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폴로 1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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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폴로 14호
APOLLO 14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33px-Apollo_14-insignia.png
아폴로 14호 미션 패치
이름
아폴로 14호
호출부호
사령선: CM-110, 키티호크
달 착륙선: LM-8, 안타레스
발사일
1971년 1월 31일
21시 03분 02초 UTC
케네디 우주센터, 플로리다 LC 39A
달 착륙일
1971년 2월 5일
09시 18분 11초 UTC
달 선외 활동
9시간 22분 31초
달착륙 시간
1일 9시간 30분 29초
월석 질량
42.28 kg (93.21 lb)
귀환일
1971년 2월 9일
21시 05분 00초UTC
달궤도 시간
2일 18시간 35분 39초
미션 기간
9일, 00시간 01분 58초
우주선
사령선 - 키티호크(Kitty Hawk)[1]
달착륙선 - 안타레스(Antares)
사령관(CDR)
앨런 셰퍼드 [CDR백업]
사령선 조종사(CMP)
스튜어트 루사 [CMP백업]
달착륙선 조종사(LMP)
에드 미첼[LMP백업]

1. 개요
2. 팀원 배정
3. 과정
3.1. 달 착륙과 귀환
4. 이모저모
4.1. 골프
4.2. 달 착륙선의 잔해




1. 개요[편집]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500px-Apollo_14_crew.jpg
위가 앨런 셰퍼드, 아래는 스튜어트 루사에드 미첼.

아폴로 14호는 달에 3번째[2]로 간 유인우주선이다.
1971년 1월 31일에 발사되었으며, 2월 5일에 아폴로 13호가 착륙하려다 실패한 곳인 프라 마우로 크레이터 지역에 착륙하여 9시간 22분 31초동안 선외 활동을 시행하였다. 월석을 나르기위해 최초로 손수레를 사용하였다.

아폴로 13호가 사상 유례없는 성공적인 실패가 된지라, NASA는 사령선과 달 착륙선의 모듈을 개량하면서 미션을 1년 이상 미뤘다.


2. 팀원 배정[편집]


아무래도 이 팀은 머큐리 계획의 올드보이들에 대한 헌사라 볼 수 있는, 하지만 베테랑 우주비행사가 전혀 없었던 아이러니한 팀이었다. 아폴로 달 착륙 미션 6회 중 승무원의 이전까지의 경력으로 따지면 그 어떤 미션에게도 뒤지지 않는 깨끗함을 자랑했다.

이 미션의 순번은 원래 아폴로의 첫 유인비행인 아폴로 7호 임무를 맡았던 월리 시라의 팀 또는 그 멤버들이 주축이 되어 짜여졌겠지만, 시라는 이 미션을 끝으로 은퇴했고 월터 커닝햄돈 아이즐리 역시 우주에서 감기에 걸려서 관제팀과 욕지거리를 하는 초유의 사건을 터뜨려 지상근무로 돌려졌기 때문에 팀은 개박살났다. 이에 NASA에서는 머큐리 올드보이들 중 여전히 남아있던 유일한 멤버인 고든 쿠퍼를 13호의 사령관으로 내정했고 스튜어트 루사에드 미첼을 사령선 조종사와 달착륙선 조종사로 뽑았다. 그렇게 아폴로 10호의 백업팀으로 활동하고 13호 승무원으로 달에 갈 예정이었는데...

승무원 담당 디렉터인 디크 슬레이튼은 고든 쿠퍼가 훈련에 집중하지 않는다고 그에 대해 걱정을 했고[3], 결국 아폴로 10호 백업 임무를 끝으로 그를 로테이션에서 배제하기로 결정했고 이 결정에 쿠퍼는 NASA를 그만뒀다.

그 무렵, 미국 최초의 우주비행사였지만 메니에르병 때문에 우주비행 자격을 박탈당하고 행정직을 전전하고 있던 앨런 셰퍼드[4]가 위험을 감수하고 실험적인 수술을 받은 후에 기적적으로 비행 자격을 회복했다. 이러자 디크 슬레이튼은 쿠퍼의 빈 자리를 셰퍼드로 채운다. 하지만 아폴로 10호의 백업 팀원들도 초짜였던데다 오랜 기간 우주비행 훈련을 받지 않은 셰퍼드도 사실상 초짜나 마찬가지였기에 10호 백업 팀의 순번인 13호는 결국 아폴로 11호의 백업이었던 짐 러블의 팀과 순번을 바꿔야 했다. 이렇게 셰퍼드의 팀은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최악의 상황은 피할 수 있었지만, 아폴로 13호의 성공적인 실패의 원인 규명과 그에 따른 보완 과정에 1년 정도의 시간이 소요되면서 그들의 달여행은 예정보다는 뒤로 미뤄지게 되었다.

앨런 셰퍼드는 머큐리 계획에도 참여한 아폴로 계획 우주비행사 중 최고참이며[5], 그의 동기 7명 중에 유일하게 달에 다녀온 인물이 되었다.[6]


3. 과정[편집]



3.1. 달 착륙과 귀환[편집]


두꺼운 구름이 깔린 1971년 1월 31일, 세 명의 우주인, 사령선 키티호크, 달착륙선 안타레스, 기타 장비들을 탑재한 새턴V 로켓이 케네디 우주 센터에서 발사 되었다. 로켓은 구름 때문에 금방 시야에서 사라졌지만 NASA는 장거리 카메라로 이를 추적했다.

아폴로 11호의 컴퓨터 오류, 12호의 벼락으로 인한 전기 계통 고장, 13호의 산소탱크 폭발 등 문제가 없던 적이 없었던 아폴로 계획의 전례(?)를 따라서 14호도 위기를 겪었다. 발사 초기에, 사령선(키티호크)과 달착륙선(안타레스)을 도킹시키는 과정에서 결합부분의 고장으로 실패를 거듭했다. 여러 번의 실패 끝에 간신히 결합에 성공했으며 무려 1시간 42분이 소요되었다. 다행히 그 후론 도킹 장치가 오작동을 하진 않았다. (일설에는 도킹 장치가 그 후로 고장났다고 하는 말이 있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http://en.wikipedia.org/wiki/Apollo_14#Launch_and_flight_to_lunar_orbit)

더 큰 문제는 달 착륙 때 벌어졌다. 성공적으로 사령선에서 달 착륙선이 분리된 뒤, 비상시에만 입력되어야 하는 착륙 중단 신호가 중단 스위치 내부의 파편으로 인해 오작동을 일으켜서 컴퓨터가 착륙 중단 대기 상태(Abort)에 돌입해 버린 것. 이 상태로는 착륙을 위해서 역분사를 시도하면 곧바로 하강단이 사출되고 사령선이 대기중인 고도로 복귀해버리기 때문에 중단 모드를 해제해야 했다. 그런데 꼭 고물TV마냥 판넬을 퉁퉁 치면 잠깐 정상으로 돌아갔다가 도로 먹통이 되는 일이 계속 되자 NASA측에서는 착륙선의 RAM에 저장된 취소 대기(Abort) 비트를 필요할 때마다 일일이 켜고 끄는 식으로 잘못된 신호를 무시하도록 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고[7] 앨런 셰퍼드와 에드거 미첼이 구두를 통해서 NASA측이 불러주는 대로 착륙선을 그 짧은 시간 동안 재프로그래밍하는데 성공해서 일단락 되는 듯 싶었다.

그 이후 착륙 과정 중에도 문제가 생겼는데, 착륙선의 고도와 수직하강속도를 알려줘야 할 레이더가 오작동을 일으켜 달의 표면을 자동으로 포착하지 못했다. 셰퍼드는 레이더를 재부팅하여 5,500m 고도에서 간신히 작동시킬 수 있었다. 셰퍼드는 착륙선을 수동으로 조종했고, 놀랍게도 6번의 달 착륙 임무들 중 목표지점에 가장 가까이 착륙선을 착륙시킬 수 있었다. 미첼은 레이더가 재가동되지 않았더라도 셰퍼드는 착륙을 시도했을거라 생각했다.


"It's been a long way, but we're here."
"참으로 오랜 길이었지만, 마침내 왔다."
셰퍼드가 달을 처음 걸으며 남긴 말.[8]


2월 5일에 프라 마우로 크레이터에 착륙했다. 이곳은 아폴로 13호가 착륙하려고 했던 곳이다.

착륙 후 셰퍼드는 착륙선에서 나가 몇 발자국을 걸은 뒤에 "참으로 오랜 길이었지만, 마침내 왔다(And it's been a long way, but we're here)."는 말을 남겼다. 셰퍼드와 미첼은 착륙지를 프라 모로 기지(Fra Mauro Base)라 이름 붙였다. 루사가 달 궤도에서 사진을 찍고 있을 무렵, 셰퍼드와 미첼은 첫 번째 EVA에서 ALSEP(Apollo experiment package)라는 실험 기구로 실험을 수행했고, 달 탐험 최초로 손수레를 사용해 장비와 샘플들을 옮겼다. 두 번째 EVA에서는 크레이터 둘레 주변 300m까지 가는 것이 목표였지만 경계를 찾을 수가 없었고, 우주복의 산소가 떨어져가자 취소하고 착륙선으로 귀환했다. 사후 분석 결과 이들은 목표거리였던 300m를 넘어서 20m까지 갔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들은 약 45kg의 샘플을 채취하여 착륙선에 실었다.

이후 귀환하는 과정에서 우주에서 실험을 또 진행한 뒤, 세 우주인을 실은 사령선 키티호크는 1971년 2월 9일 남태평양에 착수했다. USS 뉴 올리언스가 사령선을 회수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79px-Apollo_14_Shepard.jpg
달 위의 앨런 셰퍼드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79px-Mitchell_Studies_Map_-_GPN-2000-001146.jpg
지도를 읽는 에드거 미첼



4. 이모저모[편집]


  • 앨런 셰퍼드가 일찍 세상을 떠나고, 2016년 2월 5일 달 착륙 45주년을 하루 앞둔 날 에드 미첼이 타계하며 6회의 달 착륙 미션 중 착륙자들이 모두 별세한 첫 미션으로 기록되었다. 2016년 2월 현재 아폴로 프로그램 중 착륙자들이 모두 생존해 있는 미션은 아폴로 16호 뿐이며, 아폴로 16호만이 사령선 조종사를 포함한 전 팀원이 생존해 있는 미션이다.
결국 2018년 16호의 사령관 존 영이 사망하면서 달을 다녀온 아폴로 미션중 전 팀원이 생존 중인 미션은 더이상 없다.
다만 2022년 기준으로 아폴로 8호아폴로 9호 멤버는 모두 살아있다.

  • 이 미션에서 스튜어트 루사가 달에 나무 씨앗을 가져가서 궤도비행을 함께한 뒤 지구에 가져왔다. 원래 지구에서 실험할 때 쓰려고 했는데 귀환 과정에서 실수로 다 섞여버렸고 그냥 관상용으로 쓰였다고. 이 씨들은 묘목으로 키웠다가 전미의 여러 곳에 나눠 심었다. 그 중 하나는 1976년 미국 독립 200주년 기념으로 케네디 우주센터에 식수했는데, 2017년 허리케인 어마가 들이닥쳐 뽑혀버렸다고. ### 다행히 같이 갔다온 다른 나무들은 다른 안전한 곳에서 잘 자라고 있다나.


4.1. 골프[편집]


셰퍼드가 몰래 가져온 골프채와 골프공 2개와 6번 아이언으로[9] 달에서 골프를 쳤고, 그가 친 두 번째 공은 셰퍼드의 표현에 따르면 "멀리 멀리(miles and miles and miles)" 날아갔다고 한다.

그 덕에 셰퍼드는 세계 최초로 달에서 골프를 친 사람이 되었다.[10] 그 외에도 셰퍼드는 헬멧과 양 팔, 양 다리에 붉은 띠를 넣은 우주복을 최초로 착용하였는데, 이것은 지상의 관제소에서 두 우주비행사를 사진만으로 구분하는 것이 어려웠기 때문에 사령관이라는 표시를 한 것이며 그 후의 우주비행사들도 이런 표시를 따라하게 된다.[11]

구글에서 Golf on the Moon Alan Shepard라고 검색해보면 엄청난 합성사진들이 쏟아지며 오늘날까지도 이는 필수요소로 인기를 끌고 있다. 일부 팬들은 박세리타이거 우즈를 달나라에 보내보자거나 하는 드립을 치기도 한다.




4.2. 달 착륙선의 잔해[편집]


달 착륙선인 안타레스는 1971년 2월 7일에 달 표면에 추락했다. 다른 장비들은 착륙지 프라 모로에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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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라이트 형제가 처음 비행을 했던 곳이다. 미 해군의 키티호크급 항공모함에도 이름이 붙었다.[CDR백업] 유진 서넌.[CMP백업] 로널드 에반스 [LMP백업] 조 엥글. 원래 이 팀은 아폴로 17호에 배정될 예정이었으나 취소된 18호의 달 착륙선 조종사로 예정되었던 전문 지질학자 해리슨 슈미트가 미국 과학계의 요구로 끼워넣어졌다.[2] 원래는 4번째 착륙이었어야 하나 바로 이전의 아폴로 13호가 산소탱크 폭발로 인하여 실패했다. 아폴로 13호 참고[3] 쿠퍼는 천성이 파일럿이었다. 우주비행사에 지원하여 합격하고 두 차례 우주비행 임무를 수행하긴 했지만, 백업이니 로테이션이니 뭐니 해서 늘 시뮬레이터에만 틀어박혀있어야 하는 우주비행사 생활에 염증을 느꼈고 24시간 스포츠카 레이스인 데이토나 로드 레이스를 훈련 째고 갔다오는등 일탈을 반복했다. 결국 NASA의 높으신 분들도 그에 대해 불만을 드러내기 시작했다.[4] 승무원 관리 부서로 옮기게 된 디크 슬레이튼의 후임으로 수석 우주비행사로 일했으며 가끔씩 휴스턴에서 케네디 우주센터까지 우주비행사를 보내줄 T-38의 조종사로 알바를 뛰며 비행 감각을 유지해 왔다.[5] 탄도비행이기는 했지만, 미국인 최초로 우주에 간 사람이기도 하다.[6] 아폴로 11호 이후 기준에서 머큐리 세븐 대부분은 현역을 은퇴하였고 NASA에 남은 사람 가운데 앨런 셰퍼드를 제외하면 디크 슬레이튼 정도가 남지만 우주비행사 전체를 통솔하는 슬레이튼의 업무를 아폴로 계획이 어느 정도 정리될 때 까지는 다른 이로 대체하기도 어려웠으니 논외 사항이다.[7] 세간에 알려진 것 과는 달리 착륙선의 가동 프로그램은 자기 코어 로프(Core rope memory) ROM에 저장되어 있어서 재프로그래밍이 아예 불가능했다. 그 대신 프로그램이 체크하는 Abort 비트를 수동으로 조작한 것이다.[8] 닐 암스트롱이나 피트 콘래드가 달을 처음 밟으며 명언을 남긴 것과 달리 셰퍼드는 일단 걷고 난 뒤에 감회를 드러냈다.[9] 골프채의 경우 몰래 가져오기 위해 분리형으로 제작되었고 달의 표면에서도 버틸 수 있는 물질로 특별이 제작되었다고 한다.#[10] 그리고 골프는 달에서 플레이된 최초의 스포츠가 되었다.[11] 셰퍼드의 재미있는 발언 중 하나로 이런 게 있다. "달에 가기 전에 나는 썩어빠진 개자식(rotten son of a bitch)이었지만, 지금은 그냥 개자식이 되었다" 실제로 셰퍼드는 괴팍한 성격으로 우주비행사들 사이에서도 유명했다고 한다. 귓병 때문에 행정직으로 밀린 설움도 있고 자기 후배들이 자기보다 더한 경험을 하면서 역사에 이름을 남기는걸 보면서 한이 맺혔기 때문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