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부 이난 파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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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치세
2.1. 지브롤터 공방전 (1349-50년)
2.2. 마그레브 재통일과 죽음



1. 개요[편집]


أبو عنان فارس بن علي
아부 이난 파리스 빈 알리[1]

생몰 1329년 ~ 1358년 1월 10일
재위 1348년 봄 ~ 1358년 1월 10일

마린 왕조의 11대 군주. 부왕 알리의 튀니지 원정의 실패를 틈타 반란을 일으켜 2년의 내전 끝에 술탄에 올랐다. 부왕처럼 틀렘센, 튀니지 순서로 원정한 그는 역시 성공을 거두지만 더 빨리 실패하였다. 와병하여 페스로 돌아온 그는 1358년 와지르에게 암살되었고, 아들들이 내전을 벌이고 틀렘센의 자얀 왕조가 재차 독립하며 마린 조는 한세기에 걸친 쇠퇴의 길에 접어들었다.


2. 치세[편집]


파일:모로코 디나르 2.jpg
파일:모로코 자위야.jpg
파리스의 디나르 금화 / 1356년 살레에 건설한 자위야 앗 누사크

아불 하산 알리의 차남 파리스는 1339년 형 압둘 말리크가 사망하자 후계자가 되었고 틀렘센 총독이 되었다. 그러던 1348년 튀니지에서 일어난 반란으로 부왕이 위기에 처하자 수도 페스로 돌아가 술탄을 칭하였다.

2.1. 지브롤터 공방전 (1349-50년)[편집]


1344년에 체결된 10년 간의 알헤시라스 휴전에도 불구하고 1349년 알폰소는 그 당사자인 알리가 폐위되고 마린령 안달루스가 파리스의 수중에 들어갔으니 무효라며 지브롤터 포위에 나섰다. 십자군세 부과와 왕실 직할지 및 보물 매각으로 자금을 모은 그는 강화된 왕권 덕에 후방에 대한 걱정 없이 주요 제후들과 2만 대군을 거느리고 9월 지브롤터 북쪽 라 리네아 델라 콘셉시온에 진영을 차렸다. 포위에 앞서 그라나다 술탄 유수프가 지브롤터에서 궁병과 보병을 파견한 것이 거의 유일한 지원이었다. 포위에 임하며 알폰소는 무르시아 병력으로 그라나다를 공격해 쉽사리 구원에 나서지 못하게 하였고, 유수프의 항의에도 아라곤 함대가 봉쇄에 합류하였다. 다만 페테르 4세는 조약을 지키기 위해 그라나다 군을 공격하지 말도록 지시하였다.

포위 초반부에 유수프는 알카라즈, 케사다를 습격하고 에시하를 포위하는 등 교란 작전에 나섰고, 겨울에는 리드완이 이끄는 그라나다 군이 카냐테 라 레알을 이틀 간 포위한 끝에 항복시켰다. 포위군은 성벽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 대신 봉쇄에 주력하며 방어용 참호를 파고 장기전에 돌입하였다. 견고히 건설된 진영은 주둔지보다는 도시에 가까웠고, 알폰소는 후비 레오나라와 그 자녀들 등 가족 대부분을 대동하였다.[2] 포위군은 7년 전 알헤시라스 수비대가 사용했던 초기 대포를 활용하였다. 그럼에도 도시가 항복할 기미가 없고 카스티야 군 역시 봉쇄에 치중하는 상태로 가을과 겨울이 지나갔다. 그러던 1350년 초엽 유럽을 강타하던 흑사병이 카스티야 진영에 나타났고, 다수의 사상자를 내며 혼란을 초래하였다.

포위를 풀고 회군하자는 제후들과 부인들의 요청에 알폰소는 검을 빼들고 지브롤터가 다시 카스티야령이 될 때까지 떠나지 않을 것이라며 거부하였다. 다만 그는 곧 와병하였고, 성금요일인 1350년 3월 27일 진영에서 사망하였다. 그는 중세 유럽 군주 중 유일하게 흑사병으로 사망한 이였다. 그 직후 카스티야 군은 알폰소의 운구와 함께 포위를 플고 철수하였다. 한편 구원을 준비하던 유수프는 그들의 철수를 방해하지 않았고, 항복을 고려하던 지브롤토 수비대 역시 성 밖으로 나와 이 기적적인 일을 지켜보았다. 1350년 7월 17일 파리스와 유수프는 카스티야의 10대 군주 페드로와 1357년 1월 13일까지 기한의 휴전 협정을 체결하였다. 유수프는 약속대로 페드로에 대한 여러 반란들에 있어 3백의 기병을 파견해주었고, 안달루스에는 평화가 유지되었다. 비슷한 시기 부왕 알리의 군대를 격파한 파리스는 내부와 외부 모두에서 권력을 공고히 할 수 있었다.

2.2. 마그레브 재통일과 죽음[편집]


기존 마린 군주들과 달리 '아미르 알 무미닌'을 칭한 그는 내전 끝에 1351년 5월 알리가 사망한 후 그의 전철대로 정복 활동에 나섰다. 1352년 파리스는 혼란을 틈타 독립했던 틀렘센을 재차 정복하였다. 이듬해에는 베자이아를 점령한 후 튀니지를 노렸다. 한편 내전 막바지에 파리스의 동생 아불 파들[3]과 아부 살림은 그라나다 궁정으로 피신하였다. 파리스는 그들의 송환을 요구했지만 마그레브 통일 후 그가 그라나다를 침공할 것이라 우려한유수프는 요구를 거절하는 것을 넘어 아불 파들을 카스티야 궁정에 보내 도움을 청하게 하였다. 모로코를 약화시킬 의도로 페드로는 반군을 수스로 수송할 함대를 양도헤주었다. 파리스는 유수프의 행위에 분노하였지만 그의 배후에 있는 카스티야를 자극해 새로운 전쟁이 터지는 것을 원치는 않았기에 반란 진압에 집중, 1354/55년경 아불 파들을 사로잡아 처형하였다. 아부 살림은 후에 1358-61년간 술탄에 오른다.

반란 진압 이후 정복을 이어나간 파리스는 1357년 튀니스를 점령, 부친에 이어 8년만에 재차 마그레브 통일을 이룩하였다. 하지만 그는 재상 파리스 빈 마이문의 농간으로 같은해 모로코로 회군하였고, 11월부터 와병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재상 하산 빈 우마르 알 파두디가 파리스가 정한 후계자 아부 자얀 무함마드와 다툰 후, 더 어린 아부 바크르 사이들 후임 술탄으로 지지하였다. 그 무렵 파리스가 점차 병마에서 회복하자, 재상 하산은 후계 문제에 간섭한 것에 대한 처벌을 두려워하여 술탄을 교살시켰다. (1358년 1월 10일) 한때 마그렙을 통일했고, 여전히 모로코와 알제리 서부를 지배하던 군주 파리스가 이렇게 허망하게 사망하자 마린 조의 전성기는 종식되었다. 사후 그의 아들들 간에 내전이 터지며 마린 조는 한세기 간의 쇠락에 접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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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Abu Inan Faris [2] 4남 1녀. 적자 페드로는 세비야에 머뭄[3] 1349년 12월에 잠깐 튀니스 총독을 맡았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