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비뇽 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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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교황청 주요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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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노사의 굴욕
파문을 통한 교황권의 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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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권의 절정
중세 흑사병
교황권 쇠락의 시작
성직자 과세
교황권 해체 시작, 아나니 사건
아비뇽 유수
서방교회 대분열
콘스탄츠 공의회
서방교회 대분열 종식, 콘클라베 제도 정착, 위클리프파 이단 지정·얀 후스 화형
후스 전쟁
평화협정으로 후스파 용인
사코 디 로마
교황권 위기의 상징
16-17세기 종교개혁 →



라틴어
Papae Avenionenses
아비뇽 교황권
영어
Avignon Papacy
Avignonese Captivity
아비뇽 유수

파일:Pope_palace_Avignon_by_Rosier.jpg
아비뇽의 교황궁

1. 개요
2. 배경
3. 아비뇽 교황들
4. 정말로 아비뇽 '유수'였는가?
5. 여담


1. 개요[편집]





14세기 경인 1309년 ~ 1378년, 교황청이 오늘날 프랑스 보클뤼즈 데파르트망의 아비뇽으로 이전했던 시기를 일컫는 용어이다.

'유수'(幽囚)는 '잡아 가둠'이라는 의미로, 교황이 사실상 한지에 유폐되었음을 뜻하는 것이다.[1] 신바빌로니아에 의해 유대 왕국이 사라지고 유대인들이 수도 바빌론으로 끌려갔던 '바빌론 유수'에 빗대어 붙여진 이름이다.[2]

1376년 그레고리오 11세가 로마로 돌아가서 2년 후인 1378년에 선종하고 새 교황이 로마에서 선출되면서 막을 내렸지만, 프랑스 왕국이 이에 불복하여 아비뇽에 또다른 교황을 선출하면서 1418년까지 40년간 서방교회 대분열이 벌어졌다. 이로 인해 교황청의 입지는 추락했고, 교황의 권위에 의문을 제기하는 위클리프파, 후스파, 공의회수위설 등이 득세했다. 교황은 이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더욱 세속 군주화되었다. 또한 이 사건으로 아비뇽은 신성 로마 제국에서 교황령으로 이전되었다.


2. 배경[편집]


1122년 보름스 협약의 체결로 주교 서임권이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아닌 교황에게 있음을 확인하고, 성지 예루살렘을 탈환하기 위해 단행된 제1차 십자군 원정이 성공한 이래, 교황의 권세는 절정에 이르렀다. 교황은 서유럽 세계를 지배하는 가톨릭의 수장일 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중부를 관통하는 교황령을 다스리고 십일조, 군주들의 기부금, 수많은 교구의 헌금 등 막대한 자금을 사방에서 받아내며 세속 군주들에게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지도자이기도 했다. 당시에 유행한 두 개의 검 이론'은 교황이 '영적인 검'과 '세속적인 검'을 모두 가지고 있으며, 자신이 지시한 대로 사용한다는 조건하에 세속 군주에게 두 번째 검을 하사한다고 설파했다. 교황은 이를 입증하기 위해 세속 군주들에 대한 간섭을 서슴지 않았는데, 특히 신성 로마 황제를 복종시키기 위해 온갖 모략을 구사하기도 했다.

그러나 유럽의 세속군주들이 영토의 확장과 관료제의 확립을 통해 세력을 키우면서, 13세기 후반에는 실권상으로 교황의 우위에 서게 되었다. 이는 각국에서 관료제가 태동하고 영주들의 몰락이 확고해지면서 나타난 현상이었다. 관료제와 세제의 확립으로 자연히 과세 대상인 백성의 파악도 활발해져 국경선의 중요성도 확고해지기 시작했다. 이전까지는 국경과 영지의 세력권 자체가 선이 아닌 점이었고, 사람이 태어나서 자기 마을 밖으로 수 km 이상 밖으로 나가는 일 자체가 드물었던 시대라, 국경 지방의 경우 농노가 아닌 이상 프랑스인이 아침에 장터 가러 옆 동네 신성 로마 제국 영토로 갔다가 저녁에 돌아오는 경우도 허다했다. 특히 프랑스 남부의 프로방스는 당시까지만 해도 신성 로마 제국에 속해 있었다.

하지만 국경선이 확립이 된 이후부터는 통행세를 내야 했고, 어길 경우 영토 침공으로 간주했다. 경제적으로도 12세기 이후 활발해진 영토의 개간으로 14세기까지 유럽 내에서 인구가 거주하지 않던 공지(空地)가 사라져 국경선의 확립에 일조했고, 이렇게 성장한 농업 경제를 바탕으로 상품 화폐 경제가 부활하면서 장원제는 쇠퇴하는 반면 왕권은 확고해졌다. 그리고 국왕의 권위는 이를 기반으로 성장한 경제력과 영토 확장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이렇듯 갈수록 강해지는 국왕들 중에서도 카페 왕조 프랑스 왕국의 국왕 필리프 4세는 국가 전체를 통제하고자 반항적인 귀족들을 토벌하고 자치를 누리던 플랑드르 도시들을 억압했다. 그 과정에서 막대한 국고를 소모하면서 재정이 부족해지자, 필리프 4세는 삼부회를 소집하여, 제3계급에 대한 과세 확장을 시도하는 한편 교회에 대한 과세도 시도했다. 이는 서임권을 놓고 논쟁을 벌였던 카노사의 굴욕 당시의 상황이나 교회 인사에 대한 재판권을 놓고 토마스 베켓과 대립한 앙주 제국헨리 2세 플랜태저넷의 상황과는 달리 현실 그 자체인 경제권 차원의 접근이라는 점에서도 의미를 갖는다. 하지만 교구로부터 들어오는 자금을 토대로 권위를 유지하던 교황 입장에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고, 이로 인해 필리프 4세와 교황 보니파시오 8세가 심각한 갈등을 벌이기 시작했다.

1295년, 필리프 4세는 성직자들에게 10분의 1 과세를 부과하기로 했다. 이 소식을 접한 교황 보니파시오 8세는 1296년 교령 《평신도와 성직자》(Clericis laicos)를 반포했다. 그는 이 교령에서 교황청의 동의없이는 성직자가 세금을 낼 수 없으며, 허락없이 세금을 내는 주교는 파문에 처한다고 선포했다. 필리프 4세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프랑스 내 주교구들이 외국으로 자금을 보내는 것을 금지한다는 칙서를 반포했다. 이로 인해 교황청의 수입이 타격을 입자, 보니파시오 8세는 1302년 교령 《우남 상크탐》(Unam Sanctam: 한 성자)을 반포했다. 이에 따르면, 영적인 권력은 세속적인 권력보다 우월하므로 교황은 국왕보다 우월하며, 국왕은 교황의 뜻에 반하는 일을 해서는 안 되었다.

필리프 4세는 수도 파리에서 삼부회를 소집해 귀족과 부유한 평민들을 집결시킨 뒤 교황에 대항하는 자신의 투쟁을 합법화했으며 성직자 과세를 고착시키려고 했다. 그러자 보니파시오 8세는 필리프 4세를 파문하고 프랑스 왕국 전역에 성무금지령을 내리려고 했다. 하지만 필리프 4세가 한 발 더 빨랐다. 그는 심복인 기욤 드 노가레를 시켜 보니파시오 8세를 고발하는 기소장을 작성하도록 했다. 이 기소장에는 보니파시오 8세가 저지른 혐의를 다음과 같이 명시했다.

1. 간통죄: 교회는 교황의 신부인데, 전임 교황이 살아있을 때 불법적으로 교황의 자리를 찬탈했으니 간통을 저질렀다는 것이었다.[3]

2. 교황의 방에 온갖 짐승과 마귀를 불러들여 수간 및 마귀와의 교접을 행한 죄

3. 교회 재물 착복죄: 보니파시오 8세는 실제로 사치를 일삼고, 성직매매를 대놓고 벌이는 부패한 인물이었다.

4. 살인죄: 보니파시오 8세는 정적인 콜론나 가문에게 반역죄를 씌워 그들의 근거지를 공격했고, 콜론나 가문에 항복하면 신변의 안전을 보장해주겠다고 설득했지만 정작 항복하자 모조리 죽여버리고, 콜론나 가문의 영지에 있었던 백성들까지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후 기욤 드 노가레와 콜론나 가문의 가주였던 시욘나 콜론나가 지휘하는 프랑스군이 이탈리아로 침입했다. 1303년 9월 7일, 그들은 아나니에 있었던 보니파시오 8세 앞에 들이닥쳤다. 교황 때문에 멸문지화를 당했던 시욘나 콜론나는 보니파시오 8세에게 욕설을 퍼붓고 모욕하면서 당장 사임하라고 협박했다. 보니파시오 8세가

"차라리 나를 죽여라."

라고 외치며 강력히 거부하자, 시욘나 콜론나는 끼고 있었던 장갑을 빼어 교황의 뺨을 후려쳤다. 이는 14세기 교황권의 쇠퇴를 상징하는 사건 중 하나로, 아나니의 뺨 때리기(schiaffo di Anagni / Anagni slap)로 불린다. 그 후 보니파시오 8세는 프랑스 병졸들에게 얻어 맞으며 감금당했다. 교황의 곁에 있었던 성직자들도 두들겨 맞고 교황과 같이 감금당했으며 교회의 보물들까지 빼앗겼다. 이탈리아의 귀족들이 이 소식을 듣고 급히 현장으로 달려와 3일 만에 구출했지만, 보니파시오 8세는 이 사건의 충격으로 1개월 만에 선종했다. 이를 두고 당시

"보니파시오 8세는 여우처럼 교황의 지위에 올라 사자처럼 지배하고, 개같이 죽었다."

라는 말이 돌았다.

보니파시오 8세 사후, 교황청은 1303년 10월 22일 프랑스군의 삼엄한 경비와 압박에 시달리며 교황을 선출했다. 신임 교황 베네딕토 11세는 필리프 4세가 원하는 대로 《우남 상크탐》을 무효로 하고, 필리프 4세에게 내리려 했던 파문 역시 없던 일로 했다. 그 대신, 아나니 사건에 가담한 기욤 드 노가레와 시욘나 콜론나 등을 파문했다. 또한 필리프 4세와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1세 사이의 군사적 마찰에 개입해 휴전 협정을 맺도록 종용했다. 그러나 재임 9개월만인 1304년 7월 7일에 갑작스럽게 선종했다. 세간에서는 독살당했다는 설이 파다했지만 사실 여부는 불확실하다.

베네딕토 11세가 갑작스럽게 선종한 후, 로마에서는 콜론나 가문이 이끄는 친 프랑스 정파와 보니파시오 8세가 속했던 카에타니 가문이 이끄는 반 프랑스 파, 독자적인 교황을 선출하려는 오르시니 가문의 분쟁이 심하게 일어났고, 이로 인해 교황은 11개월 동안 선출되지 못했다. 그러다가 어차피 기존의 추기경 중 한 사람을 뽑아봐야 다른 정파에서 반발할 테니, 차라리 외부 인물을 세우기로 합의하고, 필리프 4세와 보니파시오 8세 사이의 정쟁이 벌어질 당시 중립을 지켰던 성직자이자 저명한 법학자인 레몽 베르트랑 드 고트를 만장일치로 지명했다. 1305년 6월 5일, 추기경들은 페루자에서 레몽을 클레멘스 5세로서 교황에 선출하기로 결의했다.

당시 리옹에 있었던 클레멘스 5세는 1305년 11월 15일에 그 곳에서 즉위식을 치렀다. 당시 로마는 콜론나 가문, 카에타니 가문, 오르시니 가문 등 여러 귀족들 사이의 분쟁으로 치안이 몹시 불안정했고, 급기야 로마 교구의 주교좌 성당인 산 조반니 인 라테라노 대성당이 누군가의 방화로 전소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클레멘스 5세는 이렇듯 불안정하기 짝이 없는 로마에 섣불리 가지 못하고 프랑스 왕국과 잉글랜드 왕국의 영역이었던 기옌 사이를 오갔다. 또한 보르도의 전 대주교였던 그가 교황에 선출된 배경에는 필리프 4세의 강력한 지원이 있기도 했기에 그의 요구를 거부할 수 없었다. 필리프 4세는 고분고분해진 교황을 압박해 성전 기사단(템플 기사단)을 재판에 회부하여 대거 숙청하고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막대한 재산을 빼앗았다. 성전 기사단의 운명을 결정하기 위해 소집되었던 빈 공의회는 교황에게 로마로 귀환하라고 요구했다. 이에 클레멘스 5세는

"나 역시 그러기를 바라지만, 로마의 사정이 너무 좋지 않으니 불가능하다."

고 답했다.

클레멘스 5세는 로마로 돌아가지 않는 대신 프로방스 백작의 소유였던 아비뇽에 머물기로 했다. 그가 아비뇽을 선택한 것은 다음의 이유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우선, 아비뇽은 당시 서유럽 세계의 중심국인 신성 로마 제국의 명목상의 영토이면서도 프랑스 왕국의 국경과 인접했다. 그래서 클레멘스 5세의 지지 기반인 프랑스 왕의 지원을 수월하게 받으면서도 직접적인 통제를 피할 수 있었다. 또한 이탈리아 반도 바깥에 있었기에 기벨린파(친 황제파)와 구엘프파(친 교황파)의 대립, 여러 귀족 가문의 분쟁, 여러 도시 국가들과 나폴리 왕국, 시칠리아 왕국들의 세력 다툼 등으로 혼란스럽기 짝이 없는 정국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그러면서도 이탈리아와 가까워서 교황령 및 이탈리아 귀족, 성직자들에 대한 관리를 수월하게 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클레멘스 5세가 아비뇽으로 교황청을 옮기면서 '아비뇽 유수'의 막이 올랐다.


3. 아비뇽 교황들[편집]



3.1. 클레멘스 5세[편집]


1309년 3월 9일 아비뇽에 도착한 클레멘스 5세는 그 곳에 자리잡은 도미니코회 수도원에서 정무를 돌봤다. 3명의 추기경이 교황 대리로서 로마 시와 교황령을 감독했지만, 콜론나 가문과 오르시니 가문 사이의 세력 다툼이 극렬했기에 별다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었다. 1314년 장염으로 추정되는 질병에 시달리던 클레멘스 5세는 자신의 고향인 빌라드라우트(Villandraut)로 가서 여생을 보내려고 했으나 1314년 4월 20일 잠시 들린 로크모르(Roquemaure) 마을에서 선종했다. 그의 재임 기간 동안 아비뇽은 교황을 선출하는 추기경단 일부의 공식 거주지가 되었다.


3.2. 요한 22세[편집]


클레멘스 5세의 사후 리옹에서 새 교황을 선출하기 위한 회의가 열렸지만, 추기경들이 좀처럼 합의를 이루지 못하면서 2년 3개월 동안 교황이 선출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나폴리 국왕 카를로 2세의 재상이자 프레쥐스의 주교였으며, 클레멘스 5세처럼 뛰어난 법학자였던 자크 뒤에즈가 요한 22세로서 교황에 선출되었다. 추기경들은 당시 72세의 고령이었던 그를 과도기적인 교황으로 간주했지만, 요한 22세는 놀랍게도 18년간 재임하면서 교황청이 아비뇽에 완전히 자리잡는데 크게 기여했다.

요한 22세는 탁월한 행정가였다. 그는 교황청의 재정을 회복하기 위해 교회 행정을 효율적으로 재편성했으며, 각지의 군주와 주교들이 알아서 자금을 보내주던 관례에서 벗어나 교황이 직접 관료를 파견해 헌금을 거둬들이는 정책을 시행했으며, 각지의 주교들이 교황이 내리는 교령에 일괄적으로 따르게 하는 등 강력한 중앙집권적인 정책을 추진했다. 그 결과 교황청은 막대한 자금을 확보할 수 있었고, 교황의 입지는 자연히 강화되었다.

한편, 요한 22세는 프란치스코회 영성파가 청빈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을 비판하는 《교회법의 창시자》(Ad conditorem canonum)를 반포했으며, 예수12사도가 생전에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았다는 주장은 극단적이며 이단적인 주장이라는 내용의 《몇몇 사람들 중에는》(Quum inter nonnullos)를 반포하는 등, 교회가 현실과 동떨어진 이상에 치우치는 것을 저지했다. 그러면서 프란시스코 수도회와 손을 잡고, 자신을 프랑스의 앞잡이로 몰아세우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루트비히 4세와 치열한 정쟁을 벌였고, 이탈리아 내 구엘프파 도시들 및 나폴리 국왕들과 연합하여 루트비히 4세의 이탈리아 진출을 저지했다.

그러나 프랑스에게 유화적인 태도로 일관해

"교황은 프랑스의 꼭두각시이다."

"프랑스 국왕은 교황이자 황제"

라는 비아냥을 받았고, 죄 없이 죽은 영혼은 공심판을 받기 전까지 지복직관[4]을 누릴 수 없다고 주장했다가 교황이 이단적인 주장을 하고 있다는 비난을 받고, 죽기 직전에 이르러서야 주장을 철회하는 등 여러 문제점이 있었다. 이로 인해 교황에 대한 불신이 유럽 사회 전반에 만연했다.


3.3. 베네딕토 12세[편집]


1334년 12월 4일 새벽, 요한 22세가 90세의 나이로 선종했다. 이후 파미에의 주교로 이단인 카타리파 토벌전에서 활약했던 자크 푸르니에가 베네딕토 12세로서 교황에 선출되었다. 그는 교회의 질서를 회복하고 교황청을 로마로 되돌리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1335년 7월 6일 로마에서 파견된 사절단이 귀환해달라고 요청했을 때, 그는 테베레 강둑으로 돌아가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아비뇽에 자리를 잡아 상당한 부를 누리고 있었던 추기경들이 강력하게 항의한 데다가 볼로냐 시에서 반란이 일어나면서 로마로 가는 길이 끊기자, 그는 어쩔 수 없이 아비뇽에 남기로 했다.

베네딕토 12세는 전임 교황이 모은 자금을 활용해 웅장하고 화려한 교황궁을 아비뇽에 세웠다. 또한 지복직관을 기정사실화하고,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루트비히 4세와 화해함으로써 교황청에 대한 불신을 해소시키려고 노력했다. 그러던 1337년 11월 백년 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잉글랜드와 프랑스 양측에 특사를 보내 서로 화해하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교황을 프랑스의 꼭두각시로 간주한 에드워드 3세는 교황의 휴전 제의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고, 전쟁은 장기화되었다. 베네딕토 12세는 전쟁의 참화가 아비뇽까지 미칠 것을 우려했고, 루트비히 4세가 언제 딴 마음을 먹고 쳐들어올 지도 모른다고 걱정했기에, 교황궁과 교회 시설들을 둘러싼 강력한 요새를 추가로 짓게 했다.


3.4. 클레멘스 6세[편집]


1342년 베네딕토 12세가 선종한 후, 추기경 피에르 로제가 클레멘스 6세로서 교황에 선출되었다. 그가 재위한 당시에는 중세 흑사병이 유럽 대륙에 본격적으로 전파되었다. 이때 유럽 각지에서 흑사병의 원인을 유대인에게 돌리고 학살하는 사태가 빈번하게 벌어졌다. 이에 클레멘스 6세는 1348년 7월 6일 유대인에게 책임을 묻는 것은 잘못된 짓이며 악마에게 유혹당한 것이라는 내용의 《아무리 불충하더라도》(Quamvis Perfidiam)를 반포했으며, 유대인 탄압을 공공연히 선동하는 주교들을 파문했다. 그러나 극히 일부의 군주들만 교황의 뜻을 따랐고, 민중은 유대인들을 거리낌없이 박해했다.

클레멘스 6세는 나폴리 왕국의 여왕이자 아비뇽이 위치한 프로방스 지방의 영주였던 조반나 1세로부터 아비뇽을 80,000플로린에 매입했다. 이리하여 아비뇽은 프로방스에서 독립하고, 교황령에 배속되었다. 이후 교황의 권위를 살리기 위해 교황궁을 프랑스 왕국의 궁전 못지 않게 화려하게 꾸몄으며, 다양한 미술 작품들을 사들이고 예배당을 축조했다. 그리고 프랑스 왕국 북부 지역의 음악가들을 전폭적으로 후원해 아르스 노바 음악이 황금기를 맞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 밖에도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 등 이탈리아 작가들에게도 상당한 후원을 해줬다.

한편, 교황이 부재한 로마의 혼란은 갈수록 심해졌고, 1347년에 호민관이 되어 권력을 장악한 콜라 디 리엔초(Cola di Rienzo) 역시 권력을 얼마 유지하지 못했다. 이후 1354년에 돌아왔으나 카피톨리노 언덕에서 살해되었다.[5] 교황은 추기경 알보르노를 파견하여 로마를 회복하려고 노력했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3.5. 인노첸시오 6세[편집]


1352년 11월 클레멘스 6세가 악성 종양에 걸려 선종한 후, 에티앙 오베르 주교가 인노첸시오 6세로서 새 교황에 즉위했다. 그가 즉위할 당시 아비뇽 교황청의 재산은 중세 흑사병의 여파와 선대 클레멘스 6세의 예술 활동 및 토목 공사로 인해 바닥났다. 이에 미사와 더불어 다양한 성무일도를 노래하는 교황청 소속의 합창단인 '카펠라니 카펠레'의 인원 수를 12명에서 8명으로 축소했고, 교황궁에 소장되어 있는 다양한 미술 작품들을 판매하는 등, 재정을 확보하는 데 전념했다. 그러면서도 백년전쟁의 여파로 인해 아비뇽의 주변 지역마저 치안이 악화되어 약탈자들이 위협을 가해오는 것을 막기 위해 아비뇽 성벽을 대대적으로 수리했다.

인노첸시오 6세는 베네딕토 12세처럼 교황청을 로마로 되돌리고 싶어했다. 그는 카스티야 연합 왕국에 위치한 툴레도의 대주교인 알바레즈 칼리오 데 알보르노스 추기경을 이탈리아로 보내 교황령을 안정시키도록 했다. 알보르노스 추기경은 교황의 지지자들을 확보해 로마 시를 어느 정도 안정시켰지만, 교황령의 혼란 수습에는 실패했다. 한편, 인노첸시오 6세는 백년전쟁을 종결시키기 위해 잉글랜드와 프랑스에 사절을 거듭 보내 화해를 촉구했고, 에드워드 3세장 2세브레티니 조약을 체결해 9년 동안의 평화를 이루는 데 일조했다.


3.6. 우르바노 5세[편집]


1362년 인노첸시오 6세가 선종한 후, 기욤 드 그릭모아르 추기경이 우르바노 5세로서 신임 교황에 등극했다. 프랑스 남부 마르세유의 성 빅토르 수도원장이었던 그는 역대 아비뇽 교황들과는 달리 검소한 삶을 추구했다. 우르바노 5세는 프랑스 남부에서 패권을 다투고 있었던 푸아 백작 가스통과 아르마냑 백작 장 1세를 중재하고자 노력했다. 가스통이 승리하여 장 1세를 사로잡자, 특사를 파견해 장 1세를 함부로 대하지 말고 몸값을 받은 후 풀어주라고 요청해 가스통의 승낙을 받아냈다. 푸아 백작은 장 1세로부터 받아낸 몸값으로 프랑스 남부에서 가장 부유한 귀족이 되었다.

1363년, 우르바노 5세는 모든 기독교 왕과 귀족들에게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를 향한 십자군을 일으켜달라고 호소했다. 뤼지냥의 피에르 1세는 2년 후인 1365년에 이 십자군을 수행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1365년 잉글랜드의 약탈자들이 아비뇽 근교로 쳐들어와 심각한 약탈을 자행했다. 교황청은 그들이 아비뇽까지 쳐들어오는 것을 저지했지만 세입이 크게 줄어드는 것은 막지 못했다.

우르바노 5세는 교육 정책에 공을 들였다. 헝가리 왕국에 대학교를 설립했으며, 1363년 4월에는 파비아 대학교를 정식 '스투디움 제네랄레'[6]로 승인했다. 여기에 프랑스 남부 몽펠리에의 약학대학을 복원하는 계획을 실시했으며 동시에 성 베네딕토 대학을 설립하고, 폴란드 남부 크라쿠프 대학교의 발전을 증진하고자 수많은 서적들을 제공하면서 양질의 교육자들을 파견했다. 또한 유대인들에게 해를 끼친 성직자들 및 신도들을 과감히 제명하는 엄벌 제도를 실시했다.

1367년 4월 아비뇽 교황청의 로마 귀환을 계획하고 로마를 일시 방문했지만, 로마 귀족들 사이의 심각한 정쟁과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의 견제, 기득권을 놓기 싫은 아비뇽 추기경들의 거센 반대에 직면하자 1370년 9월 로마를 떠나 아비뇽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로부터 3개월 뒤인 1370년 12월 29일에 선종했다.


3.7. 그레고리오 11세[편집]


우르바노 5세가 선종한 후, 클레멘스 6세의 조카였던 피에르 로제 드 보포르가 그레고리오 11세로서 신임 교황에 등극했다. 그는 나체십자가를 짊어지고 다니며 자신들의 몸에 채찍질을 하고 다니는 '채찍 고행단'(Flagellant)을 이단으로 간주하여 그들을 심판하는 종교재판소를 설치하는 등 흐트러진 교회 질서를 재정비하고자 노력했다. 또한 카스티야 왕국, 아라곤 왕국, 나바라 왕국 등 이베리아 반도의 국가들과 시칠리아 왕국, 나폴리 왕국 등의 이탈리아 남부 국가들이 서로 전쟁을 벌이는 것을 중단시키고 화해하도록 하는 데 기여했다. 한편 백년전쟁을 끝내기 위해 잉글랜드와 프랑스를 화해시키려고 노력했으나 별다른 성과는 거두지 못했다. 그리고 정교회와 가톨릭의 통합을 추진했으며 오스만 술탄국을 대상으로 십자군을 일으키려 했고, 부정부패를 일삼는 성직자들을 축출해 교회에 대한 민중의 신임을 회복하고자 했다.

그레고리오 11세는 밀라노 공작 베르나보 비스콘티의 교황령을 탈취하려 드는 행보에 위협을 느끼고, 잉글랜드 출신의 용병대장 존 호크우드를 고용한 후 나폴리 왕국과 손을 잡고 밀라노 공국을 압박했다. 1374년 6월 6일 밀라노 공작이 교황령을 건드리지 않겠다고 서약한 뒤, 그레고리오 11세는 로마로의 복귀를 추진했다. 그러나 프랑스인을 이탈리아 교회 관구의 대법관과 총독으로 임명했다가 프랑스인의 지배를 받기 싫어한 현지인들의 거센 반발에 직면했다. 그 사이에 교황권이 강해져서 이탈리아 중부에서의 자신들의 영향력을 약화시킬 것을 우려한 피렌체가 1375년 7월 베르나보 비스콘티와 동맹을 맺고 공세에 나서자, 프랑스인 교황 특사들에게 반감을 품고 있었던 이탈리아 귀족들이 대거 귀순하면서 교황의 입지가 급속도로 위태로워졌다.

그레고리오 11세는 이에 대응해 1376년 3월 31일 모든 피렌체 주민을 파문하고, 각국의 유럽 군주들에게 피렌체 상인들을 그들의 땅에서 추방하면서 재산을 몰수하라고 권고했다. 추기경들은 정세가 불안해졌으니 로마로 귀환하지 말라고 권고했지만, 그는 백년전쟁과 흑사병의 여파로 황폐해진 아비뇽에 더 있어봐야 좋을 것이 없고, 자기 대에 교황청을 로마로 옮겨야 한다고 여기며 계획대로 밀어붙이기로 했다. 1376년 9월 13일, 그레고리오 11세는 마르세유에서 함대에 올라탄 뒤 10월 18일 제노바로 이동했다. 이후 포르토 피노, 리보르노, 피옴비노에 들러 지지자들을 규합한 뒤 1376년 12월 6일 코르네토에 도착했다.

1377년 1월 13일 코르네토를 떠나 1월 14일 오스티아 항구에서 하선한 교황은 티베르 강을 거슬러 올라가 산 파올로 수도원으로 향했다. 1377년 1월 17일, 그레고리오 11세는 테베레 강둑에 정박한 갤리선에서 하선한 뒤 프로방스 및 나폴리군에 둘러싸인 채 로마에 입성했다. 그러나 1377년 2월 1일 브르타뉴 중대가 리미니 근처의 체세나 시민들과 충돌해 4,000명이 살해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에 분노한 로마 시민들이 제네바의 로베르트 추기경(훗날의 대립교황 클레멘스 7세)의 선동에 따라 폭동을 일으키자, 그레고리오 11세는 1377년 5월 말 아나니로 후퇴했다.

이후 전열을 재정비한 교황파는 반격을 가해 로마냐를 굴복시키고 피렌체와 타협한 뒤 1377년 11월 17일 로마에 재입성했다. 하지만 로마의 치안은 여전히 불안정했고, 그레고리오 11세는 아비뇽으로 돌아가는 것을 심각하게 고려했다. 그러다가 1378년 3월 26일에서 27일 사이의 밤에 로마에서 선종했다. 그는 삼촌인 클레멘스 6세처럼 라셰즈듀 수도원에 안장되기를 원했지만, 로마인들은 교황의 시신을 다른 데로 옮길 수 없다며 그대로 로마에 안장하도록 했다.

그레고리오 11세가 사망한 직후, 로마에서는 프랑스인이 아닌 이탈리아인을 교황으로 뽑도록 압력을 넣었고, 결국 로마 출신의 바르톨로메오 대주교가 추기경들의 투표를 통해 우르바노 6세로 선출되었다. 이탈리아에서 물러난 프랑스 추기경 13명은 4개월 뒤 아나니에서 공포 분위기속에 결정된 교황은 무효라고 선언했고, 9월 20일에는 폰디에서 프랑스 출신의 추기경인 제네바의 로베르(로베르트) 추기경을 선출해 대립교황 클레멘스 7세로 옹립했다.[7] 이리하여 서구 대이교(The Great Schism), 또는 서방교회 대분열이 발발했다.


4. 정말로 아비뇽 '유수'였는가?[편집]


바빌론 유수에 빗댄 표현인 '아비뇽 유수'라는 용어가 언제, 어디서 유래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일각에서는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가 아비뇽에 머무는 동안 친구에게 쓴 편지에서 아비뇽을 가리켜

"서방의 바빌론"

으로 일컬은 데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아비뇽에서 집권한 교황들은 당대에도 프랑스에 적대적인 국가들로부터

"프랑스 왕의 꼭두각시"

로 취급되었고, 후대에는 로마에서 가톨릭 교회를 이끌어야 하는 임무를 망각하고, 프랑스 왕에 의존한 채 사치와 향락을 일삼은 자들로 매도되었다.

그러나 현재 학계에서는 강제로 끌려갔다는 의미가 담긴 '유수'라는 표현은 적절하지 않으며, 아비뇽에서 집권한 7명의 교황들이 지나치게 저평가되었다고 보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교황청이 아비뇽으로 옮겨진 것은 프랑스 국왕 필리프 4세의 강압에 의해서가 아니라 클레멘스 5세의 전략적인 판단이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필리프 4세가 1314년에 급사한 후, 프랑스 국왕들은 아비뇽의 교황들에게 이렇다할 간섭을 하지 않았고, 그들이 교회 체계를 재조직하고 교황권을 강화하는 것을 방관했다. 오히려 일부 학자들은 아비뇽 이전이 교황이 혼란스럽기 짝이 없었던 이탈리아에서 벗어나 여유를 갖고 교회 체계를 재정비하며, 교황의 권위를 되살리는 등 교황청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물론 프랑스 출신 사제들이 교황과 추기경을 독식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외의 관료들 중엔 이탈리아인들이 많았으며, 교황은 이탈리아 문제에 상당한 신경을 썼다. 로마 시민들 역시 교황에 대한 충심을 여전히 간직했다. 루트비히 4세가 로마에 입성한 뒤 요한 22세를 폐위하고 대립교황 니콜라오 5세를 세우자, 로마 시민들이 들고 일어나 니콜라오 5세를 타도했다. 교황이 프랑스의 앞잡이가 되어서 자신들을 신경쓰지 않는다고 그들이 여겼다면 이런 일은 일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5. 여담[편집]


교황이 결국 로마로 돌아가기는 했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프랑스 국왕은 자국 내 가톨릭교회에 대해서 강력한 지배권을 가지게 되었다. 이른바 갈리아주의의 시작으로 프랑스 교구 내에서 걷히는 헌금은 교황청으로 흘러들어가지 않게 되었으며, 성직자의 임명에도 프랑스 국왕의 영향력이 커져서 교회 조직에도 교황의 영향력이 별로 미치지 않게 되었다. 이는 좋은 점도 있었지만 프랑스 교회 내부의 문제가 있을 때 교황이 제지할 수도 없게 만들었고, 프랑스 혁명 때 중하급 성직자들이 혁명정부를 의외로 적지 않게 지지하는 결과를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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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다수의 서양사 용어 번역이 그렇듯이 일본에서 번역한 용어를 채택했지만, '유수'라는 한자어는 그 이전에도 동아시아에 있었던 단어이다.[2] 공교롭게도 두 사건 모두 70여 년의 시간이 지나서야 원위치로 복귀할 수 있었다.[3] 실제로 보니파시오 8세는 첼레스티노 5세가 교황직에서 자진 사퇴하도록 설득한 뒤 자기가 교황이 되자마자 첼레스티노 5세를 감금해 죽을 때까지 유폐했다.[4] 천국으로 즉시 갈 수 있는 권리[5] 여담으로, 바그너의 오페라 중 첫 번째로 상업적인 성공을 거둔 오페라가 리엔초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리엔치>(Rienzi, 1842)였다.[6] Studium Generale. 현재의 대학교에 준하는, 중세 유럽의 고등교육기관들을 이르는 말이었다.[7] 클레멘스 7세는 애초에 이런 13명의 추기경들의 독자 교황 선출을 주도했던 추기경 가운데 한 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