 지역유지로 잘 살고 있다. 2005년 인터뷰 그리고 한때 경찰에서 몇 번이나 검찰에 기소 요청을 했지만 모두 기각당했으며 더욱 무서운 것은 화성군수가 조사 받던 중 쓰러져서 병원에 입원하자 화성군수님을 보호하겠다는 화성농촌문제 연구회와 지역 4H 소속원들이 주축이 된 지지자 300명이 몰려가서 병실을 지키면서 기자들을 내쳤다는 것이다. 또 "씨랜드 사건이 비극이기는 하지만 군수님에게 모든 비난을 돌리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반면 씨랜드 원장 박씨는 1심에서 징역 2년 6개월 및 금고 5년, 전 소망유치원 원장 천씨는 금고 5년이 각각 선고됐다. 이후 이들은 각각 징역 1년과 금고 4년으로 감형됐다가 2001년에 출소했다.

화성 동부(병점, 동탄, 봉담 등)에 비해 상대적으로 개발이 늦고 소외되어 있는 서부 지역에서 일어난 이 사건은 주목이 덜 되는 편이다. 게다가 1달 후 신창원 탈옥 사건임창열 경기도지사 뇌물 사건 등으로 관심이 금방 줄었고 일부 언론과 국민들이 보상금 더 받으려고 질질 끈다며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경우도 있었다.

이 사건에 관련해 인허가를 담당했던 공무원 이모 씨도 고초를 겪었다. 당초 해당 인허가 신청을 접수한 담당 공무원 이모 씨는 실사 결과 컨테이너를 얹은 부실하고 취약한 형태의 건물이라 허가를 내주지 않았는데 이후 씨랜드 쪽의 갖은 회유와 협박에 시달린 것. 이모 씨의 상급자들도 빨리 허가를 내주라고 압력을 가했고 나중에는 조폭까지 동원해 협박했다고... 또 씨랜드 회장인 박모 씨는 "니까짓 게 군수도 아닌데 시키는 대로 하지 말이 많냐", "안 되면 안 되는 법을 찾아오라" 등의 폭언을 행사하는 바람에 결국 이모 씨는 다른 민원부서로 옮겨야 했고 허가는 속전속결로 진행되었다.

해당 공무원은 이러한 전말을 비망록에 남겨 양심선언했으며 나중에 씨랜드 사건이 터진 후 수사를 받으면서 이 비망록이 관계자 처벌에 결정적 기여를 했지만 결국 상급 공무원들이 그 건으로 줄줄이 사법 처리를 받게 되자 조직 내에서 내부고발자라는 냉대를 받으면서 끝내 그 다음 해에 쓸쓸하게 명예퇴직을 하게 되었다. 관련 기사. 말이 명예퇴직이지 사실상 해임된 거나 마찬가지. 퇴직 이후 그녀는 인터뷰에서 "'참 공무원'이 아니라 스스로를 '어린 생명을 잃게 만든 죄인'이라 생각하며, 평범한 엄마로 살고 싶다"고 말했다. 결국 제대로 된 원인 및 진상 규명 없이 1999년 8월 10일 유가족들은 배상책임 대상에 대한 배상/보험청구권을 경기도 및 화성군청에 위임하는 등으로 합의하고 말았다.

사고 이후에도 샌드위치 패널을 쓰고 소방 시설이 미비한 일부 불량 청소년수련원들이 법망을 피해 한동안 존재했으며 창고 등 타 건물도 샌드위치 패널 등 내장재 관련 법안에 손을 대지 않았다. 당시에도 이미 전문가들은 샌드위치 패널의 위험성을 보고하고 있었고 인구밀집시설의 내장재를 난연재로 바꾸어야 한다고 정부에 수차례나 요청했는데 정부는 이를 묵살하고는 화재 대비를 위한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결국 이로 인해 4년 후 대구 지하철 참사와 천안초등학교 축구부 합숙소 화재참사, 청도 버섯공장 화재, 2008년 이천 냉동창고 화재 사고 등이 발생했다. 씨랜드 참사가 발생한 지 무려 6년이나 지난 2005년에야 참여정부에서 '청소년활동진흥법 시행령'이 제정되면서 청소년수련원 시설에도 샌드위치 패널을 건축 자재로 쓰지 못하게 규정했지만 이마저도 2005년 이후 건물에만 적용되고 그 이전에 완공된 건물에는 여전히 샌드위치 패널이 사용되고 있었다. 결국 2008년에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서야 건물 및 차량의 내장재가 불연재 또는 난연재로 바뀌게 되었다. 다만 이명박 정부도 건설경기 부양과 서민 주거환경 개선이라는 목적으로 도시형 생활주택으로 규정된 건축물에 대한 규제를 대폭 완화하여 드라이비트 공법을 장려한 죄값이 있다. 제천 스포츠센터 화재 사고의 화재규모를 키운 원인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만약에 씨랜드 참사가 일어난 직후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관련 법령을 다시 이전으로 돌리기라도 했다면 더 많은 생명을 잃은 사건을 비롯한 1999년 이래의 수많은 화재 참사들은 발생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상술했듯 국민의 정부가 들어서자 정부와 국회 차원에서 외환위기를 극복한다는 명분 하에 적극적인 규제 완화 정책을 펼쳤고 이 때문에 기존에 있었던 화재 관련 규제들이 대부분 없어져 버리면서 그 틈을 타 씨랜드 같은 건축물이 곳곳에서 만들어졌다.

9. 사고 이후[편집]


  • 희생자들의 시신은 국립과학수사연구소로 이송되었고 분향소는 서신면사무소 3층 회의실 및 서울강동교육청에 차려졌고 8월 7일에 올림픽공원에서 합동 영결식을 엄수한 후[31] 벽제화장장(현 서울시립승화원)에 화장되어 다음날 아침에 사고 현장 반대 방향인 동해에 유골이 뿌려졌다.[32] # 2001년에 서울 마천동 어린이안전공원 내에 추모비가 세워졌다.

  • 사고 이후 경기도청에서 '씨랜드 백서'를 발간했는데 내용이 백서라고 할 자격이 없는 수준이다. 본래 '백서'란 이런 사건사고가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 발간하는 책이고 그 내용의 핵심은 사건이 일어난 원인과 이에 대한 대책인데 전체 300쪽이 넘는 이 백서에 담긴 내용의 대부분은 '피해 가족과의 보상 협의 과정'과 '수습' 과정이고 사건의 원인에 대해서 할애한 페이지는 고작해야 7쪽이 전부였다.[33] 게다가 '대책'에 관해 서술한 내용은 더 가관이었다. 사건의 직접적인 원인이 된 샌드위치 패널에 대한 대책이나 화재 관련 법령 보완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다. 게다가 백서의 내용에는 실제 사건과는 전혀 어울리지도 않는 "원만한 사고 수습을 위해"라는 표현이 군데군데 등장한다. 이에 유가족들은 분노를 터뜨리며 '서둘러 사건을 덮어버리려는 수작'이라고 날 선 비판을 쏟아내었고 유가족들 스스로가 십시일반으로 사비를 모아 '씨랜드 백서'를 발간했다.

  • 사고 어린이들의 부모들은 2001년 3월 23일 화성시에서[34] 씨랜드 청소년 수련의 집 화재사고 사상자 보상금 지급 조례가 통과되면서 보상금을 받게 되었지만 어린 아이들의 생명은 그 어떤 것으로도 갈음할 수 없었다. 여자 하키 종목으로 1988 서울 올림픽에서 은메달, 2번의 아시안 게임에서 2개의 금메달까지 땄던 김순덕 전 여자 하키 국가대표 선수는 이 사고로 아들 김도현 군을 하늘나라로 떠나 보낸 후 4개월 만에 인천에서 화재 사고가 또 발생하자 그녀는 정부의 무책임한 수습에 분통이 터져 현역 시절 받았던 훈장과 메달을 모두 정부에 반납한 뒤 자신의 가족들하고 함께 뉴질랜드로 영구이민을 떠났다. 그 해 8월에 가졌던 인터뷰


  • 한편 이 참사로 인해 당시 6세였던 쌍둥이 딸을 모두 잃은[35] 유가족 대책회장 고석 씨[36]는 2006년 <안전교육이 유아의 안전능력에 미치는 영향>이라는 주제로 서울시립대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고 2000년 한국어린이안전재단을 설립해서 대표로 활동하고 있으며 이후 안전문화 유공자로 인정받아 2015년 국민포장을 받았다.

  • 사고 발생 후 유치원/초중고 학생, 부모, 교사들 사이에서 여름캠프 기피 현상뿐만 아니라 청소년 수련시설에 대한 불신이 만연해졌다. 당시 전국 유치원들의 십중팔구는 7월부터 예정됐던 1박 2일 여름캠프를 취소 또는 보류하고 이듬해부터 당일 캠프, 주말농장 체험 등으로 전환하는 도화선이 되었다. 언론 역시 선진국 수련 시설 안전사례 및 불량 사설 수련원 실태 등을 보도하여 정부와 관계기관의 각성을 촉구하였다. 이에 따라 행정당국은 청소년 보호 정책을 강화해 건축법 및 소방법을 개정하여 수련원 건축 자재를 난연재로 하는 등 후속조치를 마련하였다. PC통신과 인터넷 등지에도 추모 분위기가 형성되어 '씨랜드참사 희생자 유족회'란 홈페이지가 개설되기도 했다. 다른 페이지

  • 2021년 8월 19일 MBC 심야괴담회에 당시 현장보존 보초근무를 한 달여간 섰던 의경 대원의 이야기가 소개됐다. 괴담보다는 참사를 잊지 말자는 분위기로 진행되었다. 그가 보초 철수 이후 이 곳을 다시 찾지 않다가 22년 후 자신의 아이들과 함께 사고 현장을 찾는 장면도 후반부에 나왔다. 영상 1, 영상 2 다만 의도와는 별개로 심야괴담회라는 이름을 써 놓고 사건사고를 주제로 삼는 건 아니지 않느냐는 논란이 일자[37] 커뮤니티로 해명 후 해당 프로그램에선 사건사고를 다루는 것은 지양하고 있다. 또한 아래의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에서는 같은 사건을 알기 쉽게 풀어내면서도 시사교양 프로그램이라는 방송의 취지에 맞게 사건을 진중한 자세로 다루었기 때문에 시청자들로부터 더 많은 공감을 얻었고 자연히 실제 사건을 예능적인 요소로 희화화한 심야괴담회와 비교되었다.


  • 2021년 12월 9일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에서도 '마지막 여름캠프'라는 제목으로 이 사건을 다루었다. 방송에서는 사전답사차 왔다가 화재를 처음으로 목격하고 이 사실을 당시 그곳에 있던 사람들에게 알리는 한편 화재 현장에서 아이들을 구출하는 데 힘을 보탰던 송영규 관장 부부[38]와 희생된 유치원생들 중 한 명인 김세라 양의 아버지와의 인터뷰가 나오는 등 기존에는 대중이나 언론에 잘 알려지지 않았던 부분들도 자세하게 다뤄졌다.[39]

  • 녹화 도중 장성규의 이야기 친구로 출연한 백지영이 당시의 처참한 상황을 들으면서 내내 오열하는 바람에[40] 녹화가 잠시 중단되기도 했다. 따로 녹화를 하던 장도연의 이야기 친구 비비도 눈물을 계속 멈추지 못했으며 이야기를 이어나가던 장도연마저 희생자 중 한 명인 김세라 양(당시 7세)의 아버지가 불에 타다 남은 세일러문 잠옷[41]의 잔해를 보고 딸의 시신을 확인했다는 이야기를 하다가 말하기가 너무 미안하다며 끝내 울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그야말로 엉엉 울면서 녹화가 잠시 지연되는 모습이 편집되지 않고 그대로 전파를 탔다.[42][43] 장현성의 이야기 친구로 나온 타블로는 3명 중에서는 비교적 감정 표현을 절제하면서 이야기를 듣는 편이었지만 타블로 본인도 어린 딸을 둔 아빠인 만큼 참사 당시의 상황을 들으면서 시종일관 참담해했고 때때로 울컥하는 모습도 보였다.

  • 한편 사건 당시 소망유치원 인솔교사들의 무책임한 대처, 수련원의 부실공사와 안전관리 실태, 정부와 씨랜드 관계자들의 한심한 대응에 대한 부분에서는 이야기꾼과 이야기 친구 모두가 크게 분노하는 모습을 보였다. 특히 백지영과 타블로는 어린 자녀를 둔 부모의 입장이다 보니 당시의 막장스러운 상태에 대해 매우 격분했고 타블로는 방송에서 필터링되기는 했지만 아예 장현성과 함께 욕까지 했을 정도였다.[44] 또한 타블로는 방송 말미에 참사가 일어나기 전 아이들이 선생님에게 쓴 편지 내용을 언급하면서 "아이들이 선생님을 사랑한다고 하고 절대적으로 믿었지만, 어른들은 사실 그렇게 믿을 만한 존재가 아니다."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비비도 만약 살아 있었다면 활발하게 사회 생활을 하며 살아갔을[45][46] 많은 아이들이 어른들의 욕심과 무책임함으로 인해 억울하게 희생되었다는 사실에 시종일관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 씨랜드 대표는 사건 직후 바로 구속됐으며 이후 징역 5년을 선고받고 수감됐다가 출소한 뒤 참사 장소 옆에 식물원 카페인 야자수마을을 열었으며 화성시 땅인 화재 참사 장소는 주차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는 2022년 3월 26일 실화탐사대에서 방송했다. #


10. 사상자[편집]


  • 소망유치원(서울특별시 송파구 동남로6길 16)[52]
    • 사망자
      • 구성욱, 권형수, 김도현[47], 배한슬, 김재우, 오영종, 이재혁, 이형민, 정선교(7, 남)
      • 강찬영, 고가현&고나현[48], 김세라, 류연수, 천수영, 최송이[49][50], 허수나, 황소희(7, 여)
    • 부상자
      • 김이현(6, 여), 박유정(7, 여)
      • 김태천(34, 남)[51]

  • 부천 이월드 영어학원
    • 김혜지(6, 여)[53][54]
사망자 어린이들은 1999년 당시 만 5세~6세로[55] 2023년 현재 생존해 있었다면 만 29세~30세가 되었을것.
  • 기타
    • 김영재(38, 마도초등학교 교사)
    • 박지현(23, 여·수련원 강사)
    • 채덕윤(26), 서태용(21)

11. 유사 사례[편집]


아래는 샌드위치 패널 등 가건물에서 일어난 화재 사고들을 서술했다.


12. 영향[편집]


  • H.O.T.의 4집 타이틀곡 '아이야! (I Yah!)'가 이 사건으로 희생된 아이들을 추모하기 위해서 만들어졌다. 이 노래는 이후 2014년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가 발발하면서 재조명되었다. 1999년 콘서트 때는 오케스트라와 밴드와 합동공연으로 마지막 곡으로 부르게 되었으며, 초반 인트로에 이 사건 관련 뉴스 클립들이 쓰였다. 이후 씨랜드 참사를 다룬 꼬꼬무 8화 중간예고에서도 잠시 삽입되었다.

  • 사고 약 2년 뒤 2001년 4월 11일에 발매된 자전거 탄 풍경의 1집 앨범 중 10번 트랙 '담쟁이 넝쿨별'도 이 사건으로 희생된 아이들을 추모하기 위한 곡이다. 부제부터가 '씨랜드에 잠든 어린이들을 위해' 이다.

  • 한국119소년단에서 개최하는 소방동요제의 출품작인 <하늘나라 천사에게> 역시 이 참사로 희생된 아이들을 추모하기 위한 곡이다. 노래 듣기

  • 소설가 하성란 작가도 창작과비평 2001년 봄호에 '별 모양의 얼룩'이란 단편을 발표하면서 해당 사건에 대해 다루었다. 담담한 어투로 써내려간 수작이니 읽어보면 도움이 될지도. 이후 소설집 '푸른 수염의 첫번째 아내'에 수록되었다.

  • 2008년 곽재용(감독/각본)의 일본 영화 <싸이보그 그녀>에 사이보그인 여주가 씨랜드의 아이들을 구출하는 장면이 나온다. 곽재용 감독은 아픈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기는 기원하는 의미에서 이 장면을 넣었다고 한다.

  • 2009년 MBC 수목드라마 에서 극 초반 이 사건을 모티브로 한 스토리가 전개되었다. 극중에서는 여주인공 윤하나(임주은)가 어린 시절 화재가 발생한 수련원에서 또래 아이들을 모두 잃고 혼자 살아남은 후 불에 트라우마를 가진 여고생으로 나온다.[56]

  • 2012년 옴니버스 형식으로 제작된 한국 영화 <가족시네마>에서 ‘별 모양의 얼룩’(홍지영 연출, 김지영 주연)에서 씨랜드 화재 사고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를 다루었다.


  • 사고의 여파로 인해 전국적으로 대부분의 학교들이 당해년도 수련회수학여행을 취소하는 분위기로 이어졌기에 당시 재학 중이던 1980~1990년대생들은 어린 나이였음에도 사건을 잘 기억하고 있다.[57]

  • 이 사건 이후 유치원과 어린이집에서 주최하던 숙박형 캠프가 당일치기 여행으로 대체되기도 했다.


  • 당시 2층에서 잠을 자다 살아남은 원생 1명이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면 안 된다는 생각에 소방관을 지원해 합격했고 현역 소방관으로 활동 중이라는 댓글을 꼬꼬무 영상에 남겼다.


13. 관련 자료[편집]




  • 당시 MBC 뉴스데스크 자료[58]










14. 둘러보기[편집]


문서가 있는 대한민국의 화재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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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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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신골든스위트 화재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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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고속 차고지 화재사건V, 설봉호 화재 사고A , 2011년 충북 청주시 낭성면 산불?
2013년
인사동 식당밀집지역 화재V, 외발산동 버스 차고지 방화사건V, 포항 산불사고V, 2013년 울주 산불?
2014년
고양종합터미널 화재 사고H, 2014년 서문시장 화재?, 장성 효사랑요양병원 화재 사고V, 도곡역 열차 방화 사건V, 2014년 대전 목상동 한국타이어 공장 화재?
2015년
의정부 아파트 화재 사고H, 강화도 캠핑장 화재 사건A
2016년
춘천중앙교회 화재 사고?, 경부고속도로 언양분기점 관광버스 화재 사고A, 김포 상가건물 공사현장 화재 사고H, 2016년 서문시장 화재A
2017년
여수 수산시장 화재A, 화성 동탄 메타폴리스 상가 화재 사고H, 2017년 5월 강릉-삼척-상주 산불H, 강릉 석란정 화재 사건?, 제천 스포츠센터 화재 사고?, 수원 광교 오피스텔 공사현장 화재사고?
2018년
종로 여관 방화 사건V, 밀양 세종병원 화재 사고A, 세브란스병원 화재 사고H, 인천 이레화학 화재E, 군산 유흥주점 방화 사건V, 세종시 아파트 공사장 화재 사고A, 인천 세일전자 화재 사고E, BMW 차량 연쇄 화재 사고A, 진관동 편의점 화재 사고H, 대한송유관공사 고양저유소 화재 사고H, 종로 고시원 화재 사고H, KT 아현지사 화재 사고?, 수원 골든플라자 화재 사고?
2019년
양양 산불H, 진주 아파트 방화·흉기난동 살인 사건V, 원주 중앙시장 화재A, 경북 구미 모텔 화재사고?, 천안 라마다호텔 화재사고?, 고양 성석동 폐기물 처리시설 화재 사고?, 대구 사우나 화재 사고A, 불광동 모델하우스 화재?,부산 해운대구 산불H, 포항 산불?, 고성-속초 산불A, 강릉-동해 산불A, 인제 산불H, 은명초 화재H, 김포 요양병원 화재 사고A
2020년대
2020년
2020년 춘천 산불H, 삼성전자 화성 반도체 공장 화재A, 울산 웅촌면 산불?, 울산 두서면 산불?, 제석산 산불A, 2020년 4월 경기도 수원 광교산 산불?, 군포 물류창고 화재 사건H, 2020년 4월 안동 산불H, 한익스프레스 이천 물류센터 화재 사고A, 2020년 5월 고성 산불A, 2020년 6월 양산 산불A, 파주 드라마 스튜디오 화재 사건?, 고흥 윤호21병원 화재 사고A, 죽굴도 화재 사건H, 용인 SLC 물류센터 화재 사건A, 인천 초등학생 형제 방임 및 화재 사건H, 울산 남구 삼환아르누보아파트 화재 사고?, 남양주 수진사 방화 사건V, 인천 남동공단 화장품 공장 화재?군포 아파트 화재사건E, 서울 마포 모텔 방화 사건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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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2월 양양 산불?, 2021년 정선 산불?, 2021년 하동 산불?, 2021년 안동 산불H, 2021년 영동 산불A, 2021년 예천·영주 산불?, 2021년 논산 산불?, 이천 쿠팡 덕평 물류센터 화재 사고A, 천안 주상복합 지하주차장 화재사고A, 고양 화정동 달빛마을 4단지 화재사고?, 2021년 11월 양양 산불H, 2021년 순천 산불?, 한마음마트 봉담점 화재사고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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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 반도체 금형부품 공장 화재?, 아산 귀뚜라미 보일러 공장 화재 사고?, 강원도 인제 남면 산불H, 평택 냉동창고 신축공사현장 화재 사고A , 2022년 경북 영덕 산불A, 2022년 구례 간전면 산불H, 2022년 대구 달성군 주암산 산불V,옥수역 화재 사건?, 2022년 울진-삼척 산불H, 2022년 3월 영월 산불?, 2022년 합천-고령 산불?, 2022년 강릉-동해 산불V/?, 2022년 남한산성 산불V?/H?, 2022년 경북 봉화 산불H, 2022년 4월 양구 산불H, 2022년 경북 군위 산불?, 2022년 대구 달서구 학산 산불?, 울산 에쓰오일 화재사고?, 2022년 5월 울진 산불H, 2022년 5월 밀양 산불? , 전북 남원 식품 공장 화재?, 대구 변호사 사무실 방화 사건V, 이천 관고동 병원 화재?, 대전 현대프리미엄아울렛 화재 사고?, 대구 동구 율암동 섬유공장 화재?, 강릉시 현무-IIC 미사일 낙탄 사고A, SK C&C 판교 데이터센터 화재로 인한 인터넷 서비스 장애 사건A, 대구농수산물도매시장 화재 사건? , 순천 폐기물처리시설 화재 사건? , 원주 폐기물사업장 화재?, 대구 가스충전소 폭발사고A , 2022년 대구 달서구 성서공단 화재? , 2022년 서울 남대문시장 화재? , 제2경인고속도로 갈현고가교 화재사고A
2023년
부산 부전동 오피스텔 주차타워 화재E , 2023년 강남구 구룡마을 화재?, 고양 존속살인 사건V , 2023년 예천 산불H , 2023년 김천 산불? , 2023년 영양 산불H , 2023년 순천 산불H, 2023년 대구 달서구 대덕산 산불? , 인천 현대시장 방화 사건V , 2023년 합천 산불H , 2023년 부여 산불H , 2023년 하동 지리산 산불?, 2023년 광주 운암산 산불H , 2023년 대전 목상동 한국타이어 공장 화재?, 2023년 상주 외남면 산불H, 2023년 광주 양동시장 인근 방화 사건V , 2023년 3월 평창 산불H, 2023년 순천 별량면 산불H , 2023년 서천 산불H, 2023년 안동시 도산면 산불?, 2023년 화천 군 사격장 산불H, 2023년 강화 마니산 산불?, 안산 선부동 빌라 화재사고A, 아산 둔포면 폐기물 야적장 화재?, 2023년 화천 화천읍 산불?, 2023년 포천시 영북면 산불H, 2023년 제천 봉양읍 산불H, 2023년 홍성 산불H, 2023년 옥천 군북면 산불H, 2023년 군위 소보면 산불H, 2023년 당진 대호지면 산불?, 2023년 서울 인왕산-북악산 산불?, 2023년 대전-금산 산불H, 2023년 보령 청라면 산불H, 2023년 고창 상하면 산불?, 인천 부평구 상가건물 화재 사고?, 2023년 함평 산불A, 2023년 순천 송광면 산불?, 2023년 영주 평은면 산불A, 서울 방이동 오피스텔 화재 사고?, 2023년 4월 강릉 산불A, 화순 백재활요양병원 화재 사고?, 밀양 한국카본 2공장 화재?, 김포 통진읍 열풍기 제조 공장 화재 사고?, 화성 팔탄면 플라스틱 제조 공장 화재?, 안동 북후면 식품 가공 공장 화재 사고A, 완주 알루미늄 가공품 생산공장 화재?, 인천 귤현동 비닐하우스 화재 사고?, 대구 중리동 재활용 공장 화재?, 부산 해운대 씨클라우드호텔 화재?, 화성 향남읍 자원순환시설 화재A, 부산 좌천동 목욕탕 폭발사고?, 부산 개금동 아파트 화재 사고?, 인천 논현동 호텔 화재 사고?, 서울 도봉구 아파트 화재 사고E

H: 사람에 의한 실화, V: 고의적 방화, A: 누전, 장비 고장, 가스 누출 등에 의한 사고, E: 그 외, ?: 원인 불명/조사중




역대 대한민국의 대형 사고 및 참사

[ 2020년대 ]
발생일
사망
사건명

2022년 10월 29일

159
이태원 압사 사고

2020년 4월 29일

38
}}}
[ 2010년대 ]
발생일
사망
사건명

2019년 5월 29일

27
헝가리 유람선 침몰 사고

2018년 1월 26일

47
밀양 세종병원 화재 사고

2017년 12월 21일

29
제천 스포츠센터 화재 사고

2014년 12월 1일

27
501오룡호 침몰사고

2014년 5월 28일

21
장성 효사랑요양병원 화재 사고

2014년 4월 16일

299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

2010년 3월 26일

46
천안함 피격 사건

}}}
[ 2000년대 ]
발생일
사망
사건명

2008년 1월 7일

40
이천 냉동창고 화재 사고

2003년 2월 18일

192
대구 지하철 참사

2002년 4월 15일

130
중국국제항공 129편 추락 사고

2001년 9월 25일

25
제7호 태창호 사건

2001년 7월 24일

20
진주 관광버스 추락사고

2000년 10월 27일

22
장수 88올림픽고속도로 추돌 참사
[ 1990년대 ]
발생일
사망
사건명

1999년 10월 30일

56
인천 인현동 호프집 화재 참사

1999년 6월 30일

23
씨랜드 청소년수련원 화재 사고

1998년 10월 29일

27
부산 범창콜드프라자 화재
1997년 8월 6일
228
대한항공 801편 추락 사고

1996년 7월 26일

20
철원 군부대 산사태

1996년 4월 4일

21
양평 버스 추락 사고

1995년 8월 21일

37
경기여자기술학원 화재

1995년 6월 29일

502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1995년 4월 28일

101

1994년 10월 24일

29
충주 제5호 화재사고

1994년 10월 21일

32
성수대교 붕괴 사고

1993년 10월 10일

292
서해훼리호 침몰 사고

1993년 7월 26일

68
아시아나항공 733편 추락 사고

1993년 6월 10일

20
연천 예비군 훈련장 폭발 사고

1993년 4월 19일

34
논산 정신병원 화재

1993년 3월 28일

78

1993년 1월 7일

28
우암 상가아파트 붕괴사고

1991년 11월 3일

22
인제 버스 추락 사고

1990년 11월 4일

21
소양호 버스 추락 사고

1990년 9월 1일

25
영동고속도로 섬강교 버스추락사고
}}}
[ 1980년대 ]
발생일
사망
사건명

1989년 9월 17일

24
전북 모래재 버스 추락 사고

1989년 7월 27일

79
대한항공 803편 추락 사고

1987년 11월 29일

115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

1987년 8월 29일

32
오대양 집단자살 사건

1987년 6월 16일

29
극동호 유람선 화재 사건

1986년 7월 30일

21
고창 거룻배 전복 사고

1985년 1월 11일

38
양강교 버스 추락사고

1984년 1월 14일

38
부산 대아호텔 화재 사건

1983년 10월 9일

25
아웅 산 묘소 폭탄 테러 사건

1983년 9월 1일

269
대한항공 007편 격추 사건

1983년 4월 18일

25
대구 초원의집 화재
1982년 6월 1일
53
청계산 C-123 추락사고

1982년 4월 26일

62
우순경 사건
1982년 2월 5일
53
제주 C-123 추락사고

1981년 11월 22일

33
부산 금정산 버스 추락사고

1981년 5월 14일

55
경산 열차 추돌사고
}}}
[ 1970년대 ]
발생일
사망
사건명

1979년 10월 27일

26
은성탄광 화재

1979년 4월 14일

44
함백 탄광 폭발사고

1978년 7월 23일

33
한강대교 버스 추락 사고

1977년 11월 11일

59
이리역 폭발사고

1976년 10월 28일

34
동해 어선 조난 사고

1976년 5월 18일

23
답곡리 버스 추락사고

1976년 2월 28일

32
화천 버스 추락사고

1974년 11월 3일

88
대왕코너 화재사고

1974년 2월 22일

159
YTL30호 침몰 사건

1973년 8월 12일

32
영동역 유조열차 폭발 사고

1973년 5월 16일

22
영일 건널목 열차 추돌사고

1972년 12월 2일

53
서울시민회관 화재 사고

1972년 8월 1일

26
의암호 버스 추락 사고

1971년 12월 25일

166
대연각호텔 화재

1971년 10월 13일

20
남원역 열차 추돌사고

1971년 5월 10일

80
청평호 버스 추락 사고

1971년 5월 10일

31
질자호 침몰 사고

1970년 12월 15일

326
남영호 침몰사고

1970년 11월 5일

31
의암호 선박 전복 사고

1970년 10월 14일

46
모산 수학여행 참사

1970년 8월 21일

25
추풍령 고속버스 추락 참사

1970년 4월 8일

33
와우 시민아파트 붕괴사고
[ 1960년대 ]
발생일
사망
사건명

1969년 9월 17일

76
창녕 남지읍 나룻배 전복사고

1969년 9월 17일

37
창녕 기관선 - 남지교 충돌 사고

1969년 1월 31일

41
천안 열차 추돌사고

1968년 1월 8일

41
함양 버스 추락사고

1967년 10월 16일

42
금릉 버스 추락 사고

1967년 9월 15일

29
삼양수산 원양어선 침몰 사고

1967년 4월 8일

80
서울 청구동 C-46 추락사고

1967년 1월 14일

93
한일호-충남함 충돌 사고

1967년 1월 1일

41
서문시장 화재

1964년 7월 29일

95+
서해 어선단 실종 사고

1963년 10월 23일

49
여주 조포 나룻배 침몰 사고

1963년 6월 25일

70
거제 장승포 산사태

1963년 1월 18일

140
연호 침몰 사건

1962년 9월 7일

36
한남동 나룻배 침몰 사고

1960년 3월 2일

62
부산 국제고무공장 화재

1960년 1월 26일

31
서울역 압사 사고

}}}
[ 1950년대 ]
발생일
사망
사건명

1959년 7월 17일

67
부산 공설운동장 압사 사고

1956년 1월 12일

66
태신호 화재

1955년 3월 2일

42
부산역 열차 화재

1953년 11월 27일

29
부산역전 대화재

1953년 1월 31일

56
오산 건널목 추돌 사고

1953년 1월 25일

66
행운환 침몰사고

1953년 1월 9일

330
창경호 침몰 사고

1951년 7월 11일

94
제5편리호 침몰 사고

1951년 7월 11일

30+
제13호 침몰 사고

}}}
[ 1940년대 ]
발생일
사망
사건명

1949년 10월 5일

71
평해호 침몰 사고

1949년 8월 18일

51
대강 터널 질식 사고

1947년 8월 19일

23
태양환호 침몰 사고

1946년 11월 13일

42
영등포역 열차 충돌 사고

1945년 8월 24일

{{{#!wiki style="margin: 0px -10px"
549​~� 이상
우키시마호 사건



[1] 국과수와 대법원의 결론.[2] 유가족과 전문가 및 인근 주민들이 내린 결론.[3] 인솔교사 1명, 씨랜드 소속 레크레이션 강사 3명 포함.[4] 서울특별시강동송파교육지원청에 의해 당일 강제 폐원 조치되었으며 사고 이후에는 일반 상가로 존재하고 있다. 송파구 동남로6길 16(문정동 30-16)에 있었으며 이 건물에는 사고 이후에도 소망유치원의 간판 흔적이 남아 있다.[5] 동안구 호계동(경수대로 653, 호계동 933-10) 위치. 예그랑유치원으로 개칭 후 2021년에 해당 지구 재건축으로 인해 폐원했다.[6] 송내뉴서울아파트(경인로 53번길 46) 위치. 현재도 운영 중이다.[7] 당연히 상기 유치원들을 다 합쳐서 47명이다.[8] 희생된 유치원생 중 18명은 소망유치원생이었으며 나머지 1명은 2층에서 투숙했던 이월드영어학원 원생이었다.[9] 4개월 터울로 발생한 이 두 사건으로 많은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피해를 당하자 씨랜드 사건으로 소망유치원에 다녔던 일곱 살짜리 아들 김도현 군을 잃은 1988 서울 올림픽 하키 여자부 은메달리스트 김순덕은 대한민국에 환멸을 느껴 현역 시절 정부로부터 받은 훈장과 메달을 모두 반납하고 뉴질랜드로 영구이민을 떠났다. 15년 후 또다시 청소년들이 대거 희생당한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가 터지자 그녀의 뉴질랜드 이민이 재조명되었다.[10] 그나마도 제대로 된 MDF나 O.S.B 같은 제품이 아니라 톱밥을 압축해서 만든 저급한 제품이었다.[11] 출처: 2000도1858. 실제로 이 사고 뒤에 충남 천안 농가에서도 모기향 때문에 불이 나 인명피해가 났다.[12] 물론 위에 언급한 비리는 별개로 처벌받아야 하지만 모기향이 원인으로 지목되는 순간부터 원장에게 비판이 가해질 것이니 언론들도 자연스럽게 원장을 비판할 것이고 공무원들은 그만큼 빠져나올 탈출구가 생기는 셈이다.[13] 당연히 직선거리가 아니라 도로사정 상 거리이다. 이 거리는 서울의 가장 동쪽에 있는 강동구에서부터 인천공항까지의 거리나 부산부터 경주까지의 거리다. 어째서 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었냐면 당시 오산소방서에서 화성군까지 다 맡았기 때문이다. 원래 오산은 화성군의 중심지였고 당시 화성군청도 오산시에 있었으나 오산은 화성의 동편에 치우쳐 있었다. 사고 장소는 화성에서도 서쪽 끝인 데다 직선거리로도 30km 이상이었다. 가장 가까운 파견소(현재의 119지역대)는 9km 거리에 있었으나 정규 소방관이 단 1명밖에 없었다. 때문에 이전부터 계속 인원을 충원해야 한다는 보고를 올렸으나 상부에서 묵살되었고 결국 씨랜드 화재 참사로 이어졌다. 화성소방서는 그로부터 9년이 지난 2008년에야 생겼다. 2020년대에도 인력 부족으로 고통받는 소방인데 1999년에는 오죽했을까.[14] 사고 지점과 현재 화성소방서 본부가 위치한 향남읍 기준으로도 30분 정도가 걸린다. 그나마 지금은 고속도로가 깔려 있기 때문에 제한속도를 무시하고 달리면 참사 당시보다는 훨씬 빠르게 도착할 수 있다.[15] 사고 직후 소망유치원 원생 희생자 유가족들이 화재 현장을 돌아보기 위해 서울 송파구가 대절한 대형 버스를 타고 현장 입구로 향했는데 버스가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길이 좁아서 유가족을 태운 버스가 현장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대형 버스가 진입하지 못했으니 버스보다 차폭이 더 넓고 육중한 소방차가 들어갈 리는 만무했다. 이 도로 상황을 본 유가족은 "수련원에 들어가는 정문(입구)부터 이렇게 허술한데 어떻게 당국의 허가를 받은 것이냐?!"고 분통을 터뜨렸다. 이 모습은 2021년 12월 9일에 방영된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의 자료 화면으로도 등장했다.[16] 게다가 소방서 소속 차량이 노후 차량이었던 관계로 출력이 낮아 제 속도를 낼 수 없었다.[17] 소방관 249명에 공무원 200명 등등. 경찰도 50명 이상이 동원되었다.[18] 이것도 추측에 불과하고 공식적으론 그날 밤 화재 당시 소망유치원 교사들이 어디에 있었는지는 지금도 불명이다. 증언이 워낙 제각각인데다가 행적을 확인해줄 건물 내외 CCTV도 없었기 때문에 건물 밖에 있었는지, 안에 있었다면 어디 있었는지 확실하게 알려진 게 없다. 확실한 건 그날 밤 교사들이 술을 마셨다는 것과 화재 발생 당시 314호에는 커녕 그 근처에 단 한 명도 없었다는 것.[19] 후에 소망유치원 원장은 "선생님들이 회의 중이어서 불이 난 것을 알지 못했다"는 말도 안 되는 변명만 늘어놓기에 급급했다.[20] 당시 교회 식당에서 아이들 곁에서 점심식사를 지도하고 있던 교사는 방문 목적이 불분명한 외부인이 지하주차장과 연결된 출입문을 열고 불쑥 들어오자 무섭다는 생각과 빨리 원감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 한다는 생각만이 앞서 아이들을 식당에 방치하고 1층으로 올라갔고 주방 아주머니도 무섭다는 생각에 범행 도구로 사용될 수 있는 식칼을 주방에 방치하고 아이들을 그대로 둔 채 도망치듯 1층에 올라갔다.[21] 소화기의 강력한 수압에 건물이 붕괴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결국 불타는 도중에 2층 컨테이너가 일부 주저앉았다.[22] 1997년 외환 위기 직후여서 대한민국의 경제가 매우 안 좋았기에 경제를 조금이라도 살려 보자는 생각에서 했던 거다. 그러나 당장의 경제 회복에 주안점을 두다 보니 반드시 필요한 규제들까지 경제 살리기라는 명분 하에 완화되어 버렸다.[23] 나이가 아직 어리기 때문에 자칫 사소한 부주의라도 엄청난 사고로 이이질 수 있는 데다 위기 대처 능력도 전혀 없기 때문. 사실 초등학생이라 해도 저학년(1~2학년) 학생들은 수련 활동을 꺼리는 편이다. 일선 학교뿐만아니라 성당이나 교회 주일학교 등에서 시행하는 숙박형 수련회라든가 여름캠프도 대부분 고학년(초등학교 5~6학년) 부터 참여하도록 지침을 두고 있다.[24] 게다가 일부 극성스러운 부모들은 자녀의 여름캠프 등을 시행할 것을 유치원 측에 요구하기도 했으며, 심하면 아예 유치원을 옮기겠다는 협박 아닌 협박을 하기도 했다. 2010년대에는 세월호 사건에 코로나 사태 등이 터지자 학부모들이 학교에서의 단체 체험학습에다 수학여행에 자녀를 보내기 불안하다며 학기 중 가족체험학습을 신청하거나 아예 자녀 몰래 수학여행을 뒤따라가는 경우도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지금하고는 완전히 딴판이었던 것.[25] 문제는 이러한 지시가 권고 내지는 계도 수준에 불과하다 보니 원장들이 말을 듣지 않았다는 것이다.[26] 사고 직후 피해자 가족들이 아이들을 확인하러 국과수로 찾아왔지만 국과수 측에서 시신 훼손이 너무 심해 부모라도 알아보기 어려울 것이라며 가족들을 만류했다고 한다. 이는 세월호 참사와 대구 지하철 참사 직후에도 마찬가지였는데 세월호는 시신이 물속에서 부패해 알아볼 수 없었다고 하고 대구 지하철의 경우엔 아예 화장장 수준의 초고열로 전동차가 전소되어 전동차 내에 유골밖에 남지 않았다고 한다.[27] 나중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송영규 관장은 301호에 있던 아이들을 다 구하지 못했다는 것을 뒤늦게 알고 심한 죄책감에 시달렸다고 한다. 이후 김영재 교사의 출신 고교인 목포고등학교와 마도초등학교를 주축으로 장학 활동 등 김영재 교사를 잊지 않기 위한 활동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으나 현재는 확인되는 것이 없다. 한편 그의 모교인 목포고등학교에서는 추모비를 건립하고 매년 추모 행사를 통해 고인을 기린다고 한다.[28] 당시 소망유치원 원장이었던 최경자 원장은 유치원 일을 접고 종교에 귀의했으며 인솔교사였던 한 교사는 어린이집에서 하는 야외 견학이나 현장 실습 체험에는 빠진다고 한다. 그러나 평생에 걸쳐 속죄하기에는 이미 그들은 너무 큰 업보를 지어서 대부분의 여론은 싸늘할 뿐이었다.[29] 이 인간은 "왜 건물을 이렇게 올렸냐?!"고 물어보자 돈 아끼려고 그랬다고 진술했다.[30] 다만 관련 혐의로 잡혀갔지만 그 부분은 무혐의가 되었고, 다른 비리 혐의로 구속영장이 신청되었다.[31] 반면 김영재 교사의 영결식은 마도초 교정에서 먼저 거행됐다.[32] 예외적으로 김영재 교사와 채덕윤 강사는 용인공원묘지와 수원공설묘역에 각각 안장되었다. 이후에도 매년 추모식이 끝나면 유족들이 아이들의 넋을 달래기 위해 아이들의 유골이 뿌려진 동해로 갔다. 10주기 당시 동해에 찾아갔다고 보도된 기사 다만 15주기인 2014년에는 세월호 참사 등을 고려해 생략했다고 한다. #[33] 그마저도 2쪽은 사진 한 장만 달랑 있다. 즉, 내용이 담긴 페이지라고는 5쪽밖에 되지 않는다.[34] 당일로부터 2일 전에 시로 승격되었다.[35] 고가현&나현 자매. 사고 당일이 쌍둥이 딸들의 생일 3일 전이었다.[36] 1963년생. 당시 제약회사에 근무하고 있었다.[37] 의도가 좋으면 되는 것 아니냐는 의견과 사건사고를 다루는 타 방송에게 맡겨야지 본 방송이 굳이 사용해야 할 소재는 아니라는 의견으로 갈렸다.[38] 화마 속에서 최선을 다해 아이들을 구출한 송 관장 부부에 대해 백지영은 '영웅'이라고 평했다. 실제로 송영규 관장이 재빨리 이 사태를 알리지 않았거나 송 관장 부부의 노력이 없었다면 더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송영규 태권도 관장은 처음엔 아이들이 전부 무사히 구출된 것으로 알고 있었다가 301호실에 있었던 18명의 아이들이 사망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전해듣고 큰 충격을 받았으며 자신이 미처 그 301호실의 아이들을 구해내지 못했다는 것이 사건으로부터 20여 년이 지난 후에도 상당한 PTSD로 남았다고 한다.[39] 다만 이야기 친구 3명 모두 방송 초반에는 사건에 대해 잘 모르는 듯한 반응을 잠깐 보였는데, 위에도 언급되었듯 당시 상대적으로 개발이 덜 된 지역에서 발생한 사건인 데다 얼마 못 가 다른 이슈들로 인해 묻혔다는 점도 있고 특히 비비의 경우 사건 발생 1년 전인 1998년에 출생했으므로 사건에 대해 어렴풋이 들어보기는 했을지 몰라도 사건에 대해 구체적으로는 잘 알지 못했을 것이다.[40] 이날 출연한 이야기 친구 3명 중에서 백지영의 감정 표현이 가장 강렬했다. 그도 그럴 것이 백지영도 한 아이의 엄마이기 때문인데 이 사고로 희생당한 어린이들의 연령대가 방송 시점 기준으로 백지영의 딸의 나이(5세)와 비슷했다. 자신의 자녀와 비슷한 나이대의 어린이들이 어른의 부주의로 목숨을 잃었기에 더 크게 공감했다는 분석이다. 또한 백지영 자신도 과거 유산으로 한 번 아이를 잃은 경험이 있기 때문에 이렇게 어린이들이 희생되는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항상 안타까워한다고 알려져 있다. 그리고 백지영에게 묻혔지만 진행자인 장성규 또한 두 아들을 둔 아빠이다 보니 눈물을 참으면서 진행을 이어가는 장면이 종종 잡혔다.[41] 세라 양이 캠프 전날부터 잊지 않고 챙겼을 정도로 가장 아끼던 잠옷이었다고 한다.[42] 특히 그동안 꼬꼬무를 진행하면서 장도연이 이렇게까지 이야기를 진행하기 힘들어한 적도 없었다. 그만큼 너무나 화나고 슬퍼할 사건이니... 세일러문 잠옷으로 시신을 확인한 이야기는 결국 자막으로 대체되었다.[43] 이때 출연자들 외에 제작진들도 함께 눈물을 흘리면서 녹화가 지연되었다는 후문이 있으며 당시 상황을 증언하던 김세라 양의 아버지도 이 부분을 이야기하다 끝내 울음을 터트리면서 인터뷰가 잠시 중단되기도 했다.[44] 중간에 화재 전과 후의 수련원을 촬영한 자료 사진을 보다가 종잇장처럼 구겨진 2, 3층 컨테이너의 모습에서는 3명 모두 "이런 곳에서 아이들을 재웠느냐"며 경악했다. 덧붙여 욕설이 나간 부분은 당시 수련원장이 돈을 아끼기 위해 건물을 부실하게 지었다고 증언한 대목이었다.[45] 당시 30대였던 부모들은 2021년에는 50이 넘는 중년이 되어 환갑을 앞두게 되었다.(30대 후반일 경우 환갑을 맞이했다.)[46] 희생된 어린이들의 연령대는 모두 세는나이로 6~7세였으므로 만약 생존했다면 2023년 기준으로 세는나이 29~31세로 한창 사회적으로 활발하게 활동할 연령대다.[47] 사고 이후 뉴질랜드로 이민을 떠난 전 여자 하키 국가대표인 김순덕 씨의 아들.[48] 이 둘은 한국어린이안전재단의 설립자이자 현 대표인 고석 씨의 딸인 일란성 쌍둥이 자매로, 둘의 생일인 7월 3일을 불과 사흘 앞두고 참변을 당하고 말았다.[49] 원래는 여름캠프 참가를 희망하지 않았던 원생이었으나(송이 양의 어머니 또한 아이가 감기에 걸렸다면서 캠프 참가를 만류했다)로 아버지의 "감기 따윈 가서 뛰놀면 낫는다"는 말로 인해 캠프에 참여하게 되어 참변을 당했다.[50] 송이 양의 아버지는 해당 사고 이후 "어린 딸을 사지로 보낸 것에 대해 그저 용서를 구하는 것을 되풀이 할 뿐, 어찌하면 좋을 지 모르겠다"며 울먹이기도 했다.[51] 1965년생. 천경자 원장의 남편으로, 당시 국가정보원 서울지부에서 24시간 근무 후 이틀을 쉬는 경비원으로 재직 중이었는데 비번날이었던 사고 당일 인솔 교사들의 회포를 풀기 위해 맥주하고 소주, 삼겹살, 수박 등을 사들고 찾아갔던 것으로 확인됐다고 말했다. 따라서 김 씨는 사고 당시 인솔 교사들에게 술자리를 제공하여 물의를 빚는 바람에 국가정보원 측으로부터 7월 2일 부로 사직 처리되고 말았다. 참으로 기가 막히고 낮 뜨거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후 근황은 불명.[52] 문정동 30-16. 소망유치원은 이 건물 2층에 있었다. 사건 이후에도 이 건물 자체는 남아 있고 상가로 활용되고 있으며 건물 외벽에 소망유치원 간판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53] 2층에서 유일하게 희생된 원생. 해당 학원 측에서는 화재 당시 방 안에 있던 모든 원생들을 깨워서 밖으로 데리고 나왔다고 발언했으며 이 중 김혜지 양이 대피하면서 소지품인 가방을 두고 나왔던 사실을 떠올려 다시 가져오려고 223호로 돌아갔다가 불길에 휩싸여 변을 당했을 것이라고 진술했다.[54] 피해 원생의 부모는 주변 아이들과 곧 잘 어울리며 붙임성 있고 다부진 성격에 집안의 웃음꽃이나 다름없던 막내 딸인 혜지 양의 사고 소식을 접한 충격과 슬픔 및 시종일관 변명을 거듭하며 무책임한 태도를 보였던 이월드 학원 관계자들에 대한 분노의 감정을 감추지 못했다.[55] 1993~1994년생[56] 그 뒤 동생인 윤두나(지연)도 작중 초반에 학교 일진들이 일부러 불을 질러 화재가 난 건물 안에 갇혀 생을 마감했다.[57] 이 참사 1년 후에는 추풍령 경부고속도로 연쇄추돌 참사가 터지면서 수학여행이 2년씩이나 취소되는 사태가 일어났다.[58] 오늘의 주요뉴스 영상을 보면 자막이 평소보다 2배는 크게 나왔음을 알 수 있다. 사고의 심각성을 드러내는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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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06 12:05:04에 나무위키 씨랜드 청소년수련원 화재 사고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