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녜스 바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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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녜스 바르다의 주요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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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베네치아 영화제
파일:베니스 국제 영화제 로고.svg
황금사자상
제41회
(1984년)


제42회
(1985년)


제43회
(1986년)

크쥐시토프 자누쉬
(태양의 해)

아녜스 바르다
(방랑자)


에릭 로메르
(녹색 광선)

역대 베를린 영화제
파일:베를린 국제 영화제 로고.svg
은곰상 : 심사위원대상
제14회
(1964년)


제15회
(1965년)


제16회
(1966년)



아녜스 바르다 / 로만 폴란스키
(행복) / (혐오)

잉베 감린 / 피터 스카모니
(더 체이서즈) / (노 슈팅 타임 포 폭시스)


아녜스 바르다
Agnès Varda

파일:agnesvarda.jpg

이름
아녜스 바르다 (Agnès Varda)
국적
파일:프랑스 국기.svg 프랑스 | 파일:벨기에 국기.svg 벨기에
출생
1928년 5월 30일
벨기에 브뤼셀 익셀
사망
2019년 3월 29일 (향년 90세)
프랑스 파리
학력
소르본 대학교 문학, 심리학 전공 루브르 학교 예술사 전공
직업
영화 감독 , 설치 예술가 , 사진가
배우자
자끄 드미
자녀
마티외 데미 , 로잘리 바르다

1. 개요
2. 경력
3. 사망
4. 필모그래피
5. 한국에서 서울국제여성영화제



1. 개요[편집]


파일:youngvarda.jpg
1960년대 젊은 시절

one of the Gods of Cinema

영화의 들 중 한 명.

- 마틴 스코세이지, 2019년 #


벨기에 출신 프랑스 영화감독. 2010년대에도 여전히 꾸준한 활동을 보였던 노익장 감독이기도 했다. 누벨바그를 이끌었던, 정확히는 누벨바그 분파 중 센 강 좌안파[1]에 속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2. 경력[편집]


브뤼셀에서 엔지니어 아버지와 주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원래 이름은 아를렛이였으나 19살에 개명해서 지금 이름으로 바뀌었다고. 부계 혈통은 아나톨리아 출신 그리스인이라고 한다.[2] 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소르본 대학에서 문학과 심리학을 전공했다.

사실 영화광들로 유명했던 다른 누벨바그 감독들과 달리 처음엔 영화랑 별 인연이 없었다고 한다.[3] 문학이나 미술을 좋아했지만 처음엔 큐레이터가 될 생각이었다고 한다. 이후 에콜 드 보자르에서 사진을 공부하긴 했지만 그때도 영화 감독이 될줄은 몰랐다고 한다.[4] 1955년 데뷔작 라 푸앵 쿠르트로의 여행도 영화로 찍을 생각은 없었고, 라 푸앵 쿠르트 사진을 찍어서 친구에게 전할 생각이었다. 그러다가 즉흥적으로 영화 카메라를 빌려 다큐멘터리와 전문 배우를 캐스팅해 픽션을 엮어서 영화를 만들었다.

14,000달러 저예산으로 빠르게 찍었던 라 푸앵 쿠르트로의 여행은 카예 뒤 시네마 세대보다도 5년 일찍 새로운 영화를 발명했다는 평가를 받으며 바르다를 주목받는 감독으로 만들었다. 편집 과정에서 알랭 레네나 알랭 로브그리예 같은 좌안파 멤버들을 만나 친해지고, 훗날 남편이 되는 자크 드미[5]을 비롯해 애증의 장뤽 고다르[6], 프랑수아 트뤼포, 에릭 로메르 같은 누벨바그 멤버들도 알게 된다. 그렇게 두번째 영화 5시부터 7시까지의 클레오행복을 통해 아녜스는 페미니즘적 주제와 사회비판, 다큐멘터리와 극영화 간의 경계 허물기 같은 진보적인 실험을 내세워 평단의 지지를 받았고 후배 샹탈 아케르만과 더불어 현대 여성 영화 감독의 선구주자가 된다.

이후 '노래하는 여자, 노래하지 않는 여자', 제인 버킨샬롯 갱스부르 모녀가 바르다의 아들인 마티유 드미가 출연한 아무도 모르게라던가 [7] 상드린 보네르가 주연해 히트쳤던 방랑자 같은 영화를 발표하면서 활동했다. 자크 드미가 세상을 떠난 1990년대부터 천일야화를 마지막으로 극영화는 손을 뗐지만 되려 2000년대에는 이삭줍는 사람과 나를 통해 다큐멘터리로 활동 무대를 전환하면서 DV/디지털 영화의 새로운 경지를 열였다는 평단의 찬사를 받았다. 나이가 나이인지라 이전보다 느긋하게 활동하고 있지만, 여전히 정정한 모습을 보이면서 2017년 공동 감독 JR과 함께 신작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을 내놓았다.

영화 주제로 보자면, 여성의 위치에서 페미니즘적인 고찰과 비판[8]과 극영화와 다큐멘터리 간의 모호한 경계, 마르크스적 고찰, 이면화 작업을 특징으로 꼽는다. 이외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는데 적극적이어서, 2000년대 이후로 디지털 매체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페드로 코스타 같은 혁신적인 디지털 다큐멘터리 흐름에 동참하기도 했다.

여성 영화인들에게 매우 존경받는 감독인데, 바르다 데뷔 이전까지 여성 영화 감독은 알리스 기블라셰 [9], 도로시 아즈너나 아이다 루피노, 자클린 오드리 같은 케이스를 제외하면 감독 되기도 힘들었고 잘 눈에 띄지 않았다. 바르다는 그 점에서 여성 감독의 선구자적인 가능성을 선보였고, 현역으로 오랫동안 활동을 이어갔기에 존경받는다. 더불어 자크 드미와 함께 누벨바그 세대 감독 중에서는 유일하게 할리우드에 정착해 활동한 적이 있는 감독인지라[10], 할리우드에서도 인지도가 높은 감독이다.

자식으로는 감독이자 배우로 활동하는 아들 마티유 드미와 프로듀서인 딸 로잘리 드미가 있다. 자식사랑이 지극한지 자식들의 모습을 기록하고 싶어서 영화에 출연시켰다라고 밝히기도 했다.

본인도 유명한데다 남편 자크 드미 역시 프랑스에서 흥행 감독으로 입지가 있어서 젊은 시절 사진들을 보면 카트린 드뇌브제인 버킨을 비롯한 쟁쟁한 스타들과 같이 찍은 사진들이 자주 나온다. 의외로 고급 에로 영화로 유명했던 잘만 킹 부부하고 친했다고 한다. 때문에 장례식 전 추모 행사에도 드뇌브를 비롯해 마리옹 코티야르기욤 카네, 상드린 보네르, 자크 오디아르, 제인 버킨 같은 명사들이 얼굴을 보였다.


3. 사망[편집]


2019년 3월 29일 암 합병증으로 타계하였다. 유작은 아녜스가 말하는 바르다.[11]


4. 필모그래피[편집]


연도
제목
연출
각본
제작
비고
1955
라 푸앵트 쿠르트로의 여행
La Pointe-Courte
O
O

데뷔작
1958
오페라 무페 거리
L'opéra-mouffe
O


단편
1958
오 계절들이여, 오 성(城)들이여
Ô saisons ô chateaux
O


다큐멘터리, 단편
1958
해변에서
Du côté de la côte
O


다큐멘터리, 단편
1958
라 코코테 드 아주르
La cocotte d'azur
O


다큐멘터리, 단편
1961
맥도날드 다리의 연인들
Les fiancés du pont Mac Donald ou (Méfiez-vous des lunettes noires)
O


단편
1962
5시부터 7시까지의 클레오
Cléo de 5 à 7
O
O


1963
안녕, 쿠바인들
Salut les Cubains
O


다큐멘터리, 단편
1965
행복
Le bonheur
O
O


1965
크리스마스 캐롤
A Christmas Carol
O


단편
1966
창조물들
Les créatures
O
O


1966
엘자 라 로즈
Elsa la rose
O


다큐멘터리, 단편
1967
머나먼 베트남
Loin du Vietnam
O


다큐멘터리, 옴니버스 영화 참여작
1967
얀코 삼촌
Oncle Yanco
O


다큐멘터리, 단편
1968
블랙 팬서
Black Panthers
O


다큐멘터리, 단편
1969
라이온의 사랑
Lions Love
O
O


1971
나우시카
Nausicaa
O


TV 영화
1975
다게레오타입
Daguerreotypes
O


다큐멘터리
1975
여성의 대답: 우리의 몸, 우리의 섹스
Réponse de femmes: Notre corps, notre sexe
O


다큐멘터리, 단편
1976
이란에서의 사랑의 즐거움
Plaisir d'amour en Iran
O


다큐멘터리, 단편
1977
노래하는 여자, 노래하지 않는 여자
L'une chante l'autre pas
O
O


1981
벽, 벽들
Mur murs
O


다큐멘터리
1981
도큐멘추어
Documenteur
O



1983
율리시스
Ulysse
O


다큐멘터리, 단편
1984
여인상 기둥 이야기
Les dites cariatides
O


다큐멘터리, 단편
1984
방7, 부엌, 그리고 욕실
7 P., cuis., s.de b...
O


단편
1985
방랑자
Sans toit ni loi
O
O


1986
시네마테크의 계단
T'as de beaux escaliers, tu sais...
O


단편
1988
아무도 모르게
Kung-fu master!
O
O


1988
아녜스 V에 의한 제인 B
Jane B. par Agnès V.
O
O


1991
낭트의 자코
Jacquot de Nantes!
O
O


1993
로슈포르, 25년 후
Les demoiselles ont eu 25 ans
O


다큐멘터리
1995
시몽 시네마의 101일 밤
Les cent et une nuits de Simon Cinéma
O
O


1995
자크 드미의 세계
L'univers de Jacques Demy
O


다큐멘터리
2000
이삭줍는 사람들과 나
Les glaneurs et la glaneuse
O


다큐멘터리
2002
이삭줍는 사람들과 나... 2년 후
Les glaneurs et la glaneuse... deux ans après
O


다큐멘터리
2004
시네바르다포토
Cinévardaphoto
O


다큐멘터리
2006

Quelques veuves de Noirmoutier
O


다큐멘터리
2011
아녜스의 해변
Les plages d'Agnès
O


다큐멘터리
2011
여기저기의 아녜스 바르다
Agnès de ci de là Varda
O


다큐멘터리
2017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
Visages villages
O


다큐멘터리, 공동 감독
2019
아녜스가 말하는 바르다
Varda par Agnès
O


다큐멘터리, 유작


5. 한국에서 서울국제여성영화제[편집]


한국에는 2007년 서울국제여성영화제로 내한한 적이 있었다. 2017년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이 같은 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되었을때, 건강 문제로 내한하지 못했지만 축사 영상을 찍어 보냈다. 직후 개봉할때도 공동 감독 JR과 함께 다시 한번 축하 영상을 찍어 보내기도 했다.

참조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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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로 센 강 좌측에 거주했고, 좌파적인 정치 견해를 보였기에 붙은 분파로 누벨바그보다 훨씬 일찍 활동했으며 문학 사조인 누보로망과 연계되는 경향이 강하며 기억에 대한 고찰과 영화의 형식을 실험하는 난해하고 급진적인 스타일로 유명했다. 알랭 레네, 크리스 마르케, 장 마리 스트로브, 알랭 로브그리예, 마르그리트 뒤라스가 이 분파에 속한다.[2] 아녜스의 삼촌은 유명한 화가였던 장 바르다였고, 아녜스가 다큐멘터리를 찍기도 했다.[3] 그나마 에릭 로메르가 비슷하게 영화랑 연관이 없었다.[4] 관련된 일화가 있는데, 데뷔작 편집을 맡았던 알랭 레네는 영화를 보고 루키노 비스콘티의 흔들리는 대지하고 닮았다고 말한 바 있다. 이에 대한 바르다의 대답은 비스콘티가 누구임?였고 레네가 당황했다고. 바르다는 데뷔작의 혁신성을 영화광적 지식과 상관없이 그냥 스스로 발명해버린 셈이다. (본인은 윌리엄 포크너를 예로 들었다.) 바르다 본인도 레네 때문에 영화에 대한 지식을 배웠다고 밝힌바 있다. 참고로 25살에 본 영화가 딱 10편 정도였는데, 그 중엔 오슨 웰스시민 케인도 있었다고 한다.[5] 쉘부르의 우산으로 유명하다.[6] 마지막 누벨바그 생존자라는 공감대가 있고 초기엔 바르다 영화를 칭찬하기도 했으나, 고다르 성격이 워낙 오만하고 까칠한지라 불화가 있다. 평소에도 별로 만나지 않는 듯 하며 2017년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에서 혹시나 하고 스위스에 사는 고다르를 찾아갔다가 문전박대 당하고 디스하는 장면이 있을 정도[7] 비화로, 버킨이 아이디어를 제안하고 각본을 쓴 영화였는데 버킨이 딸 샤를로트 갱스부르를 출연시키자 아녜스 역시 아들 마티유 드미를 데려와 주연을 시켰다고 한다. 원래 호텔에서 베드신이 있었다고 하는데, 친구와 자기 아들의 러브신 장면을 찍는게 영 거시기했는지 아녜스가 잘라버렸다. 이에 버킨이 항의하자 "마티유랑은 절대 안 돼, 할 거면 감독 직접 해"라고 대응했다고.[8] 다만 바르다는 페미니스트 사이에서도 상당히 논쟁적인 감독이였다. 극영화 시절엔 아이러니와 은유, 모순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전형적인 여성상을 인식하고 비판하는 페미니즘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특히 언제든지 대체될수 있는 가부장 체제의 여성의 위치를 아이러니로 비판한 행복은 공개 당시 마지막에 패배한 주인공 결말로 불편한 반응과 동시에 가부장제의 불륜을 옹호하는거 아닌가라는 논란이 있었다.[9] 영화 태동기에 데뷔하여, 극영화를 만들면서 여성 영화인의 시초로 꼽힌다. 정작 본인은 2000년대에야 본격적으로 재발굴된 불운의 감독이기도 하다.[10] 의외로 누벨바그 감독들은 전성기에도 프랑스에 남아서 활동했다. 영어 영화 역시 고국이나 영국에서 주로 찍었다. 가장 할리우드 친화적이었던 트뤼포조차도 화씨 451에서 영어 영화 만들기의 곤란함을 겪고 줄곧 프랑스 영화만 찍었다.[11] 아녜스 바르다의 해변 후속 다큐멘터리로 2010년대 이후 작업들과 회고를 다룬다. 베를린 영화제 비경쟁 부문에서 공개되었다. 바르다의 방랑자로 함께 작업한 상드린 보네르가 오래간만에 출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