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유브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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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유브 왕조
السلطنة الأيوبية (al-Salṭanah al-ʾAyyūbiyyah)
الأيوبيون (al-ʾAyyūbiyyūn)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70px-Flag_of_Ayyubid_Dynasty.svg.png
국기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600px-AyyubidGreatest.png
아이유브 왕조의 강역
존속기간
1171년 ~ 1250년[1] / 1254년[2] / 1260년[3]
왕조
아이유브 왕조
수도
카이로(1171년~1174년)
다마스쿠스(1174년~1218년)
카이로(1218년~1250년)
알레포(1250년~1260년)
공용어
아랍어
쿠르드어
콥트어
히브리어
민족구성
아랍인
쿠르드인
유대인
정부형태
군주제(술탄)
공국연합
면적
2,000,000km2(1190년)
인구
7,200,000명~8,000,000명
국교
이슬람(수니파)
통화
디나르
이전국가
파티마 왕조(1171년)
장기 왕조(1250년)
예루살렘 왕국(1291년)
이후국가
맘루크 왕조(이집트)
라술 왕조(예멘)

1. 개요
2. 역사
2.1. 건국
2.2. 살라딘 사후
2.3. 제5차 십자군 전쟁
2.4. 제6차 십자군 전쟁
2.5. 제7차 십자군 격퇴와 몰락
3. 역대 군주
4. 역사보기 틀




1. 개요[편집]


살라딘(살라흐 앗 딘 유수프 이븐 아이유브)에 의해 창설되었으며, 12세기 말과 13세기 초에는 이집트, 나중에는 팔레스타인, 이라크 북부, 시리아 지역 대부분과 예멘을 통치했다.

2. 역사[편집]


파일:1185 중동.png
십자군 국가들이 나타나지 않은, 정확히는 1190년의 상황에 더 가깝다.

2.1. 건국[편집]


살라딘의 아버지 아이유브(나짐 앗 딘 아이유브 이븐 샤디)는 12세기경 이라크와 시리아에서 셀주크 튀르크의 통치자 밑에서 활동했던 쿠르드족 용병 가문 출신이었으며, 바로 그의 이름에서 왕조의 명칭이 유래되었다. '아이유브'(ايوب)란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인 을 뜻하는 아랍어이다.

아이유브는 다마스쿠스 총독에 임명되자, 그의 형제인 시르쿠와 함께 십자군과의 전쟁에 대비해 시리아를 통일했다. 삼촌인 시르쿠가 죽은 후 살라흐 앗 딘은 재빨리 이집트를 장악했다.1169년 다미에타를 침공한 십자군을 몰아내는 데 성공했고, 1171년 파티마 왕조의 마지막 칼리파 알 아디드가 붕어하자 쉬아 계열 이스마일파(7이맘파) 파티마 왕조를 멸망시켰다. 나아가 열성 무슬림들을 동원해 십자군에 대항하는 통일전선을 구축했으며. 이집트를 당대 세계 최강의 이슬람 국가로 만들었다. 이후 예루살렘 왕국을 침공하여 하틴 전투에서 그 주력군을 괴멸시키고, 예루살렘을 탈환하는 업적을 세웠다.

2.2. 살라딘 사후[편집]


살라딘의 통치하에서 유지되었던 유대감은 그의 승하(1193) 직전에 사라졌으며, 그가 친척 가신들에게 토지를 분배한 데 따라, 그 가신들이 각자의 속주에서 자치적 성격의 내정을 시행함으로써 아이유브 왕조는 분권화하고, 반봉건적 성격의 가문 연합체로 변모했다. 살라딘은 죽으면서 장남 알 아프달 알리에게 다마스쿠스, 차남 알 아지즈 우스만에게 카이로, 3남 앗 자히르 가지에게 알레포를 맡겼다. 그리고 동생 알 아딜에겐, 그의 야심을 경계하여, 동북변의 자지라(메소포타미아 북부) 지역을 맡겨 그가 아들들의 방파제가 되어주길 바랬다. 하지만 형제간의 반목 끝에 오히려 알 아딜이 조카들을 쳐내고 자신의 아들 알 카밀을 카이로 총독으로 두며, 자신은 다마스쿠스에서 술탄이 되었다.

알 아딜이 술탄이 되면서 그의 통치 시기에 신성 로마 제국과 아이유브 왕조간의 긴장 관계가 완화되었다. 해상강국 베네치아에게 알렉산드리아 항구의 사용 특권을 부여하며, 교섭하는 등 주변국에 회유정책을 폈고, 무역활성화로 경제가 발전하면서 아이유브 왕조의 분파주의도 잠잠해졌다.

2.3. 제5차 십자군 전쟁[편집]


파일:아이유브 군.jpg
13세기 아이유브 기병대

1218년 로마 교황은 아크레장 드 브리엔 공작을 총사령관으로 하는 제5차 십자군을 보냈다. 동년 8월 5차 십자군의 침략으로 다미에타 공방전이 한창일 때, 전염병으로 큰 피해를 입었단 전갈을 받은 알 아딜이 급사했다. 전염병으로 전쟁은 소강 상태로 들어가고, 그의 아들 알 카밀은 다미에타에서의 철수를 조건으로 예루살렘을 내주겠다고 제안했다.

이에 십자군 총사령관 쟝은 수락하려 했으나, 추기경 펠라기우스가 이 기회에 이슬람 세력을 완전히 몰아내야한다고 주장하며 반대 의견을 피력했다. 의견이 갈라진 십자군에서 여러 제후들이 귀환했고, 쟝과 펠라기우스는 남은 십자군과 함께 다미에타를 2년간 공격해 함락시키긴 했지만,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었다.

펠라기우스가 전쟁을 계속한 근거는 신성 로마 황제 프리드리히 2세가 지원해 줄 것이란 희망때문이었으나, 정작 프리드리히 2세는 성전에 무관심했고, 결국 펠라기우스는 지원을 받지 못한 군대를 이끌고 이집트의 카이로로 향했다. 펠라기우스의 십자군이 나일 강 델타의 카이로에서 북쪽으로 약 150km, 다미에타에서 서남쪽으로 약 60km지점까지 침공해왔지만 알 카밀은 나일 강의 범람을 이용해 대승했다. 알 카밀은 이 승리를 거둔 지역을 만수라('승리')라고 부르며 기념하고, 도시를 건설했다. 이후 포로 석방을 조건으로 다미에타를 돌려받았고 제5차 십자군 전쟁을 종식시켰다.

2.4. 제6차 십자군 전쟁[편집]


1227년 프리드리히 2세가 제6차 십자군을 이끌고 왔으나 큰 전투는 없었다. 알 카밀은 이를 기회로 보고 프리드리히 2세와의 협상을 통해 예루살렘에 있는 모스크는 여전히 무슬림의 관리하에 두고, 예루살렘에 성벽을 쌓지 않으며, 군대를 상주시키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제6차 십자군 전쟁을 종결시켰다.

알 카밀은 성지를 팔아넘겼다며 비판받았으나 그가 맺은 조약 덕분에 예루살렘에서는 조약에서 명시한 1239년까지 평화가 이어졌다. 알 카밀은 유럽 세력들과의 평화협상 기간 동안 반란을 제압하고, 아나톨리아 지역의 룸 술탄국과 아르투크 왕조와의 전쟁을 이어나갔다. 그러던 와중에 아라비아 반도까지 진출한 몽골 제국의 침략을 당하기도 했다.

2.5. 제7차 십자군 격퇴와 몰락[편집]


1238년 알 카밀이 승하하고, 두 아들 사이에 후계 다툼이 일어났다. 1239년 휴전협정이 끝나고, 아이유브 왕조의 요르단 지역을 통치하던 알 카밀의 조카 앗 나시르가 예루살렘을 점령했으나 1243년에 내전을 이유로 십자군에게 다시 반환했다.

1244년 이집트 아이유브 왕조의 앗 살리흐 아이유브(재위 1240~1249)는 호라즘 왕조가 멸망한 뒤 남은 군벌들과 손잡고, 시리아 아이유브 왕조와 예루살렘을 공격해 점령했으며, 당시 내전 중이던 시리아 아이유브 왕조는 십자군과 동맹하여 이에 대항했다.

이슬람 세력이 다시 예루살렘을 점령한 것에 자극을 받아 1249년 6월, 프랑스 왕 루이 9세가 36,000명의 대군을 이끌고 제7차 십자군을 선포했다. 술탄 알 살리흐는 중병을 앓고 있어 이를 막기 위한 친정을 선포할 수 없었고, 선대 알 카밀처럼 예루살렘 양도를 조건으로 철수할 것을 제안했지만 루이 9세는 카이로를 점령하고, 동생 로베르를 총독으로 임명할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이 제안을 거절한 뒤 다미에타를 점령하고 카이로로 진군했다. 하지만 십자군은 만수라에서 바이바르스(Baibars)의 아이유브군에 참패했고,(알 만수라 전투) 루이 9세가 포로로 잡히면서 제7차 십자군 전쟁은 종결되었다.

제7차 십자군 전쟁에서도 승리한 아이유브 왕조였지만 전쟁 중에 술탄 알 살리흐가 병사하고, 후계자인 알 투랸샤가 바이바르스에게 숙청당하면서 1250년 맘루크가 권력을 승계하는 것으로 이집트의 아이유브 왕조는 완전히 몰락했다. 이집트의 정권이 맘루크의 손아귀로 넘어간 뒤에도 아이유브 왕조의 일원들은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을 갖춘 채 시리아와 레반트에서 할거하고 있었으나[4] 문제는 동방에서 불어온 거대하고 강력한 신의 재앙과도 같은 폭풍이 갑자기 나타난 것이었다. 아이유브 왕조나 이집트 맘루크보다 훨씬 강력한 호라즘 제국과 바그다드의 아바스 칼리파조를 모두 잔혹하게 멸망시키고, 계속 서쪽으로 진군 중이던 몽골군이 메소포타미아, 시리아, 레반트 지역까지 닥쳐온 것이었다. 이집트의 아이유브 왕조에 이어 두 번째로 강대한 세력을 보유했던 시리아의 아이유브 왕조는 몽골군에게 순식간에 멸망했고, 시리아와 레반트 각지에 소규모 공국으로 남은 아이유브 왕조의 잔당들은 대부분 몽골 제국에게 항복했으며, 아인 잘루트 전투에서 맘루크와 싸운 댓가로 병합당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 와중에도 소수의 아이유브 조 아미르들은 맘루크 편에 붙어 속국으로 살아남았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결국 모두 병합되었다. 최후까지 남은 아이유브 조의 일원은 현재 터키 지역에 있는 히슨 카이파의 아미르였고, 일 칸국과 맘루크 왕조 사이에서 간신히 독립을 유지했다. 1334년 일 칸국이 붕괴한 뒤 적대 관계이던 이웃인 아르투크 왕조로부터 공격받기도 했으나 오히려 아르투크군을 철저히 격파하고, 아르투크 왕조가 다스리던 영토를 일부 병합하기도 하는 등 마지막 영광의 순간을 누리기도 했다. 그럼에도 세력 자체는 여전히 약했고, 맘루크와 튀르크계 둘카디르 왕조의 속국으로 명맥을 유지하다가 1461년 백양 왕조우준 하산에 의해 완전히 멸망하고 말았다.

열렬한 수니파였던 아이유브 왕조는 시아파 무슬림과 기독교도들을 개종시키고자 했으며, 이집트와 예루살렘에 신학교의 일종이었던 마드라사(madrasah)를 건설했다.

문화적으로 파티마 왕조를 계승·발전시킨 아이유브 왕조는 카이로에 성채를, 알레포에 요새를 건설하는 등 뛰어난 군사 기술을 보유했다.

3. 역대 군주[편집]









4. 역사보기 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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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7차 십자군 전쟁 도중 이집트 아이유브 왕조 술탄 투란샤가 피살되고, 아이바크가 술탄을 칭하며 맘루크 왕조가 처음 세워진 해이다.[2] 맘루크 조의 허수아비 술탄 알 아슈라프 무사가 폐위된 해이다.[3] 시리아의 앗 나시르 유수프가 몽골군에게 포로가 된 해이다. 다만 같은 해 아인잘루트에서 몽골을 격파한 맘루크 조가 시리아를 수복했다. 그리고 시리아 중부의 홈스하마에 남아있던 아이유브 왕가 영주들은 1342년까지 제후로써 남아있었고, 심지어 하산 케이프의 방계는 1462년까지 200년 이상 존속했다.[4] 사실 살라딘의 생전을 제외한 아이유브 왕조 역사 대부분에 걸쳐 시리아와 이집트의 왕실 일원들이 서로 치고박으며 대립하는 것은 거의 일상이었다. 그러니 이집트의 아이유브 왕조가 몰락한 뒤에도 시리아의 아이유브 왕조 일원들은 여전히 적잖은 세력을 보유하고 있었다.[5] 이집트의 권력자가 된 것은 1169년, 파티마 조를 멸한 것은 1171년, 술탄 칭호를 받은 것은 1176년.[6] 증조부인 살라딘과 이름이 똑같다. 둘다 알 말리크 앗 나시르 살라흐 앗 딘 유수프. 따라서 살라흐 앗 딘 2세로 불리기도 한다. 부친 이름만 달라서 이븐 아이유브, 이븐 알 아지즈로 구분하기도 하는데 여기선 보편적인 표기로 후자를 왕호인 앗 나시르라 칭한다. 바그다드의 칼리파 알 무스타심에게서 1257년 술탄 칭호를 부여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