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샤르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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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샤르 제국
افشاریان
Afshâryan

파일:아프샤르 왕조 국기.svg
파일:아프샤르 왕조 국장.png
국기
국장
위치
파일:AfsharidGreatestextentIranica.png
1736 ~ 1796[1]
성립 이전
멸망 이후
호타크 왕조
카자르 왕조
사파비 제국
두라니 왕조
국가
Salamati-ye Shah
(왕의 행진, Marcia Reale)
수도
이스파한, 마슈하드
정치 체제
전제군주제
국가원수
황제(샤한샤)
주요 황제
나디르 샤
언어
페르시아어, 아프샤르어
민족
페르시아인, 아프샤르인
종교
이슬람 수니파(국교), 이슬람 시아파(다수종교)
통화
토만
1. 개요
2. 역사
2.1. 성립과 전성기
2.2. 공포정치
2.3. 나디르 샤의 암살과 내전
2.4. 잔드 왕조 시기
2.5. 멸망 (1796)
2.6. 나데르 미르자 아프샤르의 반란(1802)과 후일담
3. 역대 국왕



1. 개요[편집]


아제르바이잔계(튀르크계) 소수민족인 아프샤르족의 나디르 샤가 세운 18세기의 이란 왕조. 사파비 왕조를 사실상 멸망시킨 아프간계 길자이족의 호타키 왕조를 축출하고 오스만 제국, 러시아 제국, 무굴 제국 등 외세도 응징한 후 사파비 왕조도 멸망시켰다. 이란 역사상 최후의 수니파 왕조이기도 하다.

2. 역사[편집]



2.1. 성립과 전성기[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나디르 샤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정복황제 나디르 샤의 정복으로 호스로 2세 시기의 사산조 페르시아 이후의 이란 왕조 중 가장 넓은 판도를 구축했다.(1740)

전성기(1736 ~ 1747년)의 역사는 이란의 나폴레옹이라고 불리는 나디르 샤 문서를 참고할 것.


2.2. 공포정치[편집]


그러나 오스만 제국무굴 제국의 반격으로 정복한 영토들을 모두 상실한데다 나디르샤의 공포정치와 수니파 강요정책, 무모한 전쟁, 높은 세금, 지나친 징병에 반발한 반란이 각지에서 일어나고 말았다.


2.3. 나디르 샤의 암살과 내전[편집]


1747년, 반란을 진압해 나가던 나디르 샤가 암살로 생을 마감하자 그의 카리스마와 군사적 역량으로 묶여있던 제국은 광속으로 와해되었고 아프샤르 왕조는 더욱 쇠퇴하여 이란 동부와 호라산 지방으로 축소되었다. 나디르 샤가 왕위계승자인 아들을 맹인으로 만든 처사도 쇠퇴에 기여했다. 나디르 샤의 사후, 그가 죽기 전부터 반란을 일으킨 상태였던 조카 알리 쾰리 칸이 마슈하드에 입성하여 모르테자 미르자와 레자 쾰리 미르자 등 나디르 샤의 아들과 손자들을 학살했다. 다만 모르테자 미르자가 사파비 왕조의 공주와 낳은 아들인 샤로흐만이 죽음을 면하고 대신 감금되었다. 1747년 7월, 이스파한에 입성한 알리 쾰리 칸은 '아딜 샤'로 즉위했다. 그후 아딜 샤는 고르간에서 반란을 일으킨 카자르 부족의 모하메드 하산 칸을 격파하고, 그 5세 아들인 모하메드를 사로잡아 거세했다. 거세된 후 환관이란 의미인 '아가 모하메드'로 불리게 된 후자는 추후 카자르 왕조를 창건하고, 처절한 복수에 나선다.

한편 1748년 6월 이번에는 아딜 샤의 동생인 이스파한 총독 이브라힘 칸이 반란을 일으켰다. 아딜 샤는 마잔다란에서 남하했지만 나디르 샤의 사촌인 아르메니아 총독 아미르 이슬람 칸을 비롯하여 대부분의 장군들이 이브라힘 칸에게 합세해버렸다. 패배한 아딜 샤는 테헤란으로 남하했지만 사라잡혀 실명되었다. 한편 이브라힘 칸은 타브리즈에 입성한 후 '이브라힘 샤'로 즉위했다. 하지만 그 역시 자신을 도운 아미르 아슬란 칸을 초대한 후 살해하며 인망을 잃었다. 또한 동쪽의 마슈하드에서는 유일하게 생존해 있던 나디르 샤의 직계 혈통인 샤로흐가 풀려나 샤로 옹립되었다. 이브라힘 샤는 마슈하드로 진군했으나 셈난에서 부하들의 배신으로 사로잡혔다. 그후 샤로흐는 아딜 샤와 이브라힘 샤 형제를 마슈하드로 압송하고 처형하며 부친과 형제들의 한을 갚았다. (1749년 7월) 이로써 내전은 2년만에 종식되었고, 이란 북부 카자르 족의 모하메드 하산 칸 역시 아프샤르 왕조에 복속했다.

하지만 15세에 불과한 '샤로흐'의 지배력은 약했고, 실권은 튀르크 / 쿠르드 / 아랍 장군들의 수중에 있었다. 그들은 서로 경쟁했고, 밀려난 세력은 샤로흐의 반대파가 되었다. 그중 사파비 왕조의 공주 샤흐바누 베굼과 미르자 다우드 사이의 아들이자 이맘 레자 성지의 관리자이던 미르 사이드 모하메드 마라쉬에게 불만 세력이 결집했다. 1749년 12월 30일, 아랍계를 대표하는 미르 알람 칸 쿠자이마는 다른 16명의 장군들과 함께 모하메드 마라쉬를 찾아가 제위에 오를 것을 청했고, 후자는 승낙했다. 그들은 샤로흐의 심복인 튀르크계 장군 유수프 알리 칸 잘라이르가 마슈하드를 비운 틈을 타 샤로흐 샤를 감금했고, 모하메드 마라쉬는 사파비 왕가의 후예로서 '술레이만 2세'로 즉위했다. (1750년 1월 14일) 술레이만 2세는 측근들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폐왕 샤로흐를 죽이지 않은채 유폐지인 차하르바그 궁전에 이쉬카가쉬 바하쉬 (비서실장) 모하메드 레자 베그를 간수로 두어 감시하게 했다.

다만 술레이만 2세가 라드칸으로 사냥을 나갔을 때, 와킬 (재상) 미르 알람 칸이 모하메드 레자 베그를 소환했고, 그 틈에 아미르 칸 카라이와 아미르 메흐랍 칸이 차하르바그 궁전에 들어가 하렘에 있던 샤로흐를 실명시켰다. 돌아와서 보고를 받은 술레이만 2세는 분노하여 음모자들을 해임했지만 며칠 후 복직시켰다. 한편 민심 안정책으로 술레이만 2세는 3년간 토지세를 면제해주었는데, 이로써 지주들의 반발을 샀다. 그러한 상황에서 샤로흐에 충성하는 유수프 알리 칸 잘라이르가 아미르 메흐랍 칸의 장례식을 틈타 궁전을 습격하여 술레이만 2세를 사로잡고 실명시켰다. 그 과정에서 샤로흐의 잘라이르 부족 출신 왕비는 병사들에게 샤로흐가 실명되지 않았다고 설득했고, 이후 음모자들은 그가 장님이 된 것을 알았지만 어찌됐든 보위에 올렸다. (1750년 3월 20일) 도주한 미르 알람 칸을 제외한 나머지 귀족들은 샤로흐의 복위를 받아들였다.


2.4. 잔드 왕조 시기[편집]


카림 칸이 이란 통일 전쟁을 벌이고, 전성기를 구가했으며, 그가 죽은 후 다시 내전이 터지고, 카자르 왕조와 대립하다가 잔드 왕조가 무너지는 역사는 해당 문서에 상세히 정리되어 있다. 그동안 아프샤르 왕조의 샤로흐는 조용히 사태를 관망하며 이란 본토에 개입하지 않았다.


2.5. 멸망 (1796)[편집]


그후로도 호라산 지방에 잔존해 있었던 아프샤르 왕조는 이란을 접수한 잔드 왕조와 아프간의 두라니 왕조에게 시달리다가 결국 잔드 왕조를 무너뜨린 카자르 왕조에게 1796년 멸망당했다. 잔드 조를 멸망시킨 카자르 조의 아가 모하메드 샤가 마슈하드로 진군해오자 샤로흐 샤는 수석 무즈타히드 (율법학자) 미르자 마흐디와 함께 성밖 적진을 찾아가 투항했다. 아가 모하메드 샤의 조카 호세인 콜리 칸은 이들을 환대했다. 이후 아가 모하메드 샤는 술레이만 칸 휘하 8,000명의 병력을 미르자 마흐디와 함께 성내로 보내어 지배를 확립하고 주민들에게 샤의 관용을 보이도록 했다. 하루 후, 아가 모하메드 샤는 아바스 1세의 전례에 따라 순례자 복장을 하고 맨발로 이맘 레자 성지를 향하며 눈물을 흘리고 땅에 입을 맞추며 참배했다.

하지만 23일 간의 순례가 끝나자 그는 돌변하여 나디르 샤의 시신을 파내어 테헤란으로 보내어 카림 칸의 무덤 옆에 매장하도록 한 후, 샤로흐를 소환해 나디르 샤의 보물 위치를 불도록 했다. 샤로흐는 더이상 선조의 보물을 소유하고 있지 않다고 맹세했으나, 잔혹하고 탐욕스러웠던 아가 모하메드 샤는 그를 불신하고 극심한 고문을 가하도록 했다. 초반에 말하기를 거부했던 샤로흐는 심한 고문을 격은 후 보석의 행방을 털어놓았다. 이후 샤로흐는 가족과 함께 마잔다란으로 보내졌는데, 여정 도중 고문으로 인한 상처가 도져 담간에서 사망하고 말았다.


2.6. 나데르 미르자 아프샤르의 반란(1802)과 후일담[편집]


나디르 샤의 증손자인 나데르 미르자 아프샤르(?~1803)는 1797년 카자르 왕조로부터 호라산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야심찬 인물이었고, 1802년 마슈하드에서 반란을 일으켜 자립을 시도했으나 이듬해인 1803년 4월 포로가 되어 2명의 아들들(아바스 미르자, 이븐하임 미르자)과 함께 처형당했다.[2]

나데르 미르자 아프샤르의 다른 3명의 아들들인 타흐마사프 미르자(Tahmasp Mirza), 칼리크 바르디 미르자(Khaliq Vardi Mirza), 마흐부브 알리 미르자(Mahboub Ali Mirza)도 눈이 머는 형벌을 받았다. 오직 이스마일 미르자만 데칸 고원의 하이데바라드까지 도피해 그곳에 정착했다고 한다.

3. 역대 국왕[편집]





이후 나데르 미르자 아프샤르[3]가 1802년 카자르 왕조에게 반기를 들고 호라산 주의 주도 마샤드에서 반란을 일으켰지만, 반란은 진압되었고 1803년 그의 아들들과 함께 살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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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디르 샤 시대의 강역.[2] 포로가 되었을 때 눈이 뽑히고 혀가 잘렸다고 한다.[3] 샤로흐 아프샤르의 4남. 나디르 샤의 증손자다.